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74
“그래?”
제현 오빠가 내 머리에 손을 올리며 키를 가늠해 보는가 싶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벌써 그런 나이가 됐구나.”
“그러게. 언제 이렇게 많이 자랐냐. 요만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두 사람이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현 오빠가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성인이 되는 건 축하할 일이지. 네 생일이 5월 29일이었나? 올해엔 좋은 선물로 준비해야겠네.”
“아, 주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는 장난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꼬맹이가 이제 랭크 시험을 볼 수 있는 나이가 됐구나.”
“하하, 그러게요…….”
“최근에는 너희들 실력을 확인해 본 적이 없어서 뭐라 말을 못 하겠네. 하지만 네가 민희랑 비슷한 실력이라고 치면, 민희는 C랭크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어. 올해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 B랭크를 딸 수 있을지도 모르지.”
헉. 나는 잠시 멍해졌다. 천호 오빠가 긍정했다.
“최근 몇 번 대련해 봤는데, 꽤 버겁더란 말이지.”
‘음…….’
그래, 그렇구나. 기분이 이상했다. 좋다기보다 불안하고, 약간은 기쁘고, 신경 쓰이고, 복잡했다.
“아, 몰라요. 랭크 시험 볼 때까지 신경 안 쓸래요. 저는 진로가 더 급하니까.”
“그래, 맘대로 해라. 어차피 C랭크만 따도 웬만한 일은 다 할 수 있으니까.”
“부담 주지 마세요.”
나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나는 한숨을 내쉬다가 마침 생각나 말했다.
“선물 하니까 생각난 건데 천호 오빠랑 제현 오빠는 은희 언니랑 성후 오빠 결혼 선물로 뭘 줄 거예요? 좀 신경 쓰여서요. 축의금으로 퉁칠 수는 없잖아요.”
“응? 너희들 축의금 내는 거야?”
“저는 내야죠. 결혼할 때쯤엔 성인일 테고.”
“어……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그러게.”
제현 오빠가 천호 오빠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내 질문에 잠시 고민했다. 나는 제현 오빠의 표정이나 감정의 색을 옆에서 잘 관찰했다.
7년 전, 제현 오빠는 은희 언니를 좋아했다. 아니,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좋아했다. 과연 지금 제현 오빠는 어떤 기분일까. 그는 과연 이 결혼을 각오하고 있었을까.
‘7년이나 지났으면 접을 때도 됐지.’
결혼 이야기를 듣고 시간이 지나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미 몇 년 전에 마음의 정리를 끝낸 건지, 그의 감정에서는 별다른 동요가 나타나지 않았다.
“아직 안 정했어. 넌 어떤 걸 생각했는데?”
“예쁜 식기 세트……는 제가 주기엔 좀 오버겠죠?”
“엄청 실용적인 걸 생각하고 있었네.”
“그럼 찻잔 세트?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까 화장품이나 향수 같은 것도 많이 주더라고요. 부적이라도 하나 만들까 싶기도 하고…….”
“흐음.”
“아님……여태까지 찍은 성후 오빠 사진을 모아서 앨범으로 만들어 선물하는 것도 괜찮겠네요!”
“아니…….”
“그건 좀…….”
두 남자가 당황하며 나를 말렸다. 천호 오빠가 기이한 눈으로 나를 훑었다.
“너 성후 선배 사진을 그렇게 많이 찍었어?”
“그냥저냥 조금 찍었어요. 저 항상 사진기 갖고 다니거든요. 20장은 넘어요. 오빠들 사진도 그 정도 있어요.”
“헐. 전혀 못 느꼈는데.”
하하. 7년이나 알고 지냈는데 20장은 껌이지. 어쨌거나 사진은 좀 그렇단 말이지?
“그럼 커플 팔찌를 만들어서 선물할까…….”
“그래. 그게 좋겠다.”
“흠, 오케이.”
그럼 어떤 설정을 부가하는 게 좋을까. 내가 한동안 가만히 서서 고민하고 있자 천호 오빠와 제현 오빠도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린 뭘로 준비하지? 가구라도 선물할까.
천호 오빠가 무심코 툭 내뱉었다.
“제현이 넌 조금 기분이 복잡하겠다. 너 예전에 은희 선배 좋아했었잖아.”
“…….”
“아, 맞다. 아차……은하…….”
