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34
그리고 또 하나는 리포트와 감상문이다. 지정된 특수속성마법에 대해 조사한 후 리포트를 쓰거나, 지목된 책과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적어 내면 된다. 특수속성마법은 마법을 배울 수 있을 만한 소재가 매우 적다. 그러면서도 공부는 매우 많이 해야 하는 과목이니, 불합리할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선생님은 우리가 다양한 자료를 접하도록 권유한다.
이 과제 역시 짝 두 명이 함께 작성해야 한다. 우리는 지정된 자료를 보고 각자 인상에 남은 것을 종이에 쓴 다음, 둘 중 한 명이 그것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이 과제를 해결하고 있다. 물론 정리하는 것은 번갈아 가며 한다. 리포트 과제는 보름에서 한 달 주기로 나오고, 내가 정리해서 쓰는 건 이번으로 두 번째다.
사각사각, 나는 말없이 글만 적었다. 별다른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이 과제를 할 때는 보통 이렇다. 필요한 말만 하며 묵묵히 과제를 한다. 그러다가 가끔은 훈련을 할 때처럼 마법에 대한 화제로 불이 붙어 의견을 나누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대련 때 그렇듯 꼭 한 번은 다투게 된다. 하지만 침묵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우리는 마법을 위해서가 아니면 서로 말을 걸 이유도 필요도 없는 사이였다. 그저 의무적으로, 소문거리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비밀 도서관에서 만나 과제를 할 뿐이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조금 느낌이 달랐다. 내가 이성진이 쓴 것을 확인하고 글을 정리하는데, 그가 말을 걸어왔다. 그것도 마법이나 과제와도 전혀 상관없는 화제로.
“확실히, 글을 잘 쓰는군.”
손을 놀리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어느새 그가 등 뒤에서 내가 쓰던 글을 보고 있었다. 나는 곤란해하며 몸과 팔을 이용해 글을 가렸다. 쓰다 만 글을 남에게 보이는 건 무척 부끄럽고 창피하다. 나는 글을 몸으로 가린 채 대답 없이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게임, 어제 친구들이랑 같이 해 봤어.”
그러나 그 직후, 나는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결국 해 본 거야?”
“여자 캐릭터는 처음에 진행 못 하니까 먼저 남자 캐릭터로 엔딩을 두 개 봤어.”
“아, 그거. 중간에 선택지에 따라 연애 루트도 있고, 우정 루트도 있고…….”
“성녀와는 비밀 연애를 하게 되더군.”
“성녀는 신과 결혼한 사람이란 이미지가 강하잖아? 성녀라는 위치를 가지고 대놓고 연애하진 못하지.”
“그런 건가.”
“응.”
나는 대답하며 리포트를 마저 썼다. 공들여서 몇 번이나 퇴고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한 바닥만 채우면 되니까.
나는 쓴 글을 다시 한 번 읽으며 이상한 문장을 지우거나 고쳤다. 그 정도만 했다. 다행히 점심시간 전에 전부 마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성진도 나름 글을 잘 쓰는 편이다. 작가처럼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다듬어진 실력은 아니지만 문맥이 명료하고 문법도 괜찮다. 그건 분명 많이 썼다기보다는 많이 읽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무심코 물었다. 그건 이성진이 모처럼 내게 걸어온 대화의 연장이었다.
“너 책 많이 읽어?”
“자주 도서관에서 마주치잖아.”
“그런가…….”
“적어도 네 방에 있는 책 중 반은 읽어 봤던 거야.”
“헐.”
그 말만으로도 그가 내 생각보다 책을 훨씬 많이 읽었다는 게 충분히 전해졌다. 사실 난 의외로 책을 그렇게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 자의로 보는 책은 한 달에 10권을 못 넘긴다. 자료용이나 공부용으로 보는 책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는 의무적으로 책을 읽을 만한 이유가 공부를 제외하고는 없을 터였다. 내가 모은 책 중에는 마니아층만 읽을 만한 책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책들을 포함해 반 이상 읽어 봤다는 건……정말로 대단한 일이다.
