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88
쿠오오──!!
시커먼 집속 포가 나를 공격했다.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유연하게 대처하려던 나는 이내 상대의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헉…!”
적은 기괴한 키메라였다. 박쥐 같은 날개가 네 개나 붙어 있고, 팔다리는 다 합해서 네 개다. 동물이라기에는 두 발로 선다. 그러나 사람이라기에는 갈색인 데다가 파충류처럼 딱딱한 피부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금색 눈을 빛내며, 짐승과 꼭 닮은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키에에엑!!”
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어떡하지? 싸워야 하나? 나는 이 세계를 유지하는 근원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 생각하고 강한 마력을 찾아왔다. 저것이 그 근원일 가능성은 있다.
“아……어떡하지. 설마 죽여야만 하는 건 아니겠지?”
무언가가 죽는 건 참 꺼림칙하다. 동물이든, 곤충이든. 하물며 내 손으로 죽이다니. 그냥 쓰러뜨리는 건 안 될까? 기절시키면 무언가가 달라지려나?
난처해하던 나는 문득 상대의 몸에서 빛나는 금속 물체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금속 물체, 어떠한 종족인지도 모를 짐승은 팔다리와 꼬리에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 마력의 핵은, 거기에 있었다.
“아……!”
저게 핵이구나! 생각과 동시에 나는 옆으로 날아오는 마력을 막아 쳐 냈다. 건물이 어찌나 튼튼한지, 튕겨 낸 마력을 정통으로 맞고도 돌 부스러기 하나 떨어지지 않는다.
“키이이익…….”
짐승이 신음 소리를 내며 손안에 마력을 모았다. 검게 모인 마력이 응축되더니 주위에 번개를 뿌리기 시작했다. 나는 마력을 가늠하며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내 결계는 그 모든 것을 아무렇지 않게 막아 냈다.
짐승이 공격을 유지하는 틈을 타 결계를 이용하여 짐승의 꼬리와 팔다리에 붙어 있던 금속 물체를 내 앞으로 텔레포트시켰다. 키이잉?! 짐승이 당황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금속 물체를 툭툭 건드렸다. 살펴보았지만 부순다고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콰직, 콰직
비싸 보였는데,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이 세계와 닮은 마력이니 한번 부숴 보아야겠다.
“키아아아악!!”
나는 갑옷에서 마력석만 챙긴 후 비명을 지르는 짐승을 내버려 두고 다음 마력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다수의 마력이 느껴진다 싶더니, 기계병이 잔뜩 있었다.
막무가내로 마법을 쏘기에 텔레포트 한 뒤 기척을 감췄다. 기계들이 못 알아볼 정도로 확실하게 환각을 실체화해 모습을 숨겼다.
이어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봇은 그냥 부숴도 되겠지. 나는 민희의 마법을 사용해 마력석을 전부 저격해 부쉈다. 중앙에 있던 가장 큰 마력석은 간단히 깨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건 한번 조사해 봐야겠다.
“보관하려면 간이 아공간 장치라도 있어야……아, 맞다. 문이야. 이거 네 마법 안에 넣을 수 있나? 최근에 아공간 업데이트했었지?”
「문제없습니다, 마스터. 프로그램을 실행하겠습니다.」
마력석 조각 두 개를 문이 안에 가둔 뒤 다음을 향해 출발했다. 세 개, 네 개, 손쉽게 손에 들어왔다. 문제는 마지막 다섯 개째였다.
쾅!
“어……어떻게 해……. 몸 안에 있잖아…….”
겉보기에는 곰같이 생긴 동물이었는데, 마력석이 몸에 떡하니 박혀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끙끙댔다.
“누가 저런 짓을 한 거야. 애가 가엾지도 않나. 마, 마력석은 꼭 빼내야 하나…? 몸 안에서 깨지면……저 아이한테 위험한 거 아냐? 있잖아, 저거 없어지면 쟤한테 안 위험해?”
