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68
“…….”
나는 끝까지 침묵했고, 그는 등을 돌린 채 사라졌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게 된 공원에 바람만이 불었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숙이고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맘대로 안 되는 거야.”
그렇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난 너한테 고마워.”
네가 나에게 반하지 않았더라면 성진을 만날 때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유일하게 어쩌면 ‘그 녀석’일지도 모른다고 느낄 이를 만날 때까지,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정말로 고마워.”
고맙다는 말은, 바로 내가 너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었다.
꿈속에서 그녀의 동생을 찾는다는 목적을 좀처럼 이루지 못한 채 수학여행의 끝이 다가왔다. 기둥을 전부 둘러보았지만 영혼이 들어가 있는 기둥은 본섬의 붉은 기둥밖에 없었다.
하루에 두 번씩 마력을 고갈하자 마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무리하게 훈련을 한 보람이 있다.
인성은 그날 이후 우울해 보였지만 많이 티가 나지는 않았기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는 일은 없었다. 성진도 나를 평소와 다름없이 대했다.
수학여행 4일째 날 오후, 친구들과 조우했다. 오늘 오후부터는 다른 조 학생들과 다시 모여 같이 활동하게 된다. 우리는 서로 신나 하며 4일 만에 만나는 친구들을 반겼다.
“인하야, 한수야!”
“소영아!”
“오랜만이야!”
인하가 덥썩 나와 민희에게 달려들었다. 소영이는 우리에게 담백하게 인사한 뒤 뭔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인성이에게 다가갔다. 아, 성진이는 몰라도 소영이에게는 말을 했구나. 나는 직감했다.
“후……왠지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아.”
인하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할 게 너무 많고 바빠서 그런 걸 느끼지도 못했는데. 그러나 나는 속내를 말하는 대신 그저 인하의 어리광을 받아 주었다.
오늘은 마지막 기둥을 보는 날이었다.
아크에 있는 마지막 기둥을 보고 나서 다시 아래로 내려간 뒤 동물원에 갔다가 그 근처에 있는 숙소에 머무르게 된다. 마지막 날이나마 친구들이랑 다 함께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니지, 다행이라기보다 기뻤다.
“네가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왜애? 수학여행은 학생들이 데이트하기에 딱 좋은데.”
“…그거랑 이건 다르잖아.”
인하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운 모양이다. 어이구, 귀엽기도 해라.
나는 며칠 만에 친구들 사이에 폭 파묻히듯이 둘러싸인 채 걸어갔다. 그도 그럴 게 소영이와 민희를 제외하고는 다 나보다 키가 컸다. 그러다 보니 우리 세 사람은 파묻히는 형국이 되었다.
아크는 조용한 곳이었다. 다른 섬에 비해 작고 사람이 살지 않는다. 가끔 누군가가 청소를 하러 올 뿐이다. 신전 같은 건물이 하나 있고, 그 외에는 전부 숲이었다. 신전은 무덤이다. 시신이 안치되는 곳은 아니다. 다만 역사에 이름을 올릴 만한 강한 마법사들의 신체 일부나 유품이 그곳에 묻힌다. 묻힌 자들의 이름은 아크에 영원히 새겨진다. 강대한 자들의 마지막 흔적이 남은, 이 섬은 그런 곳이었다.
그녀의 마법의 일부, 유펠르시아의 기둥, 6번째 마법석은 신전 앞에 세워져 있었다. 이번 마정석은 색이 없이 투명했다.
마정석 주위에는 결계가 둘러져 있었다. 붉은 기둥이 핵이고, 본섬 주위의 섬에 있는 다섯 개의 기둥은 마법을 연결하는 매체이다. 이 모든 것이 400년 이상 지속된 천공의 마녀의 ‘천공마법’이었다.
과연 유펠르시아 사람 중에 그 진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복잡했다.
아크의 마정석은 구경할 수 있는 시간이 특히 짧았다. 우리는 잠시 후 다른 섬으로 내려와 동물원을 구경했다. 동물원은 정글처럼 넓었고, 특이한 동물들이 참 많았다. 날개 달린 말도 있었다. 이건 페가수스라 생각해야 할지, 그냥 마법 생물이나 키메라라고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몇몇 순한 동물을 몇 마리를 데리고 등에 올라타는 체험을 했다. 말이나 새 등등 여러 동물의 등 뒤에 타고 달렸다.
