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202
나는 고개를 책상에 박은 채 대답했다. 뭐지, 이건. 지금 우리가 하던 대화는 흑역사를 발굴해 내는 대화였던가……?
“나만이 아니라, 다들 수군거렸어. 반감을 가진 녀석들도 많았고.”
“그랬겠지……. 내가 생각해도, 같은 학년에 그런 애가 있다는 말 들으면 어이없을 거야.”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나를 보며 성진이 슬쩍 웃었다.
“그래도 직접 본 네 인상 자체는……나쁘지 않았어. 시선에 움츠러들고, 앞으로 나서기를 꺼리고, 그래서 안 좋은 소문이 더 불어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일단 소문의 대상이 될 것 같은 인물로는 안 보이더군.”
“헤에……그래서?”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관심이 갔다. 여태껏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이렇게 풀어내다니, 엄청 재미있잖아!
“그런데 친구가 반해서 쫓아온 녀석이잖아. 그런 것치곤 너무 평범해 보여서 별로였어.”
“음…….”
성진은 멍한 눈으로 손바닥에 턱을 괴었다.
“수업 시간에도 항상 설렁설렁 하는 것처럼 뒤로 한 발짝 빼고, 진심은 내비치지 않고, 내 친구는 자기를 쫓아서 왔다는데 기억도 못 하고 있지, ‘은하 님’이라고 부르면 부끄러워하며 그만두라고 말하면서도 웃으며 받아들이고. 실력이 있는 게 훤히 보이는데 진심을 보이지 않잖아. 결국 소심해서 움츠리는 면이 짜증 나고 싫더라고. 뭣보다 제일 친한 친구가 그런 여자한테 반했다는 게 맘에 안 들었어.”
“너…….”
나는 성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의 성격은 제각각이라는데, 넌 진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그렇겠지.”
“그래서 짜증을 겸해서 나한테 뒤집어씌우셨다?”
“누군들 화가 안 나겠어. 수업 시간에 간 보는 것처럼 설렁설렁 하다가 좋은 건 다 가져가고, 심지어 그런 여자한테 친구가 실력으로 졌다는 생각을 하면.”
“메롱이다, 메롱.”
나는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뭐든지 눈에 띄는 걸 싫어하는 소심한 녀석이었던 셈이지만.”
“인생은 평범한 게 최고라고…….”
나 같은 사람한테 많은 사람의 눈에 띄는 일은 무척 고역이다. 칭찬받으면 기쁘기는 하지만 주목받으면 부끄럽고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어진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그때 일만 없었어도 랭크 시험 전까지 좀 평범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그 사건’이란 건 대체 뭐야? 소문으로 들어 보니까 네가 뭔가 엄청 대단한 일을 한 것 같던데. 한수 말로는 인생을 빚졌다던가…….”
풉…! 나는 당황하며 마른기침을 했다.
“켁……콜록……! 뭐야? 그 오글거리는 말은……?!”
“너랑 내가 싸웠을 때 그 녀석이 한 말.”
“으으윽……그러니까 엄청 오글거린다……! 뭐……음……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 오글거리고 쑥스럽기는 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때 우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해킹으로 시작된 본격적인 테러, 이사장님을 비롯해 A랭크 마법사가 밖으로 나가 있었던 데다가, 초등학교와 다른 곳 사이의 연락은 완전히 두절된 상태였다.
그래서 내 마법으로 구해 냈다. 결계에 갇혀 텔레포트 배지조차 쓸 수 없는 친구들에게 안전한 장소로 텔레포트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남아 있는 학생들을 전원 대피시켰다. 쑥스럽지만, 또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일이다.
그러자 성진이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틀린 말이 아니라고…? 네가 그렇게 말하다니……. 테러 사건이란 건 들은 적 있는데, 대체 어떤 상황이었던 거야? 이제 말해 줘도 되지 않아?”
“그럼……그러네.”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시간 나면 친구들이랑 같이 이야기해 줄게.”
“좋아. 약속한 거다.”
거창하게 약속씩이나. 나는 씩 웃어 보였다.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주위가 어수선해졌다. 성진이 나를 일으켰다.
“가자. 이동해야 돼.”
“어라, 원래 이 시간은 정규 수업 시간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어차피 시험은 끝났고, 축제가 얼마 안 남았잖아. 축제 준비 때문에 가는 거야. 이번 시간엔 예술과끼리 모이기로 했어. 너도 이번엔 유리 공예 동아리 중학교 대표로 작품 내야 하지 않던가?”
