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286)
286화
그림자는 하나의 개별 생명체인 것처럼 꿈틀댔다. 은은한 광기를 담은 맥동이 간헐적으로 지속된다.
그것에 발끝부터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교황과 마탑주를 잠식했다.
주제를 모르고 놀렸던 입이 얌전해졌다.
“다른 신.”
여전히 거죽만큼은 초연한 혼돈악이 권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는 정면을 향하고 있었으나 그 무엇도 비추고 있지 않은 듯했다.
그는 잠시 그대로 조각상처럼 미동 없이 섰다.
“빛이 잉태한 어둠이시여……?”
“회귀세계의 추방자시여……?”
두 인간들이 저마다의 명칭으로 그를 부른다.
그러나 질척하고 어두운 심연과 같은 곳으로 생각이 깊게 끌려 들어간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다른 신…….”
반복되는 읊조림.
그의 음성과 눈빛이 미몽에 홀린 듯 흐려졌다.
그제야 아주 오래된 위화감이 정리되었다.
회귀하기 전이었던가.
아일렛 로델라인이 최초로 신성 강림의 기운을 발현했을 때, 그는 그것이 ‘엄격한 질서와 선’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고 느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신위의 권능을 부여받은 성인을 이단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너무도 불경하기에 의혹을 바로 폐기했었다.
그 감각을 허투루 넘겨서 안 되는 것이었는데.
어리석었다.
결국 그 역시 유일신이란 인식의 틀 속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만신전에 직접 들어가고도 신성의 이질감을 알아채지 못했다.
신을 철저히 버리고 나서도, 의식은 여전히 신에게 지배당해 있었던가.
스스로의 꼴이 우스웠다. 그러나 웃음이라고는 비소 한 조각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다른 신이라고.”
벌써 세 번째 되뇜.
그만큼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의 근간을 흔들어 버리는 조건이었으므로.
이것은 흡사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역을 당한 것과 같은 기분이다.
“…….”
그가 걸음을 걸었다.
지고한 악의 두 다리가 잔뜩 긴장한 교황과 마탑주를 지나쳐 간다.
“어, 어둠이시여, 왜 그러시는지…….”
“뭔가 문제라도……?”
그가 대예배당을 빠져나가기 직전, 여전히 응답을 구걸하는 두 인간들을 향해 한 마디를 적선했다.
“……생각할 것이 있다.”
그의 등 뒤로 예배당의 문이 닫혔다.
일직선 복도에 늘어선 검은 조각상들이 좌우에서 포복했다. 악마들의 경배를 받으며 미남자는 걸음을 옮기고 또 옮겼다.
그가 도착한 곳은 악마도 인간도 없는 성황청 후원의 깊숙한 곳이었다.
수맥이 있는 암벽을 깎아 만든 제단은 물소리 이외에는 적요하다.
본래 사제들의 수양을 위해 쓰이던 공간. 그곳에 홀로 선 리드는 넓게 열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
그가 불러낸 재앙의 밤에 별이 그치지 않고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오지 않는 낮을 기다리듯 그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 자세 그대로 미동하지 않았다.
그 모습은 의식을 드리는 제사장처럼 경건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신.”
절절히 끓을 것 같은 감정이 음성에 배어 나온다.
“하.”
수양과 같은 오랜 번뇌 끝에 얻은 답은 허망한 탄식이었다.
그가 차가운 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그것이 세상을 비웃는 것인지 스스로를 비웃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미 늦은 것을.”✠세렌트라 대륙의 수많은 교회들이 타락했다.
마기와 사인화에 잠식된 교회의 영역을 중심으로 검게 변색된 땅의 면적이 넓어졌다.
한눈에 확연히 알 수 있는 마계화였다.
어빅시니스는 제 권속들을 각지의 교회에 보내는 것으로 식민지를 계속해서 확장해 나갔다.
파견은 어빅시니스의 권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원리는 목적한 교회의 좌표에 악마를 공간 전이를 시키는 것과 같았다.
첫 파견은 화려하게도 6천이 넘는 주교급 악마들을 일거에 인세에 보냈다.
물량공세로 마왕으로서의 위세를 떨치는 것은 이만하면 충분했다.
주요 거점은 확보했으니 이제는 차근차근 영토를 확장하는 데에 중점을 둘 때였다.
남은 6만의 사제급 악마들은 확장된 마계의 식민지에 추가로 배치되거나, 하르마게돈의 ‘규칙’에 따라 가장 전략적인 장소를 정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복 목표는 어떨 때는 이미 점거한 대형 교회에 인접해 있는 소형 교회이기도 했고, 또 어떨 때는 아주 먼 변방에 외따로 떨어진 폐가나 다름없는 교회이기도 했다.
전체적인 대국을 볼 수 있고 규칙을 아는 이만이 유의미하게 느낄 수 있는 전략이었다.
당하는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그저 무작위일 뿐이었고, 이런 상황은 인간의 공포를 가중시켰다.
그래도 아직까지 인세의 혼란은 크지 않았다.
현재까지 관측된 바에 의하면, 타락한 교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계의 영토를 넓힌다.
그리고 그 영토 안에 들어온 인간을 타락시켜 영혼을 빼앗고 마족의 종복으로 삼는다.
하지만 그뿐, 영토 바깥에 있는 인간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는 못했다. 또한 그 확장 속도 역시 느린 편이었다.
점령 당시에 교회 안에 있지만 않았다면 충분히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교회 인근의 거주민들은 집을 버리고 피신했다.
먼 외곽으로 가거나, 더러는 교회가 점령당하지 않은 마을이 있는 곳으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국가가 어서 토벌전을 벌여 사태를 해결해 주길 오매불망 기다렸다.
