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18
나는 얌전히 대답했다. 이소영과 인하도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자습하는 것은 시범조인 우리를 비롯해 학생 수의 반 정도였다.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수업을 시작하고 15분밖에 안 지났다. 아무래도 가상 공간의 시간을 현실보다 빠르게 설정해 놓았나 보다.
우리 세 사람은 다른 학생들이 이번 수업을 어떻게 진행하는지 구경했다. 특히 나는 이소영의 친구들을 집중해서 보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내 눈으로 그 마력을 파악할 수 없는 이성진에게 신경을 기울였다. 두 사람은 같은 학년 중에서 어느 정도 상위권에 들어가는 남자와 짝을 지었다. 나는 빠르게 적을 해치워 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최인성은 그림자로 적을 공격했고, 이성진은 물로 적을 공격했다. 이성진은 공격에 매우 능숙했다. 심지어 매우 압도적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 한 번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니, 이건 강한 마법사를 만난 데서 오는 기쁨일 뿐이야. 나는 가슴의 고동을 애써 내리누르며 전투를 관람했다. 그의 물은 마치 재해처럼 주위를 휩쓸었다.
그들은 우리에 이어서 두 번째로 모든 레벨을 클리어했다. 중간중간 우리가 했던 것과는 다른 내용의 과제가 나왔지만, 마지막만은 하나도 틀림없이 똑같았다. 그들도 나와 비슷한 방법을 썼다. 공격한 것은 최인성이었다. 최인성의 마법은 그림자, 애초에 물리적인 것을 바탕으로 삼지 않는 마법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보다 훨씬 능숙하게 오직 적만을 쓰러뜨렸다.
“저 둘.”
“…….”
“강하네.”
인하도 그 두 사람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응.”
나는 호기심에 가까운 감정으로 이성진에게 정신을 집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상시에는 마력이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마법을 쓸 때는 다르다. 몸 밖으로 퍼트리는 마력과 마법은 보인다. 내 예상대로였다. 그는 나보다 강했다. 나보다 훨씬 높은 경지의 마법사였다.
이성진과 최인성은 곧 우리에게, 정확히는 이소영의 곁으로 돌아왔다. 수업 시간은 의외로 금세 지나갔다.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인하의 소매를 잡아 세우며 말했다.
“인하야, 나 화장실 좀 들렀다 갈 테니까 친구들이랑 먼저 급식소 가 있어.”
“응? 알았어.”
여자 친구들끼리는 화장실도 같이 간다고 하고, 실제로 그러는 사람도 많지만 나와 인하는 굳이 화장실까지 같이 다니지는 않는다. 양치 정도는 같이 하지만서도.
‘민희는 따라왔었지만.’
나는 화장실에 들른 김에 머리를 손봤다. 실기 수업을 받을 때 편하도록 하나로 묶었던 머리를 풀고 손가락으로 슥슥 빗었다.
머리를 정리하고 재빨리 화장실을 나섰다. 지금쯤 친구들은 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먼저 먹어도 되는데, 꼭 그렇게 기다린다. 그게 참 기쁘고 고맙다.
거의 뛰다시피 하던 나는 복도에 서 있는 인영을 보고 무심코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약간 껄끄러운 기분을 삼키며 평범하게 걷기 시작했다.
창가 맞은편, 몹시도 수려한 외모의 소년이 복도 벽에 기대어 있었다. 주변에 최인성이나 이소영도 없이, 그는 혼자였다. 나는 그 모습에서 첫 만남이랑 비슷한 분위기를 느꼈다. 습관적으로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나는 품 안의 목걸이를 쥔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성진은 복도에 선 채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내가 어색한 기분으로 그를 지나치려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너는 수업이 장난 같냐?”
……뭐?
순간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곳에는 나와 이성진, 그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말은 당연히 나를 향한 말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전혀 진심이 아니더군. 주위 눈치나 보다가, 간 보면서 해결해 버리고.”
“무, 뭐……?”
명백히 시비 거는 투였다. 나는 당황해서 입을 벌렸다.
“좋겠군그래. 수업에 집중하지 않아도, 대충 해도,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간단히 남들보다 강해지지. 그리고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너를 칭찬하고, 누군가는 너를 존경해. 곤란해하는 얼굴로 그걸 내심 즐기기까지. 정말 가관이군.”
