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266
나는 이번엔 마력의 근원이 아니라 마력만을 흡수했다. 기껏해야 C랭크 상위? 나름 하긴 하지만 여기에는 그보다 강한 마법사가 상당하다. 아주 가끔이지만 S랭크 마법사도 들른다.
털썩. 남자는 눈을 까뒤집으며 자리에 쓰러졌다. 병원까지 옮겨 줄 자비는 없다. 여기는 나름 치안이 괜찮다. 시답잖게 납치해서 약으로 주무르거나 장기를 매매하는 일은 없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쳤다.
“휘익! 역시 청아 누님이야!”
“대단하다니까!”
“저거 보면 반할 것 같아!”
“여기에 번견 와 있는 거 잊지 마라.”
“헉! 무시무시한 소리는 하지 마!”
번견이란 성진이와 인성이 이야기다. 거친 지역만 돌아다니다 보니 이런 일이 많았는데, 더러운 음담패설에도 익숙해져 무덤덤해진 나와 인하, 소영이와는 달리 미영 할머니와 인성이, 성진이는 누가 우리한테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걸 질색했다. 물론 자신들이 그런 말을 듣는 것도.
“에잇, 시끄러워. 그러다가 진짜 걔들 온다? 걔들이 얼마나 눈치 빠른데.”
“헉!”
소영이의 일갈에 주위가 조금 조용해졌다. 이 신입, 실력은 나름 괜찮았는데 적응이 느려서 큰일이었다고.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조금 걸어가니 사위가 다시 조용해졌다.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옷 가게로 향했다. 캘런의 옷 가게는 이 거리에서도 번화가에 속하는 곳에 있다. 사람이 많이 다니고, 분위기 좋은 카페가 있는 곳.
쓸데없는 시비는 이제 사절인지라 몸 주위에 환각마법을 둘러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게 했다. 여기서 시비가 걸린 건 오랜만이다.
큰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종이 딸랑딸랑 울렸다.
“어머나, 청아 씨! 어서 오세요. 주문하신 옷 준비해 놨어요.”
“안녕하세요.”
풍성한 갈색 머리의 여자 캘런은 웃으며 나를 맞았다. 나는 가게를 한 번 둘러보았다.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고, 손님들은 옷을 고르고 있다.
“잠깐만요. 가지고 올게요!”
캘런은 카운터 뒤쪽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카운터 근처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캘런이 옷이 가득 걸린 이동식 행거를 밀고 왔다. 얇고 튼튼한 코트와 몸을 움직이기 편하게 만들어진 바지와 상의. 나는 맨 먼저 코트를 살폈다. 코트가 제일 중요한 방어구(防禦具)다.
“한번 입어 보실래요?”
“아뇨.”
나는 옷 위에 손을 올렸다. 전투복은 면을 이루는 실부터 다르다. 마법을 흡수하고, 마법에 반응하고, 주인을 보호한다. 내가 마법으로 좀 더 강한 마법을 걸면 S랭크 마법사에게 걸맞은 전투복이 탄생하리라.
“충분해요.”
“이 허리끈은 암철(暗鐵)을 짜 넣은 물건이니 무기로 쓰셔도 돼요. 단추는 주신 소재를 사용했고요.”
“수고하셨습니다.”
“별말씀을. 저야말로 항상 이렇게 주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캘런이 생긋 웃었다. 캘런이 행거를 통째로 작은 상자에 넣은 다음 내게 내밀었다. 내 손에 닿은 상자가 점점 희미해지며 사라졌다. 아공간에 들어간 것이다.
“그럼 저는 이만 갈게요.”
“아, 잠깐만요.”
“네?”
“혹시 알고 계시나 싶어서요. 조만간 거리가 옮겨질 예정이에요.”
“아……그렇군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그러며 캘런이 내게 반으로 접힌 카드를 내밀었다. 나는 카드를 대충 주머니에 넣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네. 다음에 또 오세요!”
