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12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던 거냐! 이 멍청한 것. 초등학교를 졸업해도, 의무 교육 기간이 끝나도 똑같다! 넌 여전히 애송이야! 아무 때나 찾아와도 되고, 필요할 땐 언제든지 물으러 와도 된다. 이 못된 것.’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분명 그렇게 말해 주었지만, 그래도 만나야 할 이유가 없어지면……사라지면…….
중학교에 올라가면 나도 분명 많이 바빠질 것이다. 그러면, 만날 수 있는 이유가 없는 이상 멀어지게 된다. 모두가 분명 그럴 것이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예외는 있지만 그건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사실이었다. 마음은 언제까지나 곁에, 만화 속 그 대사는 참으로 현실적이지 않다. 그게 가능한 경우는 아주 적지. 나는 그런 속내를 숨기며 스승님에게 물었다.
“스승님은 어떤 꽃을 좋아해요?”
“꽃?”
“네. 꽃요.”
나는 예전에 했던 결심을 떠올렸다. 스승님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은……그래, 장미란다. 분홍색 장미.”
“장미요? 스승님은 정말 화려한 걸 좋아하네요.”
“그럴지도.”
“준휘 선생님은 어떤 꽃을 좋아해요?”
“그 녀석은 아무거나 좋아해. 굳이 따지자면 나무를 더 좋아하는군.”
“그럼 민 선생님은요?”
“그 녀석은 다 싫어하고.”
“…….”
나는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꽃을 싫어하면 곤란한데. 음, 그렇다고 애제자가 꽃을 준다는데 싫어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속으로 고민하다가 다과를 다 먹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기다가 멈칫하며 다시 스승님을 한 번 돌아보았다.
“저기요, 스승님.”
“뭐냐?”
“……계속 스승님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나로서는 꽤 용기를 내서 한 말이었다. 눈가가 뜨거워지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주먹 쥔 손 안에 식은땀이 맺혔다. 솔직히 긴장, 했다. 많이, 매우 많이. 아마 스승님은 그런 내 심정을 눈곱만큼도 몰랐을 것이다. 잠시 후 스승님은 ‘뭐냐, 겨우 그거냐.’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려무나.”
나는 스승님을 돌아본 채 살풋 웃었다. 달깍,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눈물은 나오려다 말았다. 나는 메마른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주저앉을 뻔했다. 긴장한 만큼, 예감했던 만큼, 그만큼 슬펐다.
통보를 받은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인하도, 민희도, 현호도, 한수도 받았다. 민희는 통보를 받고서 엉엉 울었다. 민희의 선생님은 절대 안 그럴 것 같은 인상을 하고서 민희한테는 팔불출이었는데, 이번에도 그 통보에 민희가 울음을 터트리자마자,
‘언제든지 와도 돼! 또 같이 실험하자! 어, 그리고, 연장할까? 좋아, 연장하자. 졸업할 때까지! 그 후에도 물론 괜찮고!’
당황하며 이랬다고 한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서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진짜 큰일은 사실 이다음에 일어났다.
☆
졸업 날은 차근차근 다가왔다. 예행 연습을 하고, 기숙사에 들어가기 위한 짐도 다 쌌다.
졸업식 전날의 일이었다. 인하가 불현듯 내게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은하야, 나 요즘 어딘가 이상해!”
드물게도 필사적이고 다급한 어조라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 싶었다.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인하에게 물었다.
“뭐가? 어디가 이상한데?”
“이상해, 자꾸.”
“자꾸?”
“그…….”
인하는 답지 않게 제대로 말을 못 이었다. 망설이며, 무심코 얼굴을 붉혔다. 그것을 보고 인하가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았다. 드디어? 생각보다는 오래 기다렸다.
“하, 한수를 볼 때…….”
