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237
몇 번 눈을 깜빡이다 보니 알 것 같았다. 전생에 눈이 나빠 앞이 잘 보이지 않던 그 감각이다. 시력이 나빠진 거다.
“저기, 저는 그러니까…….”
“수련회 마지막에 뭔가 하다가 쓰러졌다는 걸로 알고 있어. 제현이가 그렇게 당황하는 건 또 오랜만에 봤네.”
“아, 네. 쓰러졌구나.”
“무리했니?”
“잘 모르겠어요…….”
마력을 한계까지 쥐어 짜낸 것도 아니었으며, 이제 마력 고갈 정도로는 정신을 잃지 않는다. 그럼 내가 정신을 잃은 이유는 눈의 과부하 때문이겠지.
“과부하는 푹 쉬면 나아. 눈이 뜨거우면 냉찜질해 주고, 차가우면 온찜질해 주고. 그래도 아프면 병원에 가든지 나를 찾아오든지 하렴. 마력 보충만 잘하면 금방 나을 거야.”
“지금 시력이 나빠진 것 같은데 이것도 나을까요?”
“나을 거야. 빠르면 하루, 느리면 일주일 걸리려나?”
그럼 난 회복 속도가 빠르니 며칠 안에 낫겠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제가 정신을 잃고 얼마나 지났나요?”
“여기 온 지는 한 1시간 됐어.”
나는 재빨리 시간을 확인했다. 으음, 시차를 딱히 신경 쓰지 않아서 몇 시간 지난 건지 잘 모르겠네.
“아, 조금 기다려. 제현이랑 정현 선생님 온단다. 양호실에 계속 죽치고 있는 거 짜증 나서 내쫓았었거든.”
“아하…….”
잠시 후 사람들이 달려왔다. 내가 쓰러진 걸 보고 놀랐을 친구들, 예슬이나 시하, 인솔자였던 강정현 선생님과 제현 오빠, 은희 언니와 천호 오빠도 같이 왔다.
나는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과부하가 걸렸을 뿐이라는 걸 알려 주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안도했다.
“과부하라.”
“응. 엄청 집중했거든. 특수능력으로 과부하 걸리기는 처음이야.”
“어라?”
그때 현호가 갑자기 내 양 뺨을 손으로 잡더니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래?”
“은하 눈! 색깔 옅어졌어!”
“뭐?!”
거기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다. 나도 당황하며 거울을 봤다. 가까이 가서 보니 정말이다. 갈색이었던 눈 색깔이 어느새 옅은 은갈색이 되어 있다.
“우와, 이게 뭐야.”
“눈 색 변했어?”
양호 선생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색은 안 돌아올 수도 있다. 마력 색에 물든 걸 테니까.”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그래, 한번 변한 머리 색이 돌아온 적은 없다. 사실 눈 색도 어느 순간부터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그게 이렇게 갑자기 옅어질 줄은 또 생각도 못 했다.
“으음……괜찮으려나? 생각보다 색이 예쁘기도 하고.”
“잠깐, 은하야, 너 정말 괜찮아?”
“어디어디, 나도 볼래. 우와, 정말이네. 예쁘다.”
이미 색이 변해 버렸는데 어쩔 수 있나. 나는 그냥 적응하기로 했다. 걱정하는 사람, 감탄하는 사람, 불만스러워하는 사람 등 가지각색이었다. 강정현 선생님은 미안해하는 쪽이었다.
“미안하다. 무리한 부탁을 해서.”
“아, 아니요. 괜찮아요. 그보다 잘 정화됐나요? 제대로 못 봐서…….”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엔 거의 정화된 것 같았다. 설마 네가 그 정도로 정화에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군. 조만간 조사원이 그곳에 파견될 거다. 정보가 오면 너에게도 알려 주마.”
“네에.”
어차피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못 보니까. 살짝 시야를 떠 보려고 했지만 아파 올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불안할 정도다.
‘그러니까 그건, 아직 내가 보기에 일렀던 건가.’
정화한 것 때문에 과부하가 걸린 게 아니다. 내가 평소보다 깊게, 더 깊게 보려고 했던 게 문제였다. 몸이 눈의 레벨을 따라가지 못한 거겠지.
나는 양호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친구들과 함께 기숙사로 돌아갔다. 제현 오빠네와 강정현 선생님과는 중간에 헤어졌다.
“눈 잘 안 보여서 불편하겠다.”
