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90
‘어라……?’
어질거리는 시야로 겨우 뒤를 돌아보니 허공에 뚫린 검은 구멍에서 거대한 파충류의 손이 불쑥 나와 나를 관통하고 있었다. 화끈한 고통이 희미해지는 정신 속에 녹아들었다. 눈이 감기고, 몸이 흔들렸다. 촤악!! 붉은 무언가가 뿌려지는 소리……. 가슴에서 사라진 날카로운 손톱과……등 뒤에서 그 손톱을 삼키는……검은……흐릿한……구멍…….
쿠당탕
“하아아…….”
희미한 시야 안에 새빨간 색이 담겼다. 귓가에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니, 날 부르는 걸까? 나를…….
잿빛 세계가 시야에 비쳤다. 지지직지지직, 선명하지 않고, 흐리고, 안개 같고, 불완전한 그림 같으며, 현실과는 아득히 먼…….
세계는 어둡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까말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아, 눈앞에 무언가가 서 있다. 누군가가…….
샛노란 원피스를 입은 어린 소녀다. ……울고 있나? 그래, 나를 보며 울음을 터트리고 있다. 그녀가 잿빛이 된 나를 끌어안는다.
“──…!!”
들리지 않는 목소리. 모든 것이 소음, 모든 것이 이명, 모든 것이…….
깜빡이는 시선 속에 사라져 간다.
그래.
그 순간 나는 분명히 죽었다.
“허억!”
나는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았다. 짙게 깔린 안개 속을 걷고 있었다. 안개는 점점 옅어지고, 푸르스름하게 밝아지는 하늘이 보였다. 그것을 보며 멍하니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나, 분명…….’
오싹! 소름이 온몸을 덮쳤다. 두렵고 두려웠다. 걸음을 옮기는 발이 떨렸다.
이윽고 나는 발을 멈추고 양손으로 몸을 감쌌다.
그때, 나는 분명 죽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라 실감하지 못했지만 돌이켜 보면 틀림없다. 분명 나는 가슴을 뚫려 죽었다. 내 뒤를 따라 손만 부분 텔레포트 한 드래곤에게──심장을 꿰뚫려 죽은 것이다.
드래곤의 발톱은 내 가슴을 관통했다. 피가 흐르고, 후드득 뿌려졌다. 드래곤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손톱을 옆으로 빼냈다. 몸이 갈리고…….
“윽……우웩……!”
나는 자리에 쓰러져 구역질을 했다. 위에서 신물이 올라와 바닥에 떨어졌다. 죽었어, 죽었어, 죽었다고……! 정말로 죽었단 말이야……!
“아……으아…….”
그 섬뜩한 감각이 몸에 각인된 채 잊히지 않는다. 나는 앞서가는 사람들의 뒤에 남겨진 채 자리에서 몇 번이나 감정을 토해 냈다. 바닥에 질척한 액체가 떨어졌다.
“흡……흑……흐으윽…….”
그때 나는 누군가가 내 등을 두드리는 감각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목 뒤로 굽슬거리며 흘러내린 백색에 가까운 은발이 인상적이었다. 안정적인 마력 색이다. 어디선가 봤던 얼굴이라 생각했더니 그때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던 남자였다. 나를 향해 돌아가라고 했던 그때 그 남자다.
“괜찮니?”
그 옆에는 녹색 머리를 하나로 묶은 남자가 서 있었다. 아마도 일행인 듯했다.
“뭘 그렇게 신경 써. 어차피 여기 들어온 이상 다 비슷한 처지인데.”
“그래도 어린애잖나. 힘들겠지. 동료라도 죽은 거니?”
“아, 아니…….”
나는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었다.
“부, 분명……저……심장을…….”
“뭐?”
시큰둥한 표정으로 서 있던 녹색 머리 남자가 놀란 눈으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심장을 뚫리고도 무사히 돌아왔어? 너 운 엄청 좋네.”
울컥한 기분에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북받치는 감정만은 꾹 눌러 참았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바닥을 적시는 것을 바라보다가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저, 저기……전……어째서…….”
은발 남자가 내 등을 쓰다듬는 것을 멈추고 나와 시선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래. 너는 여기 온 지 아직 얼마 안 된 모양이구나.”
“네, 네에…….”
“네가 죽은 것은 언제지? 세계가 돌아가기 몇 분 전이냐.”
“아, 아마도……직전…….”
“그래.”