나는 마력석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봐도 심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마력이 저 짐승에게 생기를 주고 있다. 나는 곰의 공격을 결계로 어렵지 않게 막으며 울상을 지었다. 문이가 대답했다.
「저는 그런 것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마스터.」
“그치만 이것들이 결계의 핵일지 아닐지 확실하지 않은데 무작정 깨부쉈다가……실험 정신 때문에 쟤가 죽거나 많이 아프면 그건 너무 불쌍하잖아. 그치?”
「동물을 좋아하는 마스터에게는 물론 그렇겠지요.」
나는 눈을 꼭 감으며 외쳤다.
“안 되겠어! 좀 더 조사한 다음에 올래!”
나는 게이트를 사용하여 성 바깥으로 나갔다. 기분이 착잡했다. 나도 빨리 돌아가야 하는 건 안다. 아는데……그런 생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기에는 죄책감이 너무 컸다.
성 바깥으로 나온 나는 깜짝 놀랐다. 어느새 저녁이 되어 있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난 건가, 아니면 성안의 시간이 이상한 건가……. 혹은 이곳의 시간이 원래 세계와는 다른 걸까?
“문이야, 내가 여기 온 지 얼마나 지났어?”
「마스터의 체감 시간으로 약 10시간이 경과했습니다.」
“그래? 뭔가 이상하지 않아? 벌써 저녁이라니. 처음 왔을 땐 새벽이었잖아.”
「이 세계의 시간은 시간대가 좀 다른 걸지도 모르죠.」
“역시?”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문이야, 마력석 좀 꺼내 봐.”
「네, 마스터.」
나는 고성에서 모은 마력석을 전부 주위로 둥둥 띄운 뒤 눈을 개방했다. 이어서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성안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아까에 비해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근본이 되는 마력은, 아무래도 내가 들고 있는 것이 아닌 듯했다. 저 성에 힘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저 성 자체가 아닌가 싶다.
나는 검청색 마력석을 툭툭 두드려 보았다. 검청색 마력석은 분명 저 성과 연결되어 있다. 고민하다가, 검청색 마력석을 봉인해 보았다. 그러자 성에서 뿜어내는 마력의 양이 줄었다. 이건 출력 제어 장치, 혹은 동조 장치 같은 건가.
결국 이 마력석을 건드리는 정도로는 이 세계에 별다른 변화가 생기지 않는 모양이다.
‘게다가 처음에 살펴봤을 때보다 세계가 더 넓어졌어.’
나는 하늘에서 또 한 번 세계를 훑어보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세계의 경계선이 보이지 않았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이 세계는 내 감각을 넘어서 있다는 걸.’
아마 머리가 터질 정도로 집중하지 않으면 나는 이 세계의 근원, 혹은 그 비슷한 것에도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문이와 함께 많은 장소를 조사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성급하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냉정을 되찾은 것 같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제대로 조사해 봐야겠어. 이 세계,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 조건, 무엇보다 랑 유메이…….’
그 아이가 무언가 단서를 지니고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머리를 스쳤다. 아니, 직감이라기보다는 상황을 통한 추론인가. 나는 망설였지만, 상황이 보다 확실해질 때까지 이 마력석은 문이의 아공간에 넣어 두기로 했다.
나는 세계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이상해. 뜬금없이 호러 게임 속에 빠진 기분이야.”
처음에 만났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죽음의 길’이라고 말했던가. 하지만 적은 생각보다 그리 강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표현했지? 더 강한 적이 있나? 왜 하필이면, 죽음의 길이라고 표현했지? 죽음이라니……섬뜩함이 가슴을 스쳤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시야를 개방하자 아까보다 훨씬 많은 것이 보였다. 하늘에 있는 새까만 구름과, 짐승과 싸우고 있는 마법사들, 내가 있던 성에도 사람이 몇 명 들어가 있었다. 주위의 모든 생명이 색과 크기를 통해 투시되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느꼈다. 이 세계의 어둠 속에 스며들어 있는……무수히 많은 주인 없는 영혼의 낌새를.
더 보려고 한 순간, 세계가 출렁거렸다.
