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207
“엄~청 긴장돼요!”
“나도…….”
“난 그럭저럭?”
“평소처럼만 하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하긴, 긴장하라고 해도 끝까지 긴장을 지킬 수 없겠지만. 시험은 가상 현실 시간으로 최소 사흘에서 최대 한 달이나 걸려. 그 시간 동안 계속 긴장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니?”
“헐…….”
그렇게나 오래 걸린다고? 나는 불안감을 삼키며 앞머리를 매만졌다. 은희 언니가 격려하듯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너희도 지금 미리 출석 체크 하고 자기 자리를 확인하는 게 좋아. 아직 사람이 별로 몰리지 않은 편이거든. 사람 몰릴 때 하면 진짜 힘들어. 아주 지옥이야, 지옥.”
나는 시선을 돌려 건물 입구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그곳을 오가고 있었다. 저게 아직 몰리지 않은 편이라고? 그래, 1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시험을 치른다는데, 어련하시겠어.
“그렇구나.”
“알려 줘서 고마워, 언니!”
“우리 바로 갔다 오자.”
우리는 은희 언니와 성후 오빠에게 인사하고 인파를 헤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 사이를 걷는 대신 단거리 텔레포트를 반복해서 움직이며 수험표에 적힌 방을 찾아 들어갔다. 첫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들은 지역별로 같은 곳에 모여 시험을 치르게 된다. 그러니 우리가 시험을 치르는 방은 같다. 우리가 시험을 치르는 방에만 몇천 명이나 되는 학생이 몰릴 것이다.
우리는 푯말에 ‘R’이라고 적힌 방을 찾았다. 벽에 달린 개폐 버튼을 눌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끝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넓은 방과 그 위에 세워져 있는 엄청난 숫자의 가상 현실 캡슐이 우리를 맞았다. 와, 규칙적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왠지 벌레 알 같……흠흠, 하여간 엄청났다. 마을만큼 넓은 방을 바라보고 있자니 괜히 손끝이 움찔 떨렸다.
“수험생이시라면 수험표를 제출해 주십시오.”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자니 요정처럼 생긴 작은 것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아마 아바타(가상 인물)일 것이다. 우리는 각자 들고 온 수험표를 내밀었다. 아바타는 우리 수험표를 사각형의 작은 기계에다 넣었다.
“출석 완료했습니다. 이건 수험 카드입니다. 시험을 치를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므로 잘 보관하시고, 잃어버렸을 때는 다시 한번 저를 찾아와 주십시오.”
요정은 우리에게 수험표를 돌려주며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에 이름과 수험 번호, 그리고 우리가 사용할 기계 번호가 적혀 있었다.
“카드를 쥐고 ‘이동’이라고 말하면 여러분이 시험을 치를 기계 앞으로 이동합니다. 이동한 다음 카드에 적힌 기계 번호와 기계에 적혀 있는 번호를 확인해 주십시오. 번호는 장치 하단과 꼭대기에 적혀 있습니다. 혹시 수험표에 적힌 번호와 기계에 적힌 번호가 다르다면 바로 제게 와서 알려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카드를 받고서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계가 정말 끝도 없이 많았다. 우리는 우리가 시험을 칠 장치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확인한 다음 다시 이 방 입구에서 보자.”
“그래.”
나는 카드를 쥔 채 ‘이동’이라 중얼거렸다. 몸이 넓은 시험장 안 어딘가로 이동했다. 눈앞에 달걀형의 동그란 가상 장치가 서 있었다. 수험 카드에 적힌 글자와 가상 장치 아래에 큼지막하게 적힌 글자를 비교했다. JI-034, 정확히 일치한다.
장치 앞에 서서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내가 들어왔던 입구가 어딘가 싶었는데 저 앞이었다. 멀긴 하지만 입구와 이어진 일직선 길이 바로 옆에 있으니 길을 잃을 걱정은 없어 보인다.
입구를 확인하는 내 옆으로 익숙한 얼굴이 달려왔다.
“은하 님!”
주위를 오가는 많은 사람 사이에서 그 목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주위 사람들이 무심코 우리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나는 당황하며 입가에 검지를 가져갔다.
“학교 밖에서는 특히 그렇게 부르지 마……!”
“에헤헷, 뭐 어때요. 은하 님 자리는 여긴가요? 저랑 가깝네요!”
“그래?”
나는 예슬이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럼 혹시 친구들도 멀지 않은 곳에 있을까? 시선을 개방하며 찾아보니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도 있고 멀리에 있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예슬이는 곧 다른 친구를 발견했는지 나에게 인사하고 어딘가로 달려갔다.
