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25
“제한 시간은 말했다시피 10분이야. 준비하렴.”
그와 동시에 선생님들 앞으로 숫자가 적힌 커다란 전자 창이 떠올랐다. 전자식 스톱워치인 듯했다.
일단 파란색 수정구 안에 있는 마력을 눈으로 훑어 가늠했다. 수정구 안에 있는 마력은 제법 많았다. 나는 긴장하며 집중했다.
“그럼 준비…….”
시작!
그 목소리와 동시에 나는 바로 마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란 수정구의 마력을 움직여 하얀 수정구 안으로 옮겼다.
나는 그와 동시에 큰 위화감을 느꼈다. 마력을 계속해서 옮기면서도 이상한 기분에 미심쩍은 표정으로 수정구를 노려보았다.
그래, 이상했다. 이제 나에게 마력을 움직이는 것은 손을 움직이는 정도의 간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달리 마력을 움직이는 게 이상할 정도로 더디고 버거웠다. 내 의지에 따라 가볍게 움직여야 할 마력이 중간에 저항까지 했다.
‘이런.’
내 탓인지 수정구가 불량인지 아니면 이것조차 시험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중했다. 평소보다 좀 느릴 뿐이지 많이 버거운 것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파란 수정구에서 마력을 쭉쭉 뽑아내 전부 하얀 수정구에 넣어 버렸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30초였다.
나는 파란 수정구 안에 남은 마력이 없는지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세 선생님이 보였다. 나는 흠칫했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것이다.
‘아……혹시, 실수했나……?’
나는 방금 전 내가 했던 행동을 떠올려 보았다. 잔뜩 긴장한 탓인지 평소보다 마력을 움직이는 게 버거웠던 탓인지 내 지론에 따라서 전력으로 시험을 쳤다. 제한 시간은 10분, 시험을 수행하는 데 걸린 시간은 30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음…….”
세 선생님은 잠시 나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짓더니 금세 진정하고는 그들의 바로 앞에 있는 종이에 뭐라고 쓰기 시작했다. 한동안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적막한 공간을 메웠다. 나는 그 안에서 손을 모은 채 움츠리고 서 있었다.
그동안에도 스톱워치의 맨 아래에 있는 시계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후, 내가 이 방 안에 들어온 지 딱 10분이 되었을 때, 선생님이 내가 들어온 곳과는 반대쪽에 있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열심히 잘했어. 시험은 이것으로 끝이란다. 저쪽으로 나가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으렴.”
자리에 선 채 머뭇거리고 있던 나는 그 말이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곧바로 문을 향해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선생님이 가리킨 문을 나서자마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반 아이들, 그리고 인하와 현호와 시하와 한수.
나는 친구들을 보며 안도감에 웃었다. 인하가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고 현호가 크게 팔을 흔들며 나를 맞았다.
“그래서? 시험 어땠어?”
곧바로 그렇게 물어 오는 현호를 향해 한수가 타박을 줬다. 그런 건 나중에 우리들끼리만 있을 때 해. 시하도 그렇다며 작은 목소리로 긍정했다.
문안에서 10분 간격으로 반 친구들이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희 역시 문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얘들아~!”
민희는 이번에도 호들갑스럽게 우리 품으로 달려들며 긴장했다느니, 특이한 시험이었다느니, 하고 싶었던 말을 전부 쏟아 냈다. 그러면서 실없이 웃길래 나는 민희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어 주었다.
잠시 후 시험이 완전히 끝났다. 모든 아이들이 시험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갔다. 종례를 마친 후, 우리는 어쩌다 보니 민희네 집으로 놀러가게 되었다.
“그래서? 시험 어땠어?”
시험에 대한 것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사적인 이야기 장소가 필요했다. 카페 무료 시식권은 이미 써 버렸고, 사비로 가려고 하니 돈이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가게 된 장소가 민희네 집이었다.
나와 인하가 민희네 집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민희네 집만이 아니라 한수나 현호의 집도 가 본 적이 없다. 세 사람끼리는 자주자주 서로의 집에 놀러 가는 모양이었지만, 나와 인하에 한해서는 그런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약간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민희의 집은 적당했다. 주택이었고, 오빠랑 둘이서 살기에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다만 구조가 좀 특이했다.
