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246
이내 나는 꿈을 통해 바깥을 살펴봤다. 사람 없이 남아 있는 우리 집과 선아 아줌마의 집. 한번 무너졌던 대현 학교….
학교에 도착한 순간 몸이 한곳으로 빨려드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착각이 아니다. 정신이 저 검은 수정에, 검은 마정석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나만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의 영혼이 울고 있다. 주위의 모든 영혼과 마력이 오로지 한곳으로 빨려 든다.
나는 필사적으로 마정석의 영향을 피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숨을 고르고 다시 몸으로 돌아왔다.
그 마정석은 나도 빨아 들이려고 했다. 꿈을 통해 바깥으로 나간 내 정신체를, 영혼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조금만 더 마정석에 다가갔다면 나는 영영 내 몸으로 돌아올 수 없었으리라.
나는 또 한 번 숨죽여 울었다.
‘어쩌면 친구들, 부모님……소중한 사람들의 영혼도 아직 이승에 남아 있을지도 몰라.’
나는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내 눈이라면 찾을 수 있을까? 성진의 눈이라면…….’
그들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 저 검은 구체? 영혼의 조각이 감정의 조각과 합쳐져 유령이니 귀신이니 하는 것이 생기게 된다. 그럼 그들의 감정은 어디에 남았을까. 아니면…….
‘우리의 곁……?’
라라를 매일매일 놓지 않고 껴안았다. 성진이 이따금 소식을 가져왔다. 랭크 시험 본부 SR은 다시금 권리를 되찾았다. 트라베리아의 정보를 파괴하고 랭크 정보를 다시 가져왔다. 그로써 그들은 독립했고, 트라베리아에 대항할 체제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미 한국의 정보는 트라베리아에 어느 정도 넘어가 있었다. 완전하지는 않은 정보로 트라베리아는 한국을 관리했다. 그곳에 사는 마법사들을.
그들은 의외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덤벼 오는 마법사 외에는 죽이지 않는다. 핍박하는 일도 드물다. 다만 가끔 실험체라며 사람을 데려간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비마법사는 대부분 죽었다. 다른 마법사들은 힘없는 자들을 보호할 수 없었고, 힘이 없는 비마법사는 힘없이 스러져 갔다.
이윽고 우리는 결심했다. 보지 못한 ‘시간’을 보기로.
괴롭고 끔찍하더라도 죽음을 확인하기로.
마지막을 보지 못하면 분명 계속 뒤돌아보게 될 것 같았다. 너무 현실감이 없고, 너무 생생해서.
“시작한다.”
성진은 우리 앞에 투명한 주황색 구체를 놓았다. 빛이 퍼지며 우리의 시야를 잠식했다.
끼익──
커다란 열차 두 대가 역에 나란히 멈춰 섰다. 북단산 지하 대피소는 방공호로 쓰이는 만큼 매우 넓었다. 올라가는 계단까지 5분이나 걸어야 할 정도다. 천장에 달린 조명이 넓은 방공호를 비췄다. 사람들이 하나둘 열차에서 밖으로 나왔다. 축제 관리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공연 시간까지 13분 남았습니다! 휴식 시간을 합해 20분 정도 남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차례로 줄을 서 위로 올라가 주세요. 올라가면 관객분들은 제단에 있는 관람석에, 마법사분들은 제단 주위에 서 주세요. 그리고 김선아 님은 제단 위로 올라가 주시길 바랍니다.”
“네, 네.”
구태여 걸어서 가는 건 축제 기간 동안 방공호 안이 마력을 흡수하여 밑으로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때문에 마법을 정상적으로 쓰기 힘들다. 또한 방공호 안은 바깥과 차단된다. 특히 공간마법은 쓰기 힘들다. 사람이 너무 많아 혼잡해서 그런 것도 있었다. 김선아가 생긋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얘들아. 치이지 않게 조심해.”
“네에!”
주민희가 손을 들며 대답했다. 손미연이 생글생글 웃으며 다른 곳에 한눈을 팔던 제 아들 김현호의 뺨을 잡아당겼다. 박한수는 얌전히 제 엄마인 이유영을 따랐다.