제현 오빠는 그저 입을 다물었지만 천호 오빠는 나를 보며 당황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알고 있었는데요?”
“뭐?! 그랬어?”
이 말에는 제현 오빠도 놀랐다. 에휴.
“몇 년이나 알았는데요. 설마 모르려구요?”
“민희는 모르던데…….”
“…….”
……몰랐단 말이야? 이제 보니 다른 아이들도 눈치 못 챈 거 아냐? 대체 몇 년을 알았는데……. 그래도 민희가 눈치 못 챘을 정도니 가능성이 높다.
“어쨌거나, 알고 있었어요.”
“그랬구나…….”
“…….”
우리는 침묵하며 동시에 제현 오빠를 보았다. 제현 오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빛은 담담했다.
“확실히 기분이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생각보다 슬프진 않아. 차라리 안심도 돼. 너무 오랫동안 좋아했고, 그 시간만큼 포기하고 있었어.”
“…….”
“어차피 이렇게 될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랬겠지. 그리고 나는 제현 오빠가 좋아하는 마음을 접지 못할 뿐 포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은희 언니와 성후 오빠가 사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마. 좋은 일이니까. 이미 오래전에 접었어.”
“그래…….”
“두 사람이 결혼하게 돼서 정말로 잘됐다고 생각해. 굉장히 잘 어울리니까.”
“맞아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호 오빠가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제현 오빠의 어깨를 쳤다.
“그래, 그렇다니 다행이다. 시간 지나면 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겠어?”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꼭 사랑이 전부란 건 아니고. 일도 있고, 마법도 있고, 동생들도 있잖아.”
그러며 천호 오빠가 내 뺨을 약하게 잡아당겼다.
“하이마여.”
“괴롭히지 마.”
제현 오빠가 천호 오빠의 손에서 나를 구해줬다.
“그런데 넌 사람을 사귀는 범위가 협소해서 말이지. 너보다 민희랑 은하, 현호가 먼저 애인 데리고 오는 거 아니야?”
“…….”
앗, 제현 오빠가 굳었다.
“헉, 그런 생각이 드니까 좀 걱정되네. 그런 의미에서 인하랑 한수는 참 잘된 것 같아. 잘 어울리기도 하고.”
“맞아요.”
나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인하의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으면 많이 걱정했을 것이다.
“은하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 음, 아니다. 애인 사귈 생각 있니?”
심각한 어조로 물어보기에 나도 천호 오빠를 향해 심각한 얼굴로 답했다.
“사귈 생각도 없고, 시간도 없어요. 여기서 더 바빠지면 저 과로사해요.”
제현 오빠와 천호 오빠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생각보다 타격이 크다. 우리 꼬맹이들 아직 애기들인데.”
제현 오빠가 무언으로 동의하며 천호 오빠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천호 오빠가 자기가 말을 잘못 꺼낸 게 있으니 이번만 봐주겠다며 제현 오빠를 향해 투덜거렸다. 나 참, 우리랑 친한 어른들은 다들 너무 팔불출이라니까.
이내 나는 새삼 허기를 자각하며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윽, 저녁 사러 왔던 거 잊어버렸다. 그럼 전 먼저 갈게요.”
“그래. 늦었으니까 빨리 돌아가라.”
나는 두 사람과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치킨 한 박스를 사서 기숙사로 돌아갔다.
“아는 사람이 곧 결혼한다고 하니까 엄청 설렌다. 그치?”
민희가 음료수 빨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인하가 양손에 턱을 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기대돼.”
오늘은 모처럼 초등학교 시절 수준별 수업 멤버들끼리 모이기로 했다. 바로 은희 언니와 성후 오빠의 결혼 선물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유정 언니와 인호 오빠도 온다. 우리끼리는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두 사람도 은희 언니와 꾸준히 마주치며 안부를 나누고 있었다. 당연히 두 사람도 결혼식 초대 손님이다.
딸랑
“미안, 우리가 좀 늦었니?”
유정 언니와 인호 오빠는 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바빠졌다. 지명도 온다. 지금은 대현 소속이지만 졸업하기 전에 취업처를 정할지도 모르지. 두 사람 다 전투 마법사고, 현재는 짝을 지어 활동하고 있다. 마법사가 조나 짝을 지어 활동하는 일은 흔하다. 유정 언니는 앞에 나서서 싸우고, 인호 오빠가 그 뒤에서 서포터를 한다고 한다.
