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9
“어라?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
핑, 하고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떠올렸다.
떠올린 것은 이곳에 있기 전, 조금 전의 나였다. 나의 세계를 상상하고 있던 나.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 이건 꿈이구나.
나는 새벽의 먼바다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물 천지에서 별을 바라보는 느낌은 대체 어떠할까. 왜, 만화에서 가끔 나오지 않는가. 넓디넓은 새카만 물 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런 광경……. 그런 생각을 하자 세계가 일그러졌다. 나는 어느새 바다 위에 서 있었다.
“어라……?”
바다 아주 먼 곳에서 새벽의 빛이 보였다. 하지만 하늘은 여전히 은하수와 별자리로 가득하다. 나는 그 순간 감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까만 바닷물에 선명하게 별빛이 박혀 있었다.
“와…….”
알고 있었다.
원래 바닷물에 이렇게 선명히 별이 비치는 일은 없다. 호수라면 또 몰라도, 바닷물은 언제나 파도로 출렁이고 있는걸.
하지만 이곳은 꿈속. 내가 자각하고 원한다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곳.
나는 바다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별빛이 눈꺼풀 속으로 스며들었다.
“……!”
……어라?
“……ㅎ…ㅏ!”
으으……시끄러…….
“유은하!”
워?!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 주변에서 아이들이 놀라거나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헉……!”
나는 그제야 상황을 인지하고 당황했다. 얼굴이 저절로 뜨거워졌다.
‘나 지금 잠든 거야? 수업 중에?’
아니, 물론 잘 수도 있다. 전생에도 학교에 다니면서 수업 중에 참 많이 졸았다. 하지만 그래도 몇 없는 아이들의 앞에서 대놓고 자 버렸다는 것이 부끄러워 아무 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자는 모습을 보인 것 자체도 부끄러웠다. 박한수가 나를 타박했다.
“너 이렇게 중요한 수업 중에 어떻게 하면 잠들 수 있냐?”
“…….”
“은하한테 시비 걸지 마. 잘 수도 있지.”
“너 은하니까 편들어 주는 거지?”
“시끄러.”
“됐다. 거기 너 조용히 해라. 딴 놈이라면 모르지만 이 녀석은 정신계열 환각 훈련 중이었으니까 잘 수도 있어. 그러니까 용서해 줄 수 있다.”
“그거 차별이야!”
정준휘 선생님의 말에 김현호가 툴툴거렸다. 나는 살짝 안심하고 두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정준휘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그래서? 진전은 있었나?”
“그……‘자각몽’은 꿨어요.”
“벌써냐, 더럽게 빠르네. 그 외엔?”
“음……꿈에 빠지기 전에 제가 제 세계라고 생각하며 떠올렸던 게 그대로 꿈의 광경으로 반영되었다는 점?”
“우와. 정신계열에서 어드바이스 하나로 이렇게 빨리 진전 보이는 앤 처음이야.”
“내 말이 그 말이다.”
두 사람은 나를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는 약간 뻘쭘해하다가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뭐, 네가 그렇게 꿈에서 이미지화하는 동안 수업 시간 끝났어. 이만 돌아가라.”
나는 말없이 고개를 꾸벅였다. 인하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인하의 손을 잡고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순간 나는 나와 모두의 몸에 마력이 가해지는 걸 느꼈다.
‘맞다, 제약.’
그걸 바로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마력이 가해지는 방식이 그 이미지와 비슷했다. 둥근 띠 같은 마력이 우리의 몸 주위에서 압축되더니 그대로 우리 몸 안에 스며들며 사라졌다.
“왜 그래?”
인하가 의문 어린 표정으로 멈춰 서 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에 오히려 내가 의아해졌다.
“못 느꼈어?”
그 정도로 은밀한 마력이었나? 확실히 평소 마법에 비해 존재감이 흐릿한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을 정도였는데…….
