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70
“오빠, 랭크 올랐다며? 축하해!”
그 말에 우리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축하 인사를 날렸다.
“아, 맞다. 제현 오빠, 진짜 축하드려요! 이거 엄청 대단한 일이잖아요.”
“역시 제현 형!”
“정말로 축하해!”
“고맙다.”
웃으며 대답하는 제현 오빠의 옆으로 민 선생님이 끼어들었다.
“그럼, 굉장하고말고. 이 나이에 이 정도면……어쩌면 S랭크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라.”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와, 진짜요?”
다른 사람들도 놀란 얼굴이었다. 제현 오빠가 드물게도 쑥스러워했다.
“그래. S랭크, 혹은 A랭크까지 올라갈 사람은 미리 싹이 보여. 원래 마법사는 성장기에 급격하게 성장한 뒤, 그 후부턴 속도가 느려지거든. 스무 살을 넘기 전에는 가파른 절벽이었다면 그다음부터는 능선처럼. B랭크는 벽이야. 그 벽을 넘을 만한 사람들은 미리 낌새를 보여. 정말로 재능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성장이 멈출 시기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하지.”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흘끔 성진을 보았다. 낌새, 낌새라고 하면 우리 곁에는 이만한 놈이 없다. 어쩌면…….
“그보다 아까 왔었지? 미안하다. 사람이 좀 많아서…….”
“괜찮아요.”
“맞아. 괜찮아, 괜찮아.”
제현 오빠의 사과에 나는 성진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손을 내저었다. 제현 오빠가 이번에는 유정 언니와 인호 오빠를 돌아보았다.
“너희들도 이번에 C랭크가 됐다며? 여태까지 실력을 적당히 잘 숨기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너희 학년도 시끄러워지겠네. 축하한다.”
“킥킥, 정말.”
민 선생님이 동의했다. 유정 언니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우씨.”
“감사합니다.”
인호 오빠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인호 오빠는 어째 시간이 흐를수록 예의가 발라지는 것 같다. 너무 얌전해서 저러다가 어느 순간 중2병에 걸릴까 봐 걱정될 정도……는 너무 비약적인 생각인가?
제현 오빠가 우리를 보며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축하연에 갈 거야. 뷔페에서 한대. 혹시 너희도 갈래?”
“네? 아뇨. 저흰 시험도 안 치렀고, 그건 좀 죄송…….”
“꼬맹아, 넌 축하해 주는 역할이란다. 민이랑 민아랑 요 후배들 기운 띄워 주기 위해서라도 따라와라.”
“엑.”
손을 내저으며 거절하려고 한 순간 백한 선생님이 내 몸을 띄우며 제현 오빠 앞에다 내려 주었다. 성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중얼거렸다.
“……걔 치마 입고 있는데.”
“아.”
“멍청아!”
스승님이 백한 선생님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나는 당황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속바지 입었으니까 세이프?”
“넌 당사자니까 좀 부끄러워해라. 그리고 고개 돌렸어. 안 봤어.”
“흠, 너 의외로 그런 데에선 배려심이 있구나.”
말을 듣던 몇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민희가 분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나와 백한 선생님의 몸을 흔들었다. 유정 언니나 한수, 인하도 그를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런, 졸지에 백한 선생님이 신변이 위험해졌다.
“가자!”
한동안 떠들썩하게 소란을 피우던 우리는 카페에 민폐를 끼치기 전에 밖으로 나갔다. 나는 제현 오빠에게 축하의 말을 몇 마디 더 하다가 성진을 돌아보았다. 초연하게 혼자 걷고 있는 뒷모습이 괜시리 외로워 보여서, 나는 민희와 제현 오빠가 대화를 하는 틈에 그를 향해 달려갔다. 나는 성진과 나란히 서서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렇게 원한다면야, 책 사면 사인해 줄게.”
“제목부터 말해. 제목이랑 장르.”
나는 키득키득 소리 내어 웃었다.
