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264
벨라 트리저가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았던 날, 만약 내가 그 지하 공동에 있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을 수백 수천 번 했다. 하지만 그 일로 실감했다. 내가 거기에 있었더라도, 달라질 일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대론 안 된다.
이대로는 허무하게 살해당할 뿐이다.
훨씬 더 많은 힘이 필요해. 지금보다 훨씬 내 힘을 끌어낼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해.
아직 부족하다. 지금의 노력으로는 부족하다. 지금보다 훨씬 더 필사적으로 힘을 잡아 삼켜야 했다. 그래도 커븐 로드에게 닿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더, 더, 더, 더, 더──!
커븐 로드를 보고 돌아온 날, 만신창이가 된 모습을 보고 동료들은 깜짝 놀랐다. 그 이후로 우리 팀은 단독 행동이 금지되었다.
새로운 기술을 만들었다. 강한 자에게 이기기 위한, 내 힘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특수 기술’. 이것은 언령이다. 목록 안에 있는 기술은 특별한 힘을 지니게 된다. 내 상상력을 그대로 실현하여 그야말로 현재 내 힘보다 뛰어난 실력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된다.
싸우고 싸웠다. 제시해 주는 길만으로는 부족해서 더 깊이 들어갔다가 팔다리가 날아갔다. 그때 동료들은 많이 울었다.
그래도 얻은 것은 있었다. 덕분에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강해진다.
죽음에 다가가는 상처를 입은 순간, 그 죽음을 이겨 낸 순간, 지금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만든 가장 강한 공격에 살의를 담아 나를 찌르기로 했다.
괜찮아. 난 굉장히 튼튼하니까. 팔다리가 날아가는 것 정도로는, 심장에 살짝 구멍이 나는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그래도 이게 잘못된 행위임은 알고 있어, 동료들에게 들키지 않게끔 조절했다. 적어도 성진이 있을 때는 안 된다. 들키고 만다.
시간이 흐를수록 동료들의 행동은 조금씩 변해 갔다. 소영이는 조금 활발해졌다. 적을 상대할 때는 가차 없지만, 우리에게는 웃어 준다.
“위험한 데 갈 때는, 꼭 나도 같이 가기야.”
인하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했다. 초조한 것도 같고, 걱정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성진은…….
전보다 나를 과보호했다. 어딜 가든지 같이 가거나, 일일이 어딜 가냐며 물어볼 정도로. 그때까지도 나는 강해지는 데만 필사적이라 성진의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성진, 인하, 두 사람과 같이 다닐 때가 많았다.
초조함은 내 가슴속에 들러붙어 사라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전혀 성진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으니까. 내가 강해지는 것만큼, 그보다 빠른 속도로 성진은 강해졌다. 믿음직스러운 한편 불안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실력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제대로 움직였다. 목표의 초침을 좀 더 트라베리아에 가깝게 옮긴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데랜서를 깨부수는 것부터 시작했다. 데랜서는 트라베리아의 영역을 증명하는 것, 크기는 사람만큼 작은 것에서 산보다 큰 것까지 다양했다. 작은 것은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물건이다. 그런 만큼 힘도 약하다.
참 불합리하기도 하지, 사람 크기만큼 작은 데랜서조차 웬만한 A랭크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힘을 지녔다. 우리는 한동안 데랜서를 상대하며 자신의 실력을 확인했다.
어느 정도 영향력 있는 데랜서 10개를 부수고, 우리는 제대로 싸움에 돌입했다. 복수의 첫 단계가 힘을 기르고 정보를 모으는 것이라 한다면, 복수의 두 번째 단계는 바로 트라베리아 아래에 붙은 휘하 조직을 잘라 내는 것.
우리는 커다란 상을 그렸다. 몇 년간 필사적으로 훈련해 강해졌지만 우리 실력으론 아직 죽었다 깨어나도 커븐 로드를 이길 수 없다. 괴롭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트라베리아의 마법사라고 죄다 귀신같이 강한 것은 아닐 테지. 허나 밖에서 사람을 죽이고 돌아다니는 마법사는 죄다 귀신같이 강하다.
