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62
그것이 또다시 슬로 모션으로 보였다.
‘마법이 아까보다 약해졌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눈에 힘을 줬다. 주위로 마력이 퍼졌다. 남자가 내 영역 안에 들어왔다. 어둠이 아지랑이처럼 움직이며 중력을 가뒀다. 환각이 강렬한 의지를 가지고 남자를 슬금슬금 좀먹었다.
“이건 또 뭐야?!”
나는 게이트를 사용해 이동한 뒤 재빨리 몸을 일으켜 착지했다. 몸은 고통스러웠지만 마력은 아직 충분히 남아 있었다.
“포기가 느리군. 뻗어져라.”
은발 남자가 환각에 감싸인 채 마력을 주위로 퍼트렸다. 남자의 몸에서 나온 구슬이 내 주위를 빙 둘러쌌다.
“백화(百花)의 연회.”
“어린 계집애에게 쓰기는 아까운 기술이지만, 십중거성(十重巨星).”
나는 헉헉 숨을 고르며 그들을 보았다. 나를 우습게 보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서서히, 많은 마력을 깎아 썼다. 반면 내가 쓴 마법은 많지 않다.
아니, 사실 내겐 모든 마력을 쏟아붓는 필살 기술이 없다. 별마법, 속성융합마법을 공격마법으로 쓰고는 있지만 언제나 딱 조절해서 적당히 썼다. 과도하게 강하지도 않고 원래 위력에 비해 약하지도 않다. 필살기라기엔 모자랐다.
나는 내 주위를 둘러싼 백 개의 냉기와 열기를 품고 있는 구슬을 보았다. 내 주위로 솟아오른, 주변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10개의 거대한 중력구를 보았다. 어떤 것은 중력을 내뿜고 있고, 어떤 것은 중력을 흡수하고 있다. 저것이 한데 합쳐지면 내 몸 같은 건 진작에 산산조각 날 만한 힘이 주위를 휩쓸 것이다. 나는 두려움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행인 건, 저 사람들에게 살의가 별로 없다는 것 정도?
죽일 생각으로 마법을 쓰는 게 아니라 쓰러뜨릴 생각으로 마법을 쓰고 있다.
저것을 막고 반격할 수 있는 방법은 이제 오직 하나! 전부 삼켜 버릴 수밖에!
‘하나, 환각으로 저들의 정신을 흐트러뜨리며 기술을 약화한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둘, 위압감을.’
“백화…….”
구슬이 빙글빙글 내 주위를 돌며 좁혀 오기 시작했다. 나는 가슴 앞에 손을 모아 둥글게 벌렸다. 왼손에는 어둠.
“십중…….”
오른손에는 빛.
“연회!”
“거성!”
“……!”
중간에는 게이트의 허무를 펼친다──!
‘전부 삼켜 버려!’
나를 중심으로 거대한 어둠이 휘몰아쳤다. 주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폭발음이 들리고, 어둠과 빛이 합쳐지며, 그것이 게이트의 허무에 섞였다. 어둠이 펼쳐지며 중심으로 힘이 몰린다. 모든 것이 뭉쳐진 마력이 주위를 휩쓸었다.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결국 그 모든 것이 뭉쳐 허무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주위를 덮었던 허무가 사라지고 그 여파에 허덕이는 우리 세 사람만이 남았다. 마법의 폭풍을 고스란히 받아 낸 두 남자는 멀쩡하지 못했고, 폭풍의 핵에 있었던 나는 지쳤을 뿐 멀쩡히 서 있었다.
‘아직 마력이 남았어.’
나는 손을 움직였다. 내 앞에 있는 두 사람도 여력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이런 미친…….”
“저 계집애는 대체 뭐야?”
그러나 이 몸으로 저 두 사람의 날카로운 공격을 막고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지친 틈에 제대로 된 결계를 치고 아이들이 도망갈 때까지 조금 더 시간을 벌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이번엔 제대로 결계를 칠 시간이 있었다. 그런 생각에 내가 마력을 움직일 때였다.
