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205
‘한 달 치 식권이랑 흑역사. 한 달 치 식권이랑 흑역사…….’
내가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성진이 손으로 내 머리를 누르며 말했다.
“순진한 애한테 뭘 시키려고 하는 거야. 패스!”
와아아아……!
긴장해 말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군중이 목소리를 높였다. 대부분 성진의 선택을 기뻐하고 있었다. 세상에나, 커플끼리 키스 안 했다고 안도하는 걸 보는 건 또 처음이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내 인지도 및 성진의 안티를 실감했다.
“후아……다행이다. 진짜로 하는 거 아닌가 싶었어.”
“난 하면 마법을 써서라도 막으려고 했지.”
이거야 원, 외부인은 적응 못 할 분위기가 되어 가고 있다. 실제로 그러고 있는 것 같고.
“패스한 분은 다시 한번 뽑아 주세요!”
패스한 사람은 우리 조를 포함해 세 조, 그중 한 조는 방금 전 다섯 번째에서 두 번째 패스를 하고 내려갔다. 리퀘스트가 하필 ‘러브 송 합주’였기 때문이다. 악기도 없고 연주할 줄 아는 악기도 없었기 때문에 포기했다. 아니, 왜 그런 게 있냐고요.
앞 조가 먼저 제비를 뽑았다. 앞 조가 뽑은 것은 ‘여자가 거만한 포즈 취하고 남자가 발등에 키스하기’였다. 상당히 난이도 있는 자세다. 결국 여자가 먼저 포기를 외쳤다. 이해합니다. 나는 다음 제비를 뽑았다.
『무릎 위에 앉히기』
비교적 간단했다. 바닥에 앉기 좀 그랬기 때문에 성진은 의자를 소환해서 앉은 뒤, 공주님 안기를 해서 나를 무릎 위에 앉혔다. 이럴 때마다 이 대회 나오겠다고 한 게 조금 후회되었다. 내가……내 무덤을 팠구나……!!!
그러나 겉으로는 웃으며 성진의 목을 끌어안았을 뿐이다.
“서로 고생한다.”
“어.”
비로소 최종전을 치르게 되었다. 남은 조는 인하와 한수를 포함하여 총 3조였다.
“그럼 최종전을 시작합니다! 최종전 종목은 바로 ‘알콩달콩 사이 자랑하기’. 룰은 간단해요! 차례대로 자신들이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 관객들에게 닭살을 떨어 주세요! 진짜 눈꼴실 정도로! 생각할 시간 5분 드립니다! 닭살을 떤 후 관객 투표로 이번 축제의 베스트 커플이 정해집니다! 자, 준비하세요!”
우리 세 조는 각자 떨어져 의논했다. 뭐? 닭살을 떨어?
“그냥 장기 자랑 같은 건가?”
“그런 방향으로도 생각할 수 있겠군. 그럼 마법 융합?”
“미묘…….”
“그런가.”
“그다음엔……그러네, 듀엣이라든가?”
“애교라든가…….”
애교라고라? 너랑 나 사이에? 우리는 서로를 미심쩍게 바라보다가 다시 고민했다. 내가 아는 한 최고로 닭살 떠는 애교 같은 건……음……삼행시 지어서 쪽쪽거리는 그런 거밖에 없는데. 나는 잠시 단어를 머릿속에 조합했다. 그래, 대본을 쓰는 거다. 어차피 나온 이상 흑역사 적립은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나는 성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지막까지 연기하자고.”
“어? 그래…….”
나는 성진의 귓가에 소곤소곤 연기 내용을 말했다. 성진은 그 말을 듣고 곤혹스러워했지만 새빨개진 내 얼굴을 보고 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5분은 금방 지났다. 인하와 한수부터 시작했다. 인하와 한수는 마법을 사용했다. 빛마법과 나무마법, 꽃마법과 번개마법을 융합했다. 가지가 뻗어 가고, 빛나는 열매가 자라고, 열매가 번개를 뿌리고, 그 주위에 꽃잎이 휘날렸다. 공격으로 돌리면 상당한 위력일 거다.
“한수랑 인하답다.”
