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80
은희 언니는 배를 잡으며 웃더니 영문을 모르는 우리를 보며 눈가를 닦았다.
“정말, 우리 후배들은 다 왜 이렇게 귀엽담.”
“그치? 우리 귀엽지?”
“웩.”
민희가 무리수를 뒀다! 은희 언니는 양 뺨에 주먹을 대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민희의 머리를 웃으며 쓰다듬었다.
“어휴, 우리 잔망스러운 꼬맹이들. 천호랑 제현이가 계속 꼬맹이들 꼬맹이들 거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 귀여운 것들.”
마치 뒷이야기가 흐지부지될 것 같은 분위기였으나, 그럴 순 없지. 아직 끝이 아니라고! 나는 자기도 첫사랑을 밝혔다며 의욕 만만한 인하와 합세해 친구들의 첫사랑을 캐냈다.
“소영이 첫사랑은 알 것 같아. 성진이나 인성이, 둘 중 하나지?”
“소, 소꿉친구라고 그러는 거 아니지?”
“소꿉친구고, 가장 중요한 건, 얘들이 잘생겼다는 거지.”
“…….”
침묵하며 시선을 피하던 소영이는 이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아악! 내가 왜 그랬지! 저 얼굴밖에 볼 거 없는 놈을 좋아했다니……내 흑역사라고! 이게 다 저 녀석이 얼굴만은 잘난 탓이야! 얼굴만은.”
“…….”
“성진이였구나.”
“으학학학학!”
민희가 또 한 번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은희 언니는? 첫사랑이 누구야?”
“음……어릴 때 옆집 살던 남자애. 이젠 얼굴도 기억 안 나지만.”
흔한 패턴이었다. 민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머뭇거리며 한수를 돌아보았다.
“음……사실 한수의 첫사랑은 아는데, 이걸 말해도 될지…….”
“알고 있었단 말이야?!”
한수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더니 새빨간 얼굴로 입을 가렸다. 그 반응에 현호와 민희가 소리 높여 웃었다.
“푸흡…! 그걸 몰랐던 사람이 어딨어!”
“맞아! 어딨어!”
정말 신나게 웃어 젖힌다. 한수는 ‘익…!’ 하고 화를 눌러 참더니 이내 곤란해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어색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사실 나도 알고 있었어. 근데 난 알다시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인성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머뭇머뭇 대답하며 시선을 피하자 한수가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뭐야, 그랬었냐고…….”
“미안.”
“네가 미안할 게 뭐 있냐.”
이 대화로 모두는 한수의 첫사랑이 나임을 알았으리라. 여태까진 몰랐었던 이성진, 이소영, 최인성까지 포함해서.
나는 한수의 태도가 비교적 평범한 것에 안심했다. 어쨌거나 한수한테는 실연이었을 텐데.
“성진이 넌 그 여자애고?”
“그래.”
성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첫사랑이었고, 다시 만나서 또 한 번 좋아하게 되었고, 헤어진 사이 다른 사람과 몇 번 사귀긴 했지만 결국 날 잊지 못했노라고. 나를……한없이 평범했던 나를……. 나는 손을 세게 쥐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먹을 것이 떨어졌다. 그 많던 먹을 것이 설마 떨어질 줄이야. 아쉬워하고 있는데 은희 언니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우리 숙소 냉장고에 과자랑 피자 남은 게 있었는데…….”
쫑긋. 우리는 눈을 반짝였다. 참고로 인하랑 한수, 성진이는 제외다.
“좋았어! 지금부터 진실 게임을 한다.”
“진실 게임? 웬 진실 게임?”
밑도 끝도 없이 민희가 제안했다. 한수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민희는 씩 웃었다.
“한 번쯤 너희들이랑 해 보고 싶었거든! 그리고 진실 게임이니까……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에겐 벌칙이 있어야겠지? 처음으로 입을 다무는 사람은, 선생님들 숙소에서 먹을 걸 털어 오기!”
