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01
잠시 후 인하와 한수가 자신들의 부모님들한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이 탄성을 지르며 부러워했다. 소란은 얼마 후 가라앉았지만 아이들은 가끔씩 선아 아줌마와 한수네 엄마를 곁눈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리던 경기가 시작되었다. 인하가 나가는 오전 마지막 경기, 초*중*고 합동 탈출 게임이다!
“히히히. 너랑 민아 선생님이 협력해 주셔서 다행이었어.”
“그러게. 저거 시나리오 쓰느라 엄청 고생했거든? 너 나한테 진짜 고마워해야 한다.”
“응응! 고마워!”
“특히 귀신의 뒷이야기를 신경 써서 설정했지.”
웃고 있던 민희가 당황하며 눈을 땡그랗게 떴다.
“뭐? 뒷이야기라니? 저거, 귀신의 성인데?”
“그래. 정말 고생했지 뭐야. 적당히 감동적인 설정을 만드느라.”
“뭐? 에잇, 정말, 은하 너~! 뭐 하는 거야!”
내가 자랑스럽게 엄지를 척 내밀자 민희가 인상을 찌푸리며 내 등을 안 아플 정도로 퍽퍽 쳤다. 나는 그것을 장난스럽게 넘겼다.
“걱정 마. 귀신이랑 친해지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안 나와. 그리고 말했잖아. 적당히 감동적인 설정이라고. 그러니까 괜찮아.”
“으아…….”
민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경기장을 응시했다. 민희는 내가 감동적이거나 슬픈 이야기를 구상하는 게 특기란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시나리오로 꽤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는 사실도. 그러나 나는 딱히 걱정되진 않았다. 확실히 그 스토리가 터지면 분위기가 좀 가라앉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건 진엔딩이라 웬만큼 하지 않고는 절대 안 나온다.
연습했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호흡을 맞추는 연습. 저 게임을 시험해 본 것도 게임에 참가하지 않는 학생회 멤버들이라 들었다. 첫 판에 공략도 없이 조건을 충족시킬 수는 없을 터다.
그동안 무대가 만들어졌다. 결계가 쳐지고, 그 사이로 높다란 성이 우뚝 세워졌다. 주변으로는 커다란 모니터 영상이 몇 개나 떠올랐다. 현실에 가상을 적용하는 가상 현실 시스템이다. 게임을 만든 것은 스승님, 거기에 스토리와 개연성을 집어넣은 것이 바로 나다.
[네! 찾아왔습니다! 올해 처음으로 선보이는 탈출 게임! 귀신의 성에서 탈출하라! 본 게임은 세계적인 게임 마이스터인 정민아 님께서 제공해 주셨습니다! 또한 이 게임의 시나리오는 매혹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엄청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설은별 님께서 집필하셨다고 하네요!]윽. 이어진 말에 나는 그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설마 저기에서 내 닉네임을 말할 줄이야! 에이 씨, 증말! 그야 지인들 빼고는 나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역시 부끄럽다. 나는 얼굴에 손바닥을 덮어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진실을 아는 곁의 세 사람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번 종목은 초*중*고 합동이기 때문에, 팀별로 점수가 가산되지는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함께 즐기기 위한 경기! 하지만 탈출에 가장 많이 기여를 했다 판단되는 학생의 팀에는 소정의 상품을 드릴 예정입니다! 또한, 참가한 분들께는 당연히 호화로운 상품을 드려야겠죠? 자, 우리의 대표들이 등장하네요!]성문 앞에 여섯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초등학교 대표 두 명, 중학교 대표 두 명, 고등학교 대표 두 명. 초등학교 대표는 당연히 인하와 아르델이다.
고성 주위로는 어두운 숲이 배경으로 펼쳐져 있다. 고성도 그렇고, 어두운 숲도 그렇고, 음산한 분위기를 제대로 연출하고 있다.
[와, 근데 초등학교 대표는 여학우 두 명이 나왔는데……와, 완전 예쁜데요?!]침 삼키지 마라! 야유하는 소리가 들렸다. 인하는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새침한 얼굴로 고성을 올려다보고 있다. 이런, 인하 팬이 더 늘겠는걸?
