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315)
외전 4화
‘그래, 내가 혼자 유별나게 굴 일이 아니지.’
여동생이 선택한 데다, 집안의 웃어른들도 다 인정하는,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훌륭한 남자이지 않은가.
사역마 발언으로 시작된 테실리드에 대한 사감은 이제 슬슬 청산해야 할 것 같다. 여기서 부러 밉게 볼 구석만 찾아내는 것은 형편없는 짓이었다.
프린츠의 내적 타협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테이블 위에서 오가는 대화의 주제가 발전되었다.
“그런데 말일세, 손녀사위.”
“예.”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할 계획인가?”
“……아.”
테실리드는 귀 끝을 붉히고 시선을 내리까는 모습으로 레오날드와 히스펜릴 공왕의 마음을 또 흡족하게 했다.
‘우리 딸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허허! 풋풋하기는!’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수천 살치고 풋풋한 편이긴 했다.
‘결혼…….’
그 한 단어가 테실리드의 머릿속에 침투하기 무섭게 황홀함에 질식할 것 같은 상상을 무수히 펼쳐 놓는다.
그는 멍해질 뻔한 정신을 가까스로 추슬렀다.
‘그런데 프러포즈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사정을 곧이곧대로 밝히면 테이블에 난리가 날 것 같았다.
“결혼은 프린츠 경께서 먼저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오래전부터 마음에 두신 여성이 있다고 아이한테 들었습니다만.”
화제의 과녁을 바꾸는 의도는 훌륭히 성공했다.
프린츠의 표정이 즉시 풀어졌다. 그가 마음에 둔 사람, 비안카 길레트는 언급만 되어도 그의 기분을 날아갈 듯 만들 수 있는 존재였으므로.
“크흠, 조만간 그분께 제 마음을 고백할 생각입니다.”
푸른 흑발의 아름다운 여성을 머릿속에 그리는 호수 빛 눈동자가 아련해졌다.
비안카 길레트는 그가 힘없는 시종이었던 어린 시절부터 몰래 짝사랑해온 아가씨였다. 백작저의 사용인들 대부분이 그녀를 냉담하고 속을 알 수 없다며 기피했지만 프린츠의 눈에 비친 그녀는 달랐다. 비안카의 상냥하고 정 많은 성격을 몇 번이나 접했으니까.
갓 휘핑보이가 되어 롬디오의 매를 대신 맞던 시절, 그는 저택 구석에 숨어서 혼자 훌쩍거리고는 했었다.
아무리 그가 원해서 한 일이었다지만 그 역시도 어린 나이였고 매는 아팠다. 심지어 간혹 롬디오가 망나니답게 선생을 도발할 때면 프린츠가 받는 체벌에는 감정적인 화풀이가 섞이기도 했다.
도서관 외벽의 화단은 아빠와 여동생을 걱정시키기 싫어서 그가 힘들게 찾은 그만의 장소였다. 인적이 뜸하기에 아무도 찾지 못하리라 자신했다.
그러나 사람 대신 웬 천사님이 그를 찾아낸 모양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근처의 창틀에 그의 이름이 적힌 과자 주머니가 매일 놓여 있었다.-대체 누굴까.답례로 편지도 써서 올려놓고 풀꽃으로 된 화관도 올려놓았으나 답신은 없었다.
결국 프린츠는 천사님에 대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화단 아래 몰래 매복을 했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자그마한 손이 쿠키 주머니를 내려놓고 사라지는 것을 보고, 다급한 마음에 붙잡아 버렸다.
그리하여 알게 된 사실은, 감히 자신이 모시는 어린 아가씨의 손목을 잡아버렸다는 것이었다.-아, 아가씨?!
-……아프니까 놔줄래?
-죄, 죄송합니다. 그런데 쿠키를 주신 천사님이 아가씨일 줄은……. 어째서…….
-어리석은 오라버니 때문에 네가 고생하고 있으니까. 길레트 백작가의 차기 가주로서 책임감을 느꼈을 뿐이야.
-안 그러셔도 되는데……. 그보다 죄송해요.
-뭐가?
-아가씨인 줄도 모르고, 풀꽃 같은 시시한 걸 답례라고 드리고……. 너무 부끄럽네요. 버, 버리셨죠? 하하.
-안 버렸는데.
-다행…… 네?
-예뻐서 잘 말려놨어.
-…….대답하는 비안카는 살며시 웃고 있었다. 드물기에 더욱 값진 미소였다.
상냥한 귀족 아가씨라는 존재는 뭇 소년들의 첫사랑이 되기 충분하지 않던가. 프린츠도 이런 고전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어린 소년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더랬다.
사실 기사가 되고 싶은 꿈에도 비안카의 영향이 컸다. 비록 평민이지만 기사 작위를 받으면 비안카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어쩌면 그녀를 지키는 호위 기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꿈을 품었다.
그리고 그의 꿈은 이루어졌다. 망나니 도련님의 폭력 사태를 계기로 재능이 발견되어 카르멜 자작에게 검술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만족하려고 했는데…….-사실 오빠 왕족 비슷한 거 맞아. 오빠랑 나, 히스펜릴 공왕의 손주거든.당시에는 너무나 충격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서는 기쁨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귀족이면.
자신이 귀족이면.
비안카의 곁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계기를 얻은 바람은 금세 부풀었다. 제 안에 그런 강한 욕망이 있었다는 사실에 프린츠 스스로가 놀랄 정도였다.
그리고 이제 가문까지 받쳐주는 기사가 되었으니, 명문 길레트 백작가에 혼담을 넣는다고 해서 비안카에게 모욕이 될 일은 없을 터였다.
‘올해가 가기 전에 프러포즈할 거야! 반드시!’
