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272
“그렇다면 안심이에요.”
나키리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는 문이를 향해 속삭였다.
‘좀비 감염 해석 어플을 만들어 줘. 할 수 있겠어?’
좀비의 상태를 관찰하고 구분하려면 아무래도 집중해서 눈을 써야 한다. 그보다는 어플을 만들어 관리하는 게 더 효율적이다. 문이가 수긍했다.
「가능합니다. 마스터가 본 정보와 주위를 통해 본 정보로 프로그램 구축 및, 좀비화 감염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축하겠습니다. 현재 데랜서의 영향으로 원거리마법이 불완전함은 고려해 주십시오.」
‘알았어.’
그럼 드디어 제대로 움직일 때다. 도쿄부터 시작해서 일본을 돌아다니며 좀비를 퇴치한다. 예슬이와 시하까지 위험해지기 전에 내가 해야 한다.
‘이성진이 있다면.’
그가 있었다면 ‘죽음’을 볼 수 있는 만큼 더 수월했을지도 모르지.
“그럼 저는 바깥을 돌며 식물형, 동물형 좀비를 없애고, 감염된 사람의 좀비화 진행을 멈추고 올게요.”
“네?”
“저는 동식물 좀비도 구분할 수 있어요.”
“아! 그렇군요. 확실히 동식물 좀비는 사람보다 구분하기가 힘들어요. 그리고 지금으로선 감염 확산을 멈출 수 있는 것도 미나 씨뿐이네요.”
사람과 사람만이 아니라 식물에게, 동물에게, 다시 사람에게. 이렇게 계속 확산되었다간 일본은 정말로 멸망할 거다. 첫 번째 감염 때 범인을 붙잡지 못한 순간부터 누군가가 죽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최선을 다하자.
‘당장 범인이 일본에 있을지는 사실 확실하지 않아. 어쩌면 꿈속의 나는 강화된 좀비한테 당한 걸지도 모르지. 아니면 수틀린다 싶을 때 나타날 수도 있고. 어쨌거나 트라베리아의 마법사가 아니기만을 비는 수밖에.’
나키리가 문득 걱정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병원에는 좀 강한 분이 있어 줬으면 했는데…….”
“주변에 결계를 치고 갈게요. 결계가 무너지면 바로 달려올 테니 걱정 마세요.”
강력한 마법을 설치하고 가야겠다. 도쿄를 처리하고 나면 멀리까지 나갈 예정이기 때문에 바로 달려올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 그래도 도쿄만은 지켜야지. 도쿄 바깥으로 나갈 때는 도쿄를 중심으로 시간을 재며 왔다 갔다 반복해야겠다.
“죄송해요. 우리 나라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 도와주시고.”
“……아뇨.”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예지몽에 이끌린 순간부터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내가 당장이라도 나갈 기세이자 예슬이와 시하가 내게 달려왔다.
“미나 님, 저희도 갈게요!”
“숫자가 많잖아. 우리도 도울게.”
그 의견에는 회의적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몸을 확실하게 보호할 수단이 없다면 여기 남아 있어.”
“하지만……!”
“난 결계마법으로 직접 공격 외엔 감염으로부터 몸을 완전히 보호할 수 있어. 더군다나 나는 체질적으로 면역력이 강해. 극독도 통하지 않을 정도야.”
“아…….”
“그러니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
두 사람만은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다. 예슬이와 시하가 분한 눈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나키리 의사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잠시만요, 극독도 이겨 내는 체질이라고요?”
“네. 그런데요?”
“그럼 혹시 당신의 피를 조금 뽑아도 될까요? 면역력이 강하다는 건 외부의 변화에도 강하다는 것. 어쩌면 당신 피로 특효약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요!”
내 피로? 그건 생각도 못 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이러는 동안에도 감염자는 늘어나고 있을 테니까.
“좋아요.”
