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03
“……!”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스승님이 기척도 없이 거기에 서 있었다.
대단해. 나는 무심코 감탄했다. 그 강대한 마력을 깔끔하게 숨겼다.
“너라면 이르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했다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이르군. 일찍 오길 잘했어.”
그러나 나는 곧 스승님의 눈초리가 평소에 비해 날카롭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움츠렸다. 어라? 오늘따라 분위기가 좀……많이……사나우신데……?
“스, 스승님, 저희 집엔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라…….”
어라라. 스승님을 둘러싼 분위기가 아까보다 더 사나워졌다. 나는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차림새도 평소와 다르다. 머리카락은 머리 장식 없이 고무줄로만 묶었고, 복장도 화려한 드레스나 원피스 같은 것이 아니라 평범한 캐주얼 스타일이었다. 웬일이지? 멍하니 옷차림을 살피는 나를 향해 스승님이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어제 선물 고맙다.”
“……?”
그러나 막상 나온 이야기는 사나운 태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설마 그 이야기를 하러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온 건 아니겠지? 문자나 전화로 해도 되는 것을. 당황하는 나를 향해 스승님이 말을 이었다.
“편지도 읽었다. 매우 고맙구나. 근데.”
내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힐 때쯤, 스승님이 갑자기 내 뺨을 잡아당겼다. 고통과 당황이 섞여 입 안에서 괴상한 소리가 나왔다.
“으워어어어어어?!”
“근데 너, 편지에 감히 그딴 식으로 적었겠다?”
“으아아아아아파요오! 머, 머가여?!”
스승님은 내 뺨을 휘어잡은 손을 한동안 놓지 않았다. 발음이 조금씩 샜다. 스승님이 열불 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 봤다. 감사 인사로 시작해서 역시 감사 인사로 끝나는 그 글을 말이다. 근데 마치 이별 편지 같더구나?”
스승님이 왼쪽 뺨에 그치지 않고 내 오른쪽 뺨까지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으앙, 아이에오!”
“그럼 그 문장은 대체 뭐냐. 여태까지 고마웠다든가, 4년간 정말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이 괘씸한 것. 확실히 올해로 강습이 끝나는 건 맞지만, 그럼 넌 그 이후엔 나를 안 찾아올 생각이었던 거냐?”
나는 뜨끔했다. 아니, 영영 인연을 끊을 생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내 성격상, 성격상 말이다, 아무래도 의무 교육 기간이 끝나면 지금과 같은 이유로 찾아가는 건 민폐인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단 말이다. 그러니 아마 일부러 찾아갈 일은…….
“이 배은망덕한 놈. 정말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던 것이더냐.”
그러나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설마 그럴 리가. 그제야 스승님이 내 뺨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나는 붉어진 양 뺨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스승님의 시선을 슬금슬금 피했다.
“서, 설마요. 그렇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개인 지도를 받는 일은 줄어들 테고, 의무 교육 기간이 끝나면 가르쳐 달라고 찾아가기 약간 부담스러워지지 않을까 싶어서……. 게다가 준휘 선생님도, 민 선생님도, 초등학교 선생님이니까, 마찬가지고. 그래서……늦기 전에……음, 자주 만날 수 있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그냥……감사 인사만이라도…….”
우물쭈물,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감정을 눌러 참으며 마지막까지 듣고 있던 스승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멍청한 것!”
나는 눈을 꽉 감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해도, 의무 교육 기간이 끝나도 똑같다! 넌 여전히 애송이야! 아무 때나 찾아와도 되고, 궁금한 게 생기면 언제든지 물으러 와도 된다, 이 못된 것.”
스승님은 한동안 나를 향해 악담을 하나 싶더니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씨근덕대는 숨소리가 들렸다.
“너란 애는……글솜씨만큼은 미칠 정도로 뛰어나서……편지 읽고 쓸데없이 울 뻔했지 않느냐, 요 녀석아.”
진짜 울어 버릴 것 같은 분위기라 나는 흠칫했다. 감동해서 운다면 바라 마지않는 일이지만, 섭섭함과 쓸쓸함 때문에 운다면 그건 진짜 몹쓸 짓을 한 게 된다. 나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어, 그, 그게…….”
“준휘랑 민 녀석도 마찬가지다. 걔들이 너한테 얼마나 정이 들었는데……. 쓸데없이 어른스러운 게 독이 되는구나. 어린놈이 인연의 끊고 맺음을 딱 자르는 거 아니다.”
