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15
“실기면 대련을 하려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김우진의 말에 이소영이 수긍했다. 체육관에 실기 수업이니 아무래도 그 가능성이 제일 높겠지.
우리는 빠르게 걸어 체육관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습관적으로 기척과 발소리를 죽였다. 아니, 기척이라기보다는 마력의 낌새랄까? 안은 이미 학생들로 가득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소영은 어쩐지 누구를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 역시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기척이 달려들었다.
“엇……!”
“얘~들아!”
위로 도약한 인영이 휙 나와 인하에게로 안겨 들며 우리를 양팔로 꽉 끌어안았다. 으악! 나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인상을 썼다.
“민희야~! 깜짝 놀랐잖아!”
“에헤헤, 미안.”
민희는 중학교로 올라오면서 단발로 자른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작게 웃었다. 그러더니 놀란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같은 조의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쟤들은?”
“우리는 수업 체험 조를 짜서 하거든. 같은 조 애들이야.”
“아하~. 우리는 개별인데.”
민희가 키득키득 웃었다. 나는 민희를 반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다른 친구도 오지 않았나 싶어서. 하지만 민희뿐인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음 한수랑 현호한테도 첫 수업 이거 들으라고 할 걸 그랬어. 그러면 다 같이 모일 수 있는데.”
“그것도 괜찮네. 다음에 모일 만한 수업은 미리 의견 모을까?”
“찬성!”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옆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말을 걸어왔다. 다들 초등학교 때부터 알던 친구들이다.
“안녕. 너희들도 이 수업 들어?”
“너희는 여전히 친하구나.”
“은하네 반은 조별인가 봐. 같은 조 애들 부럽다~!”
나는 익숙하게 인사를 받았다. 동경받는다는 상황 자체는 여전히 좀 어색하지만 그래도 이런 행동들은 이제 익숙하다. 다만 신학기가 되어도 반응에 변함이 없다는 게 조금 슬펐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익숙한 대현 초등학교 출신 학생들과 달리 다른 조원 세 명은 다소 당황한 기색이었다.
“어, 너 학교에서 인기가 많구나?”
그러자 민희가 뻐기듯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후후, 몰랐어? 우리 은하는 대현 초등학교 출신 아이들 사이에서 엄청 인기가 많다구!”
“민~희~야~!”
“알았어, 미안 미안.”
나는 민희를 날카롭게 제지했다. 정말이지, 중학교에 올라왔으니 나에게 쏠리던 관심이 흐려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건만. 우리 대화를 듣고 강성우와 김우진이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는데, 이소영이 불현듯 어딘가를 보며 소리쳤다.
“아, 있다 있다! 여기야!”
목소리를 높이며 크게 손을 흔든다. 오, 같이 입학했다는 친구가 이 수업에 참여한 모양이다. 약간 호기심을 가지고 이소영이 손을 흔드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던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앗, 소영아.”
“…….”
두 남자가 이소영의 말을 받으며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어색하게 굳은 채 손에 움찔 힘을 줬다.
한 명은 검은 머리에 얼굴에는 다소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고, 또 한 명은, 역시 검은 머리지만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수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또다시 크게 뛰는 가슴을 애써 억눌렀다. 그래, 그 남자였다. ‘그 녀석’인 줄 알았던 남자.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진정해. 아니야. 외모 탓일 수도 있어.’
저 취향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한 외모에 누군들 안 두근거리겠나. 나는 입술을 이로 꾹 눌렀다. 이상하잖아. 저런 식으로 초면부터 싸가지 없는 말만 내뱉는 놈이 ‘그 녀석’일 리 없어. 아니면, 변한 건가? 환생했다고는 하나 저렇게 딴사람처럼 변할 수 있나?
나는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깊게 뛰던 심장이 점점 가라앉았다. 그야 변할 수도 있지. 하지만, 하지만…….
인하가 이소영을 향해 물었다.
“네 잘났다던 친구들?”
“맞아. 좀 잘났지?”
인하가 두 사람을 흘끔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 낭군님만큼은 아니지만!”
“……응.”
“푸합!”
