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305)
305화
리드가 팔을 들어 눈두덩을 가렸다.
“하, 하하…….”
허탈한 웃음소리가 젖은 대기를 위태롭게 울렸다. 그동안 그는 아일렛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의 외면이 낳는 시야 사각에서 아일렛은 조용히 움직였다.
그녀의 손이 아공간을 휘저어 두 개의 물체를 꺼낸다.
하나는 전투 중에 챙겼던 성지 구축, 그리고 또 하나는 합성의 미스터리 박스였다.
빈 선물 상자 안에 깃발 형태의 아티팩트를 집어넣는다.[ 합성의 미스터리 박스에 필요한 재료가 모두 모였습니다.] [ 퀘스트 ‘■■■■ 합성 (난이도: 불명)’이 완료되었습니다. 보상을 수령합니다.]굳이 허공에 손을 뻗어 무언가를 받으려 할 필요는 없었다. 이번 보상은 물질이 아니었으므로.
아일렛의 머리 위로 황금색 광구가 떠올랐다. 작은 태양이 일출한 것처럼 보이는 현상.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빛으로 빚어진 천체본이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소원 실현 아티팩트, ‘천지창조’를 획득합니다. 발동하시겠습니까?]“예.”
그녀의 소원이 무엇인지는 그녀가 가장 잘 알기에 망설임은 없었다.[ 사용 분기점을 선택하십시오.]“테실리드 아르젠트의 회귀 시점.”[ 사용 대상을 지정하십시오.]“100회차, 테실리드 아르젠트.”
연달아 울리는 나직한 음성에 두 번이나 그의 진명이 실렸다. 이쯤 되자 리드도 팔을 걷어내고 제가 만들어낸 어둠에서 벗어났다.
“아일렛 로델라인……?”
뭘 하고 있느냐는 의문을 담은 부름과 시선이 오롯이 아일렛의 얼굴을 향했다.
그의 눈에는 찬연한 빛을 발하며 회전하는 천체본 형태의 아티팩트 ‘천지창조’가 보이지 않았다.
시스템은 계속해서 진행 상황을 충실하게 보고했다.[ 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천지창조’를 가동하여 당신의 소원을 실현합니다.] [ ‘천지창조’에 의해 당신이 존재하는 세계가 복사됩니다.] [ 특수 시간선이 탄생합니다!]“쿨럭……!”
입가로 흐르는 한 줄기 선혈이 그에게 이번 시간선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본래부터 리드는 아일렛을 원망하는 법을 잘 몰랐다. 시간이 없다는 사실은, 그 잠깐의 원망마저 빠르게 녹여 버렸다.
제 처지를 체념한 그가 처연히 말했다.
“그래……. 네가 주는 벌이라면, 달게 받아서 견뎌야지. 그래야지…….”
“…….”
“네 마음껏 나를 벌해. 나를 네 마음대로 해.”
“…….”
무방비하게 저를 내맡겨 버리는 그였다.[ 적용 대상이 ‘최종 조건’을 만족하지 않습니다. 조건을 만족하기까지 걸리는 예상 시간: 12초…….]시스템의 초읽기가 시작됨에 따라, 리드를 내려다보는 아일렛의 표정이 점차 무너져 갔다.
그녀는 막대한 9계위 신성력을 허락받은 신성경이었다.
치유 한 번이면.
치유 한 번이면, 지금 흩어져가는 그의 영혼을 육신에 붙잡을 수 있다.
그것은 그녀에게 너무나 쉽고 간단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를 소생시켜 살려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아일렛은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손등의 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지도록 손끝에 힘을 주고, 입술을 피 나도록 짓씹어 가면서.
그를 살리고 싶은 마음을 죽였다.
그럼으로써 그를 죽였다.[ 적용 대상이 조건을 만족하기까지 걸리는 예상 시간: 7초…….]그리고 이때, 리드는 아일렛의 마음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순간을 그녀에게 영원히 각인시킬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
그녀의 기억 속에서 영생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주저 없이 실행에 옮겼다.