“안경 쓰면 되지. 그보단 마력이 안 보이는 게 불편해.”
어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불안했지만, 그래도 낫는다니까. 성진이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사실 제대로 보이진 않았는데, 분위기가 그랬다.
“그래, 잘 봤냐?”
성진이 내 머리를 꾹 눌렀다. 나는 웃었다.
“응, 대단한 걸 봤어.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생각해 보면 이 녀석에겐 언제나 도움을 받는다. 나는 그때 보았던 풍경을 떠올리며 활짝 웃었다.
수련회가 끝난 다음부터 우리는 부쩍 바빠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할 일이 갑자기 늘었으니까.
학생회 인수인계가 시작된 것이다.
참고로 과부하가 걸린 눈은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먼저 시력이 돌아오는 데 이틀쯤 걸렸고, 마력이나 영혼 등을 제대로 볼 수 있을 때까지 사흘이 더 걸렸다. 덕분에 나는 한동안 안경을 쓰고 지냈다. 인수인계 때 서류를 무리 없이 읽기 위해서였다.
시력은 돌아왔지만 눈동자 색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뭐, 괜찮다. 생각보다 색이 예쁘니까.
저주를 정화했을 때처럼 모든 것을 동시에 보아도 이제는 저기에 생명이 있을 거란 확신이 들 뿐 생명 그 자체가 보이지는 않았다. 그때는 어떻게 볼 수 있었던 걸까. 초조해서였을까? 아니면 필사적이어서?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한번 보았으니 언젠가 분명 다시 볼 수 있게 될 거다. 나는 그날을 기대하기로 했다.
선거 날짜는 축제 날짜와 어느 정도 겹친다. 그래서 대현 학생회는 대대로 축제 일을 도우면서 인수인계를 해 왔다.
수련회가 끝나고 바로 다음 날 학생회 후보 명단이 붙었다. 명단에 적힌 우리 이름을 보고 학생들은 당황하기도 했고, 기뻐하기도 했다.
인하가 회장이래! 헐, 이성진이 부회장? 은하 님이 나왔어! 은하 님이? 웬일이야! 이번에도 민희랑 한수가 할 줄 알았지. 설마 멤버가 싹 바뀔 줄이야.
우리 외에 학생회 후보로 나선 학생은 없었다. 투표도 하기 전에 당선이 확정됐다.
“학생회의 일은 학생들의 생활이 잘 이루어지게 돕는 거야. 축제 때 할 일은……학생들이랑 교섭해서 행사 스케줄을 잡고, 반이랑 과에서 하는 행사를 확인하고 겹치지 않도록 조정하고, 축제 때 돌아다니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선도 위원이랑 같이 수습하고, 행사 때 학생들에게 필요한 물건 챙겨 주고, 고등학교 주임 선생님이랑 예산 교섭하고.”
말이 줄줄이 이어졌다. 이어질수록 나와 소영이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인성이는 진지하게 들으며 손가락을 꼽았고, 인하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성진은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하여간 그래. 열심히 하자!”
갑자기 회장의 미소가 무섭게 느껴진다. 의욕 있게 대답하는 건 인성이 정도였다.
말 그대로 지옥 같은 나날의 시작이다. 우리는 선배들의 옆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학생회 일을 도왔다.
“돈이 너무 드는 시설은 거절하거나 스스로 어떻게 하라 그래. 우리가 학급에 기본으로 줄 수 있는 설비는 기본 소재뿐이야. 판자, 천, 책상이나 의자, 나머지는 학생들이 마법으로 재량껏 꾸며야지.”
“네.”
“음식점을 많이 하잖아? 바깥에서 포장마차 하는 놈들도 있고. 그 시설은 제3 비품실에 있고, 웬만해선 숫자가 부족할 일은 없을 거야. 상점가에서도 사람이 오거든? 바깥에서 음식 장사 하는 점포 전체 수는 학생들 것까지 포함해서 50개 전후로 제한해야 해.”
이런 사항들을 정리해 놓은 서류가 옆에 있는 자료 책꽂이에 꽂혀 있었다.
“강당마다 공연 횟수는 하루에 20~25개 정도로 제한하고, 공연 시간은 꼭 확인해야 해. 총 8시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8시간이야. 특히 연극은 길어지는 일이 많으니까 반드시 확인해야 해.”
그 외에도 확인해야 할 것은 머리가 폭발할 정도로 많았다. 옆에서 축제 지침서를 보며 하나하나 해 가는 선배들을 보고 있자니 존경심이 몰려왔다. 그리고 이걸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진심으로 골치가 아파 왔다.