그래서 트라베리아의 다리 역할을 하는 조직을 잘라 내기로 했다. 우리 실력으로 없앨 수 있는 조직을 하나둘씩.
더러운 짓을 일삼는 최하위 조직, 어느 정도 역할을 지닌 중소 조직. 처음엔 눈치채지 못하게, 가끔 신경에 거슬릴 정도로만 잘라 낸다. 물론 이 역시 가장 큰 목적은 우리의 실력을 키우는 것이다. 싸움에 익숙해지기 위한 전쟁과는 달리, 강한 마법사와 일대일로 싸워 이기기 위한 훈련.
그러니 작전에서 제일 중요한 건 효율적인 승리가 아니다. 오히려 비효율적인 승리다. 더해서 그 조직들로부터 트라베리아의 정보를 캐낸다. 가장 중요한 것은 트라베리아가 사는 땅이 어디에 있는지 밝혀내는 것이다.
기꺼웠다. 너무 기꺼워서 한동안은 몸을 찌를 생각을 안 했을 정도였다.
정체를 효율적으로 숨기기 위한 방법을 여러 가지 고안했다. 고안 끝에 가면을 쓰기로 했다.
첫 전투는 생각보다 느슨해서 쉽게 이겼다. 살아 있는 사람은 경찰에 넘겼다.
두 번째 전투에서는 다쳤다. 나는 조금 다친 걸로 끝났는데 인하랑 소영이가 조금 심하게 다쳤다. 병원 치료가 어려운 입장이지만 우리는 돈만 주면 치료해 주는 유능한 의사를 알고 있었고, 그에게 치료를 부탁했다.
우리의 싸움은 적당한 간격을 두고 계속됐다.
평판이 더러운 조직을 무너뜨릴 준비를 하다가 레일리 리카르트와 로일을 만났다.
레일리의 규율마법이 환각을 꿰뚫고 우리를 인지했다. 예상치 못하게 환각 변장의 부족함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녀도 많이 성장했지만 우리는 그보다 더 성장해 있었다. 그때 나는 이미 그녀의 실력을 뛰어넘은 상태였다.
“오랜만이에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리카르트 씨?”
“레일리라고 불러 주세요. 살아 있어서 다행이에요.”
트라베리아가 어디 있는지 찾기 위해 여러 세계를 돌아다녔다. 끊임없이 싸움을 바랐다.
그래,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다. 처음에는 참혹해진 세계에 익숙해지며 강해지기에만 벅차서, 다음엔 눈앞에서 본 실력 차에 압도되어 역시 강해지기에만 벅차서.
유클라프의 마법을 본 것만으로도 벅찼는데, 나는 또 한 번 아득한 실력 차이를 가늠하게 되는 상황에 처했다. 꿈속에서 트라베리아의 정보를 찾다가 소니아의 몽마와 맞부딪친 것이다. 다행히 소니아와 부딪히기 직전에 그 장소에서 도망쳤지만, 소니아가 나를 인지했음은 틀림없다. 그 후론 빌어먹게도 제대로 꿈속 세계를 돌아다닐 수 없었다.
잠을 자는 시간은 더 줄었고, 훈련의 강도는 더 격심해졌다. 마법을 쏘아 스스로 겪어 보는 행위쯤이야 다들 눈감아 줬다. 훈련이 지나치다 싶으면 미영 할머니와 성진이 경고를 주긴 했지만.
강해지는 것에만 급급했다. 그럼에도 어느 기점을 넘기니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함께 훈련을 하면서, 중요한 전투가 있을 때 자신은 강하다는 이유로 한발 물러나는 걸 보면서, 위험할 때 여지없이 나에게 달려오는 걱정에 가득 찬 눈동자를 보면서, 그럼에도 나보다 앞에 서 있는 그를 분한 눈으로 보면서.
훈련을 열심히 하지 않는 건 아니다. 전투 때 집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강해지려고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트라베리아를 쓰러뜨릴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게 슬프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필사적’이지 않았다.