그 근처에는 대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활기차게 이야기를 나누는 정준휘와 유민, 그 옆을 따라가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정민아와 남연아. 한켠에선 이은희와 주제현, 유천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보다 훨씬 떨어진 곳에서는 정하진이 그의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람들은 물결처럼 앞으로 휩쓸려 갔다. 조명을 따라 가장 앞에 선 사람이 계단을 오르는 순간, 그는 갑자기 무언가에 밀려 굴러떨어졌다.
“으악!”
“악, 뭐야?”
김선아가 앞을 바라보았다.
“뭐야? 무슨 일 있나?”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엄청난 한기를 느낀 김선아가 손으로 팔을 쓸었다. 쨍! 예고도 없이 날아간 검은 무언가가 조명을 박살 냈다. 김선아가 눈을 크게 떴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뭐야? 갑자기 조명이 깨졌어?
“누구야! 정체를 밝혀!”
‘그 여자’의 기세는 몹시도 위압적이었다. 계단 끄트머리에 서 있던 여자가 한 발 한 발 아래로 내려온다. 검은 마력을 휘감고, 어깨에는 검은 낫을 짊어진 채.
김선아는 그 발소리에 집중했다. 너무나도 거대한 마력이라 웬만한 마법사는 눈치채지 못했다. 강함이 일정 선을 넘어선 사람만이 그 기척을 눈치챘다. 눈치챈 사람 대부분은 위압되어 몸을 벌벌 떨었고, 김선아만이 겨우 두려움을 이겨 내고 목소리를 냈다.
수천이 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당황으로 점점 커진다. 선아 아줌마? 김선아 씨?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발소리가 멈추고, 섬뜩한 기척이 김선아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
“……!”
“네가 김선아냐?”
날카롭게 뻗친 검은 단발머리에 깡마른 체구. 여자가 동공이 열린 눈으로 소름 끼치게 웃었다. 어깨에 걸치고 있던 사람 키보다 큰 낫이 소리 없이 휘둘러졌다.
“안……!”
김선아가 재빨리 마법을 펼쳤지만 보통 마법사라면 생채기조차 남길 수 없을 그 마법을 낫에서 나온 검은 기류는 간단히 뚫었다. 서걱, 검은 마력이 저항 따윈 없었던 것처럼 생명을 날카롭게 자른다. 그토록 허무하게 김선아의 몸이 잘려 떨어졌다. 뜨거운 피가 주위로 튀었다.
“큭……큭큭큭큭!”
“선아 아줌마……?”
“이게 대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여자가 다시 낫을 휘둘렀다. 다섯 번 휘둘러진 낫과 낫에서 솟아오른 마력이 반경을 날카롭게 벤다. 그 마력은 소리조차 내지 않고 주위의 모든 것을 잘랐다. 육체, 바닥, 천장, 피가 튀고 날카롭게 베인 살점이 날아올랐다.
그건 그저 학살이었다. 그녀가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기까지 고작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낫질 몇 번에 사람이 무자비하게 베였고, 칼날에 닿은 자는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꺄하하하하하!”
피를 맛볼 때마다 낫이 날카롭게 공명한다. 피가 철퍽철퍽 아래로 떨어진다. 여자는 피가 튄 얼굴로 피가 튄 낫을 쥔 채 목소리를 높였다.
“꺄하하! 잘려라! 튀어! 피다, 피! 죽어! 죽어 버려!”
낫을 휘두르며, 죽은 사람을 다시금 절단하며,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역시 사람을 베는 건……너무 재미있어…!”
여자가 황홀한 얼굴로 손가락에 묻은 피를 핥았다.
“너무 재미있어서 그만둘 수가 없어! 꺄하하하하! 기분 최고야! 이래서 이걸 그만둘 수 없다니까!”
여자는 한동안 낫으로 주위를 갈기갈기 베더니 이내 낫을 바닥에 내렸다. 철퍽, 검은 낫의 머리가 피 웅덩이에 처박혔다. 검은 낫은 웅웅 소리를 내며 피를 흡수했다. 여자가 구두로 피를 차올렸다.
“맞다……아직 마무리를 안 했네.”
피 웅덩이 속에서 여자는 즐겁게 웃으며 낫을 펜, 피를 잉크 삼아 벽에 글자를 새겼다. 글자에서 채 다 마르지 않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럼…….”