“──유은하!!”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폐허가 된 땅을 이성진이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반가움에 눈을 크게 떴다.
“성──.”
“뒤! 조심해!”
나는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성진이 지원군임을 깨달았는지 두 사람이 무리하게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유은하!”
“은하야?!”
그 무렵 학교에서 다른 지원군도 도착했다. 제현 오빠와 민 선생님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이곳에 와서, 지금 이렇게 망신창이로 쓰러질 때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0분도 되지 않았다. 고작 10분 만에 이 꼴이 됐다. 나는 울컥했다.
그러나 감정의 격류를 느낄 틈도 없이 머리 위를 중력의 무게가 덮쳤다. 나는 풀썩 주저앉으면서도 마법을 펼쳤다. 결계가 일 차 폭발을 막았다. 그 직후, 내 뒤에서 날카로운 물의 검기가 날아왔다.
“손! 잡아!”
성진은 검기를 날리고도 지체하지 않고 내게 다가와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그의 힘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서 마력이 진동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자연스럽게 이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마법 융합!’
우리는 1학년 때 협력 대련을 했던 이유로 자주 서로 마법을 융합하며 연습해 왔다. 나는 녀석의 물마법 위에 어둠을 겹쳤다.
쿠과과과과!!!
지체 없이 온 마력을 쏟았다. 이 녀석의 마력에 맞추려면 반 이하로 남은 마력에 주변의 마력까지 전부 끌어와야만 했다. 서로의 몸에서 빛이 일어나며 휘몰아쳤다. 성진의 몸에서 일어나는 노을색 마력과 별이 섞인 내 밤하늘색 마력이 합쳐졌다. 그 순간, 마법이 폭발적으로 증폭했다.
어둠과 물의 소용돌이는 땅을 깊게 파헤치고, 그 수분으로 하늘 위의 구름까지 축축하고 무겁게 만든 후에야 멈췄다. 마법에 휘말린 두 사람은 정신을 잃고 기절했다.
“으아…….”
드디어 끝났다. 드디어……. 나는 안심하며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성진이 여전히 내 손을 쥔 채 날카롭게 소리쳤다.
“너,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지는 게 어디 있어! 어디서 멋대로 위험한 일에 끼어들고 난리야! 답지도 않게, 무모하게…….”
나는 성진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내 손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는지 성진이 흠칫해서 입을 다물었다.
“무서웠어…….”
“……일어나, 멍청아.”
나는 성진이 허리를 숙임과 동시에 그 녀석의 몸을 확 끌어안았다.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곁에 있는, 어리광을 부릴 수 있고 거리낌 없이 대할 수 있는 편한 상대. 좋아하는 상대임을 떠나 성진은 내게 의지할 수 있는 상대였다. ‘그 녀석’처럼…….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그대로 맡겼다. 코끝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저녁놀의 냄새가 났다.
나는 잠시 후 제정신을 차렸다. 성진에게서 떨어져서 약간 흘린 눈물을 닦았다. 대현에서 사람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선생님들에게 지원 요청이 왔던 것은 길게 잡아도 20분 전, 내가 싸운 것은 10분. 그것을 생각하면 이들의 도착은 별로 늦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주저앉은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풀썩 주저앉았다. 문이는 어느새 닫혀 있었고, 통각을 둔하게 하는 마법도 풀려 있었다. 싸우면서 다쳤을 때 느껴졌어야 했던 고통이 이제야 고스란히 느껴졌다. 배며, 얼굴이며, 팔이며 할 것 없이 전부 아팠다. 가장 아픈 건 배와 얼굴이었다. 나는 신음 소리와 함께 자리에 주저앉았다.
“흐윽…!”
그에 성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그 정도 다치고 엄살이냐.”
