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81
친구들이 하나같이 깜짝 놀랐다. 아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눈치채지 못한 사람이 한 명(현호) 있었지만, 대개 알아들었다. 우리 사정을 제일 모를 은희 언니마저 금세 상황을 유추해 냈다.
“쟤 은하를 좋아했구나.”
“네……그런 것 같더라고요.”
“알고 있었어……?”
저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이라니.
“그럼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티가 나는데 모를 리가 없잖아.”
“윽……하긴.”
친구들은 모두 아차 하더니 이내 납득해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전 내용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던 현호도 이번 이야기는 알아듣고 안쓰러워하며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불쌍한 녀석. 처음부터 거절당했던 거였어.”
민희가 맞장구쳤다.
“그러게. 이제 보니 은하 철벽녀였네, 철벽녀.”
“사실 한수의 짝사랑도 알고 있었고.”
“정말.”
동정 여론이 거세졌다. 소영이가 현관문을 바라보며 가라앉은 눈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소영아, 너는 괜찮겠어?”
“뭐가?”
소영이는 내 마음을 알고 싶어서 진실 게임을 기회로 삼아 내 진심을 이끌어 냈다. 그런데 소영이는 원래 인성을 응원하는 입장이었다. 최인성, 나, 이성진, 서로 마음이 향하는 상대가 다른 상황에서 나를 응원하겠다고 나섰으니.
“원래 인성이를 응원했잖아. 근데 방금 말한 거 인성이 입장에서는……많이 섭섭할 일이잖아.”
“흥. 돕는 거 때려치우겠다고 말한 게 언젠데.”
“뭐?”
“행동으로 나서지 않고 감정만 질질 끈 지 몇 년째니. 그래서 미리 말했어. 인성이 네가 은하를 좋아하는 건 알지만, 난 은하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걸 더 응원할 거다. 그러니까 후회하기 전에 제대로 하라고!”
“그런데 결국 아무것도 못 했지?”
“은근히 불쌍하네.”
소영이가 속상한 눈으로 주먹을 쥐었다. 한수가 쯧 혀를 찼다.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야, 쟤 왜 혼자 밖에 나와 있……뭐야? 왜 그래?”
성진이었다. 그는 냉장고 털이에 성공했는지 손에 피자와 과자와 소시지를 들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경직되어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를 환영했다.
“피자다!”
“진실 게임은?”
“음……끝났어.”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피자 먹고 잘래. 빨리 줘.”
“넌 그렇게 먹고도 배가 고프냐.”
성진은 곧바로 피자를 받아 드는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친구들 사이의 경직된 분위기는 풀렸다. 그러나 진실 게임의 여파는 남아 있었다. 친구들은 이성진을 한동안 맘에 안 드는 눈으로 노려보더니 이윽고 서로 눈으로 대화를 나누고는 응징을 가했다. 발차기와 주먹이 한 대씩 이성진에게 날아갔다.
“윽…갑자기 뭐야?”
“그냥~. 맘에 안 들어서.”
“흥.”
“짜증 나.”
“이것들이…….”
나는 봤다. 방금 은희 언니도 은근슬쩍 성진의 머리를 때렸다. 생각보다 참, 탈이 많은 수련회 마지막 날이다. 나는 풋 웃었다.
“미안, 진실 게임 하다가 네 뒷담이 나와 버렸어.”
“원인은 너였냐…….”
“미안.”
언짢은 기색을 보이는 성진을 향해 나는 손을 내저으며 다시 한번 사과했다. 말투는 가벼웠을지언정 거기에 담긴 마음은 진심이었다. 정말로 미안해하고 있어. 몇 번의 환생 끝에, 마지막엔 반드시 너와 여신님의 곁에 돌아갈 것이라고는 해도, 그래도 고개를 들지 못할 만큼 미안해하고 있다. 내 이기심 때문에 이렇게 변해 버린 너에게.
“하아…….”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수련회가 끝나고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최인성이 내게 고백을 했다.
“미안…….”
