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211
그렇게 해서, 나는 어쩌다 보니 제현 오빠와 대련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 결코 내 의지는 반영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현 오빠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거다. 나는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제현 오빠와 시선을 마주하며 곤란해했다. 심지어 구경꾼도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그러니까……상황이 왜 이렇게 됐지……?
‘시선 끄는 게 짜증 나서 하소연했던 건데 더 시선을 끌게 됐잖아!’
이 오빠가 정말? 나는 답답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상황인데도 친구들은 잘하라며 응원이나 하고 있다.
“은하야, 힘내! 이겨 버려!”
“어쭈, 민희 넌 날 응원해야 되는 거 아니냐?”
“은하야! 오빠 콧대를 눌러 버려!”
“동생이라는 게 정말.”
“은하야, 힘내!”
“저 녀석, 의외로 사고를 친다니까.”
“동감.”
심지어 성진이와 한수는 내 뒷담을 하고 있다. 내가 뭐! 내가 원한 게 아니라고!
“둘 다 파이팅!”
거기에 은희 언니와, 천호 오빠와, 헐, 스승님이랑 백한 선생님까지 와 있잖아! 이게 웬 생난리람. 주위 시선 때문에 차마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겠다.
‘이 오빠가 진짜. 왜 이렇게 일이 커진 거야. 아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누군가가 무대 뒤에서 소리쳤다.
“선배! 고위 마법사용 대련 시스템 가동했어요!”
“어. 고마워.”
“…….”
나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평소와는 달리 체육관 전체가 ‘무대’가 된다. 바닥을 발로 툭툭 찼다. 작게 심호흡을 한다. 눈을 감았다 뜨며 앞을 보았다. 정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제현 오빠의 표정도 평소와는 달리 날카로웠다. 나는 주먹을 한 번 쥐었다.
‘──어쩔 수 없지.’
이미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면 전력을 다한다.
속으로 초를 셌다. 하나, 둘, ……셋.
휙!
먼저 움직인 것은 제현 오빠였다. 제현 오빠는 나와는 달리 올라운더다. 근거리도, 중거리도, 원거리도 능숙하다. 순식간에 내 눈앞에 나타나서는 손을 휘두르며 위에서 아래로 어둠을 뿌렸다. 나는 손을 뻗어 그 마력을 ‘정화’했다.
“윽…….”
어둠이 무력하게 녹았다. 역시, 상성의 우위는 내가 점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우위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내 정화속성이 특별한 거니까. 나는 앞에 결계를 만들어 제현 오빠를 밀어냈다. 우리는 몇 번 공격을 교환했다. 마법이 큰 소리를 내며 맞부딪히며 주위로 마력이 휘몰아쳤다.
슥
“……!”
가벼운 준비 운동 같은 거였다. 이번에도 역시 제현 오빠가 먼저 움직였다.
제현 오빠의 마법은 사실 매우 단순하다. 어둠마법과 그림자마법을 손발처럼 움직인다. 그러나 그 범위는 해일만큼이나 넓고, 그만큼 강력하다. 하지만 원리는 그저 어둠을 움직여 공격한다, 그뿐인 것이다.
제현 오빠는 자신의 그림자에서 검을 뽑아내더니 크게 휘둘렀다. 어둠이 출렁이며 내게 달려왔다. 그러나 그건 결계에 막혀 사라졌다.
그것을 보며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마력을 많이 넣지 않았더라도, 마법 레벨은 A랭크 그대로다.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을 수 있다는 건…….
현실감이 나를 두드렸다. 나는 환각으로 씨앗을 만들었다. 간단히 이름 붙이자면, ‘어둠을 먹고 자라는 씨앗’이다. 녹색 씨앗을 주위에 뿌렸다.
제현 오빠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제현 오빠와 달리 나는 근접전에 능숙하지 않다. 나는 내가 있던 자리에 얼굴이 여러 방향으로 비치는 크리스털 덩어리를 만들어 냈다. 세워진 크리스털 벽은 직선으로 몸을 불리며 미로를 만들어 냈다.
“윽, 이건…….”
