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38
뭐어, 규칙이라니 어쩔 수 없다. 많이 아쉽고 아깝지만 이번에는 포기하자. 나는 곧 팔을 걷어붙였다.
“좋아. 그럼 이제 해 보자.”
“흠, 어디서 하는 게 좋으려나?”
“아무래도 마력석이 많은 곳을 고르는 게 좋겠지?”
“하나씩 파낼 거면 듬성한 곳이 좋지 않나?”
우리는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며 습관적으로 손을 잡고 움직였다. 시야를 개방한 상태라 마력석이 어디에 많고 어디에 적고 어느 것이 힘이 강한지까지 전부 보였다.
뒤에서 우리를 고스란히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 음……우리가 먼저 이쪽으로 가면 알아서 다른 곳으로 갈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보네…….
‘뭐, 상관없나.’
같이 행동하든 따로 행동하든 무슨 상관이람. 서로 마력석만 잘 채굴하면 됐지. 아까부터 계속 묘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는 강수정이 신경 쓰이지만, 이것 역시 별로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거다.
“그럼……난 여기로 할래. 한수는……저기 어때?”
“많아?”
“엄청 많진 않고, 적당히 있어.”
“그럼 난 저기서 하지 뭐. 은하 너, 집중하다가 너무 멀리 가지 마라.”
“응. 주의할게.”
내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나는 손을 이마에 대며 장난스럽게 거수경례했다. 내가 한수에게 추천한 곳은 나와는 반대편에 있는 벽 쪽이다. 채굴하는 동안 내 모습을 주시할 수 없으니 걱정하는 것이다. 나는 집중하다 보면 가끔 주위를 못 보고 이상한 곳으로 가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럼, 우리는?”
내가 곧바로 마력석 채굴에 착수하려는데 이성진이 내 앞에서 팔짱을 끼며 물었다. 내가 지목한 장소로 걸어가던 한수가 멈칫하며 우리를 돌아보았다. 떼어 놓아도 계속 이성진의 곁에 붙어 있던 여자애가 나를 흘겼다.
“성진아, 이런 애가 뭘 안다고~.”
“…….”
이성진은 여자애를 무시하며 내게 눈빛으로 말했다. ‘어디 또 개무시해 봐라.’ ……솔직히 개무시하고 싶었지만 같은 조이니 그만두자. 나는 가지고 있던 레이저 전등으로 세 곳 정도를 가리켰다.
“…근데 너도 마력에 민감하지 않던가?”
“어. 잘 선택했네.”
“알면서 왜 물어본 거야?”
“시험 삼아.”
와, 지금 날 내려다본 거지? 짜증 나네. 물론 그가 나보다 월등히 강한 실력자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짜증 나는 건 짜증 나는 거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정한 자리로 가 주저앉았다. 진짜 생각할수록 기분 나쁘네.
“후…….”
됐어. 집중하자.
나는 마력을 똑바로 꿰뚫었다. 내가 원하는 마력만이 선명하게 시야 안에서 살아났다. 그 빛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목에 걸려 있던 펜던트가 진동하며 빛을 내뿜었다. 나는 버튼을 눌러 삽에 막을 만들고 삽을 흙 안에 집어넣었다. 삽도 마법 아이템이기 때문에 흐르는 마력 색으로 위치를 투시할 수 있다.
삽을 잘 조정해 삽의 막이 마력석 바로 아래에 위치하도록 만든다. 나는 삽 버튼이 반짝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삽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삽에 걸쳐진 장막이 마력석을 둥글게 감쌌다.
‘좋아.’
방금 한 작업으로 이 마법 아이템이 어떤 식으로 흙을 파고드는지도 확인했다. 흙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다. 그러니 빨리 잡아 빼서는 안 된다.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며 빼내야 한다. 나는 삽을 느리게 잡아당겼다.
마력석이 적은 흙과 함께 빠져나왔다. 나는 버튼을 눌러 구체를 평면으로 되돌렸다. 수정 모양을 지닌 녹색 마력석이 얇은 막 위에 놓여 있었다.
