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59
내가 친 결계마저도 일그러뜨릴 것 같은 격렬한 폭발이었다. 그러나 나는 긴장을 놓지 않고 폭풍을 노려보았다. 저놈의 마력만은 도무지 제대로 읽을 수 없으니 정말로 당했는지 아닌지 바로 확인할 수 없다.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앞을 노려보았다. 한 발짝,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찰박
‘찰박…?’
그게 물이 밟히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풍덩! 발목이 강한 힘으로 끌어당겨졌다. 나는 어느새 물웅덩이 속에 들어와 있었다.
‘아차!’
여태까지 겪었던 것과 패턴이 다르다. 물이 팽창한 것이 아니라 겨우 발에 밟히는 물웅덩이 속으로 끌어당겨졌다. 일렁거리는 물 사이에서 웃고 있는 이성진의 얼굴이 보였다.
“너 이미 한 번 죽었어. 넌 지금 내 영역에 들어와 있는 거다. 알겠냐?”
입을 열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이성진의 공격이 내 몸에 직격했다. 복부에 강렬한 고통이 일었다. 눈을 뜨기도 힘든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이 희미해지며 눈이 감겼다.
정신을 잃는 건가 싶었던 순간 나는 이성진의 손에 이끌려 그놈의 영역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기침하며 입 안에 들어간 물을 뱉어 냈다.
“켈록…! 으, 느낌 이상해……!”
“한기는 없고? 아까 공격당했던 곳은 아파?”
“뭐? 아니, 물에 빠져서 그런지 조금 춥게 느껴질 뿐이야. 딱히 아프지는…….”
“그래? 역시, 너 정도쯤 되면 내 영역에 들어가도 무사한가 보네.”
“뭐, 뭐……?”
나는 대답하다 말고 당황해서 이성진을 돌아보았다. 이성진은 내 시선을 눈치챘을 텐데도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내 영역에 들어가면 보통 독이 올라서 그대로 기절하던데 말이야. 실수로 소영이를 들였을 때는 체온이 떨어지고 맥박이 약해져서 죽는가 싶었지.”
“야!!!”
진짜 내가 화를 안 내고 배겨? 지금 내가 그런 무시무시한 곳에 들어갔다 나왔다는 소리야?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으으…….”
「마스터, 정화마법 사용 권한을.」
“응, 부탁할게.”
문이가 정화마법을 발동했다. 몸이 방금보다 훨씬 편해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중얼거렸다.
“『문자마법 레벨 2, 종료』.”
내 목소리와 함께 문이가 사라졌다. 모니터도 키보드도 깨끗하게 모습을 감추었다. 나는 다시금 표독한 눈으로 이성진을 노려봤다.
“너 말이야, 그런 위험한 데 날 끌고 가지 마! 난 아픈 것도 무섭고 하여간 다 무서워!”
“자랑 아니거든.”
이성진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랑 하지 말고 다른 녀석들이랑 하든가. 걔들은 널 봐줄 테니까 그게 더 나을걸?”
“그건…….”
내가 약간 가라앉은 기색으로 뭐라 말을 잇기 전에 이성진이 말을 가로챘다.
“야, 말해 두지만 이건 그냥 하는 말이니까. 나도 제대로 마법을 쓸 만한 상대는 너밖에 없어, 지금은.”
“…….”
나는 한숨을 내쉬며 가상 환경이고 뭐고 초토화되어 날아가 엉망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우리가 나가면 알아서 복구될 터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제 친구들이랑 마력량이 많이 차이 나. 전엔 그냥 조금 앞선 수준이었다면 지금은……차이가 많이 나. 왜지? 훈련 시간도 줄었고, 친구들도 열심히 하는데. 계속 대등할 줄 알았는데.”
그 사실을 느끼고야 말았다. 친구들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은 나와 이성진을 제외하면 인하다. 그다음을 근소한 차이로 최인성이 쫓고 있다.