모습을 크리스털에 비친 잔영 안에 숨긴 채 하늘로 날아올랐다. 위에서 아래로, 마력을 뿌린다. 중력의 영향을 받은 마력이 거세게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제현 오빠가 똑바로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
눈이 마주친 순간, 제현 오빠가 쥔 어둠의 검에서 마력이 폭사했다. 길게 이어진, 파도 같은 마력이 내가 만든 크리스털 환각을 전부 부쉈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이 아니다. 내가 만든 크리스털 벽은 부서진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깨진 크리스털이 주위로 떠올랐다. 아까 전에 뿌렸던 씨앗이 어둠을 흡수해 갔다.
『어둠 반사!』
무작위 반사지만 내게는 피해가 오지 않는다. 저 마법은 환각, 동시에 내 마법이다. ‘내 마법으로 반사한 어둠이 나에게 영향을 줄 리 없다.’
쨍! 째쟁!
씨앗에서 싹이 트며 새로운 어둠을 만들어 냈다. 어둠이 크리스털에 반사되었다. 마치 레이저가 거울에 반사하는 것처럼 어둠이 지그재그로 꺾이며 제현 오빠를 공격했다. 어느새 아래가 온통 어둠으로 덮였다. 어둠 안에서 공간마법의 낌새가 느껴졌다.
‘궤도……는…….’
나는 흠칫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제현 오빠가 더 빨랐다.
“윽…!”
재빨리 뒤로 물러난 순간 제현 오빠가 한쪽 눈을 감고 어둠의 검을 내리쳤다. 그것과 동시에, 제현 오빠가 든 검이 새하얗게 변하며 사라졌다.
“……뭐?!”
“아…….”
몇 번 겪었던 일이기 때문에 나는 방금 제현 오빠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한쪽 눈을 감고 거리감을 무시한 채 내 그림자에 공격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나를 상대할 때는 무의미하다.
“그……제 주위를 지정해서 하는 공격은 잘 안 먹혀요. 어둠마법이면 더 그래요. 특히 그림자는……뭐랄까, 닿는 순간 사라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뭐?”
제현 오빠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냐……. 한 번도 통한 적 없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봐. 어떻게 안 통하는데?”
“음……제 주위로 마법 생성하려고 하잖아요? 제 바로 옆, 이 지점에 마법이 나타나도록 딱 설정하고, 생성하려고 하면……제 주변 마력은 제가 통제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마력의 제어권을 가져올 수 없고…….”
“…….”
“제 친구도 그림자마법 사용하거든요? 그림자도 일단 내 일부라서 그런가? 하여간 공격이 먹히지 않아요. 빛마법이라면 모를까 어둠마법이면 공격하면 통하지 않거나 정화되거나……. 조종하거나 물들이는 종류는 더욱 안 먹히고, 그나마 직접 공격하는 게 더 먹혀요.”
최인성이 몇 번이나 시도했다가 실패한 방법이다. 멍하니 있던 제현 오빠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니, 참 나, 그럼 공격 수단이 상당히 봉쇄되는 거잖아. 은하 너, 솔직히 싸우면서 다친 적 별로 없지?”
“없진……않은데…….”
확실히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많지 않았다. 눈에 띌 정도로 다쳤던 건 그 세계에서 싸웠을 때 정도다. 아, 작년에 B랭크 마법사와 싸웠던 것도 포함해야겠네. 하지만 결국 그때도 멍만 조금 들었을 뿐이었다. 복부를 당했는데 내상을 입지 않았고, 뺨을 주먹으로 맞았는데 턱뼈가 부러지거나 이가 부러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체질 변화로 육체가 엄청나게 튼튼해졌다. 앞으로는 더 다칠 일이 없겠지.
“킥킥……뭐야, 그게! 쩔잖아!”
제현 오빠가 갑자기 소리 내어 웃었다. 그야말로 배를 감싸고 시원하게 웃어 젖혔다. 당황하고 있는데 제현 오빠가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눈동자에서 순식간에 온기가 사라졌다.
주위로 수십 개가 넘는 창이 떠올랐다. 하나하나 무시 못 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품고 있다. 그것이 레이저 같은 속도로 나를 노렸다. 나는 나를 둘러싼 둥근 결계를 만들어 공격을 흡수해 똑같이 되돌렸다. 허공에서 창이 부딪히며 상쇄되었다.
