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84
“으음……모르겠다.”
나는 꿈속을 조금 더 돌아다니다가, 이내 백한 선생님의 꿈을 찾아보았다. 백한 선생님의 꿈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감으로 길을 걷다 보니 그럴듯한 문이 나왔다. 위쪽이 둥글게 휜 하얀 문이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길쭉한 문고리를 살짝 돌려 보니, 문이 잠겨 있었다. 철컥, 철컥. 몇 번 더 움직여 보았지만 잠긴 채 열리지 않았다.
“끄응, 김새네.”
잠겨 있는 방을 억지로 열고 들어갈 수는 없다. 나와 백한 선생님은 과연 얼마나 친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아는 한, 백한 선생님은 소수의 사람들과 어울린다. 스승님한테는 유독 엉겨 붙고, 민희를 귀여워한다. 은희 언니는 그의 첫 제자다. 인하의 선생님인 강정현 선생님과도 뭔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스승님과 친하기 때문에 준휘 선생님이나 민 선생님과도 사이가 괜찮다. 나와는 스승님을 통해서 알게 되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관계를 이어 가고 있다. 하지만 친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별개다.
똑똑
망설이다가 문을 두드려 노크를 했다.
“실례합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유은하인데요.”
열리면 운이 좋은 거고 열리지 않으면 그뿐이다. 열려 있는 날이 있을 수도 있으니 그때 또 놀러 오면 되지.
그런 생각으로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 번쯤 두드리고, 말을 한 후, 기다린다. 1초, 2초, 10초, 20초. 1분이 지나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다시 노크해 보고 기다렸지만 원하는 반응은 오지 않았다. 무리구나 싶어서 어깨에서 힘을 빼고 몸을 돌리는데, 문 너머에서 달깍하고 무언가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어라, 설마?’
나는 놀라서 몸을 돌리고 문고리를 잡았다. 이번에는 아무런 방해 없이 문고리가 완전히 돌아갔다. 달깍, 문이 열린다. 놀람과 동시에 가슴에 찾아온 기대감에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문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눈부신 빛이 찾아왔다. 눈을 꾹 감고 뜨자 새하얀 방의 전경이 보였다. 눈부신 빛의 근원을 찾아보니 위쪽에 난 창에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들어온 문과 모양이 비슷한, 위쪽만 둥근 창이다. 창 너머로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앞을 보았다. 넓은 방에는 가구 하나 없이 장난감이나 잡동사니 같은 것이 잔뜩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잡동사니를 헤치고 건너편에 있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커다란 복도가 나타났다. 어떠한 건물의 복도인지 감을 잡기 힘들었다.
벽도 바닥도 황금색이다. 천장과 기둥, 창틀에조차 빼곡히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음……백한 선생님의 꿈은 어쩐지……신기하네?”
창밖으로는 푸른 하늘이 보인다. 햇볕이 따가울 정도로 눈부시다. 나는 아무 곳으로나 걸었다.
옆에 있던 그럴듯한 문 중 아무것이나 여니 서재가 나왔다. 대부분 제목만 봐도 머리가 아플 것 같은 책이었다. 수학책, 과학책, 철학책, 잿빛 책장에는 그런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조금 지나자 방금 전에 비해서 다소 밝은 분위기를 지닌 책장이 나왔다. 이 책장에는 물렁한 느낌이 풍기는 책이 많았다. 로봇에 관련된 책도 있었고 요리책 등의 취미 서적이나, 게임 관련 책도 있었다. 아마 스승님의 영향이겠지. 동성애 관련 책도 있었다. 어라, 이건 민 선생님이랑 준휘 선생님의 영향이려나?
그 외에 연애 서적이 제법 꽂혀 있었다. 『동생 같았던 그녀가 어느새 여자로 보여요.』 그런 상황에 따른 공략법을 서술한 연애 서적이었다. 나는 곧 연애 서적 제목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고는 뺨을 붉혔다.
“어라라라, 이 선생님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그 미스터리어스한 백한 선생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책 제목으로 보건대 상대는 아마 연하인 것 같다. 헤에~.
그 외에도 소설이 몇 권 있었다. 영어권 책도 많았다. 옆에는 게임 CD도 다수 꽂혀 있었다. 대부분 스승님이 속한 커뮤니티 쪽 게임이었다. 백한 선생님, 생각보다 스승님과 친한 것 같다.