“그렇지.”
재미있는 남녀 커플은 듀엣을 했다. 신나는 사랑 노래를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부르는데, 절로 박수가 나왔다.
‘이런 분위기에서 그런 걸 해야 한단 말이야? 하, 근데 주제는 커플이니까…….’
몰라, 모두들 보고 웃고 말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옆으로 걸음을 옮긴 뒤, 몸을 돌려 성진을 마주 보았다.
“성진아~.”
일부러 애교가 듬뿍 담긴 목소리로 불렀다. 하, 미친, 내가 생에 이런 짓을 하게 될 줄이야. 상품 땜에 참는다.
“내가 오행시 지어 볼게. 고양이 인형으로 운 띄워 봐.”
“고.”
“고양이가 폴짝 뛰어오르며,”
“양.”
“양~.”
“이.”
“이쪽에 쪽 해 줄게 야옹,”
쪽. 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그 녀석의 뺨에 뽀뽀했다.
“인.”
“인간 정말 좋아!”
“형.”
“히영~. 언제나 고마워! 한 번 더!”
5분 만에 짜낸 오행시로는 이게 겨우였다. 나는 고양이 흉내를 내면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녀석의 뺨에 한 번 더 뽀뽀했다. 귀여우니까 고양이를 골랐고, 오글거리니까 저따위 시를 만들었다. 성진은 고생한다는 눈으로 피식 웃더니 내게 고개를 숙였다. 답 키스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너란 녀석은 정말.”
말투와 그 안에 담긴 감정마저 완벽했다. 서로 완벽한 연기였다.
──그러나, 입술이 입술 바로 옆에 닿기 직전.
“야!!!”
커다란 목소리가 그것을 저지했다. 나는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텅 빈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은희 언니와 천호 오빠가 화들짝 놀라 자신들 사이에 있던 제현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제현 오빠는 잔뜩 화난 얼굴로 일어서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 소리친 건 아무래도 제현 오빠 같았다.
“이 이상은 못 참아!”
“안 돼! 인정 못 해!!”
“감히 누구한테!”
친구들도 잇따라 일어났다. 인하가 달려와 성진의 멱살을 잡고, 민희나 강예슬, 윤시하 등 팬클럽 일원도 앞으로 달려 나왔다.
“무슨…! 지금까지는 그나마 은하가 한 거니까 봐준 거지, 감히 누구한테 키스를 하려고 해?!”
인하가 성진의 멱살을 잡고 탈탈 흔들었다. 소영이도 안절부절못하며 소리쳤다.
“차라리 은하랑 사귀길 바라긴 했지만, 이건 아니라고! 너무 진도가 빠르잖아!”
성진이 제 몸을 탈탈 흔드는 인하의 손목을 잡았다.
“야, 지금 대회…….”
“때려치워! 나도 안 해! 이 이상은 용납 못 해! 어딜 감히 은하 님한테…….”
“고생했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던졌다. 어라? 어라? 어라라……?
“헤어져!”
“어디서 은하한테!”
“헤어져라!!”
나는 허망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내 팬들은 힘이 셌다. 이미 주위는 난장판이었다. 이 일을 계획한 학과 친구들은 될 대로 되라는 표정으로 박수를 치고 있다.
‘처음부터 우승은 무리였던 건가…….’
나는 한 달 치 식권을 떠올리며 눈물지었다.
결국, 우승은 듀엣을 부른 재미있다고 소문난 커플이 가져갔다. 모든 것이 끝난 후에야 나는 구경하러 온 지인들에게 사실을 말할 수 있었다.
“연기였다고~?!”
“당연하지! 그럼 내가 얘랑 진짜 사귈 거라고 생각한 거야?”
“하, 하지만……!”
민희와 소영이가 뭔가 엄청 말하고 싶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말로 하고 싶긴 한데, 말문이 막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때의 표정이었다.
“아니, 자연스럽게 키……아니, 그…….”
민 선생님 역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뚱하니 대답했다.
“뭐 어때요. 닳는 것도 아니고.”
““…….””