나는 나키리 의사에게 기꺼이 손목을 내밀었다. 웬만해선 정체를 들킬 수 있을 만한 정보를 주고 싶지 않지만, 이런 상황이니 어쩔 수 없지. 나키리 의사가 주사기를 가져와 바늘을 내 손목에 밀어 넣었다. 그걸 한 번 더 반복했다. 주사기 두 개만큼의 피가 빠져나왔다.
피를 빼는 동안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병원 주위에 좀비나 좀비화가 일정 이상 진행된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단단히 결계를 쳤다. 그러며 문이와 대화를 했다.
「나키리의 말을 들으니 란스의 성배가 왜 사람에게 심각한 부담을 줬는지 알 것 같습니다. 좀비화하며 그 세포가 몸의 일부가 되었는데 그걸 축복이라고 억지로 배제하려 드니 부담이 컸던 겁니다. 세포를 떼어 내는 건 살을 떼어 내는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그러네. 세포인가. 그리고 내 피. 이게 마력 소모를 줄이면서 변이를 멈추거나 없애는 방법을 찾을 단서가 될 것 같아.’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뭣보다 환각마법으로 변이를 멈출 수 있는 건 확인되었으니까요.」
‘그래. 환각 실체화로 변이를 완전히 없앨 수 있는지도 한번 시험해 보자.’
「네.」
주삿바늘이 빠져나가자 상처가 바로 치유됐다. 나키리 의사는 단숨에 상처가 사라진 내 팔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성큼성큼 바깥으로 향했다.
“미나 님…….”
“아이템 잘 가지고 있어.”
“…그래, 알았어.”
지금 보니 예슬이와 시하의 허리에 아까 만났을 때는 보지 못했던 물건이 걸려 있다. 검은색 검집에 감싸인 카타나(일본도)다. 주문한 물건이란 게 저건가? 확실히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퍼뜩 머릿속에 허공을 가르던 검날이 떠올랐다. 머리가 베인 좀비.
‘역시 시하와 예슬이였구나…….’
나는 곧바로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오면서 닿지 않았던 방향으로 빙 돌았다. 오고 가면서, 혹은 드론이 이미 상당수의 좀비를 처리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아직 남아 있다.
아래에 보이는 식물은 죄다 좀비였다. 대중 미디어에 따르면 좀비에게 가장 유효한 수단은 불이라지. 그러나 불은 특기가 아니기에 강정현 선생님의 흑염을 사용했다. 강정현 선생님의 불꽃은 어둠마법이다. 어둠의 불꽃이 거기 있던 식물을 남김없이 태웠다.
시공간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건 정말 뼈아프다. 지금의 내 결계마법은 방어할 수는 있어도 세계를 차단할 수는 없다.
대규모마법을 사용하기 힘들다는 것도 뼈아프다. 데랜서만 없었다면 이미 좀비를 다 없애고도 남았을 텐데.
「좀비 대항용 프로그램을 만들기까지는 2시간 이상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렇게나 걸려?
나는 계속 동식물 좀비를 탐색했다. 빨리, 빨리 좀비들을 처리하고 다음 도시로 가야 한다. 눈에 보인다면 사람 좀비도 죽였다. 마음을 비정하게 닦아 내고 이미 죽었다는 말을 되뇐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죽음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
대규모마법은 확실히 유지하기 어렵지만, 나는 문이에게 힘을 불어넣으며 도쿄 지도 내에서 좀비화 범위를 파악했다. 우선 도쿄 내부의 좀비를 확실하게 없애고 그걸 유지하기 위해 결계를 쳐야겠다.
완전 차단 결계마법은 쓸 수 없고, 데랜서 때문에 마법을 지속하기도 힘들다. 아공간을 열 수 없으니 아이템을 꺼내 들 수도…….
‘어라? 혹시 여신님의 아공간도 안 열리나?’
여신님의 아공간은 특별하다. 내 영혼에 얽힌 아공간은 언제 어느 때든 열린다. 전에 트라베리아의 세계에 갇혔을 때도 여신님의 아공간만은 열렸다.
