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72
“애가 어른인 척하는 것 같아. 그런 옷은 좀 더 크면 입으렴.”
“그런가……. 근데 나 이런 스타일 좋아하는데.”
나는 워커를 벗은 후 신발을 들고 들어왔다. 자주 신을 신발이 아니니 깨끗하게 닦은 뒤에 장롱 안에 넣어 놔야겠다.
“그럼 넌 저녁 안 먹을 거지?”
“응. 먹고 왔어.”
나는 주방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 라라를 향해 한 번 미소 지으며 내 방으로 올라갔다.
캄캄한 방 안에 들어가 불을 켜고 신발을 화장대 근처에 내려놓았다. 터벅터벅 걸어가 침대 위에 누웠다. 풀썩, 침대가 아래로 내려갔다 다시 올라왔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성진이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 얼굴이 떠오르지 않거나, 피의 맹약의 내용을 잊어버렸거나, 기억이 그렇게 마모되었다는 건…….
‘아니, 시간이 지나면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지.’
나는 서른 살에 죽었고, 그는 못해도 70살까지는 살지 않았을까. 내가 죽은 이후로 그가 나를 떠올릴 수 있는 수단은 사진이나 비디오 같은 것밖에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과 감정은 희미해진다. 그는 지금까지 나를 붙들고 있지만……죽은 다음에는 사진이나 비디오를 구할 방법도 없었을 테고,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엄청 머리가 좋은 녀석도 아니었고. …아니, 하지만.’
하지만 뉘앙스에 뭔가 좀 더……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내 착각일까? 나는 생각을 이으며 옆으로 몸을 돌렸다.
아니, 착각이 아닌 것 같다. 그야 얼굴 정도는 잊어버릴 수 있다. 물론 잊어버릴 수 있지만……감정은 아니지 않은가. 감정마저 다 잊는다면 그건 나를 놓았을 때다. 지금까지 그 정도로 나를 붙잡고 있으면서, 잊어버렸다고?
잘 생각해 보면 그의 말은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피의 맹약을 맺었을 때의 감각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피의 맹약의 내용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 감정이 전부 바래 버렸다고?
기억과 감정은 함께 따라가는 것이다. 기억 상실증에라도 걸리지 않는 한 그것은 사람의 일생 속에서 항상 남아 있다. 추억으로 그때의 감각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이 기억과 완전히 같지는 않더라도, 그 추억에서 나온 감정이 가슴을 사로잡고 애틋하게 만들면 그것이 진실이 된다.
‘피의 맹약이 어떤 내용인지 잊었다면……설마 내가 기억이 있을 거란 사실도 잊어버린 건가? 기억하나? 아닌가?’
나는 복잡한 기분에 몸을 다시 뒤척였다.
14년이 지나 다시 만난 그 녀석은 대단한 마법사가 되어 있었다. 무척이나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래 중에서는 견줄 자가 없을 정도다. B랭크는 확정일 거라고 본다. 우리의 재능은 결코 제현 오빠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
그는 그 말을 하며 차갑고 외로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친구가 된 지금은 가끔 다정한 표정을 보여 주지만 그의 눈동자는 언제나 쓸쓸한 감정을 담고 있다.
인간의 일생이 길고 기억이 짧다지만 그 감정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나는 내 첫 삶을 기억하고 있었다. 세어 보니 40년도 전에 만났던 여신님의 얼굴도 선명하게는 아니지만 기억하고 있다.
그때 갑자기 이 말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아직 영혼을 볼 수 없었어. 그녀의 영혼을 확인하지 못했고, 그녀는 죽었지. 시간이 흘러서야 영혼이 보이게 됐고, 그때 그녀의 영혼을 찾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어.’
……영혼을 찾았다면, 그건 언제? 다른 세계에서 본 적도 없는 영혼을 찾는데, 내가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하지? 피의 맹약을 믿고 있기 때문에? 피의 맹약에 대한 자세한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다면서?