“……?! 뭐지?”
나는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계의 모든 마력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한 점을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풍경은 물처럼 녹아들었고, 안개처럼 흐트러졌고, 모든 것의 경계가 사라졌다. 하늘의 경계도, 숲의 경계도, 건물의 경계도 전부 사라졌다. 주위는 새까맣게, 새하얗게, 이윽고 아무것도 아닌 색으로 물들었다.
‘의식이…….’
눈앞에 새하얀 안개가 보였다. 내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그것이 이내 흩어지며, 희미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그 장소에 있었다.
처음 내가 정신을 차렸던 장소,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는 길 위에서, 그때처럼 멍하니 걷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어?”
나는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대체 뭐지? 왜 내가 또 여기에…….
나는 당황하며 어느새 안으로 들어가 버린 문이를 불렀다.
“『문자마법 레벨 2!』”
나는 모니터가 뜨자마자 물었다.
“문이야.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겠어? 왜 내가 갑자기 여기에…….”
눈앞의 모니터가 움직였다. 잠시 후 문이가 답을 내렸다.
「시간이 돌아갔습니다.」
“뭐? 시간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그렇습니다. 공간의 시간이 돌아가고, 그 안에 생명체가 빨려 든 것 같습니다. 사람이나 동물, 식물들의 경험이나 기억, 혹은 장비는 그대로인 듯합니다. 저희가 얻은 마정석도 그대로 제 안에 있습니다.」
그래. 어디선가 느껴 본 적이 있는 것 같더라니, 그건 시공간마법이 펼쳐질 때의 감각이었다. 그 시간을 거스르면 여기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 아니, 이 세계 안에서 그것은 법칙이다. 그것을 공연히 거슬렀다가는 더 위험한 꼴을 당할 가능성이 컸다.
내 힘이 이 세계보다 더 강하다면야 상관없겠지만, 이 세계는 지금까지 차원의 틈새조차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로 견고하게 닫혀 있다. 무작정 행동하기엔 너무 위험했다.
‘차라리 바깥의 도움을 바라는 편이 나을지도.’
곧바로 떠오른 것이 성진의 얼굴이라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정작 바깥에 도움을 요청할 방법이 없다. 이곳에서 잠들면 꿈속 세계로 갈 수 있을까? 가능할까? 몸을 막는다고 정신까지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꿈을 돌아다니는 힘은 마법이다. 마법이 바깥과 연결되지 않는 만큼 꿈속에서도 접촉을 못 할 수도 있다.
애초에 꿈속의 일을 그들이 떠올릴 수 있을까? 내 실종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떠올릴 가능성이 높지만, 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을 모른다. 그런데 꿈속에서 접촉한다 한들 다른 사람들이 내가 있는 장소를 찾을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이 있는 건, 내가 아는 한 성진과 스승님뿐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개가 점점 옅어지고, 하늘이 밝아지고 있다. 먼저 이 주변을 탐색해 보기로 했다.
어제는 혼란스러워서 잘 몰랐지만, 이제 보니 주변에는 낡은 건물이 몇 채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안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상점?’
한국에서는 잘 쓰지 않는 한자가 적혀 있었지만, 어렵지 않게 뜻을 알 수 있었다. 잡화점이었다.
이제 보니 이곳은 상가 거리였다. 잡화점, 아이템 상점, 무구 상점, 음식점도 있다. 그 사이를 나처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린다. 그러나 그다지 좋은 물건은 없는 것 같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잡화점에 한번 들러 보기로 했다. 한자로 된 간판을 통해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보아하니 여기는 중국의 어느 마을인 것 같다.
중국 화폐는 없지만, 구경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상가 사람들을 통해 어쩌면 이 세계에 대해 뭔가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상점 안은 평범했다. 옛날 구멍가게나 오래된 문방구 같은 분위기였다. 어딜 보나 평범해 보이는 아주머니가 가게를 지키고 앉아 있다. 바로 앞에 샤프나 노트, 스티커, 다이어리 같은 문방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물건을 보는 척하다가 아주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나를 아래위로 유심히 훑어보던 아주머니가 내 말을 가로챘다.