나는 내 손을 바라보았다. 내 마력을 느끼는 감각은 내가 마력을 보면 볼수록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그렇다고 전문적인 마법으로 개발할 생각은 없지만, 이것은 상당히 매력적인 요소였다. 그렇다면, 이런 건 생각할 수 없을까.
마력을 파악하는 이 눈으로 언젠가 본 마법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다거나 하진 않을까.
나는 그런 어이없는 상상을 하곤 피식 웃으며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무사히 첫 수준별 수업이 끝났다. 덕분에 의외의 친분을 쌓게 된 것 같다. 박한수와 인하는 학교를 마치는 순간까지 투닥거렸고 주민희와 김현호란 아이는 성격이 잘 맞는지 금세 친해져선 장난기 어린 얼굴로 떠들어 댔다.
나는 그 사이에 끼어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친근감마저 느껴졌다. 그건 아마 동질감 때문일 것이다. 같은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미묘한 동질감. 인하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웬만한 아이들은 다 무시하는 인하가 수업 이후로 그 아이들의 말이나 장난을 받아 주는 것을 보면 뻔했다.
“수업 말이지, 꽤 괜찮았지?”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내 세계에 대해 떠올리고 있던 나는 그 말에 웃으며 인하를 돌아보았다. 그래, 좋았다. 덕분에 내 꿈속 세계를 만들 수 있었으니까. 그토록 아름다운 세계가 내 정신세계라니…….
“응. 괜찮았어.”
“역시 대화를 하며 배우니까 뭔가 더 알아듣기 쉬워. 빨리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아.”
“응. 그러네.”
“……은하는 어떤 걸 했어?”
나는 그 말에 손가락 끝으로 마력을 펼쳐 푸른 요정 같은 것을 둥둥 띄우며 대답했다. 요정이라곤 해도 만화 캐릭터 같은 요정이었지만.
“내 메인은 보다시피 환각이잖아?”
“응. 문자마법이 더 대단하긴 하지만.”
“그래, 그렇잖아. 그래서 내가 지향하는 환각은 두 가지인데.”
“응.”
“하나는 현실에서 내 세계를 펼치는 거고, 또 하나는 정신세계를 넘나들며 내 환상을 ‘정신 속’에서 보여 주는 거야.”
“음…….”
“예를 들어 정신을 차리면 꿈속의 일이 되어 있거나 하는 그런 거야. 하지만 그 꿈에서 있던 일이 뇌를 거쳐 현실에서도 영향을 가지거나 하는 거지. 물론 내가 뇌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뇌가 진짜라고 느끼면 그게 정말로 신체에 적용되거나 하는 예가 있잖아? 그런 거지.”
“…….”
“그래서, 난 현실에 환상을 나타내는 건 이미 할 수 있지만, 정신세계 관련 환각은 전혀라고 할 정도로 쓸 수 있는 게 없었잖아. 오늘은 그 첫 단계를 밟는 방법을 배웠어.”
“첫 단계?”
“응. 자각몽을 꾸는 거.”
나는 자랑스럽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V 자를 만들었다.
“오늘 성공했지롱~!”
인하는 들뜬 표정으로 웃는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각몽’이라는 게 뭐야?”
“…….”
……아, 거기부터? 이제 보니 내가 한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구나.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이해했다. 인하는 어린애였다. 말투나 행동거지는 어른스러울지 몰라도 지식은 아직 한참 부족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설명했다.
“그러니까 자각몽이라는 건, 꿈속에서 꿈이라는 걸 깨닫는 거야. 그 왜, 꿈속에서, 우리는 이게 꿈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잖아? 보통 꿈에서 깬 다음에 ‘아, 꿈이었구나.’ 이러지?”
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개의 사람은 그럴 것이다.
“응. 맞아.”
“하지만 자각몽은 달라. 말 그대로 이게 꿈이란 걸 자각하는 거야. 꿈속에서 말이야.”