아니, 애초에……그는 피의 맹약을 언제 확신했을까. 피의 맹약이 성취되었을 때는, 아닐 것이다. 죽기 직전에 한 맹약을 나는 믿었지만, 여신님의 이름을 걸고 있는 나이기에 믿을 수 있었다. 그 비현실적인 주술을, 그는 언제부터 믿게 되었을까.
죽었을 때? 다시 태어나서 마법을 배웠을 때? 아니면…….
그에게는 무언가가 있었다.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정말로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이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넌……대체…….’
나는 옆에 있던 이불을 꽉 끌어안았다. 그러다가 잠이 든 것 같았다.
의식을 자각하자 나는 주황색 문 앞에 서 있었다. 호박색의 문에는 청보라색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내가 이곳으로 온 것은 의식적일까, 무의식적일까.
‘미안.’
나는 속으로 그에게 사과를 했다.
‘비겁한 짓을 좀 할게.’
나는 굳게 다짐하고 전생의 나를 떠올렸다. 손을 보자, 몸이 약간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손가락이 조금 통통해졌고, 키도 조금 더 컸다. 나는 눈빛을 가라앉히며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두드렸다.
“나야. 들어갈게.”
성대가 떨리며 낯선 듯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슬이 차르륵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금속 문고리를 돌렸다. 나는 빛이 새어 나오는 꿈속으로 들어섰다.
“노을색…….”
이윽고 처음으로 마주한 그의 꿈속 세계를 둘러보며 나는 경악일지 탄성일지 모르는 신음 소리를 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석양이었다. 푸른 들판 너머, 저 바다를 향해 모든 빛이 모이고 있다. 바다 수평선 너머로 서서히 내려가는 태양, 그곳을 중심으로 길게 늘어진 구름, 모든 것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또한 이 세계는 시간대만 제외하고는 나의 세계와 참으로 많이 닮아 있었다. 이 들판도, 저기에 보이는 바다의 배치도.
“예쁘다…….”
한동안 넋을 잃고 노을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색과 배치, 귓가에 들리는 바람 소리마저 취향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꿈을 향해 속삭였다.
“어디 있어?”
순식간에 주위 광경이 바뀌었다. 내 몸이 그가 꾸는 꿈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위가 새까매졌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은하수가 보였다. 검은 밤하늘을 수놓는 반짝이는 보석들이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기억에 있는 장소였다. 익숙한 산이었다. 전생에 내가 살던 곳 주변에 은하수가 잘 보이는 산으로 손꼽히는 장소였다. 나는 수풀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 우리가 언제나 항상 함께 있었던 그곳, 그 장소에서 그는 가만히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심코 말이 나갔다.
“기다렸어?”
목소리가 매끄럽게 뻗어졌다. 그의 어깨가 한순간 들썩였다.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눈동자가 경직된 채 아래를 본다. 나는 그의 옆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나는 순간 놀랐다. 그의 목소리에는 명백히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꿈속이라 한들 이상한 반응이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숙여 그의 표정을 확인하려고 했다.
“고개 좀 들어 봐.”
그는 입술을 깨무는가 싶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꾹 감겼던 눈이 이내 떠졌다. 우리가 있는 장소는 분명 우리가 전생에 항상 함께 있던 산 근처인데도, 그는 현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조각같이 수려한 얼굴로, 애처로운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그가 눈을 뜬 그대로 자수정색 눈동자에서 눈물을 쏟아 냈다. 그 녀석이, 바로 그 이성진이. 나는 진심으로 당황해서 허둥지둥 팔을 뻗었다.
“왜,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속내를 좀 캐려고 찾아왔더니,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지? 꿈속에서 울 정도로 나를 찾지 못하는 것이 괴로웠나? 그래, 나의 죽음이…….