끝끝내 인내하다가 겨우 용기를 짜내어 한 고백임을 알지만, 나는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며칠을 고민한 걸까. 얼굴은 창백했고 눈가는 거뭇했다. 차일 걸 각오한 고백. 인성은 애처롭게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어차피 고백하지 않을 거라면……나랑 사귀는 게 더 낫지 않아? 나, 잘할 거야. 원한다면 뭐든지 할게. 기념일도 잘 챙기고, 선물도 많이 하고, 절대 바람 같은 건 피우지 않을 거야. 아, 바람 안 피우는 건 당연한 일이지. 하여간 정말로……노력할 거야.”
“미안해.”
나는 숨을 들이켜며 다시 한번 사과했다.
“너한텐 언제나 미안했어. 정말로.”
“…날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너한테 미안하니까 이 이상 사과할 짓은 하고 싶지 않아. 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알고 있고, 나는 너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런 상태로 사귀면 괴로운 건 너야. 서로 괴로울 거야.”
인성은 쓰린 눈으로 고개를 숙이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나와 키가 비슷했지만, 지금은 차이가 많이 난다. 역시 남자구나. 그는 잘생겼고, 우유부단할 정도로 다정하지만, 때로 유쾌하지만, 그뿐이다. 그저 좋은 친구다.
“전에도 이랬지……. 전에도 이렇게 포기할 뻔한 일이 몇 번이나 있었어…….”
“…….”
“네 반지를 보고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들었을 때도 그랬지……. 지금 생각해 보면……그때 했던 말은 전부……이성진을 좋아하는 걸 숨기기 위해서였구나…….”
나는 입을 열려다가, 멈칫했다. 아니야. 얼버무리기 위한 말은 아니었어. 전부, 모두 진심이었어. 왜냐면 그 사람은 이성진의 전생이니까.
지금도 좋아한다는 말도, 찾고 있다는 말도, 다시 만났다는 말도…….
“……전부 거짓은 아니었어.”
“…….”
그는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아슬아슬하게 울음을 참고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있잖아……조금만 더 들어 줘. 포기할게. 이걸로 포기할 테니까…….”
응.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하게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몇 번이나 숨을 고르며 하고자 했던 말을 했다.
“널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정말, 멍청했고, 내 세상밖에 몰라서……우리가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고 생각했었어. 기억해? 인하한테 지고서, 진짜 꼴사납게 날뛰었잖아.”
“……기억해.”
“그걸 네가 막았었잖아. 그때 난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어. 인하가 대등했다면, 너는 날 압도했지. 공격은 사라지고, 내 마법을 아무렇지 않게 꿰뚫고, 눈앞에서 나를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
“그걸 잊지 못해서, 너를 쫓아 이 학교에 왔어.”
나는 그를 이 학교에서 다시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나는 성진에게서 느낀 그 녀석의 흔적이나 불쾌감 때문에 최인성은 안중에도 없었다. 인성과 관련된 이야기는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고 신경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돌이켜 보면 이토록 명백한데도.
“너는 내 상상과 너무 달라서……. 당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소심했고, 나를 기억하지도 못했고, 말을 걸어도 무뚝뚝하고 별다른 대답도 안 하고……. 그래서 내 착각이었구나 했어. 굉장히 강했지만, 강한 것 외에는 다 내 착각이라고……! 하지만…….”
가린 손 아래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래도 상냥해서……웃으면 예쁘니까……계속 눈으로 좇다 보면 예쁜 점만 눈에 들어오니까……. 친해질수록 신경 써 주고, 그게, 그러니까, 좋아서…….”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그는 있는 마음을 전부 쥐어짜 냈다.
“……많이 좋아했어. 정말로, 착각이 아니라.”
필사적인 그의 진심에 나는 가슴이 벅찰 정도로 감동했다. 비록 차이기 위한 고백이더라도, 비록 마음을 받아 줄 수 없더라도, 필사적으로 모든 마음을 전부 쏟아붓는 그의 진심이 아플 정도로 가슴에 닿았다. 나는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고마워. 이건 진짜야. 나 고백받은 건 처음이야. 정말로 고마워.”
이번 삶에서 나에게 이토록 진지한 사랑을 준 건 그가 처음이었다. 그 마음을 다해 고백한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가 울음을 애써 참고 있음을 깨닫고 돌아섰다. 멀리에서 들리는 울음소리를 애써 모르는 척했다.