“……아.”
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축제, 잊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 시기는 학교에서 제일 바쁜 시기였다. 날짜를 꼽아 보니 축제까지 1주일도 남지 않았다.
“미친…….”
“선처 부탁해 봐라.”
“으으……어떡하지…….”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성진을 따라갔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배 째야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건 왜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대표 작품을 만들어 내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성진이 중간에 내 손목을 붙들며 텔레포트 했다. 묘한 이질감과 함께 우리는 시청각실에 도착했다. 예술학과 전교생이 다 자리에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같은 학년 친구들이 인사해 왔다.
“은하야!”
“은하 님, 안녕하세요!”
“안녕.”
“은하 선배!”
한 후배가 내게 달려왔다. 나와 같은 유리 공예 동아리에 속한 후배였다.
“은하 선배, 아파서 계속 결석했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으세요? 어디 수술했다던데…….”
물론 헛소문이다. 나는 어색함을 숨기며 웃었다.
“응. 이제 괜찮아.”
“다행이네요……. 선배들도 걱정 많이 하셨어요. 아, 그리고……그동안 은하 선배가 안 계셔서, 중학교 대표 작품은 제가 내게 됐거든요. 하지만 혹시 지금이라도 낼 생각이 있으시다면…….”
“응, 아니, 알고 있겠지만 무리야.”
“그렇군요…….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그래.”
후배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아마 대표가 된 것이 내심 기뻤던 모양이다. 나도 대표라는 과분한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좋다. 어찌 된 일인지 3학년 중에 유리 공예 동아리에 들어간 사람은 나밖에 없어서, 대신 2학년인 저 후배가 대표를 맡게 된 모양이었다.
“하나는 해결됐군.”
“응.”
우리는 앞에서 세 번째 줄에 앉았다. 텔레포트를 사용해 들어오는 학생들, 혹은 걸어서 들어오는 학생들, 곧 좌석이 찼다. 예술과는 다른 학과보다 학생 숫자가 적은 편이기 때문에 곳곳에 빈자리가 생겼다.
“자자! 그럼 회의 시작한다!”
앞으로 나선 건 3학년 예술과 두 반의 반장 2명과 부반장 2명이었다. 분위기가 어수선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동아리 활동은 각자 알아서 하고, 합동 행사부터 살펴보자. 예술과는 축제 때 매번 공연을 해. 시나리오 담당, 시나리오 다 썼어?”
“쓴 지 오래야. 이미 배우 섭외하고 배역 정해서 연습하고 있어. 연극부는 거의 참가했고.”
“그럼 이건 됐고.”
예술과는 행사 때 반드시 무대 공연을 한 개 한다. 이건 예술과의 전통이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또 하나 전통이 있다. 그건 바로 전시회였다. 한 사람당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까 작품을 전시한다. 작품을 낼 기술이 없는 사람은 건물 내부를 꾸미는 일을 돕는다. 혹은 홍보를 하거나 접객을 하기도 한다.
반에서 개별 행사를 진행하는 반은 머리를 맞대고 그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당연히 우리 반에서도 개별 행사가 진행된다. 우리는 아이템 판매다. 여태까지 만든 물건 중에 자신작을 몇 개 골라서 제출하면 된다. 접객은 돌아가면서 하게 될 테지.
“맞다. 커플 대회는 어떻게 할 거야?”
“맞다, 그거 우리 아직 안 정했었지.”
“커플 대회?”
나는 잠시 의아해하다가 곧 깨달았다. 중학교 3학년에는 커플 대회가 있고, 고등학교 3학년에는 미인 대회가 있다. 아무나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과 대표로 커플을 선출해서 대회를 진행한다. 염장질을 사람 앞에서 대놓고 자랑하며 잘 어울린다 싶은 베스트 커플을 뽑는 행사였다. 나와는 동떨어진 이야기인 고로 나는 허허 웃음만 지었다.
그 말을 듣고 앞에서 이미 딴짓을 하고 있던 반장이 우리 반으로 다가왔다.
“맞아! 커플 대회! 지금 우리 과만 못 정했어! 게다가 적이 너무 막강해!”
반장이 분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전투과랑 교육과에서 인하랑 한수를 내보낸대! 그걸 누가 이겨!”
“헉…….”
나는 턱을 괸 채 이야기를 듣다가 비틀거렸다. 다른 사람들도 웅성거렸다.