현관문을 열면 복도가 이어지고, 복도 옆으로 긴 장지문이 달려 있다. 한쪽 문을 열면 부엌이, 한쪽 문을 열면 거실이 있다. 복도를 쭉 가면 부엌 벽 맞은편으로 민희의 방이 있었고, 민희의 방 옆으로는 계단이 나 있었는데, 그 위쪽에 있는 다락방이 제현 선배의 방이라는 듯했다.
게다가 문을 열자 가정부 로봇부터 보이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지금은 멈춰 있지만 집 안이 너무 어지러워지면 자동으로 움직인다고 한다.
우리는 복도 옆 장지문 한쪽 면을 차지하는 거실에서 오늘 친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냥, 할 만했어.”
나는 현호를 향해 대답했다. 선생님들의 놀란 눈을 떠올리면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인데 뭐 어쩌겠어. 교칙을 준수하여 치러지는 시험이니까 다른 곳으로 이야기가 샐 염려는 없다.
“나도. 별로 어려운 느낌은 안 들었는데, 음……그래도 평소보다는 어려웠어. 나 그거 옮기는 데 1분 넘게 걸렸어.”
“나도! 왠~지 잘 안 움직여서, 물을 움직이는 느낌으로 잘해 보려 했는데, 그래도 잘 안 되더라고. 난 2분 걸렸어.”
민희의 말에 현호가 동의하는 것을 보며 나는 역시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런 감각을 느꼈다. 역시 그것 자체도 시험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렇긴 하더라. 난 1분 정도 걸렸나?”
“나도 1분 정도.”
이어서 한수와 인하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중에 마력을 다루는 실력이 가장 좋은 것은 나고, 그다음으로는 인하 한수 민희 현호 시하 순으로 이어졌다. 다만 민희의 경우 사격마법을 사용하는지라, 사격마법은 제법 세세한 컨트롤을 필요로 할 때가 많기 때문에 컨트롤만은 인하나 한수와 비등했다. 또 한수와 인하의 마력 운용 실력은 우열을 가르기 힘들 정도로 비등했다. 이 두 사람은 그것만이 아니라 마력의 크기도 마법 실력도 다 비등비등하긴 하지만.
인하가 이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은하 넌?”
“난……30초 조금 넘겼어.”
“……흐응.”
그럼 그렇지. 한수가 투덜거렸다. 민희와 현호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중에 가장 마력을 잘 다루는 건 은하니까!
마지막으로 시하가 작게 “난 10분 안에 겨우 끝냈는데. 9분 51초…….”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 말에 경직되었다. 어라? 이거, 나 좀 위험한 거 아냐? ……성적이, 원래와는 정반대의 의미로.
속으로 온갖 복잡한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결국 어차피 지난 일이라 생각하며 포기했다. 어쩌겠어. 선생님들을 믿어야지.
그 대신 나는 수정구에 담겨 있던 마력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 안에 있는 마력은 사실 담임 선생님의 것이었다. 내가 그 말을 꺼내자 모두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걸 채워 넣기 위해 선생님이 꽤나 고생했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덜컹.
“어라?”
그렇게 우리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데 문득 건너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희가 곧바로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올려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간은 4시 10분, 민희가 환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빠다! 민희가 소리치며 장지문을 드르륵 밀어 열었다.
“오빠! 다녀왔어?”
그러나 보인 얼굴은 제현 선배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안녕, 민희야! 어라? 은하랑 인하도 있네? 다들 집에 모여서 놀고 있었니? 여기에서 보니까 또 신기하다.”
은희 언니가 나를 보며 상냥히 웃었다. 부회장 선배와 천호 선배도 함께였다. 우와, 나는 그 면면들을 보며 문득 감탄했다. 제현 선배, 은희 언니, 부회장, 천호 선배까지, 우리 학교 서열 1, 2, 3, 4위가 다 모였어. 나는 이어서 민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민희 인맥 진짜 쩐다.
그러다가 인하를 보고는 멈칫했다. 물론 내가 할 이야기는 아님을 안다. 응, 선아 아줌마는 그 모든 인맥을 날려 버릴 정도로 엄청난 특대급 백이니까.