씁쓸한 기억이 떠올라 내가 가라앉은 사이 그는 어쩐지 초조한 기색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반복해서 닦으며 눈을 부릅떴다. 아아……그의 목 안에서 탄성을 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이런 얼굴이었어. 드디어 기억났어…….”
무슨 소리지? 내가 의아해하던 순간 그가 양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으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흠칫하며 얼굴을 붉혔지만 이내 당황하며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감격에 찬 눈빛과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이런 얼굴이었어. 굉장히 예쁘지는 않았어.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했고, 날씬하다기보다는 통통했고, 그리고, 그리고…….”
나는 이어지는 묘사에 인상을 찌푸렸다.
“너 지금 나한테 시비 걸어?”
“푸핫.”
그는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내 나를 꽉 끌어안았다. 얼떨떨하게 그 품에 안겨 있자 귓가로 계속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목소리였어. 기억이란 건 정말로 굉장하구나. 수만 년이 지나서 이렇게 떠오를 줄이야……. 꿈인 건 알고 있어. 이제 죽어도 좋을 것 같아…….”
수만 년. 갑자기 튀어나온 스케일이 큰 단어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참으로 현실감 없는 단어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야…?”
“기억하고 있어. 원망하지 마. 전부 잊은 건 아니었어. 화내듯이 어리광 부렸던 걸 기억해. 내가 준 싸구려 반지를 죽을 때까지 소중하게 대해 줬던 것도 기억해. 데이트를 하면 항상 별을 보러 갔었잖아. 너 때문에 나는 별의 배치를 외웠어. 그런 주제에 너는 별자리를 거의 외우지 못했고 말이야.”
귓가에 상냥하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추억을 속삭였다. 나는 품에 안긴 채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축제를 보러 갔었잖아. 아아, 소설 자료라고 했던가? 유리로 만든 공예품을 보고 저런 걸 배워 보고 싶다고 했었잖아. 바빠서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며 땡깡을 부리기도 하고. 아, 그래. 어린 시절 이후에 너랑 고등학교에서 재회했을 때도 기억해. 너도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지. 넌 내 첫사랑이었어. 너랑 다른 사람들 없는 곳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너를 따라서 학교에 1등으로 도착했었어. 그리고……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점점 젖어 갔다. 목소리는 결국 오열에 가까운 울음소리로 변해 갔다.
“대체……어째서……날 두고 가 버린 거야…….”
아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울분을 참으며 그를 꽉 끌어안았다.
“죽어도 잊지 않으려고 했어. 이제 충분하잖아. 내가 얼마나 널 찾았는데, 앞으로 대체 얼마나 널 찾게 할 셈이야?”
“난──.”
“몇 년이 지났는지 알아? 몇 번이나 환생했는지 알아? 몇 번이나 죽었는지 알아? 몇 번이나 내가 다시 태어났는데……! 이런 힘까지 얻었는데……결국 너를 찾지는 못했어……!”
……말을 자아내려는 입술이 멈췄다. 생각이 뚝 끊겼다.
……뭐?
방금 뭐라고 했어?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널 좋아할 거라고 했잖아. 수십 번을 환생하고, 이종족으로도 살아 보고, 네가 좋아하는 판타지 세계에도 태어나고, 그래도 결국 너를 잊지 못하고 찾고 있는데.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어. 그런데, 그런데…….”
머리가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엉켰다. 나를 끌어안고 있는 온기가 돌덩이라도 된 것처럼 무겁게 나를 짓눌러 왔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입술은 다시 힘없이 닫혔다.
뭐라고……했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 시간의 힘을 얻고 세계를 뒤져 봐도 너의 모습은 없었어. 피의 맹약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환생을 하면 곧바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믿었는데……그런데…….”
“…….”
“그때 나는 인간이었어. 너에 대한 추억은 그 무엇도 소유하지 못한 채 죽었다고…! 이제, 내가 너에 대해서 확실하게 기억하는 건 몇 마디의 말과, 아주 작은 추억과, 그리고 너의 이름뿐이야……「───」!”
