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218
우리는 이해했다. A랭크까지 섭외한 건 조금 오버 같지만. 남자는 금방 본론에 들어갔다.
“잠시 후, 8시 30분부터 예선전이 시작됩니다. 예선전은 총 15조로, 본선에 진출하는 것은 30명입니다. 한 조에서 두 명씩 진출하는 셈이지요.”
“예선 종목은?”
“총 세 가지입니다. 이번에는 참가자가 만 명이 넘거든요. 최연소 A랭크의 효과가 클 겁니다. 혹시라도 나올까 기대했던 거겠죠.”
“이런 대회에 A랭크가 나오면 반칙 아냐?”
“다행히 두 분 다 참가 신청을 할 생각은 없는 것 같더군요. 대신 협조를 부탁드렸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한번 나를 향해, 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첫 번째 예선은 기초 체력 측정입니다. 마력 측정을 하고, 그다음으로 힘을 측정하며, 마지막으로 기계병과 대련합니다. 그 결과에 따라 반이 걸러집니다.”
“반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나는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두 번째 예선은 단체전입니다. 링 밖으로 나가거나 기절하면 탈락하는 조건이죠. 링 하나당 100명씩 세워 5명이 남을 때까지 계속합니다.”
“난투전이라. 재미있는걸?”
공선영이 손바닥에 주먹을 치며 합장 자세를 취했다.
“세 번째 예선은 미로 던전입니다. 2시간 동안, 총 30명이 남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대회 참가자들끼리는 싸우지 못하는 규칙입니다.”
예선전은 대전이 적구나. 토너먼트전인 본선에서 제대로 싸우라는 걸까?
“이 대회, 예선 무조건 통과 조건이 있지 않았어? 시드 말이야.”
“네. 이번에도 예외 없이 적용됩니다. C랭크 이상은 전부 예선전을 치를 필요 없이 본선에 진출하며, B랭크는 시드로서 2회전부터 시합을 하게 됩니다.”
“안 그러면 기가 죽지.”
“그 말대로입니다.”
어라, 그러면 친구들은 다 예선전은 치르지 않겠네?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확실히 친구들한테 예선전은 시간 낭비다. 괜히 떨어지는 사람이 늘어날 뿐이다.
“여러분은 이곳에서 예선전 실시간 영상을 보시면서 맘에 걸리거나 심판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될 경우 이의를 제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으……지루하겠네.”
“하하. 다 필요한 일입니다.”
“어쩔 수 없지.”
예선전이 시작하기까지 아직 30분 이상 남았다. 팀장님이 커피와 간식을 가지고 왔다. 우리 주위로 모니터 영상이 잔뜩 떠올랐다. 이렇게 한꺼번에 보면 확인하지 못하고 넘기는 일이 생길 텐데. 예선전이니까 괜찮다는 건가. 아니, 보아하니 예선전 장소에 심판이 많이 대기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도넛을 포크로 잘랐다.
“너랑 같은 최연소 A랭크라는 이성진, 그 녀석 이번에 세계 랭킹 500위 안에 들었잖아. 어때, 강해?”
“네, 네? 그야 그렇죠…….”
멍하니 모니터를 보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가 질문했다. 나는 부담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얼마나 강한데?”
“엄……걔랑 저랑 실력 차가 많이 나서…….”
“아……확실히 세 단계나 차이 났지?”
“네, 뭐…….”
“엄청 잘생겼던데 성격은 어때? 나는 TV에서 얼굴 보고 그게 사람 얼굴인가 싶었어. 진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잘생겼잖아. 그 옆에 있던 B랭크 여자도 엄청 예쁘던데…….”
“네. 예쁘고 잘생겼죠.”
인정, 인하랑 성진이는 정말 넘사벽으로 잘생겼고 예쁘다.
남 이야기 하는 것처럼 말하자 그녀가 살풋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 원하는 반응이 아니었나 보다.
“그 남자 말인데, 너랑 파트너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진짜야?”
“아니요.”
“흐음…….”
살가웠던 눈동자가 조금 냉랭해졌다. 이 사람, 혹시 성진이한테 관심이 있나?
‘무리도 아니지. 직접 만나면 정떨어지겠지만.’
최연소 A랭크에, 심지어 잘생겼다. 할리퀸 로맨스를 꿈꾸는 여자들에게는 왕자님 같은 대상이다. 그놈의 싸가지 없는 성격만 아니라면.
그 녀석을 망가뜨린 게 나이니, 싸가지 없다고 투덜거릴 수만은 없지만서도.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데 머릿속에 염화가 전해져 왔다.