마침 테실리드도 프린츠에게 자신감을 북돋는 말을 했다.
“프린츠 경께서는 기사들의 귀감이시니 프러포즈 받는 분은 굉장히 기쁘시겠군요.”
“그, 그럴까요?”
세상 선한 얼굴로 하는 말은 아부가 아니라 진심 어린 찬사로 들렸다. 어쩔 수 없이 또 테실리드에 대한 호감이 고개를 들려던 때였다.
그런데!
“예, 데릴사위를 원하는 비안카 길레트 소백작 같은 여성분만 아니라면요.”
“……네?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아, 모르셨습니까? 아이가 그러던데요. 길레트 소백작이 원하는 신랑감은 작위 계승권이 없는 차남 이하의 영식이나 평민이라고 말입니다.”
“……!”
“그러고 보니 최근 셀레스티드 국왕 폐하께서 전해주신 편지에 의하면, 요즘 왕실 사교계가 길레트 소백작의 부군 자리를 놓고 경쟁이 치열하다고 합니다.”
다음 순간, 세상의 모든 선량함을 모아서 빚은 듯한 얼굴로 테실리드가 프린츠를 확인 사살 했다.
“하지만 프린츠 경께서는 히스펜릴 공작가를 이으셔야 하니, 데릴사위는 절대 될 수 없지요.”
“자, 자, 자, 잠깐만요!”
“예, 프린츠 경.”
“제, 제가 왜 공작가를 잇습니까? 오러 마스터 여동생이 있는데요?!”
4인용 테이블이 잠시간 조용해졌다. 서먹한 공기가 주는 의미는 명백히 ‘그걸 몰라서 물어?’였다.
잠시 후, 레오날드, 히스펜릴 공왕, 테실리드가 사이좋게 나누어서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야 린츠, 네가 우리 집안의 맏이이기도 하고.”
“우리 작은 아가는 언령교의 교황이잖느냐.”
“교리상 결혼은 가능해도 작위 계승은 곤란합니다. 교황은 환속이 힘들거든요.”
“……!”
그제야 비로소 충격과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귀족이 되었다고 좋아할 일이 전혀 아니었다!
이어서 프린츠의 두뇌가 맹렬히 돌아가며 이 일생일대의 위기를 모면할 방법을 강구해냈다.
‘작위를 떠넘겨야 해! 아일렛한테!’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 있다.
“매제!”
레이윈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것이다. 히스펜릴 가문에도 데릴사위가 필요할 테니까. 그리고 데릴사위 조건에는 누나가 이미 왕위를 계승해 버린 선왕자님이 딱이다!
별안간 덥석 잡힌 손에 테실리드가 당황했다. 하지만 그의 입은 충실했다.
“형님?”
손뼉을 마주쳐주듯 올바른 부름을 돌려주자 프린츠가 반색했다.
“네, 매제! 제가 생각해 보았는데 공작위는 매제 부부 쪽이 계승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예? 하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아이는 환속 문제가…….”
“저희 할아버지는 창창하십니다! 증손주가 작위를 계승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 주실 겁니다!”
“…….”
테실리드가 아무 말도 없자 프린츠는 초조해졌다. 필사적인 설득을 위해 그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속물적인 소리까지 주워섬겼다.
“자, 잘 생각해 보세요. 교황직은 계승이 되지 않지만 공작위는 계승이 됩니다. 아이와 매제의 소중한 자녀에게 공작위 정도는 물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
이제껏 굳은 듯했던 테실리드가 마침내 반응했다.
“자녀……. 아이와 저의…….”
공작위는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었다. 심금을 울리는 단어를 되뇌는 테실리드의 눈빛이 조금 멍했다.
그는 현재 머릿속으로 분홍 머리에 바다색 눈동자를 가진 딸, 은발과 페리도트 색 눈동자를 가진 아들을 상상해 보는 중이었다.
“아니, 다들 공작위에는 관심이 없는 게냐…….”
히스펜릴 공왕이 한탄했을 그때였다.
“응? 다들 무슨 대화를 그렇게 재밌게 해?”
“엘테아! 마침 잘 왔다. 이 애비는 슬프구나. 왜 이리 다들 공작위를 싫어할꼬. 이러다 우리 가문의 대가 끊기겠다!”
프린츠도 나섰다.
“엄마, 저 부탁 있는데 공작위 잠깐만 받아주실 수 있으세요? 손주가 다 클 때까지면 되는데요!”
“……아니, 지금 다들 뭐라는 거야? 레오, 설명 좀 해줄래?”
“하하하…….”✠테이블 내에서의 사교를 충분히 마친 사람들이 자리를 옮겨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연회장의 빈 공간과 연회장 바깥의 중정에서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자유로워진 분위기를 틈타 테실리드도 아일렛을 찾아보기로 했다.
‘길레트 소백작과 함께 정원으로 간 것 같았는데.’
여름을 보낸 정원수들은 풍성한 초록을 자랑했다. 잘 다듬어진 생울타리 사이를 홀로 걸으며, 코끝으로 맑고 촉촉한 공기를 들이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전날 내린 비로 깨끗해진 대기가 폐부마저 씻어내 주는 듯 상쾌했다.
그러나 이런 좋은 기분은 얼마 가지 못했다. 그의 뒤를 밟는 기척을 느낀 탓이다.
상대는 별로 제 존재를 감출 생각이 없는지 테실리드를 불렀다. 그것도 퍽 애틋한 음성으로.
“형.”
“…….”
테실리드는 일전에 성 아그네스 교회 뒤뜰에서 라비오사와 마주쳤을 때와 같은 실수를 해버렸다. 반응하지 말아야 할 부름에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춰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