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250
나는 손을 들어 소영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3년이 지났지만 조금도 바래지 않는다. 결코 잊고 싶지 않다.
“그럼, 갔다 올게.”
“그래. 상황 확인하고 전투할 일 생기면 우리 불러.”
“응.”
생각해 보니 다른 조직과 협력하는 건 SR과 협약을 맺은 후로 처음이다. 어느 조직 사람이 오는 거지? ……대현 사람이 있을 가능성도 있겠지.
대현과 마주하는 것이 껄끄러운 것은 왜일까. 사실 우리는 이유를 알고 있다. 대현에게 우리는 언제까지나 ‘아이’일 테니까.
우리는 복수를 할 수밖에 없지만 대현은 그런 우리를 챙기려고 할 테니까. 자신의 상처만큼이나 우리의 상처를 안쓰러워할 테니까.
하지만……가면을 쓴 모습을 아는 게 아니라면 만나도 될 것 같다. 조금 만나고 싶기도 하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동안 성진이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대서양 한복판에서 미국으로, 주위가 일그러지더니 이내 새로운 풍경으로 재조합됐다. 어느새 우리는 커다란 건물의 정문 입구에 서 있었다. 여기가 바로 SR의 본부였다.
SR 프로젝트가 있는 도시는 다른 도시에 비해 깨끗하고 평화롭다. SR이 단단히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들의 본거지도 크다. 예전보다는 조금 축소되었을지언정 여전히 넓고 깔끔하다.
마찬가지로 당연한 거지만, SR 본부는 건물에서 정원 끄트머리까지 리카르트의 관리하에 있다. 허락받지 않은 마법사는 마법에 의해 바로 쫓겨난다. 설령 운 좋게 들어온다 해도 미로 정원에 갇혀 영영 나갈 수 없다. 하지만 허락받은 자는 다르다. 대문에서 몇 걸음 옮긴 순간 바로 본부 건물이 마중하러 온다.
우리는 소리 없이 정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우리를 맞았다. 언제나처럼 변장을 하고 있었지만, 어차피 SR이 만들어 준 신분에 있는 얼굴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바로 우리를 알아보았다.
“어서 오세요. 회의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어디서 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우리가 SR과 협약을 맺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는 꽤나 많이 이 건물에 들렀다. 대현과는 우연히도 만나지 않았지만, 다른 연맹의 마법사와는 여러 번 만났다. 같이 일을 한 적은 없지만.
우리는 대리석 위를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걸어갔다. 곧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다.
“어서 오세요. 딱 맞춰 오셨네요.”
회의실 안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얼마 전에 한 번 만난 라듀 칼데린과……유미? 사람들 사이에 놀란 눈으로 우리를 보는 유미가 있었다. 조금 머뭇거리는 우리를 레일리가 부드럽게 웃으며 맞았다. 그 옆에는 마치 자매같이 닮은 그녀의 어머니, 샐레나 리카르트가 서 있었다.
레일리가 우리를 웃는 얼굴로 지적했다.
“연맹 회의에서까지 변장을 할 필요는 없잖아요. 여기 사람들은 확실하게 같은 편이라고요.”
나는 말없이 귀에 걸린 환각 아이템에 손을 가져갔다. 나는 잘 모르는 유란 사람과 같이 서 있던 유미가 다가왔다.
“…인성이 맞지? 인성이, 은하, 성진이지?”
우리는 말없이 변장을 풀었다. 마법으로 변장용 화장도 지웠다. 하나로 묶은 검은 머리카락과 보다 은색에 가까워진 은갈색 눈동자. 전과 조금 달라졌을지언정 예전의 모습이 선명히 남아 있는 우리를 보며 유미가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 너희구나!”
유미가 달려와 나와 인성이를 꽉 끌어안았다. 우리 세 사람을 한꺼번에 끌어안지 못해 아쉽다는 듯 한 손으로 성진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살아 있었구나! 무사히…!”