‘와, 예쁘다.’
나는 습관적으로 마력석을 해석했다. 얼핏 흙, 물, 바람속성이 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특별히 정해진 속성이 없는 보통 마력석이다. 지금은 연녹색으로 보이지만 그건 진짜 색이 아니다. 조명 구슬을 비춰 보니 빛이 비춰질 때마다 색이 변화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정말로 너무너무 예뻤다.
마력 패턴을 잘 기억하면 아마 내 힘으로 이것과 비슷한 마정석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다. 모양도 색도 이 모습 그대로……. 나는 무심코 팔찌로 시선을 내렸다. 내가 처음 마정석을 만들었던 날을 떠올린 것이다. 이 팔찌를 샀던 날의 일이다. 제현 오빠, 참 무서웠지…….
한동안 마력석을 관찰하던 나는 이내 웃으며 그것을 마력석 전용 아공간에 넣었다. 그런 후 다음 마정석을 채굴하기 위해 몇 걸음 옆으로 이동했다. 또다시 적당히 자리 잡고 마력석을 채굴하려는데 뒤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꺅! 성진아, 이것 봐. 나 성공했어!”
“나도 성공했어. 좀 떨어져서 해.”
“뭐니. 질투하니?”
“아니거든?”
아, 시끄러. 아까부터 기분 이상하게.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듣다 보니 든 생각인데, 혹시 홍미림도 이성진을 좋아하는 걸까? 그럴 수도 있다. 진짜 저 얼굴은 범죄야, 범죄.
나는 다시 마력석에 집중했다. 방금 캐낸 마력석의 높이는 어림잡아 5cm쯤이었다. 이번엔 좀 더 큰 걸 노려 볼 생각이다. 작은 건 채굴하면 안 된다고 하니 큰 걸 노려야지. 곧 나는 적당한 걸 발견하고는 또 한 번 삽을 켜고 흙에 넣고 마력석을 빼냈다. 이번 것은 7cm쯤 되어 보였다. 어디 어디, 내 취향에 맞는 마력을 지닌 마력석은 없나? 슬슬 신이 났다.
그것을 반복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어느새 조원들과 좀 떨어진 어두운 곳에 와 있었다. 이런, 한수가 신신당부했는데.
머리를 긁적이며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려는데 앞에서 사람의 기척이 다가왔다. 모습보다 먼저 마력 색이 보였다. 어라.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얘가 왜 이성진이랑 같이 있지 않고 여기 있대.
그런데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어쩐지 눈빛이 곱지 않더랬지. 나는 어떻게 반응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같은 조원인데 무시하고 가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저기.”
내가 걸음 속도를 천천히 줄이자 그녀가 표독스레 말을 걸어왔다. 빛 구슬 사이로 마스카라를 진하게 칠한 속눈썹이 살짝 빛났다.
“너 성진이나, 아님 걔, 한수랑 사귀어?”
하아, 난 이런 거 진짜 싫은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속으로 거듭해서 고민했다.
“……아니. 한수랑 사귀는 건 내 절친이야. 그리고 성진이는,”
“너! 네가 뭔데 성진이 이름을 함부로 불러?”
“……응. 이성진은, 소영이 알지? 소영이랑 친해졌거든.”
“그럼 성진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응. 굳이 사이를 만든다면 친구의 친구 정도?”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닐까. 나는 당황스러운 심정을 삼키면서도 무표정을 유지했다. 스승님이 시켰던 성우 훈련이 또 한 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전혀 납득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거짓말!”
나는 모아 쥔 손에 살짝 힘을 줬다.
“성진이는 말이지, 원래 그렇게 딴 사람을 신경 쓰는 애가 아니야! 다른 사람한테 일부러 말을 걸고, 넘어지는 걸 붙잡아 주고, 말을 무시하지도 않고!”
“……그럼 평소엔 안 그래?”
“그래! 넘어지면 무시하고 말을 걸면 무시하고!”
“…….”