은희 언니의 결혼식 날, 나는 나이답게 차려입고 밖을 나섰다. 하늘이 조금 흐렸지만 비가 올 정도는 아니다. 은희 언니는 우리 다섯 명에 더해서 성진과 인성과 소영이의 몫까지 청첩장을 준비했다.
“틀림없이 사람이 엄청 많이 올 거야. 성후 오빠는 초등학교 담임이고, 은희 언니는 은희 언니대로 인맥이 넓고…….”
“맞아 맞아.”
준비를 마치고 기숙사 밖에 나가자 이미 나와 있는 남자 네 명이 보였다. 성진, 한수, 현호……그리고 인성. 분위기가 잠시 어색해졌다. 인성이가 내게 고백했다 차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 명 정도다. 눈치 빠른 민희와, 절친인 성진이와 소영이다. 그 외에 알면서 모른 척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가만히 인성을 마주했다. 그래도 피하지 않고 나왔다. 어떻게든 마음을 정리하고 있다는 거겠지. 인성은 경직된 몸짓으로 어떻게든 웃었다.
“안녕.”
나는 마주 웃었다.
“안녕.”
사정을 알고 있던 친구들의 숨통이 트였다. 평소처럼 인사하고 있던 친구들이 의아한 눈으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나는 평소처럼 인하의 옆에 따라붙었다. 결혼식장은 여기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가려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텔레포트를 써야 했다. 이동 수단은 당연히 텔레포트다. 장거리 텔레포트가 가능한 사람이 여기에 세 명이나 있는데 뭐 하러 돈을 써.
“문이. 좌표 이동.”
“그 정도는 네가 직접 해라.”
“이것도 내 마법인데 뭐 어때.”
성진과 내가 대화를 나누자 인하가 불만스러워하며 내 팔을 꽉 쥐었다. 거기 아가씨, 팔짱은 남친이랑 끼면 안 되겠니. 요즘 친구들은 나와 성진이 대화를 나누는 걸 볼 때마다 짜증을 낸다. 이번만큼은 진짜 이 녀석의 잘못이 아닌데 말이죠.
문이와 게이트를 이용해서 장거리 텔레포트를 했다. 학교에서 식장까지 20km는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 이 정도는 간단했다. 역시 나는 공간계마법과 잘 맞는다.
“와, 역시 크네.”
“사람 많다.”
유정 언니와 인호 오빠는 도착했을까? 우리는 커다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예식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 정도 크기면 빌리는 데 상당히 돈이 깨졌겠는걸? 하긴, 두 사람은 괜히 B랭크 마법사가 아니다. 어쩌면 이름만 대도 빌려주는 곳이 있을지도 모르지.
문안을 슬쩍 보니 아는 얼굴이 꽤 보인다.
“우선 이름부터 쓰자.”
우리는 초대객 명단에 이름을 썼다. 인하가 대표로 이름을 쓰는 사이, 나는 가져온 축의금 봉투를 하얀 상자 안에 넣었다. 신세를 많이 진 만큼 두둑이 넣었다. 나는 나이치곤 돈을 많이 벌었으니, 이럴 때 써야 하지 않겠어.
“얼마나 넣었어?”
친구들도 차례대로 축의금을 냈다. 나는 오른손을 쫙 폈다.
“와우. 역시 은하야.”
“이럴 때 통 크게 써야지.”
“재벌 2세의 말씀이십니다.”
“진짜 재벌이면 0이 2개쯤 더 붙었지!”
소영이가 짜게 식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 정도는 평범하게 가능한 선 아닌가? 신랑이랑도 신부랑도 친하잖아.
재잘재잘 떠들던 우리는 곧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 소영이와 인성, 성진은 잠깐 산책하고 오겠다고 했다. 하긴, 이 세 사람은 대기실까지 찾아갈 사이는 아니지.
신부 대기실 문을 똑똑 두드리니 은희 언니의 친구인 주연 선배가 문을 열어 주었다.
“어라, 어서 와. 은희야! 후배들 왔다.”
“앗, 은하야!”
“앉아 있어요, 언니. 옷 망가질라.”
“언니 너무 예쁘다!”