“그럼 우리가 죽었을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죽은 걸로 처리된 뒤 어디 있는지 소식도 없고, 연락도 없고……SR에 가끔 출입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아, 맞다. 이번에 대현에서 성후 씨랑 주연 씨랑 백한 씨가 와. 세 분 다 은하랑 친하지?”
“백한 선생님이…….”
나는 보이지 않게 입 안을 살짝 깨물었다. 인성이와 성진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때마침 뒤에서 문이 열렸다. 아주 약간의 차이였나 보다. 가까스로 정문에서 마주치지 않고 여기에서 만났다. 동요한 그 기척이 씁쓸하게 다가왔다.
──만나고 싶지 않았다. 굳게 무장한 마음이 다정함으로 누그러질 것 같아서. 기쁨에 가까운 감정은 느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만나게 될 건 알고 있었다. 사실은 많이 만나고 싶었다.
동요는 잠깐이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회의실에 멈춰 선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예전과는 달리 어두움 외에는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를 한 성후 오빠와 서글프고 외로운 눈을 한 주연 선배, 백한 선생님이 보였다.
“너희……!”
주연 선배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숨을 삼켰다. 빨리 반응한 것은 주연 선배였지만, 한발 빨리 우리에게 다가온 것은 백한 선생님이었다.
“너희들!”
생각한 것만큼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무감정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에요, 백한 선생님, 성후 오빠, 주연 선배.”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호칭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백한 선생님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백한 선생님의 표정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3년 내내 연락도 없이 두문불출하더니, 어? 그래 놓고 아주 태연하다?”
“연락을 못 한 건 죄송해요.”
인성이와 성진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지켜봤다. 걱정, 이라.
담담하기 그지없는 어조에 백한 선생님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백한 선생님, 너무 그러지 마세요. 얘들도 심정이 많이 복잡했겠죠. 저도 그 기분……알아요.”
“……그래. 그래도 어디 아픈 덴 없어 보여서 다행이다. 안 아픈 거 맞지? 표정이 왜 이렇게 어두워?”
“아픈 덴 없어요.”
“그래.”
백한 선생님은 오래전처럼 내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인성이가 옆에서 왠지 모르게 안도에 가까운 미소를 그렸다.
나는 고개를 움직여 성후 오빠를 보았다. 성후 오빠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작게 ‘오랜만이다’라고,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나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 참, 고작 3년 사이에 많이도 변했구나. 평생 전투와는 거리가 멀 것 같았던 놈이, 어느새 자세가 잡혔어.”
그는 내 옷차림과 내 액세서리를 씁쓸한 눈으로 살폈다. 말 그대로 ‘선생님’다운 모습에 가슴속에서 미묘하게 파문이 일었지만, 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숨어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말 한마디에 잃어버린 현실을 깨닫는다. 가슴이 바위에 눌린 것처럼 아파 왔다. 백한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열심히 했구나.”
어린아이 취급 하는 말투에 이번에야말로 울컥했다. 화가 나서가 아니다. 자존심이 상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다만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시선을 피하던 나는 문득 우리가 있는 방향을 왠지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레일리를 발견했다. ……오지랖도 많은 사람이다, 참.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레일리가 박수를 두어 번 쳤다.
“자, 그럼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고, 회의를 시작할까요? 여러분 모두 앉아 주세요! 아, 그리고 혹시 몰라서 말하는 건데, 유명했으니 만큼 정체를 눈치챈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분들은 트라베리아의 표적이었으므로 관련된 정보에 관해서 반드시 침묵해주시길 바랍니다.”
“알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레일리에게는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백한 선생님이 내 머리에서 손을 뗐다. 기다렸다는 듯 성진이 내 손목을 붙잡고 이끌었다. 내심 뿌리치고 싶었지만, 어린아이 치기 같은 기분이 들어 그만뒀다. 우리가 중간 자리에 앉자 유미 일행과 백한 선생님 일행도 그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늘 이곳에 모인 연맹 멤버는 레일리와 샐레나를 포함해서 SR의 마법사가 3명, 대현이 3명, 유란에서 2명, 경찰에서 2명, 방위부에서 3명, 총 13명이다.
