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197
형일 아저씨가 혀를 찼다.
허나 더 곤란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제단에 있던 기둥이 움직이더니 여러 개로 분산하는 것이 아닌가.
“헉! 이건 또 뭐야?”
분산? 정말로 이건 분산한 걸까……?
“쿠어어어!!”
그러나 고민할 시간조차 없었다. 기둥이 분산한 것과 거의 동시에 드래곤이 새까만 브레스를 토했다. 나는 곧바로 도약해 브레스를 피했다. 형일 아저씨가 또 한 번 불만을 내뱉었다.
“저놈, 기둥까지 깨부술 셈인가?”
“통하지 않겠지. 마력만으로 보면 기둥의 힘이 더 강하다.”
브레스는 제단을 약간 빗겨 갔다. 그러나 브레스는 분산한 기둥을 몇 개나 없애 버렸다.
‘아니, 저건 분산이 아니라……그림자. 그래, 환영이야.’
사방에 몇 개나 거울을 두고 비추면 그 모습이 거울보다 더 많은 숫자로 분산해 비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엔 기둥 스스로가 차원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공간을 통해 그림자를 비추고 있다. 나는 주변을 면밀히 살피다가, 이내 어느 방향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나…….
투화악!
주먹이 닿는 순간, 공간이 몇 번이고 일그러지며 내 손을 튕겨 냈다. 윽…! 나는 손을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저건 또 뭐야?!”
“공간을 구부린 거예요! 그걸 반복하면 저렇게 돼요.”
“──즉, 저 기둥은 시공간마법을 쓴다는 거네?”
──아. 그 순간 나는 어떠한 것을 직감하고 형일 아저씨를 돌아보았다. 형일 아저씨는 어느새 검은 활로 드래곤을 노리고 있었다.
하진 아저씨는 검을 세우고 마력을 불어넣으며 허공을 강하게 찔렀다. 회전하며 날아간 바람이 날개에 막혀 튕겨 나갔다. 형일 아저씨의 화살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더니, 드래곤의 몸에 닿는 순간 폭발했다. 새파란 불꽃이 솟아오르며 드래곤을 집어삼켰다.
“키에에엑!”
드래곤이 비명을 지르며 꼬리를 휘두르고, 검고 일그러진 마법을 쏘는 동안에도 형일 아저씨는 담담히 물었다.
“아가씨. 그 기둥을 보호하는 마법, 부술 수 있겠어?”
나는 기둥을 돌아보았다. 차라리 내 손에 닿지 않는 힘이었으면 하고 바랐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둥 주위를 감싸고 있는 힘은 내 마법으로 어떻게든 부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부술 수……있어요.”
“좋아. 돌아가자.”
하진 아저씨가 마법을 사용하자 푸른 불꽃이 더욱더 힘을 발하며 드래곤의 몸통으로 날아갔다. 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는 두 사람을 데리고 문 앞까지 텔레포트 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또 한 번 건물 밖으로 텔레포트 했다. 순간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이내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몸에서 힘을 풀었다. 제 구역을 다소 벗어나는 보스라도 건물 안을 벗어나지는 않으니까.
‘그때는 구역만 벗어났을 뿐 건물 안에 있었기 때문에 당했지……. 게다가 완전히 이동한 것도 아니고 부분 텔레포트만 했었고.’
드래곤이 있는 던전의 기둥까지 확인을 끝냈을 때는 이미 세계가 돌아가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일몰 직전이었으며, 남은 시간은 고작 10분이었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며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 의논은 세계가 다시 돌아간 뒤에 하자고.”
“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자. 한동안 뛰어다녔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하고 우울했다.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가 다시 돌아갔다.
세계가 돌아간 후 의논을 시작했다. 몇 번 의논을 한 끝에 악마는 하진 아저씨가, 타천사는 형일 아저씨가, 그리고 드래곤은 내가 맡게 되었다.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우리는 시공간마법엔 문외한이야. 알아채지도 못하고, 깨기도 힘들어.”
“미안하구나. 네게 가장 힘든 일을 맡겨서…….”
이성적으로는 내가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어째서 나인 건지 속으로 묻게 된다. 숨이 턱 막히고, 괴롭고, 무서웠다. 두려웠다.
“아무래도 이 작전은 좀 모의 연습을 하고 실행해야겠어.”
