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278)
278화
44장. ■겁 무■■의 ■■
테실리드의 파격 선언 이후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역시 존중은 공포에서 온다는 격언은 참된 진리였는지, 내 헤일로와 테실리드의 오러 블레이드를 본 엘펜하임 성기사단은 얌전히 물러갈 것을 결정했다.
현명한 일이었다.
패잔병이 되는 것보다는 전략적 후퇴를 하는 쪽이 보기 좋은 모양새일 테니까.
물론 개중에는 이쪽에서 차려준 체면을 걷어차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인 자도 있었다.
웬 금발의 성기사가 부들부들 떨면서 테실리드에게 욕과 저주를 퍼부은 것이다.-역겨운 배교자 같으니! 마녀의 꾐에 빠져 타락하느냐! 신의 벼락이 네 머리통을 쪼개놓을 것이다!
-이렇게?
-끄아아악!그는 내 신벌을 맞고 다른 기사들에게 실려 나갔다.
성기사단이 회군하는 즉시 오늘 페론사에서 있었던 일은 추기경 의회에 보고될 것이다.
조만간 성황청을 통해 나와 테실리드를 쌍으로 묶어서 이단 심판을 하겠다는 선포가 내려지겠지. 앞으로의 일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우리 쪽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안카를 필두로 언령교가 질서교에 대항력을 갖추기 위한 물밑 작업이 진행 중이고, 곧 성과를 보일 테니까.
엘펜하임 성기사단이 물러간 후 공왕성에서 열린 점심 만찬은 왜인지 성대한 연회로 이어졌다.
모두와 함께 왁자지껄한 시간을 보내고 나자 해는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다.
그리하여 연회가 끝나고 찾아온 휴식 시간.
나와 테실리드는 단둘이 시간을 보낼 만한 곳을 찾아, 개축된 성 아그네스 교회로 갔다.
토독. 토도독. 똑. 똑.
하늘이 떨구는 물방울이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두드린다.
낮에만 해도 청명한 하늘이었건만, 밤의 어둠을 틈타 숨어들어 온 먹구름이 어느새 하늘을 점령한 모양이었다.
빗소리가 야상곡처럼 공기를 울려 성소에 운치를 더했다.
나와 테실리드. 우리 두 사람은 창가에 기대서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신과 소통할 수 있다고?”
“응.”
매끈한 바다색 눈동자가 놀라움 가득한 이채를 띠었다. 나는 인벤토리를 뒤적이며 대답했다.
“상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어. 우리 언령님은 다정할 때는 다정하시고 근엄할 때는 근엄하신 분이야. 신명에 언(言)이 들어가는 분답게 심금을 울리는 명언도 자주 말씀해 주셔.”[‘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완벽한 해석에 흡족해합니다.] [‘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눈꼴셔 합니다.]“그렇군.”
“너도 언령님께 말씀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봐.”
“으음…….”
잘생긴 얼굴이 진지해졌다. 고민에 빠진 그는 내가 손에 술잔을 쥐여주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곧 그가 고개를 높이 들었다. 성예술 유화가 그려진 높은 천장. 저 너머에 신이 있으리라 여기는 듯했다.
“언령님.”
역시 신실한 성기사님이다. 그의 음성에 담긴 우리 언령님의 이름이 유난히 경건하게 들렀다.
바다색 눈이 기대감으로 빛났다.
“혹시 리트니엘 평원에서 제게 아이를 돌려주신 분도 언령님이십니까?”[‘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당연하다고 대답합니다.]“당연하다고 하셨어.”
“아……. 그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만신전의 문을 두드리면서 감히 무엄한 모독을 입에 담았는데…….”[‘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본신을 욕한 게 아니니 개의치 않는다며 손을 내젓습니다.]“언령님이 자기를 욕한 게 아니니 괜찮대. ……근데 욕을 했어?”
“……빌어먹을 질서와 선, 이라고 했어.”
욕이라기보다는 적절한 수식어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는 죄의식이 드는지 시선을 피했다.[‘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귀엽게 봅니다.]나는 천칭님처럼 가벼운 시선으로 볼 수 없었다.
평소 칠주선과 칠죄종의 규율에 꽁꽁 묶여 있던 탓에 험한 말 한 마디 하는 법이 없던 테실리드다.
그런 그가 신을 모독할 만큼 정신적으로 몰아붙여졌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말없이 그의 잔에 ‘제례용 최고급 포도주’를 채워주었다.
테실리드는 목이 타는 듯 바로 술잔에 입을 댔다가 흠칫했다.
“이거 술인데.”
“언령교 교리에는 금주가 없어.”
“그렇군.”
그가 몇 번 더 거절할 것이란 내 예측은 빗나갔다.
그는 나와 건배한 후 바로 술잔을 기울였다. 그의 목울대가 여러 번 크게 오르내렸다.
뭐야. 의외로 잘 마시는데?[‘천기누설 감찰관’이 원작에서 볼 수 없었던 모습에 흥미로워합니다.] [‘만상의 혼돈을 감시하는 눈동자’가 이제껏 당신을 유혹하기 위해 내숭을 부린 것이라며 괘씸해합니다.]나도 내 몫의 술을 쭈욱 들이켰다.
‘오오!’
순간 입안에 에덴농원의 유기농 포도밭이 펼쳐지는 듯한 황홀함이 전신을 휩쓸었다.