두 사람의 대화에 민희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라면 나도 웃음을 터트렸을 테지만, 지금만큼은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두 사람을 내키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며 몸을 움츠렸다.
두 사람이 다가올수록 주변 여자들의 탄성은 커졌고, 넋을 잃은 채 인하를 바라보던 남자들은 기가 죽었다. 성큼성큼 이소영에게 걸어온 두 남자가 그녀에게 인사하고 우리를 돌아보았다. 나는 속에서 일어나는 어색함과 불편함에 무심코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약간 초조한 기색으로 주위를 살피던 장난스러운 인상의 남자가 우리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앗…….”
“너도 이 수업 듣는구나.”
말을 받은 것은 민희였다. 어라? 나는 의아한 눈으로 민희를 돌아보았다. 이소영도 조금 놀란 듯 물었다.
“혹시 같은 반이야?”
“아니. 합동 수업 때 만났어. 수업 듣다가 좀 친해졌고. 둘 다 대단하더라니까? 특히 저 조각남은 첫날부터 여자애들을 아주 기절시키겠더라.”
“……확실히 엄청 잘생기긴 했어.”
목소리에 채 감추지 못한 어색함이 묻어났다. 민희가 의아한 눈으로 내게 물었다.
“혹시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아니.”
“흐음.”
그러더니 민희가 내 귓가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잘생기긴 했지만 조심해. 성격 사납거든. 덕분에 수업 후반 때 분위기가 살벌했어.”
나는 이번에는 표정을 구겼다. 안다. 알고말고.
그때 인하가 눈을 크게 뜨며 갑자기 두 사람 중 한 명을 손가락질했다. 그러니까 어리숙하고 키가 좀 더 작은 쪽이다.
“어? 혹시 너…….”
지목된 상대도 뒤늦게 무언가를 눈치챈 듯 놀라 인하와 눈을 맞췄다.
“앗, 너는! 헤에, 오랜만이다?”
“네가 왜…….”
이어서 남자가 인하를 향해 친근하게 인사했다. 인하가 답지 않게 당황했다. 민희가 인하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깜짝 놀랐지? 나도 보자마자 놀랐어. 왜 여기에 있나 싶어서. 심지어…….”
말을 흐리던 민희가 이내 인하의 귓가에 뭐라 속삭였다. 그러자 인하의 표정이 차게 굳었다.
‘뭐지? 혹시 전에 만난 적이라도 있나?’
의아하긴 했으나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뭐, 만났을 수도 있지. 그보다는 저 차가운 남자가 더 신경 쓰였다. 불편하기 그지없다.
이소영 역시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민희와 인하를 보다가 이내 두 남자를 우리에게 소개했다.
“여긴 전에 말했던 내 친구들이야. 좀 장난스러워 보이는 애가 최인성, 키 크고 엄청 잘생긴 애가 이성진.”
거북함이 더해졌다.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최인성이란 남자는 어쩐지 조금 상기된 얼굴로, 이성진은 그저 관망하는 듯한 냉한 시선으로 우리를 응시했다. 잠시 이성진을 흘끔거리던 나는 곧 안심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어쩌면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긴, 지나가다 잠깐 스쳤을 뿐인걸. 아무리 생각해도 서로에게 해가 되는 만남이었으니 기억해서 하등 좋을 일이 없다.
그때 최인성이 어딘지 초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기……!”
“어휴! 너희도 참! 소개받았으니까 자기소개 해야지!”
그러나 민희가 그 말을 가로채듯이 우리를 앞으로 내세웠다. 아 참, 그렇지. 나와 인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근데 방금 말 가로막은 거 혹시 일부러……한 건 역시 아니겠지.
“그……난 유은하라고 해.”
이름만 말하고 끝내려다가 너무 짧은 것 같아서 고민 끝에 말을 덧붙이기로 했다. 뭐라고 말을 이으면 좋을까. 소영이한테 너희 이야기는 몇 번 전해 들었어? 아니, 나와 이소영은 아직 그렇게 친하지 않다.
“우리 초면이지? 잘 부탁해.”
“…….”
“…….”
전형적인 인사말에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가 있지 않은가. 그걸 인용한, 말 그대로 전형적인 인사말이었다.