“……아, 그렇구나. 그럼, 정신세계 환각이랑 자각몽은 어떤 상관이야?”
“음……그건 설명하기 좀 어려운데…….”
나는 이번에는 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이야기를 이었다.
“요는 이거야. 꿈속의 일은 우리 정신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잖아?”
“응.”
“하지만 우리는 무의식 속에서 꾸는 꿈은 보통 꿈이라고 눈치채지 못해.”
“응.”
“그걸 ‘자각’한다는 건, 자신의 정신세계를 다룰 수 있게 된다는 거야. 최소한 자신의 정신세계를 볼 수 있게 되지.”
“볼 수 있게 된다……고?”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다시피, 꿈은 우리의 정신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정신 계열 환각도, 깨어나면 꿈이 되는 그런 종류의 환각이랬잖아. 결국 꿈과 정신세계는 이어져 있다는 거지.”
인하가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꿈속에선 뭐든 가능하다고 하지? 정신세계의 환각도 상대의 정신세계, 즉 평소 꿈을 꾸는 세계를 마음대로 다루는 마법이야. 예를 들어 종이접기를 할 때, 내가 접을 수 있어야 남에게 가르쳐 줄 수 있잖아? 그것과 비슷한 맥락이야. 내 꿈속에서부터 무언가를 할 수 있어야 후에 남의 정신세계도 들어갈 수 있는 거야.”
“음…….”
“꿈속이 정신세계라니깐? 나는 내 꿈부터 알아볼 수 있어야 해. 그래야 남의 꿈도 알아볼 수 있어.”
내가 생각해도 용케 차근차근 설명할 수 있었다 싶었다. 나로서는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한 셈이었지만, 인하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네 정신 계열 환각은……꿈을 조종하는 능력이고, 그걸 하기 위해선 꿈속에서 꿈이란 걸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거야……?”
나는 인하의 말을 들으며 환하게 웃었다.
“응! 좋아, 그걸로 좋아. 나머지는 옆에서 계속 보다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역시 인하는 이해가 빠르다니까!”
실제로 웬만한 아이들은 이런 말을 들어도 외울 뿐이지 저렇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하는 이 어린 나이에 그게 가능했다. 우리 인하는 정말로 똑똑하기도 하지.
나는 자랑스러워하며 인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인하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잠시 후, 인하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문자마법이랑 결계마법은 어떻게 됐어?”
“아, 그건 아직 선생님들한텐 말하지 않았으니까, 아직 자율 연습 중이지.”
“그렇구나…….”
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메인마법만 말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그들은 이 나이에 두 개 이상의 마법을 가진 아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비밀 준수 교칙의 존재는 알지만 역시 아직 그 외의 마법을 말하기엔 부담스럽다.
“꾸준히 연습하고 있어. 결계는 좀 있으면 통로 비슷한 걸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확실히 선생님 말대로 성장기에 들어가니까 느낌이 달라~.”
“그래?”
“응. 그리고 학생증을 가지고 텔레포트 연습을 계속 하다 보면, 곧 스스로 ‘나’를 텔레포트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게 아니라도 결계랑 결계를 연결해서 텔레포트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역시 아직 둘 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
인하는 별로 실감이 안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분명 마법사로서 같은 수준에 있지만, 그 방향성은 서로 많이 다르다. 내가 공간계 마법에 상성이 높은 반면 인하는 공간 계열 마법과는 딱히 접점이 없다.
“그럼 문자는?”
“심심할 때마다 끄적거리는걸.”
집에서 할 일이 없으면 캐릭터를 만들어 본다. 종이 위에다 그 캐릭터의 프로필과 인상착의 등을 다 적으면 그것이 마치 실체화하는 것처럼 종이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그림으로 바꿀 수도 있다. 나는 이것도 나름 환각마법 종류가 아닌가 생각한다.