나는 기계 앞에 다가섰다. 랭크 시험용 기계를 조작하는 방법은 선생님들께 몇 번 들었으니 안다. 나는 기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스위치를 눌렀다. 나 말고도 기계를 열어 보는 사람이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스위치를 누르자 기계의 뚜껑이 푸쉭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나는 가볍게 뛰어올라 안으로 쏙 들어갔다. 녹색 소파는 무척 푹신하고 편안했다. 앉아서 내부를 둘러보니 카드를 꽂는 곳이 보였다. 카드를 꽂자, 내부에서 목소리가 울린다.
[수험번호 AEJJI07889번 유은하 님, 확인했습니다. 아직 시험 시작 시간이 아니므로 대기해 주십시오.]신기했다. 나는 작게 소리 내어 웃고는 카드를 다시 뽑았다.
[유은하 님, 시험 시작 시간 전까지 돌아와 주시기 바랍니다.]카드를 주머니에 넣고 다시 장치 바깥으로 나왔다. 나는 입구로 텔레포트 했다. 친구들은 이미 돌아와 있었다.
“우리 잠시 나갔다 오자. 오빠랑 다른 사람들도 지금 도착했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 수신 이력을 확인하니 문자가 와 있었다. 엄마, 아빠, 선아 아줌마, 정민 아저씨 등 많은 사람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내용을 확인해 보니 하나같이 첫 시험을 응원하는 문자였다. 나는 단체로 감사 문자를 돌렸다.
‘앗, 형일 아저씨한테서도 왔네.’
저주받은 세계에서 동료가 되었던 남자. 알고 보니 A랭크 마법사였지. 난 A랭크 마법사가 고전할 정도의 장소에서 싸웠던 것이다. 새삼 돌이켜 보면 소름이 끼친다.
『발신인: 김형일
엄청난 소동이 일어날것 같으니까 마치면 보러갈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지. 이 실없는 문자는.
그래도 그게 끝이 아니었다.
『첫 랭크 시험 힘내!!』
나는 피식 웃었다. 우리는 문을 열고 방에서 나간 후, 사람들 사이에 치이는 걸 재빨리 포기하고 텔레포트로 밖으로 빠져나갔다.
“우리 시간 될 때까지 뭘 하지?”
“명상?”
“마력 보충.”
나와 성진은 현실을 일러 주었다. 윽, 조금 긴장이 풀려 있던 소영이와 인성이가 다시 굳었다.
“아, 마력 보충 하니까 난 아직 배가 좀 허한 듯. 뭐 좀 사 올게.”
“그러든지.”
“뭐? 아침밥 먹은 지 별로 되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왠지 배가 허해.”
“은하야, 가는 김에 음료수도! 사이다로!”
“그래~.”
나는 주위를 떠돌며 맛있겠다 싶은 것을 왕창 샀다. 민희가 부탁한 사이다를 한 병 사고, 편의점에서 주먹밥을 사고, 근처 가게에서 토스트를, 컵치킨을 팔기에 그것도 사 왔다. 겨울이라서 그런지 만두랑 호빵도 팔기에 그것도 몇 개 샀다.
돌아오니 일행이 늘어 있었다. 수준별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과, 제현 오빠와 천호 오빠, 오빠들의 친구들까지 함께였다.
“얘들아, 먹을 거 사 왔어! 앗, 안녕하세요.”
“은하 안녕~.”
“뭘 그렇게 사 왔어?”
“배가 고프더라고요.”
헤헷. 나는 민희한테 사이다를 넘기며 작게 웃은 후 벤치에 앉았다. 나는 물과 함께 컵치킨을 먹고, 토스트를 먹었다. 만두랑 호빵은 친구들이랑 나눠 먹었다.
내가 우물우물 먹는 것에 집중하는 사이 모두는 격려나 응원의 말을 나눴다. 선생님들이나 선배들은 곧 우리에게 인사하고 멀어졌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왔다 갔다. 동급생, 유정 언니랑 인호 오빠, 스승님이랑 담당 선생님들, 민 선생님과 준휘 선생님. 서로 인사를 하고는 헤어졌다. 이제 시험 시작 시간까지 20분이 남았다. 우리는 다시 시험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텔레포트를 사용해 이동한 우리는 아까와는 달리 인산인해로 넘쳐흐르는 시험장의 지옥도를 목격했다. 미친, 은희 언니 말대로 미리 출석 체크 하길 잘했다.