[무대는 고성의 안, 어째선지 몰려 있는 괴물과 귀신들! 프롤로그는 길을 잃고 우연히 성을 발견한 여섯 명의 사람! 자, 게임 시작입니다!]사회자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끼이익하고 성문이 열렸다. 게임에 참가하는 여섯 명이 천천히 문안으로 들어섰다.
성 위로 목소리와 함께 오프닝 글이 흘러나왔다.
『산을 넘다가 숲에서 길을 잃은 여섯 사람은 우연히 오래된 성을 발견했다. 해 질 무렵이 되었으니 그들은 이 성 안에서 하룻밤 자고 가는 게 어떻겠냐고 이야기를 나눈다. 하룻밤 묵어도 되냐고 성의 주인이나 고용인에게 물어보자며 의견을 정리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성문이 열렸다.』
『내부는 매우 낡고 어두웠다. 아무리 봐도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없다. 성 안은 기이하리만치 조용하고 음산했다. 그들은 오스스한 분위기에 침을 삼키며 성 안으로 들어섰다.』
타박타박, 발소리가 들렸다. 여섯 사람은 성 안에 들어가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가 흩어졌다. 세 사람의 얼굴이 클로즈업돼 떠올랐다. 와……저 초등학교 대표 진짜 엄청 예쁘다. 누군가가 속삭였다. 나는 뿌듯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호러 게임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탐색이다. 그들은 흩어져 성 안을 탐색했다. 일단 게임 스토리대로 성에 자신들 외에 사람이 있는지부터 살폈다. 성에는 문이 잠겨 있는 방이 많았다. 그들은 머지않아 다시 합류했다. 게임 속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더군다나 이 게임은 플레이 타임이 짧다. 운동회 행사용이니 당연하지. 줄거리를 압축해서 집어넣는다고 꽤나 고생했다.
그들은 이번에도 게임 시나리오대로 잘 곳을 찾기 시작했다. 남의 집에서 자는 것에 거리낌을 느끼던 중 그들은 문이 열리는 방을 세 개 찾았다. 다행히 열리는 방은 꽤 가까이에 붙어 있었고, 그들은 팀별로 나뉘어 방을 차지했다.
인하와 아르델은 오른쪽 방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방 안을 구석구석 뒤졌다. 책과 일기장을 훑고 서랍을 열었다.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린 서랍에서 열쇠가 하나 나왔다.
이 성이 마(魔)의 성으로 변하는 것은 밤이 된 이후다. 시간은 흘러 순식간에 밤이 되고, 그들이 잠에 들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가 갑자기 문을 쾅쾅 두드린다. 열린 문에서 튀어나온 것은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로테스크한 괴물이었다. 참고로 미성년자 관람 불가가 되지 않도록 적절히 그로테스크하게 만드느라 그래픽 담당자가 꽤나 고생을 했다고 한다.
[윽!] [꺄악!]인하와 아르델이 볼 것 없이 곧장 마법을 썼다. 웬만큼 호러 관련 이야기를 봐 온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좀비의 약점은 불이다. 그에 맞춰 이곳의 좀비와 귀신의 약점도 불로 설정했다. 기본적으로 이 게임은 약점과 관련 없는 마법은 통하지 않게 되어 있다.
화르륵!
키에엑!
좀비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누군가가 감탄했다.
“와, 요즘 초등학생은 마법 실력이 대단한데?”
“저게 초등학생의 마법 실력이라고?”
인하의 마법은 빛, 원한다면 불을 일으킬 수 있는 뜨거운 열기를 띤 빛이다. 아르델의 마법은 불. 주황색으로 타오른다.
중학교 선배들과 고등학교 선배들은 고전하고 있었다. 그들의 메인마법이 불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뭐, 뭐야! 저 괴물, 왜 마법이 안 통하는 거지?]“왜 선배들의 마법은 안 통하는 거지?”
“그러게.”
그 외에 얼음마법이나 베는 종류의 마법도 먹혀들 테지만, 운이 나쁘게도 그들의 고유마법은 그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게임은 점점 진행되었다. 피하다 보니 다들 좀비가 불에 약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모두는 불을 써 좀비들을 하나둘 처리하기 시작했다. 좀비 중에는 아기도 있었는데, 아기 좀비가 울면서 ‘엄마…….’ 하는 걸 보며 찡해하는 건 나뿐인가. 정녕 그런 건가.