“민희야, 그거 범죄야.”
“안 들키면 만사 O.K.!”
“이게 증말…….”
골치가 아파 이마를 부여잡았지만 이미 기세를 탄 민희는 말릴 수 없었다.
“돌린다, 돌려!”
민희는 이번에도 룰렛을 꺼냈다. 빙~돌던 룰렛은 이내 민희 앞에 턱 멈췄다. 허걱, 민희가 당황했다. 오호라~. 이건 제 꾀에 제가 걸린 꼴인데?
“진실 게임이면, 한 사람이 한 개씩 질문하는 거지?”
“흠흠, 그럼 나부터.”
소영이가 나섰다.
“민희 너 좋아하는 사람 있니?”
“어…….”
민희의 표정이 경직됐다. 민희는 흥미진진해하고 있는 은희 언니를 한 번 바라본 뒤 대답했다.
“…천호 오빠.”
민희가 새빨개진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은희 언니가 화들짝 놀랐다.
“뭐? 너 진짜? 진짜로?”
“응. 어쩌다 보니까…….”
“그럼 아까 첫사랑이라고 한 건…….”
“그렇습니다! 현재 진행형 첫사랑입니다!”
민희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은희 언니는 당황해서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이내 질문했다.
“언제부터?”
“작년부터….”
“작년 언제부터?”
“질문은 한 사람당 하나씩이라고!”
민희는 빨개진 얼굴로 타당한 이유를 댔다. 하지만 놀란 건 비단 은희 언니만이 아니다. 소영이도 인성이도 의외란 눈으로 민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도 성진이 녀석만은 마치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덤덤했다. 다음으로 인하가 질문했다.
“작년 언제부터?”
“……전에 큰일이 있었잖아. 위험한 사람 만나서, 오빠가 우리 대신 다쳤었잖아.”
아아……언제를 말하는 건지 알겠다. 우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마 그때부터.”
천호 오빠는 그때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결과, 팔이 잘렸다. 잘렸던 팔은 지금은 치료받아 멀쩡하지만, 그래도 충격적인 일이었음은 변함없다. 심지어 그 상대가 실은 트라베리아의 마법사였다니.
그 이후로도 한 사람당 질문이 이어졌다. 민희는 새빨간 얼굴로, 불타오르는 눈동자로 룰렛을 노려보았다. 물귀신이 되어 누구든지 끌고 가려고 작정했군. 두 번째 타자는 바로 이성진이었다.
“아자!”
민희가 주먹을 쥐었다. 다른 모두도 골탕 먹일 생각에 가득 차 사악하게 웃고 있다. 이런. 그러나 친구들의 마음도 이해한다. 성진은 정말 뭔가 알기 힘든 놈이니, 이참에 속내를 뜯어 보고 싶은 거겠지. 그 마음은 나도 비슷했다. 나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다. 내 궁금증을 해소하면서, 친구들이 장난스럽게 넘길 수 있는 질문이 없을까?
“자, 먼저 나부터! 좋아하는 사람이랑은 어디서 만났어?”
“…….”
뭔가 말하려는 듯이 입술을 달싹이던 성진은, 흘끔 소영이와 인성이를 돌아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학교에서였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
“학교?”
“그래.”
머나먼 기억이 어렴풋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그 학교의 이름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아마 입에 담을 수는 없는 이름이었다.
쟤 좋아하는 사람 있었나 봐? 인하가 은희 언니의 물음에 긍정하며 손을 들었다.
“너 싸움으로 져 본 적 있어? 말싸움 말고 전투로.”
방금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나왔잖아? 인하는 성진의 연애 사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 질문도 관심이 가는 화제다. 우리는 방금과는 달리, ‘마법사’의 눈으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있어.”
“……!”
우리는 깜짝 놀라 서로를 보았다. 헐, 쟤가 진 일이 있었다고?
‘혹시 전생의 일인가?’