나는 고민하다가 여신님의 아공간을 열어 보았다. 과연, 여신님의 아공간은 아무런 저항 없이 열렸다.
그러나 그뿐이다. 여신님의 아공간은 내가 손댈 수 없는 영역이라, 아공간에 들어간다고 해도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는 없다. 내가 여신님에게 바란 아공간의 용도는 ‘생전 내가 가졌던 물건을 환생한 후에도 가지고 싶다’였다. 그러니 여신님의 아공간은 물건의 보관고일 뿐, 이 세계에 간섭할 수는 없다. 원하는 대로 다른 곳에 출구가 열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나는 다시 아공간을 닫았다. 지금은 이런 걸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손에 마법석을 만들어 냈다. 그 마법석을 문자마법으로 조종해 던졌다.
시공간 결계는 만들 수 없다. 그래도 벽은 만들 수 있다. 힘을 꽤나 불어넣은 마법석이니 꽤 오랫동안 유지될 것이다.
만들어 낸 결계석은 10개, 이것으로 ‘도쿄’란 구역을 나눈다. 새같이 하늘을 나는 동물이나 두더지처럼 땅속에서 사는 동물, 식물에도 감염됐을 테니 땅을 깊숙이 포함한 구 형태로 만들어 단단히 경계선을 나눴다.
「이 바이러스는 도쿄 외부에도 퍼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좀비를 없앤 후에도 내부 환경이 유지되도록 먼저 도쿄를 격리했습니다. 좀비의 처리에 협력 부탁드립니다. 좀비화되지 않은 분은 결계를 오고 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문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마 도쿄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들었을 것이다. 나는 하늘을 뒤덮고 있는 데랜서의 마력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차라리 데랜서를 부숴 버릴까?”
「반대입니다. 도쿄의 데랜서는 S랭크 상위입니다.」
“젠장.”
작게 욕을 하며 다시 돌아다녔다. 거리에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기 집으로 숨지 않고 곳곳에 있는 대피소에 숨어 방어마법을 유지하고 있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변이를 없애는 시도를 해 볼 수 없는 건 조금 아쉽다.
식물과 동물을 태우고, 또 태우고, 태우기를 반복했다. 강정현 선생님의 흑염은 사용법에 따라 다르지만 주인이 끄지 않는 한 그 생명을 태울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마법도 태울 수 있는 강렬한 불꽃이다.
중간에 자경단으로 보이는 사람을 만났다.
“결계를 친 거 혹시 당신인가?”
“네.”
“잘했어. 다른 도시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는 이상 격리하는 게 최선이지만, 저렇게 대규모로 격리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대단한걸.”
시멘트 벽에 기대어 누워 있던 남자가 내게 팔을 내보였다. 얼마나 물어뜯겼는지 살이 해지고 뼈가 드러나 있었다.
“방금 물어뜯겼어.”
이미 변이가 상당히 진행됐다. 란스의 성배를 쓰면 몸의 부담이 너무 클 거고, 정화마법으로는 정화할 수 없을 거다. 변이된 마력이 넘실대며 그의 마력을 침범한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난 괴물이 되고 싶지 않아. 내가 괴물이 되기 전에 죽여 주면 좋겠어. 스스로 죽기는 너무 무섭더라고.”
“……실례지만 잠시 시험해 볼게요.”
“뭐?”
나는 바로 움직였다. 남자의 통각을 마비시키고 상처를 정화마법으로 씻어 냈다.
이 정도로 심한 상처는 내 힘으로 고칠 수 없다. 역시 정화마법으로는 정도를 넘은 변이를 막을 수 없는 건지, 효과가 없다.
‘아직 완전히 변이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어. 이 사람한텐 미안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 해 보자. 환각은 확신이 있으니 마지막에 하고.’
나는 나키리의 말을 떠올렸다. ‘세포 변이’라.
즉 ‘좀비 세포’가 ‘사람 세포’를 잡아먹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이 현상은.