우리는 손을 흔들고 자리로 이동했다. 서 있기는 좀 뻘쭘해서 장치 안으로 들어가 카드를 꽂고 몸을 누였다.
‘으음……편하다…….’
캡슐 뚜껑을 닫자 주위 소리가 완전히 차단된다. 나는 소파에 몸을 푹 누인 채 가만히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크게 긴장되지는 않는다. 기대감과는 조금 달랐다. 그럼에도 고양감과 비슷한, 평소와는 다르고 새로운 무언가가 가슴을 휘어잡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기다리듯이 침묵하며 가만히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눈을 떴다. 그와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스피커 방송이 나왔다.
[삐익───. 시험 시작 시간이 되었습니다. 참가자 여러분은 자리에 착석해 주십시오. 다시 한번 알려 드립니다. 참가자 여러분은 자리에 착석해 주십시오. 10분 안에 자리에 착석하지 않으시는 분은 시험을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그 후로 몇 분간 착석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방송이 계속되었다. 착석하지 않은 수험 번호가 호명됐다. 나는 차분히 기다렸다. 그러자 시험 진행을 위한 안내 방송으로 넘어갔다.
[가상 장치 캡슐 안에 착석하신 분들은 캡슐 뚜껑을 닫아 주십시오. 닫히지 않은 뚜껑은 5분 후에 자동으로 닫겠습니다.]또 5분 정도 기다려야 했다. 많은 사람이 동시에 시험을 치르면 이런 불편함이 따르기 마련이다.
카드기에서 빛이 퍼지며 점멸했다. 카드는 이미 꽂혀 있었다.
[카드를 꽂으시면 시험 시작 버튼이 뜹니다. 를 선택해 주십시오. 선택하지 않으시면 5분 후 자동으로 시작됩니다.]눈앞에 입체 영상으로 된 버튼이 떴다.
『시험을 시작하시겠습니까?
』
나는 망설임 없이 를 눌렀다. 그와 동시에 주위 풍경이 일그러지며 가상 풍경에 침식당했다.
[시험을 시작합니다. 눈을 감아 주십시오.]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새까만 공간에 있었다. 새까만 세계 속에 가는 빛줄기가 빠르게 움직였다. 별을 닮은 빛이 내 뒤로 선을 그리며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세계가 아니라 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순간 커다란 빛이 내 눈앞에 다가왔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나는 어딘지 모르는 거리에 서 있었다. 옛날 중세 분위기가 나는 거리였다. 그러니까, 드래곤이나 마왕이 나오는 중세 판타지 세계 말이다.
돌길이나 흙길을 사람들이 이국적인 차림새로 거닐고 있었다. 혹은 장터에서 사람들이 과일이나 옷감 등을 팔았다.
이상한 점이 있다고 하면 양옆도, 하늘도 돌로 꽉꽉 막혀 있다는 것이다. 마치 지하상가 같다.
‘흠…….’
나는 주위를 어색하게 둘러보며 발을 움직였다. 그럼……뭘 하면 되지? 걷다 보면 뭔가 나오려나?
나는 일단 무언가가 나올 때까지 걷기로 했다. 특이한 무늬를 지닌 옷감을 보고 조금 설레기도 했지만 어차피 산다고 해도 손에 넣을 수는 없는 가상 세계 속 물건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계속 걸었다.
사람들이 장사를 하고 있는 긴 길을 쭉 지나니 넓게 뻥 뚫린 장소가 나왔다. 매우 넓은 천장 아래 수많은 건물이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아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고 있다.
‘와아…….’
가상 현실 게임이나 훈련을 할 때와 비슷한 감각이다. 어차피 다 같은 가상 현실 시스템이니까. 그런데 뭐라도 해야 시험이 조금이나마 빨리 끝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바닥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불쑥 솟아올랐다.
“꺅……!”
그것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긴 손톱과 커다란 몸을 가진……몬스터? 그러한 부류인 듯했다. 주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꺄악! 몬스터야! 몬스터가 나타났어!”
“기사단! 기사단을 불러와!”
“으아아악!!”
나는 눈을 감았다가 시야를 떴다. 상대가 지닌 힘이 꿰뚫려 보였다. 딱히 대단한 마력을 지닌 생물은 아니다. 힘은 아마 제법 강하겠지? 그러나 마력을 뚫을 정도는 아니다. 나는 내게로 뻗어지는 손톱을 피하며 어떤 마법을 사용할지 잠시 고민했다. 고민하다가, 문자마법을 사용했다.