민희가 은희 언니를 보며 잠깐 놀란 듯하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어, 은희 언니다! 올만!”
“그래, 그래. 제현이 너네 동생은 여전히 귀엽구나. 좋겠다.”
“당연하죠. 제 동생인데.”
“우와……어디 동생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어?”
제현 선배가 자랑스러운 듯이 웃자 은희 언니가 제현 선배를 보며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서 그는 우리를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너희들도 왔냐?”
“왜 고등학교 회장에, 부회장까지 여기 있는 거야?”
“아……내가 차기 회장이라서 이것저것.”
한수의 까칠한 물음에도 제현 선배는 귀여운 아이를 보는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다. 그사이 은희 언니가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와 나와 인하를 거의 끌어안다시피 했다. 나는 부담스러워했고 인하는 질색했다.
“으아앙! 동생 없는 사람 서러워서 진짜! 은하야, 인하야! 언니 좀 위로해 줘! 우리 귀여운 후배드을~.”
“아, 아니, 잠깐…….”
“답답한데요.”
“인하 차가워어!”
마치 술 취한 사람 같았다. 어쨌거나 은희 언니가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건 잘 알았다. 그러니까, 잠깐, 놔주세요. 나 엄마한테도 안기는 거 쑥스러워하는 타입이란 말이야. 또래나 동생은 괜찮지만…….
인하도 나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유로 안기는 걸 거북해했다. 그러나 힘으로는 당할 바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잠시 동안 꼼짝없이 안겨 있어야 했다.
“…….”
어느 순간 나는, 그런 나와 은희 언니를 제현 선배가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어라, 뭐지? 뭔가, 뭐라고 해야 할진 모르겠는데 방금 데자뷔 같은 기분이…….
‘그러고 보니 모니터 너머로 제현 선배를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 어디서 만났던 것 같았단 말이야.’
하지만 어디에서였을까? 그냥 착각인가?
‘웬만해선 저렇게 잘생긴 얼굴을 잊을 리가 없을 텐데. 하지만 난 가능성이 있단 말이야. 잘생긴 얼굴이더라도 지나치면 까먹는걸.’
그 말대로, 지나치면 까먹는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개는 그렇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천호 선배와 친구들이 장난스럽게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고로 천호 오빠가 차기 부회장이다?”
“헐. 실력만 따지지 말고 머리 좀 따지지.”
“이 꼬맹이가~?”
천호 선배가 건방진 말을 하는 현호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쥐어박았다. 나는 그것을 보고 약간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들은 내가 모르는 사이 이런 사람들과 친분을 쌓고 있었구나 싶어서.
“근데 오빠들도 시험 봤지? 어땠어?”
“뭐……잘 쳤을 거야. 실기 위주로 보니까.”
“하긴, 우리 학교에서 제일 강한 사람 모임인걸!”
“그러는 너희는? 어때, 시험 잘 봤어?”
은희 언니의 물음에 민희가 ‘아마도?’ 하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시험 결과에 대해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하지만 민희는 시험에 대한 호기심을 잔뜩 드러내면서도 우리의 시험 결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학교의 ‘룰’, 결코 타인의 실력을 밝혀선 안 되는 비밀 준수 교칙에 근거한 거였다.
민희의 설명에 은희 언니가 신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와, 초등학교 1학년은 그런 시험을 보는구나…….”
“아, 그거! 기억난다. 우리가 1학년 때도 그거 봤었는데.”
“맞아.”
“그랬지.”
반면 다른 세 사람은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들의 반응을 통해 중학교 때부터 이 학교에 다녔다던 은희 언니랑은 달리 다른 세 사람은 초등학교 때부터 이 학교에 다녔음을 알 수 있었다. 은희 언니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래?”
세 사람은 각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지금도 그러나 보네요.”
“1학년 때 보기 딱 좋은 시험이니까 그런 거 아냐? 내 기억으론……그 구슬 안에 든 마력량이 대충 100 정도 되던가? 그랬지? 제현아.”
“어어. 게다가 수정구 안에는 마력을 끌어당기는 자석이 심어져 있지. 처음 했을 때 평소보다 마력을 움직이는 데 저항감이 들어서 이상해했던 기억이 나.”
