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284)
284화
성기사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전열을 갖췄다.
몇몇은 교황 세네딕트의 곁에서 그녀를 보호하고자 했다.
‘시작인가.’
명백한 환란의 예고에도 교황의 눈에는 동요의 빛이 일절 없었다.
그것은 노회한 자가 보일 수 있는 침착함만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마치 모든 발버둥이 부질없다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와 비슷한 태도로 상황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바로, 생사안의 소유자인 카틀레야 추기경이었다.
“…….”
“…….”
다가올 미래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으나, 무력함 속에서 스스로를 가둔 두 사람. 그들의 눈이 우연찮게 마주쳤다.
잠시간 곧게 이어지던 시선이 얼마 지나지 않아 어긋났다.
카틀레야 추기경이 세네딕트 교황의 머리 위를 살핀 탓이었다.
추기경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은 그때였다.
삐-.
“……!”
한 줄기 이명이 모두의 귀를 관통했다.
삽시간에 고요해진 사위. 덕분에 소름 끼치는 소음이 더욱 선명히 울려 퍼진다.
끼이이이익.
낡은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의회실의 문이 좌우로 찢어지듯 벌어졌다.
열린 통로를 통해 스산한 바람이 무수한 꽃잎들을 밀고 들어왔다.
요사스러운 짙붉은 빛을 띠는 길쭉한 꽃잎. 사인화였다.
타박, 타박, 타박.
짤랑.
맨발이 느릿하게 대리석 바닥에 마찰하고, 법봉의 장식용 쇠붙이들이 종처럼 영롱한 소리를 낸다.
모두의 시선이 의회실 안으로 등장하는 소녀에게 향했다.
“저, 저자는……!”
“히끅!”
회색과 보라색이 섞인 제례복. 끝으로 갈수록 민트색으로 변하는 금발이 굽이굽이 물결치고, 악마로선 특이한 벽안이 별빛처럼 반짝이는 미소녀.
거대한 압박감에 인간들의 숨이 멎는다.
세상은 이 존재를 이렇게 불렀다.
“나는 혼돈의 묵시관, 어빅시니스. 이제부터 이곳을 혼돈악신의 복음을 전파할 진지로 쓰겠노라.”
짤랑!
법봉이 청아한 울림을 퍼뜨린다.
그 순간이었다. 흩날리는 붉은 사인화 꽃잎 사이로 핏방울이 비산한다.
“끄아아악!”
“도, 도망…… 커헉!”
“신이시여, 아아악!”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질서교 최대 최고의 성소는 일방적으로 짓밟혔다.
상대는 마계 서열 1위의 마왕이었다. 대항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 아아, 안 돼! 제발……!”
“오, 맙소사! 엄격한 질서와 선이시여!”
“시, 신이시여! 부디 당신의 어린 양들을 보우……!”
짤랑, 짤랑.
법봉이 흔들릴 때마다 울부짖는 기도 소리가 하나씩 꺼져 갔다.
살아남은 질서교인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기도는 그들을 더 빨리 죽일 뿐이었다. 그들은 구석에서 소리를 죽였다.
“이런, 다들 숨었더냐.”
어빅시니스의 맨발이 느긋한 걸음으로 피웅덩이를 밟으며 산 자들과 술래잡기를 한다.
“힉, 히끅! 신이시여, 왜……. 왜 저희에게 이런…….”
바닥을 질질 기어 단상 밑으로 들어온 마그람이 벌벌 떨었다.
그제야 그도 알아챘다. 아무리 신에게 기도해도 구원은 내려오지 않는다.
오늘 이곳에 있는 모두는 죽을 것이다. 강대한 힘과 격을 가진 존재 앞에서 인간이란 한낱 벌레에 불과하다.
그나마 마왕에게 대적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이단의 신성경과 성검의 주인 정도일 터.
그러나 그 두 강자는 질서교에서 돌아섰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지금 머리끝까지 차오른 공포와 절망에 버금가는 회한이 밀려온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둘을 붙잡을 것을.
갖은 방법으로 회유하여 교단에 앉혀둘 것을.
그런 생각은 비단 마그람의 머릿속에서만 떠오른 것이 아니었다.
‘신성경을 배척해서 페론사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성검의 주인을 성황청에 묶어두어 그 둘이 모두 여기 있도록 해야 했는데…….’