“……!”
아일렛의 녹색 눈이 커졌다.
리드가 남은 힘을 그러모아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떨리는 손끝이 향한 곳은 아일렛의 얼굴. 붉은 실선이 그어진 뺨이었다.
그의 엄지가 스친 자리에 피와 함께 상처가 닦여 나갔다. 대신 혈선은 그의 뺨으로 옮겨갔다.
귀속의 수호.
오래전에 나누어 익힌 스킬.
그것으로 아일렛 로델라인을 치료했다. 그녀가 할 수 없는 그 일을, 그는 할 수 있었다.
그가 핏기를 잃은 입술을 달싹였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기에 입술의 모양으로 말을 대신한다.
안녕.
“…….”
“…….”
담백하기 짝이 없는, 참으로 그다운 인사말이었다.
스르륵…….
리드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칠흑의 어둠을 베어낸 듯했던 머리카락이 점차 탈색되어 갔다. 은현처럼 하얗게, 또 하얗게.
남쪽에서 바람이 길게 불어왔다. 보이지 않는 손길이 낮달 같은 은발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스쳐 지나갔다.[ 적용 대상이 ‘최종 조건’을 만족했습니다.] [ 대상, ‘100회차 테실리드 아르젠트’를 ‘특수 시간선’으로 회귀시킵니다.] [ ‘천지창조’ 사용이 완료되었습니다!]팟-!
아일렛의 머리 위를 밝히던 황금빛이 한 점으로 응축되더니 천체본이 일순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 남은 것은…….
“리드?”
“…….”
“리드.”
“…….”
“테실리드.”
“…….”
대답을 돌려주지 않는 미남자의 육신을 붙잡고 있는 그녀뿐이다.
“아…….”
들판을 스치는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남쪽의 따뜻한 미풍이 아닌, 북녘의 차가운 삭풍이 이름 모를 들꽃들의 목을 쳐내며 들판을 거칠게 내달린다.
“아아…….”
끝났다.
끝나 버렸다.
그가, 100회차 테실리드 아르젠트가 떠나 버렸다.
“아, 아아. 아아아.”
그녀는 한계를 직감했다.
더 이상 제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영혼이 영영 떠나가 버린 껍데기를 부여잡은 그녀가 포복하듯 엎드렸다.
애처롭게 옹송그린 등이 거칠게 들썩였다. 매서운 삭풍이 잦아들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그랬다.
하늘이 시리도록 파랗고, 들꽃이 화사하게 만개하고, 산새들이 지저귀는,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아름다운 풍광 속.
그를 조금도 추모하지 않는 이 무정한 세계와 시간선을 기꺼이 대신하여, 그녀의 비통한 오열이 온 들판에 울려 퍼졌다.
오래, 아주 오랫동안.
“…….”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목 놓은 울부짖음이 마침내 메말랐다.
“잘 있어.”
“…….”
“다시 들를게.”
차가운 빙설 위가 아니라 포근해 보이는 풀밭이라 다행이었다.
융단 같은 초록 위에 그를 눕히고 몇 송이의 꽃을 가슴팍에 올려놓았다. 그녀에게 허락된 짧은 장례식이었다.
슬픔을 간신히 봉합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면을 향한 녹색 눈은 결연히 빛나고 있었다.
격정을 죽이고,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할 때였다.
아직, 세계를 구하는 사명은 완료되지 않았기에.
‘이제 혼돈악을 봉인하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쿠구구궁!
북동쪽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경악합니다.] [‘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경악합니다.] [‘천기누설 감찰관’이 경악합니다.]어빅시니스의 토벌로 밤의 장막이 걷혔던 하늘에 다시금 어둠이 드리워진다.
단순히 밤이 도래한 것이 아니다. 하늘 전체가 심연으로 변한 듯 질척거리는 암흑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변의 중심지에 구름과 같은 마기가 모여들어 회오리를 생성한다.