“그렇군. 여기 있는 녀석들과 일대일로 싸운 적은 별로 없었지.”
“아가씨는 한동안 일대일로 싸우고 다니긴 했지만…….”
형일 아저씨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흘끔거렸다. 나는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차가워진 손을 모은 채 두려움을 떠올렸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때 하진 아저씨가 근심 어린 눈으로 말을 꺼냈다.
“아니, 바로 시행하기에는 아직 이를지도 모른다. 아직 우리는 시험해 보지 않은 것이 몇 개 있어.”
“그래? 어떤 거?”
“기둥. 그것을 밖으로 가지고 나온 뒤 한꺼번에 파괴할 수는 없을까?”
“하지만 마정석 스스로 마법을 쓰잖아. 그걸 어떻게 가지고 나와? 웬만한 거면 그렇게 해도 되겠지만, 그런 물건을 상대론 무리야. 거울에 봉인하면 오히려 내 거울이 깨질걸?”
“…….”
“기분은 알겠는데, 위험한 건 은하 아가씨뿐만이 아냐. 우리도 버겁다고. 여태까지는 공격도 방어도 셋이서 나눠서 했었지. 은하 아가씨가 적절하게 서포트를 해 줬어. 하지만 이번에는 수십이 넘는 보스 몹의 공격을 피하면서, 그보다 훨씬 강한 마력을 지닌 기둥을 부숴야 해. 그것도 동시에, 타이밍을 맞춰서.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죽을 수 있어. 집중해야 된다고.”
나는 한순간 흠칫했다. 그렇다. 이건 그들에게도 버거운 작전이다. 그들도 죽음의 위험을 감내하고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 핵심이 되는 세 기둥을 지키는 타천사와 드래곤, 악마는 그토록 강하다. 지금까지는 공격도, 방어도, 서포트도, 세 사람분의 눈과 몸을 가지고 했기 때문에 적절하게 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 모든 것을 혼자서 다 해야 한다.
“은하 아가씨에게 부담이 크다는 건 잘 알고 있어. 아가씨는 미성년자고, 전투 마법사도 아니고, 여기 오기 전까지는 변변찮은 전투 경험도 없지. 하지만 아가씨, 잘 생각해 봐. 아까 드래곤과 마주쳤을 때, 아가씨는 정말로 그렇게 무서웠어?”
형일 아저씨가 내 어깨를 붙잡으며 속삭였다. 그 말에 몸의 떨림이 잦아졌다. 무서웠냐고? 긴장했다. 두려웠다. 하지만 막상 마주 보자 그렇게 무섭지는──않았다. 그래, 그렇게까지 두렵지는 않았다.
형일 아저씨가 나와 눈을 마주하더니 웃었다.
“아가씨는 무척 강해. 아가씨라면 할 수 있어. 마지막에 성공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해 보자.”
나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래, 이미 알고 있었잖아. 어차피 이 세계를 열 수 있는 건 여기에 있는 우리밖에 없다. 강한 마법사가 이 안으로 들어올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다. 남은 한 발로 세계가 열린다. 마지막으로 남은 세 기둥이 차원을 겨우 가두고 있다. 그것이 내게는 느껴졌다.
“……네.”
그러므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일 아저씨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우리는 서로 맡을 구역을 정한 후에도 많은 의논을 나누었다.
“문제는 타이밍인데……설마 완전히 동시에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무리 그래도 무리다. 아마……수복되기 전까지의 몇 분 정도가 유예 기간이 아닐까 한다.”
“전에 무너지고 난 뒤에 몇 분 만에 수복했어?”
“한 5분 정도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만.”
“휴우……. 염화마법으로 연락할 수 있을까? 이세계인데.”
“으음……직통 통신기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거예요. 마정석도 많고요.”
“……뭐?”
“아, 말 안 했던가요? 저 장인 지망이거든요.”
“와, 진짜야? 아가씨 능력 좋다~.”
머뭇거리며 꺼낸 말에 하진 아저씨와 형일 아저씨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전투 마법사 지망이 아닌 건 마법을 쓰는 걸 보고 알았지만, 장인 지망생이었어?”
“네. 액세서리 아이템을 만들어요. 유리 공예 기술을 익히고 있고요.”
“흐음~. 그럼 타이밍은 어떻게든 되려나?”