우리는 캘런의 인사를 뒤로하며 가게를 나섰다.
“재인이는(최인성) 오래 걸린다고 했고, 이제 가면 되겠지?”
“그러네. 이제 볼일은 없어.”
“그럼 텔레포트 한다!”
소영이가 손가락을 딱 치며 바람을 불러들였다. 세찬 바람이 사라진 후, 우리는 어딘지 잘 모를 들판 위에 서 있었다. 들판에는 꽃이 만개해 있었고, 들판 아래로 층층이 들판과 숲이 펼쳐져 있었다.
“조금 산책하다 가자. 은하 너 한동안 바쁘잖아. 바빠지기 전에 좀 기분 전환이라도 하자.”
만개한 꽃과 몰려드는 벌, 나비를 보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봄이 짙어지고 있구나.
소영이는 문득 귀에 걸린 환각 아이템을 향해 손을 가져가다가, 변장을 풀지 않고 내렸다. 여기는 아직 바깥이다. 주위에 사람 한 명 없으니 이름 정도는 불러도 될지도 모르지만. 소영이가 몇 걸음 걷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인성이도 너도 뭐가 그렇게 바쁜지 모르겠다. 그런데 도울 수 있는 것도 별로 없고. 너희 바쁘다고 너무 일만 하지 마. 바깥에도 나오고, 밥도 잘 먹고.”
“신경 쓸게.”
“그렇게 말해 놓고 또 굶을 거면서.”
“…….”
“왜 대답이 없어? 응? 은하야?”
나는 말없이 걷기만 했다. 불만 가득한 미소로 내 대답을 재촉하던 소영이가 무엇을 떠올렸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의아해하며 소영이를 돌아보았다.
“왜?”
“아니, 새삼스럽지만 네가 장인이고 인성이가 개발자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서.”
“뭐?”
반문하자 소영이는 멋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쓸었다.
“사실 난 네가 장인반에 들어간 게 옛날엔 조금……이해가 안 됐어. 불만스럽기도 했고. 인성이랑 성진이는 부모님이 장인이었으니 어렴풋이 그러지 않을까 생각했었지만, 은하 넌 예전에 장인 일을 배웠던 것도 아니고, 마법도 강한데, 일부러 해 본 적도 없는 장인 일에 손을 댔잖아.”
“…그랬지.”
충동적으로 한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만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많은 건 알고 있었다. 스승님과 부모님은 조금 불안해했고, 선생님은 내 실력이 정체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난 그 말 듣고서 네 실력이 아깝다고 생각했어.”
전혀 몰랐다. 옛날 일을 되새겨 보았으나 역시 마음에 걸리는 건 없다. 그랬던가?
“그랬어?”
“응.”
소영이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지금 와선 다행인 거야. 그때 네가 그 진로를 택하지 않았으면 지금 싸움이 더 힘들었을 테니까.”
소영이가 쓰게 웃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어렵잖아. 맞아. 그때는 그런 거 생각할 필요가 없었지. 갑자기 세상이 이렇게 변할 줄 누가 알았겠어.”
“…….”
“…우린 재능이 있으니까, 강하니까, 죽지 않고 크게 다치지도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얼마든지 고를 수 있어. 어떤 강한 마법사라도 싸움을 결심하면 죽음의 위협을 감당해야 하는 지금과는 달랐으니까.”
“그때도 위험은 많았어.”
“그래도 지금만큼은 아니었잖아. 우리 정도 실력자면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목숨이 보장되는 세계였잖아. 그래, 지금도 우리가 죽는 건 웬만한 일이 맞지.”
“…….”
“싸우는 게 미치도록 괴로운 날이 올 줄은 몰랐어…….”
나는 무심코 주먹 쥔 손에 힘을 줬다. 쓰게 웃고 있는 소영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기억해? 우리 예전에 전쟁이 터지면 어떻게 할 건지 이야기를 나눴었잖아. 그때 너는 전쟁이 나면 도망가겠다고, 우리를 말리고 도망가겠다고 했었지.”
