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277
##05. 예언가
시간을 돌려 일본에서 막 좀비 소동이 일어났을 무렵, 일본 바깥에서도 큰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최인성이 새벽같이 일어나자마자 보게 된 것은 세계 수호 연맹 중에서 유일하게 직접 연락을 나누는 SR에서 온 메일이었다.
이른바 데랜서의 이상 현상. 트라베리아는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100개 가까이 되는 데랜서를 세웠다. 그것은 전 세계에서 조금씩 수를 늘리고 있다. 크기와 마력은 제각각이지만 색은 같은 데랜서는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고 있다. 보통 마법사로는 금조차 새기기 힘들다.
그 무시무시한 악마의 창이 갑자기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또 무슨 짓을 벌일 셈이야.”
트라베리아가 세계를 지배해 온 3년간, 그들은 한 번도 가벼운 사건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 어떤 사건이건 최소 세 자릿수 이상 사람이 죽어 갔다. 마을 단위, 도시 단위, 국가 단위. 하늘에 있던 도시는 거의 무너지고, 대지는 가라앉고, 바다는 죽음의 해역이 되었으며 이글거리던 화산은 꽁꽁 얼어붙었다.
최인성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이른 새벽이라 아직 아무도 깨어 있지 않겠지만 비상사태다. 전부 불러 모을까? 아니면 우선 누군가를 데리고 상황을 파악하러 갈까. 잠시 멈칫한 순간 최인성의 마법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레일리: 인성 씨, 레일리 리카르트입니다. 급하게 죄송합니다. 웬일인지 은하 씨가 메시지를 안 받네요.』
『레일리: 메일 읽으셨죠? 지금 난리예요. 탐색대 꾸려서 나갈 생각인데 여러분도 동행하실래요?』
최인성은 그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2층으로 텔레포트 해 통신실에 있는 경보 시스템을 눌렀다. 위이이잉──. 소란스러운 소리가 기지 전체를 울렸다.
머지않아 통신실로 사람이 모였다. 김미영이나 이성진은 텔레포트로 왔고, 이소영이나 강인하는 다급히 달려와 통신실 문을 열어젖혔다. 마지막으로 유은하가 텔레포트로 통신실에 도착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경보를 울리고.”
“큰일이야. 당장 조사하러 나가야 해. 몇 명은 수호 연맹과 동행할 거고.”
“수호 연맹이랑? 무슨 일인데?”
“전 세계에 퍼진 데랜서가──일제히 이상 현상을 일으켰대.”
“뭐?!”
모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일행이 다급히 앞으로 나섰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오늘 아침 막 메일을 본 거라 잘은 몰라. 아, 은하야. 레일리가 너한테 메일을 보냈다던데?”
“아……어제 늦게 자서 피곤했나 보네. 눈치 못 챘어.”
“문이가 뭐라 안 했어? 이런 위급한 일이면 문이가 너를 깨웠을 텐데.”
“그러게. 깊이 잠들었었나?”
유은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가만히 서 있던 이성진이 팔만 뻗어 유은하의 멱살을 잡았다.
“……?!”
“뭐 하는 거야?”
이성진은 그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내뱉고 싶었던 말을 그대로 말했다. 옆으로 손만 뻗어 멱살을 잡은 채 유은하를, 정확히는 유은하가 만든 ‘환상’을 노려봤다.
“성진아?”
“이게 무슨 짓이야?”
“그건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인…….”
이성진이 멱살을 꽉 쥐고 마력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이성진의 특수능력에 부딪혀 유은하의 환상이 흐릿해졌다.
파지직
“……!”
“환각?!”
유은하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졌다. 환각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잠깐……산책 다녀올게……. 금방 갔다 올 테니까, 내가 없는 걸 눈치채도……걱정하지 마…….”
“산책?”
“이 타이밍에?”
하필이면 트라베리아가 움직인 이 순간에! 이윽고 환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유은하의 환상이 목에 걸고 있던 반지 목걸이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성진이 반지 목걸이를 주웠다.