결계 안에 흡수된 창 중에서 뭔가 색다른 느낌이 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 느낌이 무엇인지 눈치챈 나는 결계에서 재빨리 나갔다.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제현 오빠가 나타나 마법을 내질렀다. 나는 결계를 견고히 유지했다. 마법을 반사! 텔레포트 금지!
‘저긴 내 영역인데.’
내 ‘결계’ 안이다. 원한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소.
‘내 세계’──.
어둠이 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맴돌았다. 의도는 아니었지만 걸려들었다.
나는 세계를 조종했다.
결계는 내 세계였다. 아무리 작아 보여도 ‘세계’였다.
일단은, 그래, 보이는 것을 닫아 볼까. 밖에선 좁아 보여도 안에서는 끝없이 넓어 보이겠지.
“방심했군. 아니, 능력을 몰랐기 때문인가.”
스승님이 중얼거렸다.
“승패가 정해졌구나.”
“그러게.”
내 마법을 아는 사람들은 동의하고, 단편적으로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그 발언에 혼란스러워했다. 어둠을 매개로 할까? 정신 속으로 파고들자. 제현 오빠는 결계 안에 멍하니 서 있었다. 환각 속에서 내가 만들어 낸 괴물과 사투를 하느라 강한 마법을 수십 번이나 사용했지만, 그래 봤자 내 영역 안, 결계에는 금 하나 가지 않았다.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랭크 시험 결과로 비교했을 때, 마력은 제현 오빠가 더 많다. 마법 레벨은 내가 더 높다. 종합적인 실력은 비슷하다.
비슷한 실력이기에 영역 싸움은 중요하다. 내 영역에 들어온 순간부터 제현 오빠의 패배는 정해져 있었다.
약간 시간이 지나고, 나는 결계를 풀었다. 결계 밖에서 보였던 모습과는 달리 제현 오빠는 상당히 흐트러져 있었다. 환각을 진짜로 받아들인 것도 있고, 내 세계에서는 ‘현실’이기도 했다. 마력도 거의 다 소모해서 기진맥진이었다.
“헉……아, 진짜. 환각 종류란 건 중간부터 알았지만, 깨부술 수가 있어야지.”
“제 영역에 들어온 오빠가 잘못한 거예요.”
“단순한 방어 막인 줄 알았지. 하, 정말……네 마법은 한번 당하면 빠져나오기 힘들겠구나.”
맞다. 내 결계에 갇힌 순간 승기는 한없이 내게 기운다. 내 환각을 믿는 순간 내가 승리할 확률은 한없이 높아진다.
“아, 그러니까, 좀 더 제대로 맞붙은 다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 전에 저랑 제현 오빠는 성향이 전혀 다르잖아요. 오빠는 직접 공격, 저는 정신 공격.”
“우와. 전투에선 정신 공격이 제일 무섭다는 걸 알고 있는지 몰라.”
숨을 고르던 제현 오빠는 이내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머리카락이 땀에 푹 젖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랭크 시험에서 오류 따윈 없었다고. 싸워 보니까 더 확실히 알겠어. 네가 나랑 대등한 실력자라는 걸.”
“…….”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제현 오빠를 보았다. 아까 느꼈던 원망이 사르르 녹았다. 그러니까, 내 불안감을 덜어 주고 싶어서 나랑 대련을 하자고 했던 거구나. 그러고 보면 나는 동급생을 제외한 사람과는 별로 대련을 해 본 적이 없다. 친했음에도 불구하고 제현 오빠나 스승님과도 별로 대련을 한 적이 없었다. 해 봤다고 해도 어릴 적에 지도 대련을 했던 정도였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그 몇 년 사이에 나는 이만큼 성장했다. 새삼 생각해 보면 대단한 일이다. 내 재능이 뛰어나다는 건 부끄럽지만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제현 오…….”
내가 감격하며 제현 오빠를 부르려고 한 순간, 제현 오빠가 검지를 세웠다.
“그러니까 한 판 더.”
“……네?”
“한 판 더. 넌 마력 많이 남아 있잖아.”
제현 오빠의 눈동자가 단호하게 빛났다. 나는 당황했다. 아니, 이 오빠가 진짜?
“아니, 잠깐만요! 오빠는 마력도 다 떨어졌으면서…….”
“10분만 기…….”
“이게 놀고 있네.”