책에 관심을 가지고 훑어보다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다소 그늘진 복도를 계속해서 걷다가 또 한 곳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 방은 작업실이었다.
전선과 기계가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지 그 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이어져 있었는데, 나는 그 복잡한 모습에 기겁하며 방에서 나왔다.
“와아……과연 대현의 개발자는 달라.”
다시 요리조리 둘러보며 복도를 걷는데 맞은편에서 여자가 다가왔다. 긴 갈색 머리카락을 아래로 늘어뜨린 무표정한 여자였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한순간 걸음을 멈췄다.
사람과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직감했다. 이 여자는 사람이 아니다. 로봇, 그중에서도 흔히 말하는 안드로이드라 불리는 것이다.
안드로이드의 눈동자는 사람의 눈동자와는 달리 번쩍이는 안광을 발했다. 그녀가 입을 열어 물었다.
“당신은?”
목소리에도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백한 선생님은 분명 안드로이드도 제작했던가.
“그, 저는 유은하라고 해요. 백한 선생님과는 아는 사이예요. 민희 친구고요.”
“유은하……확인했습니다. 아버지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불러 주세요.”
“앗, 네. 실례할게요.”
백한 선생님네 안드로이드는 그를 아버지라 부르는구나. 나쁘지 않은 울림이라 생각하며 나는 웃었다.
계단을 타고 쭉 내려가다가 다시 복도를 걸었다. 또 적당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앗, 빙고.”
아무래도 여긴 백한 선생님의 방인 것 같다. 책상 한쪽에는 작은 전선과 철,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부품이 흩어져 있고, 책상 위의 책장에 자료용으로 보이는 책이 꽂혀 있다. 침대는 커다랬다. 낮은 책장이 방을 빙 두르고 있었다. 그걸 책상 대용으로 쓰기라도 했는지 낮은 책장 위에 컴퓨터와 키보드가 놓여 있었다.
“방까지 들어와도……괜찮으려나.”
나는 조금만 둘러보다 나가기로 했다. 관심을 가지고 방을 쭉 둘러보는데, 왠지 책 한 권이 유난히 신경 쓰였다.
갈색 가죽 표지 책은 겉보기에는 평범했다. 펼쳐 보고 나서야 앨범이었음을 알았다. 앞에서부터 빠르게 넘겼다. 어릴 때의 사진은 별로 많지 않은 데다 때때로 사람의 얼굴이 지워져 있었다.
빠르게 장을 넘기던 손길이 어느 순간부터 느려졌다. 인하의 스승님인 강정현 선생님의 사진이 나타난 이후부터였다.
스승님의 젊었을 적 모습이 나왔다. 민 선생님과 준휘 선생님, 그 둘의 악우인 한재일의 모습도 나왔다. 나는 앨범을 넘길수록 어떠한 사실을 눈치챘다. 그건 바로……강정현 선생님과 스승님, 두 사람의 사진이 앨범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라…….’
같은 사진이어도 두 사람을 향한 감정은 달랐다. 이곳이 꿈속 세계이기에 알 수 있다. 강정현 선생님을 향한 감정은 동경이나 존경, 친애 같은 것이었지만 스승님을 향한 감정은…….
처음에는 그저, 어린 계집아이일 뿐이었다.
나에게 친한 척 다가왔을 때는 성가셨다.
그녀는 반복해서 인사를 건넸다. 어느새 그녀의 인사를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
친해졌다.
스승님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마음이 점점 온화해진다. 그 감정이 어느 순간 얼어붙었다.
실수했다.
아냐, 난 나쁘지 않아.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그러나 그녀는 실망한 눈으로 나를 보며 시선을 피한다.
며칠이 지나도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
신경 쓰여. 아니, 내가 왜 신경 써야 하지?
감정을 못 참고 찾아가 봤지만 그녀는 분노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마음을 적시던 감정이 정체를 드러냈다. 어느새 너를 이렇게 좋아하게 됐나.
실수했다.
실수했다.
스승님과 멀어질수록 그의 마음이 필사적이 되었다. 그래, 들은 적이 있다. 처음엔 스승님이 다가가는 관계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방향이 역전되었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느 순간 앨범 속에 다시 스승님의 얼굴이 나타났다. 불퉁한 얼굴이나 백한 선생님을 받아들이고 있다.