“우리 학교는 행사가 많잖아요. 운동회, 축제, 소풍, 수학여행, 수련회, 설마 그걸 다 맡는 건 아니죠?”
“설마. 수학여행이랑 수련회는 우리가 안 챙겨. 본격적으로 하는 건 운동회랑 축제뿐이야. 가끔 다른 학교랑 교류해서 대련회를 열고, 동아리 예산 같은 거 정리해서 주임 선생님이랑 이사장님께 올리고…….”
역시 일이 엄청 많잖아. 나는 침을 삼켰다.
“그래도 큰 행사 끝내면 선물이 있으니까 그 맛에 하는 거지.”
“선물요?”
“응. 뷔페집 식권이랑 카페 기프티콘 10개.”
“으으음…….”
먹을 거라. 조금 의욕이……드나? 아무래도 부족한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말로 하지는 않았다.
현 학생회를 도와 조금씩 축제 준비를 했다. 비품실에 가서 비품 숫자를 확인하기도 했고, 학급을 돌며 얼마나 꾸며졌는지 확인했으며, 같은 행사를 골라 조정이 필요한 학급 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많다고 해서 긴장했는데, 예상외로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마 우리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분노를 꾹꾹 누르며 대화로 풀려고 노력하는 거 보니까.
학생회도 결국엔 학생이다. 축제 준비 기간이든 아니든 수업은 들어야 한다. 중요한 수업은 듣고, 덜 중요한 수업을 째면서, 자유 시간마다 축제 조정을 위해 돌아가며 노력하는 임원들을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하고 싶지 않다고.
‘역시 나는 잘 못할 것 같아.’
전생이든 회귀 전이든 나는 전업 소설가였다. 서류 정리 정도는 한 적이 있지만, 아무래도 이런 일은 익숙하지 않다.
‘힘드네, 진짜…….’
내년부터는 축제가 늦게 오기를 바라게 될 것 같다.
학생회 일을 돕고 기숙사에 돌아오면 액세서리 만들기 아이템을 돌려 액세서리를 몇 개 만들고, 다음엔 시공간마법 훈련을 하러 밖으로 나간다. 이 훈련은 매일이 아니라 2, 3일에 한 번씩 한다.
학교 어디에 이차원을 만들까 고민하다가 결국 허공에 보이는 차원의 틈새를 비집어 만들기로 했다. 수련회 전에 기반을 만들고 수련회가 끝난 후 조금씩 차곡차곡 이것저것 채워 넣고 있다.
나는 이차원을 불러와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긴 복도가 나를 맞았다.
어떻게 만들지 많이 고민했지만 대피용으로 떠올린 것이니만큼 ‘건물 내부’를 기본 콘셉트로 삼았다. 복도 옆에 있는 방은 침실용 빈방이다. 이곳은 빈방만 스무 개가 넘는다.
복도를 쭉 걸으면 위아래와 연결된 계단이 나온다. 아래로 내려가면 지하실이 있다. 지하실은 어떻게 꾸며야 할지 몰라 그냥 공간만 만들었다. 그것도 그냥 공간이 아니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다. 산 하나 정도는 가볍게 들어올 수 있지 않을까.
계단 맞은편, 옆길로 쭉 걸어가면 큰 방이 두 개 나온다. 이 방 역시 비어 있다. 그냥 언젠가 쓸모가 있을 것 같아 만들어 두었다.
나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위층에도 방이 많다. 창고처럼 물건을 쌓아 둔 방도 있다.
언젠가 통신실로 꾸밀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둔 방에 들어갔다. 하지만 어떻게 손대야 할지 몰라 그냥 큰 컴퓨터만 사다 넣어 뒀다. 저 컴퓨터 안에는 문이의 분신이 들어 있다.
조금 떨어진 방에는 피아노를 넣어 뒀다. 가끔 기분 전환 삼아 쳐 볼까 싶어서였다. 기숙사에는 둘 곳도 없으니까. 전생에 조금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어 쉬운 곡 정도는 연주할 수 있다.
서재도 만들기는 했는데 책꽂이만 많지 텅 비어 있다. 그야 책은 전부 내 방에 있으니까.
훈련실도 하나 만들어 볼까 했는데 그러려면 가상훈련용 기계가 필요하다. 나중에 쓸 만한 걸로 하나 사자.
“대피용……이라기보다 완전 기지네.”
