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32
“문제는 상극 속성끼리 반발하려는 성질 때문에 제어가 어렵다는 거야.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하면 원하지 않아도 주위를 부수지. 서로 휘말리면 갑자기 힘이 세지거나 약해지거나 날뛰어. 그러니까 처음 연습할 때는……순도를 낮게 해야 돼. 순도는 알지?”
“응. 마법의 질이잖아.”
“쉽게 설명하면 그렇지. 그리고 마법의 이해도이기도 해.”
“이해도?”
“말하자면 이거야. 물이 물로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법사가 그 본질에 가까워질수록 순도는 높아지지.”
“음…….”
“물의 요소에 쓸모없는 것을 걸러 내는 거야. 물이 아닌 것들, 물에 섞인 흙이나 자갈 같은 것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일부러 속성 순도를 낮춰서……어둠으로서의 특징을 옅게 해서……연습한다는 거야?”
“그럼 반발이 덜하니까. 또 주위에 끼치는 위협도 덜하지.”
나는 놀란 눈으로 이성진을 응시했다. 이 녀석은 정말로 알고 있는 게 많다. 역시 내가 오히려 도움을 받는 쪽이잖아. 이 녀석이 웬일로 이렇게 친절히 가르쳐 주는지 모르겠다.
“방금 한 건 맛보기였던 거 알지? 그럼 어디 한번 제대로 시작해 볼까?”
“……좋아.”
순도를 낮춰서 연습한다 이거지? 속성의 특징을 옅게 한다. 혹은 불순물을 섞는다. 생각해 보니 나는 일부러 순도를 낮추거나 높이면서 연습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하려고 마음먹으니 금방 되었다.
“넌 초보자니까 제일 쉬운 것부터. 모양을 바꾸면서 합치는 것부터 해 보자고.”
“모양을 바꿔서 합친다고?”
“이렇게.”
이성진이 허공에 빛의 상자와 어둠의 상자를 만들더니 그걸 합쳤다. 어둠과 빛이 섞인 커다란 상자가 탄생했다.
“와!”
나는 이성진의 말을 따라 속성마법으로 다양한 모양을 만들어 합쳤다. 그 외에도 다양한 연습을 했다. 낮은 순도에서 융합한 마법의 순도를 점점 높여 가거나, 상자 모양으로 합쳤던 마법을 공 모양으로 변형시키거나, 한쪽 속성의 순도와 마력을 높여 보거나, 낮춰 보거나.
많이 어려웠고, 많이 실패했지만, 그만큼 재미있었다.
놀랍게도 이성진은 생각보다 좋은 선생님이었다. 남을 무시하기 일쑤인 주제에 마법에 대해 대화를 나눌 땐 말이 많고 진지하다. 그는 내가 실수하거나 이상한 말을 할 땐 가차 없이 나를 찔렀다. 직설적인 말투는 재수 없고 짜증 났지만 적어도 가식은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는 달리 쉽게 화를 낼 수 있었으니까.
마력을 다 쓸 정도로 연습을 하고 난 후에야 깨달았다. 오늘 우리 과제를 전혀 안 했다.
“맞다! 과제 안 했어.”
“그렇게 서두를 건 없잖아? 어차피 시간은 많이 남았고.”
이성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시간 낭비 하기 싫다고 한 건 너였잖아?
“이건 제대로 별마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도 필요한 거니.”
하지만 그 말엔 수긍하고 말았다. 맞다. 칠성 플레이아데스, 그 마법을 완벽하게 쓰기 위해선 속성마법을 지금보다 완벽하게 익혀 둘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석연찮은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저 녀석은 결국 나한테 칠성 플레이아데스에 속성 융합까지, 두 가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거잖아? 이건 수지가 맞지 않다.
“음……혹시 말이야.”
“뭐.”
“혹시 특수속성이랑 관련해서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나도 도와주겠다고. 도움을 받았으니까…….”
또 비아냥거림이나 독설을 듣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 녀석은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래. 그러지.”
기분은 어색했으나 마음은 편해졌다. 그래, 이 녀석에게 빚을 지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낫다.
“그래서 다음엔 언제 연습할래?”