우리의 재회로 인해 약간 소동이 일었지만 곧 자연스럽게 회의가 시작됐다. 사전 설명은 이미 다들 듣고 왔기 때문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마력 증강제가 돌고 있는 도시는 세 곳이에요. 많이 퍼진 게 세 장소고, 다른 곳에서도 조금씩 돌고 있나 봐요.”
레일리 리카르트의 위로 영상이 떠올랐다. 다른 곳에 비해 무척 깨끗하고 활발해 보이는 도시다.
“이탈리아 남쪽에 있는 세놀드. 그 수호 도시 플로리아의 경계에 있는 마을이에요. 플로리아의 경계에 위치한 데다가 경찰 지부와도 가까워서 치안이 참 좋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암암리에 돌고 있는 걸 PE의 간부가 발견했다고 해요.”
레일리는 영상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 갔다.
“그리고 여긴 사실상 멸망한 전(前) 독일 서부에 있는 난민가 로앙. 피해가 가장 심각해요. 근근이 겨우 먹고살던 사람들이 만 명 가까이 중독되어서 옆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폐쇄했다나 봐요. 그런데 증강제로 힘과 마력이 세지니까, 일반 마법사로는 막을 수 없어서 방위부와 경찰을 불렀다고 하네요. 너무 흉폭해서 조사하는 데 위험이 많대요.”
마지막, 세 번째다.
“네덜란드 동부 로테르담. 여기도 피해가 눈에 띄지는 않아요. 하지만 요즘 갑자기 흉폭하게 강해지는 마법사가 늘었다더군요. 게다가 마약 거래 현장에서 베일 프라이먼을 봤다는 사람이 있어요.”
“베일 프라이먼? 그자는 분명…….”
“트라베리아의 밑에 붙은 A랭크 마법사예요. 전에는 내과 의사이자 유전자학 박사였어요. 마약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예요.”
“……!”
SR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베일 프라이먼, A랭크 마법사. 지금 내 수준이라면 별거 없는 상대……라고 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여기에서 저 이름을 들을 줄이야. 그도 그럴 게, 나는 인성이를 흘끔 돌아보았다. 그는 가만히 자료를 살피고 있었다.
“우리는 이 세 도시에서 상황을 조사하고 마약을 수색할 거예요. 최종 목표는 당연히 마약이 퍼진 원인을 뿌리 뽑는 거고요.”
“조사입니까. 조사라기에는 멤버가 거창하군요.”
“A랭크 마법사가 당했는걸요. 게다가 유력한 용의자는 트라베리아에 붙은 ‘뱀’이니까요.”
“과연.”
“그러니 미리 스케줄을 확인하고 시간을 맞춰 봐요.”
“흐음, 그런 거라면 다른 동료들과도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인성이가 손을 들며 가볍게 발언했다. 그래, 그렇지. 지금 우리는 ‘산델벤’을 치는 작전이 먼저니까. 레일리와 샐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겠죠. 당장 스케줄을 정하자는 게 아니니 걱정 마세요.”
그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서류를 나눠 줬다. 서류에는 마약 중독 흐름 지도나 마력 증강제에 중독되어 심한 부작용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 중독 증상 등이 정리되어 있었다.
서류에 적힌 부작용은 심각했다. 확인된 사망자만 이미 백을 넘었다. 가장 먼저 혈관에 이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혈압이 높아지며 맥박이 빨라진다. 체질 변화가 나타난다. 귀가 길어지거나, 머리 색이나 눈 색이 변하고, 피부색이 변하거나, 피부에 반점이 생기기도 한다. 초기에는 근육량이 증가하지만 약을 계속 복용하면 근육이 쪼그라들고 몸이 마른다.
이 약을 지속해서 복용하면 마력이 최소 3배에서 최대 10배까지 증폭된다. 중독자들이 대거 발생할 만했다.
“심하군요.”
“트라베리아, 이번엔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백한 선생님이 이를 갈았다. 전쟁으로 죽은 사람도 많지만, 전쟁 후 그 여파로 생존능력을 잃어 죽은 사람도 많다. 아사, 병사, 강도 살인 등등.
