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259
혼난……다고? 이성진이? 누구한테?
이상한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은 이상하게도 기억에 잘 남지 않았다. 위화감도 금방 잊었다.
그건 그렇고 엄청난 실력이다. S랭크 상위 마법사의 마법 때문에 입은 상처를 고작 몇 분 만에 완치시키다니. S랭크 마법사 중에 저런 사람이 있었던가? 아니면 랭크 시험을 치지 않은 숨겨진 실력자?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성진의 손에 잡혀 있던 손을 빼냈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불편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성진이 툭 내뱉었다.
“역시 의사가 필요해.”
“……의사?”
“우리 싸움은 위험한데, 제대로 치료를 할 수 있는 마법사가 없잖아. 인하 그 녀석은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으니 가벼운 상처만 고치는 게 고작이고. 앞으로 싸울 일은 점점 많아질 텐데.”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속삭였다.
“이번처럼 다른 의사한테 부탁하면 되잖아?”
“그 녀석한테 부탁하면 대가가 많이 드는 데다가, 뭣보다 그 녀석은 한곳에만 있는 놈이 아니야. 며칠 지나면 내 힘으로도 못 찾게 될 거다.”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평소에 찾아가는 의사가 있잖아.”
“돈이 들고 잠깐밖에 치료를 못 받지. 그래서 치료받을 수 있는 범위가 제한적이야. 치료 전문 마법사를 동료로 두는 게 나아.”
“동료를 더 이상 늘리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말했지만 성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상한 고집 부리지 마. 앞으로도 위험한 싸움을 계속하려면, 의사는 반드시 필요해.”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3년 전, 우리가 한 맹세였다. 복수하겠다고, 반드시 내 손으로 그 여자를 죽이겠다고 맹세했다. 트라베리아의 마법사를, 전부 쓰러뜨리겠다고. 그걸 위해선 어떤 고통도 시련도 감수하겠다고.
우리 다섯 명이서 한 맹세였다. 미영 할머니가 그 사이에 낀 것조차 나는 솔직히 그다지 달갑지 않다.
“그야 고집을 부리게 되지. 당연하잖아! 우리가 이러고 있는 게 무엇 때문인데…!”
눈가가 뜨거워졌다. 나는 어깨 위에 있는 외투를 손으로 붙잡으며 쉰 소리로 내뱉었다. 성진이 나를 돌아보았다.
“죽이기로 했잖아. 그 녀석들을……우리 소중한 사람을 죽인 트라베리아에 복수하자고 맹세했잖아…! 난 널 이해하지 못하겠어! 넌, 정말…….”
나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지금껏 하지 않으려 애쓰며 담어 두었던 말이다. 부당한 분노라고 생각했다. 이성진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냉정하고 냉랭했다. 그저 감정이 겉에 잘 드러나지 않는 성격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알게 되고야 만다. 그가 우리와는 달리 복수에 필사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에게 그 죽음이 아무 의미도 없었을 리는 없다. 냉정하고 초연한 태도가 나는 항상 불안했다. 네가 우리를 미치도록 걱정한다는 건 안다. 걱정할 뿐이지. 너는, 정말로 복수를 할 마음이 있나? 트라베리아의 마법사를 눈앞에 두고도 냉정을 유지하면서?
“넌 왜 언제나 그렇게 태연한 거야? 어떻게 항상 그렇게 냉정할 수 있어?”
“유은하…….”
“넌…, 윽……!”
성진이 외투를 잡고 있던 내 왼손 위에 손을 겹쳤다. 그는 누구보다 먼저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을 알았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 잔혹한 학살의 시간을 보았으면서도 이 녀석은 항상 초연했다. 냉정하게 바로 달려들려는 우리를 말렸다. 우리를 여기까지 이끈 것은 성진이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한 걸음 물러서 우리를 제어했다. 무언가 먼 곳을 보는 눈동자로,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넌 정말 복수를 할 마음이 있어……?”
“당연하지.”
“……!”
내 왼손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한 번도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정말? 정말일까?