“…….”
“……풉!”
그뿐이었는데 왠지 주위 반응이 이상했다. 최인성과 이소영은 조금 당황한, 혹은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고, 인하도 살짝 당황했으며, 민희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응? 어……그래……응…….”
최인성이 어쩐지 매우 실망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어, 어라? 혹시 나 뭔가 잘못했나? 당황하며 고민하는데 인하가 앞으로 나섰다.
“난 강인하. 이렇게 된 이상 잘 부탁해.”
“어어…….”
최인성이 힘없이 대답했다. 그 와중에도 이성진은 계속 묵묵부답이었다. 보다 못한 이소영이 이성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소영이 불만스럽게 인상을 찌푸리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더니 다시 생긋 웃으며 우리 옆에 있던 다른 친구를 두 사람에게 소개했다.
“여긴 이번에 같은 조가 된 강성우랑 김우진이야. 그리고 너는…….”
“안녕! 내 이름은 주민희야! 은하랑 인하랑은 초등학교 때부터 절친이고. 같은 조라고? 은하랑 인하를 잘 부탁해. 아, 넌 소영이지? 인성이한테 들었어.”
민희의 맑은 웃음에 조원들 역시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만난 지 기껏해야 이틀밖에 안 됐을 텐데 벌써 쟤네랑 그렇게 친해진 거야? 그러기가 쉽지 않을 텐데?”
“이성진은 잘 모르겠지만 인성이랑은 마음이 좀 맞더라고!”
과연 민희였다. 나는 속으로 짝짝 박수를 쳤다. 이소영은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그렇구나.” 하고 수긍했다.
잠시 후 이소영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최인성의 귀를 붙잡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두 사람이 구석에서 옥신각신하는 게 보였지만 그 내용보다는 몇몇 여학생들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흘기며 수군거리는 게 더 신경 쓰였다.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내 옆에서는 인하와 민희가 또 뭐라 속닥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두 사람한테도 별로 관심을 주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며 복잡한 머릿속을 조금씩 되짚었다. 그 녀석, 피의 맹약, 이성진. 생각에 잠겨 있다가 눈앞에 그림자가 진 걸 깨닫고 흠칫했다. 이성진, 그가 어느새 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
그는 당황해서 몇 걸음 물러나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이게 유은하라고…….”
그러더니 혀를 차고 고개를 돌렸다. 면전에 대고 엄청 실례되는 태도였다. 헐, 나는 겨우 무표정을 유지하며 그의 뒷모습을 향해 짜증 어린 시선을 보냈다. 하여간 하는 말마다 실례되는 놈이다.
‘아직 싸가지 없는 시기일 수도 있긴 한데, 그래도 좀 아니다.’
역시 그는 내가 아는 ‘그 녀석’이 아니다. 그 녀석도 분명 나처럼 환생했을 테고, 또한 전생의 나를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그 녀석은 나와는 달리 병에 걸리거나 사고라도 나지 않은 한 늙어서 죽었겠지. 그 시간 동안 성격이 변했을 가능성은 분명 있다. 있으나……그렇다고 저렇게까지 변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저건 그냥 아예 다른 사람 아닌가.
내가 아는 그 녀석은 좀 집착적인 면이 있긴 했지만, 가끔 저렇게 차가운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다정하고……장난스럽고……그런 녀석이었다. 최소한 초면인 사람 면전에 대고 실례를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니 역시 그건 내 착각이다.
‘착각이거나, 그 녀석과 관계가 있거나, 외모가 사람 같지 않아서 두근거린 걸 착각했거나.’
나는 초조한 기분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쟤 방금 혀 찼지?”
아르델이 긴 금발을 어깨 뒤로 넘기며 짜증 어린 시선으로 이성진을 흘겼다. 악감정을 가지기 매우 힘든 수려한 외모에 대고. 나는 순간 감탄했다.
“뭐야, 재수 없게. 반가워서 너한테 인사하려다가 이상한 걸 봤네.”
그러고는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신경 쓰지 마.”
“어……고마워.”
“별말씀을.”