전생의 내 이름을 외치며 그는 서럽게도 울었다. 나는 시야가 흐려지며 캄캄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를 꽉 끌어안아도, 내 이름을 외쳐도, 나는 인형처럼 초점이 흐려진 앞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졌다.
……네가 너무 변했다고 여겼다. 그렇게 여겼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몰랐다.
네 말로 인해 처음으로 깨닫는다. 환생은 누구에게나 같지 않고, 그 궤도는 제각각이라는 것을. 죽고 환생하고, 다른 세계에 태어난 우리가, 단 한 번 만에 서로를 찾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는 사실을.
네가 말했던가. 모든 것이 바래 버려서 기억나지 않는다고.
‘수만 년.’
그럼, 그럼 너는……그동안 계속……계속…….
머리가 아팠다. 어질어질했다.
마음에 동조한 것일까. 머릿속에 알지 못하는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수십 개의 감정이 겹쳤다.
가슴이 미치도록 아팠다. 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며 새까매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혼자였다. 산도, 별하늘도, 그 녀석도 없었다. 소란스러웠던 머리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어두운 공간 속에 빛이 나타났다. 선명한 ‘기억’이 내 시야를 덮었다. 눈앞에는 ‘우리’가 있었다. 나, 소영이, 인성이, 인하, 한수, 민희, 현호, 우리가 웃자 가슴에 따뜻한 감정이 찾아들었다.
시야는 깜빡이는 순간 다시 한번 변했다. 이번에 나는 어딘지 모를 높은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사람이 있었다. 외국인인가 보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 색 머리 색이 제각각이다. 금발 머리 남자가 뭐라 말했다.
「마지막 싸움이야. 반드시 이기자.」
파지직, 시야가 또 한 번 돌변했다. 이번에는 하늘에 떠 있었다. 어깨 부근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시야가 바뀌며 많은 것이 보였다. 여자, 남자, 사람, 동물, 식물, 그 안에서 빛나는 영혼의 빛.
어느 순간 내 앞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를 지닌 처음 보는 여자다.
「왠지 너랑은 언젠가 만났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건 너만의 착각이야.」
「널 좋아해! 네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알지만…….」
「난 너를 안 좋아해.」
“악…….”
시야가 빠르게 되감겼다.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되감기며, 시간을 거슬러 간다. 그래, 이것은 그의 기억이다. 수많은 시간, 그 안에 담긴 그의 기억.
목에 걸린 반지, 누군가와 만날 때마다 떠올리는 한 여자의 미소. 가장 가까운 기억부터 가장 먼 기억까지, 되돌아갔다. 냉정하고 거칠고 안하무인이던 성격이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야, 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며?」
「맞아, 있어. 목숨을 걸고 찾을 거야. 다음에는 내가 반드시 지킬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무뚝뚝했던 표정이 부드럽게 웃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그만 눈물을 떨어뜨렸다. 기억이 조금 더 되감겼다. 어딘지 모를 천장이 보였다. 새하얗고 작은 손이 보였다.
「환생했구나.」
「피의 맹약……. 피의 맹약은 진짜였어! 너도 어딘가에 살아 있는 거야. 환생해서.」
「너를 찾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함께할 거야.」
이윽고 기억은 쨍하는 파열음을 내며 깨졌다. 주위가 온통 새까맣게 물들었다. 처절한 목소리가 마음속을 물들였다.
「어째서 어디에도 없지?」
「영혼을 알아보진 못하더라도, 맹약이 있잖아. 그런데 왜 마음이 이끌리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지?」
「피의 맹약이 이루어졌다는 걸 깨달은 건 각성 후였어! 인간일 때의 기억은 흐려져. 네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 피의 맹약의 내용이 뭐였지?」
괴로움, 슬픔, 아픔, 한 조각의 미소. 머리가 아팠다. 쨍! 째쟁! 무언가가 계속 깨어져 갔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다시 세계가 조용해졌다. 눈앞에 아주 흐린 풍경이 보였다. 내 앞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창백하고 깡마른 여자였다. 갈색 머리칼을 지닌 여자는 팔에 링거를 꽂은 채 시야의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넌 무섭지도 않아?」
입을 연 것은 시선의 주인이었다. 여자의 얼굴은 희미했고, 풍경은 애틋하게 바래 있었다. 윤곽만이 비치는 화면 속에서 여자가 입을 연다.