인하가 곤혹스러운 기색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얼굴을 붉히고, 긴장하는 듯 주먹을 쥐었다 펴며,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이상해. 자꾸 신경이 쓰여. 계속, 어디에 있는지 찾게 되고, 시선이 가고……웃으면 괜히 기쁘고, 근데 가슴이 이상하게 아프고…….”
인하는 부끄러운지 연신 눈을 깜빡이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왜 부끄러워하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너나 민희는 상관없는데, 다른 별로 안 친한 여자애랑 같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보이면 왠지 가슴이, 여기가 무거워.”
“아르델 같은?”
“응, 맞아! 아르델이랑 있을 때 제일 무거웠어.”
인하는 살짝 울상을 지었다. 어설프게 마주 잡은 양손이 떨린다.
“그리고……이상해. 진짜 이상해. 바로 옆에 있으면……가슴이 뛰어. 손만 움직여도 긴장되거나, 닿은 부분이 뜨겁고……. 몰라. 자꾸 긴장돼.”
인하가 곤란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수는 친군데, 친한 친군데……자꾸 어색한 기분이 들어. 은하야, 나 왜 이럴까?”
“고민돼?”
“응. 고민돼. 나, 한수랑은……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은걸!”
말을 이으며 점점 더 고개를 숙이던 인하가 이윽고 울상이 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껏 다정하게 웃고 있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기쁘고 가슴이 벅찼다. 모든 다정함과 상냥함을 끌어모아 인하를 안아 다독여 주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인하가 처음으로 한수에게 가슴을 두근거렸던 순간을 안다. 그 수학여행 날이다. 감정은 점점 쌓여 갔고, 이내 흘러넘쳤다. 나는 그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많이 보아 왔다.
그래서 나는 지금 너무너무 기쁘다.
나에게 있어서 친구들은 ‘아이’였다. 나 역시 어른이라기엔 모자람을 알고 있다. 기억은 뭉텅 잘렸고, 크면서도 계속 아이다움을 간직했다. 이 세상에 어른다운 어른이 대체 얼마나 되겠느냐마는.
소심하기에 더욱 그랬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서툴렀다. 나는 사실, 그렇게 어른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등을 돌리고 혼자 나만의 이야기를 그려 온 만큼, 외로워한 만큼 어른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나에게 있어 친구들은 ‘아이’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인하도, 한수도, 민희도, 현호도, 시하도, 전부 다!
그랬던 인하가 벌써 사랑을 알게 되었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보내는 그런 사랑이 아닌 이성에게 느끼는 사랑 말이다.
무심코 오래된 책의 흐릿한 낱장이 된 첫사랑이 떠올랐다. 이제 기억하는 거라곤 기껏해야 분위기뿐이다. 지나가고 나서야 그것이 사랑임을 알았다. 그 이후로는 오랫동안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았다. 여신님을 만나고 나서야 지금의 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래, 나의 소중한 여신님을 만나고 나서야.
제법 격렬한 사랑을 했다고 생각한다. 끝없이 그저 사랑하기만 했다. 꺼지지 않는 불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
나는 쇄골 근처에 손을 올리며 소망하듯이 반지를 쥐었다.
“신경 쓰인다고?”
“응? 응…….”
“정신을 차리면 눈으로 좇고 있고?”
“응!”
“가끔 이유도 알 수 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속상해지고, 가슴이 세게 뛰진 않아?”
“맞아! 그래. 자주 그래! 혹시 이게 뭔지 알아? 아는 거지?”
인하가 기대 어린 눈으로 내게 바싹 다가왔다. 나는 답을 말해 주었다.
“그건, 좋아한다는 거야.”
인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으음? 생각지 못한 반응에 나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곧 인하가 팔짱을 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건 나도 알아. 나는 한수를 좋아해. 말로 하니 좀 분하지만, 좋은 친구라고 생각해.”
아아, 어쩐지. 그렇게 이해했구나. 이번엔 내가 말을 잘못한 것 같다.
“내가 한 말은 그런 뜻이 아냐, 인하야.”
“그럼?”