아르델이 생긋 웃었다. 그러고는 이번엔 의아하다는 듯이 다른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근데 저 재수 없는 녀석이랑 같이 다니는 쟤, 아까 전부터 친구랑 대화 나누면서 널 자꾸 힐끔힐끔 보는데, 혹시 아는 사이야?”
“……뭐?”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돌린 순간 아르델이 말한 상대, 최인성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고 그는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그냥 이소영이랑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줄 알았더니, 아까부터 힐끔힐끔 봤다고? 어째서? 이성진이란 놈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다고는 해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수업 종이 친 것은 그 직후였다. 나는 아르델과 헤어져 인하 옆으로 갔다. 인하와 민희, 이소영, 그녀의 친구들, 그리고 같은 조원인 강성우, 김우진과 함께 움직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편했다. 평소 말이 없는 인하가 이소영과는 쉽게 대화를 이어 간다. 분명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는 소리겠지. 나도 그렇다. 첫인상도 그렇고, 지금 인상도 그렇고, 그리 나쁘지 않은 친구 관계를 이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거기에 대고 차마 인하에게 ‘저 남자가 나한테 재수 없다는 말을 한 장본인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반도 다르잖아. 일부러 만나려고 하지만 않으면 부딪힐 일도 별로 없을 거다.
‘……괜찮은 걸까?’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에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상하잖아. 피의 맹약은 분명히 성립되었다. 내 심장이, 영혼이 항상은 아니더라도 순간순간 저 남자를 그 녀석이라고 자각한다. 그게 진짜 그저 ‘관계가 있기 때문’일까?
아직은 잘 알 수 없지만……이성진이 이 학교 학생이고, 가끔씩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한, 분명 머지않아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슴은 저 녀석이라 하는데 머리는 아니라 한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정말로 이상한…….
‘정말로 저런 녀석이 아니었는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그사이에 담당 선생님이 들어왔고, 20분가량의 짧은 실전 수업이 시작되었다.
수업 내용은 선생님이 데려온 기계병과 전투를 치르는 것.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학생들은 네 팀으로 나뉘었다. 조건 없이 무작정 가까운 학생들끼리 뭉쳤다.
나는 시야를 개방하고 주위 사람의 마력을 확인했다. 상대 팀의 평균 마력,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우리를 방해할 기계병의 마력, 우리 팀의 평균 마력을 차례로 가늠했다. 힘만으로 따지면 우리 팀의 승리는 확정적이었다. 우리 팀에 강한 학생이 대거 몰려 있는 탓이다. 초등학교 시절 톱클래스였던 나와 인하, 민희, 거기에 아르델. 뿐만이 아니라 이소영도 그에 맞먹을 정도로 강했다. 그녀의 친구들 역시 무척 강한 힘의 소유자…….
‘어라……?’
다음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앞에서 이소영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남자, 그러니까 이성진, 그의 마력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좀 더 집중했다. 눈 안에 마력을 모았다. ……그래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주위로 얼핏얼핏 두리뭉실한 무언가가 비쳤다 사라졌다.
‘보이지 않아…….’
당황해서 숨을 삼켰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수많은 마력을 봐 왔다. 처음엔 내 주위의 마력, 마법의 마력, 그다음엔 사람의 마력, 물건이 품고 있는 마력, 자연에 속한 마력, 그렇게 많은 마력을 봐 왔다.
마력을 보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예 보이지 않은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처음일 것이다. 처음…….
일순 머릿속에 선아 아줌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어서 스승님과 민 선생님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들의 마력은 너무 강대해서 나로서는 전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떨리는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설마, 그럴 리가 없었다. 그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게다가 강한 마법사들의 마력은 분명 전부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아예 안 보이지는 않는다. 심저에 가라앉은 마력 색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진은 아예 안 보이지 않나.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그의 마력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고, 그가 어떤 특수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틀림없이 나보다 강하다. 상대의 마력과 특수능력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후…….”
가상 공간 속에서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충격이 가셨다. 나보다 확실하게 강한 또래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 사람은 아니지만, 실력만은 한번 확인해 보고 싶다.
“얘들아! 일단 흩어지자! 은하는 방어 부탁해!”
“그래!”
