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28)
28화
잠시간의 침묵 후.
“아닌데? 잘못 봤어.”
“야, 그건 네 머리에 대고 할 소리지!”
이페일의 머리에 달린 꽃봉오리가 피기 직전처럼 통통해졌다. 그의 사인화는 눈동자 색과 같은 자줏빛이었다.
“아아, 우리 금발 어린이는 꽝이군요. 역시 성흔양은 좋은 화분이 못 될 줄 알았어요.”
로드리고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구경 중이었다.
“아, 몰라! 그냥 죽어!”
이페일이 사인화의 성장을 무시한 채 두더지 인형에 달려들었다.
그그그극!
신성력을 실은 포크가 두더지 인형의 날카로운 앞발톱에 막혔다.
둔해 보이는 외견과 다르게 앞발만큼은 빨랐다. 회피를 우선시하다 보니 타이밍을 잡아 강력한 일격을 먹이기가 쉽지 않았다.
“아, 짜증 나게.”
이페일이 물러나서 숨을 고를 때였다.
두더지 인형의 단추 구멍 눈이 다른 쪽을 향했다. 헤스티오였다.
두더지 인형이 고속으로 땅을 파며 헤스티오에게 달려들었다.
“히이익! 야, 임마! 왜 나를 공격해! 난 한 대도 안 쳤는데!”
“오오! 좋아, 헤스티오! 몸으로 막아서 시간 벌어!”
“야, 제대로 못 싸우냐!”
“미안. 난 탱커가 아니라 딜러라서.”
던전 토벌대의 최소 단위는 4인이며 탱커, 딜러, 서포터, 힐러로 구성된다.
탱커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힐러가 최우선 순위 타깃이며, 차순위 타깃은 서포터다.
버프를 준 이상 헤스티오에게 공격이 집중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런, 이런. 성흔양은 명색이 성황청의 최종병기 아니었나요? 어째 전혀 힘을 못 쓰네요? 실-망.”
신랄한 비웃음에 헤스티오와 이페일이 울컥했다.
그들은 던전이 처음이었다. 이제껏 훈련용 사육 마물하고만 싸우다가 느닷없이 실전을 벌이게 되니 여러모로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눈앞의 두더지 인형은 이래 봬도 S급 던전의 중보스다.
B급 던전의 보스와 맞먹는 수준이기에 통상적으로는 6인 이상의 공격대가 달라붙어서 상대해야 한다.
막다른 곳에 몰린 헤스티오가 나이프로 두더지 인형의 앞발톱을 막았다.
“야, 이페일. 내가 진짜 이 말만은 안 하려고 했는데…….”
“유언이야?”
“야, 닥쳐.”
“미안. 말해봐.”
“테실리드 보고 싶다.”
“유언 맞네. 전해줄게.”
“닥치고 포크질이나 열심히 해!”
로드리고가 얄미운 응원을 날렸다.
“그래도 여러분은 제법 잘하고 있는 편이랍니다. 동쪽 별관과 북쪽 별관은 벌써 양새끼들이 전멸이거든요. 그런데 여기는 딜러랑 서포터 둘뿐인 주제에 아직도 숨이 붙어 있잖아요. 아주 훌륭해요!”
“……!”
헤스티오와 이페일이 흠칫했다.
동쪽과 북쪽에 있는 성흔양들이 전멸이라고?
그럼 서쪽은? 테실리드가 있는 서쪽 별관은?
“열심히 발악해 보세요. 뭐, 보아하니 곧 친구들 뒤를 따라갈 것 같지만…….”
악마가 독사처럼 지껄인 그 순간이었다.
콰과광!
만찬회장의 거대한 문짝이 부서지더니 포크와 나이프가 쇄도해 왔다. 두더지 인형이 재빨리 헤스티오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뭐야!”
로드리고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역시 난입꾼을 환영하는 것은 집사의 몫이었다.
그가 문간에서 테실리드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너, 넌 은발 양새끼……! 서쪽 별관에 안 있고 왜 여기에 있죠?! 이렇게 단시간에 별관을 넘어오다니!”
여기엔 지옥염화의 본체를 제거해 준 로드리고의 공이 크다 하겠다.
“헤스티오, 이페일, 살아 있어?”