차갑고 난폭한 성격과는 다르게 책을 좋아하는구나. 의외였다. 그건 눈앞의 이 녀석이 실은 판타지 소설을 좋아한다고 들었을 때 느낀 감정과 비슷했다.
“보통 소설 위주로 읽지.”
“그렇게나 읽다니, 대단하네…….”
나는 턱을 괴다 말고 흠칫했다. 나, 방금 전부터 이 녀석이랑 엄청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있다……? 심지어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평소에도 당연하게 이랬던 것처럼.
‘하긴, 요즘 꽤 대화를 나누긴 했지…….’
필기 과제를 할 때는 침묵하는 편이지만, 마법에 대한 일에는 서로 불타올라서 지식을 교환하니까. 거기다 속성 융합 훈련에 대련까지 곧잘 하고 있으니.
그래, 이제 나는 그와 대화를 하는 것이 그다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반복되는 토론과 다툼 속에서 우리는 대화에 익숙해졌고, 그 익숙함은 어느새 마법과 관련 없는 화제에도 옮아가고 있었다.
그것을 인식했을 때, 나는 그와 나의 사이가 어느새 조금 좁혀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그건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절대 맞지 않을 거라 생각한 사람과의 거리가 좁혀진 건, 나에게 있어서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으니까. 남이 상처 입는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직설적인 말투에, 제가 좋은 것만 보는 융통성 없는 성격. 그런데도 마법에 있어서만은 너무나도 잘 맞는 상대.
‘결과적으로 특수속성마법 실력은 엄청나게 늘었으니.’
나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이성진을 흘겼다. 진짜 절대로 안 맞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단 성격부터 그 모양인 데다, 마력도 따지고 보면 상극이다.
‘아니 뭐, 최인성이나 시하네랑도 수준별 수업을 계기로 좀 더 친해지긴 했지만…….’
나는 손에 살짝 힘을 줬다. 싱숭생숭한 감정이 가슴을 들쑤셨다. 나는 이내 공책을 덮었다.
“다 썼어. 다음 수업 때 내면 돼. 내가 가지고 있을까?”
“그래.”
“그럼 5교시 때 만나.”
나는 빠르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음 시간은 이성진네 반과 합동 수업이다. 그것을 의식해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느 때처럼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나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같이 가지. 어차피 나도 소영이한테 볼일이 있어.”
“……아, 나 교실에 안 가고 바로 체육관으로 갈 거야. 친구들한텐 미리 그렇게 말해 놨어. 그럼 간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몸을 돌렸다. 미리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던 건 그 때문이다. 사실 좀 더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리포트를 적은 공책을 아공간에 넣고 먼저 비밀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1학기는 정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아니었는데. 그에 비해 2학기는 굉장히 평화롭다. 평화롭지만 곤란하다. 곤란하지만 유익하다. 저런 녀석이랑은 절대로, 전혀 맞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는 옷깃 안쪽에 있는 목걸이를 쥐었다.
대체 왜 다시 심장이 뛰는 걸까. 항상 그러는 건 아니지만, 잊을 만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설마 좀 친해졌다고 그러는 건가? 성격도 얼굴도 전혀 내 취향이 아닌데, 대체 저 녀석의 어딜 보고? 이성진과 그 녀석은 정말 닮은 점이라곤 하나도 없단 말이다. 그 녀석은 머리가 좋고 유능한 편이었지만, 낯선 사람에게는 차가웠지만, 그래도 장난도 잘 치고 제법 웃었고, 또……. 나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책은 그다지 즐겨 읽는 편이 아니었다. 일단 소설은 잘 안 봤다. 그나마 내가 쓴 소설만 좀 읽는 정도였다. 편식을 많이 했다. 고등학생일 적에, 네가 7살짜리 꼬마 애냐고 잔소리를 한 적이 있다. 그러면 그 녀석은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귀를 막았다. 정말 내 취향에 딱 맞는 얼굴이었다. 귀엽지만 남자다울 정도로만 예쁘장하고 개구쟁이 같은 성격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 성인이 된 후에는 약간 피폐해지긴 했지만, 그래도……그래도 저렇게 차갑지는 않았다.