그곳에 있던 사람이 전부 입을 다물었다. 다들 곱지 않은 눈초리로 나를 바라본다. 특히 제현 오빠와 민 선생님의 표정이 무시무시했다. 뭐, 뭐예요…….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요 꼬맹이가 진짜…….”
은희 언니가 소리치고, 제현 오빠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책망하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을 받으며 성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에 난 휘말린 거니까.”
소영이가 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난 순간 진짠 줄 알았다고!”
“어쩌겠어. 하겠다는데.”
“대체 뭘 위해 그렇게 처절하게 연기한 거야?”
식권, 식권이 날아가다니. 흑역사 한번 거하게 만든 만큼 속이 쓰렸다. 떠올리기만 해도 왜 그딴 짓을 했지 하고 발버둥 치고 싶을 정도인데 얻은 게 없다니!
“학과 친구들이 부탁하기도 했고, 상품이 갖고 싶었단 말이야! 이번 상품 들었어? 식권 한 달 치라고! 으……그걸 위해서라면 그런 연기 정도야 싸잖아! 식권 얻으면 가게 메뉴 전부 시켜서 하나씩 다 맛보고 싶었는데……!”
“이 녀석, 식권 이야기 듣고 한 번에 오케이 했어. 처음엔 싫어했으면서.”
“…….”
분해하는 내 옆에서 성진이 말을 덧붙이자 사람들이 또 한 번 침묵했다. 제현 오빠가 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유은하!!!”
“……!”
나는 툴툴대다가 화들짝 놀랐다. 그야 나도 전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연기로 뽀뽀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응? 딥 키스도 아니었고.
그러나 제현 오빠의 표정이 워낙 무서웠기 때문에, 나는 지레 찔려 움츠러들었다. 반사적으로 옆에 있던 성진의 소매 끝을 잡았다.
제현 오빠는 결국 그 이상 말을 못 하고, 그냥 한숨을 내쉬었다.
“너……진짜……그럴 거면 차라리 나한테 사 달라고 해. 알았지?”
마지막 톤만이 겨우 상냥함을 되찾았다. 네……. 나는 겨우 대답했다.
본심과는 정반대의 대답이었다. 제현 오빠의 화난 얼굴을 오랜만에 본 다른 사람들도 놀라서 잠시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내가 혼자서 우물쭈물하고 있자 성진이 내 귓가에 속삭이며 물었다.
“그래서 본심은?”
“아니, 그……뭐…….”
정답! 다른 사람한테 사게 하면 식권을 타는 의미가 없다. 그렇게 먹으면 돈이 아깝잖아. 이런 건 상품으로 질러야 하는 건데. 나도 돈 많다고. 돈이 아까워서 이런 연기를 한 게 아니라고……. 그런데 그걸 말하면 제현 오빠한테 엄청 혼날 건 알겠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표정을 숨겼다. 오빠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내 뒤로 다가온 민희가 내 양 뺨을 잡아당겼다.
“잘못했어, 안 했어?”
“으아……노래키 새가이어땅 마리야.”
“그거 말고. 어디서 애인도 아닌 사람한테!”
민희가 소리치며 성진을 찌릿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난 휘말렸다니까. 마자. 재 히마린 거. 너 진짜 계속 그럴 거야? 민희가 뺨을 쥔 손에 힘을 주다가, 이내 놓았다.
“오빠도 너무 화내지 마. 은하 얘가 얼마나 소심한 줄 알아? 오빠 화난 모습은 무섭다고.”
“윽…….”
제현 오빠가 뭔가 찔리는 거라도 있는지 고개를 숙였다. 오, 민희 굉장하다. 덕분에 나는 조금 살아났다.
“설마……어릴 때부터 어른스러웠기 때문에 우리 은하가, 이런 거에……자각이라고 해야 하나? 둔한 편인 줄은 몰랐지. 생각해 보면 예전부터 그런 낌새가 있긴 했는데…….”
뭐가? 나는 의아한 얼굴로 민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렸는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랬지. 전의 인공호…….”
제현 오빠가 은희 언니의 입을 가렸다.
“한밤중에 친구라고는 해도 남자랑 단둘이 만나거나.”