남자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가 돌아가는 순간 목숨이 붙어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 이 세계는 계속해서 처음으로 돌아가지만, 그 안에 사람과 사람이 가진 장비는 포함되지 않아. 그러니 죽으면 보통 거기서 끝이다. 하지만 세계가 돌아가는 순간 숨이 붙어 있다면, 다시 멀쩡한 몸으로 살아날 수 있다.”
“…….”
“너는 살아남은 거란다. 아가야.”
남자는 망연자실해 있는 나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내 동료와 함께 눈앞에서 멀어졌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주위에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걸었다. 비틀비틀, 한 걸음씩 걷자 머지않아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상가를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낯선 얼굴뿐이었다. 항상, 매일,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했는데, 낯익은 얼굴은 언제나 많지 않았다. 그건 내가 사람 얼굴을 잘 못 외워서 그런 게 아니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둘러본 끝에 나는 다소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처음에 나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의 동료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두 명이었던 그는 이제 혼자였다. 혼자……였다.
비로소 깨달았다.
아, 그는 죽었던 거였구나. 그래서…….
목이 멨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지를 수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텔레포트 해 벗어났다.
뭐지, 이건?
여긴 대체 뭐지?
하늘로 새까만 구름이 몰려든다. 나는 몇 번이고 텔레포트 했다.
중국? 중국이라고? 그래서?
7년 전의 중국? 왜 이 세계는 무너지지 않았지?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지.’
그런 뜻이었어──?
“흑……흐아아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나는 얼굴을 가린 채 울음을 터트렸다. 내 의지에 반응하여 주위로 마력이 발산하며 일그러졌다. 벗어나고 싶어, 벗어나고 싶어! 더는 이곳에 있기 싫어! 세계에 세계가 겹쳐 일그러졌다. 그러나 이 견고한 세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위에 있던 키메라나 식물, 대지가 휘말릴 뿐이었다.
랑, 네가 날 이 끔찍한 세계에 부른 거야? 어째서? 이유가 뭐야? 왜 나를 불렀어? 나는…….
누구라도 좋아! 제발 나를 구해 줘!
“성진…….”
그 순간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아, 나는 죽어선 안 됐다. 죽을 수는 없었다.
그 가엾은 녀석을 내버려 두고, 다시 사라질 수는 없었다.
이미 두 번이나 경험한 일이지만, 죽는 순간의 감각은 참으로 소름 끼치는 것이다. 심지어 살해당했으니.
수명이 다해 죽은 것도, 병에 걸려 죽은 것도, 전부 각오한 후에 일어난 죽음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니다. 생살이 파헤쳐지는 감각은 정말이지 끔찍하고, 잔인했다.
세계가 몇 번이나 돌아갈 동안 나는 마음이 꺾인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내가 죽은 것도, 주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세계라는 것도 충격이 컸다.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계속 울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7년이나 계속된 이 세계에서 다른 누군가가 언젠가 구해 주기를 바라며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 스스로 도망치지 않으면, 스스로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면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거다. 세계의 단면만을 보고 별로 위험하지 않은 세계라 여겼던가. 어쩌면 갑자기 영문도 없이 떨어졌다는 것 때문에 현실감이 희미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렸다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죽고 싶지는 않아…….’
살아남을 방법이 없나 필사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철저히 도망칠까? 내 목표는 탈출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이 저주 같은 세계의 근원이 되는 것을 부숴 이 세계를 멈춰야 한다. 핵이 없다면 조종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조종하는 사람이 세계 바깥에 있을 수도 있지만, 바깥에서 이 정도의 마법을 계속 유지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니, 그러니까…….
적어도 그 드래곤이 있는 곳에 뭔가 중요한 것이 있는 건 확실하다. 그러니 그 드래곤이 지키고 있겠지. 그게 오히려 함정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 핵을 숨겼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뭔가가 있을 것이다. 이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무언가가.
구원 요청도 계속 해야지. 현실을 비집어 열기보다는 꿈속 세계를 비집어 여는 편이 오히려 더 쉬울 수도 있다. 이 가능성도 내버려 둘 수 없다.
나는 이성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남아야 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이 익은 얼굴이 거의 없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참담해졌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정말로, 사람이 죽고 있구나. 모두 나처럼 갑자기 영문도 모르고 이 세계에 와서, 이 세계에서 죽고 있다. 그럼 아래에 고인 이 섬뜩한 느낌은 혹시 영혼……인 걸까? 꽁꽁 갇힌 이 세계에서는 혹시 영혼마저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고이는 눈물을 닦으며 담담히 앞으로 걸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교복과 잡화점에서 산 지갑과 내 몸과 마법뿐이다. 일단 조금이라도 더 정보가 필요하다.