그런데 인하랑 비교해도 마력이 다섯 배가 넘게 차이 난다. 2년 전, 초등학생일 때의 다섯 배와 지금의 다섯 배는 질량 차가 엄청나다. 어릴 적에는 다섯 배 차이가 별로 크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게다가 다섯 배도 대충 잡은 양이었다. 다른 친구들과 마력량이 많이 차이 난다는 걸 눈치챈 후부터 나는 남의 마력과 내 마력을 비교하는 걸 그만두었다.
내 감지능력은 남의 마력은 잘 볼 수 있지만 내 마력은 바로 잴 수 없는 타입이다. 내 얼굴을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마력을 ‘눈’을 통해 본다. 내 안의 마력은 오로지 감각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 역시 내 눈으로 내 얼굴을 보려 하는 것과 비슷해서 완벽하게 재기 힘들다.
“그걸 몰라서 물어?”
“뭐가?”
나는 침울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러자 이성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빨리 강해지는 이유는 많이 있지만……그중 몇 개만 꼽아 주지.”
“…….”
“일단, 네 마법의 레벨이 네 마력량보다 위야.”
“뭐…?”
나는 의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애초에 정신 계열 환각과 현실에 반영하는 환각, 몽현이랑 환몽이랬나? 그걸 같이 쓸 수 있다는 것부터가 마법 레벨이 뛰어나다는 증거야. 심지어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방향을 잡고 사용했다며? 마법 레벨을 그렇게 높게 잡으니 네 마력이 온 힘을 다해 마법 레벨을 따라잡기 위해서 달리고 있는 거잖아.”
“어…….”
“문자마법은 잘 모르겠지만, 시공간마법도 마찬가지야. 시공간마법은 엄청 레벨이 높은 마법이야. 결계를 영역으로 삼은 데다, 그 안의 시간마저 조율할 수 있는 것도 그렇고, 마법의 레벨이 너무 높아. 마력이 빨리 따라잡으려고 안달을 내고 있군. 당연한 결과야.”
“…….”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재능. 빼도 박도 못하게 넌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
“알……긴 아는데…….”
진짜 천재 앞에서 그런 말을 듣자니 기분이 이상하다.
“그리고 노력. 걔들이 너보다 노력한다고 생각해? 설마. 나는 너만큼 노력하는 마법사는 본 적이 없어.”
“…….”
나는 고개를 숙였다. 이상하다. 그럴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왠지 모르게 눈가에 열이 몰렸다. 이것을 인정받은 것 같다고 표현하면 좋을까……? 우울했던 것도 잊을 정도로 기쁘고 가슴이 벅찼다. 나는 목이 메는 것을 느끼며 속삭였다.
“네가 칭찬을 하다니 이상해.”
“너는 인정할 만하잖아.”
“1년 전까지만 해도 좀 더 노력하라면서 재수 없는 말은 다 했던 주제에.”
“그래. 소영이랑 한수 말이 맞아. 내가 널 모르고 한 개소리였어. 그땐 미안했다.”
절대 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감정의 응어리가 지금 풀렸다. 이미 1년이나 지난 일이라 사과를 받아 봤자 그저 그뿐이라 생각했고, 사과를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슴의 신호를 그저 무시했다. 그랬던 게 설마 1년 만에 이렇게 달라지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네가 사과하니까 진짜로 이상해.”
“아, 생각해 보니까 사과가 너무 늦었네. 좋아. 뭐 맛있는 거라도 쏠까? 너 많이 먹던데, 그렇게 먹고 돼지나 되지 마라.”
“…….”
이성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하여간 이 녀석은……마지막에 꼭 초를 친다니까. 나는 말없이 녀석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내가 행운 아이템 판매를 시작했을 무렵 이성진이 검 한 자루를 공방에 등록했다. 마력 증폭 효과가 담겨 있는 평범한 검이었다. 폭이 얇고 길쭉해 보이는 단순한 검이다. 내 옆에 검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민희도 만들 수 있지만 그건 마법이니까 별개다.