「무서워. 하지만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미치겠어. 왜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지? 차라리 내가 대신 아프면 좋을 텐데.」
「좋고 나쁘고 할 게 어디 있어. 누가 병에 걸렸든 결과는 똑같잖아.」
여자의 분위기는 초연했다. 초연하게,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머릿속에 노이즈가 꼈다.
저 목소리, 기억에 있다. 그래, 저건 ‘나’다. 병에 걸리고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의 나.
선명한 기억 속에서 유일하게 흐려진 ‘나’와 관계된 기억.
「불치병에 걸려도 죽지 않는 사람이 있잖아. 너도 분명 살 수 있을 거야. 조금만 더 버티면……제발…….」
「……미안해.」
「제발…….」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뭐가 괜찮아?」
치지직, 치지직, 목소리가 흐려졌다. 그때 난 웃었던가? 그랬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분명 네가 날 찾으러 와 줄 테니까.」
「…….」
「그러니까 괜찮아.」
울음소리가 흐려졌다. 숨이 막혔다.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새 나를 꽉 끌어안고 있는 꿈속의, 지금의 ‘네’가 있다.
나는 소리 내어 무언가를 불렀다. 그것은 목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퍼뜩 어떠한 사실을 깨달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변한 모습, 여태까지 이상할 정도로 사람에게 공격적이었던 것. 처음엔 다정하고 희망에 가득 찼던 그가, 점점 피폐하고 어둡게 변해 갔던 이유.
‘부서졌던 거구나…….’
그렇게 하얗게 바래져 있는 기억을 어떻게든 간직하려고 되새기면서, 계속해서 내가 너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너는…….
아직 네가 너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때, 이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피의 맹약을 맺고 죽은 나는 이 마법 세계에서 환생했다. 그리고 그 후 홀로 남은 그도 마찬가지로 환생했을 것이다. 그래, 나처럼.
나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서.
‘설마……이성진이 찾고 있는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건…….’
비로소 본능에 이성이 동의했고, 나는 그가 그 녀석이라는 증거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 모르고 있었다. 아니, 잊고 있었다.
그것이 그에게 절망이었음을.
──우리의 시간이 같을 것이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꿈에서 깨고 나서 나는 정신이 없었다. 멍한 머릿속에 몇 번이고 그가 했던 말이 되살아났다. 수십 번에 걸친 환생, 수만 년, 그 속에 섞여 있던 여러 사람의 얼굴, 내 이름, 시간의 힘.
머리가 아팠다. 직접 기억을 보았음에도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몇십 번의 환생이라니. 판타지 세계에 태어나고, 이종족으로 태어나 자랐다. 많은 사람을 만났다. 동료, 친구, 가족.
그러나 그의 그것이 내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겨우 받아들여졌다. 그래, 나는 여신에게 환생을 약속받았다. 언젠가 그녀의 곁에 돌아갈 때까지, 긴긴 여행이 될 터였다.
‘수십 번을 환생하면서 계속 나를 찾았다고……?’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었지. 맞아. 나는 알고 있었어. 그럼 넌……? 혼란이 엉키고 엉켰다.
‘시간의 힘이란 건 뭐지? 세계를 뒤져?’
그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시간의 힘을 얻고, 세계를 뒤져 나를 찾았다. 그건 또 뭐야? 전에 말했던 특수능력? 하지만 그 말은, 마치 이 세계에, 마법 세계에 태어나기 전부터 무언가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같잖아? ‘각성’이란 말과도 관련이 있을까?