“…….”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온다는 것은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싶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갑작스러운 독설에 어안이 벙벙했다. 심지어 그는 그 상태로 나를 차갑게 한 번 노려보더니 휙 뒤돌아 가 버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잔뜩 인상을 썼다.
“진짜 뭐야?”
마음 같아선 따라가서 항의라도 하고 싶지만, 관뒀다. 난 그런 성격이 아니다. 원래 나는 거슬리는 사람이 있어도 싸우면서 감정 소모를 하는 타입은 아니다. 철저하게 무시하는 타입이지. 싫다면 관계하지 않으면 된다. 내 욕을 하든 말든 맘대로 하라지. 거기에 휘말려서 싸우는 건 그냥 쪽팔린 일이다. 그러므로 초등학교 2학년 때 있었던 그 싸움은 내게 있어서 무척이나 큰 예외였다.
나는 검지로 이마를 꾹꾹 누르다가 다시 달렸다. 혹시라도 그놈이랑 마주치는 건 싫으니 최대한 그놈이 없는 장소를 골라 다녔다. 그놈의 마력은 나로서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으니 소용없는 짓이긴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역시 아냐! 그 녀석은 절대 아냐!’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그 녀석’일 리가 없다. 거세게 뛰던 심장도 점점 가라앉고 있지 않나. 나는 그때 느꼈던, 그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던 감정을 애써 합리화했다.
‘그 녀석은 저놈처럼 아무렇게나 남을 깎아내리는 놈이 아니었어.’
그 녀석은 모르는 사람의 심정을 물어보지도 않고 짐작해서 아무렇게나 깎아내리는 놈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목에 건 반지를 꽉 쥐었다. 이 반지의 주인은, 결코 그가 아니다.
‘환생했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변할 리가 없어.’
나만 해도 그렇다. 자신감이 좀 더 생기긴 했지만 기본적인 스타일은 전생과 크게 변하지 않았다.
……아니,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말은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분명 변했다. 사람을 대하는 것에 있어서 벽이 좀 더 얇아졌다. 친구들과 선생님, 스승님의 덕분이다. 전보다는 좀 더 남을 신경 쓰지 않고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힘’이 생겼기 때문이다. 마법이란 힘이.
하지만 전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대하는 데 서툴고 소심하다. 일단 처음 보는 사람과는 잘 이야기하지 못한다. 얼굴을 곧잘 보았을 뿐 친하지 않은 누군가와도 마찬가지다. 책을 좋아한다. 소설 쓰는 게 재밌다. 최근엔 쓰는 것 중에 시나리오란 장르가 하나 더 늘었을 뿐이다. 외모도 물론 변했다. 분명 변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많았다.
그러니 정말로 마주치게 된다면 그는 분명 나를 알아봐 줄 것이다.
나는 가슴속에 남은 약간의 초조함을 달리는 것으로 해결했다. 계단을 네 칸씩 뛰어 내려가며 급식소로 향했다. 예상했던 대로 친구들은 급식소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수, 민희, 인하, 현호…….
“얘들…….”
나는 표정을 굳혔다. 거기에는 익히 아는 친구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이소영과 어쩐지 얼굴을 살짝 수줍게 붉힌 최인성, 그리고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으로 나를 보는 이성진.
나는 이소영의 옆에 있는 두 남자를 보고는 잠시 굳었다. 그러나 이내 속에서 밀려오는 스트레스를 애써 무시하며 친구들 곁으로 다가갔다.
“얘들아.”
“아, 은하야.”
친구들이 웃으며 나를 맞았다. 나는 흘끗 이소영과 최인성, 이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민희가 웃으며 설명했다.
“얘들도 같이 먹기로 했어. 괜찮지?”
순간 이성진의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깊게 가라앉은 보랏빛 눈동자와 시선이 맞았다. 그는 곧 어떤 동요도 없이 슥 시선을 거뒀다.
“……응. 괜찮아.”
나는 어색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으로 욕을 했다. 그러니까 왜 점심시간 전에 시비를 걸고 난리야! 콱!
