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319)
외전 2장. ‘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성견(聖見)을 허락합니다.
“휴가다, 휴가! 가자, 테리!”
교황 즉위식이 있었던 날로부터 사흘 뒤.
나와 테실리드는 마침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공간 전이석을 부쉈다.
아득한 부유감이 사라지자 푹신한 풀밭을 밟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오두막집 앞에 서 있었다.
“후우.”
새삼스레 이곳이 여러모로 의미와 추억이 깊은 장소라는 것을 깨닫는다.
엄마와 아빠가 살았던 신혼집.
기억과 힘을 잃은 117회차 테실리드를 구해서 데려온 안전 가옥.
성황청과 왕성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마다 왔던 도피처.
그리고 혼돈 신릉을 헤맨 끝에 찾은 출구와 연결된 안식처.
안온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장소이기에, 그와 나의 표정이 저절로 부드럽게 풀렸다.
“오랜만이군.”
“그러게.”
혼돈 신릉에서 살아 돌아온 직후에는 성 아그네스 교회에 머물면서 교단을 정비하고 교황 즉위를 준비하기에 바빴다.
때문에 오두막집에 다시 온 것은 무려 3개월 만이었다.
그래도 그간 할아버지가 사람을 보내 관리를 해주신 덕분인지 집은 깨끗했다.
텃밭도 정성스럽게 가꾸어져 있고 나무 벽과 지붕도 매끈하게 수리되어 있었다. 손볼 곳이라고는…….
‘으음, 울타리를 옮겨서 마당을 넓히기만 하면 되겠네. 벚나무를 심어야 하니까.’
봄에 집에서도 벚꽃 구경을 할 수 있도록 해야지.
[‘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본격적인 감금 준비에 눈을 빛냅니다.] [‘균형을 조율하는 독설가’가 테실리드 아르젠트의 인생은 왜 여전히 장르가 피폐물이냐며 혀를 찹니다.]‘그런 거 아니거든요!’
나는 극구 부정했지만, 짓궂은 빙의신들은 내 격한 반응에 도리어 놀릴 맛이 난다며 좋아할 뿐이었다.
“들어가자, 테리.”
나는 성큼성큼 앞장서서 울타리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잡아주는 동안 테실리드는 문턱 앞에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갑자기 왜 웃어?”
“그냥, 좋아서.”
“얼른 들어와.”
“응.”
오두막집은 안쪽도 사람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은 듯 깔끔했다.
필요한 물품들은 다 갖춰져 있었지만, 우리가 따로 가지고 온 짐들을 정리하는 작업은 필요했다.
나와 테실리드는 우선 각자 옷부터 편하게 갈아입고 거실에 마주 앉았다.
인벤토리에서 가재도구를 하나씩 꺼내며 내가 포부를 밝혔다.
“당분간 여기서 놀고 먹고 자기만 해야지. 그렇게 보름쯤 하다가 질리면 길레트 백작성에 놀러 가자. 농장 식구들 보러.”
수건을 각이 지도록 반듯하게 개던 테실리드가 놀란 눈을 했다.
“놀러 간다고?”
“왜? 문제 있어?”
“이 집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못 나오는 줄 알았는데.”
아니, 얘까지 왜 이래.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생겼다.
“아까 그런 비장한 각오로 문턱을 넘은 거였냐고.”
“딱히 비장하지는 않았고…….”
“그럼?”
내가 별생각 없이 되물었을 때였다.
테실리드가 또 자신의 잘생김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이.”
“…….”
“난 너와 있으면 다 좋으니까.”
“…….”
“아주 작은 세계가 내 전부여도 괜찮아.”
“…….”
여기서 황홀함에 넋을 잃는 건 불가항력이지 않을까.
나는 대꾸를 잊은 채 테실리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나를 깊게 응시하는 눈의 이채가 유난히 아름다웠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색채를 보며 역시 여기에 여름의 바다가 있구나 생각했다.
나는 하마터면 그의 왼쪽 눈에서 오른쪽 눈으로 헤엄치는 한 마리 열대어가 될 뻔했다가 신들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시련의 마천루 건축가’가 방금 테실리드의 발언은 폐쇄은둔족(히키코모리) 같았다고 평가합니다.] [‘균형을 조율하는 독설가’가 자기가 무슨 집고양이인 줄 아냐며 혀를 찹니다.] [‘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기왕이면 집이 아니라 침대로 활동 범위를 더 좁혀도 될 것 같다고…….]아, 좀! 그만요!
그런데 나만 정신을 차린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내가 그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그 역시 환각의 초록 들판에서 뒹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
시선의 축을 이은 상태로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져 왔다. 초점거리 안쪽까지 침범해 온 직후 그가 살며시 은색 속눈썹을 내리깐다.
반개한 바다색 눈동자가 보내오는 눈빛이 그윽하게 나를 홀리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코끝에 숨결이 섞이기 직전에 이른 순간…….
“…….”
“…….”
“……이따 봐요.”
“……살펴 가십시오.”
정말 단둘이 되었고 자세도 그대로였으나 유감스럽게도 분위기는 환기되어 버렸다.
“풉.”
나와 테실리드는 동시에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코끝만 살짝 비비고 멀어진 그가 웃으며 말했다.
“우선 정리부터 끝낼까?”
“그러자, 테리.”
함께 짐 정리를 마친 후에는 역할을 분담해서 집안일을 했다.
나는 부엌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테실리드는 마당에 있는 아름드리나무에 그네를 설치하러 나갔다.
