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316)
기왕 이렇게 된 거,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제껏 그래 왔듯이 그는 칠주선과 칠죄종의 규율에 끌려가 주기로 했다.
마음 없이 친절을 발휘한다.
“제게 용무가 있으십니까, 선왕자 전하?”
“…….”
소년과 청년의 경계선에 있는 백금발의 왕족이 숨을 끊어 쉬었다. 그리고 울 듯한 얼굴을 애써 고쳐 웃어 보이며 말했다.
“역시 리가라고는 안 불러주는구나.”
“…….”
“괜찮아. 그래도 형이라고 불렀을 때 돌아봐 줬으니까…… 충분해.”
전혀 충분하지 않은 얼굴로 충분하다 스스로를 세뇌시키듯 말한다.
다른 시간선에서는 그토록 악독하기만 했던 자가 지금은 테실리드의 말 한마디, 표정 한 조각, 눈빛 한 자락을 구걸하듯 굴고 있다.
테실리드는 이 간극이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적응할 생각이 없기도 하고.
이런 무심함은 도리어 테실리드의 선량한 성품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름만 불러줘도 황홀해할 상대를 휘두르며 가지고 노는 것은 얼마나 쉬울 것인가.
만약 테실리드가 선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감정적 우위를 이용하여 리가레스를 진창에 처박고도 남았을 것이다.
“외람되오나 전하와 오래 마주하고 싶지 않군요.”
“……전달할 물건이 있어서 왔어. 셀레스티드 누님이 준 거야.”
“국왕 폐하께서?”
공적인 일인가 싶어 테실리드는 즉시 태도를 고쳤다. 리가레스는 역시 누님의 이름을 팔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품에서 고급스러운 벨벳 상자를 꺼냈다.
“형이 직접 형수한테 전해줘. 단둘이 있을 때. 기왕이면 잘 차려입고.”
퍽 진중한 당부에 돌아온 대답은 담백했다.
“알겠습니다.”
“……이게 뭔지는 안 물어봐?”
“제가 알아야 하는 물건입니까?”
“어, 그러는 편이 좋을걸.”
그제야 테실리드는 이게 공적인 임무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용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는 리가레스의 눈짓에 조심스럽게 벨벳 상자를 열었다.
“이건…….”
햇살 아래 드러난 것은 굵은 핑크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반지였다.
“왕가의 가보 중 하나야. 이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아서.”
“이 정도는 되어야 하다니?”
“형수가 아직 형한테 청혼 못 받았다고 엄청 속상해하던데.”
“…….”
테실리드는 두 가지 사실에서 뜨끔했다. 청혼 못 했다는 사실을 들켰다는 것과 아일렛이 엄청 속상해했다는 것이 그 가슴에 깊게 박혔다.
“아이가…… 그랬습니까?”
“응.”
물론 리가레스는 얼굴색 변화 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그러니까 이거 들고 가서 프러포즈 해, 형.”
테실리드는 영롱하게 빛나는 핑크 다이아몬드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아까 모리피스가 아일렛에게 수작을 부릴 때 꺼냈던 반지보다 훨씬 귀해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다이아몬드의 빛깔은 저절로 아일렛을 떠올리게끔 하는 아름다운 색감이었다.
테실리드가 보기에도 이것만 한 청혼 반지는 세상에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만…….
“프러포즈 반지는 제가 직접 마련해야 의미가…….”
“형, 성기사 봉급으로는 이런 반지 못 사.”
“그렇다 한들, 빈체스터 왕가의 가보를 제가 받을 이유도…….”
“있지! 세상을 구한 영웅한테 보물을 내리는 게 뭐가 이상해?”
리가레스는 영리하게도 테실리드가 왕족이니까 받을 자격이 있다는, 씨알도 안 먹힐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영웅 연금이라고 생각해.”
“아.”
심지어 설득력까지 갖춘 이유에 테실리드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답 없이 회귀하던 예전이야 신실하고 금욕적인 성기사로서 물욕을 성욕만큼이나 멀리했으나, 아일렛을 만난 지금의 그는 달랐다.
제 성기사 봉급을 모조리 주겠다고 말했을 때 순간적으로 반짝임을 숨기지 못했던 페리도트 빛 눈동자와, 267만 골드를 벌어온 일로 나중에 그녀가 퍼부어준 칭찬 세례가 그를 학습시켰다.
‘많이 벌어올수록 아이가 좋아하겠지.’
그리고 계속 보다 보니 저 분홍색 왕가의 가보는 아일렛 로델라인을 위해 존재하는 반지인 것 같았다. 이쯤 되자 그녀의 손가락에 꼭 끼워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께 감사하다 전해주십시오.”
“응, 알았어!”
심부름꾼인 리가레스가 왜 이리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테실리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반지 상자를 품에 챙겨 넣었다.
“용건은 끝난 것 같군요. 그럼 먼저 지나가십시오, 선왕자 전하.”
“아니야. 나는 형 가는 거 보고 갈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먼저 가십시오.”
“형 먼저…….”
옥신각신하게 되는 상황에 테실리드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리가레스.”
“……!”
새파란 눈이 커졌다. 환청이 아니었다는 듯이 테실리드의 차분한 음성이 계속해서 공기를 울렸다.
“유감이지만 나는 너와 형제가 되기는 힘들어. 설령 유년시절의 기억을 회복한다 해도 마찬가지일 거다.”