“그, 그런 게 아니라……그냥, 섭섭해질 것 같아서…….”
“졸업하고 이야기해, 이런 건.”
스승님이 얼굴을 가리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또렷한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처럼 물기 어린 채 반짝이고 있어서,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스승님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다행히 민 녀석은 그런 건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다……. 어디서 제자가 스승의 날에 스승을 울게 만들어! 준휘 녀석이 엄청 섭섭해하더구나! 학교에 가자마자 당장 두 사람한테 감사 인사부터 하고! 초등학교 졸업한 후에도 자주 찾아올 거라고 말하면서 사과해라! 이 요망한 계집애야!”
“에헤헤……넹.”
나는 스승님의 호통에 미안해하면서도 벅차오르는 기분에 고개를 숙였다. 기뻤다. 정말로, 진심으로.
사실 나는 스승님이 말한 것처럼 졸업하면 우리 사이가 멀어지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세 분이 유일한 은사(恩師)지만 선생님들께는 이 이후에도 많은 제자가 찾아올 거다. 그렇게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멀어지다 보면……지금처럼 친밀하게 지내기는 힘들 거라고,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그게 싫으면 만나러 가면 되지. 내가 아는 선생님들은 결코 가르침의 기간이 지났다고 해서 애제자를 내치는 그런 스승이 아니지 않은가. 혹시라도 귀찮아하면 속상해하며 물러설 테지만, 그렇게 되기도 전에 일부러 몸을 사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세 사람이 나를 매우 아낀다는 거, 그야 안다. 민 선생님은 특히 더하다. 이유도 알고 있다. 나는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정말이지, 내가 왜 오지도 않은 날을 걱정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에헤헤. 그래도 감동해서 운 거라면 ‘제1차 목표 성공!’……인데 말이죠.”
“남을 감동시켜 울리는 걸 목표로 삼는 건 시나리오 안에서만 해! 현실에까지 적용하지 마!”
스승님이 결국 다시 내 뺨을 꼬집었다. 헤오아이아……나는 겨우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결국 그 후로도 몇 분 정도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스승님에게서 풀려났다. 또한 스승님은 오늘 학교에 볼일이 있는지 나와 인하와 같이 학교에 가겠다고 했다. 준비를 마치고 집 밖으로 나오던 인하는 스승님을 보고 한순간 흠칫했다.
“왜 민아 선생님이 여기에 있어요?”
“우리랑 같이 학교로 가신대.”
“저희랑 같이요?”
“은하에게 용무가 있어서 찾아온 것이고, 어차피 너희와 목적지가 같다면 같이 가는 게 낫겠지.”
“목적지가 같다고요?”
단순히 목적지가 같은 대현 학교라는 뉘앙스가 아닌 것 같은데.
“수학여행이잖느냐. 재능 있는 아이들이 며칠 동안 학교 밖, 그것도 자신의 나라가 아닌 곳을 단체로 돌아다닌단 말이다. 당연히 대현의 마법사가 호위로 붙는다. 이번 수학여행에는 나와 유민까지 해서 A랭크 마법사가 둘, 선생들을 제외하고도 B랭크 마법사가 다섯, C랭크 마법사가 10명 정도 붙는다.”
“오, 오오…….”
“대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교기도 하고, 노리는 곳이 많으니 수학여행에서는 사복을 입게 한다. 하지만 그러면 또 아이들을 인솔하기는 힘들단 말이지. 그러다 보니 이것저것……하여간 우리 선생들은 챙길 게 많다. 그렇게 알아 두도록.”
“옛썰.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당.”
“오냐.”
나는 약간 애교 어린 말투로 인사했다. 주변에 친한 사람들이 잔뜩 생기니 어느 순간부터 내 가장 활발한 부분이 바깥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채팅이나 메시지, 톡에서는 제법 장난스럽다. 글로만 이야기를 나누다가 직접 만나게 된 사람은 처음엔 동일 인물이라고 매치하기 힘들어할 정도다.
우리는 함께 학교로 향했다. 텔레포트 배지를 사용해 학교에 도착했다. 집합 장소인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아직 학생들이 별로 모이지 않았다. 그래도 선배들이 하교할 시간이라 그런지 조금 소란스러웠다. 우리는 운동장 주변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인하 넌 어떤 옷 가져왔어?”
“나? 엄마가 챙겨 줘서, 원피스가 많아.”
“오오, 그렇구나. 난 전부 바지야. 놀려면 역시 편한 차림이 좋잖아. 귀걸이도 피어스 종류만 챙겨 왔어.”