자습 시간, 이번엔 이성진의 마법 실험용으로 대련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맞춰 교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가 문득 중얼거렸다.
“아메시스트.”
“공방 이름이 갑자기 왜?”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까 맘에 들어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일부러 유치하게 지은 그 이름들이?
“자수정, 제일 좋아하는 보석이거든.”
자수정,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보석이자, 커플 링에 쓰인 보석이기도 하다. 싸구려 반지지만 가운데 박힌 큐빅은 일단 순도가 낮은 자수정이다. 그 녀석이 없는 용돈을 털어서 샀던 물건이다.
하지만 그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보석은 루비였다. 이것 역시 나의, ‘그녀’의 영향을 받아 변한 걸까?
나는 주먹을 슬그머니 꽉 쥐었다 폈다. 말없이 걸음을 옮기는 나를 성진이 멈춰 세웠다.
“야, 잠깐, 그러고 보니 줄 게 있어.”
“뭐?”
“이거.”
그는 내 앞에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새까만 집과 자루를 가진 검이었다. 어림잡아 길이가 50~70cm 정도 되는 중단검이었다.
“이건 왜?”
“너 접근전에선 방어할 때 외엔 맥을 못 추잖아. 호신용으로 가져. 지금 여기서 뽑아 봐.”
나는 신기한 눈으로 내 손에 놓인 얇은 검을 보았다. 손가락을 대어 재 보니 검집 폭이 손가락 두 마디보다 좀 더 컸다. 나는 검의 손잡이를 잡아 검을 천천히 뽑았다.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다.
“검이라서 무거울 줄 알았는데 아니네.”
“…어?”
내 말에 성진이 조금 놀랐다.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너 검은 한 번도 만져 본 적 없어?”
“응. 없어.”
“자랑이다…….”
검이 작게 마찰 소리를 내며 뽑혔다. 일자로 곧은 양날 검이다. 완전히 뽑힌 검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이내 기겁했다.
“이거 뭐야. 기운이 엄청 이상한데?”
판타지나 사극을 예로 들자면 귀검(鬼劍) 같은 느낌이다. 나는 안 좋은 사념이 담긴 마력이 몽실몽실 솟아오르는 걸 보고 질색했다. 그러자 성진은 씩 웃었다.
“그래서 너한테 준 거잖아.”
“뭐, 뭐?”
“호기심으로 만들긴 했는데 쓸 만한 사람이 없더라고. 겸사겸사 너한테 주는 거야.”
“피, 필요 없거든?”
나는 재빨리 검을 검집에 쑤셔 넣었다.
“애초에 나 검 같은 거 못 써! 날에 베이기라도 하면 무섭고, 무섭단 말이야!”
“아니, 그건 진짜로 자랑이 아니거든. 그리고 오히려 그래서 더 도움될걸? 그거 모르는 사람이 봐도 위압감을 느낄 테고, 저주 효과도 있거든. 뽑아서 대충 휘두르는 것만으로 영향을 미친다니까?”
“그러다가 진짜 베이면 어떡하라고 휘둘러!”
“너 걔들 얕보지 마라. 네가 어설프게 휘두르는 검에 당할 놈은 적어도 우리 친구 중엔 한 놈도 없거든?”
“으, 으…….”
“그런 거니까 괜히 검 정화하지 말고, 그거 너 가져.”
“진짜 싫은데…….”
신기하니까 검 한 자루 정도는 가져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상황이 이러니 껄끄럽기만 하다. 결국 나는 검 주위에 봉인 사슬을 치고 아공간에 넣어 두었다.
한가롭게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우리 앞으로 달려왔다. 다른 반 친구로, 꽤 낯이 익었다. 그녀가 다급히 내 앞에 멈춰 섰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녀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필사적인 얼굴로 소리쳤다.
“큰일 났어요, 은하 님! 이번에 전투과에서 실습을 갔었는데…….”
“응? 응.”
“중간에 엄청 강한 적이랑 마주쳤다나 봐요! 선생님도 팔 하나 잘리고, 다른 애들도 몇 명 다쳐서 돌아왔다고……난리가 아니라서……!”
