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200
“흡……윽……!”
나는 고통 속에서 비로소 정신을 붙잡았다. 몇 번이나 정신이 날아갈 것 같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아파하면서도 마력 위에 마력을 겹치며 겨우겨우 내 상처를 막았다. 이성진이 한순간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몇 번이나 눈물을 토해 냈다.
“……!”
“…──.”
귓가에 윙윙거리며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그제야 내 주위를 사람이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내 위에서 울고 있는 한 소녀의 얼굴이 내 마음에 와닿았다. 나를 이곳에 오게 한, 어쩌면 내가 이토록 괴로운 처지에 처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여자아이였다.
「언니, 고마워요.」
귀로 전해지는 소리가 아니기 때문일까.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는 물에 막힌 듯 멍멍한데 그 목소리만은 선명히 들렸다.
「정말로 고마워요, 언니. 안녕…….」
안녕……. 그래, 안녕이구나……. 기뻐해야지. 부모님을 만날 수 있어. 작은 아이. 가엾은 아이. 아, 내가……해냈구나…….
「안녕…….」
인사하는 아이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나는 갑자기 가슴이 철렁 떨어져 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아이의 몸 주위로 검은 무언가가 맴돌며 퍼졌다.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뻗었다. 누군가가 내가 뻗은 손을 꽉 잡았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잡으려 한 손이 아니었다.
시야 사이로 새까만 색이 점점 커져 갔다.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죽은 자들의 영혼이 서서히 일어난다. 영혼이, 새까맣게 물들며, 죽음, 피, 고통, ──아아.
휘말린다!
내 눈에 노란 여자아이가 새까맣게 뭉치는 검은 마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이 보였다. 땅 전체에서 일어난, 수십, 수백, 죽은 자를 통해서 연결된 힘이…….
‘──돼.’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 나는 성진의 손을 꽉 잡고 몸을 일으켰다. 내 손을 잡고 있는 성진이나 정민 아저씨가 나를 말리며 자리에 눕히려 했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손을 뻗었다.
“안 돼…!”
“진정해. 지금 움직이면 안 돼.”
“그렇지만……그럼……너무…….”
가엾잖아.
바라지도 않았는데 이곳에 와서, 힘이 없었기 때문에, 혹은 누군가가 만든 세계가 너무 끔찍했기 때문에,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 버렸다. 그런데, 그런데, 이미 세계는 열렸는데, 그런데도 저런 곳에 갇혀야 한다면……그건 너무 가엾잖아……!
“집에 가고 싶다고 했잖아. 아니었어……?”
「……가고 싶어요. 하지만…….」
“힘을 빌려 줄게. 윽……콜록콜록! 맹세, 했으니까…….”
입 안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주위에서 소란스럽게 떠드는 목소리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내 마음에 닿는 것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오로지 영혼의 행동뿐이다. 아이가 허공에 뜬 채 눈물을 흘렸다.
「언니…….」
아이가 고개를 숙이더니 천천히 손을 뻗었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형태조차 느껴지지 않는 손이 내 손을 붙잡자, 온몸으로 검은 기운이 밀려 들어왔다. ──이 아이, 랑과 처음 만났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저주의 기운이다.
“유은하!”
“은하야?!”
“아…….”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이미, 이겨 낼 수 있게 된 마력이다.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 저주받은 세계의 기둥에게 내 마법이 확실하게 통하게 된 이후부터─!
“아……아……아아아아아아아──!!”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흘러 들어왔다. 검고, 질척이고, 끔찍하고, 괴로운……그건 줄곧 외면해 왔던 이상한 세계의 심저였고, 그 세계를 이루던 마력의 근원이었다.
죽어 버린 영혼의 힘!
유령은 마력을 쓸 수 없지만, 영혼을 마력으로 전환할 수는 있다. 영혼의 파편인 유령과 완전한 영혼은 다르다. 지금은 그걸 안다. 게다가 죽은 사람의 육체와 마력도 그 세계에 녹아 차곡차곡 쌓여 갔을 것 아닌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아이의 몸을 파고드는 검은 마력을 전부 정화하고,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아이와 연결된 모든 것을 정화했다. 검게 일어나던 땅을 내 마력이 점령했다. 마력이 점점 영역을 확장해 갔다. 검은 구체가 영혼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땅에서 검게 일어나던 모든 마력이 원래의 색으로 돌아올 때까지. 내 마력이 저주받은 땅을 온통 새하얗게 물들였다.