“흐음. 그러고 보니 민아 선생님도 오늘은 간편한 차림이네요?”
“평소 차림은 학생들을 인솔하기에는 너무 화려해서 말이다.”
평소엔 드레스 부류의 나풀거리는 옷을 즐겨 입었던 스승님도 이렇게 입으니 평범해 보인다. 하나로 가볍게 묶은 긴 갈색 머리카락, 셔츠와 청바지, 카디건이란 간단한 조합의 옷차림. 스승님은 미인이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돌아볼 정도의 미인은 아니다. 차림새만 평범하게 바꾸면 가끔 남자들이 한두 명 돌아볼 정도로 평범한 미인이 된다. 그러나 그녀는 어차피 겉모습과 상관없이 여러 의미로 유명인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한수가 도착했다. 한수는 나와 인하를 향해 다가오다가 스승님을 보고 멈칫했다.
“어, 안녕하세요. 호위 잘 부탁합니다.”
“그러마. 걱정 마라.”
알고 보니 한수는 학생회 특권으로 이미 호위가 누구인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럼 왜 미리 안 말했냐고 물었더니, 학생회 업무상 정보는 공식적인 게 아니고서야 아무한테나 말하고 다니지 말라고 그래서, 말하지 않는 게 습관이 됐다나?
민희, 한수, 현호는 생각보다 학생회로서 중립적인 입장을 잘 지킨다. 미리 알아서 유리한 정보는 우리에게도 털어놓지 않는다. 뭐, 이번엔 그냥 놀라게 하려고 숨긴 것도 있다고 한다. 한수는 아니고, 민희랑 현호가.
“걔들은 서프라이즈를 엄청 좋아한다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머지않아 아이들이 하나둘 집합했다. 학생들이 반 정도 모였을 때쯤 준휘 선생님과 민 선생님도 학교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이 반가워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민 선생님!”
“오늘도 준휘 선생님이랑 같이 있네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냐, 안녕.”
운동장을 둘러보니 선생님들을 제외하고도 학생이 아닌 사람이 몇 명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낯이 익은 얼굴도 있는 것 같다.
반가운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었지. 나는 긴장한 얼굴로 두 사람을 응시하며 초조해했다. 우물쭈물하며 그쪽을 한 번 보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고,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숙이니 내 옆에 앉아 있는 스승님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고개를 들자 스승님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에게 눈치를 줬다. 나는 한순간 질색했다.
‘설마 여기에서요?!’
스승님은 계속 눈치를 줬다. 나는 차마 고개를 젓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옆에서 떠들고 있던 인하와 민희, 현호, 한수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 참, 왜 선생님들은 이렇게 평범한 시간대에 도착한 거야. 좀 더 일찍 오면 어디 덧나나. 나는 앞으로 일어날 부끄러운 상황에 얼굴을 붉혔다. 마치 벌칙 게임이라도 하는 것 같은 민망함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마음을 굳게 먹고 준휘 선생님과 민 선생님을 향해 달려갔다. 그래, 달려갔다. 이렇게 된 이상 빨리 끝내는 게 남는 거다! 막 달려오는 나를 발견한 민 선생님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 은하야!”
에라, 모르겠다.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나는 눈을 딱 감고 두 사람의 품에 뛰어들었다. 양팔을 뻗어 두 사람을 꽉 끌어안는다. 내 갑작스러운, 혹은 평소답지 않은 행동에 두 사람의 몸이 경직됐다. 나는 눈을 뜨고, 고개를 들고, 치밀어 오르는 부끄러움을 꾹꾹 누르며 활짝 웃었다.
“선생님들! 사랑해요!”
왜냐면 이번엔 진짜 내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
내 갑작스러운 고백에 준휘 선생님과 민 선생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주변 아이들은 물론이고 우리를 호위하기 위해 와 있던 어른들도 이쪽을 돌아보며 굳었다. 나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숨겼다. 그 순간 민 선생님이 나를 꽉 힘주어 끌어안았다.
“나도! 사랑해, 은하야!”
억! 과연 A랭크 마법사……! 완전 힘세다! 숨이 막힐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옆에서 준휘 선생님이 ‘야, 야. 그만둬.’ 하며 만류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애인을 옆에 두고 다른 사람한테 사랑한단 말을 돌려주면 안 되지.
“봤어? 방금 봤어, 준휘야? 은하 귀여워. 완전 귀여워!”