“다만……네가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 걱정이 돼. 원하는 힘을 얻을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니까.”
“…….”
“나는 네가 다시 웃었으면 좋겠어.”
나는 이를 악물었다. 웃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웃을 수 있을 리가……없잖아!”
성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
“……알아. 하지만 살기 위해 하는 복수잖아.”
“뭐?”
“너는 살기 위해 복수하는 거야.”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살기 위해 하는 복수? 영문을 알 수가 없다. 내가 복수하는 건 잃었기 때문이다.
한순간에 소중한 것이 전부 핏물로 사라졌다. 나는 내 세상을 잃었다.
그런데 세상을 망가뜨린 사람은 재미있는 놀이라도 한 것처럼 핏덩이가 된 사람을 비웃었다.
그럴 수는 없다. 목숨이 그렇게 가벼울 수는 없다.
똑같은 꼴로 만들어 주고 싶어. 이대로 참고만 있을 것인가? 상실감과 분노를 뭉쳐 복수를 맹세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했다. 잃어버린 목숨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법으로도 그런 기적은 불가능하다. 죽음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 나도 똑같이 지워 버릴 거다. 상대를 세상에서 지워 버릴 거다.
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다. 해야 하니까, 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으니까 하는 거다. 수십 년의 시간이 몇 분 만에 0으로 돌아갔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죽음으로 새겨 주겠다고, 맹세한 거다.
소중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차갑게 식어 버렸다. 내 고통조차 그들을 생각하면 사치다. 아아……지금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고 싶다. 상상만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다면 이미 수만 번은 죽였을 텐데.
분노에 미치고, 상실에 미치고, 그 마음을 복수를 위해 꽁꽁 억눌렀다. 복수를 반드시 이루겠다는 마음을 덮어 억눌렀다.
하지만 성진은 우리와는 다르다. 분노는 보일지언정 증오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3년이나 함께 싸워 왔는데!
“너는 여기에 살아 있어.”
“…….”
“그걸 잊지 마.”
언젠가 그와 나는 마음이 맞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이제 그를 이해할 수 없다.
친구들도 어렴풋이 깨닫고 있을 거다. 이 녀석은 복수에 필사적이지 않다는 걸. 복수할 마음이 없는 건, 아마 아니겠지. 제 역할을 완수하지 않은 적도 없고, 우리 작전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이상하다. 어째서, 어째서 너는 필사적이지 않지?
사람의 성격과 감정을 느끼는 방식은 누구나 다르다. 하지만 그래도, 너는, 복수에 필사적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동료잖아. 복수를 목표로 모였다. 미영 할머니가 복수를 목표로 하는 것보다 먼저 인하나 우리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실력을 키우는 데 더 주력하고 항상 걱정하며 우리를 기다리려 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너는 아니잖아. 나는 몇 보 뒤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성진을 볼 때마다 항상 배신감을 느낀다.
“……이제 됐어.”
이 감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성진에게 느끼는 배신감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복수에 필사적이지 않다면 왜 우리와 함께 맹세한 거지? 어째서 복수하자고 말해 준 거야?
나는 이를 악물며 몸을 휙 돌렸다. 눈물이 새어 나올 것 같은 감각을 꾹 눌러 참았다. 저 녀석한테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이번 습격은 문제점이 많았다. 보험을 두기 위해, 혹은 마약 샘플을 넘기기 위해 연맹에 정보를 흘렸지만, 설마 그 전장에 레일리와 로일이 직접 올 줄은 몰랐다. 레일리만이 아니다. 우리를 잘 아는 유미에 성후 오빠, 주연 선배까지 함께였다.
그들은 우리 마법을 안다. 우리의 전투를 보고 그들이 무언가 눈치챘을 가능성이 있다.
SR 프로젝트도 마찬가지다. 그들과는 지난 1년간 많은 교류를 했다.
하멜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진 것도 마음에 걸린다.
“은하도 다 나았으니……바로 움직이자. 산델벤을 쓰러뜨린 김에 키메라 실험 부대의 손가락을 조금 잘라 보려고. 아마 이걸로 키메라 실험이 잠깐이나마 주춤할 거야. 이건 우리가 이번에 없앨 조직 리스트.”