집을 살 필요 없이 그냥 여기에서 살면 될 것 같다. 혼자 살기엔 좀 삭막하긴 하지만.
“으음, 정원 정도는 만들어 둘까?”
창문은 있지만 그걸 통해 보이는 바깥 풍경은 다 거짓이다. 아무리 그래도 건물만이면 너무 삭막하니까 바깥도 만들어 볼까? 진짜 바깥 풍경과는 다르게 꾸미고 싶은데, 어떻게 꾸미면 좋을까. ‘이차원’이라는 점이 드러나게 꾸미고 싶다.
‘좋아. 오늘은 정원을 만들어 보자.’
나는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계단 맞은편, 큰 방으로 통하는 길목 앞에 새로운 문이 만들어졌다. 커다란 철문을 열고 나가자 텅 빈 검은 공간이 나를 맞았다.
“『흙』.”
말을 하며 걷자 아무것도 없던 허무에 흙이 채워진다.
“정원이니 우선 잔디를 심고……나무나 꽃은 뭐가 좋을까.”
식물은 진짜를 심고 싶다. 건물은 전부 내가 차원의 구성물로 만든 가짜에 가까운 것이지만 생명이 있는 건 진짜가 좋다.
기지처럼 만들고 있으니까 마음의 안정이나 피로 회복에 좋은 실용적인 식물을 심는 게 좋지 않을까? 어떤 게 좋을까…….
길게 고민하지 않고 나는 이차원에서 나왔다. 컴퓨터를 켜고 정원 양식이나 괜찮은 나무를 찾아봤다. 어라, 이거 예쁘네.
살펴보면서 나무 기준을 몇 가지 정했다. 봄이 되면 꽃이 피면 좋겠다. 꽃에도 부가 효과가 있는 게 좋을까? 디자인은 이게 마음에 든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9시, 이미 시간이 늦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남는 주말에 부탁하는 게 좋겠지?
‘그럼 다른 거부터 먼저 해 보자.’
나는 다시 이차원에 들어갔다. 기지는 어느 정도 구색을 갖췄다. 빈방 중 반은 침대가 들어가 있고, 바닥과 벽지도 깔끔하게 꾸몄다. 복도 분위기가 조금 우중충한 게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고 화사한 것도 별로라 벽지를 바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 창가에 화분을 둬 볼까?”
나는 1층에서 3층까지 쭉 돌아다니며 화분을 둘 곳을 정했다. 이차원을 건물 형태로 고정하니 생각보다 꾸미기가 어렵다. 계단 색을 어두운 고동색에서 밝은 갈색으로 바꾸고 다시 정원으로 나갔다. 우선 하늘을 꾸며 보자.
하늘은 무슨 색으로 하는 게 좋을까? 흔히 보는 하늘을 만들어 보았다. 인공 태양을 만들고 구름을 띄운다. 매우 평범했다. 이렇게 하니 이곳이 이차원이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든다. 가장 자연스럽지만, 반면 너무 재미없다.
하늘 색을 초록색으로 바꿔 보았다. 밤이랑 낮을 구분하는 게 좋을까? 시간 단위는 어떻게 할까?
“생각보다 신경 쓸 게 많네…….”
하늘에 적용할 규칙도 고민해 봐야겠다. 초록, 노랑, 빨강, 진한 파랑, 여러 가지 색으로 바꾸어 보았다. 시험해 본 결과 하늘은 옅은 색으로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다. 진한 색은 계속 보고 있으면 눈이 피로해진다.
색은 하늘색, 파랑 계열. 중심에 태양을 대체할 빛을 둔다. 하늘 전체 색은 부분마다 조금씩 다르다. 어두운 파란색에서 옅은 하늘색까지. 색감에서 느껴지는 재질은 하늘이라기보다는 유리에 가까웠다. 중간중간 장식물을 끼워 두었다. 물방울 모양, 구름 모양, 달 모양, 별 모양의 크리스털.
하늘은 저녁이 되면 검보라색으로 변한다. 저녁이 되면 하늘 사이사이에 있는 작은 크리스털이 빛을 낸다. 반짝반짝, 별처럼.
넓지 않은 허공에 그럭저럭 볼만한 인공 하늘이 완성되었다. 나는 현관문 앞에 주저앉았다.
“생각보다 힘드네.”