“그 사람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며 떨리고, 손끝 하나만 닿아도 신경 쓰이고, 얼굴을 붉히고, 수줍어하고, 신경 쓰여서 어쩔 줄을 모르겠고. 그건 바로 사랑이야, 인하야.”
“그러니까…….”
“친구를 좋아하는 감정과는 좀 다른 거야. 너희한테 러브 레터를 보낸 사람들이 너희에게 품는 감정, 고백해 온 사람들이 너희에게 기대한 감정. 즉, 인하 너는 한수랑 사귀고 싶은 기분으로 좋아하고 있는 거야.”
“…….”
인하가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지 않는 인하에게 이 표정은 제법 이례적이었다.
나는 인하가 가만히 반응을 보이기만을 기다렸다. 인하는 더듬더듬 손을 들어 올렸다. 평소 차가웠던 눈동자가 동요로 잘게 떨렸다. 인하가 양손으로 입을 막으며 얼굴을 확 붉혔다. 그 모습이 매우 또래 여자아이다워 나는 그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찬란하고 아름답다. 이렇게 예쁜 인하는 나도 처음 본다. 아이가 처음 사랑을 자각한 순간만큼 예쁜 게 또 있을까.
분하지만 한수는 좋은 놈이다. 그러니까……인하가 반할 만큼 말이다.
“……그렇구나.”
이윽고, 인하는 떨리는 목소리로 인정했다.
“나, 한수를, 좋아하는구나. 걔들처럼…….”
그러고 인하는 다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대단하다. 시간은 정말 빠르다. 나는 눈을 감았다 뜨며 몇 번째인지 모를 생각을 또 했다. 인하의 주변으로 흐르는 감정의 색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정말 언제 이렇게 컸을까…….’
인하는 나보다 주먹 하나만큼 키가 크다. 하지만 아이들이 진정으로 성장하였음을 느끼는 순간은 바로 이런 때다. 인하도 이젠 완전히 아이가 아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얼마 안 남았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 우리는 성인이 된다. 3년은 금방이다. 분명 지나고 보면 무척 짧게 느껴지겠지.
인하를 보며 가만히 감상에 잠겨 있는데 인하가 불현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럼, 고백하러 갔다 올게.”
인하는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멍하니 눈을 크게 뜨는 내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불꽃이 이는 듯 강렬한 눈동자였다. 감정으로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눈동자다. 나는 당황하며 인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뭐? 지금 당장?”
“응. 이 기분이 뭔지 깨달았으니까.”
“하, 하지만, 고백이란 건, 그, 장소라든가 분위기라든가……어쨌거나 이렇게 갑자기 하는 게……!”
나는 앞서 걸어가는 인하를 다급히 멈춰 세웠다. 그러나 인하는 감정을 선명히 새긴 그 눈동자로 고개를 저었다.
“나나 한수한텐 그런 건 전혀 소용없어. 몇 년 함께했는데. 아무것도 안 느껴져. 그리고…….”
인하는 말을 이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시간이 지나면 결심이 무뎌질 것 같아.”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멋있다. 심하게 멋있다. 대체 뭐야, 이 박력은. 한순간 머리가 텅 빌 정도였다.
“갔다 올게.”
인하가 다시 몸을 돌렸다. 나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인하를 다시 한 번 말렸다.
“기, 기다려!”
“왜?”
인하는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인하의 양어깨를 붙잡고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최소한 예쁘게 꾸미기라도 하자!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하는 역사적인 순간인데, 적어도 예쁘게 꾸미고 가야지!”
“…….”
인하는 한순간 언짢은 기색을 보였지만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수줍게 붉어져 고개를 끄덕였다.
인하가 고백하기로 결심한 것은 한밤중이었다. 그날 밤, 나는 짧은 시간이나마 성의와 열의를 전부 바쳐 인하를 꾸몄다. 조금 어른스러운 원피스를 입히고, 머리를 곱게 빗기고, 액세서리에 신발까지 꼼꼼하게 맞췄다.