여자가 낫에 마력을 부여하자, 여자가 쥔 낫의 크기가 더 커졌다. 여자는 낫 봉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쿵
쿠궁
검은 마력이 흘러넘쳤다. 여자는 낫을 양손으로 잡은 채 지하로에 흘러넘칠 정도로 거대한 마력을 흘려보냈다. 새까만 마력이 도시의 모든 것을 부숴 버리도록.
“전부 죽여 버리겠어.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없애 버리겠어.”
여자가 입가를 끌어 올리고 웃었다.
“응? 얼마 안 남았어. 얼마 안 남았어…….”
헉! 우리는 시간에서 벗어났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구역질을 했다.
“으……웩……! 우웩……!”
“흑……흐윽…….”
“헉……!”
사람의 목숨이 정말 그렇게 가벼운가? 천 명이 넘는 사람이 고작 1분도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S랭크 A랭크 할 것 없이 전부 종잇장보다 가볍게 잘려 나갔다.
무서운 건 누구도 저항을 하지 못했다는 거다. 모든 저항을 종잇장보다 가볍게 잘라 버렸다.
머릿속에 솟구치는 피의 향연. 여자가 소리쳤다. 웃었다. 웃었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면서, 웃었어……!
“아……아……아아아아아!!”
나는 머리를 쥐어짜며 소리 질렀다.
“죽여……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아!!”
“흑……흐으윽……아아아악…!”
“……어떻게……으……흑……아아아악!!”
“헉…윽……!”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그렇게 간단히……!”
말로 표현 못 할 증오심이 가슴속에서 솟구치며 회오리쳤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성진이 내 손목을 잡아 막아섰다.
“어딜 가려는 거야?”
“죽여 버릴 거야! 뭐? 재미있어? 이렇게 슬픈데! 괴로운데! 아픈데! 그런데 자기는 뭐라고? 재미있어? 씨발, 씨발, 그딴 놈한테, 우리 부모님이, 친구가……!”
“멈춰.”
“막지 마!”
복수심에 가득 찬 건 나만이 아니었다. 이소영도, 최인성도, 강인하도, 당장이라도 달려가고픈 마음으로 성진 앞에 섰다.
“이건 아니야.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소중했어! 좋아했단 말이야! 그런데 그 사람들을 어떻게 그렇게 가볍게 죽일 수 있는 거야!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어?!”
“부모님을 죽이고, 친구도, 애인도, 선생님도, 선배들도, 전부 죽었어! 그런데 왜 막는 거야? 너도 똑같잖아!”
“정신 차려! 지금 너희들이 가면 뭘 할 수 있는데!”
이성진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필사적인 태도로 소리쳤다.
“뭘 할 수 있는데? 나가서, 그리고? 지금 나가면 개죽음을 당할 뿐이야!”
“그래도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복수를 하려면 제대로 해!”
그의 필사적인 목소리가 우리의 정신을 때렸다. 내 손목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가 봤자 개죽음이 될 뿐이야. 다른 사람의 목숨은 가볍지 않고, 너희들의 목숨은 가벼워? 똑같이 가벼운 목숨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면 머리를 식혀.”
보라색 안광이 차갑게 가슴에 박혀 들었다.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 어떻게 하면 그 자식들을 죽여 버릴 수 있을지.”
“……!”
우리는 눈을 크게 떴다.
“죽은 사람들 목숨을 개죽음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필사적으로 강해져! 강해지고, 강해진 뒤에, 그다음에 죽이러 가! 복수를 할 생각이라면 철저하게 해! 그들의 목숨이 개죽음이 아니도록, 칼날이 확실하게 가슴에 닿을 수 있도록!”
“흑…….”
“지금은 아냐! 지금은…….”
“흑……흐윽……흐아아아앙……!”
나는 자리에 쓰러져 울음을 터트렸다. 성진의 말은 옳았다. 너무 맞는 말이라 서러웠다. 인하가 짓씹듯이 중얼거렸다.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 거야. 끝낼 수는 없어. 그 녀석들이 누구를 죽였는지……철저하게 깨닫게 해 주겠어.”