환각마법도 그렇지만 문자마법은 정말로 내 상상의 결정체 그 자체였다. 전생에서 수많은 글을 써 왔던 만큼 그 효과가 더 탁월했다. 나는 문자마법의 진로를 ‘언령’ 쪽으로 정했다. 처음 만들자고 생각했을 때부터 그랬다. 문자마법은 말하자면 내가 소설을 쓰는 것과 비슷했다. 설정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무엇을 적든, 그대로 실현된다. 내 상상력을 모태로 해서.
“나도 열심히 해야겠다. 나도 이제, 서브마법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어.”
“그래?”
인하의 빛마법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공격에도 방어에도 탁월한 마법이었다. 상당히 효율적인 마법이었지만, 걱정도 되었다. 이른 나이에 너무 강해지면 어쩌나 싶어서.
‘인하의 서브마법이라…….’
빛이라고 하면 역시 속도의 대명사다. 빠른 만큼 강력한 관통력과 힘을 가진다. 인하는 최근 그 빛을 몸에 적용시키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스피드는 전투의 핵심 요소 중 하나였다. 빛은 열기를 품으며 진동시킬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서브마법 역시 공격성이 높은 불이나 번개일지도 몰랐다.
그에 반해 내 마법은 전부 직접 공격 계열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싸울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저 내가 가지고 싶고 나에게 잘 맞는 요소를 골라서 만든 마법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인하도 분명 자기가 원하는 마법을 만든 것이겠지만…….
“졸려?”
“응……졸리네.”
나는 눈을 비비는 인하를 향해 다정하게 웃으며 이불을 끌어당겨 인하의 위에 덮어 주었다.
“잘 자.”
“……응.”
……어쩐지 걱정이 됐다. 나는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
정신을 차리니 나는 들판에서 무릎을 모으고 앉은 채 하염없이 별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먼 새벽의 빛조차 개의치 않고서. 나는 눈부신 별빛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름다운 별하늘이다. 내가 원한다면 어디까지나 갈 수 있는 아름다운 세계. 그러나 나는 이 세계에 있으면서 가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쁘다…….”
홀릴 것 같은 아름다움, 이 세계를 내가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별하늘이라. 하하. 연인끼리 보면 엄청 로맨틱할 조건이네. 정말 그렇다. 나는 가슴속의 허전함을 외면하며 아무렇지 않게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예뻐?”
“응, 예뻐.”
“그거 다행이네.”
무의식적으로 대답하던 나는 이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며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앞에 나타난 얼굴에 숨을 삼켰다.
그는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수한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도, 검은색으로 보이는 짙은 갈색의 눈동자도, 호선을 그리는 얇은 입술도, 모든 것이 낯익었다. 낯익고 그리웠다.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굳었다.
“왜 그래?”
그가 웃으며 의아한 얼굴로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나는 어리던 몸이 성인의 몸으로 변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
“오늘따라 이상하네. 아, 혹시 내가 멋있어서?”
“……멍청한 소리.”
“뭐야, 평소랑 똑같네.”
나는 울 것 같은 눈동자를 일그러트렸다.
평소의 어린 몸과는 확실히 다르다. 굴곡져 있는 내 몸을 내려다보던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원스럽게 잘생긴 얼굴. 나를 향해 다정히 속삭이는 목소리. 그래, 그는 항상 나를 향해 이렇게 다정히 웃어 주었다.
나는 거기에서 깨달았다. 여기는 내 꿈속의 세계잖아.
아름답고 초현실적인 있을 수 없는 장소. 내 꿈속의, 내 상상 속만의 세계. 그래, 네가 여기에 있을 리 없고, 나의 이 몸이 여기에 존재할 리도 없다. 나는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왜,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그 이름도 오랜만에 듣는다. 이제 그 누구도 불러 주지 않을 이름이다. 나는 울며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추억 속에서 가져온 다정한 온기를 느끼며 중얼거렸다.
“나……몰랐어.”
“응?! 뭐가. 뭐가 그렇게 서러운데.”