「마스터, 예상보다 마정석 완성이 빨랐습니다. B랭크 마정석 300개 만들기 미션이 완료되었습니다. 현재 총 310개의 마정석이 완성되었습니다.」
‘오, 진짜 생각보다 빨랐네.’
「시퀀스를 종료합니다. 다음에 또 불러 주세요, 마스터.」
‘응.’
나는 동물을 보다 말고 잠시 손을 보았다. B랭크 마정석의 랭크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랭크에 해당하는 마법사 정도의 마력을 지니거나, 그 정도의 마력을 품고 견딜 수 있거나, 혹은 그에 상응할 정도로 빠르게 마력을 생성해 내거나, 아니면 희귀한 마력이거나 하는 등.
나는 잠깐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B랭크 마정석은 완전하진 않지만 결과적으로 B랭크 마법사에 상응하는 힘을 지닌 보석이다. 그걸 주위의 다른 마력도 끌어왔다고 한들, 중간중간 마력을 증폭시켜 늘렸다고 한들, 고작 나흘 만에 300개를 만들어 내다니.
내가 성인과 비등한 마력을 갖췄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내가 기억하기로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이다. 5학년 때보다 6학년 때 더 많이 성장했고, 이성진을 만난 후부터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성장했다. 해를 더할 때마다 성장하는 속도는 계속해서 증폭했다. 5학년 때의 두 배와 6학년 때의 두 배는 같지 않다. 2배가 3배로, 3배가 4배로.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지금 어느 정도의 강함을 지니고 있을까. 전투의 강함을 묻는 게 아니다. 나는 현재 대체 어느 정도의 마력을 갖추고 있는 걸까.
내년이면 이제 16살이다. 12월에는 랭크 시험을 볼 수 있다. 제현 오빠는 첫 랭크 시험 때 B랭크를 차지했다. 은희 언니는 C였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같은 학년 친구들 중에서는 뛰어나게 강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딱히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생각할수록 궁금했다. 잘하면 나도 제현 오빠처럼 처음부터 B랭크가 나올지도 모른다.
‘아니, 전투 실력이 모자라니까 아니려나.’
하여간 마정석 만들기 훈련은 이제 끝났다. 내일 집에 돌아가면 며칠 후에 회사에 건네줘야지. 그래도 다음부턴 이런 의뢰는 거절하는 게 낫겠다. 개인적으로 소소하게 하는 것이니 대량 판매는 할 수 없다고. 공지에도 그렇게 띄워야겠다.
마력이 더 이상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꽤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수학여행 마지막 날 밤을 맞이했다.
“오늘은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서 같은 방을 써도 된다. 특별히 허락해 주지. 옆 반 친구들이랑 같은 방을 써도 상관없어.”
“진짜요?!”
“와아!”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성 친구는 제외였다. 우리는 기뻐하며 뭉쳤다. 나, 인하, 민희, 소영, 이렇게 네 명이서 한방을 차지했다.
물어보니 남자 쪽도 비슷하게 갈라졌다고 한다. 현호, 한수, 인성, 성진, 이렇게 넷이서 방을 쓴단다. 사실 난 두 방으로 갈라지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한수는 성진을 싫어하니까. 1학년 때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다. 뭐, 그건 그 녀석의 자업자득이지.
오늘만은 소등 시간 제한도 없었다. 우리는 민희와 소영이의 주도에 따라 남자 방에 쳐들어갔다. 술을 가지고……. 으응?
“술은 안 돼! 중학생이 무슨 술이야!”
“우리도 내년이면 성인이잖아.”
술 따위를 들고 온 건 민희와 현호였다. 소영이도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결사적으로 말린 것은 나와 한수와……이건 또 의외인데, 성진이었다. 인성이나 인하조차 그러려니 하며 방관하는 가운데 우리 셋은 결사적으로 그것을 말렸다.
“개소리하지 마.”
“술 한 병 가지고 심하네!”
“헛소리하지 말렴, 애기야. 한 병은 무슨 한 병이니.”
나는 민희의 이마에 꿀밤을 날리며 상냥한 말투를 가장하여 타박했다.
“그렇게 마시고 싶으면 고작 1년이니 참아! 이건 압수!”
“으아아악! 그런 게 어딨어!”