“유정 언니, 다쳤어?!”
우리는 붕대가 감겨 있는 그녀의 다리를 보며 당황했다. 웬만한 부상은 마법으로 바로 치료할 수 있다. 그런데 치료가 되지 않는다는 건…….
“아니, 별로 심하게 다친 건 아닌데, 치료가 좀 더디게 되더라고. 그래서 양호 선생님한테 갔더니 오늘따라 양호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거 있지? 그래서 일단 붕대 감고 온 거야.”
“내가 봐 줄까?”
“그래 줄래?”
유정 언니가 반색했다. 현호가 붕대 위에 손을 올렸다. 현호의 물이 유정 언니의 다리를 감쌌다.
“와, 기분 좋다.”
인호 오빠가 움찔했다. 현호는 마력을 주입하다 말고 인상을 찡그렸다.
“정말 더디네. 누나가 맞은 그 마법, 좀 이상한 마법 아냐? 분명 독성을 지닌 마법일 거야.”
“그래?”
그 말에 나는 시야를 떴다. 확실히 유정 언니의 다리 주위에 모르는 누군가의 마력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별로 느낌이 안 좋았다.
‘확실히 독성이네.’
그래, 굳이 따지자면 성진이 주었던 그 저주가 담긴 검이랑 느낌이 비슷하다. 그런 종류의 마법이었거나, 아니면 그런 마음을 담아 마법을 썼거나, 둘 중 하나겠지. 웬만하면 전자이리라 본다. 그게 아니면 상대가 유정 언니보다 일정 이상 강한 마법사여서 저럴 가능성도 있다.
나는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만으로 현호의 마법에 정화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다리 주위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던 사념이 사라졌다. 치료를 하고 있던 현호가 반색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앗! 은하야, 고마워.”
“아냐. 네 말대로 안 좋은 마법인 것 같네.”
치료를 마친 후 우리는 자리를 정비했다. 둥근 좌석에 각자 자리를 정하고 앉았다.
“그럼 지금부터 은희 언니랑 성후 오빠에게 어떤 선물을 줄지 같이 고민해 보자.”
유정 언니가 손뼉을 짝짝 치며 주의를 환기했다. 민희가 손을 들며 물었다.
“혹시 정한 사람 있어?”
“아니, 아직.”
“나는 커플 팔찌를 만들어 볼까 생각 중인데, 너무 흔한가?”
“아냐. 장인반인 만큼 딱 좋은 것 같아.”
인호 오빠가 다정하게 웃으며 찬성했다. 다행이다. 이어서 한수가 손을 들었다.
“그럼 나는 꽃을 만들어서 선물해 볼까? 리트레아란 꽃이 있는데……그걸 피울 수 있게 됐거든.”
“리트레아? 그게 뭔데?”
“축복, 섬세한 아름다움이란 꽃말을 가진 꽃이야. 분홍색이고, 나무에 피는 꽃인데……화분으로 주는 게 좋으려나?”
“희귀한 꽃이야?”
“좀 그래.”
우리는 서로 고심하며 의견을 나누었다. 인하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엄마가 결혼 선물이면 식기 세트 같은 실용적인 물건도 괜찮다고 하던데.”
“그야 살림하려면 필요하잖아.”
내가 생각했던 것을 이번엔 인하가 의견으로 내었다. 대화를 듣다 보니 어떤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고 보니 선물은 언제 전해 주면 좋을까?”
내 말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결혼식 날 주면 되는 거 아냐?”
“신부 대기실에는 몇 사람 들어가지도 못해. 결혼식 끝나면 바로 신혼여행 가잖아. 아마 듬성듬성 시간이 날 테지만 그래도 바쁠 테니까. 은희 언니가 아공간이 있으면 괜찮지만……결혼식 전에 선물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으음……. 신혼집 주소를 알아내서 은희 언니가 돌아올 날에 맞춰서 선물을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
인호 오빠가 아차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타이밍도 생각해야겠네. 하지만 결혼 후에 주는 것보단 결혼 전에 주는 게 낫지 않을까? 후에 주면 뒤늦게 주는 것 같잖아.”
“아, 그러네요.”