앨범을 넘기면서 점점 알게 되었다. 앨범을 전부 넘겼을 때, 나는 확신했다.
“백한 선생님이 좋아하는 사람이……스승님이었어?!”
처음 알았다. 백한 선생님이 스승님을 소중히 여기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장난스럽고, 가족이나 친구를 대하듯 친근하게 대해서……몰랐었다. 그 눈빛을 마주하면서도, 전혀 몰랐다.
이어서 나는 침대 옆에 있는 액자를 보고 또 한 번 흠칫했다. 액자에는 스승님과 백한 선생님이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으으……뭐야, 이거. 난 이런 걸 알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가슴 한구석에서 죄악감이 자라났다. 꿈속을 헤매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알게 되는 일이 가끔 있다. 이번 일이 그런 경우다. 감정에 동화해서는, 앨범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아니었다면 백한 선생님의 감정을 눈치채는 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겠지. 가슴이 뜨끔뜨끔 아파 왔다.
“으으…….”
나는 신음을 흘리며 반사적으로 창문을 열었다. 그러다가 흠칫했다.
창문 너머로 비치던 맑은 하늘은 온데간데없었다. 꿈은 건물 안에서 끊겨 있다. 풍경은 풍경일 뿐이다. 꿈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니……하나 있었다.
검은 공간에서 그것은 유독 선명히 보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숲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 낯익은 집이 서 있었다. 스승님의 집이었다.
“아──정말, 이렇게 나오기냐고.”
나는 창가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백한 선생님의 감정을 엿본 일 때문에 한동안 꿈 훈련을 하기가 꺼려졌지만, 이번에 가기로 결심한 곳은 성진의 꿈속이다. 반드시 가야 한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오지 말라고 했을 때 순순히 찾아가지 않았을 테지만, 그 녀석의 꿈은 예외다. 알기 위해 찾아가는 거니까. 나는 며칠 만에 다시 꿈속 길을 밟았다.
“끄응…….”
성진의 꿈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녀석은 내 곁에 있었다. 한 걸음 옮기는 것만으로 문이 눈앞에 나타난다. 문제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황색 문은 언젠가 보았을 때처럼 사슬로 꽁꽁 감겨 있었다. 나는 똑똑 노크를 했다.
“성진아, 난데, 들어가면 안 돼?”
뭔가 반응이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온 반응이 생각보다 명확했다.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헐, 이 자식 설마 꿈과 관련된 재능도 있었던 거야? 아니면 무의식적인 대답인가?
“내 꿈엔 들어오지 마.”
“네가 있으면 괜찮잖아.”
“꿈에서 깬 다음에 보자고.”
문에서 ‘거절’이라는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다. 하, 이건 안 되겠는데. 당분간 또 보류인가…….
‘저번에 한 번 들어갔던 적이 있는 만큼 항상 이런 건 아닌 것 같고, 말하지 말 걸 그랬나?’
나는 분한 마음에 발을 굴렀다. 잠시 망설이다가 전생의 그 녀석의 이름을 불러 보려 했지만, 이번에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쓴웃음을 짓다가 이내 심통이 나서 고개를 휙 돌렸다.
씨이, 두고 봐! 마음이 약해지면 바로 파고들 테니까! 되짚어 보면 이상한 다짐이었다. 무슨 인간을 타락시키려는 악마도 아니고.
나는 마지막에 찾기로 한 꿈을 먼저 찾기로 했다. 그곳은 아주 먼 곳에 있다. 찾고자 하는 이는 딱 한 번, 그것도 꿈에서만 만났던 사람이다. 단순히 꿈속이라 표현하기에는 좀 더 본질적인 곳에 있다. 이를테면 저승과 이승의 경계 같은 곳이다. 찾아가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정도다.
나는 꽤 긴 시간 동안 목적 없는 사람처럼 여기저기 떠돌다가 결국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무래도 그럴듯한 기운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성진의 꿈에는 들어갈 수 없고, 그녀의 세계에 찾아가기엔 아무래도 역량이 부족한 것 같고, 이거야 원, 목표가 너무 빨리 사라졌잖아.
“끄응……내일부터는 수면 훈련이나 할까…….”