참가자들은 시나리오대로 창문을 깨부수거나 해서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를 해 보았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고 오히려 창문을 부수려 했던 마법이 녹아 사라졌다.
[엄청 실감 난다, 이거!] [누가 만든 게임이라고 했더라?] [몰라!]……저랑 스승님입니다. 죄송합니다.
괴물들이 마구 쫓아왔다. 플레이어들은 마구 도망쳤다. 괴물은 어디로 도망쳐도 계속 쫓아왔다. 불을 써도 몸이 타올라도 대부분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겨우 어딘가에 숨었다. 자, 이벤트 발동이다.
……난 이야기를 미리 알고 보는 것도 제법 좋아한다. 처음 접하는 스토리를 예측하며 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알고 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의외로군. 여기에 인간들이 들어와 있다니.]그들이 문을 잠그고 바깥의 분위기를 엿보고 있을 때였다. 덜커덕덜커덕, 무언가가 기괴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일행이 깜짝 놀라 소리가 나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나는 턱을 괴었다. 근데 이게 운동회랑 취지가 맞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냥 놀자 판인 것 같은데. 애초에 왜 운동회에 호러 게임이냐고. 차라리 수학여행 담력 훈련으로 하는 게 훨씬 더 어울리지 않나?
[인형……?]자그마한 인형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구불거리는 금발에 푸른 눈동자, 마네킹 몸을 가진, 호러 소설이나 만화에서 흔히 나오는 그 외국 인형이다. 심지어 입고 있는 옷도 고딕풍 드레스였다.
그러니까, 음산한 성에 딱 어울리는 조력자 등장이시다 이거야.
[이곳은 시간이 멈춘 성이다. 저주받은 성이지. 바보 같은 인간들……제 꾐에 제가 빠졌지.]나는 내가 설정한 대사가 진행되는 것을 흥미로운 눈으로 구경했다.
[들어온 이상은 끝이다. 나갈 수 없어. 죽지도 못하고 저 괴물들에게 먹히는 거다. 아니면 나 같은 놈한테 몸을 빼앗기거나……우후후후후후.]인형이 연극을 하는 듯한 어조로 음산하게 웃었다. 주위 사람 모두가 게임에 정신없이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니 왠지 좀 민망했다.
[……우린 탈출할 건데? 어떻게 하면 탈출할 수 있지?] [글쎄. 그걸 내가 알 게 뭐야.]내가 저거 나름 실력에 관계없이 진행하고 클리어 할 수 있게 만든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나는 뿌듯해하며 무릎 위에 깍지를 꼈다.
[하지만 기왕 만났으니 힌트 정도는 알려 줄게. 난 저 좀비들도 싫거든. 탈출하는 방법은 간단해. 문을 열고 나가면 되지.] [그러니까 그 문을 어떻게……!] [아님 이 성의 저주를 없애든가. 우후후후……어디 한번 맘대로 해 보라고……. 할 수 있다면.]인형은 거기까지 말하고 딱 움직임이 멈췄다. 영혼이 빠져나간 인형이 힘없이 쓰러졌다. 허공에 선택지가 떠올랐다.
『본격적인 탈출 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선택해 주십시오.
1. 팀별로 흩어져서 출구를 찾는다.
2. 함께 출구를 찾는다.』
떴다! 결별 선택지.
아직 플레이어는 모르고 게임 제작자만이 아는 사실. 실은 여기에서 흩어지면 이제 다시는 못 만난다. 저 성은 시간 축이 구부러져 있는 공간이다. 시간이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시간이 흐르고 있다. 괴물들이 움직이는 모습만 봐도 시간이 완전히 멈춰 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그런데도 성 안의 시간이 멈춰 있다고 표현되는 건, 시간 축이 구부러져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공간도 왜곡되어 있다. 그러니 헤어지게 되면 다시는 못 만난다.
결국 그들은 흩어져서 출구를 찾기로 했다. 흩어지는 편이 효율이 좋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런 이런, 틀리셨네요. 이렇게 된 이상 전원이 탈출하는 엔딩을 보려면……시나리오를 뛰어넘는 마법을 쓸 수밖에 없다. 설령 전원 탈출한다고 해도 해피 엔딩을 보기는 힘들 거다.
“아, 미래가 훤하다~.”
“뭐야 뭐야. 어떻게 되는데?”
“금방 끝날 테니까 그냥 봐.”