“어, 어……봤다.”
준휘 선생님이 왠지 맹한 투로 중얼거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귓가에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렇지? 귀여워! 준휘 선생님을 향해 민 선생님이 더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선생님! 치사해!”
“선생님들 완전 치사해요!”
“부럽다!”
“야! 방금 들었어? 은하 님이……!”
“우우우우우! 이런 게 어딨어요!”
나는 이번에야말로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하, 진짜. 이제 슬슬 놔주시죠……. 슬슬 진짜 숨 막히거든요…….
다행히 준휘 선생님이 적당히 중재해 주었다. 나는 민 선생님의 품에서 벗어나며 숨을 골랐다. 그래도 괜찮아. 전에 남친이 했던 것보다는 덜했어. 나는 숨을 고르며 두 사람을 곁눈질했다. 민 선생님이 상기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준휘 선생님이 답지 않게 좀 들뜬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더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나는 격한 애정 인사를 마친 후 새침하게……부끄럽게……민망하게……전속력으로 달려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 인하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인하는 나보다 키가 주먹 하나만큼은 컸다. 내 얼굴은 무사히 전부 가려졌다.
“부, 부끄러워…….”
“……왜 갑자기 너답지 않은 행동을 한 거야?”
“아니, 그게, 내가 쌤들한테 죄를 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흐음…….”
나는 인하의 말투에서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 콧소리가, 어쩐지……. 나는 인하의 얼굴을 확인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삐, 삐쳤다! 얘 삐쳤어!’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평소의 차가운 인형 같은 표정이지만, 그래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인하 얘, 지금 틀림없이 삐쳤다! 이유는 명백했다. 내가 지금 선생님들한테만 사랑한다고 말해서. 나는 무심코 키득 소리 내어 웃었다.
“……? 뭐야?”
“아니. 아무것도. 인하는 귀여워~.”
나는 손을 뻗어 인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인하가 나보다 키가 크긴 하지만 발돋움할 정도는 아니다. 인하가 뺨을 살짝 붉혔다. 우리 인하는 정말 왜 이렇게 귀여운 걸까! 한수가 인하를 보며 코웃음 쳤다. 한수 역시 인하와 같은 이유로 살짝 삐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한수는 쓰다듬어 주지 않았다. 왜냐면 나도 얘한테 약간 삐친 게 있거든. 뭐냐고? 둔감해서 그렇지 왜긴 왜야. 그래도 한수가 문제인 건 아니니까 화난 건 아니다, 삐친 거다!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 있는데 꽤 안면을 익힌 아이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윤시하, 강예슬, 아르델이. 시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살짝 붉히며 소심하게 시선을 피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세 사람과 마주 봤다.
“안녕, 얘들아.”
“안녕!”
시하를 제외한 아이들은 평소처럼 해맑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러자 친구들이 마주 인사했다. 나는 아르델에게 잠깐 시선을 두다가 곧 평범하게 인사했다.
“안녕.”
“무슨 일이야?”
“슬슬 선생님이 모이래. 그래서 그런데 한수를 데려가도 될까?”
나와 인하는 1반, 현호랑 민희는 2반, 한수만 혼자서 3반이다. 그리고 3반에는 아르델과 시하, 강예슬도 속해 있다. 나는 말없이 한수를 돌아보았다. 막 인하도 한수를 돌아보고 있었다. 인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든가.”
그러자 한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야! 왜 네가 맘대로 정하는데?”
“내 맘이니까?”
“아오……!”
한수가 이를 갈자 인하가 새침하게 물었다.
“왜. 가기 싫어?”
별 뜻 없는 말 같기도 했다. 한수는 이를 갈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다. 간다, 가.”
“흐음~.”
아르델이 한수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훑더니 우리를 향해 생긋 웃고는 이내 한수의 옆에 따라붙었다. 그 모습이 썩 다정했다. 하아, 저 아인 대체 무슨 속셈인 걸까. 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데 스승님이 내 머리 위에 툭 손을 얹었다.
“뭘 그렇게 신경 써?”
“으음……아무것도 아니에요…….”
괜히 가기 전부터 귀찮은 일에 감정을 소모한 것 같다. 나는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확실히 이미 많은 학생이 운동장에 도착해 있다. 잠시 후 우리도 민 선생님의 인도에 따라 줄을 섰다. 민희와 현호, 스승님과 준휘 선생님과는 헤어졌다. 머지않아 집합 시간이 되었다. 곧 출발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동 수단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들떴다.