생각보다 마력이 든다. 갑자기 ‘그 세계’가 떠올랐다. 기분이 나빠져 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주말, 나는 이차원에 처음으로 외부인을 초대했다. 마력을 인식시키고 한수를 이차원으로 끌어 들였다. 삭막한 복도에 들어서며 한수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차원이라고 하더니 웬 건물……?”
“건물 안을 콘셉트로 잡았어.”
“……뭔가 내가 생각하던 거랑 많이 다르네. 그리고 너라면 예쁜 풍경을 세계로 삼을 줄 알았는데.”
“내 꿈속 세계 같은?”
“어. 그런 거.”
뚜벅뚜벅, 발소리가 이어졌다. 확실히 처음에는 그런 걸 떠올렸다.
“처음엔 그랬는데, 하다 보니까 바뀌었어.”
“흐음. 문 열어 봐도 돼?”
“응. 별건 없지만.”
한수가 문고리를 열어 방 안을 살폈다. 정말로 별다른 건 없다. 그냥 평범한 벽과 바닥, 혹은 침대가 있을 뿐이다.
“삭막하네.”
“건물 안을 콘셉트로 잡은 건 좋지만 꾸미려고 하니 신경 쓸 게 좀 많더라고. 내부 구조 정하는 데만 일주일이 넘게 걸렸어.”
창문을 어떤 디자인으로 할지 쓸데없이 고민했고, 바닥을 장판으로 할지 그냥 돌로 할지 못 정해 몇 번이나 바꾸며 대조했다. 나는 그때의 고생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내가 도와줬으면 한다는 건?”
“정원 만들기.”
“정원?”
“응. 식물은 진짜를 심고 싶거든.”
한수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복도가 끝나자 계단이 나왔다. 복도 모퉁이를 돌아 계단 맞은편으로 걸어가면 커다란 현관문이 보인다. 문을 열고 나가니 흙바닥이 나왔다. 넓어 보여도 작은 빌딩 하나 넓이밖에 안 된다. 조금만 걸으면 세계의 끝이 만져진다.
“그렇다고 진짜 흙밖에 없냐…….”
한수는 성큼성큼 정원으로 나가더니 뒤로 돌아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3층 건물……이네. 건물 색은 왜 흑백이야?”
“그냥? 안도 비슷하잖아?”
“근데 건물도 방도 쓸데없이 넓더라.”
“그것도 그냥.”
“방 숫자도 쓸데없이 많고.”
“그냥……음……유사시에 가출할 장소랄까? 이거 유지해 두면 돈 없을 때 들어와서 살기 딱 좋지 않아?”
한수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불은?”
“필요 없잖아. 건물 안은 항상 밝아.”
“그럼 끄고 싶을 땐?”
“방 옆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면 방 안이 어두워져.”
“물은?”
“방마다 화장실도 있고 수도꼭지도 있으니까.”
“그건 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건데?”
한수는 생각보다 꼼꼼히 질문했다.
“내 세계니까 필요 없으면 사라지고 필요하면 나타나는 거지.”
“되게……신기하네.”
과연 은하. 한수가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이어서 한수는 하늘을 보고 갸웃했다.
“하늘도 되게 신기하게 꾸몄네. 하늘이 아니라 천장인가?”
“하늘 맞아. 원래 세계랑 차별을 두고 싶더라고.”
“하늘이라. 엄청 위화감 드네.”
이곳에서의 하루도 24시간, 바깥과 연동해 낮과 밤의 길이가 달라진다.
“이런 곳에서 식물이 잘 자라려나?”
“마법으로 만든 세계니까 영양소는 풍부……하다고 생각해.”
“가운데 저게 태양?”
“응.”
“뭐 좋아. 한번 해 보자고.”
한수가 의욕 만만한 얼굴로 팔을 걷어붙였다. 나는 환각으로 허공에 영상을 떠올렸다.
“요런 느낌으로 해 줘. 잔디를 깔고, 이 주변에 향나무를 심고, 이 위치에 커다란 나무가 있었으면 좋겠어. 효과는 어쨌거나 마음이 안정되는 걸로. 꽃나무였으면 좋겠어. 계속 꽃을 피울 필요는 없고, 가끔 꽃이 피는 나무면 돼.”
“그럼 큰 나무부터 시작할까?”
한수는 심기 전에 먼저 나에게 핸드폰으로 견본을 보여 주었다. 한수는 방울꽃나무를 추천했다. 활엽수였고, 사철나무이며, 주먹만 한 분홍색 꽃이 핀다. 꽃가루가 밤에 빛난다. 약으로도 쓸 수 있는 좋은 나무다. 한수가 개량한 나무란다.