“맞아. 나도 들었어. 그 녀석들 아주 작심했나 봐.”
“영아랑 준영이도 나온대! 걔들도 유명하잖아!”
“걔들이?”
“우리 학교 공식 커플 넘버 2지.”
“보면 염장 터지긴 하는데 잘 어울리잖아. 싸우는 거 보면 재밌더라.”
“아오……미치겠네.”
그사이 나는 성진에게 소곤거렸다.
“나간단 말이야? 걔들이?”
“어. 웬일인지 나간다네.”
“헤에…….”
그런데 진짜 한수랑 인하가 나가면 우승은 따 놓은 당상 아닌가? 아니다, 너무 잘 어울리니까 질투 나서 안 뽑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유리하잖아.
“하아, 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 예술과에도 잘생기고 예쁜 애들 많지만, 그래도 한수랑 인하에 비할 바는 아니잖아.”
예술과에는 배우나 아이돌 지망생도 다수 있다. 이 세계는 배우나 아이돌도 마법을 잘 써야 살아남는다. 그냥 예쁜 아이돌보다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법을 쓰는 아이돌이 훨씬 잘 먹힌다.
한수와 인하는 예쁘고 잘 어울리는 데다, 무엇보다 우리 학교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마법사다. 인기가 아주 많다. 실제로 우리 학교에선 아이돌 데뷔 한 학생보다도 훨씬 인기가 많다.
“인망은 없어도 우리 학년 중에 인하에 비견될 정도로 잘생긴 놈이 한 명 예술과에 있긴 하지만…….”
모두의 시선이 단번에 이쪽으로 향했다. 이크, 나는 부담스러워져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서 다가온 누군가가 내 손을 휙 감싸 잡았다.
“맞아, 그거야!”
“으, 응??”
“우리 과에 있잖아! 우리 학교에서 제일 인기 있는 사람이! 바로 은하 님이!!”
“뭐, 뭐어? 나?!”
나는 깜짝 놀라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반장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학년에서 제일 인기 있는 은하 님과, 우리 학년에서 제일 잘생긴 이성진! 두 사람이 커플로 나가면 우승은 식은 죽 먹기죠! 안 그래도 은하 님이랑 성진이랑 사귀는 거 아니냐고 수군대는 사람도 있으니까!”
모두가 술렁거렸다. 동의하는 사람도 있었고,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은하랑 성진이라니, 사건 사고 많은 콤비잖아. 오히려 안티가 나오지 않을까?”
“은하 님한테 이성진이라니! 안 어울린다! 이러면서?”
“하지만 은하 님이잖아. 은하 님을 봐서라도 뽑는 사람 많지 않을까?”
“하지만 저 두 사람 커플이 아니잖아.”
“그런 건 속이면 되지. 규칙에도 있잖아. 대회 끝날 때까지 커플이 아니란 게 대놓고 밝혀지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우리를 보는 시선이 뜨거워졌다. 나는 의자까지 밀며 뒤로 물러났다. 성진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주위를 관조했다.
“그런 구경거리에 나갈 생각은 없어. 이 녀석도 그런 건 싫어해.”
맞아! 난 나가고 싶지 않아! 이렇게 분위기에 휩쓸리다간 빼도 박도 못하게 될 것 같아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기……난 사람 앞에 나서는 건 좀 싫어해서……그…….”
그러자 아는 친구들이 몇 명 몰려들었다.
“은하 님! 부탁드려요! 이번만 나가 주세요!”
“은하가 이런 거 싫어하는 거 알지만, 가능성 있는 사람이 은하뿐이야. 응? 부탁할게~.”
“아니, 그……내가 우승하리란 보장도 없고…….”
“하지만 상대는 그 인하와 한수예요! 가능성이 있는 건 정말로 은하 님뿐이라고요!”
“저기, 얘들아……?”
“무엇보다, 우승 상품이 쩔어 준단 말이에요! 이건 놓칠 수 없어요!”
“……우승 상품?”
그 말에 살짝 귀가 솔깃해졌다. 그것을 느꼈는지 반장이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아직 공식 발표되지 않은 건데……이번 상품……상점가 식당 및 카페 이용권이에요! 상점가 식당 전체 자유 이용권을 무려 한 달 치나 준다고요.”
“……!!”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주위의 반응도 거셌다.
“그거 진짜야?”
“대박이잖아!”
“선배들만 치사해요!”
“이번 상품 진짜 대박이다…….”