나는 결의에 적어도 내 목숨을 걸었다. 하지만 성진은 아니다.
당연히 나도 동료들이 죽길 바라지 않는다. 당연히 이 이상 아무도 잃기 싫다. 그러나 목숨을 거는 것은 다른 의미다. 반드시 해내겠다는 결의다.
그런데 성진에게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 ‘복수는 다음에도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듯한 눈동자로 우리를 본다.
그것을 깨달은 것이 언제였던가.
복수를 하기로 결의하고 팀을 결성했다. 이름은 없고 오직 잃은 것을 되돌려 주기 위한 팀이었다. 처음에 팀을 만들 계기를 준 것은 분명 성진이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성진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한발 물러서 상처투성이로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를 지켜보았다. 그저 우리를 돕기 위해서 옆에 있는 형태로 협력했다.
결의하고 복수를 위해 감정을 차곡차곡 쌓는 나와는 정반대로 냉정함을 유지한 채 거기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상한 감정이 속에서 울컥 솟아올랐다.
어째서, 왜?
우리 계속 함께였잖아.
아니, 너는 우리와 조금 달랐지. 너는 은희 언니네와도, 선생님들과도 친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친했잖아.
민희도 현호도 한수도 소중한 친구였잖아.
너와 친하던 유란의 친구와 선생님도 죽었잖아.
우리는 그 죽음이 비웃음당한 것을 봤잖아.
그런데 왜 너는 그렇게 냉정해?
너에겐 모든 감정이 그런 거야? 너무 오랫동안 환생을 계속해 왔기 때문에 감정이 닳아 버린 거야?
그래서 그래?
같이 복수를 위해 달려온 것이 아니었나.
혼란스러웠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정말로 믿고 신뢰하던 동료가 사실은 나와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걸 느낀다는 건…….
그래도 차마 그걸 입으로 내뱉어 물을 수는 없어서 괴로웠다. 만약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니야. 저 녀석은 원래 감정이 잘 안 보였잖아. 그저 속에 가두고 있을 뿐인지도 몰라. 하지만 이미 그런 걸로 이해할 시기는……지났잖아.
혼란스러웠던 시기, 그 마음을 끊어 내기 위한 방편으로 내 자해는 더 심해졌다. 그걸 맨 처음 발견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인하였다. 성진을 제일 경계했는데, 불안한 눈으로 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인하가 내 상태를 가장 먼저 눈치챘다.
언젠가 나는 이미 마법으로 가슴을 찔렀다. 그때처럼 심장을 찌르려 하는 나를 보고 인하는 비명을 지르며 울었다.
“그러지 마.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더, 내가 너보다 더 강해지고 싶어. 하지만……그래도……우리는 살아서 그 녀석들을 죽일 거잖아.”
“다칠수록 강해진다면서 가슴을 찌르는 네 마음을, 그렇게 해서라도 강해지고 싶은 마음을 왜 모르겠어. 난 싸울수록 강해지니까, 더 강한 사람과 싸우고 싶어. 조금 더, 더 위험한 싸움을 하고 싶어. 하지만 만약 내가 너랑 체질이 같고, 그래서 내가 너랑 똑같은 짓을 하면, 너도 말릴 거잖아.”
“이런 데다 살의를 낭비하지 마. 네 결심이 진짜라면.”
인하는 울면서 나를 말렸다. 울며불며 나를 끌어안는 인하의 심정을 알 것 같아서 나는 나를 살의로 찌르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몸으로 마법을 직접 실험하는 건 계속할지도 모르겠지만, 자살에 가까운 행위는 그만두기로 했다.
그 이후로 나는 동료들에게 많이 혼이 났고, 한동안은 혼자서 훈련하는 것조차 금지당했다.
스스로를 찌르지 않으면 더 초조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훨씬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전에는 몰랐던 이성진의 행동이 더 낯설고 확실하게 내게 다가왔다. 그는 명백히 나와는 다른 어떤 것을 보고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다. 나에게 성진을 탓할 권리는 없다.