친구들과 티격태격하며 뷔페로 향했다. 뷔페에는 학생들을 제외하고 랭크 시험을 친 조직원 대부분이 온다는 듯했다. 이 연회의 주인공에 가까운 제현 오빠의 옆자리는 그의 친한 선배들이나 친구들로 채워졌다. 우리는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따로 앉기로 했다.
“이거 선물이에요. 아직 시험작인데 여태까지 만든 것 중에 제일 잘 만든 거니까 드릴게요.”
나는 친구들과 자리에 앉기 전에 제현 오빠에게 정식으로 축하 선물을 주었다. 내 선물은 바로 파란색 수정이 달린 펜던트 목걸이였다.
“이게 뭔데?”
“결계 아이템이에요. 수호 막 아이템이라고 생각해도 되고요. 마력을 집어넣으면 그 마력을 모태로 방어 결계를 쳐요. 아이템을 연속으로 두 번 톡톡 누르면 설정을 정할 수 있거든요? 평면이랑 입체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어요. 평면은 한 방향만 막는 방패형이고, 입체는 몸 주위를 전부 감싸는 형식이에요. 도형을 선택할 수 있어요. 삼각, 사각, 오각, 육각, 원. 자유 형상도 있어요. 자유 형상을 누르면 마력을 넣을 때 원하는 모양대로 결계를 발동할 수 있어요. 머리로 상상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요.”
나는 샘플로 만든 설명서도 건넸다.
“실험해 봤는데 C랭크 하위 공격 정도는 막아 낼 수 있더라고요. 사용자의 마력에 따라 더 강한 결계도 칠 수 있어요. A랭크인 오빠한테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지만요.”
속사포로 이어지는 설명에 제현 오빠는 얼이 빠진 채 내가 준 목걸이를 받았다. 목걸이 형태는 매우 심플했다. 검은 줄에 장식이 하나 걸려 있을 뿐이었다. 스승님이 흐뭇한 얼굴로 나를 칭찬했다.
“호오, 제법 정진하고 있구나.”
“열심히 하고 있다고요!”
그리고 싫어도 열심히 하게 된다. 옆에 앉은 누구누구 씨가 계속 나를 찔러 대서 말이다. 하여간 은근히 챙겨 준다니까.
“목걸이 내 취향이다. 심플한 데다 장식이 은근히 예뻐……. 으악! 각도 바꿀 때마다 색이 변하잖아? 진짜 예쁘다……. 제현이 너 좋겠다! 이런 것도 받고…….”
은희 언니가 탐난다는 얼굴로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잠시 얼떨떨해하던 제현 오빠가 이내 웃었다.
“그래, 고맙다. 잘 쓸게. 은하가 랭크 시험 치는 날에는 나도 뭔가 선물을 줘야겠는걸?”
“아하하하. 그럼 전 이만 친구들한테 갈게요.”
“그래. 맛있게 먹어.”
돌아간 나는 유정 언니와 인호 오빠에게도 같은 선물을 챙겨 줬다. 모양은 조금 달랐다. 유정 언니 것은 눈꽃 모양이었고, 인호 오빠 것은 둥글었다. 유정 언니와 인호 오빠는 굉장히 기뻐했다.
그 이후에는 떠들고 먹었다. 나는 홀을 돌며 음식 순례를 했다. 가까운 곳부터 돌며 먹음직스런 음식을 한 접시 위에 담을 수 있을 만큼 담았다. 식탁에 가 떠들며 먹었다. 뷔페에 축하 파티라는 느낌으로 와인을 조금 마셨다. 종류는 모르겠지만 무척 맛있었다.
“이 와인 맛있다…!”
“와인은 마셔도 되는 거야? 와!”
“은하야, 너희는 아직 어리니까 와인도…….”