헛웃음이 흘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너를 두고 죽었던, 전생의 나.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렇게도 너를 그리워했구나.”
나는 그의 뺨을 매만지던 손을 내리며 그만 그대로 얼굴을 감쌌다. 당황한 태도로 거짓된 네가 나를 껴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느끼며 서럽게 웃었다.
내가 널 이렇게 그리워했구나.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죽기 전에 그와 나누었던 약속을 떠올렸다. 거짓된 온기는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시 태어나도……너를 만나기를.”
다시 태어나도, 너를 사랑할 수 있기를.
죽어서 환생해도, 너를 기억할 수 있기를.
죽어서 환생해도 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약속하고 죽었다. 실제로 그랬다. 지금도 이렇게나 너를 사랑하고 있어…….
“어디 있어……?”
어디 있어, 너? 지금 어디 있어?
나는 정말로 너를──다시 만날 수 있을까. 네 얼굴이, 목소리가, 그 모습이 너무도 그리웠다. 그리워서 가슴이 아팠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 시선을 돌렸던 마음이 피를 토해 내는 것 같다. 보고 싶었다. 너무도 만나고 싶어서, 그리워서.
나는 서럽게 울며 신음을 토해 냈다. 사실 나는 죽어서도 이토록 너를 사랑하고, 이토록 너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무의식중에 꿈에서 너를 만들어 낼 정도로.
☆
“……다행이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인하를 바라보았다. 인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안타까운 감정을 담아 인하의 긴 머리카락을 쓸었다.
“너를……만날 수 있기를.”
이건 기억난다. 죽기 전 나는 환생한 후에도 반드시 너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지금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래도…….
“죽어서 환생해도, 내가 너를 알아보기를.”
설령 너 역시 환생했다 하더라도, 그런 네가 어떤 모습이더라도.
나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얼굴을 묻었다. 가슴 한쪽이 아련하게 아파 왔다.
##06. 아이들의 보호자
살랑거리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쳤다. 머리카락이 흔들리자 반으로 묶은 머리를 고정시키기 위해 꽂아 두었던 핀이 괜히 신경이 쓰여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핀이 만족스럽게 꽂혀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다시 읽던 책에 정신을 집중했다.
로맨스 소설도 오랜만에 보니까 달달하고 좋다. 뭐, 달달하다 못해 토할 것 같지만 재미있기는 하다. 하지만 역시 오그리토그리. 근데 그래서 오히려 재밌다는 생각에 드는 게, 나도 참 웃긴단 말이야? 그게 항상 통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뭘 그렇게 재미있게 읽고 있어?”
가만히 앉아 책을 읽는 나를 보며 인하가 말을 걸어왔다. 오늘 인하는 머리를 땋았으며 하얀 반팔 셔츠에 검은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다. 역시 우리 인하는 어떻게 꾸며도 예쁘다니까?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로맨스 소설. 지금 엄청 웃긴 부분이거든.”
“로맨스? 은하 너 로맨스는 별로 안 보지 않았나?”
“그야 오글거리니까.”
가끔 민망해서 들춰 보기도 힘들 때가 있거든. 전생의 내 연애도 솔직히 그렇게 달달했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오히려 조금 살벌했나? 아냐, 좀 달달하긴 했어. 그걸 소설로 쓰면 의외로 꽤 달달할지도…….
“오글거린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
“음……연애를 하는데 너무 사이가 좋아서 보기 힘들 정도란 느낌?”
“흐음.”
6월 중순, 나는 그제야 옷을 하복으로 갈아입었다. 사실 나는 전생에서부터 짧은 옷을 별로 안 좋아해서 밖에서는 잘 입지 않는 편이었다. 게다가 여기는 여름에 동복을 입든 말든 자기 자유니까 계속 춘추복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역시 이쯤 되면 긴팔을 입고 다니기엔 더웠다. 그래서 오늘 아침부터는 결국 하복을 입기로 결심했다. 그 대신이라고 할까, 얇은 여름용 긴팔 카디건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하복은 소매 길이와 천의 두께를 제외하고는 동복과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그래서 동복과 마찬가지로 하복도 제법 맘에 들었다. 치마 길이가 짧은 게 여전히 좀 신경 쓰였지만 안에 속바지를 입었으니까 OK다. 그리고 그래 봤자 아직 초등학생인데 뭐. 누가 치마 속을 본대도…….