저 성을 탈출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하나, 밖으로 통하는 성 정문의 열쇠를 찾는다. 둘, 저주의 근본을 찾아 저주를 없앤다. 셋, 작자가 의도한 방향은 아니지만, 마법을 써서 어떻게든 탈출한다.
아무래도 지금 나온 분기점의 미묘한 분위기에 대해 눈치챈 건 기껏해야 인하뿐인 듯했다.
[이상한데?] [뭐가?] [나, 이 게임 시나리오 작가 알아.] [그래서? 그게 왜?]나는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인하는 평소 그대로인데, 어쩐지 아르델은 평소 보여 주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내가 아는 아르델은 제법 밝고 사교성 있고 수줍음도 있는 성격인데, 지금은 냉철하고 날카롭고 당당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야 사정이 평범하지 않은 만큼 성격도 평범하지만은 않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저게 원래 성격인가? 원래 성격을 보여 줄 정도로 인하랑 많이 친한가?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느낌이 이상하단 말이지.] [흐음……. 나는 그런 건 잘 모르겠고, 그보다 탈출하는 법은 알겠어?] [빠른 길은 이 성의 어딘가를 부숴 버리는 거 아닐까?] [그건 그렇겠다.] [하지만 그럼 해피 엔딩은 무리일걸? 이 게임의 시나리오 작가는 그런 사람이야.]나는 움찔했다. 인하는 역시 나를 잘 안다. 민희가 내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맞다. 억지로 깨부수면 이세계의 입구가 열려 어둠 속을 영원히 헤매게 되는 배드 엔딩이다. 혹은 시간 축이 이상해져 버려서 먼 미래로 내쫓기는 것도 있다. 공간을 잘 아는 마법사가 아니면 불행한 결과밖에 불러오지 않는 방법이다.
[문을 열고 나가라고 했잖아. 호러 게임의 정석은 탐색, 즉 열쇠 찾기.]나는 속으로 환호했다. 그렇지! 인하야, 바로 그거야!
[그리고 이 게임의 시나리오나 뒷이야기를 전부 알지 못하면 틀림없이 해피 엔딩은 안 나올걸?]허허, 정답일세…….
[어차피 그걸 모르면 열쇠도 못 찾게 되어 있을 거고.]정답 중의 정답일세…….
하는 말마다 핵심을 찌른다. 나는 기뻐하다 말고 철렁한 기분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정말이지 인하는 나를 너무 잘 안다. 으흐흐흐흐.
두 사람은 정석대로 성 안을 전체적으로 탐색했다. 다가오는 좀비는 불꽃으로 태워 버리고, 영체인 귀신은, 불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불로 막으며 도망치기를 반복했다.
그 무렵 중학교, 고등학교 선배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하면……다행히 마구 부수는 짓은 하지 않았다. 탐색을 하다가 도리가 없으면 부수는 식으로 나왔다.
시간 축이 일그러져 있다 보니 서로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어도 서로가 한 행동으로 인해 이런저런 영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서로 귀신의 짓인 줄 알고 긴장했지만.
인하와 아르델은 정말로 잘해 나갔다. 게다가 아르델은 스승님한테 들은 이야기로 보아 대충 위험 구역에서 데려온 아이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확실히 그런 티가 났다. 연륜이 있다고나 할까, 나타나는 적을 척척 해결해 갔다. 저 애는 정말 능숙한 전투 마법사다.
게임이 이어지면서 단서가 하나하나 밝혀졌다.
『영원히 살고 싶었다.』
『사람들의 시간을 빼앗자.』
『그러려면 많은 목숨이 필요하겠지…….』
『꼬드겨 볼까?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지 않겠느냐고.』
[그래. 나는 그것 때문에 죽었어.] [내 아버지는! 그 사람은 그런 것 때문에 나를 죽였어!] [그래서 내가 전부 저주해 준 거야. 전부.] [마법이 실패하자 이 성은 불완전한 불사의 공간으로 변해 버렸어. 시간 축이 뒤틀리고, 몸이 썩어 녹아내려도 죽지 않아. 죽지 않는 거야.]고등학교 선배들과 중학교 선배들도 착실하게 시나리오를 진행해 갔다. 하지만 대충 시나리오를 진행했던 중학교 선배들은 중간에 리타이어, 그러니까 배드 엔딩을 맞이했다.