뭐야, 그거. 최악……까진 아니더라도 진짜 엄청 재수 없는 놈이잖아. 여자든 남자든 눈앞에서 넘어지면 그래도 신경 쓰이는 게 보통 아닌가?
“어, 주위에 아무도 없어도 안 잡아 줘?”
“절대!”
와, 뭐 이런 재수 없는 놈이 다 있담. 나도 사람이 넘어졌을 때 바로 달려가서 붙잡아 주는 것은 조금 망설여질 것 같다. 상대가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고, 주위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나라면, 그럼 당연히 도울 것이다. 일으켜 세우는 게 아니라도 떨어진 물건을 주워서 돌려주는 정도는 하겠지.
전부터 생각했지만 이성진 걘 뭔가 많이 결여된 것 같다. 음, 물론 세상 사는 사람 대부분이 그런 거 한두 개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만, 그래도 뭐랄까, 상식적으로, 아니, 인도적으로…….
뭐라 말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어, 저기……걔가 많이 나빴네.”
“서, 성진이 욕하지 마!”
“힘내…?”
“무슨 소리야, 그건!”
그럼 뭐라고 말해야 하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이성진과 나는 정말로 아무 사이도 아냐. 응, 절대. 전혀, 조금도 친하지 않아.”
그제야 그녀가 정상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말……?”
“응. 걔도 소영이가 하도 잔소리하니까 말을 좀 들어 주는 것뿐이야.”
“……하긴, 소영이랑 성진이는 친하니까.”
그녀가 까득 이를 갈았다.
“하여간 소영이 그 계집애 여우 같아서는…….”
나는 그 말에 울컥했다. 사람과 싸우는 일은 되도록 피하고 싶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친구 욕을 들었는데 화내지 않고 배겨?
“저기, 나 소영이랑 친하거든. 그 말은 좀 그렇지 않아?”
하아? 그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재수 없는 걸 재수 없다 하지 그럼 뭐라 해?”
“내가 보기에 소영이 착한 애야. 걔 어디가 여우 같다고 그래?”
“걘 항상 그랬어.”
그녀가 아득 이를 갈았다.
“내가 성진이 좋다고 하는데도 매번 성진이한테 들러붙어 있었다고! 매일 꼬리나 치고. 성진이는 그런 애한테 웃어 주고. 정말 짜증 나.”
“꼬리를 치다니……그건 소영이랑 걔가 친구라서 그런 거잖아! 어릴 때부터 친했다는 건, 같은 학교였던 네가 제일 잘 알지 않아?”
“아……그렇지. 고아들끼리.”
나는 그녀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하는 말에 모은 손을 꽉 쥐었다. ……아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사실, 예상하고 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기숙사에서 지냈다고 들었다. 어릴 때부터 기숙사에서 지내서 친해졌다 들었다. 지금도 학교를 나왔는데 유란이 밖에 따로 거처를 마련해 주고, 심지어 셋이서 함께 살고 있다. 어떻게 짐작하지 못하겠나.
“고아 주제에, 재능이 좋아서 팔자 폈지. 이소영 걔는 정말 옛날부터 그랬어. 착한 척은 다 하고, 불쌍한 척은 다 하고, 누가 고아 아니랄까 봐 항상 잘난 애한테 붙어서…….”
“─시끄러! 닥쳐!”
근데 이건 아니지! 속에서 열이 올랐다. 이성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설명하기는 벅차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나는 사나운 얼굴로 여자애를 쏘아보았다. 날카롭게 쏘아진 적의에 그녀가 순간 당황했다. 화가 나자 눈가에 열이 쏠렸다.
“소, 소영이한테 무슨 말을……. 성격만 보면 네가 더 재수 없거든! 여우 같은 건 너잖아! 아까부터 이성진이랑, 한수한테까지 꼬리 치고!”
“뭐, 뭐? 꼬리? 너 말 다 했어?”
“그럼 아냐? 아니면 뭐가 어떻게 아닌지 설명해 보든가!”
“난 성진이 여친이거든?”