누구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저번에 갔던 잡화점으로 들어갔다. 모르는 사람을 무작정 붙잡고 물어볼 수 있을 정도로 뻔뻔한 성격이었다면 내가 성격 때문에 고민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저기…….”
낡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아주머니는 나를 기억하는지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갑이 안 돌아온다 싶었지만……멀쩡히 살아 있었구나.”
“네……그래서, 저기…….”
“일곱 번 이상 오래 살아남은 자에게 해 주는 말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지. 던전 안에서 이 세계를 유지하는 10개의 기둥을 찾아 전부 무너뜨린다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이 세계는 무너진다.”
“…….”
나는 숨을 삼켰다. 10개의 기둥?
10개의…….
눈으로 보았던 광경이 10개의 점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이미 알고 있다. 30개가 넘는 이곳의 던전 중에 어느 것이 기둥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세계가 닫힌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아주머니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20XX년 11월 17일.”
“……감사합니다.”
가장 필요한 것을 들었으니 나는 밖으로 나섰다. 7년 동안 계속된 세계다. 내가 몰랐을 뿐, 이곳에는 강한 적이 수두룩하다. 10개의 기둥을 무너뜨리는 것은……결코 쉽지 않다. 기둥이 있는 숨겨진 장소는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려면 매우 큰 힘이 들고, 건물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더라도 반드시 던전의 보스 몹들이 소환된다. 문이의 말대로라면 부분 텔레포트마저 할 수 있는 그 드래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도망치면서, 어떻게든 기둥을 부숴야 돼.’
나는 참담함을 삼켰다. 분명 미치도록 어려운 일일 것이다.
몇 번이나 세계가 되돌아갔을까. 나는 힘이 약한 기둥부터 공략을 개시했다. 처음에 무너뜨렸던 건물 밑에 숨어 있던 마정석도 기둥이었었다. 그러므로 남은 기둥은 9개였다.
목숨이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만 치고 빠지는 걸 반복했다. 16년 만에 맞은 죽음이 너무도 괴로워서였을까. 며칠간은 적이 나타난 즉시 도망칠 정도로 마음이 불안정했다. 두렵고 또 두려웠다. 그것을 극복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두 번째 기둥을 공략하는 데 10번의 시간이 걸렸다.
“하아……하아…….”
기둥이 무너지면 건물도 무너진다. 무너지는 건물을 보자 비로소 그날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안에 남아 있는 사람과, 망설였지만 키메라도 바깥으로 내보냈다. 허나 내보내고 나서 불필요한 짓이었음을 알았다. 키메라들은 건물과 함께 사라졌으니까.
무너진 기둥과 함께 몇 개의 건물이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진 건물은 이튿날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세 번째 기둥을 공략하는 데에는 4번의 시간이 걸렸다. 어느 정도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된 건지, 훨씬 빨리 끝낼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상대가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허나 갈수록 강하고 위험한 적이 많아졌다. 시간이 돌아가 다시 살아날 때마다 강해지는 것도 있고, 최대한 ‘쓰러뜨리지 않고’ 치고 빠지려 애썼다. 하지만 다섯 번째가 되자 그것마저 힘들어졌다. 적은 다양한 마법을 사용했다. 텔레포트를 할 수 있는 자들도 나타났다.
‘누군가가 너를 공격하려 한다면, 너도 그자를 공격해야 한다.’
언제였던가, 그 말을 들었던 것은.
그러나 이번에는 쓰러뜨려서는 안 되는 상대다. 나는 온갖 방법을 사용해 제압했다. 제압하는 것에는 손 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다섯 번째 기둥을 무너뜨리는 것은 무척 힘겨웠다. 6번이 걸렸고, 복부에 부상을 입었다. 상대는 돌마저 가볍게 자르는 검술과 마법을 썼다. 나와 매우 상성이 안 맞는 마법이었기 때문인지 부상을 당했다. 공포를 채 이겨 내지 못해 움츠러든 것도 있다.
죽었을 때의 일이 떠올라 괴로웠지만 그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다. 바위도 철도 가볍게 가르는 상대의 공격을 결계 없이 직격으로 맞았는데도 손으로 추스를 수 있을 정도니까.