“여기 있다. 어른 되면 마시라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으으으……내 계획이……!”
“정 원한다면 무알콜 맥주나 마시렴.”
“응? 그런 것도 있어?”
“몰랐어?”
양손으로 이마를 감싸고 있던 민희가 내 말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이구 쯧쯧쯧. 이런 바보 같으니. 나는 모처럼 민희를 놀렸다. 민희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 나와 성진은 가져온 술 4병을 전부 압수했다. 헐, 많이도 사 왔네.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지, 가지고 있던 간식을 전부 내놓았다. 마력 회복용으로 잔뜩 사 두었던 과자, 초콜릿, 사탕, 커피와 탄산음료, 카스텔라 등의 빵과 케이크 등등. 지난 나흘 동안 주구장창 먹었던 간식들이었다.
“으헉, 뭐가 이렇게 많아?”
“걸어 다니면서 먹고 있었어. 나 말이야, 먹으면 마력이 회복되더라고.”
“응? 마력 회복할 일이 있었어?”
“응. 있었어.”
우리는 간식을 먹으며 지난 수학여행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르델과 만났던 것이나 왕성을 구경했던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나에게 시비를 걸었던 그 친구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건 같이 다녔던 성진이나 인성, 민희도 모른다. 귀찮아질 것 같아서 그냥 말하지 않았다.
왕성 일정은 인하네도 우리와 비슷했다는 것 같다. 아르델이 인하랑 한수를 많이 놀려 먹었다나.
“음?”
대화를 나누던 인하가 문득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아니, 오늘은 반지를 손가락에 꼈네.”
나는 손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인성의 몸이 한순간 들썩였다. 처음에는 약지에 끼고 있었지만, 역시 아직 헐렁해서 중간에 중지로 바꿔 끼웠다. 이 반지에는 보호마법 외의 다른 마법은 걸고 싶지 않았다. 그 크기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다.
내가 손가락에 낀 반지를 바라보던 민희가 무언가 생각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은하는 평소에 반지는 잘 안 꼈지?”
“응, 맞아.”
“그랬던가…?”
“그러고 보니 그랬네.”
기억력이 좋은 사람과 보통인 사람이 갈렸다. 인하와 한수는 바로 긍정했고, 현호는 긴가민가했다. 그걸 바로 대답할 수 있는 너희들이 무섭다…….
“이거 평소에 목에 걸고 다니던 반지 맞지?”
“응.”
그 녀석에게 받은 반지. 몇 년을 사용했던가. 나는 흘끔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관심 없는 얼굴로 반지를 바라보다가, ‘평소에 목에 걸었다’는 대목에서 잠깐 눈빛을 가라앉혔다.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인성이를 흘끔 바라보던 소영이가 물었다.
“뭐야, 뭐야. 목에 걸고 다니는 반지? 그럼 혹시 좋아하는 사람에게 받았다든가?”
이미 해 버린 말이었기에 나는 뜸 들이지 않고 평범하게 긍정했다.
“맞아. 옛날에 좋아하는 사람한테 받았어.”
푸흡…! 콜록, 콜록! 내 말과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다. 성진도 과자를 먹다 말고 약간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민희가 몇 번이나 기침하며 음료수가 담겨 있는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으, 은하 너……그 반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하고 다녔잖아…?!”
“어라. 그 전엔 안 하고 다녔을 거라고 확신해? 나 목걸이 계속 옷깃 안에 집어넣고 다녔는데?”
“으, 으으음…….”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억할 수는 없다. 나는 일부러 반지를 가지고 다녔던 시기를 애매하게 만들었다. 언제 만나서 받았냐고 물으면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환생에 대해서는 말하면 안 돼.’
눈치챌 빌미를 주어서도 안 된다. 그것이 세계의 법칙.
민희가 내 말 한마디에 끙끙대었다. 인하와 한수와 현호는 여전히 충격받은 채 말을 못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은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그렇게 계속 중얼거리기만 했다. 그사이 소영이가 곤란한 얼굴로 인성이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옛날이면 언제?”
“글쎄……오래전이라, 잘…….”
“뭐야, 성진이 쟤랑 똑같이 말하네.”
나는 그 말에 움찔했다.
“하지만 그렇게 옛날이면 첫사랑?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반지를 지금까지 가지고 다닌다는 거야? 나 잠깐 봐도 돼?”