제대로 된 첫 탈출자는 인하와 아르델이었다. 현실 시간으로 총 20분 만의 쾌거였다.
[좋아. 나가 봐. 하지만 너희들이 나가도 이 안에 남은 다른 친구들은 영원히 성을 떠돌아다니게 될 거야! 우후후후후후…….]인형은 구슬픈 목소리로 인사했다.
[바이바이.]고등학교 선배들은 시간 축이 뒤틀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법진을 준비했다. 시간 계열 마법! 나는 그 마법진을 ‘기억’했다. 마법진으로 성의 시간 축을 맞추고 그에 따라 생겨난 틈으로 빠져나가 탈출했다. 인하나 아르델과는 달리, 먼 미래로.
그렇게 게임이 끝이 났다.
“와!”
“드디어 엔딩이다!”
“나름 재밌었어!”
학생들이 소란스럽게 떠들며 몸을 일으켰다.
탈출 게임을 마지막으로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우리는 다 같이 모여서 점심을 먹었다. 선생님들과 헤어져 부모님들, 친구들과 다 같이 모여 앉았다.
“민희는 오빠랑 안 먹어서 좀 섭섭하려나?”
“됐엉. 오빠는 오빠대로 바쁜걸. 문자는 보내 놨으니 친구들이랑 먹겠지.”
민희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우리 점심 메뉴는 우리 엄마랑 선아 아줌마가 같이 싼 도시락이었다. 오랜만에 두 사람이 솜씨를 발휘했다. 나는 입맛을 다셨다. 저번에 ‘운동회 하면 역시 도시락 아닐까?’ 하고 내가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반면 현호네 부모님이나 한수네 부모님은 사 먹을 생각으로 도시락을 싸 오지 않았는데, 선아 아줌마랑 엄마가 도시락을 아주 넉넉히 싸 온 덕분에 다행히 다 같이 나눠 먹을 수 있었다. 그 대신 한수네 엄마는 간식을 많이 싸 들고 오셔서, 그것도 다 함께 나눠 먹었다.
점심을 먹는 동안 선아 아줌마가 탈출 게임을 언급하며 인하를 칭찬했다.
“우리 인하 멋지더라~.”
“……그랬어요?”
“응, 응. 같이 다니던 그 여자애도 제법이더라? 어떤 애야? 친해?”
“음…….”
인하가 고민에 빠진 채 머뭇거리자 민희가 끼어들었다.
“아르델이라면 제가 더 잘 알아요. 듣기로는 천공의 나라인 유펠르시아 출신이라나 봐요.”
“유펠르시아? 정말이야? 대단한 곳에서 왔네.”
“그쵸? 근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현에 편입해 왔어요. 어쨌거나 엄청 강해요.”
“그래 보이더군.”
부모님들이 긍정했다. 아르델이 좀 강하긴 하지. 나는 이어지는 대화에 귀 기울이며 몇 번밖에 만난 적 없는 현호의 어머니를 흘끔거렸다. 현호네도 이번엔 어머니만 오셨다. 현호네 어머니는 B랭크 마법사다. 마력의 영향을 받은 머리카락은 짙은 푸른색으로, 바다를 닮은 색이다. 그리고 그녀도 현호와 마찬가지로 물속성 마법사다. 뭐라더라, ‘바다의 마녀’라던가? 현호와 똑같은 웃는 상인데도 현호랑은 달리 만만치 않은 성격이란다.
점심을 먹고 나니 왠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져 노점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선생님들과 딱 마주쳤다. 민 선생님이 있으니 당연히 준휘 선생님도 있었고, 누나인 스승님, 평소 스승님과 친하며 민희의 선생님이기도 한 이백한 선생님도 함께였다.
나는 스승님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속에서 피어오르는 어색함을 숨기며 짧게 인사했다.
“어, 안녕하세요.”
표정 변화가 적은 준휘 선생님이나 스승님과 달리 민 선생님과 민희네 선생님은 나를 보고 반색했다.
“앗, 은하야!”
“여어, 오랜만이다. 안녕하냐.”