민희가 솔선수범하여 지휘했다. 우리가 서 있는 주위가 순식간에 숲으로 변했다. 이렇게 좁고 빽빽한 숲에서는 모여 있으면 불리하다. 흩어져서 숨어야 한다. 그러나 민희의 지시에 많은 사람이 당황했다. 당황하는 사람은 전부 다른 초등학교에서 입학해 민희나 나를 모르는 학생들이었다.
“어? 쟤한테 방어 다 맡겨도 괜찮아?”
“응! 은하 방어 엄청 잘하니까 걱정 마!”
나도 적당한 곳에 숨어 상황을 살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무 위에 올라타 모습을 숨길 수 있게 되다니 참 감개무량하다. 나는 마력을 갈무리하고 희미하게 환각을 퍼트려 내 모습을 완벽하게 숨겼다.
반경 300m는 우리 진지다. 나는 진지 곳곳에 옅은 환각속성 마력을 퍼트렸다. 마력에 닿으면 머리가 멍해지고 인식이 둔해진다. 그런데 마력을 퍼트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느 곳의 마력이 불현듯 사라졌다. 아니, 거부당했다? 제압당했다?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마력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마력은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느껴진다. 이성진, 그였다.
‘마력 반탄력? 아니면 모르는 마력이다 싶어 경계한 건가? 민감한 체질인가 보네.’
나는 이성진을 주의하며 계속 마력을 조율했다.
곧 알람이 울려 퍼지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나는 계속 한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다른 친구들은 움직이며 싸웠다. 공격이 여기저기서 난무했다. 그 공격을 하나하나 전부 눈에 담았다. 그러다 관심이 가는 마법이 있으면 복사했다.
또한 적 팀의 마법은 대부분 방어했다. 전부 다 막지는 못했지만 대규모 마법은 완전히 막았고, 친구들을 향해 다가오는 마법은 이성진이란 예외를 제외하고는 전부 막았다. 이성진은 아무래도 나와 상성이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다. 결계가 그와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부스러졌다. 그래서 그를 향한 공격은 전부 막아 낼 수 없었다. 그래도 후반에는 그가 마력을 적당히 조절해 주어 결계가 부스러지는 일이 적어졌다.
친구들이나 같은 팀원들이 적을 차례차례 격파해 갔다. 기계병이고 적 팀이고 가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민희도 인하도 이젠 아예 숨길 생각이 없구나.’
하긴, 앞으로 실전 수업이 점점 많아질 텐데 그 모든 걸 실력을 완전히 죽이고 해서는 제대로 강해지기 힘들 거다.
그사이 우리 진영에 또 한 번 대규모마법이 날아왔다. 이번엔 제법 강했다. 몇 사람이 함께 힘을 모아 만들었는지 다양한 마력이 느껴졌다. 나는 각기 다른 마력이 모여 하나의 마법을 형성하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전에 이성진이 움직였다. 그가 처음으로 제대로 마법을 썼다.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그건 마치 무너진 댐에서 물이 쏟아지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의 손안에 물로 된 소용돌이가 만들어지는가 싶더니 그것이 순식간에 확장되어 주위를 덮쳤다. 그건 일종의 재해였다. 깊고 두터운 심해의 바닷물이 주위를 휩쓴다. 그것은 오직 우리 진영만을 피해 주위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우리 팀원들도 전투를 위해 적의 진영에 나가 있었다. 나는 파도가 우리 팀원들마저 덮치기 전에 방어막을 펼쳤다. 적의 진영으로 향한 우리 팀원의 진로를 어느 정도 피해서 마법을 사용한 것 같기는 한데, 혹시 마법을 세세히 컨트롤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 그보다는…….’
마법을 막는 동안 속에서 울컥 뜨거운 감정이 솟아 나왔다.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니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 나도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 당연한 거잖아?
그러나 나는 곧 진정했다. 물의 세기는 거세지만 그 안에 담긴 마력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래, 나 같은 감지형이 아닌 이상 이렇게 숫자가 많은 상황에서 표식도 없이 피아를 전부 구분하긴 힘들 것이다. 나 역시 사람을 얼굴이 아니라 마력으로 감지하고 있고, 그마저 다 외우지 못해서 우리 팀원을 향해 날아오는 공격을 전부 막지 못했다.
