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27
“아, 난 휴식 겸 잠깐 산책하고 있었지. 심심한데 우리 이야기라도 할래?”
“네? 네…….”
나는 무심코 잡지를 꽉 껴안으며 은희 언니의 눈치를 봤다. 그녀는 오늘따라 어쩐지 가라앉은 기색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공원을 거닐었다.
그녀는 불현듯 말을 꺼냈다.
“나 말이야, 이 학교가 정말 좋아.”
문득 내뱉어진 말의 갑작스러움에 나는 한순간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그녀의 말을 들었다.
“저번에도 한번 이야기했었던 것 같은데, 그,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하여간 나도 스카우트받아서 대현에 왔다고 했잖아.”
“……네.”
스카우트를 받았던 날 그녀에게서 한번 그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천천히 긍정했다.
“그게 말이지, 그게 다 내가 초딩 때 마법을 만들어서 그런 거야. 그냥, 소설로 봤던 정령을 동경해서 정령을 만들어 냈는데……만들기까지 시간은 엄청 걸렸지만, 어쨌거나 그 나이에 마법을 만들어 낸 거야. 그때 난 너무 기뻐서,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사실을 여기저기에 말해 버렸어. 엄마, 친구, 선생님……누구 할 것 없이.”
나는 그녀의 어린 시절 모습을 상상해 보려 했지만,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그녀가 한탄하듯 툭 내뱉었다.
“힘들었어.”
“…….”
“주변 사람들 모두 나를 볼 때마다 수군거리고, 소문이 퍼지자 여기저기에서……하여간 진저리가 날 정도로 시달렸어. 음, 시달렸던 이야기는 저번에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여기에 와서, 여기가 정말로 좋아졌다고 말했었지?”
“네.”
“구체적으로 어느 점이 좋았냐면, 평범한 점이 좋았어.”
나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은희 언니는 나를 보며 얼핏 웃었다.
“넌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더라. 나도 어렸을 때 그렇게 현명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불편한 기분이 들어 그녀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어쨌거나, 다른 애들이 날 평범하게 대해 주는 게 좋았어. 어차피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다시 밝혀질 일이더라도, 모두 평범하게 접해 줘서……보호받는 게,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게 그렇게 벅찬 일이란 걸 알았어. 그리고……아하하, 그때 나도 참 무슨 자존심이었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때 내가 또래 애들 중에서 제일 강할 줄 알았어. 와, 지금 생각하니까 쪽팔린다.”
그녀는 말과는 달리 경쾌하게 웃으며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주위 사람들한테 시달리고 짜증 내면서도 그런 만큼 내가 엄청 대단하다고 생각해서 자만심만 늘어서……하여간 난 그때, 여기 와서 처음으로 알았어. 여기엔 나랑 비슷하거나 나보다 강한 녀석들이 있다는 걸. 그 대표적인 예가 후배였던 주제현, 그 녀석이고.”
제현 선배는 지금도 이 학교의 톱으로 그녀보다 강했다. 은희 언니는 추억이 어린 눈으로 후련한 것처럼 웃고 있었다.
“처음엔 엄청 충격이었어. 특히 주제현에 대해선, 좀 짜증도 났었지. 나보다 어린 주제에 나보다 강하더라고? 난 여기에서도 상당한 재능의 소유자였지만, 그 녀석은 더했던 거야. 뭐, 그건 지금도 분하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자랑스러운 후배로 여기고 있어.”
“…….”
“친한 친구들도 많이 생겼고, 좋은 후배들에 과도하지 않은 팬도 있고, 즐거워서……. 음, 그러니까 난, 결국 이 학교가 그만큼 좋다는 거지.”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옅게 웃었다. 그 심정을 약간 알 것 같다. 은희 언니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도 이 학교가 좋다.
마음이 맞는 귀여운 친구들이 생겼다. 나는 나에게 인하 이외의 친구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만남은 정말로 의외였다.
친구들이 있다 보니 학교생활이 즐겁다. 평범하지만 마법 덕분에 완전히 평범하지만은 않은 일상. 내가 좋아하는 마법을 배우고, 친구들과 떠들고, 매일매일이 즐겁다. 진심이다.
