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48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하여간 제현 오빠도 참, 걱정이 많다니까.
어쩔 수 없이 웃으며 기숙사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시야에 검은 모습이 스쳤다. 고개를 돌려 보니 신사 유령이 내 귓가에 후후 바람을 불고 있었다. 아무래도 유령인지라 바람 같은 건 전혀 일지 않았지만.
“……깜짝이야.”
나는 한 발짝 늦게 반응했다. 신사 유령은 오늘 아침이나 며칠 전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하긴, 주위의 모든 것이 선명한 선을 그리고 지워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이 상황에선 별로 특별할 것도 없나. 이 어지러운 광경에 나도 용케 적응하고 있다. 아니, 근데 그냥 적응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제어를 해야 하는데.
「이야, 자네 엄청난 사람들이랑 아는구먼. 덕분에 오전 시간엔 전혀 접근을 못 했다고. 아하하, 이 경우 닮은 사람들끼리 친하다고 해야 하려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보다 저번에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부탁할 게 있어서 자네에게 접근했다네. 그런데 이렇게 타이밍이 안 맞을 줄은 차마 몰랐지. 빨리빨리 부탁할 걸 그랬어. 실은 자네가 나를 대신해서 해 줬으면 하는 일이 하나 있거든. 그렇게 하면 이제 귀찮게 하지 않겠네.」
“무엇을 원하는데요?”
「대필을 좀 해 주게나. 친우가 있는데, 그 친우가 요즘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편지라도 보내서 격려하고 싶거든. 근데 나는 보내지 못하니까.」
용건을 듣고 나는 잠시 고민했다. 대필 정도는 별거 아니다. 하지만 나는 요즘 시간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음, 그럼……제 특수능력 훈련에 조금 동참해 주신다면……. 그리고 눈을 제어할 때까지 유령분들이 너무 달라붙는 건 좀 그래서 당분간 결계 역할을 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자 신사 씨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훈련은 그렇다 치고, 쫓는 건 자네가 조금만 힘을 내비쳐도 웬만한 잡놈들은 도망갈 텐데…….」
“저는 전혀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겁을 줘서 쫓아내는 건 좀 미안하기도 하고……. 아, 근데 오늘 저랑 부딪친 귀신이 왠지 아파하더라고요. 이거 말씀하신 거랑 관계가 있나요?”
「글쎄. 정확히는 모르겠네. 아마 자네의 몸이 저절로 긴장한 게 아닐까 싶군. 말했잖나. 자네는 성스럽다고.」
역시 전혀 모르겠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대필 정도는 괜찮아요. 그런데 기숙사에는 못 찾아오시죠?”
「그래. 학교 도서관으로 가야겠군. 늦은 시간이라 미안하구먼.」
“어차피 학교에서 지내니까 괜찮아요.”
제현 오빠한테 조금 미안해졌다. 우리는 지는 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만일을 위해 사람이 잘 오지 않는 비밀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 가는 동안 신사 씨는 수다스럽게 말을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한 아이일세. 유령을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으니.」
“음, 그치만 유령은 예전엔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는 인상이 강해서요. 안 보일 땐 무섭지만 막상 보이니까 엄청 무섭지는 않고, 그냥 좀 끔찍하다고나 할까…….”
「끔찍한 모습일수록 살아 있을 적의 미련이나 죽었을 당시의 미련이 강하다네. 아, 이거 저번에도 말했던가? 하여간 추억에 미련이 강한 자는 모습도 선명하더라고.」
말이라기보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자네가 그자와 친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네. 그자와 자네는 느낌이 너무 달라서 말일세. 실제로 1학년 때는 싸웠다 들었고, 절대 조화되지 못하리라 생각했지.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지 못해 보지 못하는 사이 친해졌구만.」
“이성진 말인가요?”
「그는 무서운 자일세. 결코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무섭고, 어둡고……끔찍할 만큼 안락하지.」
그는 왠지 몰라도 이성진을 매우 두려워했다. 그럼 유령들이 못 다가가는 사람은 이성진, 그리고 제현 오빠인가. 무슨 일이 있을 때는 두 사람 곁으로 대피해야겠다. 하지만 딱히 유령들이 말하는 무서움이나 두려움, 경이는 마력이 크기와 상관없나 보다. 아무래도 유령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두려움의 명사는 이성진 쪽인 것 같으니까.
“……근데 저랑 걔가 싸운 거, 유령들한테도 알려졌어요?”