“좋아, 다 모였네.”
인원을 확인한 후, 민 선생님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아래로 늘어뜨렸다. 금속 목걸이 줄 아래로 정십자 모양 펜던트가 흔들렸다. 은색 금속 위로 사파이어처럼 푸르른 마력석이 정십자를 따라 박혀 있었다. 펜던트 위로 마력이 일렁거렸다. 민 선생님이 입을 열어 뭐라 읊조렸다. 아마 시동어가 아닐까.
“「승인」.”
우웅─
주위 풍경이 순식간에 밀려나며 새카만 공간에 잠식되었다. 다만 우리의 모습만은 빛이 지켜 주고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아이들이 모두 신기해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동」.”
주위 광경이 또 한 번 변했다. 일그러진 세계가 비치고, 그 너머로 단단한 막이 보인다. 아마 이공간이려나? 어둠 사이로 거대한 물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행기도 있고, 우주선도 있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커다란 비행선 갑판 위였다.
“와!”
“멋지다! 엄청 높아!”
기대감이 한순간 공포심으로 물들었다. 나는 고조되는 긴장감과 기대감에 입술을 떨면서도 애써 웃었다. 비행기를 타기 전보다 조금 더 떨렸다. 그래, 우리는 천공 도시 유펠르시아까지 대현 협회 소유의 이 비행선을 타고 갈 것이다. 비행선도 종류가 많은데, 우리가 탄 비행선은 속도가 느린 편인 함선형 비행선이다. 속도 면에선 좋지 않지만 여행하는 기분을 만끽하기에는 딱 좋다.
물론 비행선으로 이동된 건 우리 담임 선생님들이나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스승님처럼 우리의 보디가드를 맡은 대현 소속의 다른 성인 마법사도 함께였다. 다른 사람들이 확인을 위해 안으로 들어간 사이 준휘 선생님이 아이들을 통솔했다.
“출발할 때까지 아래로 내려가지 말고 이 안에 있어라. 짐은 잘 챙겼지?”
““네에!!””
아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대답했다. 준휘 선생님이 안내문에 쓰여 있던 주의 사항을 몇 개 읽었다. 학생증은 절대 몸에서 떼 놓지 말 것. 옷은 너무 과하지만 않으면 된다. 귀중품은 아공간에 넣어 두고 웬만해서는 꺼내지 않는다. 돈은 적당히 사용할 것.
그래서 나는 이번에 현금은 적당히 챙기고 해외용 체크 카드를 챙겨 왔다. 평소라면 선생님 말대로 적은 현금만 가져왔겠지만, 이번 기회는 놓칠 수 없다. 유펠르시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정석이 있는데, 그게 상당히 비싸다고 한다. 내가 돈을 모은 건 이런 날을 위해서다. 참고로 부모님한텐 비밀이다. 큰돈을 한 번에 휙 쓴 걸 들키면 함부로 썼다고 엄청 혼날 테니까.
‘미리 해외 결제를 신청해 놓아서 다행이었지 뭐야.’
나는 속으로 신나 하며 준휘 선생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유펠르시아에 도착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3시간이다. 아래 객실은 공동 객실만 사용해라. 그리고……유펠르시아에 도착하고 나서는 절대 혼자서 다니면 안 된다. 다시 한 번 말해 두지만 학생증은 절대 몸에서 떼지 마! 화장실 갈 때도, 잘 때도, 한시도 떼면 안 된다. 너희도 이제 6학년이니까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지?”
“네!”
“알아요!”
“선생님은 걱정이 많다니깐~.”
“──어휴, 전혀 모르면서.”
나는 아이들을 향해 경고하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준휘 선생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방금 새침한 말을 한 것은 아르델……이었다. 아까는 한수 곁에 꼭 붙어 있더니, 언제 여기로 왔담? 참고로 한수는 아까 인하가 자길 아르델한테 넘긴 것 때문에 삐쳤는지 대열 흐트러지자마자 찾아와서 인하랑 계속 싸움 중이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아르델이 생긋 웃었다.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돌려줬다. 이건 참,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그때 덜컹하며 발밑에서부터 진동이 느껴졌다.
“어?”
“출발하나 봐!”
정말. 이공간 윗부분이 사각형으로 점점이 흩어지며 열렸다. 푸르른 하늘이 빛처럼 새어 들어왔다. 그와 함께 비행선 선체도 점점 하늘을 향해 떠올랐다. 나는 그것을 보며, 혹은 느끼며 입을 벌렸다.