그러며 인성이를 노려본다. 인성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근데 그건 제현이 네 탓도 있어. 어릴 때부터 스킨십을 막 하니까 그렇지.”
불만으로 가득 찬 은희 언니의 말에 제현 오빠가 당황했다.
“네? 친동생이나 마찬가지라고요. 그리고 제가 머리 쓰다듬는 거랑, 끌어안는 거랑, 그 이외에 뭘 했다고…….”
“그게 문제지! 어쨌거나 너는 친구의 오빠잖아! 애가 그런 거에 둔한 편인 이유를 알겠다.”
아니, 그렇게 생각이 없는 건 아닌데……. 키스를 좋아하는 사람이랑 해야 하는 것도 알고, 다 안다고. 그냥……한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연기니까 할 수도 있는 거지. 게다가 뭐……결국에는 좋아하는 사람이지 않나. 거부감이 들 리가 없다.
“어쨌거나 은하야, 그러면 안 돼. 아무리 연기라도 그렇지! 친구끼리 그러다가 이상한 감정 들면 돌이킬 수 없다고! 뭣보다 쟨 바람둥이로 유명한 애잖아!”
“네에…….”
“그래, 앞으론 그러면 안 돼. 알았지?”
민 선생님도 엄한 얼굴로 설교했다. 알았어요. 알았습니다. 제가 다 잘못했어요. 이제부터는 그런 연기 안 할게요. 안 하면 되잖아……. 나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모두가 안심했다.
“하, 진짜, 갑자기 대회에 나왔을 땐 놀랐다고. 진짜 우리가 모르는 사이 사귀게 된 건가 싶어서.”
“그랬음 진작 말했지.”
“변명이 너무 그럴듯했단 말이야!”
“그런가?”
다행히 설교는 그걸로 끝났다. 곧 제현 오빠네와 선생님들은 물러났고, 친구들도 몇 명 따로 행사가 있다면서 물러났다. 인하와 한수와 인성이는 딱히 할 일이 없다며 우리 곁에 남았다.
“뭔가 먹고 싶은 거면 조금 이따가 많이 먹기 대회가 있는데. 거기에 참가해 보지? 아직 참가 가능할걸?”
“진짜? 나 해 볼래! 나 그런 거 좋아해!”
“결국 모든 건 먹을 것 때문이었던 거냐…….”
하아. 인하와 한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들이 뭐라 하건 말건 나는 많이 먹기 대회에 참가 신청을 했다. 100명이 넘는 사람이 참가했고, 많은 음식이 나왔다. 유부초밥, 김밥, 라면, 부침개, 우동, 달달한 케이크! 빵! 과일샐러드!
중간에 단 음식 때문에 고전하기는 했지만 웬만한 건 다 싹 쓸어 버렸기 때문에 실격당하지 않고 계속 다음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다. 평소에 내가 먹는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을 먹고 있다. 그런데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
‘몸이 튼튼하고, 밥을 먹어도 배가 안 불러.’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정말이었구나. 내 체질이 어느새 이렇게 변했었구나……. 처음으로 그 사실을 실감하고 인정한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다. 더 먹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음식이 바로 마력으로 변환되는 것이 느껴진다. 그건 무척이나 기이한 감각이었다.
그렇다 보니 내가 많이 먹기 대회에서 우승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근처에 있는 고급 뷔페 쿠폰도 받았다. 좋아, 끝이 좋으면 다 좋다. 약간 싱숭생숭했지만 어쨌거나 뷔페 무료 쿠폰을 받았잖아! 다음에 혼자 놀러 가야지! 어쩔 수 없다. 1인용이니까.
그렇게 둘째 날도 막을 내렸다.
축제가 끝나자 나에게는 다소 초조한 일상이 찾아왔다. 랭크 시험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한 달도 되지 않는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대전 훈련에 돌입했다. 친구들은 싸우고 또 싸웠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정규 수업 시간에도 나는 대련 훈련에서 빠져야만 했다. 시뮬레이션 훈련은 그나마 조금 허용됐지만, 대전 훈련은 금지되었다.