“너 여기 처음이지?”
“네? 네…….”
“처음 온 사람한텐 안 팔아. 어차피 죽을 사람한테 뭘 팔아.”
“넷…?”
당황스러운 말에 나는 우물쭈물거렸다. 무슨…….
“알려 줄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어. 우리는 정보를 말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 그 사람들을 거슬렀다가는 우리는 바로 죽겠지.”
“…….”
“말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야. 오늘은 11월 17일이야.”
멍하니 있던 나는 마지막 말에 눈을 크게 떴다. 11월 17일? 내가 이곳에 온 것은 10월 9일, 혹은 10일이다. 그런데 왜 11월 17일이지?
‘맞아. 시간이 돌아갔지.’
이 세계의 시간은 11월 17일에 멈춰 있는 것일까? 그럼 적어도 이 현상은 1년 가까이 계속되었다는 뜻이 된다. 혹은 바깥과 시간의 흐름이 다른 건지도 모른다. 정확한 것은 누군가에게 묻거나 좀 더 겪어 봐야 알 것 같다. 심정이 막막했다.
“둘러보는 것 정도라면 상관없어.”
나는 아주머니의 시선을 피하듯 매대를 바라보다가 다시 아주머니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저어…….”
“뭐야?”
표독스러운 대꾸였다. 나는 몸을 움츠리고는 물었다.
“혹시 여기에선 어떤 화폐를 쓰나요……? 제가 다음에 이곳에 물건을 사러 왔을 때……돈이 없으면 곤란하니까요.”
아주머니는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이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는지 순순히 말문을 열었다.
“아가씨가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돈이야. 마력석이나 숲에 있는 보물, 동전, 어쨌거나 돈이 될 만한 건 전부 받아.”
“아, 그렇구나…….”
다행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공간조차 열 수 없는 상황인데 계속 굶고만 있을 수는 없다. 되돌아가는 것은 공간의 시간뿐이다. 사람의 시간은 되돌아가지 않는다. 물은 마법으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지만, 음식은 사야 한다.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직 이 세계를 파악하지 못했으니 며칠은 여기 있게 될 텐데, 그동안 나무 열매만 먹고 버틸 수는 없지 않나.
안도하며 잡화점을 둘러보던 나는 어느 부근에서 시선을 멈췄다. 딱, 내 마음을 끄는 것이 있었다. 노란색 지갑이었다.
‘헐, 내 취향.’
나는 주저앉아 지갑을 살펴보았다. 수첩식으로 된 노란 지갑 맨 앞에는 지갑의 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리본이 붙어 있었다. 지갑을 넘기자 카드를 넣는 주머니가 나왔다. 주머니를 넘기자 명함을 넣는 주머니가, 한 장 더 넘기자 또 카드를 넣는 주머니가 나왔다. 맨 끝에는 지퍼로 된 동전을 넣을 수 있는 주머니가 있고, 지갑 위쪽을 벌리면 지폐를 넣을 수 있다.
손에 딱 들어오고, 카드를 많이 넣을 수 있고, 지폐와 동전도 많이 들어가고, 딱 내 취향이다.
“너 이제 나가야 돼. 조금 있으면 시간이야.”
‘시간?’
나는 의문스러웠지만 이내 아주머니를 보며 말했다.
“저, 이모. 이거 저한테 팔면 안 돼요? 너무 취향이라서…….”
“아 글쎄 죽을 사람한텐 안 된다니까. 네가 죽으면 다시 나한테 돌아온다고. 그럼 돈 받아 봤자 찜찜해.”
“저 살아서 돌아올게요! 그러니까 제발, 네?”
“누구나 그렇게 말해. 빨리 나가! 이제 문 닫히니까!”
“그, 그럼…….”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다급해 보였다. 나는 지갑을 아주머니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내일 제가 여기 오면 이 지갑 꼭 저한테 파세요. 네?”