『좀비 세포 사람 세포에 닿을 때마다 희석』
『좀비 세포 사람 세포로 대체』
『좀비 세포가 사람 세포에 닿으면 사람 세포로 바뀜』
나는 심호흡을 했다. 원래 살아 있는 생물에 간섭하는 마법은 힘이 든다. 하물며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하는 세포를 건드려 변이한 육체를 사람의 육체로 되돌리는 일이다. 무엇보다 사람의 육체를 변이시키고 있는 이 바이러스, 상당히 레벨이 높은 마법으로 만들어진 병기다. 아마 나키리가 말한 약으로도 쉽게는 되돌릴 수 없겠지.
‘역시 트라베리아라고 말해야 할까. 이래서야 환각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인걸? 그래도…….’
생각보다 마력이 많이 들어갔다. 그러나 마력을 많이 넣는다고 해서 모든 것에 성공할 수는 없다.
「마법 실패!」
「세포 확인 불가. 지식이 부족합니다.」
「실패! 같은 마법을 반복합니다.」
「반복합니다.」
「마법 성공! 세포를 확인했습니다. 좀비 세포가 희석됩니다!」
「실패. 사람 세포로 변이하기 힘듭니다.」
『사람 세포 감염』
『좀비 세포 감염성 삭제』
『사람 세포 좀비 세포로 감염』
「감염 성공! 감염이 역전됩니다.」
“어, 어이……? 어이어이, 당신, 뭘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아니, 뭘 하는 거냐니까!”
“실험이에요. 좀비화를 멈출 수 없나 하는.”
“가능한 거야?”
“일시적으로는 어떻게든 멈출 수 있어요. 완전히 없앨 수 있을지는 좀 더 실험해 봐야 알아요.”
“……!”
마지막 실험이다. 나는 타자로 명령을 입력했다.
『혈청 주사』
「마스터의 피와 방금 확인한 정보를 토대로 혈청 주사를 만듭니다. 로딩 중….」
「혈청 주사 완성!」
빠르잖아?
「마스터에게는 의료 지식이 없으니 주사는 제가 놓겠습니다. 인성 님의 자료 중에 의료 지식이 있습니다.」
문이는 정말 다재다능하다. 허공에서 주사기가 만들어지더니 그 주사기가 알아서 남자의 팔에 꽂힌다. 주사기 안에 있던 혈청이 남자의 몸에 주입되었다.
나는 눈으로 끊임없이 남자의 마력을 확인했다.
「좀비화가 멈춥니다. 좀비 세포 증식이 멈춥니다. 마스터의 세포와 마법이 좀비 세포를 덮어씌워 없애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마스터가 좀비 세포에 영향을 받지 않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진짜야?”
「네. 틀림없습니다. 또한 이번 실험으로 인해 좀비의 세포 및 마력을 확인, 어플 완성이 30분으로 단축됩니다.」
“하아…….”
나는 묘한 눈으로 내 팔을 보았다. 설마 내 피가 이렇게 대단할 줄은 몰랐다. 아니, 알고는 있었다. 극독도 통하지 않는 몸. 그런데 설마 피를 이용해 저런 것을 할 수 있을 줄이야.
「좀비 세포 소멸이 확인되었습니다.」
나는 남자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병원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뭐? 하지만 나는…….”
“제대로 설명을 드리지 않아 죄송해요. 실험 성공했어요. 이제 다시 물리지 않는 한 좀비로 변하지 않을 거예요.”
“뭐? 정말이야?”
“네.”
“정말 내가 좀비가 되지 않는다고……?”
죽음을 각오했던 남자의 눈가가 젖어 들었다. 그러나 문이가 부정했다.
「그건 틀립니다. 마스터의 혈청과 감염 역전으로 인해 항체가 생겨 이 사람은 이제 설령 좀비에 물리더라도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의 혈청으로 특효약을 만들 것을 제안합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물었다.
“진짜야?”
「물론입니다. 그보다 마스터, 아직 식물형 좀비를 전부 없애지 못했습니다. 이분은 마법으로 배웅하고 먼저 식물형 좀비를 없애는 게 좋겠습니다.」
나는 문이의 의견에 수긍했다.