그나마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이성진과 몇 번 대련한 게 전부였다. 성진은 아직 살기가 덜 빠졌다면서 다른 사람과는 대련하지 말라 충고했다. 그게 나를 초조하게 했다.
개인 훈련을 할 때는 별 이상이 없어 보인다. 명상을 할 때도 특별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대련만 하면 반사적으로 날카로운 공격이 나왔다. 한 달에 걸쳐 목숨의 위협을 겪고, 그 안에서 두려움을 이겨 내느라 얼마나 마음을 짜냈던가. 그 두려움이 내 마음에 자연스럽게 남은 거다. 그 사실이 초조하고 괴로웠다.
‘난 괜찮은데.’
서서히 잦아들기는 했다. 어차피 랭크 시험은 가상 시스템을 사용한다. 하지만 부족하다고 여겼다. 마법을 완벽하게 제어해야 한다. 마음을, 가라앉혀야 해.
스승님이나 수준별 선생님을 포함해 아는 선생님들과 많이 대화를 나누고, 친구들과도 많은 대화를 나눴다.
성진이 예전에 약속했던 것을 입에 담았다.
“너 전에 약속했던 거 까먹었지? ‘그 사건’이 뭔지 말해 주기로 했잖아.”
“아, 그거.”
나는 중지와 엄지를 딱 소리 나게 부딪혔다. 친구들이 의아해하며 우리를 돌아보았다.
“뭐?”
“뭐 말이야?”
“테러 때 일. 말해 주기로 약속했거든.”
“아하.”
“아, 그거.”
“그거 말이야?!”
인하와 한수, 민희, 현호가 그러려니 하는 것과 달리 인성이나 소영이는 굉장히 궁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우리 학년 학생들에게 그 테러 사건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으니까. 학교를 다니다 보면 귀동냥으로나마 주워듣게 된다. 그건 여러모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이 없었다면 내가 이렇게 눈에 띌 리도 없었겠지. 그랬다면 성진과 좀 더 원만하게 친해질 수 있었을까? 아니, 아예 친해질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말해 주기로 한 거야?”
“친구한테 숨길 정도의 일은 아니구나 싶어서.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잖아.”
그래, 우리는 이미 성인이다. 테러 사건은 어릴 때의 일이다. 이제 밝혀져도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래도 친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밝히기 꺼림칙하지만.
“하긴.”
“벌써……5년이나 지났네.”
“그러게.”
손가락을 꼽던 민희가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친구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호기심이나 흥미로 가득 찬 세 사람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먼저 무엇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을까? 천천히 기억을 되짚으며 말문을 뗐다.
“그러니까……그날은, 굉장히 평범한 날이었어. 나랑 인하랑 한수가 같은 반이었던가?”
“맞아. 같은 반이었어.”
“응. 인하랑 나는 옆집이니까, 같이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잠시 후 등교한 한수랑 떠들고 있다가……학생들이 반에 들어오고, 수업이 시작됐어. 정말로 평범했어.”
하늘은 맑고, 지루한 수업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날 보았던 하늘이 어렴풋이 추억 안에서 되살아났다.
“내 자리는 창가 자리였는데, 창밖에서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 피할 수 없을 정도까지 가까워졌을 때쯤에야 그게 불을 두르고 있는 커다란 돌덩이란 사실을 알았어.”
나는 최대한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 갔다. 민희가 손뼉을 쳤다.
“맞아! 그땐 정말 깜짝 놀랐는데, 근데 네모난 결계가 세워지더니 그걸 막아 내고, 튕겨 내는 거야. 처음엔 선생님이 한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은하였다지 뭐야?”
나는 그때 만들었던 사각형 결계의 축소판을 만들었다. 한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부터 얘 마법은 전조가 없었거든. 애가 갑자기 숨을 몰아쉬는 거야. 그래서 이 녀석이 한 일이라는 걸 겨우 알았어.”
소영이가 내가 만든 축소 결계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결계가 젤리처럼 말랑말랑하게 눌러졌다 튕기듯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시 내가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위험하구나 싶어 선생님 지시에 따라 강한 결계가 있는 체육관 강당으로 대피하려는데, 어딜 봐도 나 ‘나쁜 사람이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온몸을 새까만 옷으로 둘러싼 남자들이 복도에서 나타났어.”