“……뭐?”
가슴이 크게 뛰었다. 나는 표정을 창백하게 굳혔다. 전투과가, 뭐……?
“민희랑 인하도 좀 다친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는 그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달렸다. 그러나 내가 채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성진이 내 어깨를 잡아 나를 막았다.
“마법 뒀다 국 끓여 먹을 셈이냐. 일단 진정해, 멍청아.”
“이거 놔!”
나는 날카롭게 반응했다. 성진이 나를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야! 큰 부상은 아닌 거지?”
“…….”
멍하니 있던 여자애는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진정하세요, 은하 님! 많이 다친 거 아니에요. 방금 확인하고 왔는데 큰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어요. 다만 인하는 팔을 좀 길게 베여서, 하지만 약 바르고 치료하면 이틀 안에 나을 정도로 가벼운 상처예요. 민희는 발목뼈에 금이 갔대나 봐요.”
옆에서 성진이 물었다.
“소영이는?”
“소영이도 괜찮아. 부상이라고 할 것도 없어.”
“그래…….”
나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숨을 골랐다. 친구들이 다쳤다는 생각이 들자 속에서 천불이 솟았다. 그러나 그것을 겨우겨우 삼키며 진정했다. 몸이, 기도하듯이 꼭 모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겨우 물었다.
“괜찮은……거지?”
“네. 치료받으면 금방 나을 거예요.”
“그래……. 알려 줘서 고마워……!”
그렇다고 한들 부상을 입은 것에는 변함이 없다. 친구들이 받았을 고통을 생각하자 아찔해졌다. 나는 앞으로 비척비척 걸으며 텔레포트 했다.
나는 곧바로 교실 문을 열어젖혔다. 웅성거리는 학생들 사이에 빙 둘러싸여 있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인하야! 민희야! 소영아!”
“은하야!”
나는 달려가서 세 사람의 앞에 섰다. 한수와 현호와, 최인성도 소식을 들었는지 함께였다. 달려가 팔에 붕대를 한 인하와 발목에 붕대를 한 민희의 모습을 보고 나는 참담함을 삼켰다.
“다쳤다며…….”
“응. 소식 들었구나? 괜찮아. 우리는 괜찮아. 단지…….”
인하가 평소와 달리 괴로운 표정으로 입술을 우물거리며 양손을 들어 이마를 감쌌다.
“나랑 민희를 감싸고 천호 오빠가 부상을 입었어. 내 팔에 난 상처, 천호 오빠가 감싸 줘서 이 정도로 끝난 거야.”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럼……팔이 잘렸다는 선생님이…….”
“인솔자로 천호 오빠가 같이 갔었어. 거기에서…….”
인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그 옆에 선 민희의 얼굴도 창백했다.
어떻게 하지? 나는 당사자가 아니다. 당장 찾아서 상황을 물어봐야 하나? 그래야 할 것이다. 인하와 민희를 감싸기 위해 팔 하나가 잘렸단다. 그런 생각이 들자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역시 이 세계는 위험천만했다.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며 전투와는 먼 삶을 지향해 온 나조차 몇 번이나 위험한 경험을 했다. 두 번이나 테러에 휘말렸고, 제정신이 아닌 스토커에게 쫓기거나, 친구가 납치당한 적도 있다. 독에 당해 끔찍한 고통을 겪기도 했다.
“…….”
나는 입을 다문 채 차마 아무 말도 못 했다. 가만히 서 있던 나는 교실 문으로 다가오는 익숙한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휙 돌렸다. 열려 있던 교실 문 옆에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한쪽 어깨에 붕대를 칭칭 감은 천호 오빠와 그런 천호 오빠를 부축하고 있는 제현 오빠였다.
“여어.”
“오빠!”
“선배!!”
“천호 오빠!”