순백의 드레스를 차려입고 베일을 쓴 은희 언니는 그야말로 눈부시게 예뻤다. 머리 위에서 은색 티아라가 반짝였다. 우리는 머리끝에서 발아래까지 감탄하며 살폈다.
“와 줘서 고마워.”
“당연히 와야지!”
신부 대기실에는 사람이 많았다. 대부분은 은희 언니 친구일 거다. 우리가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다.
나는 다시 은희 언니를 보았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부라더니, 그 말이 옳다. 신부 화장을 한 얼굴이 반짝반짝 빛난다. 머리카락은 곱게 틀어 올렸다. 드레스 밑단은 주름졌고 망사 레이스가 겹쳐 있으며 하얀 장미 코르사주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상체는 보석이라도 뿌렸는지 반짝반짝 빛났다.
“정말 너무너무 예뻐요.”
“굉장한 결혼식이 되겠던데?”
“너희도 참.”
은희 언니가 장갑을 낀 손으로 내 손을 꽉 잡았다.
“사실 지금 긴장돼서 죽겠어. 으아아아……무서워…….”
“괜찮아요. 분명 멋진 결혼식이 될 거예요.”
“그럼! 누구 결혼식인데.”
민희가 자신만만하게 내 손과 은희 언니의 손을 감싸 쥐었다. 은희 언니의 눈가가 붉어졌다.
“훌쩍.”
“야! 식도 안 올리고 울긴 왜 울어! 바보야, 울면 화장이 도루묵이야.”
“아, 알아. 안 울었어.”
은희 언니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우리는 활짝 웃으며 은희 언니와 인사를 나누고 대기실에서 나왔다.
그다음엔 예식장 근처 어딘가에 있을 성후 오빠를 찾았다. 우리는 다행히 머지않아 결혼식을 축하하러 온 하객들과 인사를 하고 있는 성후 오빠를 발견했다.
“오빠!”
“얘들아.”
성후 오빠가 우리를 돌아보자 주위에 있던 어린아이들이 우리를 돌아보며 깜짝 놀랐다.
“헉…은하 님이다!”
“안녕하세요!”
“응……안녕. 괜찮다면 ‘선배’라고 불러 주렴.”
“네, 선배!”
이렇게 새파란 후배도 내 얼굴을 알고 있는 거냐고. 심지어 ‘님’이라니. 나는 속으로 스트레스를 삼키고 성후 오빠를 향해 축하한다며 웃었다. 성후 오빠도 오늘은 제대로 차려입었다. 회색 베스트에 빨간 넥타이를 매고 있고 가슴에는 꽃과 리본이 달려 있었다. 약간 긴 머리카락 아래로 붉은빛을 품은 귀걸이가 흔들렸다.
“와 줘서 고맙다.”
“은희 언니한테도 말한 거지만, 당연히 와야지! 누구 결혼식인데.”
“그래. 고맙다.”
“결혼식 기대하고 있을게요.”
성후 오빠가 드물게도 다정하게 웃었다.
“그래.”
우리는 잠시 후 소영이네와 합류했다. 예식장 안으로 들어가니 아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우리는 우선 아는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신부석 중간 줄쯤에 앉아 있던 유정 언니와 인호 오빠와 손을 맞잡고, 아는 사람이 제일 많은 신랑석에 갔다.
스승님에게 인사를 하고 민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마침 백한 선생님이 걸어왔다. 오늘 백한 선생님은 평소 후줄근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멋들어진 정장을 차려입고 평소 귀찮다는 이유로 깎지 않던 수염을 깎고 머리를 반듯이 잘라 반올백으로 넘기니 참 훤칠했다.
백한 선생님은 스승님의 뒤로 다가오다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쉿. 완벽하게 기척을 숨긴 백한 선생님이 장난스럽게 팔을 벌리고 스승님의 어깨에 답싹 달려들었다.
“허~니, 안……푸컥!”
“떨어져라!”
그와 동시에 스승님이 주먹으로 백한 선생님의 턱을 쳐올렸다. 우와……아프겠다. 민희가 킥킥 웃었다.
“백한 쌤은 민아 쌤한테만 유독 장난을 건다니까.”