정처 없이 가는 데로 떠돌다 보니 자연스럽게 헤매는 공원에 들어서게 되었다. 오가는 흐린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유독 선명한 노란색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보다 흐렸던 아이의 몸이 나를 보자마자 선명함을 되찾았다.
아이가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또렷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언니…?”
아이가 고개를 숙이며 잠시 표정을 흐렸다.
“……아. 나, 또…….”
아이는 이내 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안녕하세요, 언니. 또 만나네요.”
“그래, 안녕…….”
“언니는 항상 여기 있어요?”
“아니, 그건 아냐. 여기는……훈련하러 오는 거야.”
“훈련요?”
“응. 마법 훈련.”
아. 아이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언니는 꿈과 관련된 마법을 가지고 있다고 했죠.
“그럼 자주 오나요?”
“아마 당분간은 자주 올걸?”
“와아!”
그녀는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아이답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기뻐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저도 자주 여기에 오는 것 같아요. 정신을 차리면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래도 언니의 얼굴은 기억나더라고요. 참 이상해요.”
“이상한 건 아냐. 꿈이니까.”
“꿈이라서?”
나는 순진무구하게 묻는 소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꿈에서 깨면 꿈 내용이 잘 기억이 안 날 때가 많지? 그것과 똑같아.”
“응! 알아요. 전에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는 꿈을 꾼 적이 있어요. 그랬는데 일어나니까 꿈이 기억나지 않는 거예요. 참 이상했는데, 엄마도 원래 꿈은 그런 거라면서…….”
말을 잇던 아이의 표정이 갑자기 흐려졌다. 아이는 저번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이가 훌쩍이며 눈가를 닦았다.
“흑……흐윽……. 엄마가 보고 싶어요……. 엄마아…….”
아이가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당황하며 아이의 등을 두드렸다. 서툰 위로였지만 아이가 내 품에 몸을 기댔다.
‘엄마랑 떨어진 걸까? 아니면 설마…….’
왜 엄마가 보고 싶은 건지, 혹시 이제는 만나는 못하는 건지 차마 물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아이를 위로해 주다가 꿈에서 깼다.
실습이 있는 날 친구들과 다시 만났다. 전부는 아니었고, 성진이, 소영이, 현호, 시하, 이렇게 네 명이었다.
“너 치사해. 못 들어가게 하고.”
“뭐가.”
절대 들어오지 말라며 차갑게 내친 주제에 잊어버렸단 말이야? 살짝 열이 올랐다.
“꿈속에.”
그러자 성진이도 물러나지 않고 인상을 찌푸렸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
“…….”
“네, 자 자.”
성진이 나를 포함한 친구들과 다투는 것은 일상다반사다. 그럴 때마다 몇 사람이 나서서 말린다. 이번에는 그 역할을 현호와 소영이가 맡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고 있던 우리를 떨어뜨렸다. 소영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 전에 거절하는 사람 꿈은 안 들어간다고 했잖아.”
“그렇긴 한데…….”
그렇지. 원래는 그래야 하는데……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전에 쟤 꿈에 들어갔을 때 느낌이 이상했거든. 그걸 확인하고 싶었다고나 할까…….”
“들어오지 마. 잘못하면 정신이 회까닥 갈 수도 있다.”
성진은 시비 거는 말투로 머리를 가리키며 검지를 빙빙 돌렸다. 나는 울컥해서 받아쳤다.
“뭐? 그럴 일은 절대 없거든? 정신력……이걸 정신력이라 해야 하나? 하여간 난 정신적 타격은 잘 안 받는다고. 어느 쪽이냐고 하면 꿈에서 더 강하고.”
“너랑 나는 상극이니까.”
“그래도 그렇지…….”
나는 툴툴댔다. 하지만 예민한 부분인 것 같아 이 이상 뭐라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미리 온 공지를 따라 박물관으로 향했다. 오늘 우리가 할 실습은 일일 경비원이다. 우리가 오늘 경비를 맡게 된 수려 박물관은 나름 괜찮은 경비 체계를 갖춘 장소였지만, 며칠 전부터 뭔가 이상한 낌새가 잡혀 이번에 경비 수를 늘렸다고 한다. 우리는 저녁 경비였다. 박물관이 문을 닫은 후인 저녁 8시부터 새벽 2시까지 경비를 하게 된다.
“3학년이 되니까 이런 실습도 하네.”