황금색 꽃을 머리에 단 테실리드가 로드리고를 무시한 채 친구들부터 찾았다.
난입꾼은 테실리드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등 뒤에서 분홍 머리 여자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친구들 소개시켜 줘, 테실리드.”
“……!”
아일렛을 본 로드리고의 눈이 한계까지 벌어졌다.
연분홍색 머리 위에 통통하게 맺힌 사인화 꽃봉오리.
유난히 마기를 흩뿌리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그 꽃잎의 색깔은 검보라색이었다.✠왠지 주인공 포스로 무장한 테실리드보다 나에게 더 시선이 모이는 느낌이다.
조금 전까지 테실리드를 향해 잇몸을 드러내던 집사가 나를 향해서는 눈을 빛냈다.
“이럴 수가! 검보라색! 정말 검보라색이잖아? 그 귀하디귀한 검보라색을 내가 피워내다니! 혹시 나에게 가드너로서의 재능이?!”
내가 자기 집 화분인 줄 아는지 헛소리를 해댄다.
로드리고가 감동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는 때가 기회였다.
테실리드가 두더지 인형의 시선을 제게로 돌리고 아이들이 없는 쪽으로 끌고 가서 상대했다.
나는 부상을 입은 성흔양들 쪽으로 다가갔다. 하얀 제복 덕에 알아보기 쉬웠다.
어디 보자. 흑발이 헤스티오고, 금발이 이페일이던가.
“안녕, 테실리드 친구들? 나는 아일렛이라고 해.”
좋은 첫인상을 주고 싶었건만, 두 사람의 표정이 구겨졌다.
“누가 친구야?”
“쟤가 자기 입으로 그래? 친구라고?”
이 상황에도 따져야 하는 중요한 문제인가 보다. 그렇다면 나도 진지해져야겠다.
“친구 아니야? 그럼 상처 치료해 줄 필요 없어?”
힐링 포션을 흔들며 물었더니.
“친구야.”
“친구 맞아.”
태도가 참 유연하다. 역시 테실리드한테 꼭 필요한 친구들임이 틀림없었다.
쿵!
두더지 인형이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서쪽 별관에 이어 남쪽 별관의 두더지까지 테실리드가 해치웠다.
똑같이 성황청에서만 자란 성흔양이어도 역시 주인공은 격이 달랐다.
수하가 쓰러졌는데 로드리고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내 머리에 달린 꽃뿐이었다.
“후후, 검보라색……. 검보라색 사인화……! 최고야! 저걸 화분째로 집무실에 장식하면……. 아, 아니지. 저건 엄청난 가치가 있어. 마계의 암경매장에 출품할까? 아니면 위대하신 세 마왕 중 한 분께 뇌물로 바칠까? 으흐흐흐…….”
헛꿈을 실컷 주절거린 로드리고가 내게 말을 걸었다.
“거기 귀여운 분홍 머리 꼬마 아가씨, 이름이 뭐죠?”
“손님 이름도 모르고 초대했어? 집사 실격이네.”
“아앗! 이 로드리고를 앞에 두고도 당돌한 성격! 꽃뿐만 아니라 화분도 마음에 들려고 하고 있어요!”
로드리고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숙녀라면 신사의 질문에는 정중히 답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안 그러면, 그 앙증맞은 입에서 대답이 나올 때까지 제가 여기 있는 아이들의 머리통을 하나씩 펑펑……!”
“아일렛 로델라인.”
“아주 좋아요, 아일렛 양. 후후…….”
내 빠른 태세 전환을 굴복으로 여긴 듯 이페일과 헤스티오가 분한 표정을 지었다.
“아일렛 양, 당신은 제 마음에 들었으니 특별히 선택권을 주도록 하죠. 이 집사 오빠랑 같이 가지 않겠어요?”
“가면 어떻게 되는데?”
“제 취향인 고딕 롤리타 드레스로 갈아입혀진 다음에 위대하신 오르슈 백작님께 인사를 드리는 영광을 얻게 되죠! 그다음은 묻지 말아요. 아직 경매장에 넘길지, 마왕님께 바칠지 결정 못 했으니까.”
나는 짐짓 고민하는 시늉을 한 뒤 답했다.
“그거 꽤 끌리는 제안이네.”
“뭐?”