정말로 감정이 닳아 버렸다면 오히려 내 탓이 크지 않은가.
그런데 원망스러웠다. 같은 일을 겪어도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친구들을 잃었지만 복수보다 자기 목숨이 중요할 수도 있지. 밉고 미워도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런 건 알아!
나도 인하도 인성이도 소영이도 원하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래도 생각하게 된다.
어째서?
왜?
그의 감정을 자각할수록, 자신의 감정을 자각할수록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괴로워졌다. 감정이 쌓이고 가슴에 열을 재촉했다.
동료인데. 동료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언제까지 계속될까.
인하와 미영 할머니는 저녁이 되어서야 탐험을 마치고 돌아왔다. 우리는 저녁을 먹다 말고 두 사람을 맞았다.
“어서 와.”
“다녀왔어.”
인하는 안으로 들어서며 내 발치에 있던 라라를 보고는 잠시 허리를 숙였다. 인하가 머리를 쓰다듬자 라라가 기분 좋은 듯 손에 머리를 비빈다.
“나 왔어, 라라.”
인하는 몸을 일으키고는 곧장 정원으로 향했다. 소영이가 인하의 뒷모습을 향해 전했다.
“식사 차려 놨으니까 이따 먹으러 와.”
“금방 갈게.”
인하의 모습이 문 바깥으로 사라졌다. 인성이가 미영 할머니를 돌아보았다.
“미영 할머니는 지금 드실 건가요?”
“그래, 그러마.”
라라가 나를 쫓다가 내 다리를 붙잡고 섰다. 손톱으로 긁을 기세기에 나는 라라를 품에 안아 들었다.
우리는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눴다.
“어땠어요?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건 없었나요?”
“하나 특이한 걸 발견했다.”
“특이한 거요?”
“인하가 오면 말하지. 그 아이가 가지고 있으니.”
라라는 내 무릎 위에 앉은 채 식탁을 갸웃거렸다. 이 아이는 먹을 욕심이 많아서 밥을 먹은 후에도 맛있는 게 보이면 또 먹고 싶어 한다. 나는 싱겁게 간이 된 생선 살을 아주 조금만 뜯어서 주었다. 그 외에는 고양이에게 맞지 않으니 먹으면 안 된다. 라라는 생선 살을 허겁지겁 먹고서는 더 달라며 울었다.
조금 지나자 인하가 왔다. 정원을 둘러보고 안심했는지 표정이 아까보다 밝다.
“늦어서 미안.”
“아냐.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하지.”
잘 먹겠습니다. 인하는 식탁에 앉으며 작게 인사하고는 수저를 들었다. 인하와 미영 할머니가 반쯤 먹었을 때 소영이나 성진, 인성이는 식사를 마쳤다. 소영이는 인하의 밥이 적당히 줄어든 것을 확인하고 말을 꺼냈다.
“특이한 걸 발견했다면서? 어떤 거야?”
“응? 아아.”
인하는 팔목에 찬 손목시계를 눌렀다. 아공간 기능과 통신 기능, 컴퓨터 기능 등 여러 편리한 기능이 포함된 아이템이다. 나와 인성이가 같이 제작했다.
팔찌 위로 길쭉한 물건이 떠올랐다. 인하는 그것을 잡아챘다.
“이거야.”
“이건……검인가?”
인하가 꺼낸 것은 돌로 된 검이었다. 굉장히 낡고 오래된……유물 같다. 박물관에서나 보던 청동 검과 형태가 비슷했다. 돌로 된 자루와 날 가운데에 둥글고 딱딱한 것이 박혀 있다.
“뭐야? 신기하네?”
“그런데 은하랑 시야를 공유해서 보면 더 신기한 게 보이거든.”
“더 신기한 거?”
안 그래도 보고 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저 유물로만 보이는 돌검에는 특이한 마력이 응축되어 있었다.
‘아니. 마력이 맞나?’