「자네는 아니었지만, 그자는 유명해. 매우 두려운 상대일세.」
그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이 학교 안에 있는 유령 중 한 명 조심해야 하는 유령이 있네. 상당한 원한을 가진 여자라서 말이야, 자네가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걸 듣거나 알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네. 그녀를 만나면 상대하지 말고 그냥 그 두려운 자에게 도움을 청하게.」
“그녀?”
나는 무슨 말인가 싶어 그를 돌아보았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약간 겁을 먹었다.
“역시 소설이나 만화에서 나오는 귀신처럼 원한을 못 이기고 사람을 습격하는 유령이 있나요?”
「있지, 있어. 그래도 강한 마법사들한테는 통하지 않지만, 자네는 아직 어리니까.」
“음……그 여자분이 어떤 사람인데요? 아니, 귀신인데요?”
「간단히 설명하면 미친놈이지. 애인한테 안 좋게 버림받은 후 얼마 안 돼서 죽었는데, 애인을 본 순간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악령으로 변했어. 아가씨는 아마 모르겠지만, 유령은 말이야……타인의 감정이나 본인의 감정에 쉽게 휩쓸리고 말아. 미련이 있어 유령이 되는 만큼, 부정적인 감정일수록 크게 영향을 받지. 한번 악의에 휩쓸리면 돌아오기 쉽지 않아. 불쌍하다면 불쌍한 여자지. 결국 애인을 저주해 죽였으니 피장파장이지만.」
끔찍한 이야기였다.
「그러고도 원한에서 벗어나지 못해 아직도 미쳐서 악의를 퍼트리고 있어. 검은 연기를 풀풀 휘날리면서 아주 유령의 악명을 높이고 있지. 이 학교에 유명한 심령 명소라 불리는 데가 하나 있거든? 자넨 가지 말게. 그 여자 거기에서 다른 유령들까지 끌어들여서 제 영역을 만들고 있거든.」
“음……그럴게요.”
죽여? 저주로? 진짜일까? 그런 장소라면 학교에서 철거했을 것 같은데. 나는 오싹 소름이 돋는 느낌에 신사 씨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런 곳이라면 왜 철거하지 않는 거죠?”
「그녀가 거기에 터를 잡은 건 그 남자를 저주로 죽인 후니까.」
나는 침을 삼켰다.
“그럼 진짜 엄청 위험한 거잖아요…….”
「뭐……하여간 다가가지만 않으면 돼. 그 여자도 웬만해선 사람을 죽일 정도로 저주하지 않아. 그 명소에서 사람이 죽은 적도 없고, 웬만해선 침입자를 약간 골려 주고 끝내는 편이지만, 아가씨는 보이잖아.」
나는 딱딱하게 굳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도서관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필요한 물건을 꺼내 들었다. 펜이 가득 들어 있는 필통과 몇 개나 있는 편지지 세트를 꺼냈다. 예전에 예뻐서 사 뒀던 건데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편지지 세트 몇 개를 신사 씨를 향해 펼쳐 보이며 물었다.
“어느 게 좋으세요?”
「다 너무 귀여운데? 내 취향이 아닌데…….」
“일반 편지지 세트는 없어서……지금 사 올까요?”
「됐네. 그 녀석도 귀여운 거 좋아하니까 됐지 뭐. 사내놈이 사내놈한테 보내는 것치곤 너무 깜찍하지만…….」
그런가. 나중에 다른 편지지 세트를 찾아봐야겠다.
“그럼 하나 시험 삼아 써 볼까요? 처음엔 어떻게 쓸까요?”
나는 편지지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그의 생각이 한순간 텅 비었다. 잠시의 침묵 후 목소리가 겹치며 여러 방향에서 밀려왔다.
「일단 인사부터 하는 게 좋겠지?」
「안녕, 오랜만일세?」
「죽은 지 몇 년이더라.」
「잘 해 먹고 있냐, 이놈. 아니, 잘 해 먹고 있는 거 알긴 한데.」
「세월이 많이 흘렀구먼…….」
생각이 두서없이 섞였다.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는 것이 뻔히 보였다.
“음, 인사말부터 골라야겠네요.”
정리되지 않은 대필은 힘들다. 심지어 직접 말을 듣고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저렇게 생각이 여러 개 섞이면 뭐부터 써야 할지 감을 잡기 어렵다.