유은하는 가끔 밤이나 새벽에 산책을 나간다. 혼자 갈 때도 있고, 라라를 데리고 갈 때도 있으며, 가끔 자지 않고 있는 동료를 데리고 갈 때도 있다. 그건 다른 모두도 마찬가지니 딱히 당황할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 타이밍에 맞춰 큰일이 터졌다는 거다. 트라베리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움직이면 재해가 일어난다. 유은하라도 잘못 걸리면 목숨이 위험하다.
“하필이면…….”
최인성이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다른 사람은 그냥 평범한 산책이라고 생각하며 초조해했으나, 이성진만은 그게 아니란 걸 직감했다.
“그냥 산책이면, 왜 반지를 두고 갔지?”
이성진이 반지를 제 얼굴 가까이 가져왔다.
“언제나 몸에서 떼지 않는 소중한 반지를. 내──‘가호’가 있는 반지를.”
“그러고 보니…….”
강인하가 의아한 기색으로 턱에 손을 올렸다. 성진이 반지를 꽉 쥐었다.
“왜 마력과 영혼마저 여기에 남기고 갔지?”
“영혼을?”
소영이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들은 한순간 침묵했다.
산책을 간다면 평범하게 가면 될 일이다. 혼자 산책을 하고 싶어 눈속임용으로 가벼운 환상을 남기는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왜 그렇게 견고한 분신을 남겼지?
『레일리: 인성 씨, 같이 가실 거면 같이 갈 사람 명단 보내 주시고, 2시간 안에 본사로 와 주세요.』
“2시간이라.”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에 멤버 전원이 갈 필요는 없겠지. 최인성이 골치 아픈 눈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유은하는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그들을 속이기까지 하며 밖을 나섰을까.
“은하가 나간 거, 설마 데랜서와 관련 있는 거 아니겠지?”
“설마. 그럼 왜 혼자 가?”
“그래. 혼자 갈 이유가 없잖아.”
최인성은 엄지손톱을 몇 번 더 깨물다가 결정을 내렸다.
“좋아. 조를 나누자.”
1조는 최인성과 이소영, 수호 연맹과 동행한다. 2조는 이성진과 강인하, 유은하를 찾는다. 3조는 김미영, 데랜서를 확인하러 간다.
유은하는 강한 마법사다. 트라베리아 소속 마법사와 마주치지 않는 한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서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갈라졌다.
최인성과 이소영은 수호 연맹의 탐색 팀에 합류했다. 미국에도 데랜서가 있다. 미국의 포타주는 전쟁 초기에 트라베리아로 인해 살 수 없는 땅이 되었고, 트라베리아는 그 위에 자신들의 영역이란 증표를 남겼다.
그들은 포타주에 있는 데랜서로 향했다. 확실히 평소와 달리 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땅에 막 꽂혔을 때와 상태가 비슷하다. 데랜서는 세워진 직후에 짧으면 며칠, 길면 몇 달간 폭풍 같은 마력을 뿜어낸다. 그러다 일정 시기가 지나면 가라앉아 은은하게 마력을 흘린다.
그런데 얌전히 꽂혀 있던 데랜서가 갑자기 방대한 마력을 방출하고 있다. 덩달아 주위 마력 농도가 짙어져 간다. 숨이 막힐 정도로 강대한 마력이다. 그나마 미국은 듬성듬성 몇 개가 있을 뿐이라 그 영향이 강하지 않았다.
조금 멀리에서 데랜서를 지켜보던 그들은 이윽고 가까이 다가갔다. 폭격당한 흔적이 남아 있는 포타주는 데랜서가 아니라도 공기가 좋지 않다. 이소영은 괜히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기분 나빠. 부숴 버릴까?”
이번에 그들과 동행한 마법사, 엘다가 발을 들었다. 다리가 순식간에 칼날로 변했다. 엘다는 칼날로 변한 다리로 데랜서를 향해 검기를 날렸다.
쾅!
“이런 젠장할.”
그러나 데랜서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그 순간 데랜서에서 마력이 폭발하듯 팽창했다. 주위로 검은 번개가 뿌려졌다.
파직, 파지지직!
강력한 위력을 지닌 번개 불꽃에 모두 뒤로 물러났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데랜서 앞에 마법진이 생겨났다. 그들은 그 마법진의 정체를 익숙하게 알아챘다. 특정 누군가를 불러내는 소환진이다.