“은하는 꿈이 있니?”
그건 또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긴. 넌 아직 어리니까, 아직 꿈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생에 내 꿈은 소설가였다. 나는 결과적으로 그것을 이루었다. 몹시도 충만하고 보람찬 나날이었다.
이어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지금은 당장 그토록 원하는 꿈이 없다. 소설을 쓰는 것은 여전히 즐거웠지만, 그만큼 마법을 배우는 것도 즐겁다. 굳이 꿈을 말한다면 내가 마법에 대고 세운 목표를 이루는 것 정도가 아닐까.
그녀는 고개를 젓는 나를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그래? 난 있어.”
“그래요……?”
“응. 뭐냐면, 이 학교의 가드가 되는 거.”
그건 정말로 의외의 꿈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정확히는 생각도 못 했다고나 할까? 나는 다시금 놀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난 이 학교가 정말 좋거든. 친해진 후배들도 있고, 아이들은 귀엽고. 그러니까 난 여기의 가드가 될 거야. 그것 때문에 내가 지금 엄청 고생 중이야.”
그녀는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검지를 세우며 인상을 좁혔다.
“학생회 인수인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여기 가드로 들어오려면 최소 B랭크는 돼야 하거든. 난 지금 C랭크긴 하지만……C랭크랑 B랭크의 격차가 너무 커서……. 난 이 나이치곤 강한 마법사지만, 아직 B에 다다를 정도는 아냐. 그래서 훈련하랴, 일 처리하랴, 어쨌거나 장난이 아니라니까.”
그야 C랭크부터는 위로 올라가기가 상당히 힘들다고 들었다. 랭크 시험은 단순히 힘의 격차를 구분하기 위한 자격시험이 아닌, 마법사의 레벨을 구분하기 위한 자격시험이다. 예를 들자면, E랭크는 하위 마법사니 마법사로서 하위에 해당하는 실력자들이 속하게 된다. 마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마법을 사용하는 실력, 마법의 응용법, 전체적인 밸런스와 대응법, 마법의 레벨, 그 모든 것을 전부 종합하여 랭크를 매기는 것이다.
D랭크는 보통 마법사니 마법사들 사이에서 보통 정도의 실력자들이 속하게 된다. C는 ‘강한 마법사’, B는 ‘고위 마법사’다. 마법사들 사이에서 강하다고 일컬어지는 실력자와 여타 마법사들의 위에 설 수 있는 실력자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참고로 그 자격 조건이 제법 확연하게 알려져 있는 A랭크와 S랭크로 예를 들자면, A랭크(스페셜리스트)와 S랭크(초월자) 사이에는 특별한 벽이 있다. S랭크의 마법사는 다른 마법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신과 같은 수준의 마법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실 A랭크 상위의 마법사 중에는 마력만이라면 이미 S랭크 하위의 마법사보다 강한 사람이 몇 명 있다. 그러므로 S랭크와 A랭크를 판가름하는 자격은 단순한 실력 차가 아닌, 마법이 ‘초월’했는가의 여부다.
─당신의 마법은 ‘인간’을 초월했는가?
단순히 마력의 크기와 그 강함만을 재는 시험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가상 시스템으로 시험을 보는 것 아니겠는가. 단순히 힘의 수치를 판가름하기 위한 시험이라면 그 정도로 복잡한 프로그램은 필요 없다.
그러니 E랭크와 D랭크 마법사의 실력 차는 별거 아닐지 몰라도, C랭크와 B랭크 마법사의 격차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보통 마법사의 10배와 강한 마법사의 10배가 같을 리가 없는 것과 똑같다.
‘학교의 가드라…….’
우리 학교 가드, B랭크부터 될 수 있었구나. 나는 가끔씩 오가며 보던 검은 양복의 언니 오빠들을 떠올리며 감탄했다.
동시에 제현 선배와 부회장 선배의 얼굴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 두 사람은 우리 학교 재학생 중에 유일하게 B랭크를 받은 마법사였다.