나는 본디 두 종류의 마력을 지니고 있다. 남색 마력과 은색 마력, 내가 가진 정화마법의 근원은 바로 그 은색 마력이었다.
「─언니.」
새하얀 시야 사이로 아이의 웃는 얼굴이 비쳤다. 아이는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해맑게 웃었다.
「고마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는 안심하며 몸에서 힘을 풀었다. 방출되었던 마력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눈앞을 덮었던 새하얀 빛도 점점 사라져 갔다.
그와 동시에 나는 허리를 숙이며 기침했다. 쿨럭, 쿨럭. 나는 또 한 번 피를 토했다.
“윽……쿨럭……!”
성진이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타박했다.
“너 미쳤어!? 그 몸으로 그러고 싶어?!”
“아, 몰라. 윽……! 아파…….”
아팠지만 정신만은 또렷했다. 나는 허리를 숙이며 계속 기침했다. 윽, 켁……!
“으, 쇠 맛.”
“으, 은하야! 어떡해…….”
“자리에 누워. 아직 치료 안 끝났어.”
“네…….”
성진이 차갑게 말했다. 나는 걱정으로 가득 찬 목소리를 들으며 얌전히 자리에 누웠다. 이 자식, 진심으로 화내니까 엄청 무섭네.
흐읍, 하아……. 나는 숨을 골랐다. 확실히 아까보다 상태가 안 좋아졌다. 고통이 선명하게 다가오고, 숨이 차고, 가슴이 괴로웠다. 정민 아저씨가 혀를 찼다.
“무모한 짓을 했구나. 마력부터 보충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이 녀석은 저랑 체질이 비슷하니까 마력만 보충하면 의외로 금방 회복할지도 모릅니다.”
“어? 나 너랑 체질이 비슷해?”
성진이 혀를 찼다.
“그래. 음식이나 잠으로 마력을 보충하는 점도, 힘이나 체력이 좋고 몸이 튼튼한 것도, 회복이 빠른 것도, 나랑 똑같으니까.”
“내, 내 힘이 센 걸 어떻게 알아……? 난 얼마 전에 처음 알았는데…….”
“대련하다 보니 대충 알겠더라고. 웬만하면 상처 날 공격에도 넌 멀쩡했으니까.”
“그, 그랬구나……윽…….”
나는 신음을 흘리며 배를 감쌌다. 정민 아저씨가 다급하게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이런, 빨리 마력 보충을 해야겠다. 혹시 마력석 가져온 사람 없어?”
모두가 당황했다. 성진이 주머니를 뒤지다가 이내 혀를 찼다.
“제길. 마력석을 하나도 안 가져왔어.”
“윽, 나도 없어. 집에도 몇 개 없었던 것 같은데.”
“저희가 직접 마력을 주면 안 될까요?”
나는 시야를 뜨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은희 언니와 제현 오빠가 나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선아 아줌마, 스승님, 민 선생님, 준휘 선생님……아, 백한 선생님도 왔구나…….
“아무 마력이나 불어넣으면 위험해. 특히 이렇게 다쳤을 때는, 속성이 맞지 않으면…….”
“제가 하겠습니다. 저랑 이 녀석은 맞는 속성이 많습니다.”
“그래?”
성진이 내 손을 잡더니 손을 통해 마력을 불어넣었다. 우리는 전체적으로 보면 상극이지만, 속성을 하나하나 따져 보면 조금 달리 보인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을 그도 전부 가지고 있는 거니까. 나보다 마력 총량이 많기도 하니 마력을 보충하기에는 딱 좋은 상대다.
나는 손을 통해 밀어 넣어지는 마력에서 그의 배려를 느꼈다. 서로 모든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만, 결국 그와 나의 마력은 상극이다. 때문에 마력을 잘못 주입했다간 오히려 나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 그는 나를 위해 마력 비율을 맞춰 조정한 다음 내게 마력을 주고 있다. 원래 섬세한 컨트롤은 잘 못하는 주제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윽……!”