지금의 성진을 보면 누군가와 싸워 지는 모습이 전혀 상상이 안 된다. 나는 당황해서 질문을 던졌다.
“근데 그거 또래 애랑 싸운 거 맞지?”
“…….”
성진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 있었던 일일까, 이번 생에 있었던 일일까. 그래, 지금은 인간 같지 않지만 예전에는 나름 평범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세상에! 친구들이 깜짝 놀랐다. 나는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팔짱을 꼈다. 이번엔 인성이가 손을 들었다.
“누군데? 어떤 사람인데! 우리 아는 사람?”
“질문 두 개야.”
“방금 그건 ‘누구냐’의 세부 질문이지!”
“…….”
잠시 침묵하던 성진이 갑자기 혀를 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쳇…….”
“……?”
우리는 의아한 눈으로 성진을 올려다보았다.
“말 못 해. 냉장고 털고 오면 되지?”
“뭐? 왜?”
“말 못 하니까 못 한다는 거지. 그 ‘왜’냐는 질문에마저 대답하지 못하거든.”
성진은 다소 비꼬듯 말하고는 휙 밖으로 사라졌다.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지만, 친구들은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네.”
“역시 쟨 비밀주의라니까.”
소영이나 인성이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진실’을 몰랐다면 나도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겠지. 하지만 알 수 있다. ‘전생’에 대한 이야기라서 쉽사리 꺼내기 힘든 거겠지.
‘그렇대도 의외네. 나처럼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닐 테니 대충 둘러대면 될 텐데.’
말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걸까? 나는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았다. 룰렛이 돌아갔다. 이번엔 소영이가 걸렸다. 소영이는 아까 부끄러워했던 화제, ‘어쩌다 이성진을 좋아하게 됐냐.’ 관련 질문을 집중적으로 받고 엄청 부끄러워했다. 그야말로 이불에 하이 킥을 할 기세로.
소영이 다음엔 내가 걸렸다. 그러고 보니 여태까지 같은 사람이 두 번 걸린 적이 없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근데 진실 게임이 원래 한 사람에게 있는 사람 전부가 하나씩 물어보는 게 맞던가? 으응?
‘괜히 긴장되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성진처럼 나도 말 못 할 것이 참 많다. 환생에 대한 것도, 그 녀석에 대한 것도 무엇 하나 대답할 수 없다. 질문 여하에 따라 성진이를 뒤따라가야겠다. 나는 긴장으로 쿵쿵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자, 그럼 나부터 질문.”
맨 먼저 손을 든 것은 은희 언니였다. 은희 언니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은하 너는 제현이를 어떻게 생각하니?”
“……?”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좀 뜬금없는 질문 같은데? 그러나 다들 은근히 관심이 있어 보인다. 나는 제현 오빠의 얼굴을 떠올리며 천천히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잘생겼고, 친하고.”
“응, 그리고?”
대체 왜 저렇게 진지한지 모르겠다. 나는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꼽았다.
“가끔 진짜 오빠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 정도로 친하다는 게 무척 기뻐요. 그 오빠가 아무한테나 상냥하지 않은 걸 아니까. 그래서 화나면 뭔가 무서워요. 그러니까 저한테 있어서는……좋은 오빠지만 화나면 무서운 오빠…?”
대답이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모두 묘하게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거나 인상을 찌푸렸다. 은희 언니가 민희의 귓가에 뭐라 소곤거리자 민희가 손을 들었다. 민희 차례로 넘어간 것이다.
“친해졌는데도 오빠가 화내면 무서워? 물론 잘못하면 화내긴 하지만…….”
“그냥 조금? 제현 오빠는 화나면 표정이 차가워지잖아. 그게 무서워. 그러니까……왠지 냉정하게 사람을 쳐 낼 것 같은 느낌이야.”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사람을 칼같이 자를 것 같은 이미지라고. 웬만한 사람한텐 정을 주지 않을 듯하니, 나와는 친해질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제현이가 은하 앞에서는 화를 잘 못 내겠다고 말하더라니, 어쩐지. 그 말 들으면 제현이 녀석 엄청 실망할걸?”