“…….”
“너로선 이해되지 않겠지만, 내가 살아온 삶이 너를 받아들이기 어렵게 해. 그러니 부질없는 수고는 그만둬. 보답받지 못할 테니까.”
“……형.”
작은 부름이 전부였다. 리가레스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한참 동안 제자리에 못 박혀 서 있었다.
테실리드는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전하.”
부러 냉랭히 뒤돌아선 테실리드가 자리를 벗어났다.
등 뒤의 리가레스가 멀어질수록, 복잡한 심정을 대변하듯 미남자의 무표정이 조금 무너진다.
이번 시간선에서 리가레스가 테실리드에게 저지른 잘못은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작다. 그러나 수십 개의 시간선을 살며 축적된 기억들을 배제하고 리가레스를 대하기에는, 이제껏 테실리드가 당한 일들이 너무 가혹했다.
눈앞에서 애틋한 표정을 짓는 동생의 모습 같은 건, 과거에 제 심장에 칼을 박아 넣던 오만한 왕자의 기억에 압도되어 버리고 만다. 허망할 정도로, 쉽게.
테실리드는 리가레스를 용서하지 못할 만큼 끔찍이 고통받았으며, 또 한편으로 그는 그 꼴을 겪고도 리가레스를 가해하고 싶지 않을 만큼 지독히 선했다.
그래서 타협점을 세웠다. 서로 엮이지 않고 철저한 타인으로서 관계없이 살기를.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잠깐의 마주침만으로 급격히 피로해짐을 느낀다.
‘아이가 보고 싶어.’
어서 그녀의 얼굴을 보고 회복해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제비를 뽑았던 손끝과 달리 걸음을 걷는 발끝에는 사랑의 힘이 깃든 모양이었다.
곧 그는 정원 한 곳에서 그녀를 마주할 수 있었다.
“테리?”
“아이.”
“혼자 여기는 어쩐 일이야?”
그러는 아일렛 역시도 혼자였다. 연회장에서 같이 나갔던 비안카는 곁에 보이지 않았다. 단둘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몹시 기꺼웠다.
아무튼 테실리드는 묻는 말에 뜸 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녀의 앞으로 성큼 다가가, 속삭이듯이.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연회장에서부터 그녀를 뒤따라 나왔다는 구구절절한 사실은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건 너무 집착하는 것 같으니까.
역시나 아일렛은 테실리드가 보고 싶어하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훅 치고 들어오는 애정 고백 같은 말에 그녀는 신록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떠주었다. 깜빡임조차 잊고 저를 보는 얼굴이 너무도 사랑스럽다.
당장 눈가에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사이, 그녀도 정신을 차렸다.
“아, 같은 수법인데 난 왜 매번 당하지.”
“수법이라니.”
“그렇잖아. 그냥 일상적인 말인데, 왜 그렇게 절절하게 해서 사람을 두근거리게 해?”
“그야 그 말에 담긴 내 마음이 절절하니까?”
“…….”
“물론 일상인 건 맞아. 네가 내 삶이지.”
“……뭐지, 로판인가.”
멍하니 되뇌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발그레해진 뺨을 보니 그에게 좋은 쪽인 것은 분명하다.
“그나저나 아이, 네 테이블에서 소란이 좀 있었던 것 같은데.”
“아, 그거. 별일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연인이 웬 미치광이에게 프러포즈를 받았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겠나.
살짝 야속함을 느끼는 사이 그녀가 주제를 회피하려 했다.
“그러는 테리 너는 테이블에서 별일 없었어?”
“가족 식사 자리에 별일이 있을 리가.”
“우리 오빠가 갑자기 너한테 엄청 친근하게 구는 것 같던데? 어떻게 오빠를 꼬신……, 아니 오빠의 호감을 산 거야?”
“글쎄…….”
프린츠가 본인의 입장상 비안카의 부군 자리에 입후보할 수 없다는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도록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요약하면 되었지만, 테실리드는 아까 느낀 야속함이 아직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자그마한 심술이 돋아났다.
테실리드가 아일렛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테리……?”
잘생긴 얼굴이 가까워져 오자 아일렛이 살짝 당황한다. 키스할 법한 거리까지 접근하여 긴장감이 최고조가 되었을 때, 테실리드는 돌연 담백하게 태도를 선회하여 이마를 콩 마주 대었다. 은빛과 분홍빛의 머리카락이 서로 어울리듯 섞였다.
“네 말대로 되었나 보지. 온 세상이 나를 사랑하나 봐.”
“…….”
“그렇지? 나의 세계.”
“……아, 진짜 또.”
목을 울린 매력적인 웃음소리에 아일렛은 놀림당했음을 깨달았다.
작게 투덜거리던 그녀는 이내 테실리드의 이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금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해 주다가 무슨 충동이 들었는지 슬쩍 뒤로 빗어 넘겼다.
테실리드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그녀가 감상을 말했다.
“앞머리를 까셔도 잘생기셨네요.”
“좋아?”
“응.”
“그럼 많이 보고, 많이 좋아해 줘.”
이번에는 두 사람 몫의 웃음소리가 공기를 흔들었다.
그때였다.
“…….”
“…….”
두 사람은 정말로 서로의 머리칼을 정리해 준 뒤 반듯하게 섰다.
“돌아가자, 아이.”
“응, 테리.”
연회에 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