“아, 아프거든? 중력파를 받았는데 그럼 안 아파? 난 전투 마법사가 아니란 말이야.”
“앗, 은하…….”
내 말에 망연한 얼굴로 서 있던 민 선생님과 제현 오빠가 다시 내게 다가오기 전에, 성진이 내 팔을 잡아당겨 나를 업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딱 굳어 버렸다.
나와 이 녀석이 요 1년 사이 많이 친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스스럼없이 스킨십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훈련을 할 때 가끔 비틀거리면 부축해 주곤 했지만 이렇게 업히는 건 또 처음이다.
‘잠깐, 나 방금 안겼었지? 심지어 내가 껴안…….’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어쩔 수 없다. 이건 생리 현상이다.
나에게 다가오던 민 선생님이 그 모습을 보고 딱 굳었다. 제현 오빠는 불만을 그대로 드러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누구 맘대로 꼬맹이를 업는 거야. 너도 아무한테나 업히는 거 아냐. 내려. 내가 대신 업어 줄게.”
“어, 아니….”
성진의 얼굴이 평소처럼 냉랭해졌다. 친구들을 대할 땐 조금이라도 감정을 드러내지만 남을 대할 때는 무섭도록 얼어붙는다.
“이미 업혔는데 굳이 바꿔서 업는 건 얘한테 무리가 갈 것 같습니다만.”
성진은 다시 나를 돌아보더니 살짝 표정을 풀었다. 그것을 보자 괜히 기뻐져서 얼굴이 더 달아올랐다.
“그래서, 어디 다쳤는데?”
“어? 음……얼굴이랑 배에 주먹으로 직격타…….”
그러자 성진의 얼굴이 불만스럽게 찌푸려졌다.
“멍청이가. 회피 훈련은 멋으로 했냐?”
“몰라. 그 사람들 엄청 셌다고. 너 올 때까지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던 거란 말이야.”
“애초에 왜 네가 버티고 서 있는데?”
“어쩔 수 없잖아. 뒤에는 후배들이 있고, 선생님들은 쓰러지지, 결계를 칠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공격은 빠르고, 아이들이 도망치게 시간을 벌려면 내가 버티고 서 있을 수밖에 없잖아! 주변에 방해 장이 있어서 바로 텔레포트는 못 하니까!”
“그러니까 왜 혼자 갔냐고. 나랑 같이 갔으면 됐잖아.”
“아, 몰라! 그럼 급했는데 어떡해!”
나는 양손으로 귀를 막으며 그 녀석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다가 무심코 깨달은 것은, 내가 이런 행동을 보였던 건 오직 ‘그 녀석’과 가족뿐이었다는 것이다. 어느새 너무 자연스럽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나는 오싹해져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굉장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제현 오빠와 굉장히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민 선생님이 보였다.
“은하야, 너…….”
“네? 왜요?”
“너……그 남자애랑 사귀니……?”
순간 가슴이 설렘 같은 감정으로 크게 뛰었다. 그러나 나는 덤덤한 미소를 꾸미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친구예요. 마법 상성이 잘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겠는 친구……?”
“그, 그런 거야?”
“네.”
민 선생님이 굉장히 안도했다. 제현 오빠가 내 뒤에 슥 서더니 내 허리쯤에 손을 끼며 나를 들어 올렸다.
“평범한 이성 친구랑 그렇게 친밀하게 구는 거 아냐.”
“엇, 엥? 으악!”
내가 당황하는 사이 제현 오빠가 나를 들어 올렸다. 그것도, 공주님 안기로! 헐, 헐! 공주님 안기를 당해 본 게 대체 몇 년 만이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당황한 얼굴로 제현 오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 오빠. 이게 뭐 하는…….”
“아프다며. 사정 설명 들어야 하니까 일단 저기 벤치에 앉자. 의료 마법사 불러올게.”
“아니, 그게.”