“마법으로 병원까지 배웅해 드릴게요. 이 편지를 나키리 선생님께 전해 주세요.”
나는 환각마법으로 편지를 만들어 냈다. 원하는 말이 편지에 그대로 담긴다. 나는 편지를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가 얼떨떨한 눈으로 편지를 받았다.
“너는 어쩌려고?”
“저는 식물형 좀비를 없앨 거예요. 확산을 막으려면 식물형 좀비와 동물형 좀비부터 없애야 하니까요.”
“그렇군. 그럼 나는 나키리 선생님께 가마.”
“네.”
나는 남자를 결계에 태워 나키리 병원에 보냈다. 떠나가는 남자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문자마법을 활용해서 치료법을 발견하긴 했지만……아까 그 방법도 많이 못 써.”
「마스터의 마력은 같은 레벨의 S랭크 마법사 중에서도 많은 편입니다. 그런 마력이 100분의 1이나 소비되었습니다. 마력 소비가 심합니다.」
“그렇지. 급할 때는 쓸 만하지만, 자칫하면 몇천 명을 살려야 하는 마당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혈청이 더 낫겠어. 이거라면 금방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마스터의 피는 확실히 대단합니다. 하지만 역시 문자마법을 덧씌워야 합니다. 마스터의 피를 사용하기에 마력 소모는 줄어들겠지만, 그래도 구할 수 있는 사람 숫자는 제한될 겁니다.」
“그런가…….”
「마스터, 도쿄에 뿌린 축복마법과 정화마법에 혈청을 섞는 것은 어떨까요? 지금보다는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설령 좀비에게 여러 군데 물리더라도 시간을 더 벌어 줄 거고요.」
“그렇겠네. 그렇게 하자.”
내친김에 한 번 더 소식을 알렸다.
「마을을 돌아다니는 빛 덩이는 좀비화를 늦추는 효과가 있으니, 좀비에게 물리신 분들은 그 빛을 삼키십시오.」
나와 문이는 돌아다니며 좀비화된 식물과 동물을 죄다 소멸시켰다. 데랜서 때문에 괜히 시간이 많이 걸렸다.
‘도쿄 바깥도 가 봐야 하는데. 다른 지역은 이러다가 전멸당할 거야. 하지만 원거리마법은 제대로 먹히지도 않고. 아니, 관서는 카미시로가 어떻게든 지켜 주지 않을까 싶지만.’
일본에 있는 또 한 사람의 S랭크 마법사를 떠올리다가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카미시로는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일본에서 벗어나지 않으니까, 있겠지? 있는 거겠지? 지금은 도쿄를 벗어날 수 없는데…….’
고민하던 나는 잠시 결계 바깥으로 나갔다. 두껍고 단단한 결계 막을 확인하고 그 위에 올라서 넓게 본다.
일본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 도쿄나 오사카 부근에 밀집해서 살고 있다. 그러니 도쿄만 지켜도 그럭저럭 선방하는 셈이다.
좀비화된 범위를 어느 정도 파악해 좀비가 된 것들은 전부 결계에 가뒀다. 좀비 바이러스를 퍼트린 자가 어떤 자이든 간에 뿌린다면 사람이 많은 곳에 뿌렸을 것이다. 때문에 가까운 외부에는 아직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았어야 정상일 텐데…….
“꽤 있네.”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세 자릿수는 넘어 보인다. 대부분은 식물과 동물이지만 드문드문 사람의 기척도 보인다.
나는 드론을 여섯 기 꺼냈다. 지금 결계 안에서 데랜서의 저항을 받아 가며 좀비를 해치우는 걸 도와주고 있는 녀석들보다 강한 상위 버전이다.
그나마 데랜서의 힘을 정화로 조금 중화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내부에 즉석으로 마법석을 만들어 채워 넣었다. 원래라면 중화하는 정도가 아니라 싹 정화되어야 할 테지만 데랜서의 힘이 너무 강해 내 마법으로도 전부 정화할 수 없다.