나는 곰곰이 스케줄을 떠올렸다. 나와 그는 내일 3교시 자습 시간과 점심시간에 만나 다시 연습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우리는 주기적으로 만나 마법을 연습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싫어도 서로를 대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
……음, 아니다. 저 녀석은 사람에게 맞추는 놈이 아니니, 내가 저 녀석을 대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해야겠다.
저 녀석은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관심이 없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뱉는 악의도 신경 쓰지 않는다. 요는 저 자식이 재수 없는 말을 했을 땐 분통 터지게 참고 있지 말고 이쪽도 직설적으로 쏘아붙여야 한다는 거다. 그래야 대화가 된다.
최인성과 이소영이 자주 다퉜던 이유를 알겠다. 아니, 사실 그건 그들에게는 말다툼조차 아니었던 게 아니었을까. 싸우는 일이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날카로운 말이 쉽게 오갔다. 이성진의 독설은 대부분 무시하자. 그게 내가 편한 방법이다. 그래도 가끔 거기에 내게 필요한 말이 포함되어 있으니 그것만 쏙쏙 골라 듣도록 하자.
하여간 우리는 조금 서로에게 익숙해졌고, 덕분에 관계가 그 이상 악화되지는 않았다. 덕분에 수업 분위기가 많이 호전되었다. 항상 우리를 볼 때마다 날을 세웠던 학생들이 안심하고 긴장을 풀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이성진은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정신 결계를 익혔다. 나도 이성진의 분할 정도로 뛰어난 설명과 시범에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새로운 기술 칠성 플레이아데스를 익힐 수 있었다. 그때쯤 내 속성 융합 실력은 무서울 정도로 늘어 있었다.
짝을 바꿀 시기는 지나갔다. 과제는 이미 끝냈다. 그래, 이제 우리는 따로 시간을 맞춰 만날 필요가 없다. 없을 텐데……우리는 당연한 것처럼 또 만날 약속을 잡았다.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 일의 시작은 아마 속성 융합을 보다 빨리 익히기 위해 시작한 기술 겨루기였다.
우리는 자주 기술 겨루기를 했다. 정말 짜증 나는 일이지만 이성진의 말대로 몸으로 직접 받아 보는 편이 더 확실하고 빠르게 속성 융합을 익힐 수 있다. 겨루기를 할 때 나는 새로 익힌 기술에 익숙해지기 위해 주로 어둠과 빛의 속성 융합을 많이 사용했다. 여러 방식으로 연습하다 보니 나에게 맞는 융합 비율을 알게 됐다. 그 비율로 던진 융합마법과 이성진의 융합마법이 부딪쳤을 때…….
힘이 무시무시하게 증폭하며 커졌다.
“헉!”
나와 이성진은 기겁하며 마법을 제어했다. 제어하면 제어할수록 마법이 커져 갔다. 단순히 서로가 사용했던 마법의 위력이 합쳐졌을 뿐이라면 저런 위력은 나지 않는다. 가장 맞는 융합 비율을 찾았을 때와 마찬가지다. ‘맞물렸기’ 때문에야말로 나올 수 있는 위력이다.
나는 순간 훈련실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훈련실의 방어마법은 A랭크니 그럴 리 없음을 알면서도. 그런데 멀쩡한 훈련실을 보고 이성진이 이런 말을 했다.
“뭐야. 왜 멀쩡하지?”
알고 보니 이성진은 훈련실을 부순 적이 있단다. 특수능력이 상성과 실력을 씹어 먹을 정도로 위협적이라서 자신보다 강한 힘을 지닌 아이템조차 곧잘 부숴 먹는다나.
여기에서 처음 안 것인데, 그는 특수능력을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한다고 한다. 하긴,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었더라면 애초에 훈련실을 부수지 않았겠지. 심지어 알고 보니 그는 세세한 마력 제어도 서툴렀다. 아니, 서툴다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위력에 비해서는 모자란 수준이라고 한다.
“아니, 그럼 대체 어떻게 속성 융합을 하는 거야? 그것도 그렇게 절묘하게, 다양하게 해내잖아!”
