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33)
33화
‘그럼 다른 회차에서는요?’[‘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회귀 세계’가 개연성을 무시한 채 당신의 존재를 삭제한다고 대답합니다.]‘주인공의 기억에서도요?’[‘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회귀의 축’과 ‘회귀 세계’는 별개라고 말합니다.]“아…….”
회귀 세계는 변해도 회귀의 축은 변하지 않는다. 즉, 주인공은 나를 기억한다.
그러나 나는 긍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언령님의 설명에 따르면 17회차를 제외한 모든 회차에서 나는 없는 존재가 된다.
나를 기억하는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세계관 전체에게 가스라이팅 당하는 셈 아닌가.
이러다 주인공 미치는 거 아니야?[‘천기누설 감찰관’이 튜토리얼 기간에 제멋대로 굴면 안 되는 이유를 좀 알겠냐고 혀를 쯧쯧 찹니다.]끙.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네가 뭔데 우리 신도 기를 죽이냐는 언령님과 느그 신도 똑바로 교육시키라는 감찰관님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비안카가 무덤의 묘비 구경을 마치고 돌아왔다.
“히아스는 하루 종일 비석 앞에 쪼그려 앉아 있고, 아가판은 돌이 닳도록 먼지를 닦고 있어. 다른 해골들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아. 에피덴이 대표로 감사하다고 너한테 전해달래.”
“잘됐다.”
비석을 세워주면서 일곱 해골들의 이름도 지어주었다. 나와 비안카가 고심한 끝에 꽃 이름에서 따왔다.
히아신스의 히아스, 아가판서스의 아가판, 에피덴드롬의 에피덴 등등.
참고로 내가 재배 스킬을 선물해 준 두개골 미인이 바로 에피덴이다.
그나저나 비안카는 해골들의 말을 참 잘 알아듣는구나. 언제 봐도 신기하네.
문득 비안카에게 부탁해야 할 것이 생각났다.
“비아, 성수를 좀 구해줄 수 있을까?”
“성수를?”
엘리판티페스를 키우려면 신성력 투입이 필수다.
내가 신성력을 각성하면 직접 만들면 되지만 그건 앞으로 943일 후에나 가능할 일이다.
물론 신열병으로 앓아눕지 않았을 때 기준으로.
“공을 많이 들여야 하는 약초구나.”
“응, 그럴 가치가 있지.”
대역병 치료약의 핵심 재료니까. 지금부터 얼마나 번식에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비안카가 다스릴 길레트 영지에서 쓸 만큼의 수량은 확보해야지.
내 의욕을 느낀 듯 비안카가 좋은 소식을 들려주었다.
“포션 상회는 준비가 끝났어. 유통 경로하고 납품할 상점도 다 뚫어놨으니 물건만 있으면 돼.”
“벌써? 상회 조직해야겠다고 말한 지 한 달 된 것 같은데.”
“재무관 도움을 받으니까 금방이던걸. 마침 후계자 수업에 상업이 포함되더라고. 아버지께 수업의 일환으로 상회를 꾸려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자금을 대주셨어.”
대단한 수완과 추진력에 타이밍까지 더해졌다.
감탄하는 내게 비안카가 쪽지를 내밀었다.
“첫 주문량은 이 정도……. 납기는 보름 후 어때?”
“해볼게!”
이 정도 판을 깔아줬으니 무조건 하는 게 맞았다.
“오늘 로델라인 씨에게도 재무관을 통해서 이야기해 둘게. 아이가 아직 어려서 보호자가 대표를 해야 하잖아.”
“그렇지.”
“으음, 생각해 보니까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하면 바빠져서 오전 주방일도 힘들겠네. 이것도 내가 조치해 둘게. 페이샤 주방장이 섭섭해하지 않게 따로 인사만 해둬.”
“으아, 비아……. 이것저것 다 챙겨주고, 정말 고마워!”
“……뭘 이 정도로.”
감동에 못 이겨 포옹했더니 비안카의 목소리가 조금 수줍어졌다. 똑똑한데 귀엽기까지 해.
그때 재배 능력을 각성한 해골, 에피덴이 할 말이 있는지 이쪽으로 다가왔다.
달그락달그락! 달달달그라락!
열심히 손짓과 발짓을 섞어가며 격하게 턱관절을 움직이긴 하는데…….
으음, 뭐라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미안.
비안카가 통역해 주었다.
“곧 던전 농장에 겨울이 찾아올 거래. 추위에 대비가 필요하다는데?”
“그걸 알아들어?”
“달달달 떠는 것 봤잖아.”
달달달그라락이 그런 뜻이었나.
내가 놀라는 와중에도 비안카와 에피덴의 소통은 계속되었다.
“에피덴이 농장의 겨울은 살 떨리게 춥대.”