안 그래도 쓰던 지갑이 낡아서 맘에 드는 지갑을 찾고 있던 참이었다. 이렇게 마음에 드는 지갑을 찾았는데 놓칠 수는 없다. 그녀가 혀를 찼다.
“알았으니까 어여 나가.”
“네!”
나는 기뻐하며 밖으로 나섰다. 내일, 반드시 돌아와서 저 지갑을 살 것이다. 맘에 드는 지갑을 발견하고 싱글벙글하던 나는 이내 헛숨을 들이켰다.
“아니, 나는 나가야 되는데…….”
지갑에 홀리기나 하고, 대체 뭐 하는 짓이람? 머리를 긁적이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나는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검은 구름이 하늘을 거의 덮고 있었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느낌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니 주위에서 소란이 일었다.
“시간이 거의 다 됐어! 모두 대비해!”
시간? 아까 아주머니도 그런 말을 하더니, 무슨 뜻이지?
검은 구름은 곧 유일하게 하얗던 부분까지 빠짐없이 덮었다. 하얗던 구름이 전부 검은색이 되었다. 푸른 하늘 아래에 보이는 검은 구름은, 몹시도 기이했다.
째깍, 띠리리리링!
‘알람 소리?’
갑자기 들린 큰 소리에 나는 놀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여러 개의 알람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소리쳤다. 그 순간, 주위의 광경이 변했다.
“꺅…!”
발아래가 일렁거리며 어둠이 꾸물꾸물 몰려들었다. 주위에 있던 상가나 거리의 모습이 안개 너머로 멀어지며,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세상에…!’
눈으로 감지해 보았지만 거의 완벽하게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인지 흔적을 더듬을 수 있었다. 차원의 일부가 한순간 뒤집혔다.
상가가 사라지자, 주위가 숲이 되었다. 우거진 나무가 어느새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이건 대체…….’
나는 주춤거리며 몇 걸음 더 물러났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기시감을 느끼며 고개를 돌리자 어제 보았던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어제 봤던 초심자 아냐. 무사히 살아남았군.”
남자가 안심한 기색으로 웃었다. 그의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뭐야? 누구야? 어려 보이는데.”
“어제 막 들어온 초심자야.”
“그래? 용케 살아남았는걸.”
남자의 친구들은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으며 나를 격려했다.
“잘 살아남았어, 아가씨. 이제 어딘가에 숨어 있어. 어려 보이는데 무리하지 말고.”
“네? 네…….”
“그래. 나무 위 같은 곳에 잘 숨어 있어.”
그들은 웃어 보이고는 서로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며 숲의 어딘가로 들어갔다.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각자 동료와 함께 어느 방향으로 사라져 갔다. 나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다가 머리가 아파져 이마를 쥐었다.
“아……뭔가 가면 갈수록 기분이 이상해…….”
나는 노란 원피스를 입고 해맑게 웃던 소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너는 대체, 날, 왜, 여기에…….
아니, 일부러는 아니라고 했던가. 그럼 대체 어떤 인과로 나는 이곳에 오게 된 건가? 랑 너는 정말 여기에 있을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가까운 장소부터 탐색해 보기로 했다. 시야를 뜬 채 주위를 면밀히 살피며 걸어갔다. 강한 마력이 느껴지는 장소로 향했다.
내가 마주한 것은 어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모양의 잿빛 성이었다. 사실 이번 건물은 모양새로 보아 성이라기보다는 저택에 가깝다.
나는 망설였지만 곧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시야에서 깜빡이는 마력의 색으로 보아 아무래도 나 외에도 다섯 명 정도가 이 저택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성안에 가득 차 있는 마력의 중심을 찾았다. 다만 이번에는 게이트를 쓰지 않고 그냥 걸어갔다. 성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필 참이었다.
천천히 몸 주위에 환각을 뿌렸다. 최대한 싸우지 않고 끝내기 위해서였다.