닮은 점이라곤 거의 없는데, 전혀 없는데, 대체 왜 계속…….
‘얼굴만이라면 제현 오빠가 최곤데. 하아, 나 얼굴 너무 밝히는 거 아냐? 한수도……역시 너무 밝히나. 아니, 이 정도면 보통이지.’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기던 나는 우연히 가드 트리오를 보았다. 역시 얼굴이며 성격이며 제현 오빠가 딱 내 취향인데. 나는 복잡한 심경을 털어 내며 세 사람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은희 언니, 오빠들, 안녕하세요.”
“앗, 은하야.”
“어, 꼬맹이다.”
“은하잖아.”
세 사람은 나를 보며 제각기 반가워했다. 천호 오빠도 참, 이제 꼬맹이라 불릴 정도로 작지도 않은데. 은희 언니가 활기차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이동 수업이니?”
“네. 합동 수업이에요.”
그러자 은희 언니가 무엇을 떠올렸는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전처럼 살벌하게 싸우지는 말고…….”
“그건 진짜 사고였어요.”
나는 쑥스러운 기분에 손을 내젓고는 시선을 피했다.
“그냥 조금 욱해서…….”
“어이구. 조금 화났다가 다 골로 가게 생겼네.”
은희 언니가 장난기 어린 투로 대꾸하며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그런 사고는 자주 있는 편이지만 말이야, 그래도 그렇게 살벌한 건 처음 봤어. 전투 마법사는 안 하겠다 하더니만 어째 그렇게 살벌하게 싸우니? 네가 전투 마법사로 진로를 잡았으면 또 얼마나 대단했을지 상상이 안 간다. 물론 넌 어느 길을 선택해도 대단하겠지만.”
“그,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런데 그런 사고가 자주 있는 편이라고? 나는 놀라고 말았다. 과연 마법 세계는 살벌하구나.
“아냐, 진짜야. 학생들 사이에서 이 정도 소동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고 다들 수군댔어. 근데 그때 그 남자애는 누구였니? 은하랑 사이가 안 좋아?”
“그냥……보통이에요. 친구의 친구……? 친하진 않아요. 성격이 잘 안 맞거든요.”
“화난다고 너무 감정적으로 마법 쓰지는 말고.”
“그때 한 번뿐이에요.”
“그렇다고 또 너무 억누르지도 말고. 가끔은 그렇게 맞부딪치는 것도 좋아. 물론 그때처럼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겠지만.”
“네에.”
나는 어느새 설교를 시작한 은희 언니를 향해 약간은 장난스럽게, 그러나 성의 있게 대답했다. 은희 언니가 나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제현 오빠가 툭툭 내 머리를 쓸었다.
“맞다, 이번에 나온 [검과 불꽃과 성녀] 플레이 해 봤어.”
“앗, 친구들도 어제 그거 했다던데.”
나는 약간 놀라며 천호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이 세 사람은 고맙게도 내 게임을 항상 플레이 해 주고 있다.
“어땠어요? 이번 게임은 정통 로맨스가 가미된 판타지였는데…….”
“재밌었어. 마지막 진엔딩 볼 때 성녀가 많이 불쌍하더라.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어. 역시 네가 참여한 게임 중에선 [이터널 시티]가 제일 좋아~.”
“남자 플레이어들은 대개 [이터널 시티]를 선호하네요. 현호랑 인성이도 그렇던데. 아, 인하도 [이터널 시티]를 제일 좋아하지만요. 민희랑 한수는 [드래곤 나이트]가 제일 취향이라더라고요.”
“나도 [드래곤 나이트]가 제일 재밌었어.”