‘교단은……! 왜 우리는 그들에게 그랬단 말인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모두가 이제 와 때늦은 탄식을 쏟아낼 때였다.
짤랑-!
누군가의 머리 위로 죽음이 드리워졌다.
“……찾았다.”
“……!”
숨바꼭질은 계속되었다.
살육이 펼쳐진 지 고작 5분. 질서교 성황청은 어빅시니스에게 점령되었다.
성황청의 외관이 변화했다.
순백의 대리석은 검게 오염되고 사방은 검은 가시덤불과 붉은 사인화로 뒤덮였다.
이곳에 걸맞은 이름은 더 이상 성황청이 아니었다.
혼돈악의 진체를 불러들이기 위한 탄신제를 준비하는 곳.
혼돈악의 대신전이었다.✠이변은 성황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엘펜하임 교국 극동부에 위치한 해안 도시, 엘토리니.
이곳은 일전에 ‘타락천의 하늘 요새’라는 S급 던전이 싱크를 일으켰던 곳이기도 했다.
도시의 부유한 상인들은 당시에 던전 싱크를 겪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제껏 바쳐온 막대한 헌금에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때부터 쭉 신실한 종교 생활을 이어오는 중이었다.
이날도 상인들은 막대한 건축 헌금을 들여 화려하게 쌓아 올린 대성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값비싼 파이프오르간이 천상의 소리를 울리고, 어지간한 가수보다 실력이 뛰어난 미성의 성가대가 신을 찬미한다.
예술 공연 감상이나 다름없는 시간이 지나고 언변이 좋은 대주교가 나와 복음을 전한다.
대출을 받아 장사로 돈을 불렸더니 신께서 칭찬하시더라는 성서의 일화는 매번 들어도 상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리고 이어진 기도의 시간.
“‘엄격한 질서와 선’이시여, 오늘도 당신의 종들이 근면성실하게 하루를 마친 뒤 이 자리에 모여…….”
쿠웅!
“어이쿠, 지진인가? ……음, 별일 아닌 모양입니다. 다시 눈을 감고 기도합시다. 속세를 열심히 살아감으로써 당신의 뜻을 받드는 신실한 일꾼들이 모였나이다. 부디 ‘엄격한 질서와 선’께서는 이들을 축복하여 만금의 달란트를 내리시옵고…….”
복된 기도가 예배의 마무리를 장식한다.
이제 뒤에 이어지는 것은 즐거운 사교 활동이다.
서로 누가 성당의 기둥을 했네, 창문을 몇 장 했네, 파이프오르간의 건반을 몇 개 했네, 하며 누적 헌금 액수를 자랑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상인들은 기도가 어서 끝나기만을 학수고대했다.
기대감은 사람을 힘차게 만드는 법. 덕분에 중간중간 아멘과 할렐루야를 외치는 음성이 열정적이다.
그렇게 어느덧 기도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들이 증명해 온 신앙심에 응답하사, 거친 환란으로부터 엘토리니만은 굽어살펴주시옵소서. ‘엄격한 질서와 선’의 이름으로 기도드렸나이다. 아…….”
아멘.
그 한마디면 기도가 끝난다.
모두가 어서 대주교가 아멘을 외치기를 바라며 질끈 감은 두 눈과 꼭 모은 두 손에 힘을 주고 기다릴 때였다.
‘음? 대주교님?’
‘뭐야? 왜 아멘을 안 하시지?’
한참을 기다려도 마무리하는 말이 들려오지 않는다.
이에 몇몇 상인들이 불경함을 무릅쓰고 한쪽 눈을 떠서 앞을 본 순간.
“힉?!”
충격적인 광경이 설교 단상에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뿔을 왕관처럼 머리에 인 염소.
그림으로 그린 듯한 축생형 악마가 사악한 기운을 발하며 인간 대주교의 목줄을 움켜쥐고 있었다.
“아, 악마다!”
“히이익!”
상인들이 새하얗게 질려 출구로 도망치려 했다. 물론 테즈리할은 허락지 않았다.
따다다다단!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이 무거운 음계를 인간들의 귀에 때려 박는다.
곧 반주에 어울리는 지옥의 성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빈체스터 왕국 북부에 위치한 어느 작은 도시.