소영이가 내 왼손을 잡아 제 눈앞으로 가져갔다. 반지를 잠깐 보던 소영이의 표정이 문득 굳었다.
“……어라?”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왜 그래?”
“아니, 이거…….”
소영이는 약간 거칠한 감촉이 느껴지는 반지의 표면과, 무늬와, 반지 가운데에 박힌 작은 큐빅을 보더니 표정을 굳혔다.
“……성진이가 가지고 다니던 거랑 디자인이 똑같잖아.”
내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졌다. 한순간 멍해졌던 눈동자가 거센 파도에라도 부딪친 것처럼 흔들렸다. 나는 천천히 이성진을 돌아보았다. 성진이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한숨을 내쉬며 목 안으로 손을 넣었다. 가슴이 두근, 두근, 크게 뛰었다.
‘아니, 하지만, 저 녀석은 내 반지를 보고도 관심을 안 가졌잖아.’
그의 옷깃 사이에서 얇은 은색 목걸이 줄이 빠져나왔다. 그 사이에서 내가 한 것과 똑같은 반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홉떴다. 정말로 나랑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였다.
‘……말도 안 돼.’
나는 주먹을 쥐었다.
‘저 녀석은 나랑 다르잖아.’
저렇게 반지를 가지고 있다면, 전에 내 반지를 보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던 이유는 뭐지? 정말로 ‘그’인가? 정말로 ‘그 녀석’인가?
하지만 이상하다. 분명 그는 환생했고, 다시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반지’를 가지고 있을 수가 있지? 나처럼, 우리가 했던 것처럼 목에 반지를 걸고 다니고 있었다고? 그 녀석은 늙어서 죽었어. 평범하게 죽었어. 환생했어. 나는 불치병으로 죽었지만 끝난 다음은 평범하지 않았다. 여신님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아공간을 받았고 내가 살아생전 가지고 있던 물건은 전부 그곳으로 이동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저 환생했을 뿐인 그 녀석이 저 ‘반지’를 가지고 있을 수가 있지?
“어? 진짜다.”
“정말, 똑같네.”
옆에서 그 반지를 살펴보던 민희와 현호가 긍정했다. 친구들의 시선이 서로 기이하게 마주쳤다. 나는 이성진을 보았고,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반지를 손으로 감싸 쥐다가 대수롭잖다는 듯 툭 내뱉었다.
“흔한 디자인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그, 그런가?”
친구들이 그 말에 반응했다. 정말로? 그런 거라고 생각해?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아파 오는 가슴을 쥐었다.
“그래. 보석이 박혀 있는 은반지, 이런 게 어디 한두 개인 줄 아냐?”
“그, 그렇긴 하지만…….”
소영이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희 둘 상황이 뭔가 비슷하지 않아?”
내 가슴이 울리는 이유를 소영이가 정확하게 찍었다. 가슴이 또 한 번 크게 뛰었다.
“설마, 설마라곤 생각하지만, 음, 설마……아니겠지? 설마 너희들이, 옛날에 좋아했던 사람한테 받았다던, 나눴다던 그 반지……의 주인이 서로라거나……그렇지는…….”
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반지가 끼워진 손을 천천히 감싸 쥐었다. 찰나의 정적이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잠시 후 이성진이 입을 열었다.
“그럴 리는 없어.”
그는 단언했다. 쿵! 이번엔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에 꽉 힘을 줬다. 왜? 민희가 언짢은 표정으로 물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들어 보니까 너도 그 반지 옛날에 만났다던 좋아하는 사람이랑 나눈 거지? 그리고 은하도 마찬가지잖아. 심지어 반지의 모양도 똑같아. 그럼 가능성 있는 거 아냐?”
“아니, 불가능해.”
“그러니까 왜?”
민희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한수와 인하도 인상을 찡그리며 성진을 돌아보았다.
그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가, 표정을 가라앉힌 후, 이내 포기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죽었으니까.”
“……!”
가슴이 또 한 번, 크게 뛰었다. 뭐……? 친구들이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처음 들어……. 목소리가 마구 섞이며 머리를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불가능해.”
“그게 무슨……. 너 좋아하는 사람을 찾고 있다며. 근데, 갑자기, 죽었다니…….”