그들을 껄끄럽게 생각하는 나와는 달리 친구들은 저들이 상당히 맘에 든 모양이었다. 한수는 잘 모르겠는데, 현호와 민희는 확실히 마음에 든 것 같다. 현호와 민희는 합동 수업으로 몇 번이나 최인성, 이성진과 수업을 같이 받았다고 하는데, 두 사람 다 엄청 강하다면서 상당히 즐거워했다. 반면 한수는 두 사람을 한 번 흘겨보더니 그러려니 했다. 그것에 복잡한 기분을 느끼는 한편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음에 들었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렇다고 쟤네가 마음에 안 든다면서 얘들 사이까지 껄끄럽게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
나는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성진이 시비를 건 상대는 나뿐인 것 같았다. 친구들에게는 오히려 호감을 느끼는 듯하다. 대체 왜 나만 콕 찍어 거슬려 하는 거지? 가슴이 답답했다. 친구들 마음에 들었다면 어쨌거나 저놈과 나는 싫어도 곧잘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나는 카레와 돈가스가 포함된 정식 C를 골랐다. 배식을 받으면서도 속으로 꿍얼거렸다. 그러니까 왜 공연히 시비를 걸어. 싫어도 마주치게 될 사이 같은데. 이 와중에 그런 걸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은 것 같아서 더 짜증이 났다. 나는 당초의 결심대로 적당히 무시하기로 했다.
막 친해지기 시작한 어색한 사이에 어울려 밥을 먹었다. 어쩌다 보니 얼굴도 몇 번 본 적 없는 최인성의 옆자리에 앉게 되어 공연히 말이 더 줄어들었다.
나는 떠드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문득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보아하니 이성진은 원래 말이 별로 없는 성격 같았다. 그렇다면 나와 그가 대화를 하지 않더라도 별로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밥을 싹싹 긁어 먹으며 입가를 핥았다. 학교 급식은 다 좋은데 한 번밖에 받지 못하는 게 아쉽다. 음식점이면 추가로 더 시킬 텐데. 뭐, 그 대신 공짜니까. 아니, 고등학교 선배들은 돈 내고 먹는댔지?
“저기.”
나는 왠지 주위 분위기가 좀 이상해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최인성을 돌아보았다.
“……응?”
한발 늦게 대답하니 최인성이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얘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민희한테 듣기론 자기랑 잘 어울릴 정도로 엄청 활발하다고 하던데.
“그거 좋아하면 이것도 먹을래……?”
“응? 아니, 괜찮아.”
나는 최인성이 내민 돈가스 조각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최인성은 나와 마찬가지로 C 정식이다. 그러나 나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친구의 것을 얻어먹을 정도로 붙임성 있지는 않다.
오늘도 급식은 매우 맛있었다. 물을 떠 와야겠다 생각하며 일어서는데 갑자기 눈앞으로 무언가가 들이밀어졌다.
“자.”
오, 내가 좋아하는 감자크로켓이다. 나는 한수가 내민 음식을 입으로 받아먹었다. 꿀꺽 삼킨 후 뒤늦게 태클을 걸었다.
“아니, 한수 너 여친을 앞에 두고 뭐 하는…….”
“자.”
이번엔 반대쪽 맞은편에서 손이 다가왔다. 나는 그것도 받아먹었다. 이번엔 계란말이였다. 물론 좋아하는 거지만, 나는 계란말이를 꿀꺽 삼키며 신음했다.
“너희들…….”
인하, 한수, 너희들 말이야……왜 나한테 먹여 주면서 뻐기는 듯한 표정을 짓는 거야! 그렇게 노골적으로 좋아하지 마! 그런 건 서로한테나 해 주란 말이야! 저것 봐! 만난 지 얼마 안 된 친구들이 어쩔 줄 모르고 있잖아! 나는 멍한 표정을 짓는 이소영과 최인성을 애써 돌아보지 않았다. 민희와 현호는 익숙하게 식사만 계속했다.
우리는 밥을 먹은 뒤 상점가로 향했다. 밥을 먹는 동안 솔직히 어색해서 죽는 줄 알았다. 아무래도 최인성은 나랑 그다지 맞지 않는 것 같다. 이성진은 뭐, 시작부터 최악이고.
“맞다, 내일 화이트 데이잖아! 우리 내일 기숙사에서 사탕 교환하자!”
“어? 아, 맞다. 맞다, 미안. 난 내일부터 이틀간 집에 내려가 있을 거야. 부모님도 보고 라라도 챙기려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자 민희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에엥~? 화이트 데이인데?”
“그러니까 더 내려가야지. 맛있는 케이크라도 사 가려고. 우리 라라한테도 맛있는 간식 줘야지~.”