기억하고 있다. 친구들과 함께 나눴던 이야기는 하나라도 잊고 싶지 않으니까.
“이제야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알겠더라고.”
“…….”
“예를 들어 네가 싸움을 피해 어딘가로 도망친다고 치자. 넌 싸움을 하지 않아도 장인 일로 어떻게든 돈을 벌고 살 수 있어. 어디에 있든, 어디로 가든지.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니.”
불안해하는 것 같은 말투에 나는 소영이의 손을 잡았다. 소영이의 몸이 살짝 떨렸다.
“무슨 소리야? 난 아무 데도 가지 않아.”
“그건……나도 알아. 그냥, 난 말이지……이 복수가 끝나면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을 것 같아. 근데 막상 싸우지 않을 생각을 하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거 있지? 혹시 나 제자로 받아 줄래?”
“…….”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지금은 할 일에 집중할 거야.”
나는 소영이를 보며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목 안이 턱턱 막힌다.
“……복수가 끝난 후의 일을 지금 생각할 필욘 없잖아.”
“맞아. 복수가 우선이지. 하지만 그래도 가끔, 생각나. 가슴이 답답할 때라든가, 너희가 다치고 돌아올 때라든가.”
나를 따라오던 소영이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은하 너 요즘 성진이랑 사이 안 좋지? 좋아하는 건 그만뒀어?”
인상을 찌푸린 건지 웃고 있는 건지 모를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본다. 나는 그걸 따라 걸음을 멈췄다.
“……그런 건 아냐.”
사랑이란 감정이 사라졌다면 차라리 편했을까. 그만두고 싶다고 해서 그만둘 수 있었다면. 아니, 그랬다면 이번엔 다른 의미로 견딜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반드시 이뤄야 할 목표와 미움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복잡한 감정에 덮여 옅어지기는 했지만, 결국 그 감정은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을 감정이다.
그래서 더 복잡한 것이다. 성진이 나를 걱정해 주는 게 내심 좋으면서도, 나를 약하게 보는 것 같아 불쾌해지고, 그게 내가 무모한 행동을 해서라는 걸 아는데도 짜증 난다. 그리고 복수를 향한 마음의 차이가 그에게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
“성진이가 너무 냉정해서 싫어?”
나는 짧게 숨을 골랐다.
“아마. 아니, 그보다는……납득하기 힘들어.”
“하지만 성진이 걔도 대충 하는 건 아냐.”
“그건 알아.”
짧은 문장이 오고 갔다.
“……너는 괜찮아?”
“음~.”
잠깐 고민하던 소영이의 눈동자가 다시 씁쓸하게 물들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이 은하 너한텐 불쾌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알고 있겠지만, 우린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게 저번 참극이 처음이 아냐.”
“…….”
“나는 부모님과 오빠를 전투로 잃었고, 인성이도 엄마랑 아빠를 잃었어. 성진이는 원래 편부 가정이었는데 아빠를 잃었고. 혹시 내가 두 사람이 같은 마을 출신이라는 이야기 했던가? 심지어 두 사람은 가족만 잃은 게 아니야. 마을이 통째로 날아갔대. 그래서 시신을 못 찾은 유족도 있고, 실제로 인성이네 아버지는 시신을 못 찾았어.”
그들의 가정 사정을 듣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두 번째는 버틸 만했다는 소리를 하려는 건, 당연히 아냐. 두 번째라고 안 아플 리 있겠어? 더 아프지. 진짜 씨발 새끼들이야. 그땐 그래도, 평등한, 전투? 아니, 이건 아닌 것 같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흔히 있는 전투……아, 이것도 짜증 나! 하여간 그렇게 잃었는데……이번엔 무분별한 학살이잖아. 정말 너무 일방적이라 괴로운…….”