아닌 게 아니라 은희 언니도 실망한 것 같다. 끄응, 하지만 친하더라도 화나면 무서운 사람은 꽤 있지 않나? 게다가 그 상대가 나보다 연장자, 그러니까 오빠나 부모님 같은 사람이라면 더 무섭게 느껴질 거다.
‘아, 확실히 오빠는 그중에서 특히 무서운 것 같아.’
부모님이 화내는 것도 스승님이 화내는 것도 그럭저럭 넘길 수 있는데 왠지 제현 오빠는 그러기 힘들다. 으으으음…….
다음으로 한수는 인하와 내가 어떻게 만났는지 물었다. 오호라, 여자 친구의 옛날이야기가 궁금하다 이거지?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인하와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지금 와서는 많이 희미해졌지만, 그래도 기억하고 있다. 당연히 아기 때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섯 살쯤에 다시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해 줬다.
그때, 질문하는 친구들 옆에서 어쩐지 수심 가득한 얼굴로 고민하고 있던 소영이가 손을 들었다. 이번 질문은 뭘까? 이전까지의 질문이 평화로웠던 탓에 방심하고 있던 나에게 폭탄이 떨어졌다.
“은하 너……성진이 좋아해?”
“…….”
웃고 있던 입꼬리가 굳었다. 떠오르는 말은 많았다. 친구로서 좋아하지. 설마. 장난으로 웃어넘기면 되었다. 그런데 뭔가 결심한 것처럼 굳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소영이를 보자 도저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엥? 뭐야, 그거. 질문 이상하지 않아? 차라리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으면 모를까.”
“은하가 그럴 리 없잖아.”
당황하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소영이가 고민하는 기색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물을지 말지 많이 고민했어. 하지만 솔직하게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건 지금뿐일 것 같았어.”
대답을 하기 위해 벌린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겨우 말을 토해 냈다.
“그게……그러니까……티 나?”
목소리는 명백하게 떨리고 있다. 이제 웃어넘길 수 없다. 소영이의 눈동자가 ‘역시’라며 납득한다. 심장 소리가 점점 커지고, 가슴 깊이 초조함이 내려앉는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응.”
“아, 진짜…? 나름 잘 숨긴 것 같았는데…….”
“맞아. 나도 전혀 몰랐어. 그런데 어느 순간 알 것 같더라고.”
대화가 조심스럽게 이어지고, 내가 긍정에 가까운 대답을 한 순간부터 티 나게 굳어 있던 친구들이 말문을 열었다.
“뭐……?”
“은하 너 정말 이성진 좋아해?”
민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소영이는 아마 마침 성진이 없었기에 이런 질문을 꺼냈을 거다. 적어도 성진이에게는 말할 생각이 없다는 거겠지. 나는 조금 안심하며 수긍했다. 이미 들켜 버렸는데 어쩌겠어.
“응.”
“뭐? 하지만 너 그 반지 준 남자애를 좋아한다고…….”
“바보! 그건 오래된 일이잖아.”
“그래도, 하지만, 새로 생긴 좋아하는 사람이 하필이면 성진이라고? 대체 왜?”
“글쎄? 왜일까.”
은희 언니도 경악했다.
“진짜야? 걔 바람둥이라고 소문난 애잖아!”
그렇게 소리치며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본다. 나는 은희 언니를 마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속상한 표정을 짓는 은희 언니를 보니 나도 속상해졌다. 생각보다 그렇게 나쁜 녀석은 아닌데.
“뭐야, 이게. 어떻게 이래.”
“전혀 몰랐는데…….”
소영이는 제 생각이 맞았음에도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겠지. 친구들 사이에 낀 소영이의 입장이 얼마나 곤란할까. 나는 쓰게 웃었다. 참 곤란할 거다.
“나도 질문해도 될까? 언제 알았어?”