태풍의 눈. 그것이 게이트로 화하여 아가리를 쫙 벌린다.
비탄, 절망, 멸망의 문이 열린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긴급 알림! ‘마왕 제물’을 만족하여 묵시전쟁 ‘하르마게돈’이 최종 페이즈로 넘어갑니다!] [ 경고! ‘혼돈악신’이 인세에 강림합니다!]“……맙소사.”
혼돈악의 진체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어빅시니스가 준비했던 것이 이거였나.’
테실리드의 시선이 밤하늘의 중앙에 위치한 섬뜩한 태풍의 눈에 고정되었다.
두 번의 버스트를 거쳐 악신으로 격상된 혼돈악이 지옥의 뚜껑을 열고 빠져나온다.
만마의 군집체가 서로 상잔을 벌이며 먼저 나오려 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아귀다툼 그 자체였다.
아직까지 인세로 빠져나온 것은 혼돈악의 일부. 전체가 세상에 존재를 허락받았을 때 벌어질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일부만으로도 벌써부터 세상을 집어삼키려 난리를 피우는 통에 인세의 시공에는 점차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허공이 흡사 유리라도 되는 것처럼, 굵은 금이 가며 파편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초현실적인 광경.
마계와 인세의 계면이 약해지며 인세가 통째로 깨질 조짐을 보였다.
본래 리드는 물론이거니와 어빅시니스도 여기까지는 바라던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식민지 삼을 세계 자체를 곧바로 소멸시킬 생각은 없었을 테니까.
따라서 지금 현상은 상정 외의 상황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는 명백했다.
악신으로 격상된 의지를 감당하기에는, 혼돈악의 창발된 사념은 너무도 질이 낮았다.
의식 공명을 통해 중추 역할을 대신해 줄 고차원적인 존재, 리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건 아일렛의 승리를 알리는 희보인 동시에, 멸망의 전조를 알리는 비보였다.
심지어 진체는 지금 격하게 분노한 상태였다.
수십만 남녀노소가 혼합된 음성이 인세를 소름 끼치게 뒤흔들었다.
리드를 잃은 혼돈악이 폭주의 조짐을 보였다.
멸망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종언의 최전선에 선 테실리드는 나직이 뇌까렸다.
“결국, 리드가 필요하다는 거군.”
그는 별수 없다는 듯 힘없이 미소 지었다.
저 멀리서 뒤늦게 사람들이 다가온다. 어빅시니스가 쓰러지자 급속도로 힘을 잃은 마족들을 아군이 모두 정리하고 합류한 모양이었다.
“테실리드 경……!”
“무사하십…, 헉?!”
그들은 다가오다 말고 멈추어 섰다. 검은 균열 앞에 선 테실리드가 몹시 낯선 모습을 하고 있는 탓에.
“검은…… 마검사……?”
길게 늘어뜨린 흑장발과 성기사 제복이 극도의 부조화를 이룬다.
아무도 섣불리 테실리드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상황은 그에게도 편리했다. 그 역시도 주변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는 혼돈악신이 몸부림치는 하늘에서 시선을 내려 정면을 보았다. 그의 다섯 걸음 앞에는 거대한 균열이 있었다.
테실리드가 천천히 걸음을 떼며 아무도 듣지 못할 말을 남겨본다.
“말했지, 아이. 나는 네가 있는 세상을 꼭 구할 것이라고.”
세상을 구하는 건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가장 손쉽고도 한결같이 사용해 온 구원 방식이란.
“……안녕.”
철저한 자기희생이다.
“테, 테실리드 경!”
“맙소사! 테실리드!”
괴물의 찢어진 아가리 같은 거대한 균열이 테실리드의 모습을 삼켰다.
혼돈의 심해가 수장을 자처한 제물을 기꺼이 맞이했다.
빙의자를 위한 특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