제현 오빠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민 선생님이 난입해 제현 오빠의 뒷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제현 오빠를 결계 밖으로 밀쳤다.
“으악! 민 선배!”
“이번엔 내 차례야.”
“네?”
나는 밀려난 제현 오빠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당황해서 민 선생님을 돌아보았다.
“은하는 잘 모를 수도 있겠는데, 우리 학교에 그런 전통이 있거든. 새로 랭크에 오르면 같은 랭크 사람들이랑 다 붙어 보는 거. 그렇게 해서 실력을 확인해 보는 거지. 학생들은 그런 거 잘 안 하지만……A랭크 마법사는 엄청 드물잖아? 그러니까 싸울 상대도 별로 없거든.”
“엥? 잠깐만…….”
그러고 보니 전에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민 선생님이 엄청난 싸움광이라는 거…….
“이번엔 만만치 않을걸? 나는 네 마법을 전부 알고 있지만, 은하는 내 마법을 거의 모르잖아? 아까와는 반대지.”
민 선생님은 어느새 손 위에 칼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민 선생님의 마법인 사철로 만든 칼이다. 민 선생님의 메인마법은 사철마법, 서브마법은 얼음! 하나하나 전투에 특화된 강력한 공격마법이다.
“자, 잠깐…….”
──만요, 라는 말을 잇기 전에, 주위가 사철 가루로 뒤덮였다. 저거 하나하나가 칼날이라고 보면 된다. 나는 오싹한 느낌을 받으며 뒤로 물러났다. 주위로 새하얀 서리가 깔렸다. 민 선생님이 빠른 속도로 내게 달려들었다.
‘최소한 눈에 안 띄는 곳에서 하자고요!’
나는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결계를 세웠다.
채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날 하루, 나는 제현 오빠와 민 선생님을 비롯해 학교에 있는 모든 A랭크 마법사를 상대해야 했다. 바야흐로 내가 학생들 사이에서 전설로 기억된 날이었다.
미친!!!
##35. 데뷔
우리는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정식으로 랭크를 보유한 마법사가 되었다. A랭크 마법사 자격증이자 신분증은 항상 지갑에 꽂고 다닌다.
학생 중 4분의 1이 고등학교에 올라오지 않고 빠져나갔다. 시험에서 걸러진 사람도 있었고, 바로 취직하겠다며 나간 사람도 있었다.
의무 교육은 중학교까지다. 고등학교 과정을 듣지 않고 바로 취직하는 사람도 많다. 빠져나간 숫자보다 조금 적게 새로운 입학생이 들어왔다. 대부분 D랭크였고, 2명은 C랭크라고 들었다.
친구들은 바로 취직하지 않고 전부 고등학교에 올라왔다. 사실 소영이와 인성이, 성진이는 바로 취직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고등학교부터는 수업료를 내야 한다. 기숙사비도 따로 필요하다. 유란에서도 고등학생 때부터는 지원을 하지 않겠다 했다고 들었다.
“집은 유란에 반납했어. 이제 방학 때도 기숙사 생활이야. 웬만한 월세방보다 우리 학교 기숙사가 훨씬 싸.”
“하지만 수업료도 들잖아. 수업료는 꽤 비싸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 여기에선 실습도 찾기 쉽고 일 알선도 해 주잖아. 기왕 고랭크 마법사가 됐으니 배울 만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고등학교도 졸업할 생각이야.”
하긴, 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소영이는 C랭크 마법사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이다. 성진이는 대장장이 일과 실습을 병행할 모양이고, 인성이는 IT 도구 개발 쪽 일을 계속 알아볼 생각이라나.
“사실 난 여기에 취직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
“그래?”
“그래. 대현이 IT 개발에선 유명하잖아. 사실 나……대현의 개발자인 이백한 씨를 동경하고 있거든.”
“엥? 쌤을?”
민희가 당황했다. 나도 조금 놀랐지만 인성이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대충 알 것 같았다. 백한 선생님은 한국에서 유명한 개발자다. 인성이에 이어 또 한 명이 놀라운 발언을 했다.
“나는 대학까지 갈 건데. 박사 학위 딸 거야.”
바로 한수! 식물 연구 학자가 되고 싶다더라. 대학은 교사, 의사, 박사, 하여간 선생이라는 말을 듣는 직업을 목표로 정한 사람들이 졸업하는 곳이다. 그러니 현호도 필수로 가야 한다.