우리는 결혼 2주 전쯤에 선물을 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또한 여자는 은희 언니에게, 남자는 성후 오빠에게 선물을 주기로 정했다. 결혼 전이면 아직 살림을 합치기 전인데, 우리는 은희 언니랑 성후 오빠, 둘 다와 친하다. 그러나 따로따로 하나씩 선물을 준비하는 것도 뭔가 이상해서 그냥 그렇게 나누기로 했다.
“결혼이라…….”
한참 고민을 하며 끙끙대던 유정 언니의 표정이 어느 순간 살짝 풀렸다. ‘결혼’이란 단어는 마치 마법 같다. 우리에게는 아직 먼 일이지만 그 단어는 꿈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은희 언니 좋겠다. 성후 오빠 같은 멋있는 남자 잡아서 연애하다가 결혼도 하고! 나도 그런 남자랑 사귀고 싶다…….”
“…….”
인호 오빠가 말없이 유정 언니를 흘끔거렸다. 무언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쯧쯧쯧,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대체 여태까지 제대로 안 잡고 뭐 했어. 내가 아는 한, 짝사랑 기간만 3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하 넌 잘 잡은 거야. 사실 사귄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엔 너랑 한수가 사귀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인하가 뺨을 수줍게 붉히며 웃었다. 인하는 한수와 사귀게 된 후로 감정 표현이 부쩍 늘었다.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일도 많아졌다. 상냥함이 예전보다 노골적으로 묻어 나오는 걸 느낄 때마다 ‘사랑은 얼음을 녹인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정말로 얼음이 녹는 것처럼 사르르 웃곤 하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좋아하게 되기 전까지는.”
옆에 앉아 있던 한수가 쑥스러워하며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래도 좋아한다는 걸 알고 나니까 가만히 있을 수 없더라고.”
“인하는 정말로 쟁취했다는 느낌이네.”
“그런가?”
“응.”
하긴, 인하는 정말로 용감하게 행동했다. 좋아했다는 걸 자각하고, 바로 고백부터 했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될지 따윈 생각조차 하지 않고 마음을 전했다.
“나라면 엄청 무서웠을 거야. 상대가 날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그런 생각은 안 들었어? 친구라서 더 망설이게 될 때도 있다고 하더라고. 거절당하면 이전의 관계로는 돌아가기 힘드니까…….”
“그때는 안 들었어.”
인하는 유정 언니의 말에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긴 속눈썹이 눈을 살짝 덮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랑이란 게 어떤 건지, 고백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고백했던 것 같기도 해. 차일 거라는 생각도 전혀 못 했고……차이면 사이가 어떻게 변할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그냥 마음을 전하는 것에 필사적이었거든. 그때는 막 알게 된 감정이 너무 뜨거워서…….”
그래, 그 용기는 어쩌면 무지에서 나온 용기였을지도 모른다. 인하는 그때 사랑이란 감정을 막 배운 상태였다.
“지금 다시 똑같이 하라고 하면……망설일 것 같고, 무서울 것 같아.”
“그렇구나.”
유정 언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활짝 웃었다.
“하지만 인하는 성공했잖아.”
“맞아. 지금도 엄청 좋아하고 있으니까 다 좋아.”
인하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한수의 팔을 껴안으며 그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헐, 너무한다. 현호가 옆에서 놀리듯이 핀잔을 줬다. 하하, 이 녀석들, 대놓고 염장질을 하게 됐구나. 다정한 눈길로 인하의 머리를 쓰다듬는 한수를 보며 나는 손에 한 번 힘을 주었다 풀었다.
그러다가 나는 이 상황에서 가장 목소리를 높여야 할 민희가 조용하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민희는 뭔가 수심 가득한 얼굴로 얼음이 담긴 컵의 빨대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입술을 달싹였다가, 다시 다물고, 잠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왜?”
“음…….”
“왜? 뭐야?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민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내가 보기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 민희 너 같은데.”
“어…….”
민희가 시선을 살짝 피했다. 민희는 기본적으로 능청스러워서 무언가 마음에 찔리더라도 일부러 보이기 위해 할 때를 제외하고는 남의 시선을 피하는 일이 별로 없다. 모두 의문스러운 눈으로 민희를 돌아보았다.
“음……그…….”
민희는 답지 않게 망설이더니, 유정 언니를 향해 버럭 소리 질러 물었다.