속에서 끓어오르려는 분노를 참아 멈췄다. 냉정해야 한다. 지금은 감정을 보일 때가 아니다. 성진이 그렇게……그렇게…….
‘……그렇게 말했던 주제에.’
감정을 무사히 억눌렀다.
“아직 트라베리아가 한 짓인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주모자가 베일 프라이먼으로 확정된다 해도 그가 개인적으로 한 짓일 수도 있으니까요.”
“알아. 하지만 어느 쪽이든 짜증 나잖아.”
“그건 동감입니다.”
“A랭크 마법사가 당했다고 했는데, 얼마나 당했어?”
“경찰이나 방위부를 비롯해서 마약을 조사하던 사람들이 여럿 행방불명이에요. 행방불명된 실력자는 A랭크 1명, B랭크 2명, C랭크 5명, D랭크 10명.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고요.”
“그래서 이렇게 뛰어난 멤버를 모았던 거군.”
“그렇지요.”
B랭크에 A랭크까지 실종됐으니 멤버가 화려해질 만도 하다. 잠시 후 레일리가 제안했다.
“오늘은 멤버가 모인 김에 상황이 가장 심각한 로앙에 사전 조사를 가 보면 어떨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방위부분들께 부탁받은 것도 있고요.”
“부탁받았다고?”
“그렇습니다.”
앉아 있던 방위부 사람 중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A랭크 마법사, 에단 카로스다.
“로앙의 상황은 지금 매우 심각합니다. 이대로 두면 로앙의 주민들은 전부 마약의 부작용으로 사망할 겁니다. 부장급 대원이 구출을 위해 돌입했지만 큰 부상을 입고 겨우 완전히 중독되지 않은 피해자 4명만 구출해 돌아왔습니다. 새롭게 구출조를 짰습니다만, 아무래도 정보가 부족합니다. 여기 있으신 분들은 다칠 염려가 없지요. 사전 조사를 하러 가는 김에 레일리 씨에게 마을의 구조 확인과 피해자가 있는 장소의 수색을 부탁드렸습니다. 제가 구출조의 리더입니다.”
“하긴, 레일리의 마법이라면 직접 가지 않아도 전부 조사할 수 있을 테니까.”
“그 말대로랍니다.”
레일리가 생긋 웃었다.
“또한 발 빠르게 치료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완전히 마약에 물들지 않은 분 몇 분을 더 구출해 갈 생각입니다. 협력 부탁드립니다.”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딱히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에단 네 실력이라면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구출받은 사람은 몸을 가눌 수 없을지도 모르고, 날뛸지도 모르고, 부상을 입었을지도 모릅니다. 신중한 편이 좋지요. 한시가 급하므로 사전 조사가 끝나면 저는 바로 구출조에 합류하려고 합니다. 이 점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오케이.”
방위부의 에단, 직접 만난 것은 오늘로 두 번째지만 참 정중한 사람이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인성이, 이성진은 로앙으로 가기 전 환각 아이템을 사용해 변장을 했다. 귀걸이를 한 번 만지는 것으로 바뀐 우리 모습을 보고 주연 선배나 유미가 신기해했다.
이내 우리는 로앙으로 이동했다. 미국에서 독일로, 텔레포트를 펼친 것은 성진이었다. 그가 우리 중 텔레포트 범위가 가장 넓다.
샐레나는 남았다. 그녀가 함께한 것은 SR의 책임자로서지 이번 사건의 책임자로서가 아니었다. 이번 사건의 책임자는 레일리다.
10명 남짓 되는 일행은 단숨에 로앙의 빈민가 구역에 내려섰다. 부수어진 나라에 피난민이 모여 생긴 빈민 마을이다. 도시 주위로 바리케이드가 단단히 둘러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마력 증강제 사건을 조사하러 왔습니다. 세계 수호 연맹(World Protection Union)입니다.”
가볍게 생각하면 낯 뜨거운 이름이다. 그런데 진짜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세계 수호 연맹에는 많은 조직이 속해 있다. 그 가장 위에 있는 자들은 복수보다도, 트라베리아에게 반발하는 것보다도, 무너져 가는 세계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누군가 말하길 트라베리아를 막기 위한 마지막 방어선. 그런 만큼 강한 마법사를 보유한 이름 높은 조직이 대거 속해 있다.