“맞아, 은하야. 이성 친구랑 그렇게 친밀하게 스킨십하는 거 아냐.”
민 선생님이 내 옆에 따라붙으며 엄하게 주의를 줬다. 지금 이 공주님 안기 자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공주님 안기도 좋아하는 사람한테 업히는 것만큼 굉장히 부담스러운데? 옆에서 성진의 퉁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말은 잘하는군요. 그럼 당신은 이성이 아닙니까?”
“나는 이 아이의 오빠 같은 거다.”
제현 오빠의 목소리가 굉장히 딱딱해졌다.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성진은 본디 무지하게 건방지고 재수 없는 놈이다. 나나 친구들은 좀 익숙해졌지만, 이 녀석과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무조건 부딪치게 된다고 봐야 좋다.
“하지만 친오빠는 아니잖습니까.”
“상관없어. 동생처럼 생각하니까. 너 같은 놈이 건드리는 건 못 봐.”
“…….”
주위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싸하게 노려본다. 저놈은 선배한테도 싸가지 없이! 민 선생님은 성진을 불쾌하게 바라보면서도 의아해하며 제현 오빠를 말렸다.
“괜한 싸움 하지 마. 너 이상하게 까칠하다?”
제현 오빠가 짜증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앞을 돌아보았다.
“당연하잖아요. 저 녀석이 은하한테 한 짓이 많으니까…….”
“뭐? 은하 너 무슨 짓 당했어?”
“…….”
나는 침묵했다. 민 선생님은 1학년 때 우리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모른다. 그 사건은 중학교 학생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퍼졌지만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쉬쉬했다고 들었으니까. 누군가에게 알릴 만큼 좋은 일이 아니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사실을 축소해 말했다.
“작년에 쟤랑 성격이 안 맞아서 대판 싸웠거든요…….”
“뭐? 헤에. 저학년 때 이후론 처음이네.”
“그 사실은 좀 잊어 주시고…….”
예슬이랑 머리끄댕이 잡고 싸웠던 일은 이제 좀 잊고 싶다. 나도 너무 유치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예슬이도 나도 잊고 싶은 이야기다.
“…….”
제현 오빠가 묘한 감정을 담은 시선으로 나를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현 오빠는 나를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근처에 있는 의자에 데려가 조심스럽게 앉혀 주었다. 그 행동이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그에게 오빠라는 감정밖에는 안 가지고 있음에도 굉장히 낯간지러웠다.
의료 마법사에게 치료받는 사이 나는 민 선생님과 제현 오빠에게 대강 사정을 이야기했다. 담임 선생님께 지원 요청이 왔던 일, 위험에 처한 후배들 중에 시하의 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이 되어 텔레포트 지원을 했던 것. 인질이 되었던 아이를 구한 후 표적이 되고, 아이들을 도주시키려 했지만 방어벽이었던 선생님들이 전부 쓰러져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가 싸웠던 것.
“고작 10분 남짓 싸운 건데 진이 다 빠졌어요.”
역시 대련과 진짜 전투는 다른가 보다. 무시무시하게 무서웠고, 무시무시하게 빨랐다. 선생님들을 몇 분 만에 쓰러뜨려 버린 상대와 싸우면서 내가 10분이나 버텨 냈다는 것 역시 신기했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이미 학교로 돌아간 줄 알았던 윤수로와 윤수아가 치료를 끝마친 내게 찾아왔다. 똑 닮은 얼굴을 한 두 아이는 나를 보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은하 누나!”
“언니…! 다쳤어? 괜찮아?”
“괜찮아.”
“히잉……미안해…….”
두 아이는 달려와 내 무릎에 매달렸다. 내 무릎에 얼굴을 묻고 훌쩍훌쩍 울었다. 어리광 많은 아이들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나는 천천히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현 오빠가 이야기를 끝마친 나를 보다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오늘 쓰러뜨린 상대가 둘 다 B랭크 마법사란 걸 아니?”