부회장 선배가 말을 이었다.
“그 마력을 1분 만에 옮긴 거면 1학년 사이에선 당연히 1등이다. 참고로 역대 최고 기록이 아마 54초였을 거다.”
“그래요?”
이 이야기만은 제현 선배도 처음 안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말에 천호 선배가 깜짝 놀라며 제현 선배의 등을 툭툭 쳤다.
“헐……야 야, 그거 제현이 네 기록이잖아!”
“어? 그랬나?”
“어! 그랬어!”
그러니까 저 기록이 제현 선배의 기록이라고……. 나는 선배들의 말을 들으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은희 언니가 “재수 없어!”라고 소리치고 제현 선배가 “내가 뭘!”이라고 당황하는 동안 아이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하, 나는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최고 기록이 54초라고?’
즉, 나는 오늘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는 소리인가? 제기랄. 어쩐지 선생님들의 시선이 이상하더라니.
속에서 저절로 나오는 욕을 삼키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인정한다. 설령 크면 묻혀 버릴 만한 것이라 하더라도, 내가 좀 재능이 있긴 한가 보다.
“그렇다니 이번 시험은 우리 민희가 1등이겠네.”
잠시 후 은희 언니와 전혀 어른답지 못하게 옥신각신거리던 제현 선배가 헤실헤실 웃으며 민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민희는 그의 다정한 미소에서 시선을 피하며 애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내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해 질 녘이 되었을 때쯤에서야 민희네 집에서 나왔다. 놀다 보니 저녁까지 얻어먹게 되었다. 덕분에 배가 빵빵했다. 하늘 아래 붉게 깔린 융단을 보며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시선을 가만히 내리깔았다.
“시험 점수 좋게 나왔으면 좋겠다.”
“응.”
“우리 다음에는 친구들 한번 집에 초대해 보자. 제현 선배 생각보단 요리 잘하더라. 하긴, 둘이서 사니까 당연한 일일지도. 민희도 벌써 간단한 요리 정도는 할 줄 아는 것 같고.”
요리랑은 전혀 관련 없을 것 같은 얼굴로 제현 선배는 가정적인 요리를 차례로 내려놓았다. 그야말로 일등 신랑감이었다. 좋아하는 사람만 없었다면 당장에 결혼해 달라고 청혼해도 후회 없을 것처럼 남자의 좋은 조건은 전부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다.
‘언뜻 무표정해 보여도, 친구한텐 다정하고, 동생한테도 잘해 주고. 요리도 잘하고, 마법도 잘하고. 여자가 가만히 두질 않겠네.’
인하는 내가 하는 말에 고개를 숙인 채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제현 선배의 얼굴을 떠올리던 나는 문득 생각난 것에 인하를 돌아보며 물었다.
“맞다, 그러고 보니까.”
“……응?”
“나 있지, 민희네 오빠, 제현 선배 있지, 그 사람 어디서 한번 만나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왜일까?”
물론 여러 번의 생을 겪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보단 데자뷔를 많이 느끼는 편이긴 하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 얼굴에 한해서는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많지 않았다. 애초에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니까.
내 말에 인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봤잖아, 저번에.”
“아니, 그게……민희를 통해 만났거나, 저번에 영상으로 봤을 때라든가, 그런 게 아니라……뭐랄까……그 전에 만났던 것 같은…….”
“그러니까 만났잖아?”
인하는 당연한 말을 하는 사람을 본 것처럼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당황해 버렸다.
“응?”
“저번에, 은희 언니랑 같이 학교 갔을 때 만났었잖아. 그러니까 학교 입학하기 전에, 겨울에, 은희 언니랑 같이 대현 고등학교에 갔을 때. 제현 선배, 그때 가던 중에 은희 언니한테 말을 걸었던, 은희 언니가 눈치 빠르다고 했던 그 사람이잖아.”
“……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까, 작년 겨울이라고? 그러고 보니 그랬지. 인하와 은희 언니한테 이끌려 학교를 구경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만났던 사람들이 분명…….
“──아아아앗!”