장난스럽게 인사하며 민희네 선생님이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 사람도 머리 쓰다듬기를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그러자 민 선생님이 갑자기 경쟁하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나는 두 사람의 손을 탁탁 쳤다. 에잇, 뭐 하는 짓이야, 진짜. 다행히 스승님이 내 기분을 눈치채고 두 사람을 성가시다는 양 나에게서 떨어뜨렸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님이 그런 나를 보며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물었다.
“게임은 잘 보았느냐?”
나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다 말고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결국 찢어져서 엔딩이 났네요.”
“해피 엔딩은 제법 감동적인데 말이다. 하긴, 첫 판에 해피 엔딩은 힘들겠지.”
“인하랑 아르델이 있는 힘껏 스토리를 따라가 줬으니까 됐어요.”
“확실히 그건 나도 기쁘더군.”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던 스승님이 문득 씩 웃었다.
“그걸 온라인 게임으로 내려고 하는데, 어떻느냐?”
“……그만두세요. 그건 단편이기도 하고, 스토리를 휙 압축하기도 해서, 솔직히 조잡하다고요…….”
“그 정도는 아니던데.”
나는 부루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게임 시나리오 작가를 계속 하게 되는 걸까? 물론 덕분에 돈을 꽤나 벌고 있긴 하지만……. 계속 하게, 되는 걸까. 나는 그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최근 연재 사이트에서도 종이 책이랑 전자책 제안이 많이 들어오고 있는데……. 나는 입을 우물거리다 이내 다물었다.
“너는 결국 아무 경기도 안 나가는구나. 초등학교 마지막 운동회일 텐데.”
나는 웃는 것으로 답했다. 초등학교 마지막 운동회라 할지라도 그렇게 눈에 띄는 경기에 나가는 것은 나답지 않은 일이므로, 스승님은 그러려니 했다.
“그래, 혼자서 어딜 가고 있었지?”
“아차, 아이스크림 사려고요. 콘에다가, 냉기마법 걸려 있는 걸로요.”
“흠.”
결국 선생님들이 나랑 친구들 아이스크림까지 전부 사 줬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잔뜩 몰고 친구들 곁으로 돌아갔다. 친구들이 매우 반갑게 아이스크림을 맞았다.
우리는 남은 점심시간 동안 주변을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며 시간을 때웠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갑자기 한수가 ‘으왁!’ 하고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봤더니 한수의 팔에 익숙한 아이가 매달려 있었다. 뒤에서부터 달려와 덮친 것 같다. 구불거리는 금발이 낯익었다. 아르델은 활짝 웃으며 한수의 팔에 매달렸다. 와, 엄청 적극적이네.
“여기 있었구나, 한수야! 그리고 민희랑 현호도! 지금 고등학교 회장이랑 부회장이 불러.”
“어? 그래? 에이……쉬는 시간인데.”
“우리 빨리 가자!”
“야, 좀 떨어져! 귀찮거든!”
“에이, 뭐 어때서 그래~.”
아르델이 살살 눈웃음을 쳤다. 그 장면을 보며 현호와 민희가 약간 질린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한수와 아르델이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세 사람 다 익숙해 보인다. 자주 저랬던 건가? 그러나 나에게는 생소한 광경이었다. 그것을 보자 문득 어느 날의 일이 떠오르며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가슴을 스쳤다.
‘…….’
그것은 아주 조용한……다정하고 특별한 분위기 그 자체와 닮은 것.
나는 기억이란 감정을 삼키며 옆에서 나와 팔짱을 끼고 있는 인하를 보았다. 인하는 한수와 아르델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바라보다가 이내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왜? 표정이 그렇게 묻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고는 다시 앞을 봤다. 성큼성큼 앞서가는 한수와 그 옆에 매달린 아르델, 그 뒤를 따라가는 민희와 현호. 친구들의 모습이 빠르게 멀어져 갔다. 그때 한수의 팔에 매달린 채 앞서 걸어가던 아르델이 흘끔 우리를 돌아봤다. 픽 웃고는 다시 한수에게 재잘재잘 말을 건다.
……허?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방금 그거, 뭐야?
어이없어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한수의 어머니가 감탄했다.
“호오.”
한수네 아버지도 장난스럽게 웃었다.
“내 아들이지만 참 인기가 많다니까.”
“확실히 한수가 멋있긴 해. 아직 어린데도 어쩜 저렇게 훤칠한지.”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배려심도 많고 다정하다고 하던걸? 그렇지? 은하야.”
“네.”