이번엔 은희 언니가 눈을 반짝였다. 아무래도 같은 장르인 [드래곤 나이트]와 [이터널 시티]를 비교했을 때 여자들은 [드래곤 나이트]를, 남자들은 [이터널 시티]를 고르는 확률이 높은 것 같다.
때마침 종이 쳤다.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예비 종이다. 이런, 나는 대화를 멈추고 재빨리 세 사람에게 인사했다.
“저 이제 가야겠어요. 언니, 오빠들, 수고하세요~.”
“그래. 다음에 보자, 은하야.”
“또 봐, 꼬맹아.”
“글 쓴다고 너무 무리하진 말고. 민희가 너 요즘 계속 피곤해 보인다고 걱정하더라.”
“네에.”
그러고 보니 세 사람은 내가 소설도 쓴다는 사실은 아직 몰랐던가? 언제 말을 해……해야 하려나? 응, 부끄럽지만 하는 게 좋겠지. 나는 세 사람과 인사하며 몸을 돌렸다.
체육관에 도착하니 이미 친구들이 와 있었다. 이성진도 함께였다. 친구들은 늦게 온 나를 보고 의아해했다.
“쟤 말론 먼저 갔다고 하더니?”
인하가 손가락으로 이성진을 가리켰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게, 오는 길에 은희 언니네를 만났거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생각보다 늦었네.”
“그랬구나.”
친구들보다는 조금 늦게 왔다고 해도 나는 학생들 중에선 일찍 온 편이었다. 입구와 가까운 장소에 서 있었기 때문인지, 우리는 꽤 많은 학생들한테 인사를 받았다. 이제 보니 그중에는 올해 이 학교에 입학한 학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을 알고는 착잡해졌다.
‘이상하다? 주목이 좀 줄어들어야……줄어들어야 하는데?’
다양한 곳에서 뛰어난 재능을 꽃피워 대현에 들어온 학생들은 다들 제 실력과 재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에서 추종자까지 데리고 있는 여자를 보고 그들이 느끼는 심정은? 한마디로 표현해서 ‘웃기지 마’ 정도가 되겠지.
‘……인하의 영향인가?’
그럴 수도 있다. 인하와 한수는 무척 압도적인 실력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으니까. 민희도 사교성이 좋아 다른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하다. 그리고 나와 이성진의 냉전. 그 일을 계기로 나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학생들이 나에게 시비를 걸 생각을 접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성진처럼 많은 사람의 적의를 받고 싶지는 않겠지. 하지만 뭔가, 전보다 나한테 ‘은하 님’이라고 부르는 학생의 숫자가 늘어난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설마, 착각이겠지.’
우리는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곧 종이 쳤고, 선생님이 들어왔다. 요즘 합동 수업이나 실기 수업에서 테마를 정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도 그러했다. 오늘의 수업 내용은 2 대 다수였다.
“2 대…….”
“다수……?”
모두 해 본 적 없는 주제에 어리둥절해했다.
“두 명이 팀을 짜서 여러 명과 싸우는 거야. 참고로 실제 대련으로 할 거다.”
“2인 팀과 다수 팀으로 나눌 거야. 2인 팀은 학년 상위 10명으로 짤 거고, 다수 팀은 그 상위 조를 이기면 되는 거지. 아무래도 우리 학년에 웬만한 또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학생이 몇 명 나온 것 같아서, 이런 걸 해도 괜찮겠다 싶더라고.”
나는 그 말에 곤란함을 느꼈다. 그렇다면 멤버 중 9명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나.
“선생님, 그 2인 팀은 어떻게 짝을 짓나요?”
아르델이 손을 들어 물었다. 그건 나도 궁금했다. 무작위? 아니면…….
“마력 패턴으로 상성에 맞도록 짝을 짤 거야.”
……진짜로 정해져 있는 거잖아. 나는 고개를 돌려 이성진을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그도 나를 돌아보았다.
결국, 예상대로 됐다.