엄마와 아빠는 자주 나한테 라라 사진을 보낸다. 화면 너머로 점점 커 가는 라라의 모습을 보자니 참으로 흐뭇한 동시에 아쉬웠다.
“넌 그렇게 동물을 좋아하면서 왜 여태까지는 동물 안 키웠어? 부모님도 동물 좋아하잖아.”
“내가 책임을 못 지니까.”
나는 간단히 대답하며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냈다.
“아, 있다. 그래서 미리 사탕을 준비해 왔어. 자.”
내 취향대로 초콜릿사탕도 가져왔다. 나는 민희의 손 위에 작은 사탕을 여러 개 올렸다. 민희만이 아니라 인하, 한수, 현호, 내친김에 이소영과 최인성……이성진에게만 주지 않을 수는 없으므로 그에게도 남은 사탕 중 아무거나 주었다. 주고 나서 나는 약간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박하사탕에 커피 맛 사탕, 캐러멜, 전부 그 녀석이 좋아하던 사탕이다. 그 외에도 콜라 맛을 좋아했던가?
“…….”
내가 준 사탕을 보던 이성진의 얼굴에 얼핏 표정이라 할 만한 게 떠올랐던 것 같다. 민희가 제 손바닥 위에 놓인 사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은하는 맨날 이런 식으로 준단 말이야……. 로맨틱이라곤 하나도 없어.”
“의리에 뭔 로맨틱을 바라?”
“흠……그건 그렇지만. 애인이 생겨도 이렇게 줄 거야?”
한수와 인하가 공연히 흠칫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그 경우에 난 받는 쪽이지.”
“음……그건 그러네. 그럼 밸런타인 땐?”
나는 또 한 번 고민했다. 자연스럽게 그 녀석과의 추억이 떠올랐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밸런타인 초콜릿을 건네준 지 이미 10년도 더 지났다. 그때 나는……아아, 그래, 만들어 줬던 적도 있었지. 다만 포장이 망해서 억울했던 기억이 있다.
“만들려나?”
“만드는 거야?”
“초콜릿 만드는 거 재밌어. 귀찮아서 많이 만들진 않겠지만.”
“아하, 그래서 우리가 은하 수제 초콜릿을 먹은 적이 없는 거구나.”
현호의 수긍하자 민희가 타박했다.
“뭐래. 먹은 적 있잖아. 옛날에 은희 언니 랭크 시험 응원한다고 초콜릿 만들었던 일 잊었어?”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한수와 인하가 그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밸런타인데이는 아니었지만. 만들고 나서 남은 건 우리가 먹어치웠지.”
“그랬지. 생각해 보니……만들기 좀 귀찮긴 해.”
““응.””
인하 말에 동의. 까먹고 있던 현호도 우리 말을 듣고 기억해 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나는 손을 내저었다.
“그래서 밸런타인데이 때 수제 초콜릿을 준 적은 없지만, 그래도 그 대신 쿠키랑 머핀을 구워 줬잖아.”
“그게 더 간단해?”
“응. 초콜릿은 일일이 신경 쓸 게 많아서 귀찮아.”
그렇구나. 친구들이 다시 한 번 수긍했다. 그사이 나는 한수를 향해 흘끔 눈총을 보냈다. 너 설마 연인끼리의 첫 이벤트를 까먹고 있진 않았겠지? 한수는 그런 의미가 담긴 내 시선에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다행히 따로 준비한 게 있나 보다. 그래, 인하도 밸런타인 초콜릿을 줬잖니. 그럼 너도 당연히 줘야지.
“아, 벌써 수업 시간 다 돼 간다. 이따가 수업 마치고 봐!”
“그래.”
나는 친구들과 인사하며 몸을 돌렸다. 이소영이 우리 곁에 따라붙었다. 돌아서며 스치듯이 이성진을 흘겼다. 참, 인하보다 더 차갑고 표정 없는 녀석이다.
‘시비를 걸 필요 없이 무시했으면 다 좋았을 것을, 쓸데없이.’
나는 휙 앞을 보았다. 뒤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을 무시한 채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소영이 제 친구들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많아졌다. 그 비율은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졌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주로 이성진과 최인성이었다.
혹시 나와 이성진 사이에 맴도는 묘한 기류를 눈치챈 걸까? 그냥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치곤 그녀의 감정이 묘하다. 이성진도 구태여 나와 있었던 일을 말해 친구들 사이에 불화를 일으킬 생각은 없어 보였고, 원체 사람을 무시하는 차가운 성격인지라 다들 눈치 못 챌 줄 알았는데, 역시 친한 친구는 다른가 보다.