기이한 힘이 느껴진다. 굉장히 위력적이지는 않은데, 왠지 모르게 오싹하다. 그렇다고 또 불길한 건 아니다. 금색 마력이 희미하게 둥근 파동을 그린다.
“오오, 뭐야 이거? 특이하다. 강한 힘을 지닌 것 같으면서도 가진 마력은 적어. 마법 레벨이 높은 건가?”
소영이가 신기해하며 검에 손을 뻗었다. 인하의 손에 있을 때와는 달리 약간 거부 반응을 보이며 진동했다. 그렇다고 일부러 잡은 손을 뿌리치지는 않는다. 검은 인하에게서 소영이에게, 소영이에게서 인성이에게로 건너갔다. 인성이의 손에서는 한층 더 거부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왠지 저 검의 느낌, 익숙한데?’
익숙하다. 어디에선가 한번 느껴 본 것 같다. 그런데 그 느낌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엄연히 다른 기운인데 비슷한 느낌이 든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탐색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데자뷔인가?’
떠오를 듯 말 듯하며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분명…….’
흐릿한 영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동안 고민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따가 문이를 불러 검색해 볼까?
고민하던 나는 인성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인성이 바로 옆에 있는 성진은 검을 만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 여기.”
인성이가 내 손 위에 검을 건넸다. 오래된 돌검은 날이 무뎌져 있어 베일 위험은 전혀 없었다.
날과 자루를 꽉 쥐는 순간 위화감이 몸 전체를 휩쓸었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러나 그 위화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검은 잠시 나를 거부하는가 싶더니 금세 나를 받아들였다.
“어? 방금 검이 빛나지 않았어?”
인성이가 놀라며 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재빨리 검을 훑어보았지만 검은 변함없었다. 딱딱하고 낡았으며 특이한 마력을 내뿜고 있다.
힘이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규칙적으로 마력을 내뿜는 검을 이리저리 훑었다.
“힘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딱히 무기는 아닌 것 같아. 비축된 힘도 너무 적고. 으음……잘 안 보이네.”
“은하 눈으로도 잘 안 보여?”
“응. 상당히 레벨이 높은 마법이 담긴 것 같아.”
자연스럽게 시야를 벗어난다. 그 숨는 느낌은 성진의 마력과도 조금 닮아 있었다.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건 검이 가진 힘이 빛속성이라는 것 정도다. 그래서 인하 손은 거부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싶다. 미영 할머니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돌검을 가리켰다.
“그 검……아마도 ‘신검’이 아닌가 한다.”
“신검요?”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서였다.
“그렇게 대단한 검인가요?”
“아니. 대단하다기보다는 상징적인 물건이다.”
“상징적인 물건요?”
“그래. 옛날에 제사를 지낼 때 사람들이 쓰던 검과 형태가 비슷하다. 하해림이 굿을 할 때도 비슷한 검을 썼지.”
해림 할머니는 검을 쓰나 보다. 나는 검을 손가락으로 툭 두드렸다.
하해림 할머니는 살아 있지만, 대신 힘을 잃었다. 트라베리아의 영역 안에서는 귀신의 힘을 빌릴 수 없다. 그 마정석은 영혼을 전부 삼켜 버리니까. 대대로 그녀를 지켜 주던 가문의 수호신 세 명은 어떻게든 지킬 수 있었지만, 가문의 수호신을 봉인한 대신 그녀의 힘은 반감됐다.
그 이후 가끔 얼굴을 마주한다. 그녀는 라비언트 생존자 그룹의 제의를 마다하고 한적한 산골에서 숨어 지내고 있다. 아직 한적한 장소가 조금 남아 있다.
“예전에 중국 근처를 여행할 때 비슷한 검을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아직 라비언트와 폴리젠에게 쫓기고 있었던 때니, 한 300년은 넘었을 거다. 그게 이 검은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상당한 보물이란 소리네요. 이거 이렇게 가져와도 되나요?”
“어차피 중국은 반쯤 무너졌으니까. 이 검 역시 무너진 마을 어귀에 꽂혀 있었다. 게다가 가지고 있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미영 할머니가 내게서 검을 건네받았다.