마법사 랭크 프로젝트, 대현을 비롯한 미성년 마법사 보호 협회, 세계 경찰 조직, 원래 국가 안보를 수호하던 방위부, 세계 무술 연합의 대표 중국 무술 연합, 난민을 후원하며 유럽과 미국 곳곳에 평화 도시를 만든 평화 기구 PE, 중동 용병 연합 대표 울비스, 예부터 과학과 마법을 연구 조사했던 연구자 및 학자 집단 도시 국가 리브리, 영국에서 시작된 마법 평준화 프로젝트 집단. 그 외에도 그보다 작은 많은 조직이 속해 활동하거나, 협력하고 있다.
우리와 그들도 협력 관계. 하지만 그저 협력 관계일 뿐이다. 그것도 연맹의 협력자가 아니라 SR의 개인 협력자다. 왜냐면 우리의 목적은 그렇게 다정한 게 아니니까.
이곳을 관리하고 있던 방위 부대의 협력을 받아 바리케이드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코트 후드를 눌러썼다. 안에 무언가 기분 나쁜 마력이 날뛰고 있는 게 보여서였다. 성진이 인성이에게도 후드를 씌웠다.
“마력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마력으로 전염될 수도 있으니 조심해라.”
이 코트는 후드를 쓰면 방어력이 올라간다. 특히 호흡기로 흡입되는 독에 중독될 확률이 낮아진다. 인성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역 안에 들어서자마자 보기 안 좋은 광경이 눈에 띄었다. 삐쩍 마른 시체가 한구석에 쌓여 썩어 가고 있다.
“안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건 이미 들었습니다만, 안에도 사람이 있을 텐데, 왜 묻지 않고 저렇게 방치해 놓은 거죠?”
“저희와 마찬가지입니다. 이지를 잃고 흉폭해진 마법사한테 습격당하기 때문이에요. 이성을 잃고 흉폭해진 자들은 약에 조금 중독된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합니다. 불씨가 꺼지기 직전의 마지막 힘이겠지만요…….”
“그렇습니까….”
“정신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충동에 갉아먹혀 흉폭해집니다. 지금은 과연 멀쩡한 사람이 남아 있는지 의문이에요. 너무 흉폭해서 팀장급 대원이 돌입해도 겨우 다섯 명밖에 구해 데려올 수 없었습니다. 마을의 반도 못 갔죠.”
“크르르르…….”
말을 하기가 무섭게 사람의 기척이 다가왔다. 그들은 다 해어진 옷을 입고 마치 짐승처럼 네 팔다리로 서 있었다. 하나, 둘, 셋, 순식간에 20명 가까이 되는 사람에게 둘러싸였다. 나는 그들을 흘끔거리다가 서류를 확인했다. 저렇게 삐쩍 마르다니, 이지를 잃은 뒤 아무것도 먹지 않은 걸까? 그래도 보통 본능이라는 게 있잖아.
“이현.”
인성이가 작게 가명을 부르자 그는 의미를 알아차리고 살기를 내뿜었다. 성진의 살의는 절대적이다. 이지를 잃은 짐승마저 물러나게 할 만큼, 트라베리아의 키메라마저 원초적으로 겁먹게 만들 만큼.
마약에 빠져 이지를 잃은 사람들이 깨갱 하며 자리에서 오들오들 주저앉았다. 바싹 굳어 움직이지도 못했다. 같이 온 사람들도 갑작스러운 살기에 반사적으로 몸을 떨며 굳었다.
“어머, 무서워라.”
레일리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여전히 댁네 번견은 무시무시하네요.”
“…….”
나는 말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좋은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안 좋은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계속 가지요.”
성진의 살기가 남아 있어서 그런지 이지를 잃은 사람들은 우리가 다가간 순간 헉 하며 도망갔다. 레일리는 주위를 슥슥 둘러보며 마법을 펼쳤다.