특수속성 수업 때에도, 다른 실습수업 때도 자주 그랬듯이, 나와 이성진이 짝이 되었다. 누군가가 그것을 보고 불만을 내뱉었다.
“에이 씨, 또야.”
“왜 쟤야.”
당연히 친구들도 불만이 많았다.
“은하랑 성진이……자주 같은 조가 되는 것 같지 않아? 시간도 그렇고.”
“응.”
인하가 최인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웃으며 괜찮다고 손짓했다. 인하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인하는 아르델과 짝이 되었다. 소영이의 짝은 최인성이다.
“그럼 유은하랑 이성진부터, 앞으로 나와라.”
다수 팀은 그냥 무작위인 듯했다. 12명이 우리의 앞에 섰다. 나는 시선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라 눈동자를 굴렸다.
“너희는 전에 사고 친 전적이 있으니까, 조건을 좀 달 거다.”
“…….”
나는 곤란한 심정으로 선생님을 돌아보았다. 이성진도 묵묵히 선생님을 돌아보았다.
“먼저 마법을 쓸 때 반드시 페어라는 이점을 살려서 힘을 합쳐 상대를 쓰러트릴 것.”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였다. 하지만 이 녀석이랑 힘을 합쳐야 한단 말이지……. 나는 이성진을 흘끔거렸다. 문제는 또 있었다. 내 고유마법은 직접 알려 주지 않으면 어떤 마법인지 파악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성진은 아직 내 메인마법을 모른다.
“그리고 너희 두 사람은 메인마법 사용 금지.”
“네, 네……?”
나는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선생님은 단호했다. 불만은 다른 데서 나왔다.
“네에?!”
“선생님,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런 거 없으면 너희들 순식간에 당한다? 뭐, 쟤네가 얼마나 호흡을 맞출 수 있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된 이상 빨리 끝내는 게 남는 거겠지만…….
“플러스, 반드시 고유마법, 그것도 하나만 써서 싸워라. 너희 서브도 만들었지?”
이번에야말로 나는 당황했다. 아니, 저 많은 사람이랑 대련하는데, 고유마법만 쓰고, 심지어 한 종류로만 싸우라고? 뭣보다 나는 이 녀석의 서브마법을 모른다고!
“대화할 시간을 1분만 주마. 나머지는 대련 중에 이야기해라. 아, 대련 시에 하면 너희들 염화도 못 쓰겠네. 마법을 하나밖에 못 쓰니까.”
누군가가 또다시 그건 너무 불리하다며 소리쳤다. 그러나 나는 그 목소리에 신경을 쓰지 못한 채, 다급하게 이성진을 돌아보았다.
「야. 어떡할래?」
「수업 때문에 합동마법은 몇 번 연습해 봤잖아.」
「그거야 우리 속성을 시험하기 위해서 썼던 거지. 그리고 지금은 속성마법 못 쓰잖아.」
「너 서브는 뭔데?」
「결계랑 문자.」
「그게 서브였어? 그럼 메인은 뭔데?」
「눈치 못 챘으면 비밀이라니까?」
「소영이한테 정도는 말해라.」
「지금 그 이야기 할 때 아니지?」
「내 서브는 염력.」
「헐, 미친. 말도 안 되는 조합이잖아. 너 그걸로 산이라도 부수려고?」
「메인을 알기 힘든 네가 더 말이 안 돼. 쫌생이같이 숨기고나 다니고.」
「너 시비 거니?」
거리낌 없는 대화 끝에 우리는 험악해졌다. 서로를 노려보며 염화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 1분이 지나 인정사정없이 대련이 시작되었다.
“대련 시작!”
“앗……!”
“어…….”
나만이 아니라 상대편도 당황했다. 12명의 학생들이 공격을 시작해도 될지 말지 망설이며 자리에서 머뭇거렸다. 그사이에 다른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된 이성진이 내 귓가에 얼굴을 바싹 가져와 귓속말을 했다.
“아앗──!”