“그래애?”
나는 어른들의 대화를 들으며 표정을 가라앉혔다. 글쎄? 저건 정말로 그런 걸까? 내가 보기엔…….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한수에게 매달려 있는 아르델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아르델이 묘한 미소를 보낸 상대는 바로 인하였다. 나는 기분이 나빠져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니까, 여태까지 몰랐는데, 아르델은 아무래도 성격이 좀 꼬인 아이인가 보다. 애초에 방금 그건 뭐였지? 견제? 시비? 아니면 놀리려는 건가?
‘아니면 오해하는 걸까…….’
인하와 한수의 사이를 오해하고 있는 게 아니고서야 아르델이 인하한테 저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 태도는 대체 뭐야? 아니면 의심스러워서 확인이라도 해 보고 싶었던 건가? 솔직히 불쾌했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은 기분만은 약간 알 것 같다.
인하랑 한수는 상당히 사이가 좋다. 선남선녀인 데다가 두 사람의 사이는 제법 미묘해 보일 때가 많다. 둘 사이를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두 사람의 사이는 크면서 점점 변해 갔다. 처음엔 티격태격 자주 다투는 사이. 다투다 보니 친해졌다. 티격태격거리던 친구 사이는 어느 순간 매우 친한 친구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이미 두 사람은 서로만이 아는 뭔지 모를 감정의 기류를, ‘특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한동안은 한수와 인하를 주시했었다. 그러다 두 사람의 특별함은 애정보다는 동질감에 닿아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어쨌거나 불쾌하긴 매한가지였다.
나는 인하와 손을 잡고 같이 운동장으로 향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부모님들과는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모처럼의 운동회긴 했지만, 우리 학교 운동회 특성상 부모와 아이들이 어울릴 일은 별로 많지 않다.
나는 바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잠시 헤맸다. 갑자기 인하에게 시비가 걸리는 걸 눈앞에서 봐 버렸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인하의 팀인 홍 팀으로 같이 갈 수도 없다. 거기에는 고민의 원인인 아르델도 있을 테니까.
나는 인하와 함께 대충 운동장 근처 교정을 설렁설렁 걸었다. 담임인 민 선생님한테는 문자로 『속이 안 좋아져서 인하랑 같이 조금 늦게 돌아갈게요』라고 인하의 의견도 묻지 않고 제멋대로 송신했다.
아무 곳이나 걷다 말고 문득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 보니 이거, 땡땡이잖아? 학창 시절 해 보고 싶은 것 첫 번째. 역시 땡땡이는 한 번쯤 쳐 봐야지. 그리고 역시 민 선생님의 과거는 애들이 알아선 안 된다. 이런 걸 해 보고 싶어진다니까.
‘거짓말은 나쁘지만.’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나는 학교를 많이도 빠졌다. 결코 본의는 아니다. 원래 나는 엄청 성실한 사람이라고! 그런데 4학년 때, 마력 고갈 건으로 학교를 몇 주나 빠지고, 그 후에는 또 특수능력 제어 때문에 학교를 한 달이나 빠졌다. 5학년 때는 민희랑 같이 납치 사건에 휘말려 부상 때문에 학교를 빠졌었고…….
“안 돌아갈 거야? 조금 있으면 운동회 시작할 거야.”
“조금만 더 있다 가자. 나 지금 속이 좀 안 좋네.”
인하가 바로 낯빛을 바꾸며 나를 걱정했다.
“많이 아파? 보건실 갈래?”
“아아니, 그 정도는 아냐.”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긴 했지만 나는 애써 태연하게 웃었다. 인하 얜 아무렇지도 않나? 그 애의 시비는 이번이 처음일까? 처음인 걸까? 사실 인하는 눈치조차 못 챈 것 같다. 차라리 눈치 못 챈 게 다행인가?
우리는 한동안 화단에 앉아 조잘조잘 대화를 나눴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하가 작게 웃었다. 그것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나는 인하와 함께 운동장으로 돌아갔다.
운동장에 도착해서 나와 인하는 어쩔 수 없이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나는 인하를 한수가 있는 홍 팀에 데려다줬다. 한수는 여전히 아르델과 함께였다.
“어? 너 왜 이제 오냐?”
인하가 쓸데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은하가 속이 안 좋다고 해서, 잠깐 쉬다가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