“그래서 걔가 유미랑…….”
하지만 이소영의 이야기에 드문드문 유미가 등장했기 때문에 제법 재미있게 듣고 있다. 이성진과 최인성 이야기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설령 관심 없는 사람의 이야기라도 옛날이야기는 뭐든 제법 흥미로운 법이다.
“내 친구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걔들은 진짜 엄청 강해.”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움직여 주위를 바라보았다. 저번 실기 수업에서 이소영이 실력을 보여 준 보람이 있는지, 여자들의 적의 어린 시선은 조금 주춤한 상태였다. 당연한 일이다. 이소영은 웬만한 또래는 범접도 못 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니까. 실력을 보여 줄 계기는 앞으로 몇 번 더 있을 거고, 그러다 보면 질투를 할지언정 시비는 걸지 못하게 되겠지.
“응. 그런 것 같더라.”
노트에 마저 설정을 끄적이다 말고 나는 인상을 살풋 찌푸렸다. 오늘따라 왠지 몸이 나른하고 집중이 안 된다. 이소영이 이야기를 하다 말고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넌 볼 때마다 뭔가를 적고 있는 것 같네. 뭘 그렇게 적는 거야?”
“응? 아니 그냥……메모하는 게 습관이야.”
“그래?”
“맞아. 자주 그래.”
인하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이소영은 곧 하던 이야기를 이어 갔다. 짧다면 짧은 쉬는 시간 동안 참 많은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니, 그냥 듣는 편이다.
“근데, 음, 은하도 6학년 때 친선 시합 갔었지? 참가는 아니고, 구경했다고 들었는데.”
“응? 응……. 인하랑 민희 시합하는 거 보려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긍정했다. 이소영은 말을 하면서 어쩐지 초조한 기색이었다. 인하가 왠지 긴장한 눈으로 우리를 응시했다. 나는 영문을 모를 요상 야릇한 분위기에 뺨을 긁적였다.
“어, 거기서 말이야, 은하가 했다고 들었는데, 그…….”
“야! 너 빨리 준비 안 하고 뭐 해?”
이소영이 말을 끝까지 잇기 전 갑자기 교실 뒷문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말을 잇던 이소영뿐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던 사람 모두 의아해하며 뒷문을 돌아보았다. 이성진에 최인성, 한수까지 와 있다. 방금 큰 소리를 낸 것은 최인성이었다.
이소영이 소리를 지른 최인성을 한 번, 나를 한 번 돌아보더니 이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소영은 씩씩거리며 달려가 최인성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이 바보!”
“윽! 갑자기 왜 그래?”
“기껏 좀 도와주려고 했더니. 됐어! 이쪽이 훨씬 아깝다! 흥이다!”
“진짜 왜 그래?”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 인하가 살짝 한숨을 내쉬곤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하를 따라 나도 일어섰다. 이미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상태니 바로 체육관에 가면 된다.
우리는 손을 잡고 한수 곁으로 다가갔다. 한수가 이내 내 반대편 손을 잡았다. 그리고 투닥투닥 다투고 있는 이소영과 최인성을 두고 우리를 이끌었다. 나는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너 바보 아냐?”
“뭐, 왜. 내가 뭐.”
“날 사이에 끼고 뭐 하는 거야. 인하 손을 잡으라고.”
“그럼 인하 쟤만 네 손 잡잖아. 그건 좀 분하잖아…….”
“그걸 분하게 여기면 어떻게 해. 정말이지.”
나는 인하와 한수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사귀게 되면 이전과는 조금 달라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두 사람은 전처럼 특별한 세계를 구축하면서도 여전히 친구들과 함께하는 걸 우선시했다. 나를 편애하는 것도 변하지 않았다.
잠시 후 이성진이 다투고 있는 이소영과 최인성을 데리고 왔다. 나는 원인 모를 두 사람의 다툼을 대충 흘리며 인하와 한수를 향해 물었다.
“이제 선택 수업 체험 기간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너희는 들을 수업 다 골랐어?”
“대충은. 을 빼면 인하랑 비슷할걸? 도 들을 거고, 도 들을 거야.”
“나는 들을 거야. 빛에 대해서 공부해야 하니까.”