‘큰 마법을 하나 막았고, 적 진형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럼 이제 움직이겠군.’
나는 직감적으로 싸움이 다음 공격으로 끝날 것임을 알았다. 민희와 인하, 이소영과 그녀의 친구들이 흩어져서 적 팀 진영에 대규모마법을 날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이 전멸했다.
승자가 정해짐과 동시에 가상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는 가상 공간이 풀리기 전에 나무 위에서 내려와 착지했다. 승패가 났을 때는 이미 수업 시간이 5분밖에 안 남은 시점이었다. 아무래도 가상 공간 안과 밖의 시간을 좀 다르게 해 놓았던 것 같다.
“여러분 모두 잘하셨습니다!”
모의 전투가 끝날 때까지 좀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살피고 있던 선생님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는 방금 했던 것처럼 팀으로, 혹은 개별로 전투를 반복하며 수업을 진행합니다. 지금은 가상 공간을 이용해 훈련했지만 본 수업에 들어가면 가상 공간뿐만이 아니라 여러 실제 환경을 사용해 훈련할 겁니다. 그리고 이 학교의 설립 의의에 따라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다른 지역에 봉사 활동도 갈 겁니다.”
나는 봉사 활동이란 단어에서 잠시 멈칫했다. 전생, 나는 학교에서 학점을 따기 위한 봉사 활동 외에 진짜 봉사 활동다운 봉사 활동은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갑자기 전쟁 지역이라니, 너무 위험하잖아. 아니, 지금의 나라면 괜찮지 않을까? 지금의 내게는 마법이 있다.
‘하지만 역시 본격적인 전투 수업은 별로 흥미가 안 가는데.’
구태여 선택 수업이 아니더라도 이미 정규 수업에 전투 훈련이 포함되어 있다. , 혹은 이 그 시간이다. 그러니 꼭 전투 수업을 따로 들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어차피 나는 전투 마법사가 될 생각이 없으니까. 아무래도 조금 고민해 보아야겠다.
“그럼 오늘 체험 수업은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나는 학생증을 눌러 시간을 확인했다. 종이 치기 3분 전이다. 나와 인하는 민희와 인사하며 조원들의 모습을 찾았다. 이소영 역시 제 친구들과 인사했다. 한순간 이성진이 신경 쓰였지만 애써 돌아보지 않았다. 김우진과 강성우는 근처에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나는 흩어지는 학생들 사이에서 휩쓸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인하와 이소영을 끌었다.
“얘들아, 이제 다음 수업 가자.”
“응. 성진아, 인성아, 이따가 보자.”
이소영이 제 친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무심코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그만 이성진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눈을 깜빡이다가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최인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경직됐다.
‘뭐지?’
그러고 보니 아르델이 쟤가 날 계속 흘끔흘끔 보고 있었다고 그랬지. 의아하긴 했으나 굳이 이유를 확인할 정도로 궁금하지는 않았다. 거기다 지금은 수업이 먼저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6교시 까지 해서 첫 중학교 수업이 끝났다. 오늘 체험한 수업은 다들 흥미로웠다.
, 속성에 대해 연구하며 연습하는 과목이다. 이 과목은 이론 교과서를 따로 배부한다. , 이것도 의외로 흥미로웠다. 여러 상황에서 무술 대련을 하는 수업인데, 오늘은 건물들의 옥상 위를 건너다니며 대련했다. 건물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게 조건이라서 다들 벽이나 지붕에 달라붙어 싸웠다. 아찔했지만 보는 맛이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다. 무술에 자신이 없는 나는 그냥 체력 훈련이나 대차게 하는 수업을 찾는 게 좋겠다.
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전투 훈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다양한 지형에서 혹독한 기후를 접하고 견뎠다. 나는 순간 마법을 훈련하는 데 이런 게 왜 필요한가 생각했다. 그래도 체력 훈련엔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약간 관심이 갔다. 들어 보니 평범한 대련이나 시뮬레이션 훈련도 함께 진행한다는 모양이다.