신사 씨는 한동안 궁리한 끝에 몇 단어를 짜냈다.
『오랜만일세. 건강한가?
내가 죽은 지 이미 20년은 넘었구먼.』
몇 문장을 채 말하지 못하고 그는 혀를 찼다.
「에잉, 막상 편지를 쓰려고 하니 힘들군. 그런데 자네 필체가 별로구먼.」
“넵…….”
나도 내 글씨체가 별로인 건 안다. 소설가라고 글자를 예쁘게 쓰는 건 아니다. 나는 그의 고뇌 사이에서 곤란해하다가 의견을 냈다.
“그럼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적어 뒀다가 나중에 하나로 모아 정리해 보는 건 어떨까요?”
「그렇군, 그게 좋겠어. 일단 그렇게 할까.」
우리는 한동안 고민을 거듭했다.
며칠간 훈련을 하면서도 짬을 내어 계속 편지 대필을 했다. 필체가 별로라는 말에 나는 한동안 고민하다가 유령이 만질 수 있는 펜을 만들어 직접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래도 편지를 쓸 때는 항상 함께 고민하며 썼다. 편지는 하루에 몇 줄씩 채워졌다.
그와 만나는 동안 유령의 행동에 많이 익숙해졌다. 끔찍한 모습을 지닌 유령이 다가오면 약속대로 신사 씨가 멀리 떨어뜨려 주었다. 처음 나한테 장난을 친 유령이 매우 아픈 맛을 본 후로 나를 직접 건드리려고 하는 유령은 없었다. 다만 유령들은 호기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주 내 곁에 머물렀다.
가끔 이상한 유령을 만나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다들 착했고 위험한 일도 없었다. 아니, 그런 놈들은 신사 씨가 쫓아내 주고 있는 거겠지.
눈의 능력은 한순간 심해졌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완전히 제어되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듯했지만 어찌 되었건 일상생활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잘게 흔들리는 영상을 계속 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지라 계속 있다 보면 눈이 피로해지지만, 그럴 때는 이성진이 귀신같이 눈치채고 도와줬다. 그래서 다행히 전처럼 정신이 크게 피폐해지는 일은 없었다.
다만 아무래도 이 어지러운 세계에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이성진밖에 없었기 때문에 피로가 조금씩 누적되고 있다.
사실 지금 나를 피곤하게 하는 것은 유령이나 영혼보다는 오히려 마력이다. 유령이나 영혼을 안 볼 수 있는 장소는 몇 곳 있었지만 마력은 그런 장소가 없었다. 마력은 어디에나 있다. 여신님의 아공간에라도 틀어박히고 싶지만, 그 아공간에도 마력은 떠다니고 있다.
[힘들면 바로 연락해라. 학교를 쉴 수 있도록 잘 말해 주마. 그리고 유령 관련 소문 중에선 좋은 이야기가 별로 없으니까, 이상한 놈 만나지 않도록 조심하고.]“저한테 지금 문제인 건 유령이 아니라 눈 자체예요. 온갖 세상이 일그러져 보인다고요. 성진이 걔가 가끔씩 눈을 닫아 줘서 조금이나마 휴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게 된다고요. 마력이 눈꺼풀 안에 비쳐 보여서.”
[이런……이번만큼은 정말 네가 어떻게든 하길 기다릴 수밖에 없구나. 명상은 계속 하고 있지?]“네. 근데 이 능력에 각성한 다음부터 마력이 엄청 강해진 것 같아서 불안해요. 능력이 불안정할 때는 팍 성장하는 건 별로 안 좋지 않을까요?”
[그건 두고 봐야 안다. 그런데 새로 사귄 이성진이라는 친구, 제대로 된 놈이겠지? 특수능력 같은 예민한 일로 너를 맡겨야 한다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나는 곧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그렇다고 제대로 된 놈이란 건 아니지만요. 나는 말을 삼키며 스승님과 좀 더 통화를 이어 갔다. 전화를 끊은 후,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하늘이 지금은 흔들려 보인다. 마력이 겹겹이 겹치고 색이 겹겹이 겹쳐서, 윽, 눈 아프다…….
나는 시야를 제어하려고 노력했다. 며칠 전보다는 훨씬 가라앉았지만 그래도 주기적으로 시야가 흔들린다. 하지만 상태를 보아 하니, 앞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제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찡그린 채 가늘게 뜬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한쪽 눈을 감았다.
“따끔거리네…….”