인성이가 제시한 조직은 5곳이다. 눈에 띄는 실력자는 없었다.
“내일 각개 격파로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게 어떨까 싶은데, 다들 할 수 있지?”
“문제없어.”
“이 정도쯤이야.”
“그래. 이번엔 어디까지나 격파에 초점을 둔 거 명심하고.”
인성이가 문득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번 일로 하멜이 은하한테 관심을 가진 건 틀림없어. 그러니 최대한 빨리 끝내자. 바로 메인 통신실에 들어가서 정보만 빼고 전부 무너뜨리는 거야. 제한 시간은 1시간.”
“1시간이라.”
지금의 우리라면 어렵지 않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결국 주목을 받아 버렸으니까, 이 임무를 끝마치면 소문이 잠잠해질 때까지 잠시 잠적하자. 지금 당장 하멜에게 불씨를 줘 봤자 좋은 일은 하나도 없어.”
“오케이.”
“어쩔 수 없지.”
우리가 트라베리아 휘하 조직을 무너뜨리려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실력 향상, 정보 탈취, 트라베리아의 세력을 조금씩 떼어 내겠다는 것도 목적 중 하나다. 키메라는 트라베리아에 있어 유용한 전력이었다. 산델벤은 키메라 개발 조직 중에서도 제법 순위권 안에 든 조직이다. 괜히 하멜이 눈독을 들였던 게 아니다.
“그리고 SR에서 연락이 왔는데…….”
인성이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소영이가 몸을 움찔 떨었다.
“……무슨 용건이래?”
“무슨 용건이긴. 마약 사건 뒤처리야. 마력 증강제 사건의 주모자로 보이는 베일이 죽었다며 회의를 하자던데? 남은 마약의 회수나, 해독약 제조, 이성을 잃은 사람들의 제압 및 재활 등등.”
“아…….”
그렇지, 베일이 죽었다고 사건이 끝난 건 아니다. 마약 사건에 협력한 이상, 후환이 남지 않도록 뒤처리를 해야 한다.
사실 우리가 직접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한번 맡은 일 아닌가. 더군다나 산델벤 일로 바빠 제대로 협력을 안 했다. 그렇다고 이후로 다급하게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일 또 하나의 뒤처리만 끝나면 한동안 잠적할 예정이니까.
‘잠적’이라고 해서 전혀 일을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찢어진 전투복을 수리하거나 새로 사야하고, 부서진 가면도 바꿔야 한다. 트라베리아와 관련 있는 사건을 조사하거나, 전황을 살펴보거나, 트라베리아가 있을 법한 장소를 탐색하거나, 하여간에 할 일은 많다.
그러나 지금 SR과 만나기는 조금 껄끄러운 감이 있다. 그래, 성후 오빠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 대현에는 우리의 싸움을 그다지 알리고 싶지 않다.
사실 그때 찾아온 사람들에게 보여 준 건 별거 없다. 본 거라고 해 봤자 내가 비참하게 당한 모습 정도? 그 후에는 성진의 보호를 받으며 도망쳤다.
하지만 우리가 계속 싸우는 한 이런 부딪침은 언제고 일어날 일이었다. 어차피 우리도 마지막까지 숨길 생각은 없다.
“내일 몇 시?”
“미국 시간으로 10시. 그러니까 각개 격파는……여기 시간으로 아침 8시에 시작하자.”
“알았어.”
“연맹에는 누가 가지?”
“나랑 은하가 갈게. 뒤처리도 우리 전문이니까.”
“으음, 너희한테만 부담이 가는 것 같아서 걱정이야.”
소영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와 인성이를 응시했다. 우리는 그 후로도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건 나였다.
“그럼 난 이만 쉬러 갈게.”
“그러네. 오늘은 이만 쉬자. 오늘 식사 당번 누구더라?”