“……응.”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도……그래도, 그래도 극복은 빨리 되더라. 짜증 나는데 생각보다 더 빨리 일어날 수 있더라고. 감정도 더 빨리 추슬렀고. 그다음엔 주제에 너희가 걱정되더라. 우리가 넋을 잃은 사이 우리 물건을 몰래 챙겨 오고, 라라를 데려와선 애가 죽어 간다고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하는 성진을 보고는 또 기가 막혔지.”
그래, 라라.
“그땐 정말, 고마웠어…….”
눈앞의 충격에 무너져 내가 차마 떠올리지 못했던 가족을 구해 낸 건 성진과 소영이었다. 순간 소영이가 말문이 막힌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고맙단 말 들으니까 양심이 찔리네…….”
소영이가 자신의 앞머리를 헤집었다.
“난 그때, 정말 미안한 말인데, 고양이나 챙길 시간 있겠냐고 화를 냈거든. 근데 네 가족이란 말 듣고 기분이 이상하더라고. 게다가 네가 라라를 보자마자 안심한 얼굴로 울었잖아.”
고양이 따위? 나는 조금 울컥했다. 나한테 라라는 ‘따위’가 아니었다. 내가 화난 걸 눈치챘는지 소영이가 곤란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알아. 그 애가 너한텐 우리만큼 소중하단 걸 알아. 마지막 가족이란 걸 알아. 지금은 알아. 하지만 그땐 나도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 지금은 나도 라라가 좋지만, 역시 동료만큼 소중하진 않아.”
“…….”
소영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가 좀 샜네.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게 아니었는데. 근데 기분 전환 하려고 왔다가 왜 이런 대화를 하게 됐담? 하여간, 그러니까……아, 그래! 성진이 그 녀석이 말하더라. 무언가를 죽이는 것보다 지키는 게 수천 배는 더 어렵다고.”
“죽이는 것보다 지키는 게 어렵다고……?”
“그래. 우리도 지키지 못했잖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이상 이야기를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 심정은 소영이도 마찬가지일 걸 알기에, 나는 묵묵히 주먹에 힘을 줬다. 소영이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예를 들어 일대일로 벨라를 죽이려는 거랑, 뒤에 라라를 두고 벨라와 싸워야 하는 상황 중, 과연 어느 게 더 힘들까?”
뒤에 라라를 두고……? 내 앞에는 벨라가 있고, 내 뒤에는 라라가 있다. 선뜩한 감각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창백한 얼굴로 옷깃 안의 목걸이를 꽉 쥐었다. 소영이가 쓰게 웃었다.
“성진이 입장에선 우리가 라라인 거야. 언니를 잃은 라라가 복수하겠다고 벨라에게 달려들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그걸 두고 볼 수 없어서 사이에 끼어들어서 지키려고 하는 거야.”
참 실감 나는 비유다. 라라와 성진의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이 욱신 아파 왔다.
“그런데 사실 그렇잖아. 이 시대에 사는 사람은 누구든 공감할 거야. 목숨은 진짜 쉽게 사라져. 만약 참극 때 죽었던 모두가 단단히 대비한 다음 벨라를 만났다 치자? 근데 그래도 100명 이상 죽었을 거야. 그 여자라면 도망쳐도 쫓아왔겠지. 어쩌면 참극 때처럼 전부 죽었을지도 몰라. 강한 마법사가 사람을 죽이려고 마음먹으면 목숨은 정말……쉽게 사라져.”
목숨은 그렇게 가볍고 허무한 것인가? 사람은 그토록 쉽게 죽는가? 전생을 포함하면 나는 꽤 살았다. 그 녀석과 만난 생에는 불치병에 걸려 30살에 죽긴 했으나, 쉽게 죽지는 않았다. 내 주위에는 사고로 허망하게 죽은 사람이 없었다. 모두 천수를 누렸다. …그런가. 그 이전에 아는 사람이 적긴 했다.
“그리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겠지. 쉽게 죽을 생각은 없지만 아차 하는 사이 허무하게 죽게 될지도 몰라. 적어도 성진이 걔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그걸……그 불안감을……믿지 못해서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어.”