“그거야 상성이랑 감이지. 그리고 위력에 비해서 모자라다고 했잖아. 작은 마력은 세세하게 제어할 수 있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여태까지는 적당히 마력을 사용해서 제어할 수 있었다는 건가? 갑자기 머릿속이 띵할 정도로 자괴감이 몰려왔다.
“거기다 우리는 마력 자체가 속성 융합이랑 다를 게 없잖아.”
이마를 쥐어뜯고 싶은 기분을 참던 나는 이어진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건……그렇지만.”
부정할 수 없다. 확실히 우리 마력은 그 자체로 상극속성 융합이다. 곧 그는 아까 전 현상을 분석했다.
“……그렇군. 부서지지 않은 건 네 제어력 때문인가. 하지만 특수능력을 무시하고 섞였다는 건…….”
“아…….”
“증폭 양상도 그렇고. 확실히 우리 속성은 상극이면서 맞물리는 부분이 있으니.”
맞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증폭 양상은 이상하다.
“시험해 볼래?”
이성진이 툭 던지듯 물었다. 나는 손이 근질근질한 기분에 주먹을 꽉 쥐었다.
“우리 상성.”
그렇게 시작한 것이 놀랍게도 과제를 해결한 후로도 이어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게 무척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처음엔 고유 마력을 섞어 보는 것에서 시작했다. 우리 마력은 말했듯이 상극이다. 섣부르게 섞으면 서로의 마력이 지워졌다. 그러나 이따금씩, 아주 가끔 마력이 맞물리면 무식할 정도로 마법이 증폭됐다. 그 비율을 알아내는 건 우리 감각으로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참고로 마력이 지워지는 비율은 압도적으로 내가 더 높았다. 이성진이 더 강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의 마력이 더 특수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느낌이 이상해.’
대련에서 마법을 쏠 때나 멀리에서 얼핏 마력이 지워질 땐 못 느꼈는데, 차분히 마력을 섞고 있자니 마력이 지워질 때마다 왠지 이상한 감각이 자꾸 몸 안에서 피어올랐다.
나는 그 감각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와 특수속성마법을 맞부딪쳐 보았을 때 알았다. 이성진과 가장 상성이 높은 특수속성마법은 독마법이다. 그의 독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아니라 마력 독이다. 마법을 죽이는 독. 그리고 나는 처음 자신의 상성을 털어놓았을 때 정화마법과 제일 상성이 높다고 말했었다. 실제로 정화마법은 나와 상성이 높다. 그러나 나는 별마법이 제일 나와 상성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정화마법과 이성진의 독마법이 맞부딪쳤다. 사실 정화와 독이라고 하면 정화가 더 상성의 우위를 점하고 있기 마련이다. 독은 오염시키지만, 정화는 그 오염을 정화하는 개념이니까. 그럼에도 오히려 내 마력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 건, 그만큼 이성진의 마법이 독하고, 거칠며, 강력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와 이성진의 마법은 동등하게 부딪쳤다. 동등하게 부딪치고, 동등하게 서로의 마력을 지웠다.
그러한 결과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정화마법과 독마법의 상성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성진 덕분이기도 했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정화마법과 상성이 ‘가장 높다’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성진의 독마법과 내 정화마법이 부딪친 순간, 내 정화마법이 반응했다. 상극의 마법에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것처럼 내 안에서부터 좀 더 힘을 이끌어 냈다. 알고 보니 내게 제일 잘 맞는 특수속성마법은 정화마법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의 마력은 서로의 마력을 깨끗하게 지웠다. 다만 먼저 사라진 것은 역시 내 정화마법 쪽이었다. 이유는 단순히 내가 이성진보다 더 약하고, 내 정화마법이 아직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부딪치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손을 보며 그 순간의 감각을 되새겼다. 가슴이 맥동하며 내부의 마력을 끌어냈다. 부딪친 그 한 점을 향해 힘이 끌려간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감각을, 아마 이성진도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이내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우리의 마력은 상극이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서로의 힘을 끌어낼 수 있다.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마력이 반응하며 서로의 특수성이 더 견고해지는 것이다.
‘세상에!’
감탄하며 고개를 든 순간 나와 이성진의 눈이 맞았다. 일순 우리는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함께하는 것으로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다!