“너 또 책 읽고 있냐?”
팩으로 된 사과주스에 빨대를 꽂아 먹고 있던 한수가 말을 걸었다. 요즘 저 주스 자주 마시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책 같은 게 뭐가 그렇게 좋다고…….”
“재밌어.”
나는 대답하며 살짝 웃었다. 그러자 한수가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팩 고개를 돌렸다. 인하가 한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사이 앞자리에서 학생증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민희가 몸을 돌리더니 또 학생증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아, 은하야! 그, 뭐였더라? 학생회에 대한 게 있는 게시판이 어딘 줄 알아?”
“넌 좀 직접 좀 찾아라.”
“미안~.”
한수의 지적에 민희가 헤헤 웃었다. 괜찮아. 신경 안 써. 나는 작게 웃으며 민희에게 게시판을 일러 주었다. 민희는 처음에 나한테 맵에 대해 물어본 다음부터 학생증 관련 질문은 꼭 나한테 하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같은 수준별 I반에서 수업을 받는 다른 친구들도 학생증에 대해서는 전부 나한테 묻는다.
민희는 내 말에 따라 학생회 게시판을 찾아내고는 활짝 웃었다. 학생회 게시판을 쭉 훑어보던 민희가 곧 신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앗싸, 이제 운동회까지 열흘 남았다!”
“그게 좋냐?”
“한수는 안 좋아? 현호는 엄청 좋아하던데?”
“그 녀석이야 그렇지. 난 귀찮아.”
뭐, 그거엔 공감한다. 나도 솔직히 귀찮긴 해.
우리 학교의 운동회는 거창하게 열린다. 그도 그럴 것이 초*중*고 합동인 것이다. 규모가 얼마나 커질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경기 종목은 그렇다 치고 경기 자체는 당연히 마법을 사용하여 이루어진다. 초등학교 저학년은 배우는 마법이 별로 없는 만큼 경기에 잘 내보내지 않으니 괜찮지만, 중학생, 고등학생 선배들은 많이 바쁠 것이다. 나는 문득 며칠 전에 만났던 회장 선배를 떠올렸다. 그 언니도 많이 바빠 보이던데, 기대되기보다는 아예 무섭다. 응.
하지만 내가 이 시기에 개최되는 운동회를 조금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가 더 있었는데, 그 거창한 운동회 일주일 뒤에 이 학교에서의 첫 시험인 학기 고사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었다. 시험 얼마 후에 방학이 찾아온다는 걸 생각하면 그렇게 나쁘진 않은데, 마법 학교에서 치는 첫 시험이라는 생각을 하면 역시 좀 많이 걱정이 되었다.
참고로 우리 학교 시험은 1학기에 한 번, 2학기에 한 번씩 해서 1년에 총 두 번만 친다. 비밀 준수 교칙에 따라 실기 시험은 한 명씩 치러지게 되며, 그 결과 역시 완전히 비밀에 부쳐진다. 근데 그 숨기려는 마법 실력이라는 거 운동회 하다가 들키게 되면 그냥 망하는 거지. 완전 망함.
물론 마법을 써야 하는 행사는 대부분 중학교 고등학교 선배들이 한다 들었지만, 그래도 뭐랄까……불안하다고 해야 할까.
또 운동회 당일에는 외부 사람들도 초대하는데 학생들이 직접 초대장을 보낸 사람만 학교 안에 들어올 수 있다. 한 학생당 초대할 수 있는 사람은 최대 5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