“아프면 말하라니까.”
내가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언제 나타났는지 이성진이 내 눈을 가려 준다. 하, 제대로 된 놈이 아닌 걸 아는데, 그런데도 이 손에 익숙해졌다. 온도는 차갑지만 왠지 다정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손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사양은 적당히 해라. 곁에 없을 땐 이런 부탁도 못 하잖아.”
“고마워.”
그래, 이상하다. 이 녀석의 곁에 있으면 이상하게 편안하다. 낯익고, 왠지 그립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건 즐겁다는 감정과는 사뭇 달랐다. 편안하면서, 살아 있는 걸 실감할 때처럼 가슴이 따뜻하다.
‘이 느낌, 어디서 많이…….’
나는 생각을 잇는 걸 그만두고 입술을 다물었다. 우리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에서는 반 친구들이 뭔가 단합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앗! 성진아, 은하야!”
자습 시간이라고 잠깐 밖에 나갔다 왔는데,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우리 내일 담력 시험을 하기로 했는데, 너희들도 괜찮지?”
뭐? 갑작스러운 제안에 나는 눈만 멀뚱히 깜빡거렸다. 반 친구들이 즐거운 얼굴로 떠들었다.
“은하야, 이런 일엔 빠지면 안 되지! 빠지면 후회할 거야!”
“응? 어?”
“저번에 선배한테 들은 건데, 우리 학교에 유명한 심령 명소가 있다는 거 있지! 뒤쪽 숲에, 이 층짜리 낡은 교사가 있거든? 거기에 나온다는 거야! 귀신이!”
“그래서 옆 반이랑 같이 담력 시험 하기로 했어! 괜찮지?”
심령……명소? 머릿속에 신사 씨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으음, 거기엔 미친년이 있다고 했는데…….
“상관없어.”
나는 간단히 받아들이는 이성진을 흘끗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 녀석에게 부탁하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응. 나도 괜찮아.”
“좋았어, 결정이다!”
와아아! 반 친구들이 선생님이 없는 틈을 타 담력 시험 계획을 세우고는 신난다고 박수를 쳤다. 다시 한번 머릿속에 신사 씨가 한 말이 떠올랐지만, 이내 그 생각을 지웠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어쩌겠어. 괜찮겠지. ─이성진이 같이 가니까.
‘응. 괜찮겠지.’
흘끔거리다가 눈이 마주쳤다. 이성진이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무엇을 생각했는지 피식 웃었다.
“무서워?”
“응……약간?”
그러자 이성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입을 열어 무언가 물어보려는 순간, 반장이 소리쳤다.
“그럼 내일 저녁 10시에 기숙사 앞에 있는 공원에서 집합이야! 도망치기 없기다!”
아이들이 다시 한번 환호를 지르며 즐거워했다. 담력 시험, 유령을 전혀 못 보던 예전에는 유령 짓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담담하게 넘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또 어떨지 모르겠다. 더 무서울까, 아니면 반대로 전혀 무섭지 않을까.
긴장감인지 기대감인지 모를 것으로 가슴이 조여들었다. 애초에 어둠을 제대로 어둠으로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눈 안에 비치는 마력 때문에 요즘은 세상이 온통 눈부시고 어지럽게 느껴진다. 그건 밤에도 예외가 없다.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 마법을 사용하여 잠에 드는 게 아닌가.
하지만 심령 명소라, 역시 신사 씨가 말한 그 미친 여자가 있으려나. 우리 학교에 심령 명소가 그리 많지도 않을 테니.
‘나중에 신사 씨한테 물어봐야지.’
나는 태평하게 생각하며 소란스러운 아이들 사이에서 다시 능력 제어에 집중했다.
담력 시험 당일 10시, 나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담력 시험을 치르러 갔다. 한밤중이었지만 시야는 밝았다. 마력과 영혼의 빛 때문이다.
「자네, 정말로 가려고? 그 미친년은 날뛰기 시작하면 분간을 못 하는데.」
“음……문자마법으로 야매 퇴마 아이템도 준비했고, 만일의 경우엔 이성진도 있으니까요.”
「으음, 그건 좀 무섭군…….」
대체 유령들은 왜 하나같이 이렇게 이성진을 무서워하는 것일까. 본능적으로 두렵고 끔찍하다고 하는데, 정확히 뭐가 무섭다는 건지 모르겠다. 다만 이 신사 유령이 말하기를, 이성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제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 같단다.