소환진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는 사람은 아는 자였다. 이름이 알려진 자들은 약 30개체, 그러나 전쟁 당시에 모습을 드러낸 건 소문으론 약 100개체. 트라베리아가 만들어 낸 생물 병기 키메라, 그중에서도 특히 뛰어나 이성을 가지고 마법을 부리는 장군 시리즈였다.
트라베리아는 어디에서 나온 건지 알 수 없는 기술력으로 옛날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특이한 특성을 지닌 생물 병기를 만들었다. 그중 이성이 있고 특히 강한 자들이 바로 장군 시리즈. 눈앞의 남자는 ‘듀라한’을 모델로 한 장군 시리즈로 이름은 듀크라 한다.
검은 말을 탄 채 투구에 감싸인 제 머리를 손에 들고 다니는 요정 혹은 저승사자. 그는 듀라한의 전설대로 죽음과 관련된 마법을 부린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 몇 초가 지나면 심장이 마비되며 손발이 떨리고, 붉은 마력이 그의 수족을 따르며, 듀라한이 뿌린 피에 맞은 자는 저주받아 며칠 안에 죽는다.
듀라한의 손에 들린 머리가 그들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온몸이 마비된다. 기사 갑옷을 입은 듀라한의 손에 새카만 검이 들렸다.
“이런!”
“피해!”
레일리가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일행 중에선 그녀의 실력이 제일 뛰어났다. 레일리의 손에서 붉은 회로가 뻗어져 나갔다. 거센 검격이 그 마법에 막혔다.
마법이 부딪친 충격으로 주위에 거센 여파가 몰아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랜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홍색 머리카락 사이에서 빛나는 레일리의 날카로운 시선과 은색 투구 사이에서 빛나는 듀라한의 음울한 검은 시선이 마주쳤다. 듀라한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의 명이다.”
“주인님? 어느 주인님이죠?”
“모든 주인님이다. 그 누구도 다운 피스를 건드리게 하지 마라. 그렇게 말씀하셨다.”
“대체 그 사람들은 저것으로 무엇을 하려는 거죠?”
“…….”
듀라한은 침묵했다. 레일리 리카르트는 입술을 깨물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장군 시리즈는 강하다. 하나같이 S랭크의 실력과 기술을 지니고 있다. 그냥 마력만 뛰어난 게 아니라 응용도 잘한다.
“레일리! 부숴야 합니다! 저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알아요, 하지만…….”
레일리는 침착하게 상황을 봤다. 그녀도 이 3년간 트라베리아에게 저항하며 많이 강해졌다. 그래도 장군 시리즈는 특별하다. 더군다나 이 듀라한은 레일리보다 훨씬 강하다. 추측하건대 S랭크 상위에 접한 실력자.
그래도 레일리의 비서, 로일이라면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일이 온 힘을 다해 싸우기에는 뒤에 사람이 너무 많다. 게다가 이상을 보이는 데랜서는 100개 가까이 된다. 상황을 파악하지 않고 싸우기엔 잃는 게 많다.
“지금은 물러나는 게 좋다고 봅니다. 장군 시리즈와 정면에서 싸우면 피해가 크겠죠. 여기서 저 듀라한과 싸울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로일 씨 정도입니다. 게다가 듀라한의 뒤에는 데랜서가 있어요. 데랜서가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릅니다.”
“저도 인성 씨 의견에 동의합니다. 여기서 싸우기에는 너무 불리합니다.”
최인성에 이어 라듀까지 그렇게 말하니 다른 자들도 고민하다가 찬성했다.
“그럼 상황을 좀 더 파악한 뒤 다시 오기로 해요.”
“되도록 빨리 부숴 버리고 싶지만 지금까지도 실패했으니까.”
엘다가 사자 갈기처럼 굽슬거리는 금갈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웬만한 마법사가 온 힘을 다해도 쓰러지지 않는 데랜서.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악마의 창이라 불리는 것이다.
데랜서를 없애려 한 사람은 많고도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데랜서의 힘이 너무 강해서 실패했다. 한 번은 벨라 트리저가 이런 말을 남겼다.