나는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맞다! 그 사람이었어! 학생회실에 가면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 남자였다. 은희 언니를 향해 상냥하게 미소 지으면서도 우리를 보고서는 얼어붙을 것처럼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겨우 그때의 일을 떠올리고서 한심한 기분이 되었다.
아니, 스스로가 진짜 바보 멍청이처럼 느껴졌다. 나 진짜 바보 아냐? 그때 일을 다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얼굴만은 완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정말 나는 사람 얼굴은 진짜 기억 못 하나 보다. 부회장 선배도 은희 언니가 은인이라고 말해서 겨우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걸지도. 제현 선배를 처음 보고 분명 잘생겼다고 생각하며 감탄했던 기억이 있는데, 설마 지금까지 새까맣게 잊어 먹고 있었을 줄이야…….
그러나 나는 곧 그러려니 하는 기분이 되었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아니, 나만이 아니라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딱 한 번 만났던 남자의 얼굴을 반년이 지난 후에도 기억하는 사람이 특이한 거다. 아, 참고로 인하는 특이한 게 아니라 똑똑한 거다.
그럼, 그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하와 손을 잡고 붉은 노을 하늘 아래를 나란히 걸었다.
##07. 싸움
방학식 날, 모든 학교가 그렇듯이 우리들도 성적이 나왔다. 성적은 학생증에 직접 자료 형태로 전송되어 왔다. 우리는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서로의 성적표를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정확히 말해서 경악한 건 나뿐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예상했다는 듯 ‘과연’, ‘역시’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실기 시험은 알파벳 등급으로 나왔는데, 나는 A+로 만점이었다. 심지어 추가 점수까지 받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실기 시험에서 A+를 받은 게 나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시하를 제외하고는 전부 만점에 가산점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 ‘그나마’도 다음 성적을 보고 깨어졌다. 그러니까, 필기시험 말인데, 초등학교 1학년 수준의 문제다. 당연히 대부분 100점이거나 혹은 100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그래서 내 필기시험 등수가 어떻게 되냐면은……어, 1등이네. 그러니까 내 필기시험 점수랑 실기 시험 점수를 합치면……그냥 1등이라고! 나 난생처음으로 전교 1등 먹었다고!
‘으아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는 책상에 앉아서 하는 공부보다는 실전 마법에 훨씬 중점을 두므로, 필기 공부에는 그다지 교육열을 올리지 않았다. 그런 건 알지만 기분이 복잡했다. 전교 1등, 1등이라고…….
심지어 아이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마법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머리도 좋네.”
“무슨 소리! 은하는 딱 봐도 어른스러운 게, 머리 좋을 것 같잖아.”
아니, 아닌데. 근데 한수랑 민희만 저러는 게 아니라 친구들 모두 내가 머리가 좋다고 결론을 내리고 의기투합한 덕분에 나는 아니라고 손을 내저을 기회를 놓쳐 버렸다. 참고로 내가 머리가 좋다는 말에 가장 크게 동의한 것은 공부도 안 한 주제에 내 뒤를 따라 2등인 인하였다. 어이, 이봐들, 이런 아이가 진짜로 머리 좋다고 하는 거야.
하지만 일일이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 분명하므로 나는 결국 말하기를 관뒀다. 그래, 어차피 크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전교 1등을 한 게 결코 내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이야 어린애다 보니까 약간 어른스러운 내 행동이 다 대단하게 보이는 것뿐이다.
얼마 후 여름 방학이 찾아왔다. 드디어 찾아온 여름 방학을 반기며 나는 마법 훈련에 열을 올렸다. 학교에 다닐 동안엔 생각보다 맘껏 하지 못했던 마법 연습을 이 방학을 계기로 잔뜩 해 둘 생각이었다.
선아 아줌마한테 필요한 마법을 배우기도 하고 인하와 서로 집을 오가며 마법에 대해 의논을 했다. 도서관을 다니면서 내 마법과 관련된 책을 몇 권 골라 읽었다. 두껍고 설명만 쭉 이어지는 지루한 책이었지만 제법 읽을 만했다.
또한 마법 설정 노트에 적어 두었던 아이디어를 더욱 열심히 실행했다. 학교에 다니는 사이 노트에 적어 둔 마법 아이디어 개수가 많이 늘었다. 학교 수업 중엔 마법과 관련된 실용적인 내용이 매우 많아서, 듣다 보면 마법에 대한 설정이 이것저것 떠오르곤 한다. 그래서 나는 어디를 다니든지 수첩 하나씩은 반드시 몸에 지니고 다닌다.