「하지만 자네, 그자를 믿는구나. 그것도 상당히.」
나는 그 말에 걸음을 옮기다 말고 멈칫했다. ……믿는다고? 이성진을, 내가?
“…….”
나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 말이 맞다. 나는 어느새 그를 당연한 것처럼 믿고 있었다. 위험할 때 부르면 구해 줄 것이라며 의지하고 있다. 참 이상하지. 그놈은 분명 누군가를 도울 성격이 아닌데.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믿을 수 있을 만큼 착하고 고운 성격을 가진 것도 아닌데.
나는 고민하다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음……뭐, 친구니까.”
친구니까. 그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졌다. 맞아. 친구……친구지? 언제부터 그는 나에게 친구가 되었을까.
「그런가. 하여간 진짜진짜 조심해서 갔다 오게나. 웬만한 유령들은 마법사를 못 이기지만, 그 여자 정도 원한을 쌓으면 콘크리트 정도는 가볍게 부술 수 있거든. 마법이 통하긴 하지만, 완벽하게 통하지도 않고, 모든 마법이 통하는 것도 아니야. 그래도 물리력은 방어마법을 펼치면 막을 수 있을 걸세. 자네는 아직 어리니 정말로 조심하게.」
“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런 말을 들으면서도 그 여자 유령을 마주치는 게 두렵지 않은 건, 이성진 이상으로 내 힘을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나는 결계가 유령에게 통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야매 퇴마 아이템을 만들어 낸 것처럼 문자마법 역시 귀신을 막는 데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무섭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들었다.
나는 결국 귀신도 마법과 비슷한 현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이토록 무섭지 않은 거겠지.
무서운 게 있다면 피를 흘리는 끔찍한 겉모습뿐이다. 목이 잘리거나, 머리가 함몰되거나, 가슴이 뻥 뚫려 있거나. 그것마저 신사 씨가 보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줬으니 정말 나는 안 좋은 심령 현상은 전혀 겪지 못한 셈이다. 그래, 역시 전혀 안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긴장되었다.
하지만 우리 학교에 붙어 있는 악령이라니 어떻게든 해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신사 유령에게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여자는 자신을 배신한 남자 혹은 그 남자와 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 조금이라도 닮은 점이 있는 사람을 보면 어딘가에 가두어 공포 체험을 겪게 한단다.
다만 다른 영화나 심령 소설과는 달리 그로 인해 죽은 사람은 없다. 대현에 드나드는 사람은 전부 재능 있는 학생이거나 실력 있는 마법사다. 크게 위험에 처하지 않고 빠져나오거나 구출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의 사람들은 ‘저 건물에 오래된 마법이 걸려 있다’고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마법을 풀려고 하고 있지만 마법이 아니니 풀 단서를 찾지 못하고, 지금도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래도 ‘저주’는 다르다는 모양이지만, 마법사를 죽일 정도의 저주는 악령이라도 아무에게나 걸 수 없다. 아무래도 죽었다는 그 남자는 상당히 원망을 샀던 모양이다.
이 세계 시점에서 보면 악령조차 민폐 투명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유령은 보통 마력을 못 쓴다. 마력은 육체에 쌓이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가 없는 유령은 대부분 마법을 쓸 수 없다. 이것 역시 가끔 예외가 있다고 한다.
또 염원이나 증오 같은 강한 감정에 의해 물리적이거나 초자연적인 힘을 쓸 수 있게 된다고는 하는데, 그건 마법과는 다른 이치라고 한다.
공원에 가까워지자 신사 씨를 포함해 내 주변에 있던 유령들의 기척이 전부 사라졌다. 나는 어두운 밤을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 보는 기분으로 선명하게 꿰뚫어 보며 친구들 사이에 섰다. 이번 담력 시험은 우리 반인 14반과 옆 반인 13반만 한다고 한다. 다른 반이나 선생님한테는 비밀이다. 때문에 오늘 내가 담력 시험에 참가한다는 사실은 친구들조차 모르고 있다.
심령 명소라는 건물은 평소 봉쇄되어 있지만 마법을 걸 수 없기 때문에 바리케이드를 쳐 둔 정도였다. 그래서 현재는 암암리에 일탈을 즐기는 학생들의 담력 시험 장소로 쓰이고 있다.