다른 사람들의 기척을 보고 조금 망설이기도 했다. 나보다 먼저 이곳에 와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계를 더 잘 알 테니까. 그러나 묻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우선 내 감지능력으로 이 세계를 어느 정도 파악하자.
「마스터. 어제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돌아간다고 치면, 지금부터 정확히 8시간 44분 동안 조사할 수 있습니다.」
“응. 알려 줘서 고마워.”
나는 건물에 설치된 함정을 지나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갑자기 발아래가 푹 꺼졌다.
“어……?”
당황하는 순간 옆에서 포격이 날아왔다. 퉁! 몸에 쳐진 결계에 막혀 공격이 무산되었다. 직후 주위에 있던 무기가 전부 나를 노렸다. 헐. 나는 당황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무구는 마력이 포함되어 있는 마법 무구였지만, 그것을 발동시키는 장치는 아무래도 평범한 기계 장치였던 것 같다.
“이런 건─!”
날카로운 날을 가진 진동 레이저 빔이 내게로 날아왔다. 대부분은 결계로 인해 튕겨 나갔지만, 나는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반사적으로 달려 나갔다. 퉁! 퉁! 소리가 살벌하다. 으휴, 정말이지.
[전방에 적을 확인했습니다. 주의하십시오.]“기계병?!”
짐승 모습을 한 기계병이었다. 정말로 짐승처럼 보일 정도로 실감 나게 만든 로봇이다.
나는 수십 발로 나뉘어 쏘아지는 공격을 피하며 시공간마법을 이용해 로봇의 중심부에 박혀 있던 마력석을 빼냈다. 마력석이 사라지자 로봇이 멈추며 자리에서 쓰러져 내렸다.
나는 손에 든 녹색 마력석을 살폈다. 내 손보다 훨씬 큰 다이아형 보석 안에 강대한 마력이 집약되어 있었다.
“오……예쁜 마력이네.”
나는 마력석을 문이의 아공간 안에 넣어 둔 뒤,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으아악!”
“……?!”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내가 아까 당했던 공격에 이곳에서 처음 만났던 그 남자가 당하고 있었다. 피하며 달리고 있지만 전부 막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내버려 두면 크게 다치겠다는 생각에 마법을 사용하여 레이저 무기를 전부 부쉈다.
“사격추적마법.”
허공에서 나타난 검은 공에서 마력이 수십 개나 뻗어져 나가며 설치된 무구를 때려 부쉈다. 도망치고 있던 사람들이 산산이 부서진 무기를 보며 깜짝 놀랐다.
“아니…?”
“대체 누가…….”
말없이 도와서 그런지 얼굴을 마주 보기 민망해서 텔레포트를 사용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커다란 마력이 지척으로 가까워졌다.
갑자기 어제 일이 떠올랐다.
‘어제 내가 상대했던 그 키메라도 내가 간 뒤에 누군가를 해쳤을까…….’
‘죽음의 길’이라고 했다. 이곳에 위험한 적이 많은 건 분명하다. 나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어제 그 짐승들을 쓰러뜨려야 했을까? 죄 없는 짐승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던 걸까? 하지만 죽이는 건, 너무 끔찍하잖아…….
죽음은 괴롭다. 친인이든 먼 사람이든 싸늘하게 주검이 된 시체를 보면 가슴이 차가워진다. 차바퀴에 짓뭉개진 새의 시체를 울면서 묻어 주었던 기억이 있다. 튀어나온 내장에 차마 손을 댈 수 없어 신문지를 쓰레받기 대용으로 해서 옮겼었다.
“모르겠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중간중간 적을 만났지만 환각으로 속여 싸우지 않고 피했다. 결계와 환각 실체화를 더하면 이제 안드로이드조차도 속일 수 있다.
쭉 둘러보았으나 성에는 단서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모든 방을 열고 샅샅이 훑어보아도 그럴듯한 것은 없다. 대체 왜 이렇게 커다란 성을 만들었는지 의문이다. 그냥 키메라들의 둥지로 만든 걸까?
이내 나는 이 성 안에서 가장 커다란 마력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잠시 망설였지만, 곧 문을 밀었다.