“부상도 있어요. 우승한 커플이 나온 학과 학생들한테는, 카페랑 식당 일주일 치 식권이 따라온다고요! 이건 놓칠 수…….”
“코…….”
“네?”
“콜!”
나는 작게 외치며 안 잡힌 손으로 반장의 손을 잡았다. 이건 진짜……대박이잖아!
“콜! 나갈게.”
“진짜요?!”
“그래. 한 번쯤은 쪽팔린 연기 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 나 연기 수업 들으니까.”
“아자!!”
3학년 예술과 학생들 전원이 환호했다. 그래, 먹을 걸 위해서라면 쪽팔린 연기 한 번쯤이야. 잠깐, 유은하?! 성진이 당황해서 내 어깨를 쥐었다.
“너 뭘 멋대로…….”
“야, 한 번만 희생하고 도와줘. 이건 진짜 안 하면 후회할 거야.”
“…….”
나는 소곤소곤 속삭였다. 여느 때와 다르게 의욕에 넘치는 내 얼굴을 보던 성진이 나를 말리는 걸 그만뒀다. 그리고 포기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반장이 흥분한 얼굴로 손을 잡고 들었다.
“좋아! 식권을 위하여!”
““위하여!!!””
인하와 한수가 이래서 대회에 참가했던 거구나! 라이벌이 된 이상 전심전력으로 해야지!
나는 어느 때보다도 열정적으로 주먹을 들어 올렸다. 성진만이 골치 아프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커플 대회에 나가는 건 친구들에게는 비밀로 했다. 인하와 한수가 참가한다는 게 알려진 이상 이번에는 구경꾼이 제법 많을 거다. 연기 힘내야겠다.
“너 그런 낯간지러운 연기 제대로 할 수 있겠냐?”
“할 수 있어. 내 마법은 환각인걸.”
“환각을 그딴 데 쓰고 있는 거냐, 넌…….”
“너야말로 제대로 해. 다른 여친들 대할 때처럼 그렇게 차갑게 하면 안티 생길걸?”
“즉 자기가 인기인이란 건 자각하고 있는 거군요?”
“윽…….”
커플 대회 참가를 응원하며 같은 과 친구들이 나와 성진은 접객이나 홍보 등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연기는 아직 맞춰 보지 않았다. 그냥 서로 연기할 만한 썰을 몇 개 정리했다.
“하아……근데 수준별 수업도 오랜만이네.”
“너 훈련 금지당했다고 했지? 지금도?”
“응……. 아직 하지 말래. 할 수 있는 건 명상 정도? 당분간은 그냥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쉬라는데……나는 그게 더 불편하더라고. 평소처럼 훈련하고, 아이템 만들고, 글 쓰고, 훈련하고, 그래야 평소 일상으로 돌아왔구나 싶을 것 같은데……. 음, 그래도 가끔 이렇게 푹 쉬는 것도 나쁘지 않아.”
손으로 몇 가지를 꼽다가 이내 맑게 웃으며 성진을 돌아보았다. 성진이 내 머리를 손으로 쓱쓱 쓰다듬었다. 어라, 이런 스킨십은 또 처음인걸. 약간 쑥스러워졌다.
“자, 거기까지!”
그때 우리 사이로 갑자기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옆으로 피했다. 가슴이 긴장되며 쿵쿵 뛰었다. 나와 성진이 사이에 수도를 날린 것은 민희였다. 양쪽으로 피한 나와 성진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던 민희는 이내 성진한테 덤벼들었다.
“어디서 우리 아이돌의 머리를! 은하 머리는 간단히 내주지 않겠다!”
“뭐라는 거야.”
민희 뒤로 킥킥 웃고 있는 소영이가 보였다. 우리는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한수와 인하, 인성이는 이미 와 있었다. 시하와 예슬이는 수업 종이 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달려왔다.
“은하 님! 오늘은 훈련해도 돼요?”
“응. 이제 랭크 시험도 얼마 안 남았고……앗!”
“……? 왜 그래?”
시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친구들도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방금 처음 깨달은 사실을 입에 담았다.
“생각해 보니 나……시험 신청 안 했는데…….”
신청 기간은 10월까지다. 이미 지나도 한참 지났다. 어라, 잠깐? 그럼 나 이번에 시험 안 쳐도 되나? 안 그래도 부담스러웠는데 안 쳐도 되나?
좋아해야 할지 곤란해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성진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우리 학교, 첫 시험은 알아서 자동으로 신청해 준다더라.”
