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342)
그녀는 오두막집에서 나와 숲으로 들어갔다. 오늘 먹을 신선한 과일을 따러 가기 위해서였다.
“안녕, 얘들아. 좋은 아침이야. 뭐? 저쪽에 산딸기가 잔뜩 있다고? 알았어. 고마워.”
루미나는 토끼, 다람쥐, 노루 등 산짐승들과 반갑게 인사하며 숲속 깊이 들어갔다.
그녀는 엘프였으므로 숲은 항상 그녀에게 안온하고 편안한 장소였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느낌이 달랐다.
그녀의 발끝이 향하던 곳에서 살짝 비켜난 방향. 그곳에서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어둡고 음습한 기운과 불쾌한 피비린내가 미약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왠지…… 저쪽으로 가야 할 것 같아.’
피비린내는 질색이건만 충동은 강렬했다.
이 이끌림은 마치 그녀의 영혼에 새겨진 의무감과 같았다.
‘뭐지, 이 운명적인 느낌은? 도무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녀 대신 설명하자면 이랬다.
웬 무능한 비호감 이세계 남고생을 주워다가 호구처럼 먹이고 입히고 재우며 돌봐줘야 할 것만 같은 끔찍한 의무감!
그것이 세계의 강제력으로 인해 루미나에게 발현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가지 마세요.”
“……!”
스스로 지옥에 걸어 들어가려던 루미나의 걸음을 멈춰 세우는 음성이 있었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경계를 바짝 세우며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상대를 확인한 순간.
“어…….”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져 버렸다.
낯설지 않았으니까.
“그쪽은 위험해요. 가지 마세요.”
“…….”
매일같이 자신의 꿈에 나타나 미소를 흩뿌렸던 인간 남자가 눈앞에 실재가 되어 서 있었다.
그런데 꿈과는 사뭇 다르기도 했다.
몽환의 세계에서 남자는 분명 밝고 해맑게 웃고 있었는데,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남자는 물 먹은 눈동자로 그녀를 보며 애틋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초면인 사람에게 보일 만한 눈빛이 아니다. 마침 남자의 다음 말이 이 생각을 뒷받침해 주었다.
“제가 가서 살필 테니, 루미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을 하세요.”
“잠깐만요.”
“네?”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헉! 아! 그, 그건…….”
인간 남자는 당황했다. 루미나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용병 같아 보이는데, 저를 미행하라는 의뢰라도 받으신 건가요?”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니에요!”
“그럼 제가 안심할 수 있게 대답을 해주세요. 제 이름이 루미나인 것을 어떻게 아셨나요? 말해주지 않으면 저는 당신을 경계할 수밖에 없어요.”
“겨, 경계하지 마세요! 저는 수상하거나 위험한 사람이 아닙니다. 말, 말할게요.”
남자는 해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다.
좀 모자라긴 해도 위협이 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며 느긋이 사정 설명과 자기소개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게……. 그러니까 그게……. 제가 당신의 이름을, 어떻게 아냐면…….”
“…….”
“제가, 다, 당신을…… 어떻게…….”
“…….”
“어떻게, 모를 수가, 있…… 흡.”
어느덧 남자의 음성에 목메는 울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이내 초록 눈에도 두꺼운 물막이 씌어 버렸다.
난데없는 남자의 반응에 루미나는 당황했다.
‘아, 아니! 갑자기 왜 우는 건데!’
그런데 당황할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녀의 파란 눈에서도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왜?
대체 왜 자신이 울고 있지?
심지어 의식한 순간 둑이 터진 듯이 눈물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의지로 그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 몸이 통제를 벗어난 상황. 루미나는 닦아내는 행위가 무의미할 정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냥 내버려 두며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
“저를 아세요?”
울음을 필사적으로 참는 탓에 남자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몸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끄덕끄덕.
“그럼 여기에는 저를 만나러 왔나요?”
끄덕.
뻔한 질문과 뻔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다음 물음은 달랐기에, 루미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그녀의 입술이 소리 없이 몇 번인가 달싹거린 끝에 겨우 세 번째 질문을 입에 담았다.
“그럼 혹시…….”
“…….”
“혹시 당신의 이름이…….”
“…….”
“아스틴이에요?”
남자는 이번에도 목소리 대신 다른 것으로 답을 주었다.
엉망으로 일그러지는 남자의 표정이 소리 없는 오열을 담는다.
결국 참지 못하고 두 손에 얼굴을 묻은 그가 옹송그린 커다란 등을 마구 들썩였다.
그가 진정할 때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루미나는 조금도 채근하지 않고 조용히 그를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남자에게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고개를 들고 온 힘을 다해 힘껏 미소 지은 남자가, 지금까지 나눈 대화를 정리해서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미나. 아스틴……이라고 해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여기, 이 시간선에 왔어요.”
“……아.”
루미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제껏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 제 영혼은 애타는 기다림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그 기다림이 끝났다.
운명에서 벗어난, 운명 같은 재회였다.
✠
테실리드는 고해성사 후 라딘 사제가 준 보속을 해내는 중이었다.
즉, 나흘 동안 집안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집을 구석구석 깨끗하게 쓸고 닦는 것은 물론이며, 이불을 비롯한 침구류를 싹 다 빨아서 널어놓았고, 가재도구를 몽땅 꺼내서 새로 정리했다.
오두막집의 울타리, 지붕, 외벽에 조금이라도 상한 곳이 있다 싶으면 깔끔하게 보수를 하고 페인트도 새로 칠했다.
그러잖아도 끝없는 집안일을 적극적으로 찾아서 했으니 나흘이 아주 보람찼다.