“하지만 이공간에서 싸워야 하니까 몇 번 실험을 해 봐야 돼요. 만드는 건 간단하니까 이따가 드릴게요.”
역시 가장 큰 문제는 공략 자체다. 세 명이서 함께 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혼자서 해야 한다. 강한 적 여러 명을 혼자 상대하는 것에는 많은 리스크가 뒤따른다.
‘기둥이랑 드래곤에만 집중해도 힘들 판인데…….’
환각마법으로 몸을 숨기고 공격할까? 그러나 기둥을 공격하는 순간 위치를 들키겠지. 게다가 그 드래곤은 생각보다 민감하다. 부분 텔레포트도 주의해야 한다. 기둥과 비슷한 방법으로 몸 주위를 보호하면 어떨까.
환각마법으로 최대한 어지럽게 만들 수밖에 없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위험하니까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진행해 보자. 우선……잘못하면 크게 다칠지도 모르니까 세계가 돌아가기까지 한 세 시간쯤 남았을 때 혼자서 기둥이 있는 곳까지 가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재 보자.”
“그렇군. 크게 다쳤는데 기둥을 부수는 것까지 실패하면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은하 너는 치료마법을 잘 못 쓴다고 했지?”
“네……. 임의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한데……제약이 많아서…….”
언젠가 딱 한 번 사용했던 방법. 바로 결계로 시간을 돌려 몸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시공간마법이기 때문에 제약이 많다. 가벼운 상처는 그냥 해도 되지만, 심각한 상처는…….
‘으, 싫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죽음까지 생각하는 상황에서 물불 가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웬만해선 쓰고 싶지 않다.
“그럼 먼저 기둥과 통하는 길까지 가는 데 각자 시간이 얼마 걸리는지 확인하고 돌아오자. 거기까지라면 보스와 만날 일도 없고 별로 다칠 일도 없을 거 아니야.”
“그렇군…….”
하진 아저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형일 아저씨는 감지능력이 없어서 적과 자주 마주치기도 할 테고……그보다는 그냥 텔레포트 아이템도 만들면 어떨까 싶은데요. 이동 포인트는 여기랑 기둥으로 향하는 길 바로 옆 지점으로 하면 되겠죠?”
그런 건 생각지도 못했는지 두 사람이 당황했다. 하긴, 공간계마법과는 거리가 멀다 그랬지.
“……아, 맞다. 그러면 되겠네.”
두 사람은 겸연쩍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살짝 웃었다.
“흠, 큼! 그럼 그렇게 하자. 그다음은 실전……연습이네.”
그러나 그 미소는 곧바로 지워졌다. 형일 아저씨가 인상을 쓰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지만 연습을 위해서 기둥 구역에 직접 들어가는 건 위험해. 거긴 막혀 있어서 여차할 때 공간마법을 사용해 밖으로 나갈 수도 없잖아.”
“마지막 1시간만 기둥 구역 안에서 연습해 보는 건 어때?”
“그 정도라면……괜찮겠네. 하지만 그럼 시간이 너무 많이 남으니까……그동안에는 우리끼리 훈련을 좀 하자.”
나는 대화를 진행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무적인 감정이 머릿속을 채웠다.
나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예상외로 그렇게 무섭지 않다. 이미 트라우마를 극복했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건 내가 가진 마법, 환각마법 덕분일 것이다.
덕분인지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런 건 지금이 처음이 아니다. 나는 예전부터 그랬다. 초조할 때, 냉정을 유지하기 힘들 때, 감정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 무의식적으로 언제나 감정을 조절해 왔다. 위험에 처했을 때도, 성진 때문에 혼란스러웠을 때도, 몇 번이나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했다.
지금은 그것을 스스로 자각할 수 있다. 이곳에 오고부터 목숨의 위협을 끊임없이 느끼고 있기 때문일까,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 덕분에 마법 실력이 엄청나게 늘었다. 위험을 앞에 두고 사람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결국 진정으로 강해지기 위해서는 무시무시한 위험을 목전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 세계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강해진다는 사실도.
형일 아저씨가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무겁게 말을 꺼냈다.
“보자.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23번이야. 이 안에 성공시켜야 해.”
“…….”
나는 가슴에 올린 손을 꽉 쥐었다. 가슴이 꽉 죄여 들었다. 23번, 만전을 기하기에는 무척 짧은 시간이다.