그러나 기분과는 반대로 몸의 고통은 점점 커졌다. 정민 아저씨가 마력 보충에 맞춰 마법을 사용하며 나를 치료했다. 나는 온몸을 비틀고 싶은 기분을 한껏 눌러 참았다. 성진이 그것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더니 내 손을 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가까워져서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지만, 피부가 닿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마력 보충이 아까보다 훨씬 빨라졌다. 입 안을 통해 빠르게 마력이 흘러 들어왔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닿지 않을 정도로 입을 가까이 대고, 입에서 입으로 마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아……그렇군. 마력 보충은 인공호흡이 제일 빠르지.”
정민 아저씨가 조금 당황하며 이마를 닦았다. 나는 마력을 받다가 속에서 신물이 올라와 고개를 돌리며 다시 기침했다. 아, 뭐야……그랬던 거구나…….
기침을 하는 동안 잠깐 마력 보충이 느려지자 다시 몸에서 고통이 몰려왔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다. 난 매저키스트가 아니다. 아픔을 오래 견디고 싶지도 않고, 무엇보다 빨리 이 끔찍한 장소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러니까……친구니까 어리광 좀 부리자는 겁니다.
나는 양손을 뻗어 성진의 뺨을 붙잡고, 바로 잡아당겼다.
“……?!”
입술 위에 온기가 와 닿았다. 성진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내가 마력을 흡수하자 곧 내 의도를 눈치채고 제 몸 안의 마력을 크게 일으켰다. 눈앞이 주황색과 보라색이 섞인 노을색으로 뒤덮였다. 마력이 빠르게 몸 안에 채워졌다.
성진의 말이 맞았나 보다. 마력이 채워지자 몸의 고통도 희미해졌다. 상처 회복도 빨라졌을까? 바닥까지 드러났던 마력이 반이나 채워졌는데도 성진의 마력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입 안에서 뭔가 묘한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맛……? 독하고 이질적이면서도 이상하게 맛이 있다.
나는 곧 성진의 뺨을 붙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러자 성진이 다소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들며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나는 고통이 옅어진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후아, 덕분에 살았다. 나 진짜 죽는 줄 알았어.”
“넌 무슨……. 야, 난 보통 싫어할 걸 아니까 안 한 거였거든?”
“그냥 인공호흡인데 뭐 어때. 너야말로 이런 걸로 얼굴 붉힐 타입은 아니지 않았나?”
“당황한 거다!”
성진이 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킥킥 웃다가 갑자기 안심이 돼서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힘을 풀었다. 예고도 없이 눈물이 터져 흘렀다.
“진짜, 죽는 줄 알았어…….”
“…….”
성진은 이번엔 다른 의미로 당황한 것 같았다. 그가 어쩔 줄 모르며 손을 들었지만, 그보다 먼저 정민 아저씨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많이 고생했나 보구나……. 조금 있다가 이야기를 들려주겠니?”
“흑……. 네…….”
나는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러나 그다음 들려온 말에 나는 잠시 당황해야 했다.
“그리고……음……은하야.”
“…….”
“너 이 남자애랑……그……사귀니……?”
“……네?”
나는 잠시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왠지 미묘하게 굳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뭐야, 다들 내심 그걸 묻고 싶었던 건가. 아니, 인공호흡……키……새삼 돌이켜 보니 조금 부끄럽긴 한데, 지금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닐 텐데? 나도 다급해서 나온 행동이었다. 나는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안 사귀는데요. 아까 그건 단순한 인공호흡이잖아요.”
“음……그래.”
하긴. 의사인 정민 아저씨가 곧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인공호흡이 필요한 상대가 먼저 인공호흡을 독촉하는 경우는 드무니까. 그래서 물어본 거다.”
“아…….”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남자 여자 사이라서 더 그렇게 느껴진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납득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아직 완전히 나은 것이 아닌지, 복부에서 통증이 몰려왔다. 내가 주춤하며 허리를 숙이자 이성진이 나를 부축했다.