“내가 찾고 있는 건, 정확히는 그녀가 아냐. 그녀의 ‘영혼’이다.”
나는 창백한 표정으로 주먹을 쥔 손에 점점 힘을 더했다. 아……아아…….
“그녀는 불치병으로 죽었어. 반지는 그 전에 나눈 게 맞아. 탄생석인 자수정 반지를 만들고 싶다고 했지. 제일 좋아하는 보석이랬어. 하지만 불치병으로 죽었어…….”
“불치병…….”
“세포가 점점 파괴되어 종내에는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게 되었어. 그리고, 죽었어. 그러니까 내가 찾고 있는 건 그녀의 영혼이야. 영혼을 볼 수 있게 된 후부터 찾아 헤매고 있지. 영혼이 있다면 환생도 있을 수 있으니까. 다시 태어난 그녀를……찾고 있어.”
“뭐야, 그게……. 그거 이상하잖아. 죽은 사람을 찾다니. 그건, 이미……집착이잖아! 그런 거,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 말, 방금 한 말, 영혼을 볼 수 있게 되기 전에 죽었다는 소리 아냐? 근데 어떻게 알아봐!”
“알아볼 수 있어.”
“뭐?”
“죽기 전에 마법을 걸었거든.”
“그게, 뭐?”
“마법, 정확히는 약속이야. 하지만 확실하게 이루어진 마법이지. 언령이고, 영혼의 맹세고, 마법이야.”
“약속……?”
“‘피의 맹약’을 맺었어.”
쿵! 빠르게 쏟아지는 이야기 속에 나는 밀랍 인형처럼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가슴이 뛰고, 빨라지고, 흥분한 건지 아니면 제정신이 아닌 건지, 눈앞이 붉어지거나, 환해지거나, 흐려지거나, 그런 혼란이 반복되었다.
“서로의 피를 통해 맹약을 맺었어. 피는 그 무엇보다 강한 인연을 지닌 마법이야. 영혼이 섞였을 거야. 그건 이루어졌어. 나는 그때엔 이미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머릿속에 같은 단어만이 반복해서 맴돌았다. ‘불치병’, ‘피의 맹약’, ‘죽음’…….
“그러니까 다시 만났을 때 내가 못 알아볼 리가 없어.”
나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생각이 제대로 이어지지가 않았다. 주위의 분위기는 엉망진창이었다. 멀쩡한 건 이성진 혼자뿐이었다.
“너 미친 거 아냐?!”
“그럴지도.”
민희는 소리쳤고, 그의 절친한 친구인 두 명은 혼이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소영이 불현듯 입을 막으며 눈물을 흘렸다.
“뭐야, 그게. 그런 거였으면……그건 너무 힘들고……가, 가엾잖아…….”
다른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불쌍하다며 동정하는 눈으로 이성진을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죽은 사람을…….”
“됐어, 네 허황된 집착 같은 거 알 게 뭐야. 찾고 싶으면 맘대로 찾으라지. 그래서 은하야, 넌 어떻게 된 거야?”
“응……?”
민희가 쓰린 눈으로 이성진을 보다가 이내 딱 끊어 버렸다. 이성진의 마음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해할 수 없고 혼란스럽기에 일단 끊어 버린 거다. 민희가 자신의 동요를 애써 진정시키며 나를 돌아보았다. 민희의 말에 나는 약간이나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민희가 쯧쯧 혀를 찼다.
“이거 봐라. 네 이야기가 너무 이상해서 은하도 정신이 나갔잖아.”
“내가 제정신이 아니란 건 인정해.”
이성진은 미친 사람을 대하는 듯한 친구들의 태도에도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그런데 나한텐 그거밖에 없거든.”
“……네가 아무 여자랑 사귀는 것만 아니면 그 순애보를 인정해 줄 수 있다만.”
“그러냐.”
“그런데 그런 놈이라도 친구가 되어 버렸으니까 피하지도 못하겠고. 너 그것만 빼면 대충 정상처럼 보이니까.”
“이게 없었으면 벌써 미쳤을 거야.”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흐려졌던 초점이 명확해지고, 성진과 민희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그와 동시에 가슴의 고동이 극심해졌다. 쿵, 쿵, 쿵! 심장 소리가 점점 커졌다. 나는 심장에 손을 올렸다.