“반드시,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인하가 이를 악물며 나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맹세했다.
힘을 기를 것이다. 필사적으로, 힘을 기르고, 그리고 세계가 트라베리아에게 패배하기 전에.
──그 여자를 죽이리라고.
‘벨라 트리저…….’
나는 그 여자를 알고 있었다.
죽음을 부르는 사신의 낫, 트라베리아의 사신, 랭킹 17위, 사상 최흉의 마법사, 벨라 트리저.
우리의 모든 것을 부숴 버린 여자의 이름이었다.
목숨을 건 저주가 땅을 좀먹어 간다. 피가 역류했는지 여자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안즈!”
은색 머리의 여자가 필사적으로 그녀를 불렀다.
“엘……리…….”
심장에 칼을 꽂고도 말을 할 수 있는 건 그녀가 건 저주가 아직 그녀를 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지를 점점 새까맣게 물들여 가는 저주가 그녀의 동료들만은 피해 갔다.
“안즈, 죽지 마! 너까지 죽으면, 우리는…….”
“부탁……해…….”
“안즈!”
“복수를……부모님의……동생의……원수…….”
쿨럭! 여자의 금발마저 새까맣게 물들어 버렸다. 뱉은 피가 새까맣다.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검은 머리 여자가 무릎 꿇었다. 검게 물들어 가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귓가에 다짐하듯이 속삭였다.
“그래.”
“…….”
“반드시.”
새까맣게 변해 버린 여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여자의 심장을 통해 대지에 떨어진 검은 피는 바닥에 뿌리를 박으며 퍼져 갔다.
“도망……가…….”
은발 여자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들었다. 바로 곁에 있는 적부터 저주에 물들어 쓰러졌다. 남은 적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고 있다.
“너희들이 신의 자식이라면 풀어 봐! 이 영원한 저주를! 우리가 짊어지게 된 업화를!”
은발 여자가 처절하게 소리쳤다. 바닥에 쓰러진 동료는 영원히 눈을 감은 채 저주에 동화되고 있다.
“엘리, 가자.”
“흑…….”
“엘리시아! 벨라!”
“그래!”
두 사람은 짙은 안개로 이뤄진 길을 걸어갔다. 은발 여자가 드물게 약한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왜 우리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너무 성급했어. 아직, 아직 복수하기엔 부족하다는 거야?”
“…….”
“많이 죽었어. 동료가, 너무, 많이. 유펠라도 마을을 지키기 위해 죽었어. 이걸로 친한 친구는 너밖에 남지 않았어…….”
“라시아도 있어.”
검은 머리 여자가 은색 머리 여자의 손을 꽉 쥐었다.
“마음 약하게 먹지 마. 우리는 반드시 그 녀석들을 죽여야 돼. 원수를 갚고, 남은 마법사를 지켜야 해.”
“응…….”
이윽고 눈앞에 펼쳐진 황폐한 마을을 보며 은색 머리 여자가 눈물을 닦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앞을 향해 걸어갔다.
이 두 사람이 훗날 트라베리아의 여왕이 되는 엘리시아 루미드와, 사상 최흉의 마법사라 이름을 높이는 벨라 트리저다.
엘리시아와 벨라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유펠르시아였다. 두 사람은 거침없이 왕성에 쳐들어갔다. 세계 곳곳에서 트라베리아가 전쟁을 일으켰다. 회의실에는 드물게도 유펠르시아의 왕족이 전부 모여 있었다. 더불어 현존하는 유펠르시아의 실력자들은 모두 모여 있다.
유펠르시아의 초대 국왕이자, 오래전 그들의 친구이기도 했던 라시아 K 페일린이 앞으로 나섰다.
“벨라, 엘리시아…….”
벨라가 씩 웃었다.
“여전하군. 우리가 올 걸 눈치채고 여기 모여 있었나 봐?”
“……그래, 이 눈으로 보았다. 너희가 머지않아 이곳에 찾아올 것을.”
라시아는 흔들리는 눈으로 벨라를 바라보았다. 벨라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여는 순간, 몸을 벌벌 떨고 있던 아르델이 벨라에게 달려들었다.
“아르델!”
“안 돼! 아르델!”