“네? 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들은 B랭크 마법사였다. B랭크 마법사는 서로 실력 차가 커서 어느 정도다……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일단 그중에서도 중위권은 되어 보였다. 그래서 얼마나 무서웠다고.
“알고 있었어?”
“네. 저 감지계니까요.”
평범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제현 오빠와 민 선생님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제현 오빠가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내 옆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네가 실감이 안 나나 본데, 옆을 돌아봐.”
“…….”
나는 입을 다물고 전투의 흔적을 바라보았다. 싸울 때는 몰랐는데, 막상 확인해 보니 엉망진창이었다. 내 마법은 섬세하기 때문에 흙이나 나무에 별로 피해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마법은 달랐다.
땅은 군데군데 얼어 있고, 혹은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크게 파인 자국이 남아 있었다. 특히 아까 빛과 어둠의 속성 융합을 썼을 때 일대가 전부 날아갔다. 나무, 바위 할 것 없이 전부 다. 다행히 아이들이 간 방향과 반대쪽으로 향하면서 싸웠기 때문에 아이들이나 선생님들께 큰 피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하여간 심각하긴 했다.
“파인 거 말고는 멀쩡해 보이지? 하지만 저기 아래, 나무뿌리와 돌 바위까지 전부 곱게 바스라졌어. 삽으로 파면 굉장히 부드러울걸?”
“…….”
“그뿐만이 아냐.”
이번엔 민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반경 500m는 전부 폐허가 됐다고. 오염되진 않아서 나무를 심으면 바로 자랄 테지만, 그래도 마력의 여파가 남아서 굉장히 튼튼한 나무만 자랄 거야.”
“……와.”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겠니? 은하야.”
민 선생님과 제현 오빠가 심각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멍하니 눈을 크게 떴다.
“넌 그런 상대를 쓰러뜨린 거야.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겠니?”
나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흠칫했다. 나는 그런 마법사와 싸웠다. 겨우겨우 버티면서. 그리고 쓰러뜨린 건……내가 아니었다. 나는 소름이 끼쳐 성진을 돌아보았다.
“이……먼치킨 자식.”
“……하?”
나무에 기대어 얌전히 서 있던 성진이 당황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전부터 무지막지하다고는 생각했지만, 헐, 미친. 선생님이랑 내가 체력을 깎았다곤 해도 B랭크 마법사를 쓰러뜨리다니.”
“뭐?”
“어? 저기, 누나, 누나가 쓰러뜨린 거 아니었어…?”
내 무릎 근처에 서서 연신 놀란 얼굴로 말을 듣고 있던 윤수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아냐. 난 10분 동안 버티는 게 겨우였다고. 내가 B랭크 마법사를 어떻게 이겨. 음……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비밀 준수 교칙이 있으니까. 알았지? 쉿.”
“응, 쉿!”
쌍둥이가 입가에 검지를 가져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귀여운 것들.
그래, 쓰러뜨린 건 이성진이다. 마지막에 나랑 저 녀석이 힘을 합쳐서 마법을 썼지만, 그때 난 지쳐서 마력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고, 이성진은 팔팔했다. 그러므로 쓰러뜨린 건 거의 이성진이었다.
‘물론 나도 생각보다 선전했지만……계속 갔다면 졌을 확률이 높아. 상대가 방심해서 산 거지.’
이내 윤수로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근데 저 형 엄청 강한가 봐. 우리 형은 매일 누나보고 강하다고 하던데.”
“아니, 난, 음……맞아. 이 누나가 좀 강하긴 해. 잘 버티고. 근데 쟤는 그런 수준이 아니야. 어휴.”
“와아…….”
윤수아가 손을 모으며 반짝거리는 눈으로 성진을 돌아보았다. 어려도 잘생긴 건 알아서, 윤수아가 뺨을 붉히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근데 저 오빠 진짜 잘생겼다.”