“근데 나보다 어린 녀석은 이미 B랭크라니, 이건 정말 사기 아냐?”
제현 선배 말인가.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맞는 소리였다. 그가 현재 이미 B랭크 마법사라는 건 작년에 처음으로 시험 쳤을 때 바로 B랭크 자격을 땄다는 소리가 아니겠나.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로 사기 같네.
그녀는 그 뒤로도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성후는 대학 진학할 거라더라. 걔는 여기 선생님이 되고 싶대. 걘 마법만이 아니라 공부도 엄청 잘하니까 머지않아 네 선생님이 되어서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뭐랄까, 아는 선배가 몇 년 후 선생님이 되어 앞에 나타난다니……상상만 해도 즐거운 이야기가 아닌가.
“그래서 말인데 은하야, 나 기운 좀 북돋아 줘.”
“……네?”
바스락, 낙엽이 밟혔다. 벌써 그런 계절이 되었구나……하는 생각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10월이다. 이 학교에 들어와 벌써 반년이 지난 것이다.
“용기 좀 북돋아 주라. 이제, 2개월 후면 마법사 랭크 시험이야. 나 엄청 긴장돼.”
……아아. 그럴 만도 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그녀의 꿈의 기로인 것이다.
물론 이번에 실패한다고 그녀가 영영 이 학교의 가드가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꿈이란 건 미뤄질수록 초조해진다. 그 기분을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은희 언니를 가만히 바라보며 고민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냥 가벼운 응원이라도 필요한 것마냥. 그러나 나는 그게 진심이 아님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녀 주위에 있는 물방울 같은 마력이 평소와는 달리 약간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어떠한 사실을 눈치챘다.
‘은희 언니의 랭크가 뭐였더라?’
CCC+, 그것이 나와 그녀가 만난 이후 그녀에게 주어지게 된 랭크였다.
그때의 내 감지능력 수준은 지금에 비하자면 매우 낮았다. 나는 그때에 비해서 많이 성장했고, 그에 따라 감지능력도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더 많은 마력을 보고 느끼고 좀 더 세세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때 보았던 그녀의 마력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설령 그때의 감각과 지금의 감각이 다르더라도, 무섭도록 날카롭게 성장한 기감으로 분명하게 비교할 수 있다.
그때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 주위에 있는 마력은 밀도부터 선명하게 차이가 났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다. 적어도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위로는 아니다. 괜찮을 거라고, 그런 말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것도 있다.
“……언니의 마력, 처음 봤을 때랑 비교해서 엄청 늘었어요.”
그래서 나는 내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사실을 말했다.
“한 세 배, 네 배……? 그 정도로요.”
“뭐……?”
처음 그녀의 마력을 보았을 때 무척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녀의 마력은 모양이 특이할 뿐만 아니라 보석처럼 예뻐서, 그때의 이미지는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랬는데, 지금 보이는 이것은 무언가. 그때와 비교하기도 힘들 정도로 선명하고 아름다운 마력은 저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나는 눈가에 마력을 퍼트려 좀 더 세세하게 그녀의 마력을 보았다.
물론 나는 나보다 강한 자의 마력을 자세히 느끼지는 못한다. 내 수준에서 벗어나 있으니까. 하지만 강한 마력은 색감도 느낌도 질이 다르다. 그것으로 성장세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그녀의 몸 주변으로 동그란 구슬 같기도 하고 보석 같기도 한 연하늘색 마력이 반짝였다. 한 알 한 알마다 느껴지는 마력의 기세가 남달랐다. 그녀는 그때에 비해 분명히 강해졌다. 눈으로 가늠해 보건대 최소 세 배 이상 강해졌다. 그럼 실제로는 훨씬 더 강해졌겠지.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몇 년간 마력을 줄곧 관찰해 왔던 내 직감이니 틀림없다.
대체 얼마만큼의 노력을 하면 1년 사이 여기까지 강해질 수 있는 걸까. 분명 굉장히 노력했을 것이다.
노력, 내가 좋아하는 단어다. 나는 기꺼이 웃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강해지기까지 분명 엄청 노력했겠죠. 그렇게 노력하고, 그렇게 강해졌으니까……은희 언니라면 틀림없이, 분명히 랭크 업 할 수 있을 거예요.”