소영이가 손을 들어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은하는 참 감정 조절을 잘해.”
“……뭐?”
“복수를 생각하면 복수만 봐. 언제나 그래. 뭘 이루겠다고 생각하면 그것만 봐. 근데 옆에서 보면 엄청 위태위태하거든. 성진이만이 아니라 나도 인성이도 인하도 미영 할머니도 엄청 걱정하고 있어.”
소영이가 다시 나를 마주 보았다. 굳은 눈동자가 가슴에 아프게 박혔다. 걱정을 시켰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자해한 것까지 들켰는데 오죽할까.
“성진이 걔는 죽이는 것보다 지키는 걸 더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어. 걔가 그래 봬도 친구한텐 껌뻑 죽잖아. 옆에서 보면 그렇게 위태위태한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하겠어. 이 이상 누가 죽는 건 싫잖아.”
그녀의 눈동자에 다시 한번 물기가 어렸다.
“왜냐면 우린 누군가를 잃었기에 복수하는 거니까.”
“…──!”
한순간 숨이 막혔다. 잃었기에 복수하는 거다. 필사적으로 뼈를 깎지 않고는 이길 수 없다. 하지만 또 누군가를 잃고 싶지는 않다. 나의 각오. 다른 사람의 각오.
“그러니까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 마.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느냐의 문제잖아. 라라를 대하는 너의 태도나 내 태도가 다른 것처럼. 대신 우리는 서로가 죽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돼. 그 녀석이 지켜 주니까. 그렇다고 복수를 대충 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걸로 괜찮지 않아?”
“…….”
나는 우울하게 시선을 내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럼 진심으로 복수하고자 하는 건, 맞는 거지? 복수에 매달리는 내가 바보 같은가? 그런 이야기가 아닌 건 안다. 그러나 소영이의 말을 들어도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경고를 넘겨 버린 만큼, 나를 원망하는 만큼 더 복수에 매달리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소영이가 짜증을 내며 머리카락을 휘저었다.
“에이씨, 조금 더 참으려고 했는데 결국 말해 버렸네. 이런 건 원래 시간에 맡겨야 하는 거니까 한동안 더 지켜보려고 했는데, 왜 이야기가 이렇게 된 거지? 아니다, 그래도 한 번쯤은 이야기하고 싶었어. 하여간 그런 거야.”
“……나도 그 녀석이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건 알고 있어.”
“그래. 그럼 됐어.”
소영이가 쓰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하아아, 기분 전환 하러 온 건데 계속 우울한 이야기만 꺼내서 미안해. 요즘 그냥 좀 답답했던 것 같아.”
“알아. 나도 미안해.”
나는 소영이의 손을 잡으며 우울하게 시선을 내렸다.
사람마다 중요한 게 다른 건 알고 있다. 그 녀석이 우리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럼, 죽은 사람들은?’
단지, 우리만큼은 아니더라도 너 역시 복수에 필사적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인성이가 우리를 불렀다. 오랜만의 회의다. 가면과 전투복은 이미 완성되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가면에 끼울 장신구를 새로 만들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공방에서 나갔다. 2층 통신실이 회의실을 겸하고 있다.
“저번에 산델벤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여기저기 건드려 봤는데, 웬만한 조직은 바로 몸을 피했어. 정보가 넘어갔을 가능성을 가볍게 보지 않았던 거겠지.”
그렇다고 바로 다음 조직을 노리기엔 너무 눈에 띈 상태였으니 어쩔 수 없다. 우리는 테이블에 둘러앉아 맨 앞에 떠오른 스크린을 응시했다.
“산델벤과 주로 거래를 하면서 그들과 동등하거나 그보다 높으며, 트라베리아의 문장을 건 조직은 총 4곳이었어. 먼저 전투 조직인 무르시엘.”