방학 동안 나는 정말로 열심히 했다. 뭐……내용만 들으면 평소와 다름없다 느낄지도 모르지만, 여느 때보다 훨씬 열심히 마법을 연습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나름대로 바쁜 방학을 보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초등학생인 주제에 뭐가 바쁘냐고 말하겠지만, 나로서는 충실한 나날을 보내느라 상당히 바빴다.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고, 조사해 보고, 책을 읽으며 공부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
여름 방학 막바지, 인하네 가족들이 친척들과 함께 여행을 간 사이에도 나는 마법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오히려 박차를 가했다.
그러다가 개학 바로 전날, 마력을 운용해 공격 연습을 하던 나는 전력으로 마력 포를 쏘다가 그만 어깨가 탈골하고 말았다.
“윽……아, 아파아…….”
탈골한 직후에는 미칠 정도로 아파서 일어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은 채 흐느끼는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쓰러져 울고 있는 나를 보고 엄마가 기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엄마는 응급차를 부르고 급히 내게 응급조치를 했다. 엄마의 치유마법 레벨은 그리 높지 않아서, 큰 효과는 없었다.
병원에 간 나는 마법으로 치료를 받고 난 후에도 전치 3주는 된다는 판결을 받았다. 허얼…….
나는 허탈한 기분으로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어깨에서 손목까지 꽁꽁 깁스를 한 채였다. 그날, 소식을 전해 들은 아빠는 평소보다 일찍 집에 들어왔다. 아빠가 창백한 표정으로 내 상태를 물었다.
“대체 어쩌다가……?”
“탈골한 것만 아니라 팔꿈치 뼈에도 살짝 금이 갔고, 손목도 삐었고, 어깨뼈 근처 혈관이랑 피부에도 손상이 갔다더라고…….”
“대체 어쩌다 다친 거야?”
나는 독하게도 의사에게조차 내가 다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려다 멈추며, 이번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도 잘 모르겠어. 마법을 쓰는데, 갑자기 팔이 아파서…….”
“마법을 쓰다가 그런 거야?”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평소에는, 마법을 쓸 때, 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공격 훈련을 했는데, 나 공격할 때 표적을, 표적이 있는 부분에 마력을 집결해서 확산시키잖아? 좀 더 편하게 쓸 땐 표적이 있는 바닥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르게 하는 식으로…….”
“그래, 그랬지.”
“근데 마력만으로 공격을 할 땐 손에서 쏘아 날리는 게 보통이잖아. 그래서 손 바로 앞에 마력 포를 집결시켜서 결계 치고 단숨에 하늘로 쏴 봤는데…….”
나는 그때를 떠올리며 곰곰이 고민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마력이 쏘아져 나간 충격……반동 때문에 그런가……?”
나는 비로소 어린 내 몸이 무척이나 약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붕대에 감긴 어깨를 바라보며 고통과 함께 귀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아, 마력을 제대로 쓰기 위해선 어느 정도 육체가 받쳐 줘야 하는구나. 생각해 보면 몹시도 당연한 일이어서, 약간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대포도 포대가 약하면 포탄을 쏘지 못하고 부서진다. 그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깁스를 푸는 날부터 몸을 단련해 보기로 했다. 곧바로 본격적인 운동을 해서 근육을 붙이는 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체력 훈련은 필수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라면 운동 같은 거 딱 질색이었는데.’
하지만 마법이 걸려 있으니 아무래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일단……선아는 아무래도 새벽쯤에 돌아올 것 같대. 나중에 바로 정민 씨한테 부탁해서…….”
“응? 괜찮아. 의사 선생님 말 들어 보니까 오늘 바로 치료받는다고 해서 다 낫는 것도 아니라며? 새벽에 돌아오면 피곤할 테고, 내일 받으면 돼. 이 깁스, 통각을 둔화시키는 마법이 걸려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 아프지도 않고.”
“하지만 내일 바로 개학인데…….”