은희 언니가 나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은하야!”
그러나 곧, 울먹이는 얼굴로 나를 꽉 끌어안았다.
수준별 수업 시간, 마법을 유지하다 말고 나는 은희 언니에 대한 일을 입 밖으로 꺼내 보았다. 자세한 건 아니고, 그저 은희 언니의 꿈이 가드였다는 이야기를 해 보았을 뿐이다. 그러자 민희가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거. 나 알아.”
나는 그 말에 놀라지 않았다. 제현 선배랑 은희 언니는 상당히 사이가 좋으니까 자연스럽게 알게 되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전부터 그게 꿈이랬거든. 은희 언니 있지, 우리 오빠한테 대련 신청 많이 해. 성후 오빠랑도 많이 한대.”
“하긴, 재학생 중에서 단 두 명뿐인 B랭크 마법사니까.”
“맞아, 맞아.”
다른 친구들은 우리의 말을 들으며 처음 알았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환각의 풍경을 바꿨다. 들고 있던 일러스트집을 넘기며 지면에 있는 풍경을 확산시키고 투영하는 것처럼 방 전체를 흐리고 반투명한 대략적인 환영으로 뒤덮었다.
그걸 보며, 각자 마법을 유지하고 있던 친구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근데 들고 있는 건 뭐야?”
“그거, 어제 사 온다고 했던 그거?”
현호와 인하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나도 같이 가지. 인하가 작게 투덜거렸다. 하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았거든.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뭐야? 일러스트집? 왜 이런 걸?”
한수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내 손에 들린 것을 휙 뺏었다. 그러자 인하의 시선이 날카로워졌지만, 한수는 당연히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응. 어제 준휘 선생님이 환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연습을 하는 게 좋을 거라 했잖아. 그래서, 사진 같은 걸 보고 따라 하면서 세세하게 상상해 보는 연습을 하려고.”
“흐음~그런 거냐.”
“응.”
“……그랬구나.”
이번에는 인하가 한수에게서 일러스트집을 휙 뺏었다. 일러스트집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인하의 얼굴이 어쩐지 약간 어두워 보였다. 옆에서 한수가 짜증을 내며 목소리를 높이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는 걸 보니 평소와는 확실히 달랐다. 왜 그러지? 의아해하던 나는 옆을 돌아보다가 무심코 흠칫했다. 어느새 좀 떨어진 곳에서 마법을 연습하고 있던 다른 아이들이나 유정 언니, 인호 오빠까지 내 옆에 모여 있었다. 모두……마법 연습은 어쩌고……?
‘으음……이러다 준휘 선생님한테 혼나겠는걸…….’
그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결국 모두의 정신은 일러스트집에 완전히 팔려, 준휘 선생님이 왔을 때 연습을 하고 있던 것은 나밖에 없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는 준휘 선생님의 호통을 듣게 되었다.
그런 소란 속에서도 인하는 유독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나는 걱정이 되어 물었다.
“인하야, 괜찮아?”
“……왜?”
“표정이 어두워 보여서. 무슨 일 있어?”
그러자 인하는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으으응.”
나는 바보같이 그것만으로도 그저 안심하고 말았다. 그것이 후에 나에게 어떤 상황이 되어 돌아올지 따윈 눈곱만큼도 모른 채, 바보 같을 정도로 마법 연습에만 집중했다.
나는 환각마법이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힘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계속된 바람이 이윽고 꿈으로서 자리 잡는 것과 마찬가지다. 환각이 현실감을 가질수록 그건 그다음에 사용할 마법에 힘을 실어 준다. 마법을 전문적으로 배우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최근 그것을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마법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 처음에는 문자마법으로 시작했지만 환각마법은 어느새 확실하게 메인마법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응용에 있어서는 아직 결계마법과 문자마법이 우위지만, 역시 내 메인마법은 환각마법이었다. 그건 내가 성장할수록 확신이 되어 갔다.