함께 훈련하고 그러면서 진심으로 실력을 겨루며 강해진다? 나는 그게 정말로 친하고 신뢰하는 친구들끼리만 가능한 일인 줄 알았다. 사실 친구들과 함께 훈련하면서도 나는 ‘함께 훈련했기 때문에 강해졌다’는 느낌은 별로 받아 본 적이 없다. 대등한 실력을 지닌 친구들이 있기에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함께 훈련했기 때문이라 생각한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이성진과는 그게 가능하다. 서로 상극인 그의 마력과 내 마력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거기다 이성진과 마법을 훈련하는 건……놀랍게도 즐거웠다.
친하지 않다. 하지만 마법에 대해서는 신뢰감이 든다. 이야기를 나누면 통한다. 훈련하고, 설교를 듣고, 싸우면서, 사실은 무척 즐거웠다. 거기다 알고 보니 우리는 마법을 대하는 방식도 반대였다. 내가 감성 혹은 직감파라면 그는 이성파였다. 그게 또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마법을 더 잘 쓰기 위해서라면.’
의견이 통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과제를 끝낸 후에도 만나 같이 훈련을 하게 됐다. 아니, 과제가 끝난 후 오히려 교류가 더 활발해졌다.
우리는 다른 특수속성마법도 시험했다. 서로가 쓸 수 있는 마법부터 서로가 쓸 수 없는 마법까지. 어디가 어떻게 다르고, 부딪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며, 증폭하기엔 어떤 비율이 제일 좋은지, 모든 것을 일일이 확인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독속 마법만이 아니라 고유 마력 역시 정화마법으로 정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사실을 알고는 조금 허탈했다. 그렇게 많이 고민했는데 정화마법 하나면 되는 거였다니!
정말……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그가 나와 동류라는 건 언젠가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확실해졌다. 그는 나처럼 마법을 훈련하는 데는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이 녀석은 나보고 재능만으로 위로 올라갔다고 했는데. 나도 처음엔 이 녀석이 재능이 엄청 대단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는 노력파였다. 마법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훈련에 시간을 아끼는 건 나였다. 소설을 쓰느라 바빠서 방과 후엔 가끔밖에 시간을 내지 못하는 나. 나로서도 아쉬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로 한 일을 내팽개칠 수도 없지 않은가.
자연스럽게 우리는 자신의 특수한 힘에 대해 좀 더 털어놓았다. 나는 봉인마법과도 상성이 있다. 하지만 그는 봉인에는 상성이 없으며 오히려 봉인을 푸는 해주마법이나 해제마법에 재능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둘 다 똑같이 치유마법에는 상성이 없더라.
서로의 속성을 확인하고 섞어 시험해 보며, 상극의 특수속성마법을 부딪치는 것으로 고유의 힘을 더 이끌어 내던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련’에 시선을 돌렸다.
처음 대련에 시선을 돌린 이유 역시 이성진의 스파르타식 겨루기였다. 나는 그와 대련하면서 좋았던 기억이 없다. 그러나 대련을 할 때마다 무언가를 얻었다. 성장하기 위해 빠뜨릴 수 없는 ‘무언가’를.
전투는 항상 무섭다. 내가 상처 입는 것도 무섭고, 상대가 상처 입는 것도 무섭다. 하지만 이성진과 대련할 때는 딱 한 가지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건 바로 상대가 상처 입는 것. 그가 상대라면 나는 일방적인 약자다. 더군다나 그의 마력은 사람의 마력을 녹인다. 나는 오로지 전력으로 방어하고 공격할 생각만 하면 되었다. 그가 상대라면 언제든지 전력을 낼 수 있다. 신경 쓰지 않고 전력을 낼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건……이것 역시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상쾌하다고 해야 할까?
하나둘 그와 하는 훈련이 늘었다. 그럴수록 우리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상극의 마력을 부딪치며 훈련하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무시무시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다툰다는 소모적 상황을 싫어하는 내가 다투는 것을 감수하고 그와 훈련을 계속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막히고 있던 특수속성마법에서 몇 단계 성장을 보였고, 상극 융합도 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쓸 수 있게 됐다.