“전 여친이겠지! 너 진짜 싸가지 없다! 왜 남의 사정을 그렇게, 그냥, 막, 아무렇지 않게 말해?”
나는 씩씩대며 소리쳤다. 내가 진짜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렇게 막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설마 이성진과 막말을 나누며 내공을 쌓았던 나날을 다행스럽게 여길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이성진만 좋아하면 꼬리 친다고는 안 하겠다! 뭐, 얼굴만 보고 밝히는데 그럼 네가 더 여우지! 그리고 눈앞에서 재수 없다 하는데, 사실 이성진이 더 재수 없거든! 누가 봐도 걔가 재수 없거든! 그런 놈이랑 친구 하는 소영이가 성녀지! 성모 마리아다!”
“뭐, 뭐…! 너 남의 남친을 재수 없다고…!”
“네가 먼저 남의 친구 욕했잖아!”
“야!”
그러자 강수정도 열이 뻗쳐 소리를 높였다. 아주 머리끄댕이 잡고 싸울 태세였다. 그래, 해 보자 이거야. 이런 건 성가시고, 짜증 나고, 귀찮고, 전혀 나답지 않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친구를 욕하는데 그냥 두고 보기는 싫다.
“야, 누굴 보고 재수 없대?”
그때 기척도 없이 나타난 누군가가 내 머리를 툭 쳤다. 아야! 고개를 돌려 보니 이성진이었다. 뒤에서 달려오던 한수가 그 장면을 보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
“너 지금 누구 머릴 때려?”
“얘가 먼저 나 재수 없다 했거든?”
“네가 욕 처먹을 만한 짓 했잖아.”
“허…….”
그 뒤로 홍미림도 달려왔다. 아니, 인솔자 언니도 왔다.
“거기! 설마 싸우고 있니?”
“아니요! 죄송합니다! 하다 보니까 말이 좀 격해진 것뿐이에요! 싸우는 거 아녜요!”
“정말,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해!”
이성진이 씩씩대는 내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사이 홍미림이 뒤를 돌아보며 변명했다. 인솔자 언니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멀어졌다. 나는 이성진의 손을 퉁명스럽게 뿌리쳤다.
“됐어. 가라앉았어. 이제 소리치면서 안 싸워.”
“성진아~! 쟤가 아까 막……!”
“야.”
나는 어이없어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까 내가 화내는 걸 봤을 텐데. 쟨 지금 위로받을 상대를 잘못 골랐다. 내 말을 들었으니 자기 말도 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왜 못 하는 걸까?
“너 지금 내 앞에서 누굴 욕해?”
강수정이 이성진한테 달려가려다 말고 흠칫해서 몸을 굳혔다. 그녀가 몸을 움츠리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검정색 바탕으로 꾸며진 네일 아트가 괜히 눈에 띄었다.
“어? 그, 그게…….”
“소영이와 인성이가 나랑 친해진 후부터, 욕한 놈들 내가 다 어떻게 했는지 알고 있냐? 대련을 빌미로 아주 두고두고 밟아 줬던 것 같은데.”
나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한수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쟤 좀 사이코기 있는 듯.”
“…….”
한수가 무언으로 긍정했다. 나도 다시 표정을 굳히고 두 사람을 돌아봤다. 이성진이 차가운 눈으로 멱살을 잡고 그녀를 들어 올렸다. ……뭐?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당황해서 이성진에게 달려갔다. 홍미림도 마찬가지로 당황해서 이성진을 말렸다.
“야, 이…! 뭐 하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폭력은 아니지!”
“그만둬! 너 지금 흥분했어!”
이성진이 나를 차갑고 무기질적인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눈 안으로 차갑고 압도적인 분노가 휘몰아쳤다. 그의 몸 주위로 차갑고 따갑고 묵중한 마력이 주위를 압도하려는 것처럼 들끓었다. 반사적으로 몸이 덜덜 떨렸지만 팔을 쥔 손에서 결코 힘을 풀지 않았다.
‘근데 얜 뭐 이리 힘이 세…….’