[‘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양손으로 턱을 괴고 당신들의 신혼을 구경합니다.] [‘만상의 혼돈을 감시하는 눈동자’가 꽃 자수 손수건을 잘근잘근 물어뜯습니다.] [‘시련의 마천루 건축가’가 SS급답지 못한 평화로운 일상에 지루해합니다.] [‘균형을 조율하는 독설가’가 던전 버스트나 던전 싱크가 일어나길 학수고대합니다.]커다란 햄을 얇게 썰며 신들의 말을 흘려듣던 나는 문득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뭔가 허전하다.
뭘까.
대체 뭐지.
그렇게 열심히 고민한 끝에.
“아, 맞다!”
이유를 알아차렸다.
‘언령님? 언령님 안 계세요?’
오두막집에 공간 전이했을 때는 물론이고, 오늘 아침부터 언령님의 메시지를 한 번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역시나 언령님은 대답이 없었고, 다른 신이 근황을 알려주었다.
[‘시련의 마천루 건축가’가 ‘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은 잠시 뒤에 예정된 특별 접견을 준비 중이라고 말합니다.]오오, 특별 접견이라니. 엄청 중요한 상대를 만나시나 보다.
순간 떠오른 것은 빙의 관리국의 회장, 클리셰 미식가님이었다. 그러나 내 추측은 바로 부정당했다.
[‘균형을 조율하는 독설가’가 회장을 접대할 때도 이 정도로 꽃단장을 하진 않았다며 혀를 내두릅니다.] [‘시련의 마천루 건축가’가 오늘 굉장히 힘을 주는 것 같다며 동의를 표합니다.] [‘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그렇게 애써봐야 잘생겨질 것 같냐며 비웃습니다.] [‘만상의 혼돈을 감시하는 눈동자’가 외모 폄하에 움찔합니다.] [‘균형을 조율하는 독설가’가 우리 본부장은 까도 우리가 깐다고 항의합니다.] [‘시련의 마천루 건축가’가 ‘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은 객관적으로 봐줄 만한 남신이라고 주장합니다.]난 여기서 꽤 놀랐다.
‘언령님이 남신이었어요?’
[‘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배 나온 부장님을 상상하면 된다고 음흉하게 말합니다.] [‘창조경제 관리자’가 머리도 벗겨져서 번쩍번쩍하다고 능청스럽게 말합니다.] [‘만상의 혼돈을 감시하는 눈동자’가 이게 바로 본부장들 간의 알력 다툼이냐며 놀랍니다.]이제 내 반응을 돌려드릴 차례다.
‘그렇군요. 어쩐지.’
[‘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눈을 빛냅니다.] [‘창조경제 관리자’가 눈을 빛냅니다.]나는 양손으로 불끈 주먹을 쥐고 밝게 웃었다.
‘푸근한 성품과 빛으로 가득한 말씀이 어디서 기인했나 싶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군요!’
배 나오고 머리 벗겨진 부장님이 뭐 어때서? 나는 우리 언령님이 어떤 모습이라도 좋다!
[‘만상의 혼돈을 감시하는 눈동자’가 당신의 넓은 포용력에 감탄합니다.] [‘균형을 조율하는 독설가’가 이 정도는 되어야 ‘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의 신도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영혼을 심판하는 천칭’이 맹목적인 신앙심에 눈꼴셔합니다.]넓적한 타원형 그릇에 생크림, 치즈가루, 감자, 햄 등을 담아 화덕에 넣었다.
그라탱이 완성되기까지 오래 걸리기 때문에 그동안 몇 가지 요리를 더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토마토 슬라이스를 오븐 트레이에 배열한 뒤 올리브 오일을 뿌리고, 겉이 딱딱한 롤빵의 속을 파내서 베이컨, 그릭 요거트, 달걀을 넣었다.
요리가 거의 다 완성되어 식탁이 제법 풍성해졌을 때였다.
“아이, 그네 설치 끝냈어.”
“응, 테리. 고생했…… 뭐야, 너 옷이 왜 그래?”
깔끔한 차림으로 나갔던 테실리드가 웬 털을 잔뜩 묻혀서 돌아왔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가 털옷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집 근처에 고양이 한 마리가 사는 것 같아. 그네를 설치하는 동안 무릎 위에 올라오길래 귀여워서 내버려 뒀는데…… 털갈이 중이었나 봐.”
이건 용서할 수 없었다.
“너무해, 테리.”
“……아이?”
“고양이를 너 혼자만 봤어? 왜 나 안 불렀어? 진짜 실망이야.”
“미안. 다음엔 같이 보자.”
“알았어.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와.”
“응.”
다시 돌아온 테실리드는 왜인지 아까보다 잘생겨진 느낌이었다. 기분 탓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집 안에서 으레 하고 다닐 법한 가볍고 편한 차림이 아니라, 자수가 놓인 베스트에 크라바트까지 꽉 갖춰 입은 모습은 어디 데이트라도 하러 가는 듯했다.
내가 의아한 눈으로 보자 테실리드는 꽃병으로 센터피스를 장식하는 척 딴청을 부렸다. 눈빛을 피한다면 직접 묻는 수밖에 없다.
“갑자기 그 차림은 뭐죠, 테실리드 아르젠트 씨?”
“……옷이 이것밖에 없어서.”
“그럼 머리는 왜 뒤로 넘기셨는데요? 잘생긴 이마를 굳이 보여주실 이유가?”
“……앞머리가 눈을 찔러서.”
뭐야, 이 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