사이는 당연히……괜찮아졌다. 여전히 꺼려지고 불편하지만 그래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친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친해졌겠지만……우리는 아니다. 말했다시피 우리는 성격이 맞지 않는다. 서로와 친해지고 싶은 생각 역시 요만큼도 없다. 우리의 관계는 말하자면 서로 강해지기 위해 동맹을 맺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교류 훈련 때가 아니면 여전히 별달리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나누고 싶은 생각도 없다.
하지만 이것조차 반년 전을 생각하면 참 대단한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성인 마법사가 말리러 올 정도로 다툰 끝에, 학교의 분위기가 얼어붙은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긴 냉전 시기를 보냈다. 그렇게 서로가 맞지 않았다. 정말로 그렇게만 생각했는데……이제는 서로한테 맞춰 갈 수 있다니. 이제는 수준별 수업에서 대련을 할 때도 적정선을 지키며 대련을 한다. 심지어는 몰래 규칙을 정하고 그 범위 안에서만 마법을 쓰기도 했다. 덕분에 친구들은 많이 안심한 것 같았다.
슬픈 것은 계속 훈련에만 신경 쓸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랬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었을 텐데.
나는 개인 시간에는 개학한 후로 줄곧 바빴다. 수업 시간에 괜히 좀 더 힘을 드러내서 훈련을 했던 건 그 때문이다. 이성진과의 훈련을 보다 더 기껍게 느끼는 것도 그 때문.
결국 게임 시나리오 하나를 마감한 후에야 이중생활의 진실을 들은 친구들이 나를 걱정하거나 동정할 정도로 나는 바빴다. 수준별 수업에서 가끔 만나는 아르델이나 윤시하, 강예슬도 걱정스러워했다.
“은하 님, 요즘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요?”
“맞아. 피곤해 보여.”
“응. 괜찮아…….”
별로 친하지 않은 최인성마저도 걱정하는 얼굴로 나를 살폈다. 그러나 나는 그저 괜찮다고만 말하며 일에 집중했다.
그러는 동안 2학기가 순식간에 반이나 지나갔다.
☆
마음에 약간 여유가 찾아온 것은 소설 두 작품이 정리되었을 무렵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동아리 활동을 길게 즐기며 그 여유로움에 깊게 감동했다.
“은하 님, 요즘 바쁜 것 같던데 무슨 일 있었나요?”
“아, 할 일이 있어서……. 하지만 이제 괜찮아요.”
“그래요?”
선배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오랜만에 유리 막대를 휘적휘적 섞었다. 오묘하게 섞인 색유리 구슬이 책상 위로 떨어져 내렸다. 오랜만에 하는 것치고는 모양이 제대로 원형이다. 처음엔 강낭콩 같은 모양만 나왔었는데. 나는 뿌듯함을 느꼈다.
그때 공방 문이 열리더니 이성진이 들어왔다. 그가 동아리에 오는 것은 제법 오랜만이다. 곧바로 여자 선배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성진이 아냐? 오랜만이네.”
“오랜만에 눈 호강 하겠다.”
“미남 후배 등장일세!”
마치 아이돌 같았다. 그렇다고 과도하게 달라붙는 건 아니고, 진짜 외모만 보고 눈 호강 한다는 느낌이다. 저놈 성격이 더러운 건 쟤가 여기 들어오고 머지않아 부원 누구나 알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내 맞은편에 앉았다. 한켠에서 여자 선배들이 가위바위보를 했다. 그는 손재주가 좋아 뭘 해도 금방 해내는 편이지만, 블로잉(파이프를 이용한 유리 공예 기법)을 제일 맘에 들어 하는 모양이었다. 곧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여자 선배가 블로잉 기법을 가르치기 위해 그를 데려갔다.
“여전히 잘생겼네요.”
나를 가르치는 선배도 여자다. 하지만 이성진에게 이성적인 관심은 없다. 볼 때 반사적으로 감탄하는 일은 있어도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지 않으며, 오히려 때때로 그를 보며 인상을 썼다. 그 가장 큰 이유는……‘님’이라는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가 내 팬이기 때문이다.
“은하 님도 저런 얼굴이 좋나요?”
“음……아뇨. 전 좀 단아한 미인이 취향이에요.”
“단아…….”
풉, 선배가 웃음을 눌러 참더니 귓가에 소곤소곤 수긍했다.