“소영아, 시하야, 너희 둘은 전에도 경비 실습을 했었다고 했지? 잘 부탁해.”
웃으며 말하자 소영이는 어려울 것 없다며 손을 내저었고, 시하는 쑥스러워하며 뺨을 붉혔다. 시하가 처음 전투 마법사 지망이라는 걸 들었을 때는 상당히 의외라고 생각했었다. 어렸을 때의 순한 인상이 박혀 있어서 그럴까. 오히려 예슬이가 서포트로 나가고 있다고 들었을 때는 확실히 겉으로 보이는 성격과 적성은 다르구나 싶었다.
박물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를 집합 장소로 정했는지라, 우리는 금방 박물관에 도착했다. 박물관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전시 구역 정문은 완전히 닫혀 잠겨 있고, 업무 구역 건물은 열려 있다. 박물관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가 입고 있는 교복을 알아보았는지 우리를 돌아본다. 나는 안경을 쓴 채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귓가를 매만졌다. 인식 방해 아이템, 너만 믿는다!
“대현에서 온 학생인가요?”
“맞아요. 처음 뵙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하고 열린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행정실에 당직으로 보이는 사람이 남아 있었다.
“대현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남자는 서류를 꺼내 무언가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명단이 필요해서 그러니 여기에 사인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
잠시 서로의 눈치를 보는 가운데 현호가 앞으로 나섰다. 현호는 똑바로 이름……을 쓰려다 꼬집혀서 한글인지 뭔지 모를 사인을 만들어 냈다. 소영이가 현호의 귓가에 속삭였다.
“생각 좀 하고 쓰세요.”
“헤헤.”
직원이 지시를 내렸다.
“지금 여기에는 여러분을 제외하고 다섯 명이 더 경비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예비 열쇠를 드릴 테니 한 분은 림하의 학생과 함께 감시 카메라를 봐 주시고, 나머지는 인원을 나눠서 건물 주변과 내부 순찰을 부탁드립니다. 수상한 사람이 있으면 여기 적힌 번호로 연락 주세요. 저는 오늘 당직이라 12시까지 남아 있을 겁니다.”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림하라면……림하 고등학교인가요? 들어 본 적 있어요.”
“네. C랭크 한 분, D랭크 두 분이 오셨습니다.”
“와…….”
아직 고등학생인데 C랭크라. 생각보다 실력 있는 사람이 와 있다. 대현에 다니다 보면 감각이 마비될 것 같지만, 사실 20살 이전에 C랭크에 진입하는 마법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원래 근무하던 두 분도 오셨습니다. 한 분은 C랭크죠.”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열심히 할게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남자가 웃었다. 아이템으로 성진의 외모를 가린 보람이 있는지,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요하지 않았다.
직원은 그 외에도 우리에게 순찰 루트나 문을 잠가 두어야 할 곳 등 주의점을 일러 주었다. 일하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기존 경비원의 연락처를 줄 테니 그들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우리는 필요한 사항을 전해 들은 후 유니폼 조끼를 받고 인사를 하며 자리를 나섰다.
“누가 CCTV 감시할래?”
“은하가 하면? 앉아서 하는 일 잘하잖아.”
소영이가 넌지시 제안했다. 그러나 나는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다. 모르는 사람이랑 단둘이서 CCTV 감상이라니……막막하다.
“아니, 난 건물 안 순찰할래. 좀 구경하고 싶어.”
“그래? 그럼 난 바깥 순찰할까.”
“나, 나는 은하랑 같이 관내 순찰할래…….”
“그래?”
소영이는 바깥, 시하는 나와 같이 관내, CCTV실은 성진이 맡기로 했다. 나는 당황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엑. 너 괜찮겠어?”
“뭐가?”
내 물음에 성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CCTV실에 다른 학교에서 온 선배도 있잖아. 너라면 또 첫 만남에 시비 털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소영이는 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성진을 훑어보았다.
“정정! 나 CCTV실 할래. 현호야. 성진이랑 같이 바깥 순찰해.”
“오키오키!”
휴. 나와 시하는 반사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서로를 보며 어색하게 눈을 깜빡였다. 성진이 살풋 인상을 찌푸렸지만 스스로도 자기 성격을 아는지 딱히 반론을 하지는 않았다.
“그럼 이따가 봐.”