산델벤과 통해 있던 조직의 이름은 대강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조직이 어떤 조직인지 자세히 모른다. 그걸 조사해서 싸울 만한 상대인지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도 바로 인성이다. 그래도 무르시엘이라 하면 모르는 자가 별로 없다.
“유명한 곳이지.”
“그래. 공식적인 S랭크 마법사와 비공식 S랭크 마법사가 상당수 속해 있고, 트라베리아와도 교류가 잦은 최대 전투 조직이야. 수호 연맹과 정면에서 겨루며 여러 나라에서 트라베리아를 대신해 전투를 하고 있지. 산델벤 혹은 그들과 동등한 키메라 실험 부대에서 키메라를 사 왔다고 해. 거기에 장군 시리즈가 두 마리나 간부로 있어.”
“윽. 네 말을 들어 보니까 지금의 우리론 상대하기 버거울 것 같다……?”
인성이가 웃으며 수긍했다. 좋아서 웃는 게 아니다. 눈동자는 시리게 차갑다.
“버겁기만 하겠어? 원래 수호 연맹 소속 울비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곳이야. 여긴……그러네, 본격적으로 트라베리아와 싸우기 전에 마지막으로 노릴 뱀 둥지로 걸맞은 조직이라 할 수 있지.”
“후우. 아직 트라베리아 외에도 우리가 이길 수 없는 마법사가 이렇게나 있구나.”
소영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가 다음 조직으로 넘어갔다.
“두 번째는 알카무라. 여기는……로봇 부대야.”
“로봇 부대?”
“우리가 흔히 기계병이라 부르는 로봇부터 시작해서 거대한 갑주 로봇, 안드로이드 등 다양한 로봇을 개발하고 판매하고 있어. 뿐만 아니라 기계 무기, 그러니까 기계 갑주나 검, 총 등도 개발하고 있고. 혹은 신체 일부를 잃은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기계 팔이나 기계 다리 같은 것도 만든다더라. 하여간 로봇이라 하면 생각나는 건 다 팔고 있어. 로봇 공학으론 이 조직을 따를 곳이 없다더군.”
“인성이가 좋아할 만한 곳이네.”
확실히. 소영이가 장난스럽게 웃자 인성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봤자 뒤 세계 조직인데 뭐. 게다가 사람과 로봇을 합체시켜 실력을 끌어올리는 실험을 하나 보더라. 실제로 여기 간부는 그렇게 해서 실력을 끌어올린 마법사이거나, 혹은 로봇이야.”
“우엑.”
우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곳과 연결된 조직이 바로 세 번째인 토게인. 여기도 키메라 부대인데, 여기는 산델벤이랑 역할이 달라. 산델벤은 주로 동물로 키메라를 만들어 냈잖아? 토게인은 사람과 동물을 합성시켜서 키메라를 만들어 내. 알카무라와 토게인은 유전자 조합으로 강해진 인간에게 기계식 무기를 융합시켜 병기로 개발시키고 싶은 모양이더라. 두 조직은 동맹 관계야.”
“아아…….”
“마지막으로 캐티아. 무기 상인 조합이야. 방범 장치부터 시작해서 총 화기, 날 무기 전투용 아이템 등 다양한 무기와 기계를 팔지. 앞서 말한 조직들과도 상업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더라. 여긴 다들 알지?”
스크린 가운데에는 쓰러진 산델벤의 이름이, 그 옆에 마인드맵처럼 연결된 다른 조직의 이름이 펼쳐졌다.
“그야 알지. 세계 최고 무기 무역 중립 도시. 하지만 이젠 뱀 둥지가 된 곤란한 배신자.”
소영이는 열불 난 표정으로 책상을 손바닥으로 쳤다.
“하필이면 세계 최고라고 이름 붙은 무기 조직이 트라베리아에 넘어가면 어쩌자는 거야. 안 그래도 힘에서 지고 있는 상황인데.”
“캐티아만 문제인 게 아니지. 알카무라와 무르시엘도 마찬가지야. …알카무라는 애초에 뒤 세계 조직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인하도 한숨을 내쉰다. 우리는 다시 인성이에게 집중했다. 인성이가 씩 웃었다.