그리하여 각자의 꿈을 품에 안고 우리는 전원 무사히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에 올라왔다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나는 장편 소설을 준비하느라 한동안 책을 내지 않았고, 한동안 쉴 수밖에 없었던 장인 일을 다시 시작했다. 복귀하면서 인터넷 매장에 아이템을 잔뜩 몰아서 전시했었는데, 그게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전부 팔렸다는 게 참 웃지 못할 이야기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며 나는 제대로 연기를 배워 보기로 했다. 환각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하려면 어느 정도 연기력이 필요하다. 환각마법은 어쨌거나 남의 눈을 속이는 마법이다. 거짓을 진실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연기력이 필요했다. 그걸 위해 화술도 배우기로 했다. 뭐어, 이걸 배운다고 성격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연기를 할 때 다른 역할로서 발휘할 정도로는 몸에 익힐 수 있지 않을까.
평범한 하루하루였다.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 하루하루였다.
공식적으로 A랭크 마법사가 된 후 내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먼저, 제어 장치를 차고 다니게 되었다.
A랭크 마법사부터는 제어 장치를 꼭 하나씩 하고 다녀야 한다. 예전에는 A랭크 마법사라도 마법의 위험성이나 마력 제어능력을 따져 제어 장치 착용 여부가 정해졌으나, 마법사의 마법 정보 보호나 위험성 판단 여부의 애매함 때문에 재작년 즈음에 법이 개정되었다.
하긴, 어차피 난 어느 법이 적용되든 정신마법 때문에 착용 대상이었을 테지만.
몸에 걸치자마자 느껴지는 그 위화감이라니. 그것에 익숙해지느라 한동안 고생해야 했다. 그에 비해 이성진은 쉽게 적응하더라. 이 녀석은 참…….
그리고 기숙사 편지함에 수백 통에 달하는 편지가 도착했다. 대개는 기사로 싣고 싶다는 인터뷰 요청이었다. 의뢰나 스카우트 제의도 많았다. 일단은 전부 읽고 있다.
인터뷰 요청 기사는 죄다 퇴짜 답장을 돌려주고, 전투 의뢰는 전투 마법사가 아니라며 거절하고, 스카우트 제의도 이미 직업이 있다며 거절했다. 의뢰 요청은 거짓일 경우가 많았으며, 시답잖은 것일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여태까지는 죄다 안 맞는다며 거절해 왔다.
애초에 나는 소설가 겸 장인이란 말이야. 소설가한테 일러스트를 그리라고 하면 되나? 유리 공예가에게 도자기를 만들라고 하면 잘 만들어? A랭크라고 무조건 전투 마법사라고 생각하는 건가? 정말이지 시답잖았다.
가끔 씩씩대는 나에게 성진은 제법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짜증 나면 말해. 저주 걸어 줄게.”
“…….”
됐거든, 이놈아. 너는 너무 극단적이라서 탈이야.
다행히 그뿐이었다. 어딜 가든 주목받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그쳤다. 쉬는 시간에 교실 밖에 우글우글 몰려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건 작년 겨울 방학을 기점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나름 평온히 학교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짜증 나긴 짜증 나. 거절해도 거절해도 자꾸 온단 말이야.”
또 하나 좋은 일이 있었다. 고등학교는 과에 따라 반이 나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성진이와 인하랑 같은 반이 되었다.
“특히 인터뷰. 아니, 싫다고 하는데 왜 자꾸 오냐고. 뇌물까지 오길래 짜증 나서 좀 극단적으로 거절했는데도 계속 오더라.”
“극단적이라니? 어떻게 했는데?”
인하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나는 스프링 노트 한 장을 찢어 보여 줬다.
“자, 이게 인터뷰 요청 편지야.”
“응.”
“여기에 이렇게 쓰고.”
나는 편지 위에 『안 하겠다고요. 작작 해라. 신고한다.』라고 썼다. 매우 거친 글씨로, 매우 건방지게.
인하가 잠시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요청 편지를 쫙쫙 찢었다. 한 10갈래 정도로, 큼직하게.
“여기에 환각을 거는 거지.”