그를 알거나 그와 함께 실습을 나갔던 전투과 학생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천호 오빠를 향해 달려갔다. 특히 민희와 인하의 행동은 간절했다. 민희는 달려가 평소처럼 천호 오빠를 끌어안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해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괜찮아? 팔 붙었어? 많이 아파? 나, 정말, 정말로…….”
“오빠, 미안. 내 실력이 부족해서…….”
인하도 어두운 얼굴로 머뭇머뭇 천호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그 인파에서 조금 떨어진 채 어쩔 줄 모르며 천호 오빠를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을 쳤다. 천호 오빠는 걱정으로 가득 찬 우리의 얼굴을 쭉 돌아보더니 이내 씩 웃었다.
“오냐. 괜찮다고 말하려고 온 거다. 걱정 많이 했지? 팔도 제대로 붙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윽……!”
민희가 울음으로 가득 찬 얼굴로 천호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다정히 웃으며 민희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민희가 천호 오빠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괜찮아.”
민희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오빠가 큰일 나면 어떡하나 싶어서…! 민희가 울면서 천호 오빠의 품에 매달렸다. 인하도 민희의 뒤에 서서 눈물을 몇 방울 떨어뜨리고는 닦았다.
민희와 인하는 어릴 적부터 참 강한 친구들이었다. 소설을 보며, 영화를 보며, 힘든 일이 있을 때 등 퍽 드물지 않게 눈물을 흘리는 나와 달리 두 사람은 눈물을 보인 적이 거의 없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으려 했던 것이 아니라 정말로 울 만한 일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랬던 친구들이 지금 울고 있었다. 친하고 소중한 사람이 눈앞에서 자신들을 보호하려다가 다쳤다. 얼마나 속상했을까. 나는 전염된 것처럼 눈물을 떨구었다.
“으…….”
그사이 조금 뒤늦게 뒷문으로 들어온 성진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무슨 일이야?”
대답한 건 내가 아니라 최인성이었다. 성진을 보고 내 뒤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게, 저 형이 친구들을 보호하다가 다쳤다고 하더라고.”
“저 사람……어릴 때부터 너희랑 친한 사람이라 그랬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호 오빠는 제현 오빠의 소꿉친구야.”
나는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았다. 고개를 돌려 소영이와 한수와 현호를 바라보았다. 현호와 한수는 의외로 덤덤했다. 지들도 남자라고, 좀 컸다고, 이제 나처럼 쉽사리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우는 데 남자 여자가 무슨 상관이라고.
천호 오빠는 한동안 학생들을 진정시키다가 절대 안정이라며 제현 오빠에게 반강제로 이끌려 병실로 돌아가게 되었다. 민희와 인하도 따라가려고 했지만 수업이 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전투과의 수업은 흐지부지될 확률이 높아 보이지만, 수업을 들으라고 한 게 천호 오빠니 어쩔 수 없다.
“하여간 한숨 놨다.”
“응.”
한수의 말에 인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수가 인하의 팔을 아프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
“네 치료는 내가 해 줄게. 다 안 나은 거지?”
“응.”
인하는 기꺼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수가 붕대에 감긴 인하의 팔을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숙였다. 한수가 붕대로 감긴 손목 위에 살짝 입을 가져다 댔다. 나는 그만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
“전투과가 위험한 일이 많은 건 알지만, 너무 다치진 마라. 마음 아프니까.”
“……응.”
인하는 새빨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것을 보며 참을 수 없는 오글거림을 느껴 가슴을 쥐고 고개를 숙였다. 내 옆에 있던 최인성과 성진도 마찬가지로 당황한 듯했다.
“우와…….”
“너 그런 오글거리는 말을 어디서…….”
하지만 내가 오글거림에 죽을 것 같은 건 그저 눈앞에서 염장을 봤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평소라면 그냥 어머어머 뺨을 붉히며 감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실은…….
“어? 판타지 소설에서.”
그런 장면 쓰지 말걸! 아무래도 내가 잘못한 것 같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조금 두근거렸어?”
“응. 많이.”