점심을 먹고 를 체험했다. 생각한 대로 이론 수업이었다. 하지만 제법 실용적이었다. 게다가 중간중간 적성에 따라 직업 체험 학습을 한단다. 그 말엔 잠깐 혹했다. 참고로 내가 지금 가장 관심 가는 직업은 세계 방위 부대의 결계부다. 물론 작가의 길도 고민하고 있다.
마지막은 미술 수업이었는데, 듣는 것은 재밌었지만 직접 하는 건 어려웠다. 이 수업을 듣고 싶다고 말을 꺼냈던 강성우는 그림을 제법 잘 그렸다. 마법도 미술 관련인지,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던 붓에서 물감이 묻어났다. 듣기로는 물감마법이라고 한단다.
사실 나는 그 마법을 복사했다. 잘 보니 그 마법, 물감이 묻어나는 것뿐만이 아니라 색마다 다른 효과가 담겨 있었다. 게다가 내 마법은 문자마법 아닌가. 색이 묻어나면 참 예쁠 것이다. 내 마법은 그림으로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지만 색만으로도 추가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면 또 좋지. 강성우의 마법은 앞으로도 한동안 관찰해야겠다.
수업에서 이소영의 친구들을 마주친 건 다행히 처음 한 번뿐이었다. 이소영은 수업을 마치자마자 바로 교실을 나갔고, 나와 인하는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같이 하교하는 건 언제나의 일상이다.
“나 오늘 장인 계열 수업을 하나 보고 가려고 하는데 너흰 어쩔래?”
“수업 하나 더 보려고?”
“응. 실은 나 예전부터 유리 공예를 한 번쯤 배워 보고 싶었거든. 그래서 구경이라도 해 보려고. 전공으로 삼을 생각은 없지만 좀 관심이 가.”
“그렇구나.”
내 말에 친구들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장인 계열 수업은 별로.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서 똑같은 작업을 반복해야 하잖아. 별로 재미없어.”
“나도 유리 공예는 딱히…….”
“나도 가만히 앉아서 하는 건 별로 자신 없어.”
“……나는 오늘 다른 수업 듣고 싶은 게 있는데.”
고개를 젓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하가 말했다.
“오늘 저녁에 실전 검술 수업이 있다더라고. 한번 체험해 보려고.”
“너 검 같은 거 배운 적 없잖아?”
“민희가 쓰는 거 보니까 궁금해졌어.”
인하는 무술에도 관심이 많다. 그러자 민희가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뭐야. 그런 거라면 나도 같이 갈래. 너희 둘은 어쩔래?”
“난 그냥 기숙사로 돌아갈란다. 지금 새로운 꽃을 만들고 있거든.”
“난 졸려서 방에 가서 잘 거야.”
현호가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그럼 내일 보자~. 아님 기숙사로 놀러 갈까?”
“남자 기숙사니까 오지 마!”
“오지 말라는 규칙이 있는 건 아니잖아.”
그러자 한수가 이마를 짚었다. 이 두 사람도 참 여전하다.
“규칙은 아니지만, 남자 여자 둘이서 방 안에 들어가는 게 눈에 띄면 의심받기 쉬우니까 로비나 휴게실에서 대화를 나누거나, 아님 우리랑 같이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런가? 하긴, 인하한테 오해 사면 곤란하지~.”
“…….”
“오해 안 해…….”
민희의 대꾸에 한수는 골치 아픈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으며, 인하는 조금 당황하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민희가 소리 내어 웃고는 인하의 팔을 끌어안았다.
“그럼 가자! 모두 이따가 봐!”
“그래.”
나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다가 주위에 현호와 한수 말고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게이트를 열었다. 게이트를 넘기 직전 현호와 한수를 향해서도 손을 흔들었다.
“이따가 봐.”
“그래.”
나는 곧바로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어제 학교를 둘러보면서 공방이 어딘지 대충 기억해 뒀다. 나는 공방 근처에 출구를 열며 시간을 확인했다. 공방이나 아틀리에는 참관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도 방과 후에 한두 시간 정도 작업실을 개방한다.
‘맞다, 저번에 만들어 놓은 마정석 아직도 안 썼네. 이번엔 귀걸이로 만들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