나는 찢어진 편지에 환각을 걸어 평소와 다름없이 보이게 만들었다.
“응. 그래서?”
“겉보기엔 그냥 답장이 온 것 같지?”
“응.”
“읽으려고 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찢어지는 거야. 그리고.”
인하가 내용을 읽으려고 한 순간, 편지가 갈기갈기 찢겨 바닥으로 흩날렸다. 위에 글자만 떠올랐다.
『안 하겠다고요. 작작 해라. 신고한다.』
“…….”
인하가 멍하니 그걸 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열받겠다.”
“열받으라고 한 거지.”
“그래서? 그래도 또 왔다며.”
“뇌물로 신고했지. 이런 것도 뇌물로 치는지는 모르겠지만, 꼭 독점 인터뷰 하고 싶다고 비싼 물건을 이것저것 보내왔거든. 아, 당연히 다 반납했어.”
어쨌거나 평판은 깎였을 테니 나름 통쾌하다면 통쾌하다. 성진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귀찮게 하면 실력 행사라도 해라. 어차피 A랭크 마법사는 그 정도로는 벌금도 안 물거든.”
“난 그 법 별론데.”
“어쩔 수 없잖아. A랭크 마법사를 잡아 가둘 수 있는 마법사가 얼마나 되냐고.”
그렇다. 국가도 놔두고 싶어서 놔두는 게 아니다. 심각한 범죄 상황이 발생하면 본부의 S랭크 마법사가 나서고, 그게 아니어도 A랭크 마법사나 S랭크 마법사에게 협력을 요청하기도 한다. A랭크 마법사는 한 나라에 100명을 넘기는 일이 별로 없는 최상위 마법사. 좋아서 면죄부를 주는 게 아니다. 규제하기 벅차니까 면죄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 게 아니라도 이 세계의 법은 전투에 관해선 느슨한 면모가 있다. 힘이 흘러넘치는 세계는 그렇게 되기 마련인가 보다.
현재 나는 스토커 취급 당해도 쌀 정도로 끈질긴 상대에게 인터뷰 요청을 받고 있다. 그 상대는 몇 번 거절했음에도 뇌물까지 보내며 계속 달라붙어 오고 있다. 내가 보복을 하기 위해 기물 파손을 하거나 상해를 입혀도 그건 합법이다. 정당방위다. 내가 고위 마법사이기 때문에.
“성진이 넌 어떻게 처리하고 있어?”
“아……일단은 무시했는데, 계속되니까 좀 짜증 나더라고. 그래서 뉴스랑 신문에 올렸어.”
“……올렸어? 뭘?”
“이 이상 귀찮게 하면 테러하러 가겠다고.”
“…….”
턱, 나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미치겠다, 정말. 여기에 진짜로 극단적인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까 싹 없어졌어. 너도 해 줄까?”
“솔깃하긴 한데……됐다. 언젠간 지치겠지.”
“그렇다고 봐주진 마라.”
“음……무슨 소린지는 알겠어.”
도가 지나치면 직접 나서야겠지. 나는 손을 쥐었다 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A랭크가 된 뒤, 내 일상은 많이 변했다.
그때 우리 이야기를 들으며 침묵하고 있던 인하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대회가 열린대.”
다소 뜬금없는 화제였다. 나는 인하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흘끔 보았다. 인터넷 서핑 중이었나 보다.
“대회? 무슨 대회?”
“고등학생 대상 마법사 토너먼트 대회!”
“…….”
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런 게 있어?
그러나 곧 정신을 다잡았다. 있겠지……그야 있겠지. 전투 실력을 중요시하는 이 세계에 설마 대회 하나 없겠나.
“토너먼트라면, 역시 싸워야겠네?”
“응. 토너먼트란 말 그대로 이긴 사람이 위로 올라가.”
“흐응…….”
나는 인하의 상기된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나갈 거야?”
“나갈 거야. 오늘부터 참가 신청 받는대. 대회는 여름 방학에 열려.”
“힘내. 확 우승해 버려.”
“고마워!”
인하는 신이 난 기색으로 대회 일정을 살폈다. 그러더니 곧 다른 친구들에게도 연락을 했다. 결과 인하와 민희, 소영이, 인성이까지 대회에 나가기로 했다.
“넌 안 나가?”
“내가 나가면 반칙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