“방금 묻는 거 보고 생각난 건데! 유정 언니는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어?”
“뭐, 뭐어어?”
유정 언니가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모두의 시선이 이번엔 유정 언니에게 집중되었다. 특히 인호 오빠의 시선이 따가웠다. 모두의 시선에 둘러싸인 유정 언니가 얼굴을 붉히는 사이,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민희를 보았다. 아무리 봐도 하고 싶었던 말은 저게 아닌 것 같은데…….
“뭐, 갑자기, 그런 걸, 왜…….”
“아니, 인하보고 부럽다고 하니까. 결혼이란 말 하면서 그런 걸 떠올리는 거 보니까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싶어서.”
“아니, 딱히……없는데…….”
없구나. 이건 인호 오빠한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유정 언니는 시선을 굴리다가 퍼뜩 떠오른 얼굴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항~. 이제 보니까, 민희 너야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지? 그렇지? 아까 나한테 말한 것처럼 결혼 이야기 하면서 그런 걸 상상한 거지?”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민희에게 몰릴 차례였다. 민희가 돌에 맞은 개구리처럼 눈을 땡그랗게 떴다.
“앗, 어, 아니, 그…….”
민희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결국 민희는 새빨갛게 붉어진 얼굴로 시인했다.
“……아니……지 않아요…….”
“……?!”
목소리가 잦아질수록 민희의 몸은 수그러들었고 시선도 아무도 없는 방향으로 향했다. 헐, 진짜야? 민희의 바로 옆에 있던 유정 언니가 민희의 몸을 붙들었다.
“세상에, 진짜였어? 어떻게 된 거야? 세상에! 말해 봐!”
유정 언니는 그 나이답게 연애 이야기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 아니, 평소 관심이 없었더라도 이번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도 유정 언니와 비슷한 심정이다.
‘민희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사실 별거 아닌 일이지만 거기에 민희를 갖다 붙이면 뭔가 신기하고 대단한 느낌이 든다. 민희는 평소 남녀와 두루두루 어울리는 타입이었고, 연애와는 동떨어진 태도를 취했다. 인하도 흥분해서 물었다.
“누구야? 어떤 사람? 아는 사람?”
“너희도 아는 사람……이긴 한데…….”
민희는 얼굴을 붉히며 빨대를 물어 음료수를 쪼로록 마셨다. 빨대에서 입술을 뗀 민희가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
민희가 굉장히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와 시선도 마주하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짝사랑이니까……듣기만 해.”
아무래도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나 보다. 우리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붉어졌던 얼굴은 어느새 차갑게 식은 채, 민희는 시큰둥한 눈동자로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말이지…….”
곧바로 본론이 나왔다. 우리는 민희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천호 오빠야.”
나는 입을 크게 벌리려다 말았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잠시 고민해 보았다.
……아, 그렇구나. 엄청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민희는 평소 천호 오빠를 굉장히 따랐고, 그런 지는 무척 오래됐다. 그게 사랑으로 변했다고 한들 그리 이상하지 않다.
친구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호들갑을 떨며 경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민희를 보았다.
“……언제부…….”
“너무 질문하지 말아 줘. 그냥, 정말로, 그냥, 짝사랑이니까.”
민희는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계속 망설이며 말을 이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어. 근데, 최근 일이야. 아마 작년……? 그때부터이려나. 눈치채 보니까 좋아하고 있었어. 그게 다야.”
“그렇구나…….”
민희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반응도 저절로 잦아들었다. 민희는 골치 아픈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며 차가운 테이블 위에 얼굴을 묻었다.
“진짜……친오빠랑 다름없이 따랐는데 어느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야. 아……몰라, 몰라. 하여간 그런 거라고. 인하처럼 고백해 보려는 생각은, 아니, 가망이 있어야 좀 해 보지. 천호 오빠는 날 요만한 꼬맹이 때부터 봤다고. 사귀면 범죄라고 할 정도의 나이 차가 있다고. 그런 건 안다고. 천호 오빠가 날 요만큼도 여자로 안 본다는 건 잘 알고 있다고.”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리던 민희는 곧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억지로 활기찬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므로 짝사랑으로 끝낼 생각이니까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난 그냥 평소처럼 밀고 갈 거야. 고백도 안 해.”
“…….”
우리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담백한 척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가벼운 감정은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