선아 아줌마 덕택에 작은 비행선은 몇 번 타 본 적 있지만 이렇게 큰, 배를 닮은 비행선을 타는 건 처음이다. 붕 뜨는 감각에 가슴도 들떴다.
비행선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땅이 멀어졌다. 나는 아찔함을 느끼면서도 난간에 매달려 아래를 보았다. 비행선 주위로 만일을 위한 추락 방지 네트 및 방어막이 펼쳐져 있음을 알기에 두려움이 좀 더 옅어졌다.
땅이 너무 멀어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다. 평소 부유마법을 쓸 땐 이렇게 높이 날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지금의 내 신체로 추락해도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난다.
수도권 주변을 떠다니는 하늘 마을이 가까이에서 보였다. 나는 이윽고 활짝 웃었다.
“웬일이냐. 안 무서워?”
“생각보다 괜찮아. 비행기 타는 거랑 똑같은 느낌이야.”
그러자 한수가 안심한 기색으로 다정하게 웃었다. 와, 평소 보기 힘든 솔직한 미소다. 그렇게 생각하며 반대쪽을 돌아보니, 이번엔 인하가 나를 보며 다정하게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뻘쭘해졌다. 이 둘, 이렇게 보면 쏙 빼닮았단 말이야.
나는 아르델을 한 번 흘끔거리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저 애가 잘못 짚은 것 같다.
우리는 한동안 난간 근처에서 옅게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을 맘껏 즐기다가 그 주변에 앉아 빈둥거리며 놀았다. 객실로 내려가는 아이들도 꽤 있었다.
저녁 하늘을 밝히는 조명 아래에 앉아, 친구들은 자거나 과자를 뜯어 먹었고, 나는 책을 읽었다. 하늘을 나는 배 위에서 책을 읽는다라, 참 낭만적인 시추에이션이다. 준휘 선생님 말대로라면 도착할 때까지 3시간이 걸릴 테니 딱 좋았다. 그 정도면 책 한 권 정도는 속독 안경 없이도 전부 읽을 수 있다.
그렇게 비행선은 3시간을 꼬박 날아 유펠르시아에 도착했다. 하늘 곳곳에 있는 터널을 통과하며 날았음에도 무려 3시간이나 걸렸다. 그동안 하늘 풍경이 몇 번이나 변했다. 노을빛 하늘은 어느새 새파래졌다.
‘도착했다’는 방송이 들린 것은 내가 친구들의 칭얼거림을 무시하며 책 두 권을 막 다 읽었을 때였다. 새파래진 창공 사이로 준휘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일어서서 줄 서라!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 어디?”
“와! 저기 봐. 저거 아냐?”
주변 아이들의 활기찬 목소리에 나는 책을 아공간에 집어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구름 사이로 거대한 섬의 모습이 보였다. 드넓은 바다와 끝없는 하늘의 한가운데에 커다란 섬이 여러 개 떠 있다. 저 멀리 하늘에서 폭포가 쏟아져 내렸다. 폭포가 쏟아지는 하늘에 무지개가 걸려 있다. 아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우와, 저기 무지개 떴어! 예쁘다!”
“정말, 예쁘다!”
“천공의 나라 유펠르시아……라.”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폭포를 응시했다. 폭포는 자세히 보면 쏟아지는 게 아니라 길을 따라 정확하게 흐르고 있다. 사실은 폭포가 아니라 강인 것 같다. 하늘에 떠 있는 강. 마치 구름에서부터 물을 짜내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비행선은 흘러 흘러 구름 근처에 선착했다. 원래라면 구름 위에 배가 선착할 수 있을 리 없지만, 이 구름은 마법으로 만든 구름이다. 우리는 줄을 맞춰 차례로 아래로 내려왔다. 이렇듯 자연을 마법에 물들여 이용하는 것이 유펠르시아의 문화였다.
“와! 구름으로 만든 길이야!”
“푹신푹신할 것 같은데 의외로 딱딱하네.”
하지만 말로만 들었지 직접 겪는 것은 처음이다. 몇 걸음 걷자 단단한 흙으로 된 땅이 밟혔다.