“게다가 우리가 센 60번도 확실하지 않아. 우리 기억으로는 61번째 날에 기둥이 수복됐어. 은하 아가씨의 말대로라면 이곳의 하루는 정확히 12시간이야. 12시간, 60번, 어쩌면 한 달 주기에 맞추고 있는 걸지도 몰라.”
“설마……바깥 시간의 한 달에 맞춰 고쳐지는 건……아니겠지. 첫 달에서 다음 달로 넘어가는 순간 수복된다든가.”
“그럼 60번이 끝나기 전에 갑자기 고쳐질 수도 있다는 거잖아! 윽,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애초에 바깥 시간과 여기 시간이 비슷한지 어떻게 알아!”
“그건 모르겠지만……적어도 바깥 시간과 여기 시간이 같다면 다음 달에 넘어간 순간 바로 고쳐지는 건 아닐 거예요. 제가 여기에 온 건 20XX년 9월 23일이니까요.”
“XX년?! 그럼 우리가 여기 온 지 한 1년 반쯤 지났다는 건데……. 음……으음……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어긋나는 것 같지는 않네.”
“그래. 그럼 60번이 지나기 전에 고쳐지는 상황은 없다고 가정한다.”
“그러자고. 괜히 불길한 상상은 하지 말자.”
형일 아저씨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실행 날짜는 D-day 5일 전으로 하자. 연습 기간 동안에는 한 시간 전에 길 앞으로 이동해서, 동시에 기둥 구역 안에 진입, 최대한 동시에 기둥을 깬다. 혹시 부상을 입는다면…….”
“여력이 있을 때는 회피. 여력이 없다면 구하러 간다. 그게 아니면…….”
──정말 죽을 정도의 상처라면. 그 상태에서 시간이 많이 남았다면. 어차피 시간 회귀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죽을 각오로 마정석을 깰 수밖에. 거기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어.”
그 순간 터지게 될 시공간의 에너지, 혹은 우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 죽음보다도 무서운 것은 어쩌면 죽어서도 이 세계에 갇히는 것이다. 두 명이서는 세 개의 기둥을 동시에 부술 수 없다. 기둥을 전부 부수기 전까지는 누구도 죽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그 경우에는 정말 죽을 각오로 ‘희생’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다. 죽음을 보고 싶지도 않다. 이 세계는 두렵고, 무섭고, 그 마음을 마법으로 다잡을 수밖에 없어서.
“각오 단단히 하고 가자.”
나는 딱딱하게 굳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텔레포트 아이템은 5분 만에 즉석으로 만들었다. ‘이동’이란 시동어로 기둥과 통하는 길 앞으로 텔레포트 하고, ‘귀환’이라는 말 한마디로 우리가 평소 집합하는 장소에 돌아올 수 있다. 기왕 만드는 김에 내 것까지 만들었다. 마력은 최대한 아끼는 편이 좋으니까.
통신기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만드는 것 자체는 10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조정하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렸다. 몇 번의 조정을 거친 끝에 기둥이 있는 영역 안에서도 충분히 연락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거기까지 만 하루 정도 걸렸다.
“땡큐!”
“고맙다.”
하루의 대부분을 훈련으로 소비했다. 1:2 대련을 번갈아 반복했다. 이길 필요는 없다. 그저 방어하고 피하면서 다섯 개의 바위, 혹은 나무를 부수면 되었다.
의외로 나와 그들의 승률은 비슷했다. 두 사람은 싸우는 데 익숙했고, 나는 응용 기술이 많았다. 직접적인 전투 훈련이었다면 내 패배였겠지만, 공격을 피하고 목표를 부수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기둥을 부술 시간을 정하자. 그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부술 준비를 끝내는 거야.”
그렇게 훈련을 하다가 세계가 돌아가기 한 시간 전이 되면 기둥이 있는 공간 안에 들어가 실전 연습을 했다. 드래곤의 공격을 피하고, 또 피한다. 드래곤은 시공간마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가벼운 공격이라도 허투루 볼 수 없었다. 환각으로 어느 정도 상대를 속일 수 있다. 하지만 마법이나 몸이 기둥에 닿으면 반드시 들킨다.