“그럼 갔다 올게.”
인하는 작게 손을 흔들더니 텔레포트로 휙 사라졌다. 나는 구름이 낀 새까만 하늘을 올려다보며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제발 잘되기를.’
간절하게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졸업식 날이 밝았다. 평소보다 약간 늦게 학교에 갔다. 리허설을 하고, 넓은 강당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리에 앉아 졸업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맹세컨대, 내가 졸업식 날 이토록 긴장해 본 것은 몇 번의 생을 살면서 이번이 처음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축사와 전체적인 감독을 하는 것은 초등학교 최고위 선생님인 민 선생님이었다. 양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있는 민 선생님을 보고 나는 그가 미남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졸업식은 초등학교 대운동장에서 거행된다. 졸업식장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나처럼 긴장하는 아이들이나 선생님들, 학부모들도 그 이유였으나 무엇보다 내 기분이 그러했다. 그러나 어수선했던 것은 잠시였다. 곧 졸업식이 시작되었다.
운동장 좌석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담임 선생님과 후배들, 일부 특수 교과목 선생님들은 당연하고, 우리들의 스승님, 부모님, 친한 선배들, 심지어는 유정 언니와 인호 오빠까지 와 있었다.
졸업생 대표는 한수가 맡았다. 한수는 평소와는 달리 약간 흐리멍덩했다. 그야 당연하지. 평소와 똑같았다면 한 방 때려 줬을 것이다!
교가를 부르고, 축사를 듣고, 졸업장을 받고, 그리고……무대 위에 올라가서 다 같이 인사했다. 동시에 커다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의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나는 무대 위에 선 채 시큰한 기분으로 박수 소리를 들었다. 대현 초등학교의 졸업식은 내가 알던 졸업식과는 조금 달랐다. 박수와 함께 함성에 가까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배! 졸업 축하드려요!”
“은하 님! 졸업 축하드려요! 중학교 올라가서도 힘내세요!”
“인하 선배, 축하드려요!”
“은하 선배!”
“민희 선배! 회장 때 진짜 멋있었어요! 고맙습니다!”
……목소리가…….
“한수 선배, 진짜 좋아했어요!”
“멋있고! 너무 예쁘고!”
“멋있다 하면 은하 님이 최고지!”
“다정하고!”
나는 함성 소리를 들으며 멍해졌다. 눈이 부셨다. 시야가 닿는 공간마다 빛이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준다니, 축하해 준다니, 이런 건…….
그 순간, 누군가가 옆에서 내 손을 붙잡았다. 민희였다. 민희가 양손으로 나와 한수의 손을 잡고 들어 올렸다.
“고마워!”
민희가 손을 흔들며 맨 앞으로 달려갔다. 덕분에 나와 다른 모두도 덩달아 다른 학생들을 제치고 맨 앞으로 나섰다.
“중학교 올라가서도 꼭! 위로 올라갈게!”
와아아아──!
함성 소리가 더 커졌다. 나는 그만 울 뻔했다. 나는, 나 역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눈앞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는데, 이 순간만큼은 전혀 긴장되지도, 부끄럽지도 않았다. 가슴이 그저 벅차고 또 벅찼다. 한수와 인하도 덩달아 손을 흔들었다. 현호는 민희 옆에서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퇴장 시간은 다가왔다. 우리는 아래로 내려갔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꽃다발이 한 아름씩 안겼다.
“은하 선배! 그때 구해 줘서 고마웠어요!”
“저희 아직도 못 잊어요! 엄청 무서웠거든요!”
나는 앞으로 한 걸음씩 걸어가며 한순간 눈을 감았다. 예전의 난 소심하고 소외된 그런 아이여서, 남의 관심 따윈 소설로밖에는 얻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히 만족했다. 그렇지만…….