“하긴 그러네요! 쟤가 단아한 얼굴은 아니죠. 화려하다면 모를까.”
“맞아요.”
“킥킥킥. 하여간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나는 흘끔 성진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하지만 쟤가 확실히 잘생기긴 잘생겼어요. 곁에 두고 눈 호강 하려는 부원들 마음이 이해 가요.”
선배가 복잡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맞아요. 하지만 미남……이라기보다는 미소년 계열에 가깝죠?”
“조금 여린 면이 있긴 해요. 어려서 그런가?”
“그런 것 같아요.”
차가운 시선, 차가운 얼굴. 그의 얼굴에 관심이 가지 않는 이유에는 그의 분위기가 인하랑 비슷한 타입이라는 것도 있을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첫 만남 때부터 쌓인 비호감이다.
‘나는 너같이 외모만 보고 판단하는 여자는 딱 질색이야.’
그것만 떠올리면 지금도 속에서 열불이 난다. 나는 주먹을 꽈악 쥐었다. 그런데 언제 돌아왔는지 이성진이 다시 내 맞은편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요즘 수업 외엔 보이지 않는다 싶더니 여기 있었군.”
“어? 아, 응. 왜?”
“아까 이소영이 널 찾았거든.”
“소영이가? 선배, 잠시만요.”
“네네~.”
나는 토치의 불을 끄고 유리 막대를 내려놓은 후 핸드폰을 켰다.
『수신인: 이소영
나 찾았다던데
무슨 일 있어?』
주소록에서 이소영의 이름을 찾아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은 금방 왔다.
『발신인: 이소영
오늘 민희랑 현호랑 카페가기로함. 같이 갈래?』
나는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수신인: 이소영
인하나 한수나 성진이랑 인성이는?』
『발신인: 이소영
성진이랑인성인 올거고, 인하랑한수는 오늘 데이트래*^^*』
헐.
『수신인: 이소영
나 암것도 못들었는데』
『발신인: 이소영
바빠보였다나바』
『수신인: 이소영
움…..갈게.올만에 단게 먹고싶당ㅇ♢ㅇ』
『발신인: 이소영
ㅋㅋㅋㅋㅋㅋㅇㅇ언제마쳐?』
『수신인: 이소영
30분쯤 걸려.』
『발신인: 이소영
그럼 그후에 보쟈ㅎㅎ』
웃음 띤 얼굴로 핸드폰을 내리자 선배가 물었다.
“친구랑 놀러 가기로 했어요?”
“네. 8시 이후에요. 원래 오늘은 8시까지 할 생각이었거든요…….”
말하며 괜히 그녀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선배는 평범하게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랑 같이 가면 되겠네.”
이성진이 툭 내뱉었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어, 30분만 하려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선배가 비꼬며 빈정거렸다.
“이성진 후배님은 조금만 더 성실히 하면 좋을 텐데. 손재주는 좋은데 아까워.”
“그러게요. 부럽게시리.”
내가 선배의 귓가에 작게 속닥이자 선배가 표정을 풀며 픽 웃었다.
30분은 훌쩍 지나갔다. 나름 열심히 유리로 모양을 만들던 나는 곧 이성진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내가 오늘 만든 유리구슬은 선배의 손에 의해 팔찌로 재탄생했다.
“자, 오늘의 작품이에요.”
“감사합니다.”
나는 투명한 유리구슬이 엮인 팔찌를 손목에 차며 흐뭇하게 웃었다.
나와 이성진은 선배들에게 인사하고 동아리 밖으로 나왔다. 참 다행인 건, 이성진을 노리고 이 동아리에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하긴, 저 녀석이 나와 냉전 중이었단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웬만해선 우리 두 사람이 있는 공간에 들어서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성큼성큼 걸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이런, 아슬아슬하네. 텔레포트 하는 게 나으려나? 하지만……이렇게 시간이 비는 것은 참 오랜만이다. 그래서 그런가, 좀 더 느긋하게 걷고 싶었다. 정확히 시간을 약속한 것도 아니었으니 반드시 8시 정각에 도착할 필요는 없으려나? 그러고 보니 어디서 만날지도 듣지 못했다. 나는 내려가면서 학생증을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