과연 신계의 포도주다. 맛있다고 적힌 설명이 빈말이 아니었다.[‘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그 포도주는 음용이 아니라 제례용이라며 발을 동동 구릅니다.]‘에이, 맛만 보는 건데요.’
그리고 반을 비웠다.
그렇게 단둘이서 축배의 시간을 만끽했다. 마지막 잔을 나누어 마실 무렵 문득 머릿속에 스친 생각이 있었다.
“아, 맞다. 테리.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뭔데?”
“그때 리트니엘 평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나 마왕이 됐을 때의 기억이 없어서.”
“…….”
왜인지 술잔을 쥔 테실리드의 손끝이 움찔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까 너는 다쳐 있고 나는 신경 안정제 사탕을 입에 물고 있더라고.”
“…….”
“그거 네가 먹인 것 맞지? 대체 어떻게 한 거야?”
“…….”
나는 순수한 궁금증인 척 물었다.
어떤 위험한 방법을 썼는지 실토시킨 뒤 그게 최선이었냐고 따져서 나무랄 계획이었으니까.
눈앞의 성기사님이 고지식함을 발휘해서 정직하게 죄를 자백해주길 기다릴 때였다.
유감스럽게도 오늘의 테실리드는 별로 보수적인 기사님 역할을 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당혹으로 잠깐 흔들리는가 싶었던 바다색 눈이 이내 차분해졌다.
돌연 그가 내게 가까이 붙었다.
“궁금해?”
“……테리?”
길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이 내 어깨에 걸쳐져 있는 분홍색 머리칼을 매만진다.
느릿한 희롱에 꼬여드는 내 머리카락.
그것을 타고 은근한 찌릿함과 간지러움이 두피로 전해지는 듯했다.
공연히 목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숨을 죽입니다.]천칭님이 저러시는 것을 보면 분위기가 묘하다고 느낀 게 내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다.
지척에서 시선이 마주했다.
은발 사이사이로 보이는 바다색 눈이 어쩐지 도발적이었고, 와인을 마신 탓에 살짝 젖어 있는 입술이 왜인지 홀릴 듯한 광택을 발했다.
“알고 싶다면…….”
매력적인 얼굴이 점점 가까워져 온다.
그런데 숨결이 막 이어지려던 순간, 내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깨달음이 있었다. 나를 홀린 그의 눈과 입술 덕분이었다.
“아! 혹시 도발 스킬로 나를 끌어들여서 입으로 먹인 거야?”
“…….”
내 뒷머리를 감싸려던 그의 손이 우뚝 멈췄다.
정답인 모양이다.[‘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방금은 방법을 재현해 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하는 타이밍이었다고 버럭 화를 냅니다.] [‘균형을 조율하는 독설가’가 당신의 분위기 파악 능력에 혀를 찹니다.] [‘시련의 마천루 건축가’가 흥이 깨졌다고 실망합니다.]“아, 응, 맞아.”
테실리드가 어색해하며 뒤로 물러났다.
분위기를 깬 데에 응당 미안함을 느껴야 했으나 나는 추궁하기에 바빴다.
“세상에. 혼자서 마왕을 도발했다고?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하면 어떡해?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결과적으로 살았으니까…….”
“뭐? 결과저억? 안 죽을 자신이 있었다고 변명도 못 하는 거야?”
“그건, 그렇지만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말하기만 해봐.”
“……아그네스 성녀님, 도와주십시오.”
그는 입을 열수록 스스로를 불리하게 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퍽 애처로운 음성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목걸이에 검지를 걸며 웃었다.
“아그네스는 지금 여기에 없어. 성인의 전당에 있지.”
“거기는 왜?”
“내가 너랑 단둘이 있고 싶다고 잠깐만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거든.”
“…….”
테실리드는 작게 ‘단둘’을 되뇌더니 돌연 입을 다물었다.[‘만상의 혼돈을 감시하는 눈동자’가 테실리드 아르젠트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못마땅해합니다.] [‘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므흣하게 웃습니다.] [‘균형을 조율하는 독설가’가 혀를 쯧쯧 찹니다.]“나랑 약속해, 테리.”
“뭘?”
“다시는 네 멋대로 최선이라고 판단하고 위험한 행동 하지 않기로.”
“…….”
“특히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 좀 하지 말자. 우리 언령님은 극단적인 연출을 싫어하신다고.”
“극단적인 연출?”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대답.”
“알았어. 노력……하도록 약속할게.”
노력이란 말로 여지를 남기는 게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봐주기로 했다. 이만하면 그도 어느 정도 반성한 것 같으니까.
게다가 취조해야 할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그나저나 테리.”
“응.”
“그때 리트니엘 평원에 사람 많았잖아.”
“응…….”
“그때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응……?”
“혹시 사람들한테 보여주는 걸 좋아하는 거야?”
“어? 아, 아니, 그건……! 그런 게 아니라…….”
놀리는 재미가 톡톡한 반응이 돌아왔다. 나는 웃음을 꾹 참고 짐짓 진지한 척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참이나 어쩔 줄 몰라 하던 끝에 그가 겨우 제대로 된 말을 정리해서 내놓았다.
“미안. 리트니엘 평원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지만, 오늘은 내가 너무 충동적으로…… 그랬던 것 같아.”
“으음, 충동…….”
빙의자를 위한 특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