“인호 오빠도 참, 당연히 한 잔씩만이야.”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금방금방 먹었고, 먹고 맛있다고 생각한 음식을 금방금방 리필해 왔다. 온 이상 뽕을 뽑으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무척 맛있었다. 고기, 생선, 샐러드, 면류, 어패류, 죽, 음료와 커피, 모두 맛있었다.
“여기 케이크 엄청 맛있다!”
친구들이나 언니 오빠가 다섯 접시 정도 만에 디저트를 가져오며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음식을 흡입하듯 리필했다. 으, 진짜 맛있다~! 친구들은 따로따로 내키는 대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까 그 아이템은 언제 낼 거야?”
“좀 더 보완한 다음에 내려고.”
“내 생각엔 그거 액세서리용이나 실험용으로 쓰일 것 같아. 막는 것보다 결계 모양에 더 신경을 썼잖아?”
“액세서리 아이템인걸. 아직 세게 나갈 생각은 없어. 결계는 시리즈를 늘릴 거야.”
“흐음……. 근데 그 설명서 네가 쓴 거야?”
“응. 레이아웃은 문이가 해 줬어. 간결하고 알기 쉽고 재미있게 쓰는 것에 목표를 뒀지.”
친구들이 떠드는 사이 나와 성진은 왠지 모르게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장식용으로 만든 거라면……색에도 신경을 써 보지?”
“글쎄. 일단 반투명한 색으로 통일할 생각이었는데.”
“모양이 있으니 색에 신경 쓰는 사람도 많을걸?”
“그러네. 그것도 넣어 볼래.”
나는 차분하고 꾸준하게 만드는 아이템을 늘리고 있고, 성진은 수업 시간이나 동아리 시간에 만든 검을 하나둘씩 팔고 있다. 학생인 만큼 처음에는 평균 검 가격보다 낮게 팔고 있었는데 지금은 이름이 뜨기 시작해 가격을 높였다. 시간석도 짬짬이 팔고 있는 모양이니까.
물건을 바로 만들고 마법 부여를 할 수 있는 우리에 비해 그와 관련된 마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인성이는 아직 기계를 개발할 정도의 실력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에 재능이 있었다. 그가 내는 물건은 오르골과 춤추는 태엽 목각 인형에 그쳤다. 생각보다 참 손재주가 섬세한 친구다.
“내년에는 마법 검을 몇 개 내 보려고. 마정석은 너한테 부탁할래.”
“그럼 자세한 설정을 적어 와. 그리고 돈.”
“알았다, 임마.”
“말해 두지만 추가 비용 있어. 난 맞춤 의뢰는 안 받는다고. 너야 친구니까 받는 거고.”
“알았다고.”
우리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을 옆에서 바라보고 있던 소영이가 말했다.
“너희들……요즘 엄청 친해진 것 같다? 예전보다 거리낌이 없어졌다고나 할까?”
나는 잠시 포크를 찍던 손을 멈칫했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되물었다.
“뭐가?”
“아니, 조금 표현하기 힘든데, 갑자기 뭔가 확 가까워지지 않았어?”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계기는 있었지만, 결국 우리는 빠르게 친해지고 있었다. 소영이가 예전에 했던 말이 맞다. 성진은, 본능적인 이끌림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마음을 열었다. 나는 ‘그 녀석’에 대한 불안감에 벽을 세우고 있었다. 상대가 나와 잘 맞는다는 것을 알면서,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저 나는 확신한 후 벽을 허물었다. 어색하게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웃으며 말을 걸게 되었다.
전생의 내 제멋대로인 욕심 때문에 일그러진 관계가 무서웠지만, 그 이상으로 ‘이성진’이 내게 소중해졌다. 아무 말도 못 하지만 적어도 그가 나를 눈치챌 때까지 나는 그의 곁에 있을 생각이다.
내 이 마음이 변하지 않는 한.
역시 나는 변한 게 맞다. 죽어서 새 삶을 살고 있는 게 맞다. 이성진도, ‘이성진’이다. ‘그 녀석’이 변해서 ‘이성진’이 되었다.