지금도 테실리드는 하얗게 삶은 수건과 행주를 빨랫줄에 널고 있었다.
그러던 중 땅바닥을 뒹구는 아기 고양이 5형제를 발견했을 때였다.
바다색 눈동자에 반짝이는 이채가 감돌았다.
‘목욕시킬까……?’
마치 그의 눈빛을 읽은 것처럼 고양이들이 후다닥 도망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집으로 들어간 그는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치마를 두르고, 투명한 유리병을 늘어놓고, 각종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꺼냈다.
오래 보존되는 음식을 종류별로 만들어서 쟁여둘 생각이었다.
과일과 채소를 박박 씻고, 냄비에 끓이고, 설탕과 함께 졸이고, 채에 거르고, 유리병에 담아 밀봉하기를 반복했다.
꼬박 반나절을 노동한 결과, 식탁에는 잼, 마멀레이드, 피클을 담은 색색의 유리병이 십수 개나 쌓였다.
주황, 노랑, 초록, 빨강……. 과일과 채소가 가진 고유의 색이 유리병 안에서 반질반질 빛을 낸다.
보고만 있어도 색채치료가 될 듯이 예쁜 광경이었기에 테실리드도 제가 만들어놓고 제법 감탄했다.
‘아이한테도 보여주고 싶다.’
예쁜 것을 보면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에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
그에게 있어서 그 사람은 당연히 아일렛 로델라인이었다.
새벽 댓바람부터 해가 거의 질 때까지 집안일을 했으니 테실리드도 조금쯤 피로를 느꼈다.
그는 잠시 식탁 앞에 앉아 턱을 괴었다.
흐트러진 자세만큼이나 정신이 노곤했다. 안 그래도 반개한 상태였던 눈이 나른하게 풀려갔다.
저도 모르게 졸음에 살짝 취하려던 때였다.
달칵.
“……!”
기척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심장이 제멋대로 반응하며 기대감을 피워냈다. 그는 바로 문가를 살폈다.
하지만.
“……너희들이었구나.”
냐오옹. 미야아앙. 므아앙. 왜애앵. 뀨웅.
고양이 식구들이 위풍당당하게 집 안으로 입성해서 소란스레 울어댔다. 뭘 원하는지는 명료했다.
“기다려 봐. 간식 줄게.”
자리에서 일어난 테실리드가 찬장을 뒤적거렸다. 그제 잔뜩 만들어둔 건조 열빙어를 줄 생각이었다.
달칵.
“……!”
그때 또 문 열리는 소리가 테실리드를 시험했다.
그는 이번에도 조건반사적이다시피 출입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실망했다.
아무도 없었다. 문은 홀로 끼익끼익 천천히 움직일 따름이다. 아무래도 겨울바람의 못된 장난이었던 모양이다.
‘경첩과 잠금쇠도 손봐야겠어.’
실망을 집안일에 대한 의지로 갈음한 테실리드가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유리병 안에 든 건조 열빙어를 고양이 식구 수에 맞게 꺼냈다.
아니, 꺼내려 했는데.
후드득.
그는 손이 미끄러진 나머지 열빙어를 바닥에 잔뜩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등 뒤에서부터 기척 없이 뻗어 나온 두 팔이 그를 와락 끌어안았으니까.
“다녀왔습니다.”
“…….”
그리운 음성이 귀를 울린 순간 테실리드는 깨달았다.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온 것은 시린 겨울바람이 아니었다. 봄의 미풍이었다.
“많이 기다렸지?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나 줄 밥 차리는…… 아, 고양이 거네.”
“…….”
“흠흠. 아무튼 보고 싶었어. 나 없는 동안에도 잘 지냈지?”
“…….”
“테리?”
그가 대답이 없자 그녀의 목소리에 의아함이 실렸다.
테실리드는 말없이 제 허리에 두른 그녀의 팔을 조심히 풀어내고 정면으로 돌아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했다.
잘게 떨리는 양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존재를 실감하려는 것처럼, 심장만큼이나 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실루엣을 덧그리듯 뺨에서 어깨까지 어루만지며 내려간다.
그렇게 충분히 그녀를 손으로 느낀 다음엔, 그는 주저 없이 그녀를 끌어안고 입술을 부딪쳤다.
다급하다 못해, 조금은 절박하게까지 느껴지는 입맞춤이었다.
한참 동안 욕심을 채우고 나서야 그가 얼굴을 뒤로 살짝 물렸다.
“……이제 좀 살 것 같아.”
물에서 갓 빠져나온 듯한 음성. 그에게는 조금 전 그녀와의 입맞춤이 호흡과 다름없는 행위였기에 당연했다.
제법 안정과 여유를 되찾은 그가 코끝을 그녀의 뺨에 비비며 말했다.
“아이.”
“응.”
“나 집안일 하면서 착하게 기다렸어.”
“잘했어, 테리.”
이런 담백한 칭찬으로는 부족했다. 테실리드가 좀 더 그녀에게 가까워졌다.
굴곡이 완벽한 입술이 그녀의 귓가에서 달싹였다.
“상을 줘.”
“어떻게?”
“뻔하잖아.”
그가 그녀를 부드럽게 뒤로 밀었다. 몇 걸음 물러난 그녀의 몸은 곧장 식탁에 닿았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만큼 할 거야.”
제법 도발적인 말에 아일렛이 돌려줄 대답은 뻔했다.
“얼마든지.”
그녀는 그에게 항상 기대보다 더 많은 것을 허락해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기껍게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를 받아들였다.
겨울이지만 따뜻한, 신혼이었다.
외전 1부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