다음 날 우리는 무사히 휘하 조직 다섯 개를 1시간 안에 무너뜨렸다. 산델벤처럼 A랭크 마법사가 무더기로 있거나 트라베리아가 눈을 두고 있는 곳이 아니고서야 우리가 애를 먹을 일은 별로 없다. 그렇다고 시설이 특별히 좋은 것도 아니었으니.
가면이 망가진 나와 인하는 예비 가면을 쓰고 행동했다. 기지에 돌아온 후 나는 인성이와 함께 바로 SR에 향했다. 이제 이 정도론 힘들지도 않다. ……성진이나 미영 할머니가 우리를 단련시켜 줬으니까.
인성이는 나만큼이나 검은 옷을 선호한다. 무기를 숨기기 위해서인지 품이 넉넉한 코트 안에는 주머니가 많이 달려 있다. 끈은 길고, 소매 사이에 와이어를 숨긴다.
소영이는 우리 둘이 나란히 새카만 옷을 입은 것을 보고는 칙칙해서 보는 사람 기분도 우울해진다며 내게 검은색 이외의 옷을 입으라 했다. 반드시 검은 옷이 아니면 안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 나는 수긍하며 대충 있는 옷 중 아무거나 골라 입었다.
달라붙는 검은 바지에 흰 반팔 티, 그 위에 카키색 후드 카디건을 걸쳤다. 지퍼를 목까지 쭉 올렸다.
“자, 됐지?”
“으음……그래, 새카만 것보다는 낫다.”
나와 인성이는 바로 SR로 향했다. 대원의 안내를 받아 제1회의실로 가니 이미 대부분의 멤버가 모여 있었다.
“어서 오세요. 어라? 오늘은 평소보다 가벼운 차림이네요.”
“네.”
“아하하. 둘 다 새까만 색이면 보는 사람이 답답하다고 짜증을 부리더라고요.”
“후후. 그 기분 조금 알 것 같네요.”
레일리가 기분 좋은 얼굴로 생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나한테 화사한 옷을 입히고 싶어 했지…….
“은하야.”
유미가 어쩐지 피곤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 둘을 훑어보며 무언가 걸리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린다.
“안녕.”
“안녕. 오늘은 너희 둘만 왔어?”
“그런데, 왜?”
“아니…. 음, 아니야.”
내 어깨를 유심히 살피는가 싶더니 이내 안심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뻔히 보이는 태도에 할 말이 없어졌다.
‘유미는 조금 눈치챘었나 보네.’
산델벤에서 마지막에 마법을 쓴 것은 성진이다. 성진의 마법은 특성이 짙으니, 유미가 의심해도 어쩔 수 없지.
‘하지만 확신은 못 하는 모양이고.’
유미보다 조금 멀리에 있던 대현 일행도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는 그들의 감정을 쭉 살폈다.
백한 선생님과 주연 선배는 반갑거나 씁쓸한 감정을 담은 채 우리에게 인사했고, 성후 오빠는……여전히 음울한 분위기로 고개만 한 번 까딱였다.
‘어제 일로 우리에게 의혹을 품은 건 일단 유미뿐인가…….’
그러나 확신은 없다. 혹시나 하는 애매한 의혹. 그 정도라면 일부러 터치할 필요는 없겠지. 암시 정도는 심어 둬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얼마 후 마약 사건 초기에 모였던 멤버가 대부분 모였다. 오늘은 샐레나 리카르트는 나오지 않았다. 레일리가 대표로서 이야기를 진행했다.
“여러분 모두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마약 사건의 주모자로 예상되던 베일 프라이먼이 죽었습니다. 심문 결과 베일은 키메라 실험 부대 ‘산델벤’의 실험 책임자로, 산델벤은 키메라 실험 부대 사이에서도 제법 상위에 위치한 부대였다고 해요.”
“그럼 마약도 키메라 실험의 일환인가?”
“키메라 실험만이 아니라 인체 실험도 같이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목표는 장군 시리즈만큼 강한 인공 마법사였다고 하더군요.”
“기분 나쁘군.”