“야! 미쳤어?”
옆에 있던 이페일과 헤스티오가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얼굴을 했다.
테실리드는 멀리 있어서 얼굴을 못 봤다.
나는 주변의 반응을 무시한 채 로드리고를 쳐다보았다.
“그쵸? 그쵸? 아일렛 양도 그렇게 생각하죠?”
“응.”
“역시 숙녀의 선택은 현명하군요. 자, 그럼 이쪽으로 와서 이 집사 오빠의 손을…….”
“대신 조건이 있어. 여기 있는 애들 다 풀어줘.”
“네? 그, 그건 좀…….”
“못 해? 나 같은 숙녀를 데려가면서 그 정도도 못 해줘? 집사뿐만 아니라 신사로서도 실격이었구나?”
“…….”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로드리고가 부들부들 떨었다.
좋아. 이대로 조금만 더 긁으면 성공할 것 같다.
애들은 던전 밖으로 다 내보내고, 나는 보스룸으로 직행하고. 이거야말로 일석이조이지 않겠나.[‘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당신의 전략을 눈치채고 물개박수를 칩니다.]“돼, 안 돼? 빨리.”
“조, 좋아요! 대신 앞으로 뭘 시켜도 다 하겠다는 의미로 이 계약서에 서명을…….”
그때였다.
찌이이익.
신성력이 실린 나이프가 날아와 로드리고의 계약서를 찢었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이 뒤로 훅 당겨졌다.
“웃기지 마. 이 애는 절대 보내줄 수 없어.”
……아.
복병을 미처 생각 못 했다.
정의로운 고구마패스, 테실리드가 나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로드리고의 눈 흰자위가 분노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이런 무례한 은발의 양새끼! 신성한 계약서를 찢다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
“성흔양을 비롯해서 버릇없는 애새끼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어요. 살려두는 건 분홍색 화분으로 충분합니다!”
아, 계획 실패다.[‘균형을 조율하는 독설가’가 보스룸행 급행 버스 탑승은 물 건너간 것 같다고 말합니다.]제 생각도 그래요, 밸런스 담당자님.
당초 계획대로 테실리드 및 그의 친구들이 운행하는 일반 버스를 타는 수밖에.
로드리고가 천장으로 날아올랐다.
“딱 기다리고 있으세요, 어린이 여러분. 사인화 시세만 알아보고 와서 다시 놀아드리도록 하죠! 그때까지는 그림 리퍼를 보내줄 테니 숨바꼭질이라도 하고 있으면 되겠군요!”
나에게는 따로 인사했다.
“예쁜 화분 숙녀님, 드레스를 준비해서 데리러 갈게요. 잠시만 안녕!”
윙크를 마지막으로 로드리고는 사라지고, 피에로 인형이 퐁퐁 나타났다.
“히익! 아까 그 인형이다!”
아이들은 숨기 위해 허둥지둥 흩어졌다.
나, 테실리드, 이페일, 헤스티오 네 사람만 만찬회장에서 이동하지 않았다.
헤스티오가 피에로 인형을 건성으로 쳐내며 나에게 다가왔다.
“야, 너 이름이 아일렛이라고 했던가?”
“응, 맞아.”
“그래, 아일렛. 테실리드가 달고 온 애 아니랄까 봐 어째 하는 짓도 똑같……. 악! 야, 사람을 왜 밀고 지나가?!”
테실리드가 헤스티오를 치워줬다. 그러나 나를 잔소리로부터 구해주려는 목적은 아닌 듯했다.
“…….”
“…….”
테실리드가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어린놈이 왜 갑자기 분위기를 잡냐고 투덜댑니다.] [‘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꼬맹이가 화내는 얼굴도 잘생겼다며 좋아합니다.]그랬다. 테실리드는 화를 참는 듯한 무표정이었다.
“혼자 희생할 생각이었어?”
아니, 혼자 버스 탈 생각이었는데.
묵비권을 행사하는 내게 테실리드가 좀 더 가까이 왔다.
“그 악마 자식에게 끌려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악마가 괜히 악마라고 불리는 게 아니야.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꼴을 당하면서 영원히 고통받을 텐데, 무슨 배짱으로 악마한테 그런 제안을 했어?”
차분했던 어조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빙의자를 위한 특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