“난, 이랑, 이랑, 랑, ! 다행히 이거 전부 시간이 겹치지 않더라고. 그리고 유리 공예는 동아리가 있대. 거기도 들어 볼까 싶어. 유리 공예 수업은 딴 수업이랑 겹치더라고. 동아리에 들어도 기초부터 알려 준다고 하니까, 그렇게 할 생각이야.”
“만 들을 거야?”
이소영이 뒤에서 끼어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왜? 실기를 배우는 게 더 좋지 않아?”
“어차피 정규 수업에서도 배우잖아. 꼭 선택 수업에서까지 실기를 고를 필요가 있나 싶어. 난 전투 마법사 지망이 아니거든. 결계 관련 일이라면 생각해 보고 있지만 전투는 역시 별로야. 요즘엔 우주 여행자라는 직업에도 관심이 가. 우주를 여행하면서 새로운 생물이나 물질을 발견하고 자원을 찾아 오는 건 꽤 재미있을 것 같아.”
게다가 그런 건 소설을 쓰는 데도 매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이어서 다정히 웃었다.
“아님 글을 쓸 거야. 작가가 돼서.”
“작가?”
이소영이 눈을 크게 떴다.
“마법사와는 별로 상관없는 직업이 나왔네.”
“글 쓰는 게 재미있더라고.”
글은 몇 번을 쓰고, 몇 년을 써도 재미있다. 나는 손을 모으며 생글생글 웃었다. 한수가 자랑하듯이 덧붙였다.
“얕보지 마라. 얘 글 엄청 잘 써. 이미 글로 돈을 벌고 있을 정도야.”
“뭐어? 정말이야?”
“앗! 한수 너!”
부끄럽게! 내가 그거 숨기고 있단 거 알면서! 한수는 내 등쌀에도 능글맞게 웃어넘겼다. 인하도 자랑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이구, 하여간 이 녀석들은. 나는 쑥스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다가 생각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여태까지 내 앞에서 차가운 표정밖에 보여 준 적 없던 이성진이 나를 보고 어째서인지 동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시선이 이내 깊게 침잠한다. 나는 그 반응의 이유를 알지 못해 떨떠름해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3반, 7반, 12반, 이렇게 세 개 반의 합동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각기 우리 반, 이성진의 반, 한수의 반이다. 덕분에 이런 요상한 조합이 생겨났다.
우리는 걷다 말고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체육관 안에는 이미 많은 학생이 모여 있었다.
“은하야, 인하야, 오늘은 한수도 있네! 안녕.”
“안녕.”
“은하 님, 안녕하세요! 한수야, 인하야, 안녕.”
“그 호칭은 이제 그만 좀…….”
“어, 안녕.”
체육관으로 들어가자 여전히 많은 친구들이 인사를 해 왔다. 덕분에 요즘 이소영이나 최인성, 이성진의 이름도 얼굴 외의 이유로 학교에 확 퍼졌다. 한번은 강예슬이 일부러 이소영을 찾아와 말을 거는 것도 봤다. 강예슬이 기가 센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탓에 약간 걱정이 되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물어봤더니 이소영은 활짝 웃으며 재밌는 아이라 대답했다. 다행히 플러스 효과가 나고 있는 모양이다.
“아까 말한 우주 여행자 말이야, 그거 자격시험 꽤 어렵다고 들었는데. 실력이 B랭크 이상이어야 하지 않아?”
“아, 그냥 관심이 있다 뿐이야. 아직은 결계부나 작가 일이 더 흥미로워.”
“그럼 아직 진로를 제대로 안 정한 거네?”
“음, 그렇지 뭐.”
개인적으로는 결계부가 내 마법 적성에 딱 맞는다고 생각한다. 결계는 내 서브마법에 속한 고유 기술 아닌가. 아니면 마법에 대해 조사하는 일도 재미있을 것 같다. 아, 하지만 그런 건 머리 아픈 일도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서 그게 좀 별로다.
작가는 천직이다. 전생부터 글로 먹고살았던 만큼 천직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그리고 작가가 된다면, 우주를 여행하면서 글을 쓰는 것도 참 재미있을 것 같다.
진로는 몇 년 전부터 고민해 왔지만 아직 정하지 못한 것 중 하나였다. 이제 중학생이 되었으니 계열도 갈리고 진로 상담도 하게 될 텐데, 약간 걱정이다. 그러나 나는 원래 하나에 얽매여서 고민하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당장 길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종이 치고 합동 수업이 진행되었다. 합동 수업 내용은 안타깝게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형식인 대련이었다.