사람 몸을 한 손으로 간단히 들어 올리다니. 심지어 마력까지 사용해 안간힘을 다하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보다 약간 늦게 달려온 한수가 불쾌한 표정으로 이성진의 팔을 잡았다.
“야, 기분 나쁜 건 알겠지만 이건 아니지. 기분은 이해하지만 말이야……우리는 참았다. 못 참겠다 싶을 땐 대련을 신청했고.”
뭘 해도 미동조차 하지 않던 이성진이 이내 그녀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진짜 세게 내팽개쳤다. 나는 기겁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긴커녕 땅에 처박혀 신음 소리만 냈다.
“윽, 흐읍……!”
“미친!”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성진을 잡고 있던 팔을 놓고 그녀 곁으로 달려갔다. 옷 찢어진 거 아냐? 뼈가 부러지진 않았지? 멍은 틀림없이 생기겠고.
당황하며 강수정의 몸을 부축했다. 일단 옷이 찢기진 않았다. 뼈가 부러질 정도는 아니려나? 이 정도면 내 부족한 치유마법으로도 치료할 수 있을 것 같다. 치유마법과는 무진장 상성이 안 맞는 편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마도…….
이어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물론 그녀는 소영이를 욕했다. 하지만 이건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잖아…….
“많이 아프니? 괜찮아?”
“─경고해 두는데.”
이성진은 당황하는 우리를 신경도 쓰지 않고 제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어느새 그의 마력이 주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온몸이 짓눌리는 것 같은 감각에 숨을 삼켰다. 그것은 목을 옥죄고, 숨을 옥죄고, 피부를 찔렀다.
“다시는 내 가까이에 다가오지 말고, 그 녀석 이름도 부르지 마.”
나는 순간 그 기운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건 살기……살기였다! 미친 거 아냐? 무슨 애가, 고작 중학교 1학년이, 살기를…….
이성진은 그 말만 하고 돌아섰다. 자기 때문에 겁에 질려 벌벌 떠는 그녀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며. 나는 벌떡 일어서 소리쳤다.
“윽, 너…….”
“야! 너 그러지 마!”
전생이라면 이런 분위기에서 절대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틀림없다. 분명 성가신 일에 얽히기 싫어서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피했겠지.
하지만 이제 나에게는 힘이 생겼다. 힘이 생긴 이상, 이런 상황에서 그저 입을 다물고 싶지는 않았다. 서툴러도……그렇다 해도…….
“친구를 욕해서 화난 건 알겠어! 나도 화났고, 소꿉친구인 너는 더하겠지! 근데, 근데……그렇다고 이렇게 하는 건 좋지 않아.”
“은하야…….”
홍미림이 나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이성진에게 밀쳐진 강수정은 아직도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떨고 있다. 방금 느낀 살기 때문이다. 그 살기는 내가 그 녀석의 팔을 잡았을 때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처음 느낀 감각이라 바로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건 처음 살기가 시작된 순간부터 계속 그녀의 정신을 좀먹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지금껏 저 녀석에 대해 착각하고 있었다. 저 녀석은 진짜 미친놈이었다. 새파랗게 어린 주제에, 똑같이 새파랗게 어린 친구한테, 심지어 자기보다 약한 애한테 힘으로 겁을 주다니! 그렇게, 그런 식으로…….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라고?”
눈동자에서 보랏빛 안광이 번뜩이는 듯했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할 뻔했으나, 멈췄다. 나는 똑바로 그 눈을 마주 보았다. ……괜찮다. 그래, 한수가 곁에 있다.
절대 친구들 앞에서 비겁한 사람만큼은 되고 싶지 않다. 나에겐 여전히 보호해 주어야 할 어린 친구들이니까.
“물론, 이게 굉장히 해결하기 힘든 일인 건 알아. 응, 힘든 일이야. 사람 생각은 제각각인걸. 사랑받고 싶으면 질투도 하는걸. 근데, 근데……그렇다고 겁주고, 폭력으로 해결하는 건…….”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건! 소영이도 고립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욕 안 듣는다고 상처 안 입는 거 아냐. 자기를 보고 겁먹고 피하면 그것도 엄청 무서워! 남이 나를 다른 사람을 보는 거랑 전혀 다른 눈으로 볼 때마다, 굉장히 상처받아. 그건 당연한 거야.”