“괜찮아. 게다가 나 새벽에 못 일어날 것 같아서.”
“그래. 그럼 그러자.”
내 말에 엄마와 아빠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이미 치료를 한 번 받았지 않나. 심각한 상태가 아닌 것이다. 진통제를 먹었다고는 하지만, 통증도 제법 가라앉았고…….
어쨌거나 이런 탈골 따위는 빨리 나을 것이다. 나는 마루에 앉은 채 다치지 않은 반대쪽 손을 움직여 마법을 썼다. 그러자 어쩐지 탈골된 어깨가 삐걱거리며 아파 오는 기분이 들었다.
‘윽……!’
나는 신음을 참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쳐서 그런 건가?
나는 후 한숨을 내쉬며 마법 사용을 그만두었다. 이거야 원, 오늘은 아무래도 마법 훈련은 못 하게 생겼다.
나는 한 손으로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조작했다. 내일 새벽에 온다고……? 인하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여행을 한다 했으니 즐거운 경험을 잔뜩 했으면 좋겠다.
나는 인하의 이름을 바라보다가 결국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지금 연락하면 무심코 탈골했다는 이야기를 해 버릴 것 같다. 어차피 내일이면 알게 될 건데 괜한 걱정을 시킬 필욘 없겠지.
그러나 새벽에 돌아온다는 말과는 달리 인하는 다음 날, 평소 등교 시간이 되었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그 집 할머님한테 잡혀 있다나 봐. 좀 늦게 돌아오게 될 것 같아.”
“할머님이면……인하 입장에서 할머니인 거야, 아니면 선아 아줌마 입장에서 할머니인 거야?”
“선아의 엄마의 엄마. 인하한테는 증조할머니가 되겠네. 지금 생각해 보면 인하의 성격이나 외모는 다 그 할머님한테서 온 것 같아. 음, 하지만 선아네 집은 대대로 얼음마법을 쓰는데, 인하에 와서 대가 끊기는 건가…….”
호오. 그건 또 신기한 사실을 알았다. 인하와 꼭 닮은 할머님이라…….
“그분도 초월자셔. 은하도 언제 한번 만날 일이 생기겠지.”
“……!”
세상에, 초월자라고? 이거야 원, 재능이 유전된다는 건 사실인 것 같다. 초월자 밑에 초월자가 나오지 않았나. 그걸 생각하면 관계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인하는 선아 아줌마나 그 할머님이랑은 달리 빛마법을 쓰긴 하지만. 나는 신기해하며 감탄했다.
결국 나는 혼자서 학교에 갔다. 사람이 거의 없는 학교를 거닐면서 다소 생소한 기분이 되었다. 혼자 등교하는 게 참 오랜만이구나 싶었던 것이다. 나는 가장 먼저 교실에 도착해 자리에 앉았다. 모처럼 개학 날인데 인하와 함께 등교하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오랜만에 만나 보게 될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니 가슴이 설렜다.
이것 역시 이례적인 일이었다. 전생에 학교를 다닐 적에는 친구도 없고 의욕도 없어서 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 따윈 전혀 안 했다. 개학을 할 때마다 피곤하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계속 집에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구나.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기뻤다.
당연하지만, 등교해서 나를 본 친구들은 다들 기겁했다. 얼굴만 마주치던 같은 반 친구들도 놀란 표정으로 괜찮냐고 물어 왔다. 친구들 중에 나 다음으로 교실에 도착한 건 한수였는데, 한수는 진짜 기겁했다.
“안……너, 너! 그게 뭐야?!”
기겁해서 달려와서는 차마 손도 못 대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정말로 귀엽고 고마워서 나는 괜찮다며 웃었다. 한수는 내가 웃는 걸 보고는 버럭 소리 지르더니 어떻게 된 거냐며 추궁했다. 나는 훈련을 하다가 실수를 했다고만 말했다.
뒤이어 등교한 민희나 시하, 현호도 붕대로 칭칭 감아 고정시킨 내 팔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민희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인하는…….
인하는 1교시가 시작되기 10분 전에 겨우 학교에 올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를 보며 기겁했다.
“파, 팔……팔이 왜……!”
“아, 응. 어제 훈련하다 좀 다쳤어.”
그러자 친구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