성진이라는 이름을 갖고 새롭게 내 앞에 나타난 이 녀석에게 내가 가지게 된 감정은 예전의 ‘그 녀석’에게 보내는 감정과는 사뭇 다르다. 사랑하고 있다. 그 이상으로 친한 친구다.
나는 한 사람에게 보내는 감정을 단순히 하나의 감정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친구들에게 보내는 감정 역시 ‘우정’이라 포괄할 수는 있지만 단순히 ‘우정’뿐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동경할 수도 있고, 부러울 수도, 질투할 수도 있다. 그렇듯 한 사람에게 보내는 감정에는 많은 감정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성진에게 보내는 감정은 우정과 연애 감정을 동반한 사랑, 둘 다 포함하고 있다. 적어도 전과는 많이 다르다.
일단은 그걸 안 것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나는 그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많았다. 그가 ‘그 녀석’이라는 사실만 알았을 뿐, 그가 어째서 이토록 변했는지는 모른다. 내가 죽고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었을까. 그것을 하나씩 알아 갈수록 감정의 방향도 달라질 것이다.
“그래? 확실히 요즘 좀 더 친해진 것 같기는 해.”
내 말을 듣고 인하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난 싫지만, 은하는 결국 저 녀석이 맘에 들었단 말이지?”
“그야 친구가 됐으니까. 민희도 저번에 그렇게 말했잖아.”
“그러고 보니 진짜 어쩌다 그렇게 됐지? 작년까지만 해도 분명 불신밖에 없었는데.”
정말이다. 나도 그렇지만 다른 친구들도 어느새 이성진에게 홀려 있었다. 그래, 말 그대로 홀렸다.
“뭐, 친구가 생긴 건 좋은 거지. 이제 저번처럼 싸우지나 마. 우리가 은하가 괴롭힘당했단 소문 듣고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유정 언니의 말에 우리는 그런 때도 있었지 하며 웃고는 한동안 당사자가 보는 앞에서 그의 뒷담을 깠다.
그것은 성진이 한숨을 내쉬고, 그 한숨 소리에 맞춰 우리가 웃음을 터트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방학에 맞춰 책이 출간되었다. 내 주위에서 그 책을 산 건 의외로 성진이 녀석만은 아니었다. 책을 많이 읽을 뿐 소장은 잘 하지 않는 한수도,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닌 인하도, 또 스승님과 준휘 선생님도 샀다.
가장 의외였던 점은 스승님이 책을 샀는데 준휘 선생님도 일부러 내 책을 샀다는 점이다. 전에 스승님이 나 때문에 준휘 선생님이 판타지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증상이 잠깐에 그치지 않고 점점 깊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실제로 저번에 준휘 선생님 집에 찾아갔을 때 나는 작긴 하지만 장르 소설만 모아 둔 책장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또 한 명, 의외인 사람이 있었다. 출간으로부터 며칠 후, 성진이와 인성이가 함께 찾아왔다. 둘 다 책을 한 권씩 들고 있었다.
“약속, 사인해 주기로 했지?”
“응, 좋아. 근데 인성이 너도 책 산 거야?”
“몰랐냐? 얘도 네 책 사 모으고 있는데.”
몰랐다.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그를 보았다. 그는 뭔가 착잡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나 원래부터 네가 시나리오 쓰던 게임 했었잖아. 그래서 소설도 재밌겠다 싶어 샀었거든. 그런데 진짜로 재미있어서…….”
“그렇구나. 처음 알았어.”
“어휴…….”
성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성이 몸을 떨었다.
그가 한숨을 쉰 이유를 약간 알 것 같다.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가야 할 놈이 이 모양이라니…….’겠지? 성진은 인성을 응원하는 입장이니까. 그런 생각이 들자 가슴이 약간 아릿했다. 나로서는 인성이의 저런 면이 고맙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다. 차라리 빨리 고백해 주면 뻥 차 버릴 수 있는데. 이건 너무한가.