“…….”
“소영이한테 네 곁에 있으면서 질투를 많이 받아 왔다고 들었어. 하지만 힘으로 날려 버렸다고 했어. 그건 적어도 네가 한 방법과는 다를 거야. 힘으로 눌렀다고 해도 너같이 겁을 주는 방법은 아니었을 거야. 그건 소영이 일이야. 그렇다면, 그 애다운 방식으로 하는 게 제일 좋아.”
긴장으로 손이 벌벌 떨렸다. 나는 한 호흡 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머릿속에 생각나는 것을 계속해서 말로 표현했다.
“말로 상처 입었으면 말로 돌려줘야 하는 거야. 자업자득이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해도 이건 전혀 다르잖아. 눈앞에서 대놓고 욕을 하면 차라리 똑같이 욕으로 돌려주라고.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아, 그러니까…….”
머릿속이 점점 꼬여 갔다. 그 모든 것을 한마디로 풀어낼 수 있는 말은, 없다. 그래, 없을 것이다.
“난 소영이를 좋아해. 친구들도 마찬가지야. 너희도 그럴 거야. 근데 모두가 그렇진 않다는 거지.”
“…….”
“그런데 그건, 당연한 거야. 누구나 그런 거야. 누구나 겪는 거야. 근데 그걸 폭력으로 돌려줘서, 소영이답지 않은 이미지를 덮어씌우는 건.”
나는 주먹을 위로 들어 올리며 꽉 쥐었다.
“그건, 괜한 구정물만 덮어씌우는 거야. 나쁘게 말하면 그렇다는 거야. 소영이는 네가 아니니까.”
말을 마치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정리되지 않은 말을 마구잡이로 내뱉었을 뿐이다. 괜한 짓을 한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괜히 다급하게 돌아섰다.
“하여간 욕하면서 치고받고 싸울지언정 남 보기에 심한 짓은 하지 말라고. …저기, 괜찮아? 일어나. 이제 쟤 곁에 안 가면 돼. 남자는 얼굴이 아니라 성격도 봐야 돼. 그렇다고 한수는 안 되고……읏차.”
나는 굳어 있는 강수정의 옆으로 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강수정의 옆에서 굳어 있던 홍미림이 내가 강수정을 업는 걸 도왔다.
“아, 고마워.”
“원래는 내가 챙겨야 하는걸. 그런데 지금 몸에 힘이 잘 안 들어가서…….”
이성진의 살기 때문이다. 하여간 저 녀석은 진짜…….
“……저 녀석한테 시원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
“아니…….”
괜히 부끄러워졌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보다 키가 커서 부담스러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무겁지 않다. 강수정을 업은 채 천천히 한수를 향해 걸어갔다.
“한수야, 가자.”
“…….”
한수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씩 웃었다.
“어, 그래.”
나는 뒤에서 따라오는 홍미림의 눈치를 보며 한수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 지금 엄청 횡설수설했지. 으……이거 나중에 틀림없이 흑역사가 될 거야. 진짜 미치겠다.”
“뭐가? 엄청 멋있었는데? 역시 나랑 인하가 반한 이유가 있다니까.”
“네 단어 선택 무지 오해당하기 쉽다는 건 아니……. 여친도 있는 놈이 말이야. 그런 건 인하한테 말해야지. 문제는 인하도 그런다는 거지만…….”
“이런 사용법을 알려 준 건 너다.”
“아, 그런가…….”
점점 커진 귓속말이 들렸는지 홍미림이 킥킥 웃었다.
“너희 정말 사이좋구나?”
“응? 응…….”