유펠르시아는 하늘에 떠 있는 모습에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넓은 나라이며, 몇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섯 개의 섬에 여러 계급의 사람들이 각각 나뉘어 산다. 왕족과 귀족, 기사 및 가장 많은 국민들이 살고 있는 중앙 섬, 셰크릴. 물이 내려오는 하늘에 위치한 물의 섬, 슈만. 구름이 가장 많은 하늘에 위치하여 구름의 섬이라고 불리는 카멘. 자연의 중심점에 위치한 바람의 섬, 아즈빌. 번개와 가까운 장소라 하여 번개의 섬이라 불리는 트루첼, 마지막으로 가장 작으면서도 가장 위대한 섬, 아크다.
이건 유펠르시아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섬과 섬 사이의 거리가 상당히 멀다. 하늘 사이로 섬의 윤곽이 상당히 희미하게 보였다.
세차게 불었던 바람이 섬 안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잦아들었다. 선착장 주변에는 우리가 타고 온 비행선을 제외하고도 많은 비행 물체가 서 있었다.
바닥을 덮는 잔디로 인해 초록으로 물든 광장이 이 나라의 입국 관리소였다. 우리들은 각자 이 섬에 들어오기 위한 여권과 증명 패스를 가지고 있다. 덕분에 간단한 체크만으로 중앙 섬, 셰크릴에 아무런 문제도 없이 들어올 수 있었다.
“지금부터 비행 버스를 타고 이동할 거다. 다들 학생증은 잊지 않고 가지고 있지?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부르고, 절대 친구들과 마음대로 떨어지면 안 된다. 알았지?”
““네!!””
아이들이 호기롭게 대답했다. 이 나라는 낯선 외국이다. 떨어졌다간 분명 상당히 난감해지리라.
새파란 하늘이 참으로 가까워 보인다는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모두 외국어를 쓰고 있다. 물론 번역마법을 쓰면 전부 알아들을 수 있지만 그래도 낯선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생소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줄을 따랐다.
비행 버스는 말 그대로 비행 버스다. 다만 버스라고 하기에는 소형 우주선에 가까운 형태였다. 둥글고 납작하며 하늘을 나는, 말 그대로 비행하는 공공 이동 수단이다.
우리는 철로 된 비행 버스에 올라탔다. 이 나라에는 하늘 도로가 구축되어 있다. 특히 버스 같은 대중교통은 그 선로를 그대로 따르게 되어 있다. 마력으로 표시된 불투명한 길이 보였다. 버스는 정확히 그 안을 통과하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섬의 풍경은 우리가 사는 곳과는 전혀 달라 매우 신기했다. 나라 곳곳에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나무가 높게 높게 뻗어 있다. 사람들은 다들 날아서 돌아다녔다.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쓰는 사람은 매우 적다. 그 때문인지 자동차가 다니기 힘든 길이 많았다. 좁은 골목뿐만이 아니라 계단식으로 된 건물과 길이 다수를 차지한다. 무엇보다 나무가 많다. 웬만한 집은 나무 덩굴에 휘감겨 있었다. 또한 집과 길을 이루는 돌은 대부분 상아처럼 하얬다.
마치 전통 판타지 속에서나 나올 법한 광경이라 나는 한순간 넋을 잃었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과연 유펠르시아. 소문은 들었지만 진짜 마법의 나라다. 그것도 옛 느낌을 제대로 살린 마법의 나라다.
중간중간 사람들이 보였는데, 그들 중 몇 명은 문양이 새겨진 로브를 입고 있었다. 매우 멀었지만 시력이 워낙 좋아 전부 보였다.
“왕궁 마법사…….”
유펠르시아는 마법사 랭크와는 별개로 유펠르시아만의 전통적인 방식을 사용해 마법사의 종류와 계급을 책정한다.
자연을 매개로 마법을 사용하는 자연 마법사, 나라를 지키는 마법을 사용하는 수호 마법사,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생활 마법사. 이 외에도 종류가 많다. 사실 이건 지어내기 나름이다. 그중에서 제일 대단한 것은 왕궁 마법사다. 그건 유펠르시아에서 강함을 증명하는 고귀한 칭호다.
왕궁 마법사는 강함에 따라 또 다섯 개의 계급으로 나뉜다. 저 로브는 왕궁 마법사만이 입는 로브로, 계급에 따라 문양과 장식의 색깔이 다르다. 제일 아래인 5급은 갈색, 4급은 녹색, 3급은 보라색, 2급은 파란색, 1급은 빨간색, 특급은 하얀색을 사용한다.