‘저것의 이름은 다운 피스, 우리의 깃발이다. 영토를 무너뜨리려 하는 놈은 우리한테 싸움을 거는 걸로 알겠다.’
그래서 보통은 영토가 아닌 곳에 꽂혀 있는 작은 데랜서를 없애는 데 그쳤다. 데랜서를 지키는 자도 없고, 쓰러뜨리면 바로 보복이 오는 것도 아니지만, 때론 트라베리아의 마법사와 마주치는 일도 있고, 데랜서가 무너진 뒤 더 끔찍한 사건이 그 땅에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연맹 정도로 강한 힘을 모으고 있는 마법사 집단이 아니고서야 섣불리 데랜서를 건드리지 못했다.
아니, 연맹이라도 쉽사리 건드리지는 못한다. 벨라가 맘먹고 덤비면 아무리 연맹이라 한들 전멸이다. 어째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한편으로는 다행인 일이었으며, 한편으로는 불길한 일이었다.
그나마 데랜서가 직접 누군가의 생존을 위협한 적이 없기에 다들 감시만 하며 손을 어느 정도 놓고 있었다.
그러나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막아야 한다.
일행은 결국 분함을 삼키며 자리를 떠났다.
데랜서가 이상을 일으킴과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데랜서만이 아니라 트라베리아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행동에 특별히 규칙성은 보이지 않았다. 소동이 일어난 것에 맞춰 제각각 움직이는 것에 가까웠다. 어느 뱀은 새로운 데랜서를 심었고, 어느 뱀 둥지는 이제 사람이 몇 명 남지 않은 도시에 대규모마법을 날렸다.
전 세계의 어느 정도 실력 있는 조직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정보를 모았다. 머지않아 그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서 몇 가지 법칙을 알아냈다.
데랜서 근처에서는 전파가 잘 통하지 않는다. 핸드폰이든, 무전기든, 따로 개발한 통신기든, 대부분 불통이 된다.
두 번째로 공간마법을 쓸 수 없다. 데랜서의 마력이 공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세 번째로 대규모마법 혹은 원거리마법을 쓰기 힘들다. 마정석의 마력이 주위를 지배하고 있어 마력이 넓은 범위에 미치기 힘들다. 마법사에게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힘이 강제로 와해된다.
다행히 마력에 중독되는 등의 일은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심각한 사태였다. 예를 들어, 데랜서에 완전히 둘러싸인 나라가 있다. 멸망한 것과 다름없는 나라에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다면 사람이 모이고 뭉쳐 살아간다.
그런데 데랜서의 영향 때문에 통신이 불가능하다. 공간마법을 쓸 수 없다. 원거리마법이나 대규모마법을 쓸 수 없다. 그럼 그 나라 사람은 데랜서 영역 안에 고립된다. 극단적으로 트라베리아가 그 나라 사람을 죄다 몰살시킨다 해도 바로 알 수 없다.
현재 데랜서는 트라베리아의 장군 시리즈가 지키고 있다. 심지어 손에 꼽히도록 강한 힘을 지닌 데랜서 앞에는 트라베리아의 마법사나 커븐 로드가 직접 나섰다. 특히 아시아는 막강하다. 한국을 지배하는 쌍둥이 마법사가 한국, 일본, 몽골 및 인근 아시아를 감시하고 나섰고,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리우 홍링도 러시아까지 손을 뻗쳤다. 아시아 대륙을 봉쇄하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되니 아시아에 거처를 두고 있던 사람들은 초조함을 금치 못했다. 한국은 원래부터 폐쇄되어 있었지만 이번 사건으로 일본, 몽골은 물론 중국 대륙도 반 이상 닫혔다.
“한국은 괜찮을지 모르겠군. 거긴 원래 완전히 폐쇄된 상태라 연락이 제대로 안 됐었지만…….”
조사 팀에 협조하고 있던 이백한이 불안한 눈으로 혀를 찼다. 한국에는 대현의 이사장과 몇 동료가 트라베리아의 눈을 피해 활동하고 있다.
최인성과 이소영은 어느 정도 정보를 모은 후 다시 기지로 돌아가 동료들과 만났다. 김미영이 모아 온 정보도 SR의 정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성진과 강인하는 유은하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성진은 한 번 본 영혼은 설령 우주 너머에 있다고 해도 찾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예외가 딱 한 명 있는데, 그게 바로 유은하였다.