불꽃이 벨라의 코앞에서 멈췄다. 라시아가 아르델의 손목을 세게 붙잡았다.
“놔요!”
“아르델. 진정해라.”
“진정할 수 있겠어?! 저 녀석들이, 친구를 죽였어!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래도 소중했는데! 얼마나 소중했는데! 저 녀석 손에 친구들이……은하가……!”
일렁이는 녹색 눈동자에서 증오에 가득 찬 눈물이 흘러넘쳤다. 벨라의 눈빛이 잠시 변했다. 벨라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었지만, 아르델은 거칠게 그 손을 뿌리쳤다.
“이 개자식들이 내 친구를 죽였다고!”
엘리가 신음에 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유펠라…….”
벨라가 드물게도 상냥한 얼굴로 빙긋 웃었다.
“흐음, 닮았네. 네 손녀?”
“그래.”
라시아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벨라는 여유롭게 웃으며 아르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라시아에게 다가섰다. 라시아가 재빨리 아르델을 뒤로 숨겼다. 그러자 왕과 왕비가 아르델을 꽉 끌어안았다.
“하여간 정말 오랜만이다?”
거침없이 다가간 벨라가 라시아의 멱살을 잡았다.
“너희가 우리를 배신한 이후로?”
라시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너희들 입장에서는 배신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럼 배신이 아니면 뭐겠어? 우리는 사람들 손에 갈기갈기 찢겼어. 그런데 그런 놈들에게, 마법을 퍼트려?”
“…….”
“조금은 믿어 보려 했어. 네가, 유펠라가, 얼마나 평화를 원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녀석들이 또 무슨 짓을 저질렀지? 그러고도 우리의 복수를 막아?”
“여왕은 죽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내 친구는 너희를 배신하지 않았다.”
“친구? 배신자 주제에 잘도 친구라는 말을 입에 담는군.”
“그래, 그렇기에 더 최선을 다했다. 너희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우리는 싸웠다. 그랬기에 평화로운 세계가 도래한 거다. 누님이 바라던, 평화로운 세계가.”
“너 따위가 유펠라를 입에 올리지 마.”
벨라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라시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누님은 너희도 평화로운 세계에서 살길 바랐다. 며칠 전까지 존재했던, 마법사가 당연한 세계에서……. 너희가 한 짓은 너희와 똑같은 사람을 만드는 일일 뿐이야! 이제 제발 정신 차려!”
“그런 벌레 같은 것들과 우리 ‘마법사’는 다르지.”
“벨라……!”
“그렇게 말한 건 사람들이야. 우리가 아니라.”
벨라가 부드럽게 웃으며 아직도 악을 쓰고 있는 아르델을 돌아보았다.
“그래. 네 친구가 죽었니?”
“개새끼…!”
“꺄하하! 당돌한데? 유펠라랑 닮았으니까 내가 봐주는 거야.”
“닥쳐!”
엘리는 차가운 눈으로 아르델을 응시했다. 눈동자가 한순간 떨렸다.
“그래. 귀엽고 바보 같은 라시아. 우리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알겠니?”
“너희가 생각하는 대로 복수하러 왔나.”
“죽이지 않을 걸 알기에 여기 모인 거 아니었어?”
벨라가 놀라운 듯 눈을 크게 떴다. 라시아의 표정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벨라가 방긋 웃었다.
“그래. 너희를 죽일 생각은 없어. 유펠라가 목숨을 걸고 지켜 냈잖아. 이 세계를 멸망시켜도, 너희만은 죽일 생각 없어.”
라시아는 운명을 직감하며 고개를 숙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에서 한탄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는 너무……늦었어…….”
“뭐가?”
벨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라시아가 분한 기세로 소리쳤다.
“왜! 이런 일을 벌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누님을 찾아올 생각을 하지 않은 거지?”
벨라와 엘리시아의 눈동자가 굳었다.
“누님은 너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라시아의 멱살을 잡고 벨라의 손이 떨렸다.
“뭐? 무슨 소리야?”
“유펠라는 오래전에 죽었어. 스스로 제물이 되어 유펠르시아를 지켰지.”
“하지만 누님의 영혼은 계속 그곳에 있었다!”
라시아의 녹색 눈동자가 안광을 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