왕궁 마법사는 최저 C랭크 이상이어야 될 수 있기 때문에 유펠르시아에서는 누구에게나 선망받는 직업이라고 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국가 치안 유지, 왕궁의 보호, 범죄 조사 등등 나라의 큰일에 관련된 일들뿐이다. 부정부패 같은 것은 있겠지만 왕궁 마법사라는 시스템 자체가 나한테는 가슴을 설레게 하는 요소였다. 진짜 판타지 같지 않나.
우리가 가슴 설레 하며 처음으로 향한 장소는, 유펠르시아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계절 꽃 들판이었다. 넓고 커다란 이 들판엔 계절마다 계절에 맞는 다른 꽃이 핀다고 한다.
게다가 이 들판에 피는 꽃들은 전부 이 유펠르시아에서만 자라나는 꽃들뿐이다. 전부 마법 꽃이다. 독초도 있긴 하지만 접촉 및 반출 금지고, 대부분은 피로를 회복시키는 꽃,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꽃 등 좋은 효과를 가진 꽃들이 모여 있다. 그 중심에는 제법 오래된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그 나무 역시 계절마다 다른 꽃을 피운다고 한다. 유펠르시아의 계절 나무라고 해서 이 나무 역시 제법 유명하다. 그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는 시간의 마력을 품고 있어서 계절을 불러온다고 한다.
참고로 평범한 꽃이나 나뭇잎이라면 한 송이나 한 장 정도는 가져갈 수 있다. 그래서인지 꽃밭에서 마주친 한수는 매우 들뜬 얼굴로 들판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인하를 향해 배시시 웃으며 속삭였다.
“한수한텐 완전 천국이겠다. 그치?”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이건 한수에게 있어 마법을 좀 더 위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다. 내가 책과 영상을 통해 공부하는 것처럼 한수는 많은 꽃과 나무를 보며 공부한다. 뭐, 그냥 한수가 식물을 좋아하는 것도 있다.
한수의 옆에는 또 아르델이 붙어 있었다.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아르델을 좇았다. 혹시 쟤 정말로 한수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면 또 맞는 것도 같다. 감정이란 게 꼭 눈에 선하게 보일 정도로 깊은 감정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안 어울리는데. 나는 속으로만 실례인 감상을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이미 꿈결같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아 버리고 말았으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푸른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꽃 들판을 보았다. 한수도 꽃과 나무를 좋아하지만, 나도 꽃과 나무를 좋아한다. 한수처럼 지식을 쌓을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나는 꽃밭들 사이로 난 길을 보며 내심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길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걷다 보니 자연적으로 난 길이었다. 울타리나 철장 같은 것은 없다. 이런 게 오히려 풍취를 돋우어 좋았다. 이런 꽃 사이에 파묻혀 드러눕는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나는 들떠서 뺨을 붉혔다. 비록 누울 수는 없지만 꽃밭을 거니는 것만도 제법 환상적이다. 속에서만 흥얼거리던 노래가 입 밖으로 조금씩 흘러나왔다. 전생에 유명했던 노래로, 지금 이 세계에는 없는 노래다. 엄마 몰래 아공간에서 꺼낸 USB를 이용해서 곧잘 듣고 있다.
들판을 지나 사진을 찍고 또 바로 이동했다. 가까운 곳에 있는 하늘 수로를 구경하다가 나선 모양 하늘 수로를 따라 뱃놀이도 했다. 유펠르시아는 번화한 나라지만 그 이상으로 자연 경관이 잘 유지되고 옛 풍취가 잘 남아 있는 나라였다. 저 계단식 집들도 전부 유펠르시아 전통 가옥이다.
길을 거니는 동안 계속 기분이 좋았다. 따스한 햇볕과 풍취를 느낄 수 있는 넓은 자연 경관까지. 울타리 너머로 양을 키우는 집이 보였다. 북실북실한 양들이 자거나 뛰어다니는데 정말로 귀여웠다.
나는 동물을 좋아한다. 전생에는 동물을 많이도 키웠다. 뭐든지 좋아했다. 햄스터부터 토끼, 고양이, 개, 새, 웬만한 애완용 동물은 다 한 번씩 키워 봤던 것 같다. 가장 애착을 가졌던 건 개와 고양이였다. 죽을 때마다 울고 또 울었다. 이런, 또 생각났다. 나는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다.
나는 귀여운 양들을 질릴 때까지 보고 또 봤다. 수로를 건너다가 꼭대기에 물을 끌어오는 장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폭포를 타고 흘러 내려갔다. 조금 무서웠지만 마치 놀이 기구를 타는 것처럼 즐거웠다.
“점심시간이다!”
“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