“먼저 좋은 소식이야. 이 네 조직의 본거지를 찾아냈어.”
“찾아냈어?”
소영이가 놀라 되물었다.
“그래. 산델벤은 이 네 조직과 어느 정도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더라고. 뭐어, 캐티아는 원래부터 숨지 않았었지만.”
그래, 캐티아는 지금도 나름 중립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트라베리아의 뱀 둥지가 되어 문장을 걸고 있지만, 그렇다고 연맹 사람이나 그 외의 마법사들을 내치지도 않는다. 물론 연맹을 경계하고 무기 판매 레벨을 제한하는 정도는 하지만.
해상 도시 캐티아는 지금도 유유히 바다 위를 유영하고 있다.
캐티아의 무기는 실로 뛰어나, 웬만큼 무기를 사용하는 자들 중 반 이상은 캐티아를 찾아간다. 그럼에도 우리는 단 한 번도 캐티아에 들른 적이 없다. 이유는 당연히, 뱀 둥지의 무기 따위 쓰고 싶지 않으니까. 나중을 위해 살펴보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겠다 생각하게 된 것도 비교적 최근 일이라, 결국 우리는 캐티아에 대해선 이름만 들었지 도시의 풍경 같은 건 전혀 모른다.
“무르시엘은 신경 쓰지 않는 건지 움직이지 않았지만 토게인은 바로 물러나려고 하더라. 역시 같은 키메라 부대라서일까? 알카무라도 자신이 있기 때문인지 움직이지 않았고.”
소영이가 고민하는 얼굴로 손가락을 꼽았다.
“무르시엘은 우리가 상대하기 어려울 정도의 마법사들에다가 장군 시리즈까지 있는 조직이고, 토게인은…….”
“산델벤보다는 조금 레벨이 높아.”
인성이가 덧붙이자, 소영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세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그럼 알카무라는? 알카무라는 전혀 모르는데.”
“뒤 세계에선 유명한 조직이라 정보를 꽤 모을 수 있었어. 보스는 A랭크 마법사. 그 아래로 ‘기사’라 불리는 S랭크 마법사가 10명 있어. 제1기사의 실력은 S랭크 중상위, 적어도 지금의 성진이와 비슷한 레벨이지 않을까?”
우리는 난색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있을 만도 하다. 실로 만만치 않다.
“성진이와 비등하다고?”
“윽, 이제 보니 거기도 우리 힘으론 버겁잖아?”
“하지만 10기사의 실력은 소영이 너와 견줄 만한 정도라고 들었어. 거대 로봇이라던가?”
“거대 로봇? 왠지 재미있어 보이네.”
소영이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네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캐티아는……세계 최대 무기 상인 조합인 만큼 전력이 엄청 튼튼하고.”
“무기의 힘도 만만치 않아.”
“캐티아를 공격하면 당장 달려올 S랭크 마법사만 10명을 넘지 아마?”
“정말 위험하다 싶으면 트라베리아도 손 놓지 않을 테고.”
소영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인성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전면전을 벌일 속셈이라면 그렇게 되겠지.”
“──거기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미영 할머니가 드물게도 첨언했다.
“거기엔 비공식 초월자도 있다. 지금의 너희로선 상대하기 힘든, 나와 비슷한 실력의 상위 마법사가.”
“……!”
“뭐라고요?”
경악할 만한 정보에 우리는 깜짝 놀라 미영 할머니를 돌아보았다.
“아마……총장의 비서라고 기억한다. 이름은 스테이 레기우스, 인하와 마찬가지로 빛마법을 사용한다. 쓰는 방식에는 상당히 차이가 난다만.”
“윽, 곤란하게 됐네요.”
인성이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다. 혹시 다음 목표는 캐티아와 관계가 있는 건가? 나의 의문을 다른 동료들도 비슷하게 느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