『축소』
빛이 터지며 상대의 커다란 몸이 확 줄어들었다. 나는 놈의 주위에 마력으로 만든 우리를 세웠다. 우리를 문자마법으로 고정한다. 나는 우리 위에 달린 고리에 손가락을 넣어 우리를 빙빙 돌렸다.
“포획 완료?”
시험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생각보다 부끄러움 없이 할 일을 하게 된다. 내가 몬스터가 든 우리를 열쇠고리 다루듯이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고 있자니 누군가가 달려왔다. 은색 갑옷을 입은 사람 무리였다.
“음?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왔다만…….”
“네, 네. 분명 나타났어요. 그런데 저 여자분이 순식간에 쓰러뜨렸지 뭐예요.”
마을 사람의 말에 무뚝뚝한 표정의 남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살짝 몸을 움츠렸다.
“그거 참 대단하군. 음? 이제 보니 자유 항쟁단의 일원이었구만?”
‘자유 항쟁단?’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남자가 내 허리춤을 가리켰다.
“그 배지 말일세. 자유 항쟁단의 배지 아닌가?”
나는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 수험 카드가 걸려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며 상대를 향해 생긋 웃었다. 아무래도 그런 설정인가 보다.
“네, 맞아요.”
“그 길드에는 강한 사람이 참 많다고 들었지. 그야 그럴 만하지. 누가 뭐래도 이 커다란 미궁……덴트라이얼을 탐험하는 자들의 모임 아닌가.”
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나는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거대한 미궁……옛날이야기지. 옛날 우리 선조들은 천장도, 벽도 없는 넓은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았다고 하지. 그런데 어느 날 악마들이 쳐들어온 거야. 커다란 몸과 강인한 육체, 강한 마법을 지닌 그 존재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이 넓고 깊고 어두운 지하에 봉인했지. 그리고 우리가 살던 세계를 자신들이 차지했다고 하네.”
호오.
“사람들은 절망했지만 악마를 이길 힘도 없었던 데다 나갈 방법도 찾을 수 없었기에 지하 미궁 속 생활에 적응했네. 하지만 위험은 많았어. 이 지하에는 지상에는 없던 흉폭한 맹수와 몬스터, 그 외에도 위험한 함정이 수없이 도사리고 있었거든.”
아무래도 이 사람은 세계관의 틀을 설명해 주는 역할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사람들은 도망쳤어. 좀 더 아래로, 아래로, 평화로운 곳으로. 그러다가 터를 잡은 장소가 바로 여기야. 여기를 영역으로 삼던 몬스터들을 쓰러뜨리고 나라를 세웠지. 이곳이 이 덴트라이얼에서 사람이 사는 유일한 장소라네.”
“……네. 그렇죠.”
“나라가 세워졌고, 강한 힘을 지닌 사람들이 기사단을 조직해 나라를 지켰지. 사람들은 겨우 찾아온 평화에 안주했다네. 미궁 깊숙한 곳에서 그저 살아가며, 살아 있는 것에 만족하며 안주했지. 하지만 그 평화에 안주하지 못하고 이 미궁을 탈출하여 옛터를 되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왔어.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 낸 조직이 바로 자유 항쟁단.”
말을 잇던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이제 와선 바깥 세계란 게 정말 존재하는 건지 믿기 어려워. 그러니 이 미궁을 나간다는 이야기도 허무맹랑하게 느껴져. 그래도 언제나 사람의 도움이 되는 발전을 이루는 너희들에게는 감사하고 있고말고. 앞으로도 정진하도록.”
그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멀어져 갔다.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진 후, 눈앞에 글자가 떠올랐다.
『튜토리얼이 종료되었습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온갖 방법으로 이 미궁을 탈출해 주십시오. 미궁은 위로 올라갈수록 위험합니다.
+가 보지 않은 층으로는 공간 이동을 할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위로 올라가라 이건가? 사실 원래 이런 곳에서 나가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벽을 부수는 거지만……그건 룰 위반이려나? 그랬다간 여기에 사는 사람도 생매장당할 가능성이 있다. 어차피 가상 현실이라곤 하지만 역시 사람이 죽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계는 설명을 좋아하는 사람이 참 많았다. 덕분에 위층으로 올라가는 방법을 금세 찾았다. 처음 도착한 곳을 1층으로 쳐서, 2층부터는 확실히 위험한 게 많았다. 흉폭한 몬스터와 위협적인 함정,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몇 달 전에 내가 갇혔던 그 끔찍한 세계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그때 그 기사는 1층이 사람들이 사는 유일한 나라라고 했지만, 2층에도 3층에도 사람이 존재했다. 마을을 이룬 곳도 있었다.