그래도 고통스러웠다. 죽을 때는 거의 고통을 못 느꼈지만, 이번에는 아팠다. 혼자서 고통을 참고 있자니 서러웠다.
“하아…….”
그리고 눈을 감았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잿빛 세계에 있었다. 잿빛 세계에서 잿빛이 되어 어딘가에 앉아 있었다. 의식은 붕 떠 있었고, 떠다니는 것처럼 허공을 보고 있었다. 빛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색이 없는 세계였다.
내가 정신을 되찾은 건 눈앞에 있는 선명한 색 덕분이었다. 샛노란 색, 어디선가 본 적 있다는 생각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화들짝 정신이 깨어났다.
“너……!”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벤치에 앉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소녀가 웃었다.
“……언니.”
그러나 휘어진 눈동자에서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아이는 울면서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언니.”
환하게 웃던 얼굴이 이내 일그러졌다.
“언니가……살아서……다행…….”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흘리는 아이를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바라보다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울고 있는 아이의 어깨를 붙잡아 억지로 얼굴을 들게 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 세계는 대체 뭐야? 네가……네가 날 거기로 부른 거야? 그 세계로…….”
“저, 저는……저는 몰랐어요…….”
“몰라? 뭘 몰라!”
목소리가 윽박지르듯이 커졌다. 눈물이 가득 담겨 일그러진 아이의 눈동자가 똑바로 나를 응시했다.
“이상한 세계죠……? 맞아요, 이상한 세계예요…….”
“왜 날 거기 불렀냐고!”
“부르고 싶어서, 부, 부르고 싶어서 부른 건 아니에요! 그저……저는 몰랐어요. 저와 언니가 꿈에서 만난 순간, 눈이 마주친 순간……대화를 나눈 순간……연결되고 말았다는 걸…….”
“……연결?”
무슨 소리지?
“자세히 말해 봐.”
“네, 네.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빨리 말할게요.”
소녀가 주먹을 쥐며 눈물을 닦았다.
“그러니까……사람을 그 세계로 데려오는 방법이에요. 그냥 무작위일 때도 있지만, 보통은 ‘저주’가 연결된 사람으로 대체돼요.”
“저주와……연결……?”
“네. 사람들 말론 저랑 언니처럼 이 잿빛 꿈속 세계에서, 사람들의 의식이 떠다니는 곳에서 우연히 만나서 연결되는 경우가 가장 많대요. 꿈속에서 만나서 연결되는 거죠. 상대가 죽을 위험에 처했다고 세계가 받아들였을 때 정신을 의식 세계로 튕겨 보낸다고, 그 사람들이 말했어요. 그렇게 연결되어서, 그 이상한 세계에서 한 사람이 죽는 순간……저주에 연결된 사람이 대신 그 세계로 끌려오는 거예요.”
“대신……잠깐, 뭐라고?”
설명을 듣던 나는 어느 순간 이상함을 깨달았다. 나는 멍하니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소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웃고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요, 언니. 나, 나……나……죽었……어요. 그래서, 나…….”
“……!”
나는 반사적으로 아이를 끌어안았다. 뭐……? 지금까지 이 아이를 많이도 원망했다. 그런데, 뭐라고……?
“흐아앙……미안해요, 언니……. 내가 그만 죽어서, 죽어서……언니가……언니가 나 대신에…….”
귓가에 울음소리가 울렸다. 내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죽음을 느꼈던 순간의 일이 떠올라 몸이 벌벌 떨렸다. 나는 소녀를 껴안은 팔에 힘을 줬다.
“어떻게 된 거야.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야?”
“언니를 만나기 전부터……계속…….”
“계속……?”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마지막으로 본 날짜는 20XX년 4월 30일이었어요…….”
반년 전……. 반년 전부터, 이 어린아이가, 그 세계에 혼자…….
“저도 꿈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서 이곳으로 왔어요. 근데, 그런데, 언니를 만났을 때도, 만난 후에도, 계속 잊고 있었어요……. 언니랑, 언니랑 이야기를 나누지만 않았어도, 언니가…….”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처한 상황이 너무도 억울해서. 이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처연해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왜! 이런 어린아이에게…….
“전 계속 숨어 있었어요. 운이 좋았거든요. 좋은 장소를 발견해서……그 장소에 계속 숨어 있었어요. 가끔 사람들이 제가 가엾다면서 먹을 걸 나눠 줬어요. 그래서 그렇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그랬구나…….”