나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일단 얘가 진정될 때까지는 인솔자 언니를 피해서 어디 괜찮은 데 숨어 있어야겠다. 실습 도중에 싸웠다는 게 알려지면 일이 복잡해진다. 학교에 알리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만……그건 정신을 차리고 난 후 강수정이랑 홍미림이 선택할 일이다.
“한수야. 이따가 얘 좀 치료해 줘. 나보단 네가 치유마법을 더 잘 쓰잖아.”
“그러지 뭐. 아, 혹시 넌 치유마법 잘 못 쓰냐?”
“미안. 나도 치유마법은 잘 못 써. 부탁 좀 할게.”
“그래?”
우리는 대화를 나누며 걸어갔다. 나는 그녀가 약간 불쌍하게 느껴졌다. 논다는 말을 했어도 나름 이성진을 좋아했는데. 친구를 욕한 건 용서할 수 없지만…….
그때 등 뒤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분함을 참는 듯한 떨림도 느껴졌다.
“흑……흑…….”
나와 한수는 울음소리를 모른 척하고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홍미림이 강수정의 등을 위로하듯 몇 번 두드렸다.
그 이후, 당연하지만 분위기가 매우 우중충해졌다. 자신만만했던 강수정은 기가 팍 죽었다. 이성진을 볼 때마다 겁에 질려 창백해지는데 안쓰러워 못 살겠다. 같은 학교에 미운 정이 많이 쌓였다며 홍미림이 그녀를 많이 도와줬다. 어쩌면 저건 그때 이성진의 마력을 느끼고 독이 오른 걸지도 모르겠다. 마법사가 기세 싸움에서 졌을 때 그런 경우가 제법 있다고 들었다.
그럼 정화마법이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홍미림과 같이 그녀를 조금 챙기는 김에 마력을 좀 불어넣어 줬다. 효과가 있었는지 다행히 상태가 좀 괜찮아진 것 같았다.
“하아, 솔직히 맘에 드는 애는 아니지만……그래도 역시 걱정되네. 강수정 쟤 괜찮을까?”
“강수정…? 야, 쟤 이름은 강수진인데…….”
“헉…!”
……내가 지금까지 이름을 착각하고 있었구나. 이런 실수를. 한수가 나를 향해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그 사건 때문에 분위기가 우울해진 건 사실이었지만, 이건 실습이기 이전에 ‘일’이다. 겁을 먹은 강수……진에 의해, 아니지, 겁을 준 이성진 때문에 중간중간 지장이 생기기는 했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일에 집중했다.
하룻밤을 보낸 후에도 강수진의 태도는 겁먹은 그대로였다. 우리는 중간중간 강수…진을 위로하며 마력석 채굴을 계속했다. 그래도 강수진이 계속 말이 없고 기운이 없자 홍미림은 이번엔 방법을 바꿔 그녀를 타박했다.
“전투 마법사 지망생 주제에 대체 지금 뭐 하는 거야? 살기 한 번 맞았다고 겁먹으면 어떻게 해? 쟤보다 무서운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다음엔 밀쳐 낸다고 밀쳐지지 말아야지.’ ‘또 이런 상황이 왔을 땐 어떻게 반격하면 좋을까.’ 그런 고민이나 해. 그것도 못 하면 싸우는 거 그만둬야 하지 않겠어?”
“윽…….”
그런데 강수진의 침울했던 분위기가 홍미림의 그 말 한마디에 되살아났다. ……헐?
“대련하면서 그것보다 다친 적도 많잖아. 쟤 기세가 웬만큼 무서운 게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앞으로 더 무서운 마법사를 얼마든지 만나게 될 거라고. 그때마다 그렇게 겁먹고 있을 거야?”
“나, 난 무서운 게 아냐. 이건 실연 때문에 가슴이 아픈 거야.”
와……. 전투 마법사, 진짜 강하다. 사랑에 눈먼 그녀였지만 전투 마법사로서의 자부심은 그 이상이었던 모양이다. 그 이후로는 조금 분위기가 괜찮아졌다.
동시에 전투 마법사라면 왜 이 실습에 지원했는지 좀 의아해졌지만, 그걸 구태여 물어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