가장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문자마법, 아직은 시공간마법으로 진화시킬 엄두도 못 내는 결계마법, 두 마법의 성장세까지 합하여 나는 정말 마법 연습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날은 점점 추워져 갔고 모두의 마법도 꾸준히 성장했다. 인호 오빠의 사역수인 청룡은 이제 작은 번개를 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유정 언니도 팔 길이만 한 얼음덩어리를 생성할 수 있게 되었다. 현호는 장난치다가 물로 한수의 몸을 묶어 버린 적이 있었다. 즉 단단한 물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다. 당연하지만 그 마법은 그 직후 한수의 마법에 의해 순식간에 파훼되었다. 나무로 된 날카로운 칼로 단숨에 잘라 버리더라.
민희는 10개 정도의 마력 탄에 속성을 부여해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고, 인하는 빛으로 제대로 된 모양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들 사이에서 성장이 가장 빠른 것은 나였다. 정말, 이유를 모를 정도로 말이다.
겨울이 찾아왔다. 11월이 되자 학교는 많이 소란스러워졌다. 얼마 후면 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학급은 의무적인 참가를 할 필요가 없음에도, 우리 학년 아이들은 축제에 무언가를 내고 싶다며 들뜬 표정으로 논의를 했다.
나도 대현에서 처음 맞는 축제가 많이 기대되었다. 운동회와 마찬가지로 초*중*고 합동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규모가 큰 행사라 한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보는 ‘마법 세계의 축제’다. 3일 동안 한다고 하니, 맘껏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축제까지 2주가 남은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내가 체력 훈련을 시작한 지 딱 두 달째가 되는 날이기도 했다. 수준별 수업 시간이 끝날 즈음이 되어서 준휘 선생님은 예고도 없이 내 앞에서, 정확히는 우리 앞에서 이런 말을 꺼냈다.
“다음 시간부터 은하 넌 마법 전투용 무술을 배우게 될 거다.”
“……!”
제법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잘 생각해 보면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나온 말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체력 훈련을 시작하고 두 달 정도가 지났을 때 마법 전투 무술을 배우기로 했지 않나.
하지만 나로서는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기쁨에 가득 차 두 손을 모으며 환희했다. 드디어, 드디어였다.
나에게는 그랬다. 하지만 그건 친구들에겐 정말 갑작스러운 말이었던 것 같다. 한수와 인하가 말도 안 된단 표정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잠깐, 쌤! 왜 은하 쟤만? 그거 이상하잖아?”
“맞아요. 왜 갑자기 은하만…….”
이의를 제기한 두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모두도 불만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정 언니와 인호 오빠도, 우리가 한 살 많은데 왜 은하만 먼저 배우냐며 툴툴거렸다. 아, 하긴 그들 입장에서는 불만스러울 만도 하구나. 내가 당황하는 사이 준휘 선생님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번에 얘가 팔 다쳤었잖아. 기억나냐?”
“……네.”
인하는 답지도 않게 퉁퉁 부은 얼굴로 대답을 했다. 준휘 선생님이 이미 몇 달이나 지난 사건의 원인을 설명했다.
“그게 왜 그렇게 된 거냐면, 이 녀석이 전력으로 마력을 썼을 때, 몸이 이 녀석의 마력을 못 버텨서 그렇게 된 거다. 은하는 생각 이상으로 마력 성장이 빨랐어. 평범하게 자라나는 몸이 못 견딜 정도로. 그래서 육체 훈련이 필요해. 강한 마력을 견디기 위해서 몸도 단련시킬 필요가 있다는 거지.”
이어진 말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일단 말뜻을 이해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뭐야, 그건! 마력이 강하면 다칠 수도 있어?”
“그래. 몸이 견디지 못할 정도라면.”
민희가 멍한 눈으로 중얼거리자 준휘 선생님이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인하가 준휘 선생님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나를 돌아보았다. 나를 똑바로 담고 있는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런 거였어?”
응. 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하가 눈빛을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저기, 그럼……저희도 온 힘을 다해 마력을 쓰면 다치는 거 아닌가요? 그럼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아요?”
유정 언니가 손을 들며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준휘 선생님은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은 아직 그 정도는 아냐. 지금 문제인 건 은하지.”