“윽…….”
“괜찮아?!”
“은하야……!”
주위에서 비명이 터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저었다. 정민 아저씨도 심각한 얼굴로 나를 살폈다.
“아직 좀 아파서…….”
“그 정도 상처가 금방 나을 리가 없지. 그래도 응급조치는 했으니……빨리 돌아가서 제대로 치료하자.”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분위기가 경직됐다. 모두가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은희 언니가 울면서 내게 다가왔다.
“은하야, 이제 괜찮아? 아니, 안 괜찮겠지. 빨리 못 와서 미안해.”
선아 아줌마가 내게 다가오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선아 아줌마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겨우 겨우 말을 짜냈다.
“……늦게 와서 정말 미안해. 미래랑, 네 아빠랑, 인하랑, 네 친구들도 다 널 걱정하고 있어.”
“네…….”
나는 나를 구하러 이곳까지 달려와 준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씩 살폈다. 그들은 나를 보며 괜찮냐는 말조차,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조차 못 하고, 그저 내 일이 자신의 일인 것마냥 괴로워하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 좀 더 빨리 왔어야 하는데…….”
“아니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말을 건네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을 돌려줘야 할지 모르겠다. 결국 나는 무사하지도, 괜찮지도 않았으니까. 그저 지금 이 순간이 무척 다행스러울 뿐이다.
“그런데…….”
선아 아줌마가 무언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때 뒤에서 마법의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은하 아가씨!”
“음? 다들 여기에 모여 있었군.”
익숙한 목소리와 낯선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나는 익숙한 인영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형일 아저씨! 하진 아저씨!”
“할머니? 그 사람들은 누구예요?”
“……!”
나는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할머니? 선아 아줌마의 할머니?! 그러고 보니 저 사람, 인하가 가끔 이야기하던 그 할머님이잖아! 인하의 증조할머니이자 선아 아줌마의 할머니인, 리첼라 K 폰티나다. 한국 이름은 김미영이었던가. 그리고 그 옆에는……누군지 모르겠는걸.
형일 아저씨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내게로 달려왔다. 하진 아저씨는 어떤 여자애한테 붙들린 채 내게 다가왔다. 얼굴을 완전히 품에 묻고 있어 하진 아저씨를 붙든 여자애의 얼굴을 알 수 없었다.
“누구야?”
“응? 여기서 만난 사람.”
나는 성진에게 간단히 대답하며 다시 두 사람을 보았다. 형일 아저씨가 내 앞에서 나를 이리저리 훑었다.
“은하 아가씨, 괜찮아? 다쳤었지? 비명 소리가 들려서…….”
“아……. 네, 그게, 시간이 없어서 쓰러뜨릴 각오로 팔다리를 자르고 고위마법까지 썼는데, 그…….”
나는 표정을 어둡게 물들였다.
“……쓰러뜨리지 못했었나 봐요. 그래서…….”
나는 말을 이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제 보니 하진 아저씨와 형일 아저씨도 부상을 입었다. 형일 아저씨는 눈을 다쳤고, 하진 아저씨는 팔이 부러진 모양이다.
“그래, 그랬구나. 다친 덴 괜찮아? 배를 다친 거야? 옷이 다 찢어졌…….”
그때 성진이 카디건을 벗어 내 위에 덮었다. 답지 않게 다정한 손길로 팔을 끼워 넣고 지퍼까지 잠가 준다. 나는 그런 성진을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엄청 걱정했나 보다. 뭐라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형일 아저씨와 하진 아저씨가 그런 우리를 얼떨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허……아가씨 남친? 엄청 잘생겼네.”
“아닌데요.”
“그, 그래?”
하진 아저씨가 자신의 품에 매달린 여자애를 쓰다듬으며 내게 몇 걸음 더 다가왔다. 다친 나를 안쓰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피차일반인 것을.
“미안하다. 바로 가려고 했는데……저 사람들에게 붙들려서 말이다. 네 이름을 말하니까, 너에게 힐러가 한 명 갔으니 괜찮을 거라고 하더군.”
“아, 그랬군요. 그런데 저분들은…….”
내 질문에 형일 아저씨가 대답했다.