“아…….”
실망한 건지 다행인 건지 모르겠다. 나는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내 웃었다. 그래, 기왕 치는 김에 친구들이랑 다 같이 치는 게 낫지. 그리고 다 같이 유명해지는 거다. 그래, 그게 낫지. 음, 그렇고말고.
“그렇구나. 다행이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거 맞아? 표정이 이상했는데?”
“내 표정이 뭐가?”
“너 사실 안 쳐도 될 줄 알고 좋아했지.”
“아, 아니거든?”
“말 더듬는 거 봐라.”
“참 나. 아니라고.”
떠들다 보니 금세 수업 종이 쳤다. 평소와 다름없는 감각에 나는 내심 안도했다. 엄마도 아빠도, 아줌마도 아저씨도, 선생님들도 선배도, 참 걱정이 많다니까. 역시 평소대로 일상을 보내는 것이 가장 안심되는데. 이렇게 학교에 나와 다가오는 행사 준비를 도우며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게 충족되는데.
“은하가 참가하는 건 오랜만이니까 오늘은 평범하게 대련을 하자. 제비뽑기로 짝을 정할까?”
“네에!”
제비뽑기 결과 내 시합 순서는 첫 번째로, 상대는 최인성이었다. 인성이는 상대가 나임을 확인하자마자 괴성을 질렀다.
“억! 선생님! 은하는 좀…….”
“약점도 극복해야지.”
“약점 정도가 아닌데요!”
나는 킥킥 웃었다. 오랜만에 하는 대련이라 그런지 괜히 손에 식은땀이 맺히고 긴장되었다. 아니, 가라앉고 있나? 기분이 차갑게 가라앉고 있다.
“자, 그럼……시작!”
나는 곧바로 자세를 잡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대련을 시작했다. 정확히는……그럴 셈이었다.
“정말, 모르겠다!!”
인성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그림자를 일으켰다. 나를 향해 그림자가 커다란 형태로 덮쳐들었다. 처음부터 큰 기술을 쓰네? 침착하게 그림자를 파악했다. 침착하게, 베어 갈랐다.
…….
──‘베어 갈랐다’.
“……! 악……!”
눈앞으로 피가 튀었다. 이때까지, 나는,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그냥 괜한 걱정을 하는 줄 알았다. 정말로 내가 멀쩡한 줄 알았다. 평소대로, 평소와 다름없는 상태로 돌아온 줄 알았다.
그게 착각이라는 것은 그 직후 알 수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마법을 내질렀다가 멍하니 눈을 크게 떴다. 내가……무슨 짓을 한 거지……?
“어……?”
인성이 피투성이가 된 팔을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친구들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인성이에게 달려왔다. 현호가 다급히 그에게 치유마법을 사용했다.
나는 창백하게 질려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뭐지……? 방금……내가 무슨 짓을 했지……?
숨을 쥐어짜며 허리를 접은 순간이었다. 귓가에 큰 소리가 들렸다.
“은하야!”
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나를 부른 것은 인하였다. 인하가 진지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인성이에게 달려갔다.
“미, 미안……내, 내가……내가…….”
“정신 차려.”
성진이 내 등을 큰 소리 나게 쳤다. 현실을 일깨우는 고통에 흔들리던 정신을 다시 바로잡았다. 눈물이 뚝뚝 흘렀다. 상처 입은 것은 자신이면서, 인성이는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괜찮아……. 일부러 한 거 아닌 거 알아. 크게 다친 거 아니니까 괜찮아.”
고통스러울 텐데도 인성이는 차분히 나를 진정시켰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정신 차리고 느낌 되살려 봐. 평소에는 저런 거 숨 쉬는 것처럼 간단하게 제어했잖아. 어쩌다가 제어가 비틀린 거야?”
“맞아. 평소에 은하는 마법으로 상대를 상처 입히긴커녕 주위에 피해를 입힌 적도 없잖아.”
“은하야. 찬찬히 방금 느낀 것을 말해 보렴.”
모두 나를 탓하거나 하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성진이, 그다음으로 현호가, 이어서 선생님이. 나는 시선을 굴리며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모, 모르겠어. 그냥, 눈앞에 오는 공격을 보니까……반사적으로……반사적으로…….”
그때의 감각이 떠오르자 정신이 반사적으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성진이 이내 내 뺨을 잡아당겼다. 나는 또 한 번 화들짝 깨어났다. 성진이 선생님을 보며 말했다.
“선생님.”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