가상 세계의 시간으로 3일 만에 4층에 올라왔다. 4층, 곤충형 몬스터의 군집이 있는 곳, 다음 층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던 나는 우연히 숨겨진 마을을 발견했다.
“흠…….”
매우 낡은 건물이 스무 채쯤 보였다. 4층, 층과 층 사이에 존재하는 땅굴에 숨겨진 작은 마을. 나무가 있고, 작지만 밭이 있다. 나는 마을을 쭉 거닐었다. 마을 끝에는 무덤이 있었다. 족히 서른 개는 넘어 보였다.
“누구세요……?”
가만히 무덤을 둘러보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여자는 놀란 눈으로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사람……? 우리와 같은……? 세상에! 다른 층에서 오신 분인가요? 세상에!”
감탄을 반복하던 그녀는 이내 마을 사람들을 소리쳐 불러 모았다. 엥? 어라? 응? 나는 순식간에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작은 마을이더라니, 모인 사람도 기껏해야 50명 남짓이었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어라라.’
그들은 묻지도 않았는데 사정을 설명했다. 그들의 선조는 자유 항쟁단처럼 바깥으로 나가는 길을 찾고 있었다. 선조 대대로 방랑을 하는 민족이었던 모양이다.
2층까지는 버틸 만했다. 3층에서는 겨우 도망쳐 올라왔다. 4층에서는……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저들은 강합니다. 너무 강해요…….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만도 많은 희생이 있었지요. 아가씨, 저희는, 이제 평화롭게 살고 싶습니다. 상처 없이 이곳까지 온 만큼 강한 분이리라 믿고 부탁드립니다. 저희를 사람들이 사는 나라까지 데려다주실 수 없겠습니까?”
“…….”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눈앞에 창이 떴다.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아, 강제 퀘스트랬지. 얼떨떨해하고 있는 나를 두고 마을 촌장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하고는 어딘가로 달려갔다. 으음……그럼 다시 몇 층이나 거슬러 내려가야 하는 건가. 뭐, 어쩔 수 없지.
게다가 내게는 간단한 일이다. 그냥 공간이동마법을 쓰면 되니까. 바로 1층으로 내려갈 수 있으려나…….
게이트를 잠깐 써 봤는데, 생각보다 거리가 멀었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후 촌장 할아버지가 달려와 언제 출발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텔레포트로 이동할 수 있으니 지금 당장 짐을 싸서 모이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오래 정착한 만큼 쌓인 정이 많을 테니 하루 정도 눌러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예상외로 마을 사람들은 당장에 짐을 싸 왔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최근에 마을이 들켜 계속 습격당하고 있었단다. 식량을 비축하듯 한 명씩, 한 명씩 납치해 갔다나. 어쩐지……무너진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건물이 보이더라니.
“그럼……바로 이동할게요.”
나는 텔레포트를 사용해 순식간에 1층으로 이동했다. 커다랗게 뚫린 공동과 공동 안에 가득한 건물. 짐을 지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갑자기 변한 풍경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기가 사람들이 사는 곳이에요.”
“와……정말……순식간에…….”
그들은 잠시 허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내게 고맙다며 울먹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멋쩍어하던 나는 기사단에 대한 설정을 떠올리고는 그들을 기사단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만났던 남자와 마주쳤다.
“오! 자네는……이런, 그러고 보니 이름이 뭐였지?”
“유은하예요.”
“그렇군. 나는 델리오스라 하네. 오늘은 기사단에는 무슨 용무인가?”
“네. 이분들이 이곳에 이주해 오고 싶다고 하셔서요. 4층 위에서 발견한 분들입니다.”
“4층 위?!”
남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뭐지? 놀라던 그가 이내 감탄했다.
“그거 대단하군! 여기서 4층 위라면 미지의 땅일세. 우리 선조가 이곳으로 도망칠 때는 샛길을 썼고, 때문에 위층에 대한 기록은 거의 안 남아 있지. 우리 기사단도 때때로 자유 항쟁단과 함께 사람을 보내 위를 조사하지만……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3층까지였네. 4층이라니……자네 생각보다 대단한 실력자였구먼?”
“하,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쨌거나 알겠네. 이자들은 우리가 맡지.”
어휴, 다행이다. 어색해 죽는 줄 알았네.