“그래도 바람둥이니까 반하면 안 된다?”
“에헤헤. 그래도 잘생겼잖아.”
“그래, 그래.”
나는 귀여워하며 윤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하도 순해서 귀여운 인상이지만 시하 동생들도 시하랑 똑 닮아서 순하고 귀여운 상이다.
성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암만 봐도……내가 오기 전에 어느 정도……됐어. 대충 그렇다고 해.”
“뭐가. 진짜 그렇잖아?”
“됐다, 됐어.”
성진이 손을 휘휘 저었다. 제현 오빠와 민 선생님이 언짢은 기색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은하가 그렇게 말할 정도야?”
“너랑 싸웠을 때 저 녀석의 실력을 한 번 보기는 했지만…….”
“음…….”
나는 성진을 보며 허락을 구했다.
“야. 혹시 조금만 입 좀 털어도 돼?”
“맘대로. 신경 안 써도 돼. 너랑 친한 사람이잖아. 저 선생님한테는 인성이가 신세 지기도 했고. 정확히는 같이 다니는 안경 쓴 선생님이지만.”
“오.”
나는 그의 허락을 받은 뒤 두 사람을 향해 작게 근질거리던 입을 털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열라 세요.”
“…….”
“저건 진짜 먼치킨이에요, 먼치킨. 평생 가도 저는 못 이길 것 같아요. 여태까지도 이긴 적이 없고, 앞으로도 못 이길 것 같고, 그게 분하면서도 자랑스러울 정도라니까요?”
그러자 두 사람의 표정이 더 떨떠름해졌다.
“……저놈이 그렇게 강해?”
“은하 네가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어?”
나는 두 사람을 보며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네.”
“…….”
“아니, 진짜, 쟤는 절대 못 이길 것 같아요.”
“…….”
조금 더 사정 청취를 한 후 나와 성진은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오늘은 어차피 소풍이었고 다른 학생들도 다 귀가했으니 바로 기숙사로 가기로 했다. 윤수로, 윤수아와는 따로 텔레포트 했다. 두 사람은 텔레포트 배지로 집으로 귀환했다.
사건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지만 사실은 아직 점심시간이었다. 잠시 후 친구들에게 사정을 설명할 생각 하니 약간 골치가 아팠다. 하여간 오늘은 무척 무서운 날이었다.
“하……무서웠다.”
나는 치료받았지만 아직 위화감이 느껴지는 뺨을 쓸며 중얼거렸다. 이가 하나 흔들렸지만 다행히 치료마법으로 멀끔히 나았다. 빠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빠졌다면 상당히 소름 끼쳤을 테니까. 아직 난 그런 것에 익숙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왜 나서.”
성진이 툭 내뱉었다. 상당히 가라앉은 목소리에 나는 흘끔 그 녀석을 돌아보았다. 그는 내가 돌아보자 걸음을 멈췄다. 나도 덩달아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랬어?”
“뭐가?”
“너, 나서기 싫어하는 성격이잖아. 그런데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나는 정말로 영문을 몰랐다. 성진의 얼굴에는 심각한 분위기가 맴돌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차갑게 벼려진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진지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저번에도 말했잖아. 만약에, 전쟁 같은 게 일어나면 도망가겠다고.”
“……응.”
“그런 성격이잖아. 나서서 손을 든 적이 없잖아. 싸움을 싫어하고, 상처 입는 것도, 상처를 입히는 것도 싫어하잖아. 선생님의 말을 듣고, 위험한 건 알고 있었을 거잖아.”
그랬다. 위험할 것은 분명 알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응.”
“근데 왜 네가 나서.”
그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네가 간다고 해서 제대로 해결된다는 보장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 사건이 벌어진 게 네 탓도 아니고, 네가 나서지 않아도 누군가가 해결했을 거야. 그런데 왜 답지도 않게 무서운 상황에 끼어든 거지?”
“하지만…….”
“답지도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