결계로 드래곤의 공격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는지 확인해 갔다. 처음 할 때는 하여간 무서워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점차 진정했다. 나는 내 마법으로 드래곤의 실력을 시험했다. 브레스는 위험하니 무조건 피해야 한다. 다행히 브레스를 쓰기 전엔 엄청난 마력이 집약하니 쏘기 전에 눈치챌 수 있다.
꼬리나 주먹, 발을 내지르는 육체 공격은 결계로 튕겨 낼 수 있다. 그러나 두꺼운 결계가 필요하고, 어느 정도 충격이 온다.
손톱이나 이빨 같은 날카로운 공격은 방어가 약간 불안하다. 마법을 부가할 필요가 있다.
육체 공격에 시공간마법까지 더해질 때는, 특별한 결계가 필요하다. 그것도 상당한 마력이 소모되는 시공간 전용 결계가 필요했다.
드래곤은 부분 텔레포트도 많이 사용하는데, 그것은 기감을 집중하면 전조를 느끼고 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가 돌아가기 10분 전으로 하지.”
필사적으로 집중했다. 드래곤의 공격은 빠르고 강했다. 시공간마법까지 더해지면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한다.
부분 텔레포트만이 아니다. 마법의 마력 패턴은 단조롭지만 마법을 응용해 사용할 줄 알았다. 형태를 만들거나, 몇 개로 나눈다. 어느 기술이든 무시 못 할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다른 보스들의 공격도 문제다. 웬만한 것은 결계로 막을 수 있지만 피해야 하는 것도 간혹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둥이었다. 기둥의 마력에 집중하면서 드래곤의 공격을 피하고, 그러면서 기둥을 공략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실전 훈련 초반에는 많이 다쳤다. 관통상이나 자상은 당연하고, 드래곤의 공격에 결계가 꿰뚫려 뼈가 비틀리고 으스러지기도 했다. 피를 토하고, 팔이 꺾이고, 얼마나 고통스럽던지! 환각마법으로 통각을 차단해도, 정신적으로 괴롭다.
사람이 싸우면서 적을 상처 입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면 적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도 아니고, 하물며 키메라가 상대라면.
나는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 왜냐면 내가 아픈 걸 싫어하니까. 그런 거 아닌가? 내가 싫은 일은 남에게 하면 안 된다. 그런 건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전생을 살며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사람과 친해지기 힘들고 미움받기 쉽다면 적어도 상대에게 원망받을 짓은 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내가 아프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내가 아프듯이 남에게 돌려주고 싶어지는 거니까.
하지만 상처 입히고, 그래서 적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다음에는 더 강해져 돌아오게 된다. 그게 나를 제어하는 리미터가 되었다.
다치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도 몇 번 심한 상처를 입었다. 그 경우 우리는 합의하여 전투를 그만두고 도망쳤다. 혹은 상대를 구하러 갔다. 시간이 돌아가지 않았다면 위험했을 순간도 있었다.
‘조금만 참으면 돼. 조금만.’
그 희망만으로 버티며 드래곤의 기술, 다른 적들의 기술, 기둥의 기술까지 전부 파악했다. 마법을 피하고, 막아 내고, 버티며 기둥을 무장 해제 상태로 만들었다. 그것을 세계가 돌아가기 10분 전에 전부 해내기까지…….
약속한 시간 내에 전부 파악해 내지 못했다. 훈련을 하며 실전 훈련을 했음에도, 결국은. 실전 훈련 기간 동안 혹시 동시에 기둥을 부술 기회가 생기면 부수기로 결정했지만, 그런 기회는 결국 찾아오지 않았다. 연습할 기회는 20번 이하. 부상을 계속 입으면서도 확실한 찬스를 잡아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싸워 쓰러뜨리기에는 실패한 다음 일이 마음에 걸린다.
결계에 가두는 건 소용없다. 이공간이라 판단하고 다시 소환된다. 봉인마법에 가둬 놓아도, 부분 텔레포트를 쓰며 풀어 버린다. 드래곤은, 내 실력으로는 제압해서 묶어 놓을 수 없었다.
‘환각마법도 제대로 안 먹혀. 평범한 환몽마법은 힘으로 풀어 버린다. 그럼……좀 더 본격적으로 정신을 조작하는 수밖에.’
연습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았고, 고심할 수 있는 시간은 두려울 정도로 길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D-day 5일 전이 찾아왔다.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다잡았다.
“이제부터가 진짜야. 기회는 다섯 번. 그래 봤자 죽으면 다 끝이니까 죽을 정도로 무리하지는 마.”