“살도 썩어서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알……. 음, 말이 심했네. 아무튼 농사에 지장이 생길 거란 소리지?”
“응. 온실이라도 만들어야 할까? 어쩌지?”
“걱정하지 마. 마침 좋은 걸 주워 왔으니까.”
“좋은 거?”
나는 의기양양하게 사첼백을 뒤적였다.
짜잔 하고 비안카와 에피덴의 눈앞에 꺼내 보인 것은 바로…….
“숯 조각?”
“지옥염화의 핵이야.”
남쪽 별관 만찬회장의 벽난로에서 주웠다.
언령님의 말에 따르면 이 지옥염화는 특이하게도 ‘타락한 악마’라고 한다.
악마 주제에 악업에 관심이 없는 녀석이니 위협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악마는 악마니까, 깨워서 상태를 보고 쓸지 말지 결정해야지.”
나는 숯처럼 생긴 핵에 불을 붙였다.✠채식주의자 지옥염화, 헬베로스는 따스한 기운에 이끌려 천천히 의식을 차렸다.
천만다행으로 소멸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핵에 큰 타격을 입은 후유증은 컸다.
헬베로스는 향년 300살이었으나 지금 그의 몸체는 50살 규모의 작은 촛불이 되어버렸다.
50살이면 갓난아기나 마찬가지였다. 이러다 입을 열면 응애 소리가 나오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응애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이 어눌하게 나왔다.
300년간 축적된 힘과 격이 이렇게 사라져 버리는가. 조금만 더 견디면 인간화도 할 수 있었는데. 서러워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배고프다고?”
지척에서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각이 퇴화된 것처럼 주변이 흐릿했기에 헬베로스는 누구인지 몰라 경계하며 웅크렸다.
그때 불꽃 위로 무언가가 솔솔 뿌려지며 헬베로스의 불꽃에 타닥타닥 탔다.
은은하게 퍼지는 이 향긋한 냄새는 분명 말린 풀. 채식이다.
경계심도 잊고 게걸스레 먹어치웠다.
“되게 잘 먹네, 얘. 약초 찌꺼기 한 자루를 벌써 다 먹었어.”
“크기도 주먹만 해졌어. 쑥쑥 크네.”
“뭔가 애완동물 같다.”
“오구오구 해볼까?”
“안 돼, 비아. 물 수도 있어.”
여자애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던 모양이다.
시력이 조금 돌아와 어렴풋한 덩어리와 색깔은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분홍색 여자아이가 약초 부산물을 잘게 부숴서 주며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악마를 앞에 두고도 태연한 태도. 상대가 어떤 고위 악마일지 몰라 헬베로스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래, 헬붸로쑤. 오르슈 저택 던전은 클로징되어서 못 돌아가.”
“하긴 오르슈 저택에서 네 대접이 좋아 보이진 않았어. 네 핵, 벽난로에서 굴러다니던 걸 내가 챙겨온 거거든. 그냥 뒀으면 저택이 클로징될 때 마계의 쓰레기장으로 떨어졌겠지.”
마계의 쓰레기장이라니, 거긴 엄청 춥다고 소문난 곳이었다. 상상만 해도 무서웠다.
“……얘는 울면 불꽃이 납작하게 처지면서 수증기가 많이 나오네.”
“어깨 늘어뜨리는 것 같아. 귀엽다. 귀여우니까 더 먹어.”
검은 여자아이가 내미는 길고 얇은 줄기를 야금야금 먹었다. 손가락을 물지, 아니 화상 입히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분홍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여자애가 말했다.
“우리 비아가 널 마음에 들어하니까 특별히 네게 좋은 제안을 하나 할게.”
“너 땅속에 들어가서 지열 만들어내는 거 할 수 있다며. 그거 해주면 여기 농장에서 수확한 뒤 남는 부산물 다 너 줄게. 어때?”
그제야 헬베로스는 되찾은 시각으로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농장이 사방으로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었다.
여기서 나오는 약초 부산물은 엄청날 것이다.
그러잖아도 한쪽에 쌓여 있는 지푸라기들을 보니 동산을 셋이나 이루고 있었다.
헬베로스의 불꽃이 반짝반짝해졌다.
“응. 다 헬붸로쑤 꺼.”
이곳이야말로 헬베로스가 꿈에 그리던 직장이었다.
안 그래도 도시 생활에 지쳐서 귀농을 알아보며 이것저것 필요한 공부도 많이 했다.
까탈스러운 로드리고의 목욕물 맞추기로 훈련된 터라 섬세한 온도 조절도 잘할 자신이 있었다.
“좋아. 저기 두개골 예쁘게 생긴 해골이 에피덴이라고, 여기 관리인이거든. 말 잘 듣고 밥 많이 달라고 해.”
그렇게 아일렛의 던전팜에 식구가 늘었다.
빙의자를 위한 특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