“아니, 반응이 재밌어서 말이야.”
“저걸 진짜!”
스승님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를 갈았다. 두 분 참 재미있게 노시네요. 나는 민 선생님의 귓가에 속삭였다.
“두 분 예전부터 저러셨어요?”
“응? 음……아니.”
아니라고? 의외라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민 선생님이 작게 웃더니 내게 속삭였다.
“옛날엔 오히려 누님이 백한 형을 따라다녔어. 저 형 예전에는 개발자가 아니라 학교 가드였거든.”
“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한 선생님이 가드? 굉장히 안 어울리는데…….
“진짜요?”
“그럼, 진짜지. 그때부터 괴짜였지만. 하여간 예전엔 민아 누님이 백한 형을 따랐어. 오빠라고 부르면서. 그런데 언젠가부터 저렇게 됐지 뭐야.”
나는 양 뺨을 잡으며 혼란스러워했다.
“어쩐지 상상이 안 돼요…….”
“그치? 나도 지금은 그때가 환상 같아. 그때도 누님은 누님이었거든. 사고 치는 나랑 그 녀석……아니, 준휘를 얼마나 잔소리를 하면서 휘어잡았는지. 그래서 난 지금도 누님한텐 대들지 못하겠어.”
아아, 민 선생님의 눈이 잠시 가라앉았다. 민 선생님이 ‘그 녀석’이라 표현할 만한 사람은 한 명뿐이다. 예전에……민희를 납치했던 민 선생님의 악우, 한재일. 캘리의 일원, 그 빌어먹을 놈이다.
“하지만 백한 형은 지금과는 성격이 많이 달랐어. 여전히 괴짜지만, 훨씬 냉정했었거든. 처음엔 누님을 별로 받아 주지 않고 귀찮아했어. 그게 언제부터 저렇게 역전된 건지…….”
헤에……. 하긴 처음부터 친했던 사람은 없겠지만, 스승님이 먼저 나서서 친해지려 했다니 조금 의외였다.
“유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엑. 누님, 난 그냥 제자 질문에 대답해 줬을 뿐이라고.”
“닥쳐라.”
“네엡…….”
민 선생님은 깨갱 하고 꼬리를 말았다. 나는 그것을 보고 웃음을 삼켰다.
우리는 곧 그들과 헤어져 신부석으로 향했다. 중간쯤에 앉자 언제 왔는지 제현 오빠와 천호 오빠가 다가왔다.
“여, 너희들 미리 와 있었구나.”
“오빠!”
“안녕하세요.”
제현 오빠와 천호 오빠는 세미 정장 차림이었다. 평소의 새카만 양복보다 신선한 게 어울렸다. 옆에는 몇 번 얼굴을 봤던 선배들이 앉아 있었다. 제현 오빠가 얼핏 웃었다.
“예쁘게 하고 왔네.”
“은희 언니 결혼식이잖아.”
민희가 활짝 웃었다. 오늘은 다들 최대한 꾸미고 왔다. 민희와 나는 평소에는 잘 입지도 않던 원피스를 입었다. 민희는 거기에 더해 고데기도 했다. 화장도 약간 했다. 인하? 인하는 뭐……최대한 단정하게 입었지. 원래 신부보다 예쁘면 안 되는 건데……하하하.
제현 오빠와 천호 오빠는 제일 가장자리에 있던 민희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잠깐 제현 오빠의 표정을 살폈다. 우울함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내심 안심했다.
현호가 몸을 떨었다.
“으으, 긴장된다. 이제 5분 남았어.”
“왜 네가 긴장을 하는데?”
“그냥 왠지 떨려.”
그렇게 말하는 한수도 표정이 경직되어 있었다.
알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다. 자기 일은 아니지만 무척 긴장된다. 민희도 인하도 비슷한 기분일 테지.
우리는 사귀기 전부터 두 사람을 알아 왔다. 두 사람이 사귀고, 이윽고 결혼식을 하는 오늘까지 두 사람을 지켜봤다.
“으음…….”
속닥이거나 긴장하며 가만히 앉아 있자니 곧 앞으로 누군가가 나왔다. 두 사람 다 낯이 익었다. 아까 신부 대기실에서도 만났으니까.