“아직 제정신이 남아 있는 사람을 추적하라.”
붉은 회로가 도시 여기저기로 뻗어 나가며 멀어진다. 저 회로는 머지않아 레일리에게 유용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올 것이다.
평소 소란스럽고 무언가 부수는 소리로 끊이지 않는다는 도시가 오늘따라 참 조용했다. 길 곳곳에는 시체가 있다. 임시로 세운 건물도 대개 폐허다. 정의감 높은 일행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생존자가…안 보이는군요.”
“숨어 있을 겁니다. 레일리 씨의 마법에는 무언가 감지된 게 없습니까?”
“잠시만요─. 음……아직 전부 다 검색되진 않았지만, 반경 1km 내에 마약에 완전히 중독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는 사람은 40명 정도 돼요.”
레일리 앞으로 사람의 분포도를 표시하는 지도가 반투명하게 떠올랐다. 지도 크기가 점점 축소되며 검색되는 영역이 넓어진다.
“이 근처에도 있어요. 저기.”
레일리가 한 방향을 가리켰다. 나는 그 방향을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저 사람들은 아직 마약에 완전히 중독되지 않았군. 하나, 둘, 셋……스무 명인가. 모여서들 숨어 있는 모양이다.
레일리가 아니라 나도 알아볼 수 있다. 약에 완전히 중독된 사람은 마력의 색이 사악하다. 색이 마구 섞인 것처럼 색감이 더럽다. 하지만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까 만났던 그들과는 달리 마력이 완전히 더러워지지 않았다.
“완전히 중독된 거랑 중독되지 않은 걸 어떻게 알아보는 거야?”
“음……그냥 자료로 떠요.”
“그냥?”
“네, 그냥. 랭크 시험처럼요. 저희 마법은 생물과 마법을 분석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고요. 뭐어, 랭크 시험은 여러 가지 제약이랑 도구를 결합해 만든 특별한 ‘규율 세계’라서 자기보다 훨씬 강한 마법사의 실력까지 파악하는 거지만요. 그래서 개인으로는 랭크 시험만큼 자세히 조사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별거 아니에요.”
레일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파악하는 데 최적화된 마법, 역시 리카르트의 혈족마법은 대단하다. 레일리의 랭킹은 S랭크 중상위지만, 설령 상위 실력자라도 리카르트의 혈족마법은 무시할 수 없다.
혈족마법. 이른바 다이아몬드 수저. 탄생한 순간부터 뛰어난 실력을 보증하는 보증 수표. 그래도 부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조금 고민하던 레일리가 문 앞에 다가가 손등으로 똑똑 노크했다.
“실례합니다! 안에 계신가요? 세계 수호 연맹에서 왔습니다! 혹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은 없나요?”
우리는 서서 잠시 기다렸다. 안에서 숨을 삼키거나 참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잠시 후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의 얼굴……알고 있습니다. 레일리 리카르트죠?”
“네. 맞아요.”
“혹시……저희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까?”
바로 구원 요청이다. 레일리는 싱긋 웃었다.
“물론이죠. 저희는 여러분을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걸요.”
“…….”
침묵이 이어졌다. 그것도 잠시, 덜컹 소리와 함께 빗장 문이 열렸다. 빈민가에선 드물게도 번듯한 구조를 지닌 집이다.
“들어오세요.”
안은 낡고 습했으며 나무 기둥에는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는 그나마 멀쩡한 집이었다. 안에는 예상대로 20명의 사람이 있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다들 피폐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았다. 그들도 우리도 바로 본론을 꺼냈다.
“여러분을 구하러 온 건 사실이지만, 마약을 조사하기 위해 사전 조사로 온 것이기도 해요. 그러니 부디 저희에게 협력해 주세요.”
“협력이라면……?”
“아는 것에 솔직히 대답해 주시기만 하면 돼요. 의존성이 강한 마력 증강제, 마력을 짧은 시간 안에 강하게 해 주는 대신 부작용과 중독 증세가 나타나죠. 당신들도 그 약을 먹었죠?”
“그, 그렇습니다…….”