“나가고 싶지만, 난 힘이 없으니까, 포기했어요. 포기했지만……언니가 나를 보고 재능이 있다 말해 줬으니까……!”
“흑…….”
“조금 더 살고 싶었어요! 엄마랑 아빠를……다시 한번만 더 만날 수 있다면……만나고 싶었는데…….”
흐느낌이 멈추지 않았다. 이 어린아이가 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곳에서 견뎠을까. 나조차도 끔찍하고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었지 않나.
“저요……언니는 몰랐겠지만, 저, 의식만은 항상 언니 곁에 있었어요……. 영혼은 이상한 곳에 묶여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항상 언니를 신경 썼어요……. 그리고 알았어요. 언니가 정말로 강한 사람이라는 걸…….”
“흡……그랬니……?”
“언니, 있죠……이건 나처럼 묶여 있는 다른 사람들이 말한 건데요, 이건 저주래요. 사람을 납치하고, 사람을 죽이는 저주. 그럴 때마다 이 세계의 힘이 강해지는, 그런 저주예요. 그 세계는 그곳에서 죽은 사람들의 육체를 세계에 녹여서, 영혼을 묶어서……아무 데도 못 가게 만들어요.”
나는 숨을 삼켰다. 죽은 사람조차, 벗어나지 못한다. 그게 얼마나 괴롭고, 또 끔찍하고, 가엾은지 모르겠다. 그곳에서 죽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아이가 가엾다.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의 숫자는, 원래 마을에 살던 사람들을 제외하고 항상 100명이라고 해요.”
나는 소녀를 끌어안은 팔에 또 한 번 힘을 주었다. 이 아이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언니……우리를 구해 주면 안 될까요……?”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굉장히 많은 사람이 저주 때문에 죽었어요.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요……. 저도, 다른 사람들도……갑자기 이곳에 와서, 갑자기 죽게 되어서……하고 싶은 일도 많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
“언니. 우리를 구해 주면 안 될까요…? 나……엄마를……아빠를……보러 가고 싶어요……. 계속 나를 찾고 있을 거예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또 한 방울 떨어졌다. 우리 부모님도 나를 찾고 있을까? 그래, 지금쯤이면 연락이 갔을 것이다. 우리 부모님도, 인하네 부모님도, 친구들도, 선생님들도, 선배들도, 나를 아는 사람들은 다 나를 찾고 있을 것이다.
“……그래.”
나는 아이를 끌어안던 팔을 풀고 눈물을 글썽이며 아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
겁 많고 아픈 것을 싫어하는 나. 그러나 이것은 이미 타인의 일이 아니다.
이 가엾은 아이를 위해서, 이 불행한 상황에 휘말리고 있는 나를 위하여.
나를 기다리고 있을, 죽은 사람들의 흔적 하나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위하여…….
“맹세할게. 이 세계를 해방시키겠다고.”
아주 오랜 옛날부터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않기로 정했다. 그러므로 나는 맹세했다.
소녀는 엉엉 울어 발그레해진 뺨으로 눈물이 맺힌 눈을 휘며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언니.”
말을 하는 아이의 모습이 희미해졌다. 아니 흐려지고 있는 것은 내 모습이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목소리가 멀어지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시 안개 속에서 깨어난 나는 어린 소녀, 랑 유메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울고 또 울었다. 어린아이가 이 참혹한 세계에서 계속 견디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미안했고, 내가 이렇게 된 게 그녀의 탓이라 생각했던 것이 너무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심정이 복잡했고, 결국 이 무분별한 저주에 그녀가 휘말려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 가엾었다. 가엾고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일어섰을 때는 이미 시간이 반이나 지나가 있었다. 오늘 여섯 번째 기둥을 깨기는 그른 것 같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내가 이겨 내야 할 것이었다. 그, 드래곤…….
그래, 이제는 피하고 있던 것을 마주해야 할 때가 왔다. 이곳을 나가려면 어차피 그 드래곤을 피해 기둥을 깨부숴야 한다. 드래곤만이 아니라 그곳과 동등한 힘을 지니고 있는 다른 두 기둥도 깨부숴야 한다.
지금 심정으론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어떻게든 하고 싶지만 급하게 나서 봤자 내가 죽을 뿐이다. ……그래, 죽을 뿐이다. 마음이 싸해졌다.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나는.
‘하아…….’