“저번에……네가 성진이를 위로하고 있는 것을 봤어. 아마 ‘그녀’에 대한 거였겠지. 멀어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네가 위로하며 성진을 끌어안는 걸 봤을 때, 그때, 어쩐지 알았어. 직감이었을 거야.”
내가 성진이를 위로했을 때? 그 일로 그 녀석을 위로한 적은 여러 번 있다. 그때마다 전생의 일을 떠올렸다. 그래, 그때라면 확실히 티가 났을지도.
소영이가 내 시선을 피하며 자신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인성이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숙인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모아 쥔 소영이의 손이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얬다.
“……나 생각보다 굉장히 많이 고민하고 질문했어. 숨기고 있으니 평범하게 물으면 대답을 안 할 것 같기도 했고…….”
“들킨 거 뻔히 알면서까지 숨기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 그렇구나. 나 초조했던 건가 봐. 하지만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어졌어. 성진이도, 그리고……아…….”
소영이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골치 아픈 얼굴로 이마를 쥐었다.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속상해하거나, 짜증 내거나, 답답해하고 있었다. 전혀 몰랐는데. 왜 하필이면 그 녀석이지? 민희가 이를 갈았다.
“그놈은 첫사랑에 미친 놈이잖아. 왜 하필이면 그딴 놈을…….”
“난 싫어. 은하가 그 녀석이랑 사귄다니.”
인하가 나를 보며 울상을 지었다. 아니, 잠깐, 인하야. 인하를 향해 휘휘 내젓던 손을 소영이가 간절한 얼굴로 붙잡았다.
“기왕 이렇게 된 이상 도와줄까?”
“뭐?”
“친구로서의 의리도 다 지켰고, 답답한 꼴은 이제 그만 보고 싶고, 뭣보다 난 은하 네가 좋아. 그러니까 차라리 널 도울래. 게다가 너라면 그 녀석을 딱 붙들 수 있을 것 같거든. 미친놈처럼 영혼 찾기 하는 것보단…….”
“아니, 저기, 얘들아.”
생각보다 분위기가 너무 심각하다. 나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 그 녀석이랑 사귈 생각 없어.”
그러자 친구들이 또 한 번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에도 내가 바라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알아, 은하야. 그 녀석 진짜 이상한 부분에서 일편단심이라…….”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로 사귀고 싶지 않아.”
내면에 꽁꽁 숨겨 둔 죄책감과 죄악감, 그것을 제쳐 두고 나는 평범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걔 남친으로는 꽝이잖아. 나도 내가 왜 걜 좋아하게 됐는지 모르겠어.”
맞아. 정말 왜 좋아하게 되었을까. 그가 그렇게 된 이유, 그의 기나긴 시간, 모든 것을 배제했을 때 그는 재수 없는 사람일 뿐이다. 그래도 좋아하게 되어서 다행이다. 동정이나 죄악감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를 좋아하게 된 거니까.
“근데 좋아하게 된 건 그렇다 치고, 사귀게 되면 분명 나 엄청 후회할 거야. 분명 좋은 꼴은 못 볼걸? 장난 아니고 진짜.”
“…….”
내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는 나를 못 알아보고, 계속 그의 안에 있는 ‘그녀’를 찾는다. 결코 좋게 끝나지 못할 거다. 밀어붙이듯이 사귀는 건 지쳐 있는 그에게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나는 우리 관계를 그렇게 망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성진이 좋은 남친감이 아니란 것도 맞는 말이지. 어떤 의미로든 후회하게 될 것이며, 서로 불행해질 거다. 친구들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고, 남친으로서는 아니다 이거지. 친구들한테나 좀 다정하지, 여친한테 하는 꼴 보면 진짜……아니잖아.”
“그건……그렇지.”
소영이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친구들도 동의했다.
“그리고 그 녀석은 진짜로 사랑에 미쳐 있잖아. 난 그 녀석과 잘해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그 녀석이 얼마나 친구한테 의지하는데. 그러니까 더 사귀고 싶지 않아.”