“신물은 대개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다. 때로 마법의 법칙조차 무시하는 특별한 힘을. 이렇게 미약해 보이는 마력으로도 때때로 믿을 수 없는 힘을 보이고는 한다. 공격적인 힘과는 거리가 멀고, 주로 사람을 치유하거나, 저주를 없애거나, 사람을 축복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지. 혹시나 해서 가지고 온 거다. 돌려주는 건 이 전쟁이 끝난 이후라도 괜찮겠지.”
“특별한 힘이라……. 하긴 우리가 법을 가릴 때는 아니니까요.”
인성이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니 하며 시선을 돌리던 나는 움찔했다.
성진이 왠지 모르게 복잡한 눈빛으로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바로 옆에 있던 인성이도 눈치챘다.
“왜 그래? 뭐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어?”
“……아니.”
이내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구태여 캐물을 이유는 없다. 나는 인하를 돌아보았다.
“그럼 그건 처음 발견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게 좋겠어. 미영 할머니, 할머니가 가지실래요?”
“아니. 나는 필요 없는 물건이다.”
미영 할머니는 검을 인하에게 내밀었다. 인하는 팔찌를 눌러 아까처럼 검을 팔찌에 보관했다.
도움이 안 될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특별한 거라고 하니까. 언젠가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04. 일본 감염
나는 꿈이 무섭다.
예전엔 꿈이 좋았다. 꿈을 꾸는 것도 좋았고, 꿈속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내 꿈속 세계는 새벽하늘과 은하수다. 많은 일을 겪었음에도 변하지 않고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젠 완전히 고정돼서 바꾸기가 어렵다. 잠깐 꿈을 덮어씌우는 것이라면 가능하지만.
또 시간이 흐르게 하는 것도 가능하다. 아침이 찾아오고 낮이 찾아오고, 아주 짧은 일몰을 지나 다시 밤이 된다. 밤이 되면 시간이 느리게 간다. 새벽에서 다시 시간이 멈춘다.
이 새벽에서 눈을 감으면 안 된다. 심연에 빠져들면 안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세계가 제일 무섭다. 그럴 때면 나는 내 세계 바깥으로 나간다. 꿈의 통로에서는 멈추면 안 된다. 무엇을 보게 될지 모른다. 꿈이 교차하는 장소에서는 오래 있어선 안 된다. 무엇을 만날지 모른다. 텅 빈 어둠을 만들어 가만히 있는 게 제일 낫다. 어디든 무섭다. 어디든 괴롭다.
그러니 계속 꿈속에서 헤맨다. 차라리 현실과 관련된 의식을 찾는다. 하지만 결코 트라베리아의 마법사와 접촉해서는 안 된다.
내가 본 트라베리아의 마법사는 손에 꼽는다. 커븐 로드인 홍염의 창술사 리우 홍링과 암청의 공단사(空斷師) 유클라프 데임, 꿈의 문지기 소니아 에셔, 마지막으로 얼마 전에 만났던 간부 하멜 리디언으로 네 명이다.
트라베리아 마법사의 문은 내 힘으로 열 수 없다. 처음 접촉하고 그들의 꿈을 지키고 있던 몽마와 마주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꿈속에 있는 내 존재를 들켰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나보다 훨씬 정신세계에 정통한 마법이었는지라 지금 생각해도 용케 도망쳤다 싶다. 도망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겨우 도망칠 수 있었던 거겠지. 흔적은 전부 정화하면서, 마법도 전부 정화하면서.
소니아가 설치한 몽마는 무척 강했다. 마지막에 얼핏 소니아의 모습도 보았지만 다행히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끝났다.
꿈을 통해 트라베리아의 마법사와 직접 접촉할 수 없으니 멀리 돌아 편린을 쫓아야 한다.