백한 선생님이 툭 내뱉었다. 라듀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와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베일 프라이먼은 문제가 많았지만 결국 죽었습니다…. 저는 산델벤을 무너뜨린 자들이 신경 쓰이는군요. 듣자 하니 산델벤에는 S랭크, A랭크, B랭크, 강한 키메라가 골고루 있었고, 더불어 A랭크 마법사가 다섯 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세 명은 죽고, 두 명은 패배했지요.”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웅성거렸다.
“정체는 모릅니까?”
“네. 저희가 본 사람은 세 명인데, 세 사람 다 가면을 쓰고 있었어요.”
“가면이라.”
“설마 예의 ‘가면 조직’인가?”
“아, 요즘 뱀 둥지를 휘젓고 있다는?”
그런 말을 꺼낸 건 방위대원과 경찰이었다. 그 외에도 어디서 들은 적 있다며 끼어든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생각보다 우리에 대해 알려져 있는 것 같다.
사실 우리 외에도 가면을 쓰는 조직은 많다. 가면은 정체를 숨기기도 몸을 보호하기에도 딱 좋으니까. 그러나 개중에 우리처럼 강한 마법사만 모인 집단은 없다고 봐도 좋다.
생각에 잠겨 있던 레일리가 박수를 치며 다시 자신에게 주목을 모았다.
“방금 말했다시피 산델벤은 A랭크에 준하는 조직이었습니다. 그들을 쓰러뜨린 건 요즘 은근히 소문이 돌고 있는 가면을 쓴 마법사들이에요. 방금 어느 분이 말씀하셨던 대로 트라베리아 뱀 둥지를 휘젓고 있는 그 조직이죠.”
“트라베리아에 원한을 가진 건 틀림없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일은 안 하겠죠. 특이한 점이 있다면 조직을 무너뜨린 후엔 반드시 기지를 폭파시키는 것과, 죽지 않은 사람을 전부 경찰 조직에 넘기는 것. 경찰에 넘겨진 마법사는 전부 정신 조작을 당해 있다는 것. 또 강한 마법사 한 명 이상이 약해진다는 것.”
“약해진다고?”
“네. 본래는 A랭크였던 마법사가 가면 조직의 손을 거치면 B랭크 이하 마법사로 내려와 있어요.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조직만 무너뜨리고 조직원은 경찰에 넘기는 건가요? 이상한 놈들이네요. 그걸 보면 트라베리아에 원한을 가졌다기엔 석연찮군요. 일부러 전부 살리는 건가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죽은 사람도 있는걸요. 아마 일부러 죽이지 않는 것뿐이겠죠.”
“흐음.”
나는 대화를 그저 지켜보았다. 인성이도 중간중간 끼어들었다. 인성이는 의외로 능청스럽다. 우리 이야기임을 알고 있으면서 오히려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런 조직이 있나요? 산델벤을 무너뜨렸다는 건 A랭크 조직이겠네요. 멤버는 몇 명이죠?”
우리에게 의혹을 가지고 있던 유미가 혼란스러워할 정도로 능청스러웠다. 레일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조차 확실하지 않아요. 잡혀 온 사람들의 의견이 각자 달라서요. 근육질의 남자라고도 하고, 가녀린 여자라고도 하고, 숫자가 20명이 넘는다고도, 1명밖에 안 된다고도 하니까요.”
“정신 조작에 걸려 있다는 게 그런 뜻이었군요.”
“네. 거기에 기지를 죄다 날려 버리니 기억 외에 흔적이 남아야 말이죠. 기억 조작을 풀어 보려 했지만 기억이 완전히 굳어져서 어떻게 할 수도 없더라고요.”
백한 선생님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뭐, 뱀 둥지만 노리는 거라면 일부러 경계할 필요는 없겠지.”
“강한 조직이니 계속 조사는 하고 있어요.”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 사람들 아마 당분간은 움직일 수 없겠죠.”
레일리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하멜 리디언이 관련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하멜?”
“그 여자가?”
사람들이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고, 내 옆에 앉아 있던 성후 오빠의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음울해졌다.