「그 녀석 아가씨의 남친 아니었어? 밖에서는 모르는 척하고 다니는 거야?」
형일 아저씨였다. 나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남친 아니에요. 저번에도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은데요.」
「진짜로~?」
「그럼 진짜죠.」
언젠가 여기 있는 나를 돌아봐 주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그건 지금은 아니다. 형일 아저씨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흘끔거렸다. 거참, 진짜로 아니라니까.
잡담을 나누는 동안 예선전 시작 시간이 되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회장에 몰려 있었다. 예선전은 주어진 번호대로 15곳에서 동시에 시작된다. 첫 관문은 마력 측정이었다. 우리는 간식을 먹으며 예선전을 주시했다.
“혹시 눈에 띄는 사람 있어?”
“글쎄.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르지.”
“앗, 우리 학교 애다.”
“누군지 알아?”
“네. 가끔 얘기하는 아이예요.”
우리 학교 학생이라면 예선전을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서도, 사람이 저렇게 많으니 확신하기 어렵다. D랭크 중상위 30여 명으로 걸러질 것이다.
형일 아저씨가 내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그 외에는 눈에 띄는 사람 없어? 이 사람이 이길 것 같다든가.”
“TV 너머로 그걸 어떻게 알아요?”
공선영이 어이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흐음, 나는 화면을 이리저리 쭉 훑었다. 거의 비슷비슷……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으음……아, 저 사람은 통과할 것 같아요.”
지나가는 사람 중에 조금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아직 마력 측정을 하기 전이었다.
“왜?”
“척 봐도 마력이 많아 보여요.”
시야에 페일 그린의 마력이 의기양양한 기세로 흩어진다.
“뭐? TV 너머로 마력이 많은 걸 어떻게 알아?”
“아…….”
공선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조금 당황하여 고개를 숙였다. 맞다. 감지계란 걸 무심코 드러내 버렸다. 평소 대화하는 사람은 다들 감지계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실수했다. 형일 아저씨가 말을 걸어서, 진짜 무심코…….
흘끗 형일 아저씨를 바라보자 형일 아저씨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도 내 능력을 전부는 모른다. 나는 소심하게 대답했다.
“그냥 감이에요.”
“뭐야 그게.”
형일 아저씨가 다시 염화를 걸어왔다.
「혹시 아가씨, TV 너머로도 보여?」
「사실, 네…….」
「‘시각’이라서 그런가? 하진이는 TV 너머로는 못 느끼거든.」
아, 그건 그렇겠다. 나는 마력의 색이 보이는 거지만, 그는 앞에 있는 존재를 촉각으로 감지해 느끼는 거니까.
‘아니, 잠깐. 저건 보통 TV잖아. 내가 영상을 찍고 있는 것도 아니고……. 혹시 TV 너머로도 볼 수 있다는 건……대단한 건가?’
그냥 평범하게 생각했던 능력이 의외의 부분에서 대단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사이 내가 찍었던 그 사람은 여태까지 중에 두 번째 성적으로 마력 측정을 통과했다.
“헐…….”
“역시 은하 아가씨는 감이 좋다니까!”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TV를 계속 살폈다. 옆에서 왠지 미심쩍은 시선이 느껴졌다.
약 2시간에 걸쳐 마력 측정이 끝났다. 부정을 저지른 사람은 우리가 지적하기 전에 심판에게 끌려 나갔다.
“예선전 오늘 다 할 거야?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은데.”
“시간을 보고 적절히 끊을 예정입니다.”
“그렇군.”
제1예선전 두 번째 측정은 힘 측정이다. 시험 내용은 간단하다. 어떤 마법을 써도 좋으니까 저 단단한 합금속에 상처를 주면 된다. 기회는 세 번, 그 안에 상처를 남겨야 한다.
“저건 강도가 어느 정도야?”
“1000 정도의 마력으론 흠집 하나 안 납니다. 마법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지만요.”
“흐음…….”
흐린 인상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 측정에도 2시간 이상 걸렸다. 이번에는 우리의 판단이 필요한 일이 몇 번 있었다. 심판이 실수를 할 때마다 제지했다. 참가자들의 마법으로 인해 생겨난 수많은 흠집 사이로 또 하나의 흠집이 생겼는지 안 생겼는지를 판단하는 건 제법 어려운 일이었다.
“저거, 비싸지 않습니까?”
“괜찮습니다. 나중에 소재로 팔면 돼요.”