덜컹
거인도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것치고 문은 별로 무겁지 않았다. 한 손으로도 가볍게 열 수 있었다. 색과 질감 때문에 강철 문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다.
가볍게 문을 열자 커다란 홀이 보였다. 정면에 일직선으로 펼쳐진 레드 카펫 끝에 있는 옥좌에 거대한 뿔 두 개를 지닌, 짐승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적이 앉아 있었다. 괴물, 저것을 괴물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 키메라라고 부르는 것이 낫겠다. 저것은 분명 누가 인위적으로 만든 생물이었다.
“크르릉…….”
키메라의 가슴 정중앙에 녹색 마력석이 박혀 있었다.
‘마력석. 저게 이 성 전체에 퍼진 마력의 근원일까? 좀 제대로 살펴봐야겠어.’
저 가슴에 있는 마력석만 뽑는다고 모든 일이 다 해결될까? 나에게는 저 키메라를 죽일 용기가 없었다. 아니, 죽이는 걸 용기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네. 하여간 그 정도의 담력은 없었다.
마력의 근원만 어떻게 할 수 없을까? 이 성에 퍼진 마력은 저것에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어제 봤던 마력석과는 뭔가 느낌이 다른데?’
나에게로 연달아 날아오는 공격을 결계로 막아 내며 나는 시야를 뜨고 키메라의 마법을 자세히 관찰했다. 집중하고, 집중하던 나는 발아래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무언가에 침을 삼켰다.
‘뭐야. 이 끔찍한 느낌은.’
왜 이 끔찍한 마력을 지금껏 느끼지 못했지? 처참하고 비참한 이 힘을──.
“윽…!”
정신을 깨우듯이 내 머리로 공격이 날아왔다. 나무줄기가 내 몸을 옭아맸다.
“놀래라…….”
크게 아프진 않았지만 결계 너머라고 해도 헤드 샷은 충격이 있다. 나는 깜짝 놀라 머리를 부여잡으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좋아, 이렇게 나온다면──일단 쓰러뜨리고 보자고!
나는 나무에 옭매인 채 주먹을 꽉 쥐며 한 손에 어둠의 마력을, 한 손에 빛의 마력을 발했다. 손에만 맺혀 있던 마력이 온몸을 휘감자 내 팔을 휘감고 있던 나무가 부스러졌다. 내 몸에서부터 빛과 어둠이 연동하며 퍼졌다. 연속하여 겹치던 힘은 이내 커다란 기둥이 되어 주위를 덮쳤다.
쿠아아아!!
속성 융합을 할 수 있게 된 후부터는 기본 공격을 속성마법으로 하는 버릇이 붙었다. 아무리 빨리 쓰려고 노력해도 문자마법은 속도가 느리다. 기습을 가하기에는 속성마법이 최고다. 특히 이성진처럼 공격이 빠른 놈들을 상대로 하려면 속성마법, 혹은 시공간마법을 사용하는 게 좋다.
환각마법으로 속이고, 속성마법으로 기습을 하고, 때에 따라 시공간마법과 문자마법을 사용한다. 요즘 내 전투 방식은 그렇다. 하지만 그 때문에 환각마법에 소홀해진 감이 있어 곤란하다. 메인마법의 위치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어떻게 밸런스를 맞춰야 할지 한창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달려가며 나를 공격하기 위해 날아오는 나무를 환각마법을 사용해 전부 꽃으로 바꿨다. 하늘하늘 꽃잎이 떨어져 내린다. 나는 키메라와 눈을 맞추고, 그를 꿈속 세계로 이끌었다. 현실을 보고 있는 상태로 상대에게 꿈을 덧씌우며 조정한다. 키메라가 꿈속에 빠졌다.
덜그럭
“어라……?”
키메라가 잠에 들자마자 가슴에 박혀 있던 마력석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내가 당황한 순간, 키메라의 모습이 연기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뭐지? 꿈에 빠진 걸 보면 살아 있는 존재인 것은 틀림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