유은하의 영혼은 처음 본 순간부터 흐릿하게만 보였다. 전에는 그래도 어디에 있든지 찾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일정 이상 멀어지면 보이지 않는다. 찾을 수도 없다.
그래서 이성진이 더 유은하의 상태를 신경 썼던 거다. 이제 그의 힘으로는 찾아낼 수 없으니까.
“미치겠네.”
시간이 지날수록 유은하의 부재는 그들에게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계획된 거였을까?”
이소영의 작은 물음에 최인성이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오늘 이렇게 될 걸 알고? 설마. 이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잖아.”
“그래.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뭔가 목적이 있어서 그런 정교한 환각 인형을 만들었을 거 아냐.”
“…….”
강인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소영의 말이 맞다. 동료들에게 말하지 않고 어디론가 가야만 했기에 그런 쓸데없이 정교한 환각 인형을 만들었을 테지.
“……데랜서 영역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우울한 눈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이성진이 입을 열었다.
“지구를 방향을 바꾸며 몇 바퀴 돌아봤지만 안 보였어. 웬만해선 스치듯이라도 보였을 거야. 데랜서는 ‘영혼’에 영향을 끼치지.”
“데랜서 때문에 안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
일행의 주위로 다시금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에 입을 연 건 최인성이었다.
“그럼 한동안 수호 연맹과 협력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연맹의 정보 수집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까.”
“은하는…….”
강인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은하는 무엇 때문에 갑자기 사라진 걸까?”
“……무슨 목적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어. 어쩌면 정말 우연히 산책을 나갔다가 데랜서 영역에 갇혀서 못 나오고 있는 걸지도 몰라. 은하라도 데랜서 영역 안에서는 텔레포트 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데랜서는 기지 근처에는 없잖아. 우리는 데랜서가 있는 장소는 피해 다니니까.”
최인성은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강인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그런데, 혼자? 혼자서 데랜서가 있는 곳에 갔다고? 은하라면 어디에 있든 두 시간만 달리면 데랜서 영역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거야.”
“인하야, 트라베리아가 움직이고 있어. 여기저기서 소규모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거기에 휘말렸다면 은하라도 쉽게 빠져나올 수는 없을 거야.”
“그렇겠지! 그렇지만!”
강인하가 역정을 냈다.
“그렇게 데랜서가 많은 나라는 이 주변엔 없어! 왜 그렇게 먼 곳까지 산책을 나가는데? 이상하잖아!”
“그건…….”
“그래. 그런 먼 곳까지 나갈 필요는 없지.”
이소영이 당황하는 순간, 이성진이 말을 가로챘다.
“내가 보기엔 이틀 전부터 상태가 조금 이상해 보였어.”
“나도 그렇게 느꼈어. 표정은 평소랑 똑같았지만,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어.”
“드물게도 사흘이나 제시간에 잠을 자러 들어갔지. 평소라면 말하지 않는 이상 들어가지 않는데.”
이성진과 강인하가 시선을 교환했다. 강인하는 최인성에게 눈짓했다.
“안 그래?”
“그래…. 왠지 초조해 보이기는 했어.”
이소영과 김미영은 조금 당황했다. 두 사람은 별다른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유은하는 ‘그날’ 이후로는 생각에 잠겨 있는 일이 많았고, 감정을 대부분 억누르고 다녔다. 이성진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를 발견해서 확인하고 싶었을 수도 있지. 생각하는 바도 있었겠고, 아니면 정말 기분 전환 삼아 보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갔었을 수도 있어. 하지만…….”
느릿하게 이어지던 이성진의 목소리가 확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소영은 등골이 오싹한 느낌에 몸을 움츠렸다.
“무슨 이유가 있든지 간에, 그런 위험한 곳에, 혼자서 가는 건──룰 위반이야.”
강인하의 눈매가 평소보다 매서워졌다. 분위기가 짙고 어둡고 차갑게 가라앉았다.