“어……확실히 은하가 우리들 중 마력이 가장 많긴 하지만…….”
민희가 석연찮은 기색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렇게 차이 나요? 은하만 그걸 배울 정도로?”
“그래. 마력량만으로 따지면 너희들보다 적어도 다섯 배 이상 많다.”
“……!”
헐, 현호와 한수가 입을 크게 벌렸다. 한수가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사기다. 진짜.”
사실 말이 다섯 배지 실제로 비교하면 그게 그거다. 어린아이는 아무래도 성인과는 마력을 담을 수 있는 그릇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작은 것들끼리 비교해 봤자 크게 티가 날 리가 없지 않은가. 따지자면 그 정도쯤 차이 난다는 거다. 그래도 그 정도쯤 되면 어린아이의 몸에는 부담이 큰 모양이지.
근데 확실히 사기는 사기였다. 시간이 흐르면 알아서 따라잡힐 재능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어쩌면 생각 이상으로 재능이 있는 편이었나 보다. 정말로.
아이들은 그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 채 앓는 소리만 냈다. 끄응. 과연 은하. 하여간 사기라니까. 한수의 경우 비꼬기도 했다.
그리고 인하는……말이 없었다. 입을 다문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내가 불안해하며 인하를 향해 뭐라 말하려는데 마침 수업 종이 쳤다. 우리는 선생님한테 반쯤 떠밀려 교실을 나간 뒤, 각자의 반으로 향했다. 유정 언니와 인호 오빠는 2학년이므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으로 멀어졌고 우리는 함께 반으로 걸어갔다.
“너 말이야, 혼자만 그런 거 배우면 좋냐? 좋아?”
“에이~왜 그래. 은하 몸이 위험하다잖아! 당연히 배워야지!”
반으로 돌아가는 동안 한수는 계속 뚱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비꼬았다. 민희와 현호는 언제나와 같이 활기찼다. 다만 한수와 인하만이 평소와 달랐다.
한수가 시비조의 말을 하는 것은 언제나의 일이었지만, 한수는 진심으로 서운하다는 태도였다. 그리고 인하는, 인하는…….
인하는 평소와는 달리 내 앞에서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 걷기만 했다.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자 괜히 불안해졌다. 나는 인하를 흘끔거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저러지. 화난 것 같은데. 인하가 내 앞에서 저러는 건 친해진 이후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근데 무술을 배운다면, 그, 책에서처럼, 그 왜……체력 훈련! 맞아! 그런 거 하지 않아?”
인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나는 민희의 말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응?”
“그 왜, 있잖아. 몸을 튼튼하게 하려면 무술을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체력 훈련도 중요하다고 누가 말했는데……아 누구였더라. 까먹었다. 아무튼 그런 건 안 해?”
“맞아. 무술을 배우려면 기초가 중요하다고 책에서 그랬어!”
“그치?”
“응!”
민희와 현호는 오늘도 손발이 딱딱 맞았다. 한수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거 무슨 책이냐?”
“천호 오빠가 보던 무협책!”
“그럼 그렇지…….”
한수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민희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양손을 가슴 앞에 가져가며 주먹을 쥐었다.
“어쨌건, 그 책에선 검술을 배우기 위해서 팔 굽혀 펴기를 하거나 뛰거나 그런 거 하고 그랬는데!”
“맞아, 맞아! 운동도 같이 해야 몸이 튼튼해지지. 은하는 운동하면 금방 지치잖아. 그래선 무술 배워도 그냥 지칠 뿐이잖아.”
나는 이어지는 대화를 들으며 겸연쩍은 기분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하는데?”
그 말에 모두가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지금껏 고개만 숙이고 있던 인하도 마찬가지였다. 뭐? 동그랗게 뜬 눈에서 그들의 놀라움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무술 배우는 거, 예전에 한번 이야기가 오갔었거든. 그래서 몸 나았을 때부터 동네 돌면서 체력 훈련 했어. 내 운동 신경이 그렇게 좋진 않아서 많이 늘진 않았지만?”
“……나, 그런 말 처음 듣는데?”