중형 규모의 교회에서는 한창 엄숙한 장례식이 치러지는 중이었다.
검은 관 속에 누운 것은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
결혼식을 목전에 두었던 새 신부의 상실은 비통하기 짝이 없다.
고명딸을 일찍 보내버린 가족과 사랑하는 반려를 빼앗긴 젊은 남작이 목이 쉬도록 울부짖는다.
탈진 직전의 남작이 부축을 받으며 관에서 겨우 물러났다.
하얀 베일이 그녀의 얼굴을 덮고 관 뚜껑이 그녀의 몸마저 가려 버린다.
“아아, 안 돼, 헤브니아…….”
세상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절망 속에서, 남작이 마지막으로 연인의 이름을 부른 순간이었다.
쿠우우웅!
“……!”
둔중한 진동이 몸을 뒤흔든다.
제 심장이 땅으로 떨어져 세상에 영향을 끼치기라도 한 것인가.
젊은 남작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때였다.
드드득.
무거운 관 뚜껑이 저절로 열린다. 조금 전까지 새하얀 시체였던 신부가 저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 펼쳐진 기적. 그러나 그것은 곧장 악몽이 되었다.
“헤, 헤브니…… 헉!”
베일을 내던지자 드러난 신부의 얼굴은 완벽한 백골이 되어 있었다.
달그락달그락.
“꺄아아악!”
“으아악!”
장례식에 참석한 자들이 혼비백산했다.
그 와중에 신부의 그림자에서 스며 나온 어둠이 형태를 빚어낸다.
이윽고 현세에 실체화한 것은 보석을 주렁주렁 매단 거대한 해골의 상반신이었다.
✠그렇듯, 밤과 함께 찾아온 재앙은 세렌트라 대륙 전역을 뒤덮었다.
순식간에 심해처럼 변해 버린 어두운 하늘에서 불길한 유성우가 쏟아져 내리고, 십자가를 가진 건물들이 마기에 오염되었다.
이것은 번화한 도시와 변방의 마을을 가리지 않고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었다.
해당 지역의 거주민들은 검게 물들고 사인화로 휘감긴 십자가를 보며 흉조에 불안해했다.
“아이고! 우리 동네 교회가 왜 저러는 거요?!”
“말세야, 말세가 됐어…….”
“엄마, 교회에 예쁜 꽃이 폈어. 저 꽃 이름이 뭐야?”
“가까이 가면 안 돼!”
한편 마족들이 침투해 들어온 장소는 오로지 교회.
이 조건만 만족하면 마족들은 그 건물이 어느 교단의 소속인지 가리지 않았다.
따라서 작금의 상황은 질서교뿐만 아니라 언령교 역시 겪고 있었다.
“미친! 또 무슨 일이야?!”
“인페리노스 토벌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소름 끼치는 진동이 발생하자마자 헤스티오와 이페일은 성 아그네스 교회 앞마당에 뛰쳐나왔다.
끝없이 쏟아지는 요사스러운 유성우가 그들의 불길한 예감을 자극한다.
그러나 한가롭게 하늘의 별만 구경하기엔 지상의 상황도 심상찮았다.
“형님들, 교회 앞마당에 이상한 게 자라납니다!”
“이, 이건 사인화인데……! 악마의 꽃이 왜 우리 언니의 교회에……!”
“어? 힐데야, 저것 봐! 교회 바깥은 멀쩡한데?!”
“뭐야, 이페일? 그럼 지금 교회만 마계화되고 있다는 소리야?”
언령교의 교황청이나 마찬가지인 성 아그네스 교회가 마계의 기운에 오염되기 시작한다.
통상적으로 신성이 마기에 내성을 가졌다는 사실로 봤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영문을 따질 겨를은 없다. 은빛 성채의 일원들은 외벽을 뒤덮으려는 덩굴을 잘라내고 태우기에 급급했다.
힐데가 7계위 신성력을 쏟아부을 때마다 사인화는 가루로 화하여 스러진다.
하지만 지옥화된 땅은 계속해서 싹을 틔웠다.
“제길, 끝이 없잖아!”
“이러다 힐데가 실신하겠습니다, 형님들!”
헤스티오와 애쉬가 소리를 높인 그때였다.
“소제하라.”
빙의자를 위한 특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