‘모르겠다…….’
혼란스러워져 이마를 쥐었다. 그러나 그의 꿈을 통해 나는 몇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나를 잊지 못했다. 피의 맹약을 믿고 환생했다. 아니, 그도 환생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머릿속에 박힌 새로운 정보에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모든 것이 혼란, 혼란, 혼란뿐이었다.
확실한 건, 그가 계속 나를 찾았다는 것이다. 나처럼, 나를 찾을 때까지 환생을 계속했다. 살아가고, 죽고, 나를 찾고, 다시 죽고, 다시 삶을 얻고, 나를 찾고, 다시…….
오싹
머릿속으로 말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한기가 찾아왔다. 죄책감이 발아래에서 술렁거리며 나를 좀먹어 갔다. 그게 뭐야……? 그건……그건 너무…….
그랬다면 그가 변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야 그럴 수밖에.
‘너 미친 거 아냐?’
갑자기 예전에 민희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수없이 삶을 헤매고, 계속 나를 찾아다녔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면서…….
툭
뺨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침대보 위로 굴러떨어졌다. 수만 년 동안 보이지 않는 나를 찾았다. 반복해서 나를 그리고, 계속해서 죽음과 삶을 반복하고, 그럼 넌……그동안 대체……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흑……흐윽…….”
너무 아득해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그런데도 그것은 나의 미래와 한없이 가까워서, 너무 안타깝고 괴로워서 눈물이 나왔다. 머리는 아프고, 혼란스럽고, 네가 너무, 가엾어서…….
‘수십 번의 환생. 나를 찾아서. 피의 맹약. 시간의 힘. 각성…….’
그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나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적었다.
다만, 이것만은 알았다. 그가 너무나도 괴롭게 ‘여행’을 반복했다는 것. 그러니 나는 알아야만 했다. 피의 맹약을 주도한 것은 나다. 나는 그가 한 말의 정확한 뜻을 확실하게 알아야만 했다.
그러나 생각으로 다시 꿈속 세계로 찾아갔을 때 내가 본 것은 사슬에 칭칭 감싸여 전보다도 더욱 굳건히 닫힌 마음의 문이었다. 내 손길조차 거부하며 튕겨 냈을 정도로 강렬한 ‘거절’이었다. 이것을 ‘거절’이라 표현해야 할까? 나는 다급하게 문을 향해 말을 걸었다.
“성진아, 나야! 제발 문을 열어 줘!”
하지만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슬이 몇 개 아래로 떨어졌고, 문이 나를 튕겨 내지 않게 되었을 뿐이었다.
‘시간의 힘? 각성이란 건 뭐지? 인간……인간이란 단어를 쓸 때의 말투도 좀 이상했는데.’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방에 틀어박힌 채 골몰했다. 조금 무서웠다. 지금 성진의 얼굴을 보면 나는 분명 참지 못하고 도망가거나, 가슴이 벅차 괴로워하거나, 울어 버리지 않을까. 다시 똑바로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어야 하는데.
‘그 세계는 평범했어. 아니, 하지만 여신님이 찾아온 세계였어. 정말로 평범했을까? 혹시 그 녀석에게는, 그 평범한 세계에서 죽기 전부터 무언가 힘이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바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를 시간을 들여 차분히 가슴속에 쌓아 갔다. 그는 내가 죽은 이후,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죽은 나를 찾았나? 죽은 나의 영혼을 찾았다. 무언가 힘이 있어서 피의 맹약을 인지했다. 시간의 힘은 또 뭐지? 너무 광범위한 단어잖아…….
‘모르겠다.’