가장 건장한 청년이 울먹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요. 그걸 먹었어요. 그래서 이 꼴이 된 겁니다.”
“그 당시의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해 주셨으면 해요.”
“그 전에 혹시 남아 있는 마약이 있나? 그걸 조사해 보고 싶은데.”
백한 선생님이 관심 있는 얼굴로 끼어들었으나,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남아 있는 마약은 없습니다. 있었다면 저희도 이미……밖에서 날뛰는 짐승과 똑같은 꼴이 되었을 겁니다. 지금도 갈증에 허덕이고 있으니까요. 있다면 참지 못하고 먹었을 거예요.”
남자가 괴로운 얼굴로 목을 잡았다.
“적어도 이곳에는 없습니다. 한 사람이 중독 증상을 견디지 못해 미쳐 날뛸 때마다 모두 힘을 합쳐 제압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건 아쉽네요. 그럼 먼저 처음에 이곳에 마약이 돌았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처음 마약이 누구의 손에서 나왔는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걸 알았으면 미치기 전에 그놈을 두드려 패서 죽이거나 아니면 약을 빼앗았을 겁니다.”
“흐음…….”
“다만 처음에 우리는 이것을 ‘밥’이라면서 받았습니다.”
“밥이라고요?”
“네. 한 알만 먹어도 굶주림이 사라지고 마력도 강해진다면서 친구가 주더군요. 친구도 소개받은 거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분은 어디 있죠?”
“그놈은 죽었어요. 부작용을 이기지 못하고…….”
“…….”
“초기에 먹은 놈이었거든요. 우리는 좀 늦게 약을 접해서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거고요.”
마력 증강제, 그 비싼 걸 ‘밥’이라면서 뿌렸단 말이야?
“그걸 그렇게 펑펑 뿌렸대요? 그냥 식사 대용 식품으로?”
“네. 가격도 쌌어요. 아니, 초반에는 무상으로 뿌렸고요, 시간이 지나니 그 전에 뿌린 건 홍보였다면서 돈을 받고 팔았어요. 이 정도면 살 만하다. 작은 알약 하나에 공복이 해결되고 마력이 강해진다면야 살 만하다. 다들 그러면서 샀지요. 게다가 맛있었거든요.”
“그야 맛있었겠죠. 마약이니까.”
“그땐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먹을수록 그 작은 알약에 빠져들었다. 재고가 없다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물건을 훔치고 사람을 때려 뺏어서라도 돈을 마련해 약을 샀다.
사람들이 이상함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그들은 중독되어 벗어날 수 없었다.
머지않아 초기에 약을 먹은 사람들이 이상해졌다. 몸은 마르고, 마력이 흉폭해지며, 짐승처럼 이지를 잃고 날뛰었다. 육체 구조가 변하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엔 금단 증상을 이기지 못해 잠깐 이지를 잃을 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영영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 후에는 흉폭해진 사람들을 피해 여기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저희가 아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저희를 제발 이곳에서 내보내 주세요!”
“부탁드려요!”
“제발!”
사람들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마약이라. 나는 흘끔 남자를 보았다. 이 중에선 저 남자가 제일 중독 정도가 심하다.
“저기, 실례합니다.”
나는 손을 들고 질문했다.
“그 약, 어떻게 생겼나요?”
“어떻게……생겼냐니요?”
그의 의식이 내게 향했다. 이 순간, 그의 정신은 완전히 내게 붙잡혔다.
“약이니까 동그랬나요?”
“네? 네. 딱딱한 알약이었는데, 전체적으로 하얗고, 녹색 점이 박혀 있었어요. 크기는 이 정도였습니다.”
남자가 검지와 엄지를 살짝 벌렸다. 그 사이에 무언가 형상이 생겨났다. 어라 어라 하는 사이 알약이 남자의 기억을 모태로 완전히 형상을 갖췄다. 나는 약이 형상을 갖추자마자 그것을 빼앗아 들었다.
“아니, 방금, 무슨?”
“야, 약……약이다……윽…….”
약을 본 사람들의 눈빛이 변했다. 백한 선생님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한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