한숨을 삼켰다. 그렇게 위험한 적을 나 혼자 처리할 수 있을까? 나와 상성이 잘 맞는 동료를 사귄다면 좋겠지만……내 성격이 이 모양이니……. 아니, 지금은 성격이 이렇다 저렇다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니지. 하지만 누구를 동료로 삼아야 하지? 내 마법 타입과 전투 성향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여차할 때 나는 텔레포트로 싸움을 회피하고 있으니까.
대체 왜 이 세계가 7년이나 계속된 걸까. 견고한 세계라는 것은 알겠다. 기둥이 꽁꽁 숨겨져 있다는 것도 알겠다. 그러나 분명한 단서를 주는데도 불구하고 왜 7년이나 아무도 깨지 못한 것일까. 이 세상에는 나보다 강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지금 내 실력을 B랭크 정도로 가늠한다 하더라도……이 세계에 온 사람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을 것 아닌가.
그리고 죽었지. 죽고 또 죽었다. 나는 점점 어두워지려는 생각을 멈춰 세웠다.
‘한번……살펴나 볼까?’
드래곤과 조우했을 때의 불안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그러나 그 세 기둥만은 사전 조사 없이 무모하게 뛰어들어 상대할 수 없다. 남은 기둥은 다섯 개, 다음 것을 쓰러뜨리면 반 이하가 된다. 두 개만 더 부수면 드래곤이 있는 기둥을 상대해야 한다.
눈에 띄게 강한 힘을 지닌 세 기둥. 그 세 기둥은……이곳의 ‘핵심’이다.
나는 남은 시간 동안 고민하고, 몸을 떨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결국 사전 조사를 한번 가 보기로 했다. 당연히 방비는 철저하게 할 것이다. 몸 주위에는 단단한 결계를 치고, 게이트 안에 숨어서 주위를 돌아볼 생각이었다. 이 세계는 다른 차원이나 차원의 틈새가 없지만 게이트는 내가 인공적으로 만든 차원의 틈새다. 그러므로 마력만 유지한다면 게이트 안쪽에 숨을 수 있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가 하늘에 있는 기둥을 찾아가기로 했다. 하늘 위로 쭉 날아오르니 검은 구름 사이에 숨어 있는 노랗고 뾰족한 성이 하나 보였다. 하늘에 있는 던전은 이 성뿐이다. 이곳은 일부러 하늘 높이 날지 않는 한 찾기 어렵다.
나는 길게 뻗어진 낮은 계단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문 안쪽을 살그머니 바라보다가 곧바로 게이트 안에 숨었다. 어두운 공간이 나를 맞았다.
뒤는 어둡고, 앞은 밝다. 밝은 곳에 성의 모습이 비쳤다. 나는 성의 구조를 따라 게이트를 이었다. 로봇도, 키메라도, 차원의 틈새에 있는 나를 느끼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나는 게이트 안에서도 충분히 상대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직접 싸워 보면 더 확실히 확인할 수 있겠지만,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 세계는, 특히 핵심이 되는 세 성은 너무도 위험하다.
침을 꿀꺽 삼키며 가장 위험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섬뜩한 위압감이 몸을 짓눌렀다. 나는 바닥에 돌을 던져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중간중간 함정을 확인했다. 마력 감지로는 느낄 수 없는 기계식 함정도 제법 많았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문이 보였다. 그것을 보며 나는 그때와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문을 열고, 드래곤을 조우하기 전의 짧은 긴장감……. 침을 꿀꺽 삼켰다. 문을 열면, 이번에도 드래곤이 있을까? 아니면…….
한 차원 너머에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 문에 원래 그러한 역할이 있는 것인지, 문 너머의 마력이 확실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그랬다. 보였다고 하면 보였고 강한 힘을 느끼기도 했지만, 결국 강함을 정확히 재지 못하고 큰코다치지 않았던가.
나는 바짝 긴장한 채 문을 통과했다. 특별한 문이라 그런지 약간 저항감이 들었으나 곧 문 너머의 광경이 보였다.
이어서 나는 깜짝 놀랐다. 8장의 검은 날개, 그러나 모습만은 사람과 다름없다. 천사 같은 외양을 지닌 적과 두 명의 남자가 싸우고 있었다.
쾅! 콰광!
거대한 창이 휘둘러지며 날카로운 마력이 주변으로 길게 쏘아졌다. 그것은 내가 있는 방향으로도 쏘아졌지만, 당연히 나를 통과해 벽에 처박혔다. 그럴 거라고 알고 있었음에도 아찔할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었다.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