‘윽…….’
나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가상 전투는 가상이란 게 느껴져 편하게 할 수 있는데, 현실에서 하는 대련은 이래저래 신경 쓰여서 힘들다.
“대련 수업에 앞서 마력을 측정할 거야. 한 사람씩 이 마력 측정기에 대고 마력을 불어넣도록 하렴. 그럼 이 기계가 너희들의 마력 패턴에 맞춰 알맞은 대련 상대를 정해 줄 거다.”
담임 선생님이 동그란 구슬 아이템을 가리켰다. 형태만 보면 지구본을 닮았다. 철로 된 장식 위에 둥근 구슬이 떠올라 있다.
반과 번호 순서대로 측정기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력의 크기를 재는 측정기는 아닌 것 같다. 뒤에서 지켜본바 손을 얹고 살짝 마력을 일으키기만 하면 잠시 후 측정기에서 측정 완료 글자가 떠오른다. 말했던 대로 마력 패턴을 측정하는 모양이다.
인하는 거의 맨 처음이었고, 나와 소영이도 3반이기 때문에 초반부였다. 내가 마력을 불어넣자 마력 측정기의 색이 남색으로 바뀌었다. 그냥 남색이 아니라 은색이 섞인 남색이다. 구슬 끝부분으로 갈수록 은색이 선명했으며, 남색 사이사이로 은색 빛이 마치 별처럼 총총히 박혀 있었다. 과분하지만 별하늘색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내 꿈속 세계를 새벽하늘과 은하수로 하길 참 잘했다.
인하의 마력 색은 레몬빛에 가까운 금색이었고, 한수의 마력 색은 나뭇가지와 닮은 고동색이었다. 이소영의 마력 색은 희미하게 밝은 갈색을 띄는 은색이었으며, 최인성의 마력은 암녹색이었다. 그리고 이성진의 마력 색은…….
‘와아…….’
이성진의 마력 색은 무척 특이했다. 여태까지 그의 마력을 제대로 볼 수 없어서 잘 몰랐는데, 이성진의 마력 색도 두 개였다. 측정기의 구슬이 아래는 주황색, 위로 갈수록 청자색으로 물드는데, 그게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아아, 나는 저 색을 알고 있었다.
‘황혼의 색…….’
내가 좋아하는 색은 저보다는 조금 낮에 가까운 색이었다. 좋아하는 색? 아니, 동경하는 색에 가깝다. 나는 노을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주황색을 동경하고 있다.
‘너무 예쁘다.’
그 순간 이성진이 측정기에서 손을 떼며 나를 돌아보았다. 한순간 눈동자에 사나운 빛이 어렸다. 나는 움찔했다. 그가 나를 스쳐 내 뒤에 있는 이소영을 향해 걸어갔다. 아마 착각이 아니겠지. 정말로 나를 노려본 거다. 감탄으로 가득 찼던 가슴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잠시 후 대련 파트너가 발표되었다. 나는 내 이름 옆에 적혀 있는 이름을 보고 반사적으로 표정이 일그러지려는 걸 참았다.
『유은하 – 이성진』
나는 주먹에 꽉 힘을 줬다. 왜 하필이면 저놈이랑 파트너가 된 거지? 대체 마력의 무엇을 보고. 이성진의 마력만은 제대로 느낄 수 없는 나로서는 답답할 따름이었다. 참고로 인하의 파트너는 최인성이었고, 한수의 파트너는 이소영이었다. 다들 대등한 상대끼리 붙게 되었다.
그럼 나와 이성진의 실력도 대등하다는 걸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거기다 대등한 상대끼리 짝을 지어 줄 생각이었다면 마력 패턴이 아니라 마력의 한계치를 측정했을 거다.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이성진을 돌아보았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련 시간은 한 번에 20분으로 제한한다. 각자 알아서 대련해라! 한 번씩은 꼭 대련해!”
그건 다행이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인하와 한수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다 자기 파트너와 함께 이동하고 있다. 벌써 대련을 시작한 사람도 있었다. 나와 그는 그런 주변 분위기와 약간 동떨어져 있었다. 우리 주변이 우연하게도 비었다. 이동할 필요 없이 당장 이곳에서 대련을 시작하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