부끄럽고 과분하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다. 나는 이내 달려갔다. 계획했던 대로 앞으로 달려갔다. 친구들이 내 뒤를 따랐다.
꽃다발이 마치 길처럼 펼쳐졌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흔들리는 시야를 보며 생각했다. 이건 나답지 않다. 그러나 나답지 않더라도 이번뿐이니까. 화려해도, 이번뿐이라면 괜찮다.
머지않아 후배들 사이에서 똑바로 서 있는 세 선생님이 보였다. 나를 향해 흐뭇하게 웃고 있다. 그 옆으로 동료인 다른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 일동, 친구들의 선생님들도 보였다. 참고로 이 이야기는 미리 친구들과 같은 학년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해 놓은 상태였다. 학년 전체가 기꺼이 찬동했다.
그 대표이자 선두가 나였다. 나는 달려가며 마법을 썼다. 아공간이 열리며 넘치는 꽃 더미가 품에 내려앉았다. 찬란하게 꾸며진 꽃다발을 스승님과 민 선생님, 준휘 선생님에게로 던졌다.
당황하는 선생님들을 향해 나는 활짝 웃었다.
“졸업식엔, 선생님들께 꽃다발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나는 다시금 달렸다. 선생님들을 지나쳐 달렸다. 한수의 마법을 몇 번이고 복사해서 겨우 만들어 낸, 난생처음으로 내가 직접 만들어 낸 꽃 더미. 남은 꽃잎들이 내 신호에 맞춰 흩날렸다. 하늘에서 꽃으로 된 비가 내렸다.
내 뒤를 따라오던 친구들도 각기 담임 선생님과 자신을 담당했던 선생님들께 꽃다발을 넘겼다. 그 뒤로 반 친구들도 담임 선생님과 신세를 졌던 선생님들께 우리에게 받아 챙겨 두었던 꽃, 혹은 자신이 마법으로 직접 만들어 낸 꽃을 넘겼다. 꽃을 생성해 낼 수 있는 마법을 가진 아이가 별로 많지 않았기 때문에 대개는 한수나 내가 직접 만들어 낸 꽃이었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소리쳤다.
“은하야! 졸업 축하한다!”
울음을 삼키기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달리던 나는 그제야 몸을 돌렸다. 활짝 웃으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교실에서 선생님들과 마지막 인사를 했다. 민 선생님은 나를 끌어안고 상당히 울었다. 고맙다고 말하며 울었고, 좋아한다고 말하며 웃었다. 나는 평소처럼 ‘좋아한다는 말은 애인한테나 하세요.’ 하고 민 선생님을 타박했다.
졸업식은 화려한 꽃다발에 둘러싸여 끝이 났다. 화려한 꽃다발을 바쳤고, 화려한 꽃다발을 받았다. 유정 언니와 인호 오빠는 드디어 우리가 중학교에 올라온다면서 기뻐했다. 유정 언니네만이 아니었다. 우리 위 학년, 이제 중학교 2, 3학년으로 올라갈 선배들 중 1/5은 그 테러 사건 때부터 초등학교에 다니던 사람들이었다. 즉, 중학생들 중에도 나를 동경하고 고맙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꽤 된다는 소리다. 그 사실을 깨닫자 상당히 부끄러워졌다.
짐을 챙겨 들고 기숙사에 입소했다. 많은 것을 챙겼다. 예쁜 옷, 좋아하는 옷, 맘에 드는 액세서리, 읽을 책과 인형, 필기구 전반 등등. 입소식은 입학식 날 한다고 한다.
‘……입학식.’
이윽고 중학교 입학식 날이 밝았다.
☆
하늘에서 하늘하늘 꽃잎이 내려왔다. 대현 초*중*고 입학식 날, 대현 학교 정문 앞에 선 소년이 입가를 올리며 씩 웃었다.
“드디어 왔다, 대현.”
뒤에 있던 소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너도, 말려도 듣지를 않는다니까.”
“어쩔 수 없잖아. 심장이 떨어져 버렸는걸.”