가이약 마을.
엘펜하임 교국의 오지산간 중 하나, 엘티오 산기슭에 위치한 이곳은 몇 안 되는 ‘안전한 마을’ 중 하나였다.
산 중턱의 데본 마을을 비롯하여 동서남북 네 방향의 인근 마을들이 죄다 교회의 타락을 경험했다.
그런 와중에도 가이약 마을만큼은 재앙을 비껴갔고 지금도 완벽하게 안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엘펜하임 교국에서는 드물게도 이곳에는 아예 교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몇 년 전까지는 교회가 있긴 했었다.
웬 정신이 온전치 않은 노부부가 자기들의 진짜 딸을 신이 빼앗아갔다며 교회에 불을 지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오늘날의 재앙을 내다본 신의 보우하심일지도 모른다.
특히 그 노부부의 딸이 현재 성녀로 추앙받는 뮤리엘 필리제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훗! 역시 안전한 우리 마을로 피난민들이 몰려오는군!’
가이약 마을의 제코 그리온은 희희낙락했다.
비단 성역(聖域) 마을의 촌장이라는 자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피난민들이 저들을 받아달라며 촌장인 그에게 찔러주는 돈이 쏠쏠했다.
어차피 이대로 기다리고만 있으면 성황청에서 알아서 토벌대를 보내주어 상황을 정리하리라.
그러니 그전까지만 그는 선심 쓰듯 사람들을 받아주고 한몫을 단단히 챙기면 될 것이다.
물론 돌봄에 들어가는 노동과 비용은 마을 전체가 부담한다.
공동체 좋다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서로 돕고 살아야지.
‘기왕이면 성황청에서 토벌대를 좀 천천히 보내줬으면…….’
남의 불행으로 장사를 하려는 저열한 바람.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감당하기 힘든 업보로 돌아왔다.
드드드드득.
돌연 땅바닥이 진동하더니 사인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힉! 뭐, 뭐야?”
“어, 어째서 우리 마을이……!”
“으아아악!”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재앙이 가이약 마을에 정통으로 들이닥쳤다.
심지어 다른 마을처럼 교회만 집어삼켜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교회가 없는 가이약 마을. 이곳은 마을 전역이 일시에 마계화되었다.
마치 갯벌에서 갑자기 들어오는 밀물에 휩쓸리듯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인근 마을에서 피난 온 이들까지 수용하고 있던 터라 피해는 막심했다.
마을의 외곽으로 도망쳐 나온 이들만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생존자들은 조금까지 멀쩡했던 마을이 죽음의 땅으로 변하여 사인화와 언데드에 점령당하는 것을 코앞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교회가 없는 마을인데 왜…….”
“여기 있으면 괜찮은 것 아니었냐고……!”
덕분에 모두가 알게 되었다.
세렌트라 대륙의 그 어느 곳도 하르마게돈의 재앙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와 같은 현상에 의해 뒤통수를 맞은 것은 라그네이프 마도 공화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칠흑의 마탑이 있는 공화국의 수도, 게헤니드.
이곳은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이 잔뜩 모여 있기로 소문난 마법사의 도시였다.
“다른 나라들은 교회에 마족이 나타나서 난리라던데.”
“저런, 저런.”
“우리는 교회가 없어서 다행…… 아, 아니?!”
한 마법사가 말하기 무섭게 게헤니드의 땅 이곳저곳에서 균열이 일어나더니 거대한 검은 십자가 융기하듯 올라왔다.
뒤이어 흙이 파헤쳐지며 관짝이 튀어나왔고, 그 안에서 다시 흡혈귀가 관 뚜껑을 열고 나타났다.
송곳니를 드러낸 비릿한 미소가 마족들의 얼굴에 감돌았다.
“무주공산이로구나. 이 땅은 우리가 통째로 차지하겠다.”
비단 수도 게헤니드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오래전에 엘펜하임 교국과 수교를 단절한 라그네이프 마도 공화국에는 교회가 거의 없었다.
신성력 각성자조차 백마법사라 부르며 눈 가리고 아웅 해왔으니 오죽하겠는가.
그 탓에 라그네이프 마도 공화국의 영토 전역이 마계화되었다.
고위 악마가 튀어나온 곳은 가이약 마을처럼 절멸 지역으로 변해버렸고, 저급 악마들이 돌아다니는 지역에서 생존자들은 죽음의 숨바꼭질을 하며 피가 마르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앞선 두 나라에 비해 빈체스터 왕국은 사정이 좋았다. 유능한 오러 마스터 사령관이 있었던 덕분이다.
왕국의 검, 로미나 레칸드로는 즉시 병력을 파견하여 왕국 각지의 교회에서 일어난 재앙을 제압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왕도 빌헬론 외곽에 위치한 성 헤스티나 교회 탈환 작전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왕국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토벌전이 진행되었다. 토벌 대상은 대체로 S급 수준의 보스였기에 왕국의 병력으로 충분히 해결이 가능했다.
교회를 점거했던 마족 주교들이 하나씩 쓰러졌다.
그러나 문제는 전투가 아니었다.
“뭐, 뭐야? 왜 마계화가 멈추지 않지?!”
“보스는 죽었는데…….”
“저, 저기 봐! 보스가 되살아난다!”
“히이익!”
조금 전에 로미나 레칸드로의 일격을 받고 절명했던 구릿빛 피부의 타천사, 헬브레온.
그가 날개에 박힌 말뚝을 빼내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가 저절로 일어나는 것처럼 기괴하고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헬브레온이 세 쌍의 날개를 활짝 펼치며 말했다.
끝없는 소모전에 왕국군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패착은 명백했다.
그 누구도 하르마게돈의 ‘규칙’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빙의자를 위한 특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