즉 1년에 한 번은 담력 시험 장소로 사용되는 셈이지만……정작 공포 체험을 하게 되는 사람은 소수라고 한다. 건물에 들어간다고 바로 그 여자한테 걸리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러니까 내가 겁 없이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지.
아마 조건이 있을 것이다. 신사 씨가 했던 말을 통해 유추해 보면, 아마 원한을 가지고 있는 자와 닮았을 경우에만 문제가 되는 것 같다. 그 외에 그녀의 신경을 거슬렀을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다들 모였지? 10시니까 이제 안 온 사람은 두고 가자. 그리고 없는 놈은 내일 철퇴다.”
늦은 밤이었기 때문에 모두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저 앞에 서 있는 이성진을 한 번 바라본 뒤 고개를 돌렸다. 학생들이 맨 앞에 서 있는 반장의 말에 작게 웃으며 긍정했다.
“좋아. 그럼 조용히 이동하자.”
우리는 기척을 죽이고 움직였다. 기대된다고 웃는 여자들, 겁먹지 말라고 웃는 남자들, 무섭다고 하는 사람, 걱정된다는 사람, 다 제각각이었다. 워프 홀을 거쳐서 이동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심령 명소에 도착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머지않아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건물처럼 보이는, 하지만 상당히 낡은 교사에 도착했다.
“제법 크네…?”
“예전에 예술과에서 성적이 뛰어난 선배들이랑 선생님 몇 분이 사용했대. 화랑이랑, 음악실이랑, 전시실도 있다고 들었어.”
“진짜 바리케이드만 쳐져 있네.”
“여기 정말로 마법을 못 써?”
“못 쓰는 게 아니라, 설치하지 못한대. 며칠 지나면 마법이 사라진다는 거야. 강한 걸 써서 유지해도 되지만 굉장히 위험한 곳인 것도 아니고, 암묵적으로 담력 시험 장소로 이용하도록 내버려 둔다고 하더라. 들어갔다가 교칙 어긴 벌로 심령 현상 같은 마법에 된통 당하라고.”
“뭐야, 그거. 결국 그냥 귀신의 집이잖아.”
“그래도 무서워서 재밌잖아.”
“맞아.”
대개는 신기해했지만, 현실적인 걱정도 들려왔다.
“어둡다……. 전기는 들어와?”
“아니. 고장 났대. 그래서 손전등이나 조명 구슬 가져오랬잖아.”
“안 가져온 사람은 라이트 쓰면 되지.”
학생들은 각기 웃거나 긴장감 넘치는 표정으로 옛 교사를 둘러보았다.
“그럼 지금부터 제비뽑기로 짝을 정하자. 투시는 금지인 거 알지?”
“너희 양심껏 뽑아라~.”
“그래. 특히 너.”
“뭐야?”
우리는 차례대로 제비를 뽑았다. 같은 숫자를 뽑은 두 사람이 짝이 되는 구조다. 우리 반 20명, 옆 반 36명까지 해서 총 56명이었다. 짝수이기 때문에 짝은 딱 맞는다. 참고로 장인반은 다른 반에 비해 인원수가 적은 편이다.
내가 뽑은 숫자는 15번, 짝이 된 건 옆 반 학생으로, 잘 모르는 남자였다.
“헉, 야, 미친! 나 은하 님이랑 짝 됐어!”
“헐.”
“이 운 좋은 자식.”
나는 떠드는 3인방을 보다가 무심코 흠칫했다. 같은 학년인데 ‘님’은 좀……. 아니, 그보다 저 세 사람은 분명 초등학교 때부터 같이 다니던 학생이 아니었다. 그럼 작년 중학교 입학식 때 새로 들어온 학생이라는 소리다. 근데 나한테 자연스럽게 ‘님’이라는 호칭을 붙이다니, 대체 ‘님’이라는 호칭이 언제부터 저렇게 퍼지기 시작한 걸까.
‘강예슬, 윤시하……너희들 진짜…….’
퍼트린 범인이 강예슬이랑 윤시하라는 데 내가 오늘 걸고 온 퇴마 목걸이를 건다, 아주.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 남자를 향해 의례적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그가 기뻐했다.
“저, 저도요! 우와, 은하 님이랑 짝이라니 엄청 든든한데요? 아니, 그래도 강한 거랑 귀신은 다르니까요. 은하 님은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저거 남자다운 척하는 거 봐라.”