이렇게 보고 있자니 예선전을 세 번이 아니라 다섯 번 치르는 것 같다. 2번째 측정 후에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우리는 기지개를 켜며 회의실에서 나섰다.
“뭐 먹을까?”
“근처에 유명한 한식집이 있습니다만, 그리로 가시겠습니까?”
“응? 난 좋아.”
“저도 괜찮아요.”
“그럼 그렇게 합시다.”
밥 먹는 시간이 가장 즐거웠다. 소고기 정식을 시키고 집중해서 먹었다. 심사 위원이라, 처음 해 보는 일이고, 조금은 부담스럽지만, 일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어색하지는 않다. 게다가 아는 사람도 있으니까.
식사를 마친 후에는 또다시 예선전에 매달렸다.
“오늘은 1회전만 하고 끝내는 게 어때? 내일이나 모레 2, 3회전을 같이 하면 되겠네.”
“아무래도 그게 좋겠군요.”
기계병과의 전투에선 지는 사람도 있고, 시간 안에 승부를 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이기는 사람도 있었다. 이기는 사람은 무조건 통과, 무승부를 내는 사람은 대전 내용에 따라 통과, 지는 사람은 불합격이다.
대련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4시간이나 걸렸다. 우리는 확실한 사람은 내버려 두고 애매한 사람을 검토했다. 애매한 사람만 500명이 넘었다. 적당히 반 정도는 떨어뜨리고 반 정도는 합격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1회 예선에 통과한 사람 명단이 벽보로 붙었다.
“으윽, 뻐근해.”
“으아, 질린다…….”
“덥군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네요…….”
“아, 먹고 싶으시다면 사 드릴…….”
“괘, 괜찮아요.”
무심코 꺼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나는 양복 남자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럼 다음 예선전 때 다시 만나자.”
첫 번째 예선은 그렇게 끝났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이번엔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퍼즐 조각을 찾는 속도가 너무 느려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눈 결과 그럴듯한 방법을 찾은 것이다. 이번에도 성진의 도움이 컸다. 딱딱하고 냉정한 태도를 취하면서 사실 나보다 더 상상력이 좋은 것 같다. 그게 아니면 경험으로 얻은 지식일까.
꿈의 ‘위’로 간다. 지구 위에서 보면 사람은 보이지 않고, 은하 속에서 지구는 너무도 작다.
꿈속 세계를 그렇게 만든다.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나, 아득히 위에서 보면 도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멀리에서 보면 은하나 별이 손톱만 한 크기로 보이는 것처럼 꿈속 세계 한 지역을 한눈에 보이게 조정하는 거다. 아니면 그런 식으로 투영하여 내 마법 범위에 두든가.
정신의 문과 길이 이어진 꿈속 세계는 은하와 꼭 닮아 있었다. 또한 은하만큼이나 많이 움직이며 변화했다.
그런 다음 문이를 부른다. 시야를 크게 뜨며 정상에서 한눈에 보이는 꿈속 도시 안에서 흩어진 감정의 조각을 ‘추적’하는 것이다.
「1차 검색. 한소이의 것에 해당하는 정신 조각을 16개 찾았습니다. 2차 검색. 5개를 추가로 찾았습니다. 3차 검색……없습니다. 4차……1개 더 찾았습니다. 5차……6차……. 마스터, 한소이의 것은 아니나 다른 사람의 정신 조각을 117개 찾았습니다.」
“뭐?!”
「그중 42개는 이전에 한소이의 조각과 함께 있었던 조각의 주인 10명의 것입니다.」
생각도 못 했던 발견이었다. 찾은 이상 돌려주는 게……도리란 거겠지?
「탐색할 수 없었던 장소 및 꿈이 10곳 존재합니다.」
“그거 지도에 표시해 줘.”
「알겠습니다, 마스터.」
옆에서 보고 있던 성진이 한발 나서며 사진으로 보는 은하처럼 작아진 꿈속 세계를 응시했다.
“문자마법 레벨 2, 생각보다 유용하네.”
“응. 정말 좋은 아이야. 문이, 조각을 여기로.”
「명령 따릅니다.」
여러 장소로 퍼져 있던 조각이 단숨에 우리 앞으로 올라왔다. 22개와 117개, 한곳에 모이자 조각들이 제멋대로 합쳐졌다. 이제 한소이의 퍼즐 조각은 15개, 다른 모르는 사람들의 조각은 82개다.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도리라는 생각에 언령을 부여했다. 사실 돌아간다고 해도 제대로 정신 속에 스며들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여태까지 조각을 돌려주려 찾아간 사람 중에 한소이처럼 망가져 정신을 흡수조차 못 하는 상태의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까 괜찮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이걸 일일이 다 돌려주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나중에 상태를 봐 보지 뭐.’