“이따가 봐.”
우리는 서로를 향해 인사하며 헤어졌다. 순찰 루트는 기억력마법까지 써서 머릿속에 넣어 뒀다. 그러지 않아도 문자마법으로 재현할 수 있지만.
나와 시하는 순찰 루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복도를 아무런 어려움 없이 걷다가 창가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직 하늘에 푸르스름한 빛이 남아 있었다. 몇 분 더 있으면 완전히 암흑으로 변하리라. 창문 한켠에서 보름달이 빛났다. 환한 밤이다.
“손전등……필요해?”
“응? 아직 괜찮은데…….”
어색하게 묻자 시하는 작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 얼굴 뒤로 어린 시절의 그림자가 얼핏 보였다.
‘……그 이후로 시하랑 단둘이 있게 된 건 처음, 이었던가…….’
어릴 때부터 시하는 수줍음이 많았다. 날뛰는 친구들 사이에서 당황하기도 했고, 갑자기 주목을 받으면 부끄러워하거나 얼굴을 붉혔다. 그래서 나와 시하는 맞는 점이 꽤 많았다. 시하는 수줍어하면서도 민희의 성격에 면역이 되어서 그런지 친구들 사이에서 잘 어울렸다. 해맑고, 사심 없이, 그렇게 어울렸던 순간이 우리에게 있었다. 있었더랬다. 그때는 시하도 친한 친구였다.
시하는 그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그저 많이 자랐을 뿐이다. 여전히 수줍음이 많고, 어린애답게 순진무구했던 그때와는 달리 침착해졌다. 조곤조곤한 말투가 기억에 남아 있다. 가끔 친구들에게 휘둘릴 때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며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 모습도 낯이 익다. 단지 이름을 부르는 대상이 달라졌을 뿐이다.
몇 년 전 굉장히 속상해하며 울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 아무렇지 않구나.
갑자기 기분이 굉장히 이상해졌다. 옛날 일이 너무도 갑작스럽고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자연스럽게 잊힌 것이었는데. 단둘이 있어서 그런 걸까?
시하와 우리의 관계는 급격히, 조금씩 달라졌다. 절친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이로, 아무것도 아닌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를 쌓았다. 그걸 말로 표현하자면 ‘어색한 사이’다. 친구도 아니고, 옛 친구도 아니고, 반 친구를 대하는 것이라기에는 상대의 행동이 유별나다. 그것이 굳어졌다. 그게 당연한 것마냥 여겨지기까지 4년 정도가 걸렸다.
‘기분이 이상하다…….’
시하와 우리의 관계는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나는 어색함을 가슴 한편에 둔 채 루트를 기억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로 말이 없었다.
발소리만이 이어졌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잠긴 문이 보였다. 열쇠는 내가 가지고 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서 다시 잠갔다. 전시실 안으로 들어가자 아까와는 조금 다른 차분함이 느껴졌다.
이곳은 광석 박물관으로, 여기에는 마력석 원석을 전시해 놓았다. 나는 눈으로 원석의 마력을 훑었다. 원석에 담긴 마력의 질은 특별히 좋다고 할 수 없지만, 저 중에는 아주 오래전에 발굴된 것도 있다. 그것을 생각하면 역사적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예쁘다. 훔쳐 가지 않을까 조심하는 이유가 있구나…….”
이곳은 창문이 적다. 우리는 손전등을 켰다. 나는 시하의 속삭임에 긍정하며 원석을 쭉 훑었다. 원석이 있는 장소를 지나자 옛 보석 장신구를 전시해 놓은 곳이 나왔다. 옛 사람들에게 보석은 그저 예쁜 장식물이었다. 그 안에 마력이라는 에너지가 있을 거라고 마력을 느낄 수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짐작할 수 있었겠나.
“예쁘네…….”
“너는……여전히 액세서리를 모으지?”
“응.”
“이런 것도 좋아하겠네.”
“맞아.”
짧은 대화 속에서 시하는 기뻐하며 웃었다. 우리는 전시실을 빙 돌았다. 쭉 걸어가는데 사람 그림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처럼 손전등을 들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거기……!””
서로가 서로를 발견한 것은 동시였다. 우리는 서로의 교복과 입고 있는 조끼를 확인하고 멈칫했다.
“아, 대현이구나. 이야기 들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