어쩐지 뒤에서 비명이 들렸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칠성 플레이아데스, 문자마법으로 쓸 수 있지? 거기에 내가 염력으로 공기를 압축해 중력장을 펼친다.”
뭣이라? 나는 무심코 목소리를 높였다.
“너 미쳤니? 그 위험한 걸 사람한테 쓰겠다고?”
귓속말을 한 보람이 없었다. 그러자 이성진도 표정을 찡그렸다.
“사람한테 안 쓸 거면 뭐 하러 배웠는데?”
“그런 건 좀 강한 사람한테 써야지.”
그 이후부턴 다시 소곤소곤댔다. 그동안 앞에 있는 학생들은 우리에게 덤벼들지 않고 기다려 줬다. 그래서 거리낄 것 없이 대화를 마칠 수 있었다.
좋아. 사용할 기술을 골랐다. 나는 문자마법 전용 펜을 불러냈다.
“그럼 이제……덤벼도 되지?”
“응.”
“그냥 시작된 순간 덤비면 될 걸 그걸 또 기다려 주고 있다니, 미련하군.”
“야!”
나는 버럭 소리 질렀다. 아니, 기다려 준 건 고마운 거고, 그걸 그렇게 삐딱하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 이제 이 녀석한테 화내는 게 익숙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여간 이 자식은 말 재수 없게 하는 데 뭐가 있다니까! 실제로 앞에 있던 학생들 대부분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혹은 이 얼굴 때문에 그것도 멋있다고 멍해진 여자도 있었다. 하여간 얘랑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보면 짜증 난다. 이래서 안 맞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다.
‘……어라? 그러고 보니까.’
그때 머릿속에 문득 ‘그 녀석’과의 일이 떠올랐다.
‘그 녀석도 가끔 핀트가 엇나간 말을 해서 자주 다퉜었지. 나만 소리 높이고, 걔는 웃고…….’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것을 애써 떨쳐 내며 눈앞에 집중했다.
“그럼……간다.”
나는 펜으로 글을 썼다.
『파도!!!』 『넘실대라!!!』
나는 마법을 발동시키면서 이성진의 마법을 떠올렸다. 나를 덮치던 그 강렬하고 거대한 힘을. 내 결계를 무용지물로 만들며 내 손을 꿰뚫었던…….
그때의 이성진은 무서웠지만, 사실 그런 마법을 본 것도 그러한 고통을 겪은 것도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무서운 걸로 따지자면 4학년 때 겪었던 테러와 스토커 사건이 훨씬 더 두렵고 무서웠다. 아팠던 걸로 따지면 5학년 때, 민희가 납치되고 독으로 어깨를 꿰뚫렸을 때가 훨씬 더 아팠다. 경이롭기로 따지면, 민희를 납치했던 자의 동료였던 하늘 마법사, 그 남자가 도시를 감싸던 유리 막을 전부 부수고 그 압력으로 바다 밑바닥을 드러내며 파도를 범접 못 하게 조종했을 때가 훨씬 더 경이적이었다.
그때에 비하자면 전부 별거 아니었다.
마법을 썼다. 동시에 이성진이 그 파도를 염력으로 조종했다. 순식간에 눈앞에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내가 마력으로 만든 파도, 그 위를 덮는 이성진의 마력. 지난 경험을 통해 상극의 마력이 정확히 맞물렸다!
쿠와아─!
“꺅!”
맞물린 순간, 소용돌이의 부피가 믿을 수 없을 만큼 팽창됐다. 저건 저래 봬도 이성진의 물마법 복사판인데, 나는 혀를 차며 문자로 마법을 썼다.
『정화!!!!』『덩굴!』
탄생한 정화속성 덩굴이 소용돌이를 휘감았다. 나는 그동안에도 계속 파도를 제어하고 있었다. 소용돌이를 만드는 것은 이성진의 힘, 나는 이를 악물며 그 힘과 싸웠다. 저 소용돌이를 거의 무방비하게 맞은 사람에게 물질적인 영향이 가지 않도록!