그래도 혹시 몰라 주인의 정신에 잘 스며들도록 마법을 걸었다. 조각이 흩어지는 걸 확인한 나는 바로 다음 구역을 수색했다.
이번 의뢰는 생각보다 지친다. 흩어진 감정 조각을 찾는 데도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든다.
밀려드는 피곤함에 나는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인상만 찌푸렸다.
“아……피곤해.”
그러나 피곤하다고 해서 멍하니 누워 있을 수만은 없다. 그도 그럴 게 오늘은 대회 본선 날이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샤워를 하고 준비했다. 오늘은 눈에 띄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 공식적인 자리니 웬만하면 정장을 입고 오라고 하더라.
아직 앳된 얼굴에 어울릴지 어떨지는 둘째 치고 일에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었다. 여름이니 재킷은 조금 답답해 보이겠지. 뒤적거리다가 하얀 줄무늬 셔츠를 입었다. 그 아래로는 검고 짧은 치마를 입었다. 허벅지가 드러날 정도니 짧은 편이다.
치마라니, 교복 치마가 아닌 평범한 치마라니. 엄청나게 오랜만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치마가 이 옷에 제일 어울린다.
“조금 창피하네.”
옷을 입은 뒤 화장을 했다. 아직 학생이란 것 때문에 조금 껄끄러웠지만 일로 가는 것이니 어느 정도 화장을 하는 게 예의겠지. 비비와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입술에 틴트를 발랐다. 오랜만에 하는 화장은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았다.
“후우…….”
머리는 빗어 하나로 묶었다. 핀을 사용해서 고정해 일자로 퍼지게 했다. 맘에 드는 피어스를 하고, 반지 목걸이는 깃 안에 집어넣고, 셔츠 소매는 고정 단추를 사용해서 반쯤 접었다. 그렇게 하자 여름 정장 패션이 완성되었다.
나는 손가방을 들고 장롱에서 원피스와 어울리는 검은 굽 샌들을 꺼내 신었다. 이러니까 진짜 직장인 같잖아?
나는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은하야, 준비 끝났니? 방금 친구가 왔어.”
“벌써 왔어? 응, 준비 끝났어.”
친구들은 대회에 나가거나 관람석에 자리를 잡아야 하니까 따로 가지만, 성진이는 관계자니 같이 가기로 했다. 둘이서 걷는 건 오랜만이다. 어차피 텔레포트 할 테니 같이 걷는 건 잠깐이겠지만 역시 조금은 가슴이 설렜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세상에……우리 은하 너무 예쁘다!”
나를 본 엄마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나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정장을 입고 오라고 하더라고. 교복 말고 치마를 입는 건 오랜만이라 어색하네. 어때? 잘 어울려?”
“그럼~. 우리 은하도 이제 다 컸네. 어휴…….”
엄마가 감탄한 듯한, 혹은 아쉬운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생긋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안녕, 오랜만이다?”
방학식 이후로 한동안 안 만났으니 나름 오랜만이다. 소파에 앉은 이성진이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엷게 웃었다.
“그래. 잘 어울리네.”
“이야~.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았어?”
“가끔은.”
성진은 정장은 아니더라도 단정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반팔 셔츠 위에 베이지색 카디건을 걸친, 튀지 않는 복장이다. 그래 봤자 얼굴 때문에 확 튀지만.
칭찬을 하는 것이 드문 녀석이다 보니 조금 설렜다. 꿈 때문에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 괜찮아졌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어울린다는 칭찬을 받았는데, 아무렴.
“슬슬 가자.”
“그러자. 엄마, 다녀올게요!”
“그래. 이따가 선아랑 같이 대회 보러 갈게.”
“응!”
나는 손을 흔들며 집을 나왔다.
우리는 대문 밖으로 나간 뒤 곧바로 텔레포트 했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역시 걷는다고 해도 고작 1분 정도다.
앞을 보자 커다란 돔 건물이 보였다. 천장을 여닫을 수 있다. 오늘은 더워도 하늘이 맑으니 굳이 돔을 닫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침은 먹었냐?”
“아니. 일어나서 바로 준비하고 나온 거야.”
“그럼 뭐라도 먹고 가자.”
“너도 안 먹었어?”
“어.”
“이 시간에 연 곳이 있으려나…….”