“무슨 일에 휘말렸든, 결과적으로 반나절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연락조차 없이, 왜? 데랜서의 영역 안이라 연락을 할 수 없어서? 두 시간이면 달려서라도 벗어날 수 있어. 무슨 일에 휘말렸기 때문에 나오지 못했나? 그게 아니면 혼자서 하고자 하는 일이 있어 도망치지도, 연락을 하지도 않은 건가.”
이성진의 말이 이어질수록 이소영과 최인성의 눈빛도 사나워졌다.
“그건 모르지. 다만 처음부터 그렇게 멀리 갈 생각이었다면, 혼자서 가서는 안 됐어.”
“하, 진짜. 대체 뭐 하자는 건지.”
이소영이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쨌거나 우선 은하를 찾자. 그게 먼저야.”
모두가 한마음으로 동의했다.
그로부터 반나절 후 중국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아니, 사건은 이미 일어났었고 데랜서 때문에 그것을 알아채는 것이 늦었다. 더욱이 중국과 일본, 한국은 커븐 로드인 리우 홍링, 릴리 클라인, 래넌 클라인의 손에 의해 거의 봉쇄당한 상태였다. 은신에 특화된 마법사가 겨우 경계 면적이 넓은 중국에 들어가 사태를 발견했다.
중국에서 또 하나의 장군 시리즈가 탄생했다. 장군 시리즈에 걸맞은 힘을 지닌 그 거신은 땅의 마력을 빼앗아 일대의 땅을 죽음의 땅으로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도시 두 개분의 생명을 빼앗아 자기 힘으로 전환했다. 한편 아프리카의 어느 숲에선 식물이 날뛰며 가시 미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거칠게 마력을 흩뿌리던 데랜서는 꼬박 하루가 지나자 이번엔 무차별로 주위에 마법을 흩뿌렸다. 넓게 퍼진 마력에서 생겨난 마법은 인근 도시를 뒤흔들었고, 수호 연맹이나 소동이 일어난 도시, 혹은 나라에 속한 마법사들은 그 폭격을 막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3년 동안 비교적 얌전히 세워져 있기만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데랜서를 영역을 알리기 위한 일종의 상징이 아닐까 생각해 왔다. 그 근거에는 벨라의 말이 큰 영향력을 차지했다.
그래, 역시 트라베리아가 하는 일에 ‘얌전한’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리 없었다. 역시 데랜서는 병기였다. 트라베리아가 세계를 좀 더 효율적으로 손에 넣기 위한 병기.
유은하의 동료들은 수호 연맹을 따라 바쁘게 나라와 나라 사이를 돌아다녔다. SR의 부탁을 받고 데랜서가 연동하고 있는 영역에 잠입해 상황을 확인했다. 데랜서 상태를 제외하곤 평소와는 다름없는 곳도 있었고, 물밑에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곳도 있었다.
데랜서 영역 안은 생각보다 짙고 깊은 마력으로 넘치고 있어, 유은하를 수색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들은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데랜서를 몇 개 부쉈다. 공격한 즉시 장군 시리즈 혹은 트라베리아의 마법사가 소환되니 한 번의 공격으로 부수려 애썼다. 실패했을 경우에는 소환진에서 나오는 마력의 급을 보고 싸우거나 도망쳤다. 자리에 남은 흔적은 이성진이 종말로 전부 죽여 버렸다.
그들이 필사적으로 유은하를 찾고 있을 무렵 레일리가 다시금 그들을 불렀다. 그 부름에 따라 데랜서 영역 안에서 빠져나온 일행은 그제야 유은하에게서 메시지가 왔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정석 근처에 있는 동안은 기지와도 링크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급히 연동된 컴퓨터마법으로 기지에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해 보았으나,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뷃뷅?』 하는 깨진 문자였다. 통신 방해로 메시지가 제대로 송신되지 않은 것이다.
“젠장!”
“하지만 데랜서 영역에서 무언가에 휘말렸을 확률은 더욱 커졌군.”
“그래.”
그들은 초조함을 삼키며 SR로 향했다. 레일리가 그들을 부른 이유는 토벌이었다. 중국에서 날뛰고 있는 새로운 장군 시리즈 토벌. 그 거신은 수천 명의 생명을 빼앗아 탄생한 것에 그치지 않고 눈에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 들고 있다.