“미친, 그 여자 이름이 왜 거기에서 나와요?”
“키메라 실험 부대에서도 상위 조직이니까요. 하멜이 실험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흰 트랑카에 갔다가 우연히 싸우는 장면을 봤어요. 2 대 1이었지만 하멜이 압도하고 있었죠. 그 전투로 한 명이 어깨가 뚫리고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으니, 아마 당분간은 움직이지 못할 거예요.”
“당분간이란 말은 어쨌거나 무사히 도망쳤다는 말이군요?”
“네. 동료 두 명이 더 나타나서 싸우고 있던 두 사람을 피신시키더군요. 그 후에 저희도 괜한 부스럼이 되기 전에 도망쳤어요. 낯 뜨겁지만 저희 힘으로는 하멜을 상대할 수 없으니까요.”
레일리가 굳은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옆에 있던 성후 오빠의 기세가 이상했다. 주연 선배는 이도저도 못 하고 성후 오빠의 옆을 지켰다.
……아무것도 잃지 않은 사람은 없다. 백한 선생님은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 동료를 잃었고, 성후 오빠도 가족을 전부 잃었다. 사랑하는 아내, 부모님, 동생까지.
유미는 친구와 아버지를 잃었다. 가슴속에서 술렁거리는 분노를 감당하기 힘들어 나는 머릿속의 스위치를 바꿨다. 가슴이 훅 냉정해졌다.
“하멜의 마력을 걷어 내고 치료를 할 수 있는 마법사는 그리 많지 않을 테니, 아마 가면 조직도 최소한 일주일은 움직이지 못하겠죠.”
“부상이라…….”
그때 라듀가 어두운 얼굴로 침음을 흘렸다.
“그게 그렇지도 않더군요.”
“무슨 소리죠?”
“오늘 아침 트라베리아 휘하 조직 다섯 곳이 무너졌습니다. 생존자가 지부로 전송되고, 기지가 폭파되었으며, 기억이 조작되어 있는 걸로 보아 가면 조직의 짓임이 틀림없습니다.”
“뭐라고요?”
“세상에.”
유미가 눈을 크게 떴다.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유미의 의혹은 옅어졌다. 레일리나 로일은 우리가 한 짓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의심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누군가가 감탄했다.
“정말 보통이 아니군요.”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유용했다. 우리의 이야기가 얼마나 퍼졌는지 알 수 있으니까. 다행히 중요한 건 별로 퍼지지 않았다.
우리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화제는 곧 마약 뒤처리 이야기로 흘러갔다. 다시 터로 돌아가 샅샅이 조사한 결과 마약을 몇 개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각기 성분이 조금씩 달랐지만 그걸 토대로 의사와 제약사가 해독약을 만들고 있다나.
“해독약이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어차피 이제 증강제는 없어요. 피해자들을 격리 수용하고 재활을 도울 거예요.”
“헤에.”
여기 있는 사람들은 참 대단하다. 힘든 일은 그 외에도 산더미처럼 있는데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의 재활까지 도우려고 한다.
“은하 씨께도 치료를 부탁하고 싶어요. 저번에 은하 씨가 마약 중독자분들한테 마법을 썼잖아요? 확인해 보니 마력 증강제로 인해 나타나는 증상이 많이 완화되었더라고요. 그래서 부탁하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네.”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 정도야 어려운 일도 아니다. 어차피 마력 증강제를 만들던 조직은 무너졌다. 유통되고 있는 마약을 회수하고, 중독된 피해자들을 치료하고, 그런 것까지 내가 일일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다행히 못 알아본 것 같네. 속으로는 조금 의심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나는 대화를 주워 담으며 레일리를 흘끔거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레일리가 생긋 웃었다.
언제나처럼, 사건이 하나 끝났다.
##03. 흔들리는 심해 속에
우리는 한동안 잠적하기로 했다. 이번 사건으로 너무 주목을 받았다. 하필이면 목격자가 ‘하멜’과 ‘연맹’이니.