나는 흘끔 시간을 확인했다. 끄응, 집합 시간까지 15분밖에 안 남았는데.
“결계 치면 되잖아.”
“아……하긴.”
나에게는 짧은 시간을 긴 시간으로 만들 수 있는 마법이 있다. 결계로 시간을 조정하면 된다. 10분도 안 되는 시간을 우리 체감 시간으로 30분에서 1시간까지 늘릴 수 있다.
우리는 주위를 잠시 둘러보다가 24시간 햄버거집을 발견했다. 가게에 들어가 먹고 싶은 것을 시키고 느긋하게 먹었다. 바깥 풍경이 아주 느리게 지나갔다.
“하, 배가 차니까 살 것 같다.”
“그렇게 먹어도 되냐? 정장이잖아.”
“괜찮음. 넉넉한 옷이거든. 허리띠만 다시 졸라매면 돼.”
성진은 번외 관계자라 여태까지는 딱히 대회에 관여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래도 시합 시작 전에 대회 관계자끼리 집합하여 인사를 나눌 때는 그도 참석해야 한다.
우리는 대회장 안으로 들어가 회의실을 찾아갔다. 제1회의실로 향하던 나는 어떤 것이 떠올라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나 그때 이 녀석이랑 친하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했는데.’
예리한 시선으로 나를 탐색하던 공선영이 떠올랐다. 느낌이 어쩐지 얘 팬인 것 같던데. 같이 들어가면 노려보려나? 고민하며 걸어가는데 화장실 팻말이 보였다. 앗차, 깜빡할 뻔했다. 나는 성진을 먼저 보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들렀다 갈게. 먼저 가 있어.”
“그래? 알았어.”
여자 화장실로 들어간 나는 거울을 잠시 노려보았다. 역시, 음식을 먹는 동안 틴트가 지워졌다. 이게 그렇게 좋은 화장품은 아니거든. 마법이라도 걸어 둘걸.
나는 주머니에서 틴트를 꺼내 입술에 톡톡 바른 다음 휴지로 슬며시 닦았다. 그 후 화장을 유지하기 위해 얼굴에 마법을 걸었다. 좋아, 오케이.
회의실에 들어가니 성진이 녀석은 사람들의 주목이란 주목을 다 받고 있었다. 내가 들어온 것을 눈치챈 성진이 고개를 들기보다 먼저 형일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걸었다.
“은하 아가씨, 안녕! 와우! 예쁘게 하고 왔는데?”
“음……나름 세미 정장으로 꾸민 건데……어때요? 이런 옷은 오랜만이라…….”
“잘 어울려, 예뻐.”
나는 고개를 들고 형일 아저씨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긴 녹색 머리카락을 가볍게 묶고 흰색 셔츠 위에 세로줄 무늬 재킷을 걸친 형일 아저씨는 제법 멋있었다. 친구들 때문에 눈이 높아졌지만 형일 아저씨도 훈남이다.
“형일 아저씨도 잘 어울려요. 역시 외모가 되니까 정장을 입어도 멋있네요.”
“고마워, 아가씨.”
나와 친한 사람은 이 회장에 형일 아저씨와 성진이밖에 없다. 고개를 돌려 성진이를 찾으려는데 어깨에 팔이 얹혔다.
“누구?”
성진이 약간 뚱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이마가 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다. 손이 근질거리는 느낌을 참으며 태연히 대답했다.
“저번에 실종 사건 때 나랑 동료였던 분이야. 너도 만났었잖아.”
“아, 그…….”
성진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내 어깨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채 형일 아저씨를 올려다보았다. 무엇을 느꼈는지 형일 아저씨가 가식적인 웃음을 띄웠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팔꿈치로 그 녀석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보다 무거워. 떨어져.”
“윽……아프거든?”
“시꺼.”
나는 작게 으름장을 놓았다. 잘못하면 얼굴이 붉어질 것 같다. 이 녀석, 은근히 스킨십이 많단 말이야. 아무리 친구라도 남녀 사이에 쉽게 손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 한다. 나는 어깨를 탈탈 털었다. 그러자 이번엔 팔로 내 목을 휘감았다. 힘에 끌려간 탓에 녀석의 어깨가 머리에 닿았다.
“어쭈. 지금 내가 더럽다 이거냐?”
“아 쫌, 적당히 하라고.”
양손으로 성진의 팔을 잡고 힘을 줬지만 아무래도 이 녀석의 힘은 이길 수 없는가 보다. 결국 나는 포기하고 팔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
“여름이라 습해서 기분 나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