“그 여자애가 그렇게 강하냐?”
“그래. 두고 보라고! 너희들도 기절초풍할걸?”
“흐음…….”
“그러니까.”
갈색 짧은 단발머리를 한 소녀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고, 그 옆에 있던 보라색 눈의 소년이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로 옆의 소년을 응시했다. 그 소년은 씩 웃으며 고조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만나러 왔다. 유은하.”
프롤로그 스토리
1장: 초등학교 편 END
2장 예고편
“말도 안 돼……!”
“고작 만 15살의 아이가……!”
“후…….”
우리는 그렇게 운명처럼 만났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끼리, 함께하며 웃고, 떠들고.
“아! 또 졌어!”
“진짜 쟨 못 당하겠다니까.”
실력을 겨뤄 갔다. 어린 나이에 우리는 어른들의 실력을 금세 훌쩍 뛰어넘었다. 눈부시도록 찬란한,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는 누군가와 함께 웃을 수 있는 평온한 나날들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모든 것은 쉽게 깨어진다.
우리는 단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다.
##22. 괴물
나는 지루한 얼굴로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정말이지, 입학식이라는 건 어디든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어라? 예전에도 한 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나른한 시선으로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시야를 개방하자 눈 안으로 오색찬란한 색이 날아들었다. 그제야 기분이 좀 나아졌다. 세상에는 재능 있는 아이가 이렇게나 많구나. 지루함에 묻혀 있던 설렘이 다시 가슴 안에 피어났다.
툭.
인하가 손가락 끝으로 내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눈빛만으로 물었다.
‘왜?’
인하가 귓가에 속삭였다.
“모르는 사람이 엄청 많아.”
“응. 다들 강해 보여.”
인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전 내가 했던 것처럼 주위를 쭉 훑었다. 앞줄에서 뒷줄까지 다 같은 반이다. 대개 모르는 얼굴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인식하며 나는 아쉬워했다. 인하도 아쉽겠지. 한수랑 떨어지게 됐으니.
같은 반이 된 사람 중 대현 초등학교에서 같이 올라온 친구는 나와 인하를 제외하면 기껏해야 6명이다. 한 반 약 35명에 아는 얼굴은 6명, 안타까운 수치였다.
그리고……. 나는 누구 할 것 없이 계속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에 내 옆에 앉아 있는 인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와, 역시 인하다. 자태 하나로 주위 남자를 다 홀려 놨다. 아마 다른 곳에선 한수가 여자들을 홀리고 있겠지. 예쁘고 멋있는 애들이 대거 들어온 모양이지만 역시 인하와 한수만큼 멋있고 예쁜 애들은 없는 듯하다. 쯧쯧, 다아 임자가 있건만…….
‘그래도 선남선녀끼리 사귀니 얼마나 좋아! 눈 호강 하고!’
나는 이후 인하와 한수가 사귄다는 소식을 듣고 놀랄 사람들을 떠올리며 속으로 키득거렸다. 두 사람이 사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아직 서로의 부모님과 우리 부모님, 민희, 현호뿐이다.
입학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했다. 곧 우리는 각 반의 담임 선생님으로 보이는 인솔자들을 따라 교실로 향했다. 걸어가다가 우연히 민희와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며 줄을 따라 걸어갔다.
참고로 우리는 줄의 중간이었다. 그 탓에 안타깝게도 평소 자주 앉던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우리가 좋아하는 창가 맨 끝자리는 다른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우리는 창가 쪽 분단 뒤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았다. 앞, 뒤, 옆, 전부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 뒷자리에는 여학생 한 명만 앉아 있다.
‘서로 모르는 사이라서 그런지,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경우가 많네~.’
어수선한 와중임에도 학생들은 꼭 한 번씩은 인하를 흘끔 돌아봤다. 주위에서 탄성에 가까운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터졌다. 그중에서도 우리 뒤에 앉아 있던 여자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