“와! 이 나무 예쁘다. 이걸로 할래!”
“좋아.”
한수가 바닥에 양손을 짚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흙바닥 위에 머리를 들이민 새싹이 순식간에 자라나며 두꺼워진다. 한수는 나무를 어느 정도 키운 후 멈췄다.
“이 정도 크기면 어때?”
“딱 좋아. 꽃이 피는 주기는 어떻게 돼?”
“한 달에 한 번, 몇 개씩 피어. 1년에 한 번은 활짝 피고.”
“그래?”
나무라도 한 그루 있으니 볼만하다. 얇은 녹색 잎이 무척 예뻤다. 이어서 한수는 바닥에 잔디를 깔고, 주변에 작고 빨간 열매가 열리는 향나무를 심었다. 다 커도 허리까지밖에 안 자란다고 한다.
잔디 주변에 드문드문 꽃을 심었다. 평범한 꽃 몇 개와, 속성마법을 가진 꽃 여러 개. 하늘 분위기에 맞춰 크리스털 꽃도 몇 개 심었다.
“이제 좀 정원 같다.”
한수가 만족한 얼굴로 손에 묻은 흙을 탈탈 털었다. 역시 한수에게 부탁하길 잘한 것 같다.
“이 세계 얼마나 유지할 거야?”
“웬만해선 계속 유지하면서 넓혀 갈 건데.”
“혹시 없애게 되면 정원은 나한테 가져와.”
“오케이.”
생각보다 이 정원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럼 한수에게 줄 날이 생기면 세계 그대로 축소해서 수정 구슬에 담아 건네야지. 하늘 모습도 그대로 볼 수 있도록.
“안에 화분을 몇 개 놓으려 하거든? 그것도 부탁할게.”
“나무? 꽃?”
“둘 다.”
“화분은 있고?”
나는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 화분이 생겨났다.
“마력……을 별로 쓴 것 같지도 않은데 간단히 만드네.”
“여기 내 세계니까.”
“그런 건가.”
우리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 근처, 창문 근처, 한수가 창문 뒤쪽을 가리켰다.
“야. 그러고 보니 뒤쪽은 안 꾸몄잖아.”
“그러네. 연못이라도 만들까?”
“잠깐만. 앞뜰이랑 어울리게…….”
한수가 아직 흙밖에 없는 뒤뜰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 생각해 보니 아직 뒤뜰이랑 통하는 길이 없다. 건물 옆으로 지나가려고 해도, 건물 양옆에는 공간이 없었다. 거기가 차원의 끝이다.
아무래도 공간을 좀 더 넓혀야겠다. 한수가 고민하는 사이 나는 차원의 구조를 바꿨다. 마력이 훅 빠져나갔다.
처음엔 이차원을 유지하는 게 조금 버겁다고 느껴졌는데, 어느 정도 커지니 알아서 모습을 유지한다. 그래도 차원 구조를 넓히거나 바꿀 때마다 상당한 마력이 든다. 차원 구조를 계속해서 바꾸는 행위는 제법 훈련이 된다.
건물 안에 나무와 꽃 화분을 몇 개 둔 후, 서재 뒤로 테라스를 만들고 그 테라스를 통해 뒤뜰로 내려갔다. 한수는 거침없이 정원을 꾸몄다. 아래에 잔디를 깔고, 건물 옆으로 돌아 앞뜰을 한 번 확인하더니 뒤뜰에도 비슷하게 꽃을 심었다.
나는 정원에 연못을 하나 만들었다. 한수가 연못 주변에 작은 나무를 심었다. 나뭇잎 모양이 눈에 익었다.
“모란인가?”
“어. 이것도 개량한 거야.”
“나 모란 좋아해. 꽃은 언제 피어?”
“일주일 후쯤? 꽃 색은 이게 분홍색, 이게 하늘색.”
한수는 이번엔 테라스 근처에 큰 나무를 하나 심었다. 테라스 지붕에 나뭇잎이 닿았다. 그런 다음 테라스 울타리를 휘감는 덩굴나무를 하나 심었다.
“이런 건 어때?”
“좋아!”
나는 가볍게 박수를 쳤다. 이로써 정원 꾸미기는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한수는 구석구석 살피며 허전하다 싶은 곳에 꽃이나 나무를 하나씩 놓았다.
“이 건물 이렇게 보니까 기숙사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