“아아, 마이크 테스트!”
“흠, 흠.”
연요운 선배와 김주연 선배, 성후 오빠와 은희 언니의 절친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뜻깊은 결혼식에서 사회를 맡은 신랑 한성후의 친구, 연요운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거의 아시는 분들이네요!”
“마찬가지로 사회자를 맡게 된 김주연이라고 합니다! 신부인 은희와는 중학교 시절부터 함께한 절친이에요!”
뭔가 싶었는데 저 두 사람이 함께 사회를 맡았나 보다.
“잠시 후 결혼식이 시작될 예정이니 밖에 계신 분들, 빨리빨리 들어오세요!”
“네네! 시작됩니다, 시작됩니다!”
‘으악, 두근거려!’
밖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나는 그사이 맨 앞자리를 엿보았다. 은희 언니와 성후 오빠의 가족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근데 다들 비슷한 나이로 보여서 누가 부모고 누가 친척이고 누가 형제인지 잘 모르겠다. 자리도 몇 개 비어 있었다. 아, 화촉 점화를 위해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거려나.
‘은희 언니는 외동에 편모 가정, 성후 오빠는 남동생이 한 명 있었지?’
동생이 누구인지도 헷갈렸다. 조금 과장해서, 겉보기엔 미성년자를 넘어 어린애로 보여도 실은 400살을 넘은 어르신일 수도 있으니까. 실제로 세계 랭킹 50위 안에 그런 사람이 한 명 있다. 예전에 만났던 캘리의 부단장인 하늘 마법사도 겉보기로는 성인인지 미성년자인지 알기 힘들 정도로 앳됐다. 마법사의 노화는 보통 20대~30대쯤에 멈추지만, 가끔 역행하거나 일찍 멈추는 경우도 있다.
연요운 선배와 김주연 선배는 조금 떨면서도 대화를 착착 맞춰 갔다. 은희 언니와 함께 학생회 일을 했던 만큼 손발이 딱딱 맞았다.
두 사람은 연주자를 소개했다. 그중에 성후 오빠의 동생이 있어서 다행히 동생의 얼굴을 인식할 수 있었다.
주례는 놀랍게도 백한 선생님이 맡았다.
“오늘 두 사람의 주례를 맡으신 분은……아실 분은 아실 텐데요, 한때 은희의 지도 교수이기도 했던 대현의 개발자 중 한 분, 이백한 박사님이 맡게 되셨습니다! 자, 단상으로 나와 주세요!”
헐, 처음 안 사실에 우리는 눈이 동그래졌다. 나만이 아니라 민희나 스승님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민희는 경악했고, 신랑석을 돌아보니 스승님이 막 일어선 백한 선생님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놈이?’ ……어라, 왜 입술 모양이 자동 더빙될까?
“우씨, 말도 안 하고.”
혼란스러운 시선과 박수 사이에서 백한 선생님은 깐죽거리며 대사를 내뱉었다.
“어……은희한테 부탁받고 나오게 됐는데……차라리 정현 교수님께 시키지 말이야. 그래서 한번 지인들한테 입 다물고 나와 봤다. 이런 사교적인 중책은 또 처음이네. 하하, 놀랐지? 서프라이즈.”
“선생님! 조금 정중하게 말해 주세요!”
김주연 선배가 타박했다. 네이네이, 백한 선생님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스승님이 이마를 쥐며 고개를 저었다. 옆에서 민희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화촉 점화 순서가 되자 은희 언니와 성후 오빠의 부모님을 인식할 수 있었다. 한복을 입은 은희 언니와 성후 오빠의 어머니가 버진 로드를 걸어간다. 두 분 다 평범했다. 다만 은희 언니의 어머니는 노화가 멈추지 않았는지, 제 나이에 맞는 얼굴로 보였다. 한복이 참 고왔다. 나도 한복 한 벌 구해 볼까?
단상 위에 있던 촛불이 전부 점화되었다.
“그럼 신랑 신부의 입장에 앞서, 영상을 한 편 감상하겠습니다. 이 녀석들이 얼마나 커퀴벌레였는지 한번 보시죠. 어휴.”
“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