성진에게 기댈 수 있는 장소는 지금은 연인의 옆이 아니다. 멍하니 내 이야기를 듣던 소영이가 이내 당황하며 물었다. 내 손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은하야, 그 녀석이 다른 사람이랑 사귀는 걸 보면 싫지 않아? 슬프지 않아?”
“슬프고 싫은데…….”
나는 실망하며 어둡게 변했던 그 녀석의 얼굴과, 전생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녀석의 얼굴을 떠올렸다. 절망하거나, 감내하거나, 울고 싶은 기분을 참으며 애써 웃거나…….
“그런데 그보다는 그 녀석이 가엾어. 친구니까 더 그래. 사귀는 것보다는 의지할 수 있는 친구로서 그 녀석이 어딘가 발붙일 곳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 남친으로서는 별로지만, 친구로서는 나름 괜찮은 녀석이니까.”
“…….”
친구들이 차마 뭐라 말을 찾지 못하겠는지 기이한 얼굴로 침묵했다. 은희 언니가 안절부절못하다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은하야, 음, 나는 네가 좋아한다는 그 녀석에 대해 잘 모르겠는데, 너희들 말을 들어 보니까 그 녀석한텐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지? 그런데도 고백 안 하고 지켜보겠다는 거고.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사랑은 생각보다 쉽게 잊히지 않아. 정말 지켜보는 걸로 괜찮겠어?”
“나도 동감이야.”
한수가 인상을 잔뜩 쓰며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감정은 그리 간단한 게 아니잖아.”
맞아. 그리 간단한 게 아니지. 하지만 나는 이미 결심했다. 뭣보다 내가 그 녀석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다. 미안하고, 괴롭고, 가슴 아파서, 그 외엔 생각해 낼 수 없다. 해답을 제시할 수 없는 문제에 벅찰 그 녀석에게 더 이상 짐을 주고 싶지 않다. 친구로서 옆을 지키며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 갈 생각이다.
“괜찮아. 따지고 보면 그냥 평범한 짝사랑이잖아? 난 그냥,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좋아하지만, 사귀기에는 꺼림칙하고, 그래도 좋아하니까 지켜 주고 싶다고 해야 할까……. 말도 안 되는 먼치킨이라 누구한테 당하고 올 일은 없겠지만, 의외로 정신적으로는 좀 약하더라고.”
“은하야…….”
“좋아하는 감정은 쉽게 안 사라지니까, 그냥 좋아한다는 이유로 계속 친구 하려고. 고백하는 건 그 녀석한테 죄를 짓는 일 같아서.”
성진과 오랫동안 친구였던 소영이는 그 말을 이해했다. 부모는 없고,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미칠 정도로 찾아 헤매는 한 사람. 그의 곁에 항상 있어 주는 것은 친구뿐이다.
인하는 울분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짓는 건 그 녀석이야. 그 녀석이 나빠.”
“맞아! 감히 은하한테 짝사랑을 하게 하다니!”
“괜찮아. 안 사귄다는 건 좋은 선택이었어. 친구인 내가 봐도 그 녀석은 나쁜 놈이야. 그냥 개한테 물렸구나 생각하고 끝내.”
소영이가 울먹이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아니, 나는 전혀 안 슬픈데. 그렇게 괴롭지도 않은데. 그저 그 녀석에게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고 미안해서…….
그때, 내 시야에 소리 없이 움직이는 한 모습이 포착됐다. 밖으로 나가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인성은 말없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작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 발견한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다. 나를 끌어안고 있던 소영이가 팔에서 힘을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은하야, 저기, 인성이는……쟤도 이유가 있어서…….”
“……미안한 짓을 했네.”
딱히 네 짝사랑에 공감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당황하며 어떻게든 변명을 늘어놓으려 하던 소영이의 목소리가 멎었다. 소영이는 동요한 눈으로 내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쓰게 웃었다.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