“은하야, 너 그 좋아하는 사람이란 거 어떻게 된 거야? 무지 오래전이지? 지금도 좋아하는 거 아니지?”
“어? 어, 잊을 수 없달까……찾고 싶어. 찾고…….”
가슴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찾았다.」
눈에서 눈물이 글썽글썽하게 맺혔다. 이미 옆에서 소영이가 울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은 그런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소영이는 엉엉 울며 인성이와 현호에게 위로를 받고 있었다. 민희가 눈물을 글썽거리는 나를 보며 당황했다.
“어, 으……야! 너 때문에 은하 감수성이 야단났잖아!”
“은하야, 괜찮아?”
“너 괜찮냐?”
눈앞으로 친구들이 다가왔다. 인하와 한수, 바로 앞에서 나를 끌어안은 민희. 그러나 내 눈에는 오롯이 이성진의 모습만이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 수려한 외모. 그 위에 낯익은 형상이 겹쳤다. 아……아아!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래, 나는 처음부터 틀리지 않았다. 틀리지 않았어…….
이성진이 ‘그 녀석’이었다.
피의 맹약은 이루어졌다.
처음부터 나는 그를 알아보았고, 그리고 그에게 다시 한번 반했다. 그렇게 인연이 이어졌다.
“──….”
입을 열었다. 비로소,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반지에 대해? 여신님을 만나서 아공간을 얻게 되었다고? 전생의 내 이름과 그의 이름을 말하면 믿을까? 믿을 것이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내가 입을 열어 우리밖에 알 수 없는 것을 말한다면.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다. 그도 환생을 알고 있으니까.
“───….”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그저 입 안을 맴돌 뿐이었다. 터질 듯이 소리쳐도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입만 뻐끔뻐끔 움직이며 공기를 때렸다. 공기를 삼켰다. 그걸 몇 번이나 반복했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윽……!’
그와 동시에 극심한 통증이 가슴을 덮쳤다. 나는 민희한테 꽉 끌어안긴 채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친구들의 옆이라서 말할 수 없는 건가? ‘환생’에 대한 금기 때문에?
──아니,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입을 뻐끔거리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14년 전, 혹은 15년 전.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는 다시 만나기 위해 피의 맹약을 맺었다. 서로의 피로써 키스하고, 자신과 서로에게 제약을 걸었다. 맹세를 했다.
‘죽어서도, 환생해서도, 네가 나를 기억하기를. 네가 나를 알아보기를, 네가 다시 나를 사랑하기를. 네가 다시 나를 만나기를. 내가 다시 너를 만나기를. 그리고 사랑하기를.’
‘미래를 맹약합니다. 죽어서, 그대가 환생해도, 그대가 나를 만나길, 내가 그대를 다시 사랑하기를, 내가 그대를 알아보길, 그대가 나를 기억하길, 그대가 나를 사랑하길.’
나는 그 순간, 바랐다.
환생한 나는 이미 「───」가 아니다. 너도 물론 「───」가 아니리라.
네가 나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나라는 것을 눈치채 주길 바랐다.
그래. 환생한 나는 이미 달라져 있을 거야. 네가 아는 내가 아닐 거야. 그러니까 알아보지 못해도 다시 나를 사랑해 줘. 나는 죽었고, 너도 죽었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자.
눈물이 맺히고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때 내가 바랐던 것은 간단히 이루어질 수 없었을 이 맹약의 ‘대가’이자, ‘주박’이자, ‘제약’이 되었다.
“…….”
나는 말을 멈췄다. 그럼, 여태까지 성진에게 여러 말을 할 수 없었던 건, 환생에 대한 제약만은 아니었다는 건가?
모든 것은 내가 자초했다는 건가? 그래, 나는 그때 내가 분명 후회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어리석은 선택이고, 선택의 기로더라도, 그것을 선택했다. 책임지는 것은 나다. 오롯이 나다.
‘한심해.’
나는 민희를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음, 울다 보니 좀 부끄러워져서. 아, 그, 나도 영혼을 봐서 하는 이야긴데, 찾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사람. 집착 같은 거 다 제쳐 두고 그렇게 좋아하는 건 대단하다고 생각해.”
“하……웬일이냐? 그냥 미쳤다고 말해도 되는데?”
“나도 너처럼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해도 찾고 싶을 것 같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