다시금 머리를 부여잡았다. 고민과 괴로움에 가득 찬 나날이 지나갔다. 방에 틀어박혀 고민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 때문에 혼란스러워지면 그 기분을 해소할 겸 아이템을 만들고, 밥을 먹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성진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그에게는 시간의 힘이 있다. 그는 내가 죽은 후에, 이곳에 환생하기 전에 이미 영혼을 볼 수 있었다. 무언가 특별한, 초능력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으로 피의 맹약을 인지했다. 그 이후 환생하며 나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환생했다. 다시 나를 찾았다. 그것이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반복되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정적인 생각밖에 안 들었다. 말을 토해 내던 그의 괴로운 얼굴, 눈물을 흘리며 나를 끌어안던 그 녀석. 쌓아져 간 시간, 시간, 시간!
내가 자초한 건가?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하게 된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던 건가? 초조하고, 괴롭고, 미안하고, 서글프고, 가엾고, 불쌍하고, 안타깝고……안타까웠다.
“흐……으으윽……!”
몇 번이나 울었을까. 부모님께 변명하며 방에 틀어박힌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고민하다 잠이 들고, 암흑 속을 헤매고, 죄책감 속에 괴로워했다. 그러면서도 울 자격은 없다며 몇 번이고 나를 타박했다.
괴로운 감정 속에서 헤매며 완전히 피폐해졌을 무렵, 그 녀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데이트하자.]갑작스러운 전화에 당황하며 전화를 받은 나는 전화만큼이나 갑작스러운 말에 깜짝 놀랐다. 가슴을 꽉 죄여 오는 긴장감에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이내 최대한 평범하게 대답을 했다.
“뭔……소리야? 지금 3시가 넘었는데.”
[기분 전환을 하고 싶어. 그러니까 나와.]가슴 한구석이 욱신 아파 왔다. 나는 여리게 한숨을 내쉬며 수긍했다.
“……그래. 어디서 만날래?”
폐인 흉내는 그 죄악감이 향하는 당사자로 인해 보름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전화를 끊고 멍하니 있던 나는 곧 허둥지둥 움직였다. 어차피 계속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오늘 그 녀석과 만나면……나는 옷장을 열며 다시 멍해졌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후……모르겠다.”
나는 천천히 움직이며 최대한 단정하고 자연스럽게 꾸몄다. 엄마가 저번에 어른스럽게 꾸민 걸 보고 어색하다고 했으니 조금 더 학생답게 꾸며 볼까 한다. 그래서 이번엔 캐주얼한 옷을 입었다. 머리카락 반을 돌돌 만 뒤 핀과 왁스를 써서 고정하고, 하얀색 후드 티를 입은 다음 그 위에 회색 털 점퍼를 걸쳤다. 나비 모양 피어스를 귀에 끼우고 심플하고 작은 검은색 손가방을 챙겼다. 신발은 그냥 운동화로 골랐다.
“안녕.”
신경을 썼는지 안 썼는지 모를 차림새가 완성되었다. 죄책감에 어쩔 줄 모르면서도 긴장하며 성진의 앞에 다가섰던 나는 나와 마찬가지로 피폐한 그의 얼굴을 보고 그만 당황했다.
“헐, 너 얼굴이 왜 그래? 다크서클 장난 아냐.”
거의 보름 만에 보는 이성진은 전에 보았을 때에 비해 굉장히 어두워져 있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얼굴이 왜 그래? 피곤해 보이는데.”
“아, 난 철야한다고…….”
“그러냐.”
“…….”
우리는 서로를 보며 잠시 침묵했다. ……잠시 망설이는가 싶던 성진이 나를 끌었다.
“가자.”
“어디 갈 건데?”
“산.”
“으응?”
내가 정확히 산 어디냐고 묻기 전에 성진이 나를 데리고 텔레포트 했다. 이 녀석이 하는 공간 이동은 느낌이 기이하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물 같으면서도 바람 같은 무언가가 우리를 덮고 있고, 우리는 그 좁은 통로를 빠져나가는……그런 느낌이랄까?
“……여기 어디야?”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의아해했다. 산에 간다더니 시내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