하얀 것에는 란스의 성배 하위 호환 버전과 정화마법, 내 혈청을 넣었다. 혹시 모르니 환각마법으로 모습을 감추게끔 했다. 검은 것에는 좀비를 분쇄하는 어둠 불꽃과 그에 해당하는 문자를 넣었다. 둘씩 짝을 지어 돌아다니며 내가 갈 때까지 바깥의 감염을 조금이나마 늦춰 줄 것이다.
마법석을 세 개씩 넣어 서로 호응하며 교체해서 사용하도록 설정해 놨다. 하나의 힘이 닳으면 그 마력석이 힘을 충전하는 동안 다른 힘이 마법을 사용하도록.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힘이 완전히 끊기는 일만은 없도록. 나는 드론을 날려 보냈다.
멀어지는 드론을 확인하고 결계 꼭대기로 올라서 서쪽을 보았다. …카미시로는, 움직이고 있겠지? 적어도 일본 사람들은 그렇다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하긴, 카미시로라면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걸 막고 있는 데랜서 결계도 어렵지 않게 뚫고 들어올 것이다.
데랜서 때문일까. 내 눈에는 아무런 마력도 비치지 않았다. S랭크 마법사의 마력이라면 그냥 보일 법도 한데.
지금이라도 바깥에 나갔다 올까? 그런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사이에 여기에서 큰일이 터지면? 예지몽처럼 변한다면?
나는, 안다. 한순간 손을 놓는 것만으로도 나락에 떨어질 수 있음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경험했다. 그래서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연맹이나 동료들은 올 거다. 중간중간 자경단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미 일본 바깥으로 상황을 전하러 간 동료가 있단다. 그러니 분명…….
그사이 좀비화를 확인하는 어플이 완성되었다. 새로운 모니터에 좀비화된 사람들의 모습이 비쳤다. 마정석의 힘은 점점 강해져, 이제 문이의 힘으로도 반경 15km밖에 조사할 수 없다. 그래도 지름 30km 정도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나는 가까운 곳의 좀비를 전부 없앤 후 다시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좀비의 기척을 분쇄하며 아까 둘러보지 않았던 곳으로 향했다. 우연이겠지만 그 거리는 다른 곳에 비해 좀비가 많았다.
“자경단이 안 보여.”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 비해 무너진 건물이 많다. 도쿄의 건물은 습격이 많은 만큼 튼튼하다. 일정한 간격으로 100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도 마련되어 있다. 하늘을 날던 나는 그 튼튼한 지하 방공호까지 박살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침음을 삼켰다. 반경 30km 내에 있는 좀비의 숫자는 150, 방공호가 박살 났으니 다른 곳보다 많을 만도 하지.
바로 가까이에 30명이나……. 그때 나를 향해 공격이 날아왔다. 하늘로 좀비들이 무리를 지어 날아온다. 열 개가 넘는 마법 공격을 피하고 막으며 나는 좀비들을 살폈다.
아까보다 훨씬 마법이 활성화되어 있다. 날카로운 꽃잎, 검은 늑대, 분홍색 구름, 주황색 화염, 주위를 둘러싼 은색 카타나, 기모노를 입은 인형, 나는 그러한 마법들을 산산이 부수며 실력을 쟀다.
‘C랭크……B랭크 수준까지? 위험하네.’
어둠이 무자비하게 좀비를 덮치며 부스러뜨린다. 나는 주위에 있는 좀비를 죄다 없애며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나는 주위 마력을 잘 끌어 쓴다. 그래서 마력을 거의 소비하는 기술을 써도 금방 마력을 회복하곤 한다. 하지만 데랜서의 영향 안에서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이 정도면 이 주위의 방공호는.’
나는 인상을 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데랜서 때문에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대피소 숫자는 적었다. 정말 성가시고 답답해서 못 살겠다.