“놀고 있네! 은하 님이 너보다 더 강하거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나는 어색한 기분으로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어, 근데……동급생이니까 존댓말을 쓸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그, 그런가요? 아는 애들이 다 존댓말을 써서…….”
“아니, 이상하잖아. 그냥 평범하게 말해 줘…….”
“으, 응! 그럼 은하라고 부를게!”
“응.”
우리는 바리케이드를 넘으며 교사 정문을 열었다. 끼익, 문이 조금도 저항 없이 열렸다.
나는 15번째 줄에 서서 건물을 바라보았다. 음산하고 스산하다. 어두운 영혼의 힘이 이 교사를 안개처럼 덮고 있다. 그 안개 때문에 힘의 중심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나는 능력을 조절해 영혼의 핵심만을 눈에 보이게 했다. 영혼에도 마력과 마찬가지로 핵심, 근원이 있다. 근원을 보며 유령의 숫자를 세던 나는 혀를 찼다. 유령을 끌어모아 영역을 만들었다고 하더니, 한두 명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영혼을 통해 그들의 감정을 약간 읽었다.
‘좀 으스스한 느낌인데. 이대로라면 귀신다운 귀신을 조우하게 될 것 같네.’
신사 씨는 나에게 몇 번이나 그 미친 여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학교 안에 있는 유령은 그녀를 피한다고 한다. 그럼 아마 그 여자를 포함해 저 건물 안에 있는 유령들은 아직 나에 대해 모를 것이다.
나는 최대한 유령이 보이지 않는 척하기로 했다. 눈의 힘을 최대한 가라앉혔다. 시야가 흔들리며 마력이나 영혼의 빛이 뿌예졌다. 유령이 최대한 안 보이도록, 보여도 흐릿한 그림자 정도로만 보이도록 제어에 힘써야겠다.
“그럼 코스를 설명할게! 정문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쭉 가면 계단이 있대. 계단을 통해서 2층으로 올라간 다음에 이번에는 왼쪽으로 쭉 걸어가. 왼쪽 끝에 있는 계단을 통해서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여기 정문으로 나오는 거야. 다만 갔다 왔다는 증거로, 2층 중앙 계단 옆에 화이트보드가 있거든? 거기다 번호를 쓰고 오는 거야. 뒤에 갔다 오는 애들이 확인할 수 있도록.”
“그리고 무조건 열려 있는 방 다섯 개 이상 들어갔다 오기야. 이건 양심에 맡기겠어.”
“좋아. 그러자.”
“응.”
학생들은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내 번호와 이성진의 번호를 가늠했다. 나는 15번, 그는 20번, 충분히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거리다.
앞줄이 가고 1분이 지나면 다음 줄이 출발한다. 어느 순간부터 들어갔던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15분 정도 후, 우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타박….
“으, 스산하다.”
그는 바짝 긴장하며 걸음을 옮겼다. 교사 안은 새까맸지만 달빛이 밝아 주위를 전혀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남자는 손전등을 켰다. 창문 너머로 안에 들어가기를 대기하고 있거나 이미 나와 다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눈앞으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암만 봐도 유령이었다.
“힉…! 바, 방금, 뭐 지나가지 않았어?”
나는 잠깐 놀랐다. 그에게도 보인 건가? 그러고 보니 신사 씨가 조건만 갖춰지면 평범한 사람에게도 보인다고 했지. 역시 심령 명소라 이건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
똑바로 앞을 보고 걸어갔다. 역시 별로 무섭지는 않았다. 그냥 조금 음침했다. 나는 그를 배려해 유령이 없는 교실을 하나 고르며 말했다.
“여기에 들어가 볼까?”
“그, 그러네. 교실을 다섯 곳 들르랬지…….”
나는 교실 문을 당겼다. 그러나 뒷문은 덜컥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
“여기는 잠긴 건가?”
다행히 다음 교실은 열렸다. 단, 그 교실에는 유령이 두 명 있었다. 교실 안에는 다양한 별 모형이 장식되어 있었다. 한 그림자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한 그림자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둘 다 우리가 뭘 하든 관심이 없는지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와. 예쁘네…….”
“응.”
우리의 말에 소녀인지 소년인지 모를 그림자가 미소 짓는 듯했다. 그가 만든 작품일까? 마력 패턴으로 보아 아마 이것들은 조명이다. 분위기 연출용 조명이겠지. 손을 가져가자 푸른 별에서 빛이 일었다. 굉장히 신기하고 예뻤다.
“어, 이거 조명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