하멜이 우리를 찾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생각보다 우리에게 흥미를 느낀 모양이다. 한동안 자중할 필요가 있다.
잠적한다고 해도 가만히 있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자중하는 일은 ‘가면을 쓰고 하는 전투’뿐이다. 자중하며, 또 다른 방법으로 트라베리아에 다가갈 것이다.
한동안 마력 증강제에 중독된 사람들을 치료하고 기지에 돌아와서는 새로 얻은 정보를 정리하며 검토하는 일을 했다. 인성이의 컴퓨터와 문이가 번갈아 가며 암호문을 해석했다. 약학 혹은 생물 관련 전문 용어와 끔찍한 실험 기록이 정보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사람을 쓰러뜨리는 걸 업으로 삼게 됐지만 이런 걸 보고 끔찍해할 정도의 감성은 남아 있다. 가슴속에 미약한 동정심이 스쳐 지나갔다.
웬만한 글은 문이가 해석하고 요약해 줬지만, 그래도 우리는 정보를 직접 눈으로 훑었다. 문이가 글을 보고 해석하는 것과 우리가 직접 해석하는 것에는 은근히 차이가 난다.
산델벤과 연결된 여러 조직의 정보가 나왔다. 정규 조직인 척하고 몰래 손을 잡고 있는 경우, 협박 때문에 협력하고 있는 경우 등등. 마약 유통 경로, 키메라 유통 경로, 무기 유통 경로, 무기 유통 조직, 서로 간의 연락 방법, 이메일 주소, 통신기 암호 따위의 정보도 입수했다. 여태까지 모은 정보 중에서도 상등품이다.
“으음…….”
마약 중독자를 치료하는 일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그 이후에는 훈련과 정보 정리를 반복하고 있다.
통신실 한가운데에 지구본이 떠올랐다. 지구본에 표시된 건 세계가 조사한 데렌서의 위치, 우리가 찾아낸 데렌서의 위치, 내가 감지한 커븐 로드가 나타난 장소, 혹은 귀환하기 전에 그들이 마지막으로 있던 장소 등등이다. 커븐 로드의 등장과 귀환은 매번 느끼지는 못하나 가끔 볼 때가 있다. 그 강대한 마력에는 싫어도 반응하게 된다.
커븐 로드를 비롯해 트라베리아의 마법사가 나타난 장소, 혹은 마지막으로 있던 장소를 표시하는 이유는 규칙성을 통해 트라베리아가 있는 곳을 알 수 없을까 싶어서다.
트라베리아의 마법사가 나타나는 장소는 제각각이다. 사람의 눈을 경계하고 있다면 제 나라가 있는 곳과 가까운 장소에서 나타나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너무 먼 곳에서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추론을 바탕으로 위치를 추측해 보려고 하고 있지만, 잘 되지 않는다.
애초에 그들은 자신의 나라에 자주 출입하지 않는다. 나와 있는 사람은 나와 있고, 들어가 있는 사람은 계속 들어가 있다. 그렇다고 나타난 장소에 트라베리아가 있을 가능성을 아예 배제한 것은 아니다.
산델벤에 저장된 정보 중에는 하멜과 트라베리아 마법사 몇 명의 메일 주소가 있었다. 외부 서버를 돌고 돌아 신원을 확인해 보니 전혀 다른 인물이 나온다. 가짜 신분인지, 아니면 신분을 산 건지.
“산델벤이 무너진 건 이미 알려졌어. 그러니 연락처는 전부 끊겼다고 봐도 좋겠지.”
“위치를 알리지 않고 거래하는 조직이 의외로 많구나.”
“이건 차라리 SR에 필요한 정보일지도 모르겠네.”
“그러게.”
나와 인성이 둘이서 사흘 정도 밤을 새우며 암호문을 해석 및 정리하고, 그 후엔 동료들과 돌려 읽었다. 모두가 정보를 확인하는 데 꼬박 닷새 정도 걸렸다.
트라베리아의 위치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정보는 없었다. 정보를 전부 확인하고 우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걸 통해 다음으로 노릴 조직을 정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