“감사합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인사하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나는 텔레포트를 사용해 다시 4층으로 올라갔다. 대체 이 미궁은 몇 층까지 있는 건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탐색을 계속했다.
그러나 4층부터는 미지의 땅이라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그저 발로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는 위로 가는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내부가 넓고 복잡했다. 나는 바로 문이를 불러냈다. 문자마법 레벨 2를 사용하니 금세 다음 층으로 가는 출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문자마법으로 찾고, 그곳으로 이동하면 되니까. 진작에 이럴 걸 그랬다.
나는 5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5층은 문자마법을 사용해 다음 층으로 가는 입구를 검색해도 『없음』이라는 글자만 떴다.
“왜 이러는 거지?”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스터가 지나온 층에 5층으로 가는 출입구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물리적인 입구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위층으로 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직접 찾아봐야 한다는 거네?”
「그렇습니다.」
문이의 말에 납득한 나는 직접 5층을 탐색했다. 나는 감지능력과 환각마법을 사용해 최대한 싸움을 피했다. 저주받은 세계에서 질식할 정도로 경험한 만큼 이젠 전투라면 진절머리가 난다. 게다가 동물이든 몬스터든 사람이든 남을 상처 입히는 내 모습을 떠올리면 끔찍해진다.
이렇게 비교해 보니 확실히 알겠다. 그 미친 세계가 이상하리만치 위험했다는 사실을.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는 표현에는, 아무런 어폐도 없었던 거다.
5층은 제법 힘들었다. 문이를 통해 맵을 만들고, 맵에 설치된 마법을 전부 검색하고, 마법을 해석하고, 그래도 발견되지 않자 1층, 2층, 3층, 4층을 다시 돌아다니며 검색했다. 미로나 함정에 일부러 걸려 보기도 했다.
조사하다가 나는 또 한 번 사람이 사는 곳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층마다 사람이 있도록 설정한 게 아닌가 싶다. 그것도 몬스터와 화합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었다. 개중에는 몬스터와 사람의 혼혈도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땐 적의를 가지고 덤벼들어 싸워야 했다. 싸웠다기보다는, 적당히 공격을 막다가 도망쳤다. 같은 층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고, 이틀 동안 꼬박 출입구를 찾다가 귀찮아져서 그냥 천장을 뚫어 버릴까 고민했다.
‘이쯤 헤맸으면 충분하지 않나?’
그 상황이 다섯 번쯤 반복되었을 때 상대가 말을 걸어왔다. 단순히 위층으로 가고 싶을 뿐이라는 이야기를 하자 여자가 잠시 고민하더니 길을 안내해 줬다. 위층으로 가는 출입구는 평소에는 닫혀 있다. 그 출입구는 바로 어떤 몬스터의 배 속에 있고, 특별한 마력을 통해서만 위층과 연결된다고 한다. 혹은 죽였을 때도 열린다나. 윽, 난 그로테스크한 건 질색인데. 아니, 질색이었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나는 겨우 6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번 랭크 시험 내용은 ‘미궁 탈출’과 ‘인간 해방’이었다. 처음으로 시험을 보는 사람은 최하층에서 시작하지만, 처음이 아닌 사람은 갑자기 전투 장소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한다. 튜토리얼도 없다. 세계관에 대한 간략한 설정을 읽고, 바로 전투를 시작한다. 시험마다 다르지만 이번에는 그러했다. 설정된 몬스터의 레벨이 다를 경우도 있었다.
처음으로 시험을 치는 수험생을 제외한 사람은 대개 1시간이나 2시간 정도 만에 시험을 끝낸다. 그것은 S랭크 마법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1시간이라고 해도 가상 세계 속에서는 1주일이었다.
“김선아다!”
“김선아야! 최연소 S랭크 마법사!”
서울의 어느 랭크 시험장, 첫 시험자들이 시험을 보는 방으로 사람이 몰려왔다. 대개는 처음으로 시험을 보는 갓 성인이 된 마법사의 보호자나 지인이었다. 혹은 스타가 탄생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찾아온 매스컴 기자들도 있었다.
“빨리 끝내셨군요.”
자리에 서서 닫혀 있는 캡슐을 바라보는 김선아를 향해 박한수의 어머니인 이유영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는 당신도.”
“다른 사람과 비슷한 정도지요. 게임을 클리어하지는 못했습니다만.”
“나도 아직 한 번도 클리어한 적 없는걸. 우리 할머니 정도는 되어야 클리어할 수 있다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