통신기에는 새롭게 알람마법을 걸었다. 우리는 귀에 건 피어스형 통신기를 매만지며 결연한 각오를 나눴다.
“……아직 상대를 쓰러뜨리는 건 삼가자.”
“그래…….”
“자, 그럼.”
시선이 교차한다. 우리는 텔레포트 아이템을 통해 동시에 이동했다.
눈앞에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벽이 보였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딱 세계가 돌아가기 한 시간 전이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기둥이 있는 방으로 통하는 문 바로 앞으로 또 한 번 텔레포트 했다. 드래곤의 포효 소리가 들리는 것보다 먼저 문을 열어젖혔다.
안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소환진이 생긴다. 나는 소환진의 속도를 더디게 만들고 문 앞에 방어 결계를 여러 겹 친 후 문을 꽉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 번의 도약으로 제단 위로 올라갔다. 기둥의 처음 패턴은 매번 똑같다. 나는 결계에 손을 올려 시공간 결계를 가볍게 깨트렸다.
쿠구궁!
“우오오오오오!!!”
“『문자마법 레벨 2!』”
문이가 환각마법으로 내 모습을 숨겼다. 이 공간은 내 영역으로 만들 수 없다. 그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결계를 깨뜨리면 기둥은 제 모습을 분산하며 환상을 연출한다. 그것을 꿰뚫어 보는 것은 환각마법과 시공간마법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어둠마법으로 진짜 기둥을 쏘았다. 어둠이 닿은 곳 주위가 일렁이며 흔들렸다. 드래곤이 문과 결계를 뚫고 안으로 쳐들어온다. 그 뒤를 따라온 다른 적들이 나를 발견하고 마법을 쏘았다.
「청소하겠습니다.」
빗자루 그림이 대부분의 마법을 쓸어 버렸다. 다만 드래곤의 마법은 그것으로는 쓸어 버릴 수 없다. 나는 시공간 대응 결계마법으로 시공간의 마력을 흡수해, 다시 쏘았다. 드래곤이 비명을 질렀다.
그사이에 기둥은 다시 분산하고 있었다. 나는 기둥을 향해 또 한 번 어둠마법을 쏘았다. 웬만한 마법은 공간을 구부려 막아 내기 때문에, 꽤나 힘을 써야 한다.
기둥의 힘을 깎아 낼수록 저들의 힘도 약해진다. 키메라의 몸에 박힌 마정석은 기둥의 힘에 반응하고 있다. 하지만 기둥의 힘에는 끝이 없다. 10만의 마력을 지니고 있다면 10만 상태에서 멈춘 채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끝없는 마력을 대체 어디에서 보충하고 있는지……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쿠와와와
기둥이 위협적인 마법을 뿌리기 시작했다. 기둥에는 환각마법이 듣지 않는다. ‘의지’가 없는 데다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윽…….”
무차별 난사에 의해 주위 공간이 일그러졌다. 드래곤이 거기에 무심코 타격을 준 순간, 주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폭발이 일었다.
콰과과과과광!
결계로 몸을 보호하는 와중에 또 한 번 기둥에서 힘이 방출되었다. 이번에는 쏘아서 찌르는 형태가 아니라 파문처럼 거대하게 퍼진다. 파문이 닿을 때마다 마법의 한 부위가 찌그러진 양철 캔처럼 일그러진다.
그러나 그 마법에 영향을 받는 것은 나뿐, 드래곤은 멀쩡한 얼굴이다.
“쿠오오오오!”
드래곤이 숨을 크게 들이켜는가 싶더니 브레스를 방출했다. 이 영역 안에서는 텔레포트를 하는 데 불편함이 따른다. 그 순간, 소환진이 완성되며 다른 적들도 소환되었다.
‘으아아아아아!’
진짜 안 되나? 내 환각마법은 이미 키메라를 속일 수 있다. 환각 ‘실체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저 기둥한텐 안 통하는 거야! 속일 수 없나? 환각은 결국 환각, 진짜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원한다면 진짜가 되어야 한다.
‘아직은 힘이 부족한가?’
나는 내 몸을 중심으로 마력을 원 모양으로 방출했다. 어둠이 점점 팽창하며 시공간마법의 파문에 똑바로 부딪쳤다. 마정석의 시공간마법이 상쇄된다. 그와 거의 동시에 문이가 새로운 결계를 펼쳐 세웠다.