“아, 저기 한복 입은 여자분은 가족의 의뢰로 우릴 찾던 사람이고, 저기 저 은발 여자분은……누군지 알지? 유명하니까.”
“……네.”
“다른 사람은 친구랑 가족들. 저쪽이 우리 친구들이고, 저건 우리 형이고, 저 사람은 하진이 사모님이야. 얘한테 딱 달라붙어 있는 건 얘 딸이고.”
“흐윽…….”
나는 품에 폭 얼굴을 파묻은 여자아이를 보며 잠깐 안심했다. 정말로 끝났구나. 그런 생각이 머리를 지배한 것이다.
그러며 고개를 숙이는데 할머님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선아 아줌마가 갑자기 내 뒤에서 손을 뻗더니 형일 아저씨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헉?! 나는 흠칫해 뒷걸음질 쳤다.
“윽, 뭐야? 헉, 이건 또 엄청난 사람이…….”
형일 아저씨는 선아 아줌마를 알아봤는지 눈만 크게 뜬 채 차마 반항하지 못했다. 가, 갑자기 뭐지? 내가 당황해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선아 아줌마가 험악한 어조로 그를 불렀다.
“야.”
“뭐, 뭡니까?”
“그래서, 뭐야? 너랑 은하가 왜 동료야? 은하한테 뭘 시켰어?”
하진 아저씨나 그들의 일행 역시 당황하며 선아 아줌마와 대치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우리 일행은 당황하거나 혹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나는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서, 선아 아줌마, 그…….”
“은하는 먼저 돌아가. 난 이놈한테 물어볼 게 있거든.”
“하, 하지만…….”
“그래, 너는 먼저 돌아가서 치료를 받는 게 낫겠구나.”
스승님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동의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도, 돌아갈 거면 같이 돌아갈래요. 이제 별로 아프지도 않고, 그리고, 저, 신세 진 사람들한테 인사도 하고 싶은데…….”
“…….”
그사이 선아 아줌마의 기세는 점점 흉흉해지고 있었다. 형일 아저씨는 목이 막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탈출하기 위해서……협력한 것뿐입니다. 세 명이 모이지 않으면 탈출할 수 없는 시스템이었거든요……. 실제로 우리가 세계를 부수기 전엔 그쪽도 찾아오지 못했잖습니까…….”
“그래서 왜 은하한테 시켜? 다른 강한 놈도 많았을 거 아냐!”
“아가씨를 너무 과소평가하네요. 저런 실력자가 운 좋게 몇 명이나 굴러 들어올 리 없잖습니까. 저는 처음 아가씨와 제대로 대면했을 때……교복을 입었는데도 30살은 먹은 줄 알았다고요. 행동이 어려서 금방 진짜 어리단 걸 알았지만…….”
“그래서 저렇게 다치게 만들어? 어? 은하는 목숨이 위험했다고!”
“얘야, 조금 진정하고…….”
“할머니는 빠져요!”
선아 아줌마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할머님은 뭐라 말도 못 하고 그냥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도 나름 경악할 만했다.
“죽을 뻔한 것에 대해서는……저도 뭐라 할 말이 없지만……정말로 은하 아가씨밖에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요.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고요. 저라고 어린 여자애한테 부탁하고 싶었겠습니까. 저랑 하진이는 그 세계에 1년 이상 갇혀 있었어요. 우릴 가둔 놈이 세계를 이루는 핵, 10개의 기둥을 부수면 세계가 열릴 거라고,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렇게 만들어 놨어요.”
“그래서?”
“1년 이상 지나서 겨우 찾아온 희망이었어요. 우리는 1년 걸렸는데도, 1년 동안 건물을 뒤졌는데도 기둥을 3, 4개밖에 찾아내지 못했었다고요. 그것조차 얼마 후에는 장소가 바뀌어서. 그런데 저 아가씨는, 탈출하겠다는 의지로, 10개의 기둥을 전부 찾아내고,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기둥 중 반을 혼자서 다 무너뜨려 놨다고요. 그런 사람을 동료로 삼지 그럼 누굴 동료로 삼겠습니까?”