인하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인하는 고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랬어?”
“그럼 넌……두 달 전부터 계속 체력 훈련을 했었다는 말이네?”
“응. 밤마다.”
“……그러고 보니 저녁마다 어디 나갔던 것 같기도 해. 왜, 말 안 했어?”
가라앉은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리 갈라진 것처럼 들렸다.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느껴졌다. 가슴이 아릿했다. 그건……무언가 터지기 직전에 찾아오는……그런 알 수 없는 불안감이었다. 불안한 일에는 유독 뛰어난 반응을 보이는 내 감이 경종을 울렸다. 어째서?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하며 말을 이어 갔다.
“어……정말 내가 말 안 했었나? 난 그냥, 체력 훈련을 해야 한다고만 생각해서…….”
“…….”
“별로, 인하한테까지 말할 일은 아니라고…….”
“그만 좀 해!”
그 순간, 인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깜짝 놀라 인하를 바라보았다.
놀란 것은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아니, 복도에 있던 아이들 모두가 깜짝 놀라 우리를 돌아보았다. 인하는 내가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더없이 괴롭다는 표정으로, 서럽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나를 봤다.
“넌 항상……난, 아무것도 몰랐어! 몰랐단 말이야! 네가 체력 훈련 하는 것도, 전에 다친 것도 직접 볼 때까진 아무것도 몰랐어! 왜! 왜 나한텐 그런 거 말 안 했어……?”
울 것 같기도 했고, 견딜 수 없는 감정에 북받친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굉장히 분해 미치겠다며 화난 표정이었다. 나는 당황하여 입술을 움직였다.
“왜, 왜 그래, 인하야? 난 그냥 별거 아닌 거라서…….”
“별거……아니라고……?”
인하가 내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얼굴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인하는 정말 지금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화내고 있었다. 인하는 입술을 한 번 깨문 뒤 소리쳤다.
“난! 은하 네가 가장 좋아! 가장 친한 친구야!”
나는 갑작스러운 고백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넌 날 가장 친한 친구로 생각하고 있는 거, 정말 맞아?! 넌 나한테 중요한 건 하나도 안 말하잖아!”
“자, 잠깐, 인하야…….”
“처음부터 그랬어! 넌 나한테 아무것도 말 안 해! 교복에 대해서도 그래! 미리 말했다면 같이 샀을 텐데! 그리고……!”
“인하, 저기……잠깐……!”
“난 항상, 너랑 같이 다니고 싶은데, 넌 혼자 막 돌아다니고……훈련도! 나한텐 제대로 말 안 하고 그냥 멋대로 하고! 그리고 난 네가 다른 애들이랑 같이 다니거나 네가 모르는 애들한테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너무 싫어! 네 친구는 나잖아!”
……뭐, 뭐지? 이 귀여운 질투는?
나는 순간 웃음을 참았다. 아니, 아니 잠깐만 기다려.
터져 나오는 말이 뒤로 가면 갈수록 귀엽기 그지없어서 순간 상황을 잊을 뻔했다. 나는 잠시간 아무 말도 못 한 채 입을 가리고만 있었다. 그런 내 모습에 무엇을 오해했는지 인하는 울 것같이 일그러진 눈동자로 속삭였다.
“……너무해.”
인하는 그대로 뒤돌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당황해 소리 질렀다.
“자, 잠깐, 인하야?!”
그러나 이미 인하는 복도 저편으로 모습을 숨기고 없었다.
나는 한순간에 남겨졌다. 뻗어진 손이 외로이 떨렸다. 인하가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잠깐만, 일이 왜 이렇게 됐지? 일단 사과해야 돼. 인하가 방금 뭐라고 했지?
몰려든 시선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도 더 신경 써야 하는 게 따로 있었다.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안 말해!’
나는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그랬나……?
“우와, 인하 저 녀석……쯧, 결국 터트려 주는군.”
“와……. 인하가 설마 저렇게 할 줄이야.”
“……저기 말이야.”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있다가 그다지 동요하지 않은 기색으로 말을 주고받는 한수와 민희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그렇게……안 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