하지만 그 정도로 적극적인 사람이었다면 고백해도 마음이 변하지 않는 한 포기하지 않을 게 뻔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내가 뭐라 나설 수도 없다. 그러나 나서 주지 않으니, 우리를 둘러싼 관계가 부서지지도 않는다. 그 점이 고맙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알았다, 알았어. 사인, 해 주마. 간지 펴.”
“응? 간지?”
“책 펴면 나오는 아무것도 없는 종이.”
“아하.”
인성이 성진의 설명을 듣고서야 책을 펼쳤다. 나는 초록색과 파란색 그러데이션 펜을 꺼냈다. 먼저 약속을 했던 성진의 책부터 사인을 했다. 잎이 몇 개 난 새싹을 그리고 그 옆에 초아라는 이름을 썼다.
“팬 문구도 써 줘.”
“알았어.”
『항상 감사드립니다>▽<』 이모티콘까지 넣어 줬다. 이제 만족이지?
“풉.”
이놈이?
나는 무시하며 인성이의 책에도 사인을 했다.
“그런데 너희 같은 집에서 사니까 책을 두 권이나 살 필요는 없지 않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어라, 인성이 너도 애호가 계열이었어?”
“나는 게임 쪽.”
“아, 과연.”
평범한 사람이라면 ‘가족이 책을 가지고 있으니 나도 그 책을 읽어야지.’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지만 애호가라 책을 소장하는 버릇이 있다면 가족이 책을 가지고 있건 말건 사게 된다. 이놈들은 그런 부류였다.
“너는 써 주길 바라는 문구 있어?”
“그, 그럼 내 이름 써 줘.”
“오키.”
『최인성 님께. 책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그러자 성진이 불만을 표했다.
“이건 차별이잖아.”
“너한테도 차별해 줬잖아. 이모티콘으로.”
풉. 이번엔 내가 비웃어 줬다. 정체 밝히기 전부터 꼬박꼬박 읽고 추천 남겨 줬던 독자한테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알았다, 네잎클로버 하나 더 그려 주면 되지? 너 그림 실력은? 보통은 되지만 선이 더러워. 관둬라, 관둬.
그사이 인성이는 기뻐하며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수한 팬심이라면 사심 없이 기뻐할 수 있을 텐데. 나는 무의식적으로 목걸이를 쥐었다.
“너 습관이냐?”
“뭐가?”
웬일인지 성진이 인성이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목걸이 쥐는 거.”
“아, 이거?”
과연, 이것 때문인가.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이 한 번 싸구려라며 무시했던 이 반지가 결국 이성진이 누구인지를 이끌어 내 주었다. 참 웃긴다니까. 아니, 하지만, 예전에도 그 녀석은 이 반지를 싸구려라고 불렀었지.
결과적으로 최인성은 이미 차인 게 되는 걸까? 하지만 옛날 일이라고 말했으니, 그저 옛날 일이라고 치부하고 대시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나와 같은 입장인 성진만 아니었다면 그는 간단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성이가 말하더라고. 네가 항상 목깃을 쥐던데, 그게 그 반지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너한테 동질감을 느꼈어. 너도 그 상대를 계속 좋아하는 거지?”
“……응.”
“궁금해서 그런데 좀 질문해도 돼?”
나는 흘끗 인성을 보았다. 그는 생각보다 동요가 없었다. 어쩌면 미리 상의를 하고, 인성이가 말을 못 꺼내겠다 싶어서 성진이 말을 꺼낸 걸지도.
“음……어떤 거 말이야?”
“그 반지를 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감정을 안고 있는지.”
참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나는 목 안에서 반지를 빼며 반지를 손가락 끝에 끼워 빙글빙글 돌렸다.