“…….”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나는 성진의 뒤에 숨으며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실력이 있잖아요. 아까, 이 땅 전부를 정화한 게 은하 아가씨의 마법이라고 들었는데…….”
하진 아저씨의 감지능력을 통해 안 걸까? 형일 아저씨를 노려보던 사람들이 흠칫했다. 선아 아줌마도 한순간 몸을 떨었다.
“그 마력을 봤다면 눈치챘을 텐데요? 아가씨의 실력이 이미 웬만한 선을 넘었다는 걸. 그런 실력자가 또 아무 데나 굴러다닐 리가요.”
“윽……! 그건…….”
“우리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당신들이 과연 저희를 찾을 수 있었을 것 같습니까?”
“……제길!”
선아 아줌마는 욕을 내뱉으며 그의 멱살을 놓았다. 하……. 있는 대로 허세를 부리고 있던 형일 아저씨가 내심 안심하며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닦았다. 선아 아줌마가 차가운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 내게 다가왔다.
“……은하야. 이만 돌아가자. 상처도 아직 다 치료 안 했고, 네 엄마랑 아빠도, 네 친구들도 너를 기다리고 있어. 미래도 사실 여기 오고 싶어 했어. 너무 위험해서 우리가 말린 거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갑자기 무릎이 풀썩 꺾였다. 그 결과 나는 성진의 등에 코를 박았다.
“……!”
그건 결코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위에서 굉장한 위압감이 모이고 있었다. 나는 성진의 등에 얼굴을 기댄 채 몸을 떨었다.
“뭐, 뭔가……와…….”
“뭐? 은하야, 뭐라고?”
“……!”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이상 뭐라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내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하늘 위에서 그 위압감이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
“너는…….”
구역질 날 정도로 강대한 느낌이 내 온몸을 짓눌렀다. 나는 천천히 눈을 뜨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위압감 탓인지 시야마저 흐려졌다.
금색 머리칼이 허공에 흩날렸다. 검은 망토를 입은 여자가 옛날이야기나 동화에 나오는 마녀처럼 빗자루 위에 올라타 앉아 있었다. 여자가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아하하! 이게 뭐야. A랭크에서 S랭크까지 나란히 모여 있네? 이 일 하면서 이렇게 쟁쟁한 장면은 처음 보는걸?”
고개가 다시 숙여졌다. 민 선생님이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려 내가 고개를 숙이게 만든 것이다. 옆에서는 제현 오빠가 성진의 앞을 가리며 막아섰다.
“으악~! 근데 이게 뭐야! 기껏 모아 둔 영혼이 다 사라졌잖아? 너희 중에 이런 주박을 풀 마법을 가진 놈이 있었던가~? 흐응~. 벨라 님께 드릴 선물이었는데, 남김없이 사라졌네.”
벨라? 그 이름에 나는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천공의 마녀 유펠라에게 벨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마녀의 나라 트라베리아 출신, 최악이자 최흉의 마법사, 벨라 트리저.
“웬만한 놈들만 있었다면 한바탕 해 줬을 테지만…….”
얼굴을 보지 못하니 목소리로 분위기를 유추할 수밖에 없다. 나는 호기심과 두려움을 꾹꾹 눌러 참았다.
“아무리 나라도 폰티나까지 상대하는 건 무리겠네. 아아~안타까워라. 됐어. 실험 기록은 얻었고, 어차피 여기뿐인 것도 아니니까.”
순간 몸에 소름이 돋았다. 뭐……? 여기만이 아니라고……?
“이 미친년이…….”
“어머, 사실이긴 하지만 너무하네. 너희도 알잖아?”
“…….”
“우리를 미치게 한 건, 이 세계란 거.”
“너희들이 견디지 못하고 미친 걸 남 탓으로 돌리지 마라.”
“아, 그래그래. 너님처럼 고귀하신 분의 생각은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그럼 난 이만!”
위압감은 처음 그녀가 왔을 때와는 달리 순식간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는 후들후들 떨려 꺾일 것 같은 몸을 겨우 지탱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안도한 기색으로 몸의 긴장을 풀고 있었다. 피곤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는데, 성진이 속삭였다.
“업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