같은 정신 계열 마법사지만 소니아는 나와는 다르다. 그녀가 보는 꿈은 나처럼 세계라기보다는, 정신으로 연결되는 지도 같은 느낌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고 해도 결국 ‘길’이 있는 것은 다름이 없어서, 나는 꿈속 세계에서 언제나 소니아의 마법이 없나 조심해야 한다. 그녀의 힘은 많은 정신 속에 스며들어 있다.
위험성은 그녀가 더 높을지언정 다양한 활용은 내가 더 잘한다. 그녀의 정신마법은 공격하기 위한 마법이고, 내 마법은 아니니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무서운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전혀, 그런 게, 아니다.
꿈으로 많은 것을 보는 게 기쁘고 즐거웠던 적도 있었다. 내가 무서워하고 있는 그건, 어찌 보면 굉장한 이점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대단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보는 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꿈이 무섭다. 두려운 것과 맞부딪칠까 봐. 가장 무서운 건──.
‘나는 그 장면을 이미 봤어. 그런데도 알아채지 못했어.’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꿈을 꿨어.’
‘하지만 바꿀 수 없었어.’
‘필사적으로 바꾸려 해도, 결국 꿈과 똑같이 흘러가.’
나는 왜 그 꿈을 보았을 때 바로 그게 어떤 꿈인지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 꿈이 ‘그것’임을 알았어도 어차피 내 힘으로는 바꿀 수 없었겠지?
언뜻 보기엔 그냥 악몽 같았다. 바닥에 힘없이 늘어진 팔과 손, 벽에 칠해진 붉음, 물 안에 잠긴 것처럼 흐릿한 광경. 불길함을 느끼긴 했지만 나는 감정조차 악몽의 단편으로 취급했다.
그 꿈을 꾸고 불안감을 느꼈다면, 느끼고 친구들에게 말했다면, 그랬다면…….
‘알아. 그냥 꿈으로 여겼겠지. 어차피 바뀌는 건 없었겠지.’
그래도, 혹시. 그 말은 달콤한 꿀이며 쓰디쓴 과실이다. 그때 나는 왠지 입을 떼기가 힘들어 입을 다물었다.
몇 번이고 생각한다. 그랬다면, 그렇게 했다면.
결국 지나간 과거는 되찾을 수 없는데도.
복잡한 기분을 안고 오늘도 꿈속에서 헤맨다. 손에 닿은 환상이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한 세 시간 정도 잤을까,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상체를 일으키자마자 발밑에 누워 있던 라라가 야옹야옹거리며 내 무릎에 달려든다.
“야옹!”
“알았어. 밥 줄게.”
“미야옹.”
사료가 들어 있는 통을 여니 목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다리에 머리를 부비고 뒷다리로 서서 팔을 쭉 뻗어 손으로 서랍을 긁는다. 나는 사료를 채운 밥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애옹!”
격렬하게 울며 부리나케 밥그릇에 머리를 밀어 넣는 라라. 나는 물그릇을 씻고 물을 새로 채웠다. 맛있게 밥을 먹는 라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얇은 잠옷 위에 제대로 된 옷을 걸치고 밖을 나섰다. 문틈을 살짝 열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부엌으로 향해 냉장고를 열었다. 어제부로 만들어 둔 요리가 똑 떨어졌다. 이번 식사 당번은 나와 인하지만 먼저 요리를 시작할까 한다. 인하는 아직 요리 실력이 좋지 않아 느긋하게 옆에서 봐 줘야 하니까.
뭘 만들까 고민하다가 된장찌개와 두부조림을 하기로 했다. 필요한 재료를 꺼내고 찌개부터 만들기 시작한다. 밥솥을 확인해 보니 텅 비었다. 나는 요리를 하다 말고 밥솥에 쌀을 넣고 취사 버튼을 눌렀다.
착착 요리를 진행했다. 찌개는 다 되었으니 바로 조림 준비에 들어간다. 찌개에 넣고 남은 두부를 전부 자르고 양념을 준비했다. 야채를 자르고 파를 채 썬다. 그즈음 인하가 부엌에 들어왔다.
“먼저 하고 있었어?”
“응. 일찍 일어났거든.”
“야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