오늘따라 다정한 너희의 모습이 참 보기 힘들구나. 차마 내가 소설에 썼던 장면이란 말은 꺼내지 못하겠다. 나는 격렬한 오글거림을 참고 또 참은 뒤, 겨우 말을 뱉었다.
“확실히 다들 괜찮은 것 같네……. 다행이다.”
“야, 근데 쟤가 말한 판타지 소설이란 거 혹시…….”
“입 좀 다물어 줄래?”
“아아……역시.”
나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성진이 얘가 내 독자님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여간 다행이다. 크게 다친 사람은 천호 오빠뿐이고, 천호 오빠의 부상도 마법으로 치료할 수 있을 정도다. 인하의 팔에 난 상처도 민희의 발목에 금이 간 것도 치료마법으로 금세 치료할 수 있는 상처였다. 인하도 치료마법에 상당히 재능이 있는 편이었지만, 인하는 얌전히 한수의 치료를 받아들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음에도 의외로 전투과의 수업은 끝까지 평소와 다름없이 진행되었다.
“의외로 고지식하네…….”
“그게 아니라 다칠 때마다 일일이 수업을 뺄 수 없어서 그런 거겠지.”
“뭐…?”
“너 잊지 마. 쟤네들은 전투과야. 전투에서 다치는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우리 학년은 많이 얌전한 편이야.”
나는 입술을 어물거렸다.
“대련 때만 해도 화상을 입거나 상처를 입는 녀석들이 있잖아. 밖에 나가면 죽일 생각으로 마법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전투는 ‘다치는 게’ 전제가 돼. 대련과는 다르단 말이다. 대현은 강한 사람들이 많아서 실습 때도 학생들을 보호해 주지만, 유란은 그 정도는 아니었어. 몸에 구멍 하나 나는 거야 흔한 일이지. 팔다리가 떨어져도 다시 붙일 수 있는데 뭘 사리겠어?”
“꼭 그런 식으로……말해야겠어……?”
말을 내뱉는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이성진은 끝까지 냉정했다.
“다치지 않고 끝나는 게 이상하지. 지금까진 괜찮았더라도 계속 저 길로 나아가는 이상 팔다리 한 짝은 반드시 한 번 이상 떨어져 나갈 거다.”
“그만하라고…….”
“그러니까 정신 차리라는 거야. 네 친구들은 네가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멀쩡히 살아남을 놈들이야. 네가 위험할 때까지 주저하진 마라.”
나는 주먹을 꼭 쥐었다.
“나도 내 몸 정도는 철저하게 지킬 수 있게 훈련해 왔어. 사서 걱정하지 마. 친구들을 걱정하는 게 이상하다는 것처럼 말하지 마. 다치는 걸 당연한 것처럼 말하지 마. 아픈 건 당연한 게 아니라고…….”
울분을 담아 한 말이었지만 그 녀석은 한숨만 쉴 뿐이었다.
“이렇게 심약해서 어쩌려나 몰라.”
나는 휙 고개를 돌렸다. 역시 이 녀석은 싫다! 이럴 때마다 정말로 싫었다. 대체 그 녀석이 어떻게 이렇게 변한 거지? 환생했어도, 피의 맹약에 의해 나에 대한 기억이 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변한 거야? 다른 사람……일 리가 없잖아…….
수업을 마친 후 나는 친구들과 함께 천호 오빠 병문안을 가며 좀 더 자세한 사정을 전해 들었다. 갑자기 이상한 키메라를 데리고 검은 망토를 두른 여자 마법사가 내려와 주위를 초토화로 만들었단다. 아이들은 마법을 쓸 여지도 없이 뒤로 물러났고, 천호 오빠와 민희, 인하, 소영이만이 마지막까지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약하다는 말에 열이 오른 인하가 온 마력을 쏟아부어 쓴 마법도 여자의 손에 의해서 순식간에 파훼되었다고 한다. 그 여파는 마법을 상쇄시키고도 죽지 않아 곧바로 인하를 덮쳤다. 천호 오빠의 팔은 그것을 막으려다가 잘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