‘공간조차 통과하는 탄환.’
드래곤 다음으로 힘든 상대라 하면 바로 저 스켈레톤 대장이다. 언젠가 상대했던 해골 병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통과하는 마법을 사용한다. 공간도, 마법도! 오로지 하나만을 노리고 관통하는 것이다. ‘통과할 수 없는 결계’를 만들려면 상당한 마력이 필요했다. 아오, 정말이지!
시간이 될 때까지 기둥을 무방비로 만들고, 드래곤과 저 스켈레톤의 행동을 어느 정도 묶어 놔야 한다. 나는 드래곤과 눈을 맞추고 정신을 조작했다. 신체의 흐름을 느리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가슴에 박은 마정석에, 암시를…….’
몇 번이고 비슷한 속성의 공격을 막던 결계가 결국 한 번 깨졌다. 나는 결계를 다시 한번 펼쳤다.
“악!”
통과하는 마법이 내 결계를 하나 관통했다. 마법이 팔에 정통으로 박혔다. 나는 고통을 눌러 참으며 스켈레톤 대장에게 똑같은 마법을 되돌려 줬다. ‘통과하는 마법’으로 새하얀 다리 한 짝을 부러뜨렸다.
“키에에엑─.”
그것만으로도 움직임이 둔해진다. 그와 거의 동시에 공간의 흐름이 일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드래곤이었다. 부분 텔레포트, 코앞!
“……!”
발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주먹으로 전력으로 후려쳐 줬다. 발바닥이 아니라 발등을. 이놈의 엄지발가락 콱 부러져 버려라!
“캬아아아아악!”
내 힘이 먹히긴 먹혔는지 드래곤이 몸을 꼬며 비명을 질렀다. 그사이 나는 기둥을 몇 개의 게이트와 결계로 꽁꽁 감쌌다. 그와 거의 동시에 기둥에서 마력 파동이 엄청난 진동과 함께 주위로 퍼졌다. 내가 쳤던 결계와 게이트가 유리처럼 깨지더니 그 부스러기가 마력에 튕기며 주위로 날카롭게 꽂혔다.
나는 마력의 범위에서 재빠르게 벗어났다. 저 범위에 먹히면 웬만한 결계는 전부 우수수 부서질 것이다. 골절 때문에 움직임이 다소 느려졌음에도 여전히 위협적인 드래곤의 공격을 피하며 환각 속에 몸을 숨겼다. 기둥에게는 들키지만 드래곤과 스켈레톤에게는 들키지 않는다. 잠깐이나마 몸을 추스를 수 있다.
그때,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 이번엔 안 될 것 같다.]하진 아저씨의 목소리였다. 나는 기둥의 공격을 피하며 물었다.
“무슨 일 있나요?”
[발목이 잘리고 오른손이 부러졌어. 파동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긴 하지만……20분이나 남았으니까…….]“……!”
나는 창백한 얼굴로 숨을 삼켰다. 하진 아저씨는 오른손잡이다. 오른손으로 검을 쥔다. 게다가 발목이 잘리다니…….
[컨디션 안 좋았어?] [아니. 운이 안 좋았다.] [그래……알았어. 지금 구하러 갈게.] [미안하다.]결국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나는 쓴맛을 삼키며 그 자리에서 도주한 뒤 하진 아저씨를 부축하러 갔다.
공략은 쉽지 않았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실패했다. 두 번째는 형일 아저씨가 심한 부상을 입었다. 나도 하진 아저씨도 키메라의 공격 때문에 바로 도우러 가지 못했기 때문에 때마침 시간이 돌아가지 않았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세 번째는 동시에 부수지 못해 실패했다. 그래도 세 번째 공략에선 ‘동시’의 시간 범위를 특정할 수 있었다. 딱 5분, 오차 하나 없이 5분이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야 돼.”
정확히는 내일이 마지막이다. 하지만 초조함은 우리에게 물러날 자리를 내어 주지 않았다. 형일 아저씨는 복잡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무리하란 건 아냐. 죽는 것보단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게 나아. 다음번에는 하루에 세 개씩 부술 수 있지 않을까? 아, 물론, 고쳐졌을 때 더 강해져서 돌아오지 않는다면……말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