“맞아. 까마귀처럼 새까맸어.”
“그다음엔 교실로 들어갔지?”
“교실의 방어 장치는 반이 기계니까. 안전하다고 해서 뛰어 들어갔었지.”
“맞아, 그랬었지. 그…….”
차례로 이어진 민희와 현호, 한수의 말을 받던 나는 무언가가 빠진 것을 깨닫고 손가락을 부딪쳐 소리를 냈다.
“맞다. 그러니까……결계가 쳐졌었어. 밖과 완전히 통신이 차단되는 결계였어. 그래서 마법을 쓰기 힘들고, 밖으로 텔레포트 할 수도 없었어. 이동마법을 쓸 수 없고, 통신도 되지 않는, 그런 결계였던 거야. 학생증도 불통이었어. 하지만 기계로 된 장치라면 작동할 테니까.”
“응. 그래서 교실로 들어가고 방어 장치를 가동했었지.”
그제야 성진과 소영, 인성은 이야기의 맥락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르르 교실 안으로 들어가는 어린 학생들. 마지막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던 나. 그 장면이 이야기를 이어 갈수록 생생해졌다.
“선생님은 남아서 그 사람들을 막았어.”
“분위기 장난 아니었다? 애들은 막 울고, 나도 오빠한테 학생증으로 연락해 봤지만, 연락이 안 되고. 핸드폰도 불통이고.”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고…….”
민희도 현호도 착잡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 당시의 일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다음 순간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아이들이 울고 있는데 갑자기 문에서 쾅 소리가 났어. 문을 부수려고 공격한 소리였을 거야.”
“그럼…….”
인성이가 숨을 삼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러범은 10명이 넘었고, 선생님은 3명, 문을 쾅쾅 부수려 하는 사람들이 선생님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지.”
“무서워서 뒤로 물러났던 것 같아. 모두 다, 한곳에 모여서 손을 잡고 끌어안고……결국 문이 부서지고 테러범들이 들어왔어. 그때, 은하가…….”
현호가 내게 눈짓을 보내자 친구들도 모두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때의 심정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지금 생각해도 용기였는지, 만용이었는지 모르겠어. 나는, 내가 재능이 뛰어나단 것도, 친구들 중에 내가 제일 강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어차피 성인에게 당해 내지 못한다고 해도, 막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그 중심에 기둥처럼 섰다. 나는 그때 했던 행동을 흉내 내듯, 손에 무언가를 잡아 그것을 머리에 쓰는 모션을 취했다. 마법을 쓰는 걸 들켜도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환각으로 만든 모자로 얼굴을 가렸었다.
“앞에 설 필요는 없었어. 마법을 쓴 게 나라는 걸 들켜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 마법에 전조가 별로 없는 편이니까 웬만해선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문이 부서진 순간 아이들 모두를 감싸는 결계를 치고, 아이들 사이에 숨었어.”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가능했던 건지 신기하다. 그들은 성인 마법사였고, 나는 10살 꼬맹이였다.
“그때 은하 엄~청 멋있었는데!”
민희가 활짝 웃으며 손을 모으는 것을 보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멋있긴 무슨. 그냥 겨우 버텼다고. 몇 번 공격을 막았을 뿐인데 쓰러질 것 같더라. 그렇게 버텼는데, 근데 그다음에…….”
지금 생각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녀석이 나타났다. 그놈의 얼굴만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스마트 글라스를 쓴,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은 남자다.
“불마법을 쓰는 사람이 한 명 더 왔어. 그 남자, 감지능력이 조금 있는 마법사여서, 마법 쓰는 게 나라는 걸 들켰지 뭐야.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긴 했지만…….”
“아, 그 녀석. 진짜 기분 나빴어!”
한수가 찌푸린 얼굴로 소리쳤다. 민희도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이 뭐라 그랬는줄 알아? 은하는 꼭 납치할 거라고 말했다고! 그다음엔 은하를 스토킹했었잖아!”
“뭐?”
“스토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