“진짜 예전 일이라 잘 기억 안 나. 장난스러운 성격이었어. 상냥했지? 나랑 닮은 점이라곤 없었어. 그쪽은 약골인데도 분위기 메이커, 나는 소심하고 조용한 여자애.”
“그때 받은 반지치고는 크네.”
“응. 커 가면서 맞으면 좋겠어.”
“…….”
인성이 뭐라 말을 하려다 말고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한 척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성진이 잠시 인성을 바라보다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 후로 만난 적은 없고?”
나는 그 말에 성진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있어.”
만났다. 내 예견대로, 운명대로, 우리는 다시 만나고야 말았다. 이어진 내 말에 그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만났다고?”
“그래. 알고 보니 1년 전에 이미 만났더라고.”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만났을 뿐이야. 그는 나를 못 알아보더라고. 그뿐이지.”
아……. 인성이 제 입장도 잊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성진은 약간 안심한 기색이었다.
“그럼 너한텐 그건 그냥 추억이었던 거군.”
“누가 그렇대?”
“아니야? 하지만 전혀 이루려는 기색이 안 보이잖아.”
나는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이보셔, 성진 씨. 사랑은 하는 사람마다 다른 거야.”
그의 이런 점은 바뀌지 않았구나 싶었다. 그는 자신이 집착하는 만큼 상대도 자신에게 집착해 주기를 바랐었다. 나는……그런 사랑은 못 한다. 언제나 포기하고 또 포기해 온 나는.
“나는, 얼굴을 볼 수 있으면 그걸로 좋아. 그 상대는 지금 여친도 있고.”
말할 수 없다는 게 나의 가장 큰 죄악이다. 이곳에서 다시 태어나서 줄곧 나를 찾고 있을 너에게 뭐라 말을 해 주고 싶은데, 동시에 화도 난다. 나를 찾고 싶다면 왜 대체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는 거지? 어째서 바람을 피우는 것처럼 아무 여자와 사귀는 거지?
손을 대는 것은 아니다. 사귀면서도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하거나 포옹을 하는 등 애인다운 행위를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여자 친구보다도 친구가 우선이다. 여자 친구가 그저 소모품인 것 같다.
그가 ‘그 녀석’이라는 것은 받아들였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위화감이 든다. 그랬던 녀석이 왜 이렇게 되었지? 내가 죽은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내가 죽은 후 어떤 삶을 살았고, 이곳에 태어나서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그래도 짜증 나는 건 짜증 나는 건데, 난 말조차 못 하고.’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잠시 후 성진이 제 이마를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랑은 제일 안 맞는 타입이네…….”
“어, 그래…?”
인성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성진을 보면서도 얼이 빠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기쁜지 안타까운지 감을 못 잡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성진에게 물었다.
“그럼 나도 하나 물어도 되지?”
“어, 그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정체를 처음 알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너는? 그 반지, 옛날에 좋아하는 사람한테서 받았다며. 네 반지는 왜 그렇게 커? 암만 봐도 네 손가락에 안 맞는 거 같은데. 차라리 작았다면 이해가 갈 것 같은데…….”
사실 가장 궁금한 건, 어떻게 그가 지금까지 반지를 가지고 있냐는 것이었다. 설마 그도 여신님을 만났나? 아니, 그럴 리가. 그가 여신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환생을 거친 지금까지 반지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
“아아, 틀려.”
내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반지는 내가 상대에게 줬어.”
……아, 그렇긴 했다. 그래, 네가 사서 나한테 줬었지. 나는 뜻밖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녀와 나눴던 반지는 부서졌어. 너무 오래되어서.”
“……!”
이번에야말로 깜짝 놀랐다. 나는 멍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부서졌었구나…….’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새로 만들었어. 언젠가 만나면 다시 주려고. 이건 컸을 때의 크기에 맞춘 거야. 옛날에 준 반지는 너무 싸구려여서……백금이랑 그녀의 탄생석이었던 자수정을 써서 만들었어. 탄생석인 것도 있지만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보석이었거든.”
“그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