정화의 덩굴을 따라 소용돌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성진이 고까운 눈으로 나를 흘겼다.
“저 정도론 큰일 안 나.”
“사람이 다 너같이 무식한 줄 아니?”
“너 나한테만 막말하는 거 아냐?”
“네가 나한테 막말하는 건 생각 안 하고?”
“…….”
나는 반사적으로 말을 내뱉다 말고 눌러 참았다. 저 녀석의 화법에 휘말려 날카로운 말을 내뱉기 일쑤. 그러나 그게 습관이 되면 안 된다. 저 녀석과 똑같이 되면 어떡해. 나는 숨을 삼켰다.
“……미안.”
그러자 그의 표정이 더 미묘해졌다.
나는 짧게 내뱉고 앞을 보았다.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마력의 색과 흐름으로 보건대, 다행히 다들 무사한 모양이다. 하여간 저 녀석의 마법은 정화마법으로 정화해야 할 정도로 악독하다. 제현 오빠의 어둠마법처럼 세세히 제어하기 힘든 데다 독이 오르기 쉽다. 그래도 저 녀석의 마법을 내 정화마법으로 정화할 수 있으니, 아마 제현 오빠의 마법도 내 속성으로 정화할 수 있지 않을까.
“으이그. 그러니까 대화 끝나기 전에 덤볐어야지. 순식간에 당한다고 했지? 다음 다수 팀, 이어서 얘들 상대해라.”
“너희는 방금 썼던 것 이외의 방법으로 또 협력해서 해라.”
“……헉.”
이대로 연이어서 하는 거야? 설마 질 때까지 하는 건 아니겠지? 이번엔 또 뭘 쓰면 좋을까? 비주얼만 얼핏 다르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이번엔 네가 메인으로 제압해. 내가 보조할 테니까.”
“으음…….”
나는 머릿속으로 내가 여태까지 써 왔던 문자마법 중에 염력이랑 어울릴 만한 것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었다.
그래도 나름 재미있었다. 아니, 근데 솔직히 무섭기도 했다. 두 번째 대련부터는 시작 호령이 들리자마자 달려드는데, 심지어 이성진은 걔들을 인정사정없이 염력으로 날려 버리질 않나. 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러다 그들이 금방 자세를 바로잡는 걸 보고 진심으로 안도했다.
우리는 언젠가 했던 것처럼 서로의 마력을 조합하며 증폭하기를 반복했다. 잘못 어울리면 서로에게 피해가 가지만, 잘 맞물리면 파괴력이 배가(倍加)된다. 배가될 때의 기분이 얼마나 짜릿한지 모른다. 이래서 내가 이성진과 협력하는 걸 그만둘 수가 없는 거다.
우리 다음은 이소영과 최인성의 차례였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친했던 만큼 여유롭게 보조를 맞췄다. 다만 선생님이 우리에게 내건 조건은 다른 친구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아서, 나와 이성진이 마법을 얽어 사용한 것에 비해 두 사람은 따로따로 마법을 사용했다. 한쪽에선 바람으로 쓰러뜨리고, 놓치면 그림자가 날아가는 식이었다.
인하와 아르델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따로 공격을 했다. 마법이 사전적인 의미로 합쳐진 것은 둘이서 동시에 같은 이를 공격했을 때 정도였다. 비슷한 상성의 마법이 부딪치자 훨씬 화려하게 불타올랐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너무 의미를 사전적으로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사실은 저런 식으로 힘을 합쳐도 상관없었던 게 아닐까? 오히려 사이가 좋지 않은데도 그렇게까지 마법을 합치는 우리가 이상한 거였을지도.
“너희 말이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엄청 친해진 것 같더라? 아까 대화 나누던 것도 그렇고. 수준별 수업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까 엄청…….”
소영이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도 짐작이 갔다. 그러나 나는 이상한 말을 들은 것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어? 딱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