“리우 홍링의 영역에서 장군 시리즈를 상대하자고요? 지금은 데랜서 때문에 중국에 발을 디딘 순간 노려지잖아요.”
“리우 홍링은 어머니와 루카 씨가 상대할 거예요.”
“…….”
리우 홍링은 커븐 로드, 커븐 로드는 전원 랭킹 10위 전후의 실력자다. 말하자면 살아 있는 전설. 그리고 그것은 SR의 전대 관리자 샐레나 리카르트와 방위부의 서장 루카 에밀라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사이에 우리는 새로 탄생한 장군 시리즈를 칠 거예요. 이 이상 경험을 쌓기 전에 없애 버려야 해요.”
유은하의 동료들은 고민했지만 이내 각오했다. 여러 영역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유은하는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껏 찾지 못한 위험한 장소에 손을 댈 수밖에 없다.
다만 혹시라도 지금 유은하가 있는 장소가 일본, 한국, 중국 세 나라 중 한 곳이라면, 쉬이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을 노려보는 그들의 눈에 새파란 노기가 어렸다.
장군 시리즈 한 개체를 쓰러뜨리기 위해 뛰어난 마법사가 한데 모였다. 토벌에 참가한 것은 SR의 레일리와 로일, 경찰의 라듀, 방위부의 아르피나, 중국 무술 연합의 훼이와 리, 마지막으로 최인성과 강인하였다. 각자 S랭크 혹은 A랭크 마법사다.
샐레나와 루카는 리우 홍링을 유인하기 위해 나섰다.
토벌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은 중국 인근 바다에 배를 띄우고 모였다. 태평양에서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 솟아오르는 마력을 감시했다.
“인성이랑 인하는 괜찮을까? 장군 시리즈는 대개 S랭크 중위권 안의 실력자잖아.”
이성진은 팔짱을 끼고 있을 뿐 대답이 없었다. 평소보다 몇 배는 위압감 넘치는 분위기가 그가 얼마나 초조해하고 있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오랫동안 이성진과 알아 왔던 이소영조차 그의 이러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알고나 있을지 몰라. 자기가 은하를 유독 각별하게 대한다는 걸.’
이성진이 이렇게 각별하게 대했던 건 기껏해야…….
이소영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슥슥 빗었다. 걱정스러워 묻긴 했지만 강인하와 최인성이 무사할 것을 안다. 이번 장군 시리즈는 막 태어난 애송이고, 토벌대에는 S랭크 상위권 마법사도 끼어 있다. 만약의 경우에는 이성진의 가호도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들었을 때 하늘 어느 곳에서 폭풍이 일었다.
콰앙──!
파직파직
이소영이 유일하게 알 수 있었던 건 그게 굉장히 먼 하늘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마력과 마력이 부딪치며 하늘이 진동했다. 대기가 갈라지며 그 사이로 한순간 우주의 어둠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에 있던 무언가가 묵직하게 폭발했다.
“힉……!”
온몸을 저릿저릿하게 난도질하는 압도적인 마력. 배 위에 서 있던 마법사들은 다들 표정이 창백해졌다. 몇 사람은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았고, 어떤 사람은 몸을 팔로 감싸며 겨우 자리에서 버텼다. 이소영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소영은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으며 손을 세게 모아 쥐었다.
‘트라베리아를 쓰러뜨리려면 저 정도 실력으로 올라가야 해.’
복수심에 가득 찼던 마음은 이럴 때마다 두려움으로 쪼그라든다. 이소영은 잠시 후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팔의 일부가 한순간 바람으로 흩어졌다 돌아왔다.
이소영은 이제 완연히 초월자다.
마력은 강인하에 비해 조금 부족하지만 마법 레벨은 일정 선을 넘었다. 초월자가 되기 위한 조건은 마력의 크기 따위가 아니다. 벽을 넘어설 수 있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가, 오직 그것이다.
게다가 자연속성 마법사의 초월 지점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것은 자연에 동화하는 것. 불꽃을 사용하는 마법사는 불꽃으로, 빛을 사용하는 마법사는 빛으로, 바람을 사용하는 마법사는 바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