여기는 몇 번 돌아다녔던 곳이다. 도시의 중심, 도쿄 타워에서도 멀지 않은 장소.
하루 만에 도시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원래 무너진 곳이 많았지만 지금은 훨씬 심했다. 완전히 무너진 건물 잔해가 여기저기 널려 있다. 반경 1km 안에 사람이 없는 건, 저 좀비들이 합심해서 덮쳤기 때문이겠지.
이 도시의 좀비는 마법을 쓴다. 신체능력도 마법도, 좀비가 되기 전보다 강해진다. 처음에는 농성이 통했지만 좀비 숫자가 많아지고 그들이 힘을 합칠수록 버티기 힘들어지고 있다. 점점 꿈속 광경과 비슷해지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여태까지 한 손가락으론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예지몽을 꿔 왔다. 그것을 사전에 바꿀 수 없었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싶지 않다.
반경 내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 방어마법을 덮어씌웠다.
「마스터. 감염이 아직 완전히 진행되지 않은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 가자.”
아직 나키리 병원에 쳐 놓은 결계에선 아무런 이상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최대 감지 범위를 유지하며 돌아다녔다. 그 반경에 있는 좀비는 없애며, 사람이 피난해 있는 장소는 결계와 환각마법으로 보호했다. 그리고 막 감염된 사람이 있으면 문자마법과 혈청, 환각을 적절히 사용해서 좀비화를 풀고, 근처 피난소에 보냈다.
작은 마법석으로 만든 결계와 환각마법은 오래 유지되지 않을 거다. 데랜서의 힘은 더 강해지고 있고, 널리 볼 수 있는 범위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방어가 못 버티기 전에 빨리 전부 없애 버리자.
좀비의 숫자는 줄어들 듯 말 듯하면서 은근히 줄어들지 않았다. 가벼운 원거리마법은 막아 내는 좀비도 있었다. 도쿄 서쪽 산기슭, 나는 마을 하나가 통째로 날아간 장소를 발견했다. 마을은 반짝이는 수정에 꿰뚫려 있었다. 강한 마법, 적어도 A랭크 이상이다.
문득 결계가 깨지는 기척이 나 그 방향으로 날아갔다. 막 사람을 물어뜯는 좀비 무리를 향해 마법을 날렸다. 강한 좀비였다. 마을을 궤멸시킨 그 좀비는 아니다. 그러나 느껴지는 마력이 심상치 않다. 하나는 A랭크에 준하고, 둘은 B랭크 상위다. 좀비화로 인해 강해진 것이겠지.
이래서다. 이래서 계속 희생자가 늘어난다.
‘젠장할.’
그러나 나에게는 기껏해야 A랭크다. 순식간에 온몸을 소멸시키고 물어뜯긴 사람을 구제했다. 한 사람은 구할 수 있었으나 한 사람은 결국 구하지 못하고 마법으로 분쇄해야 했다.
그들로부터 곤란한 이야기를 하나 전해 들었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좀비를 쓰러뜨리던 자경단이 많이 당했다고 한다. 내가 방금 쓰러뜨린 자도 본래는 자경단의 일원이었단다. 자경단은 최소 C랭크의 실력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무전을 통해 알아본 결과 그들 중 반 이상이 당했다는 모양이다.
‘좀비는 강하고, 사람들은 약해. 대규모마법만 제대로 쓸 수 있었어도.’
마치 오셀로 게임 같다. 내가 백으로 뒤집으면 저쪽에서 다시 흑으로 뒤집는다. 상황을 늦추기 위해 마법 사이에 심은 혈청으로는 물어뜯겨 파도처럼 주입되는 좀비 바이러스에는 이길 수 없다.
다시금 좀비화를 억제하는 마법석을 뿌리고, 범위가 점점 줄어드는 대규모마법으로 좀비를 처리했다. 억지로 힘을 쓰면 마을 두 개 정도는 집어삼킬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살아 있는 사람도 위험해진다.
‘손을 뗄 수가 없어. 이러는 동안에도 바깥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