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278
이소영은 한때 강인하나 최인성에 비해 성장 속도가 느렸지만, 어느 시점부터 가속하듯 빠르게 성장했다. 마력이 어떤 수준을 뛰어넘자 자연스럽게 몸이 바람으로 변했다. 그런 타입이었던 거다.
떨리는 몸을 애써 지탱하며 반복해서 일어나는 하늘의 붕괴를 직시하고 있던 이소영은 갑자기 튕기듯 어딘가를 돌아보는 이성진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이성진은 그대로 어느 한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어렸다. 이소영이 표정을 굳혔다.
“뭐야, 왜 그래?”
“……일본.”
“뭐? 일본?”
“일본으로 이동한다.”
“뭐?”
이성진은 이유도 말하지 않고 중국 앞바다에서 근처에서 일본 해안가로 이동했다.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이동에 당황하며 데랜서의 마력이 자욱하게 깔린 수평선 너머를 보았다. 마력을 눈치챈 자가 이성진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왜 그러지?”
이성진은 대답하지 않은 채 정면이 아니라 조금 위를, 하늘 쪽을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이성진의 시선을 좇아 일본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성진아, 뭐가 보여?”
이소영의 물음에 비로소 이성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마법진…….”
“마법진?”
여전히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성진에게는 보였다.
데랜서의 힘이 영역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리고 있다. 그러나 저토록 찬란하고 아름다운 힘을 고작 데랜서 따위가 가릴 수 있을쏘냐. 하늘을 수놓는 은색 마법진. 그 밑으로 떨어지는 정화의 비.
“……그 녀석이다.”
이소영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속삭임이었다.
이소영은 눈을 크게 뜨고 일본을 휙 돌아보았다. 일본은 아직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한 나라였다. 원래 모든 나라가 데랜서에 지배받고 있었던 데다, 잠입시킨 조사원은 한 명도 바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혹은 릴리 클라인에게 걸려 전부 조각조각 해체되어 죽었다.
이소영은 이를 갈았다.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설마 이성진이 잘못 봤을 리 없다. 방금까지 잊고 있었던 분노가 가슴에 넘치도록 흘러내렸다. 갑자기 사라졌다 했더니, 일본에 있고, 일본에서 마법진이 필요할 정도의 마법을 쓰고 있다라.
‘대체 뭐 하러 저런 곳에 간 거야. 일본은 이미 멸망이 가까운 나라, 어찌 보면 한국보다 위험한 나라라고!’
이소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도 S랭크 상위 마법사인 카미시로가 있으니 중국보다는 나은가? 아니, 어느 쪽이든 최악이다.
중국에서 일어난 전투는 그로부터 꼬박 반나절이 지난 후에야 끝이 났다. 리우 홍링과 샐레나, 루카의 싸움에 결국 래넌 클라인까지 끼어들었고, 샐레나와 루카는 거신이 쓰러진 후 재빨리 도주했다.
싸움은 다행히 수호 연맹의 희생 하나 없는 승리로 끝났다.
다행히 새까만 색 사이에서 나키리 일행을 발견했다. 나키리 일행은 야트막한 뒷산에 있는 제법 커다란 폐공장 지하실에 숨어 있었다.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우리는 좀비에게 발견되어 다시 도망치기 위해 움직였다. 도쿄의 상징이었던 도쿄 타워가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찾아가 보니 나키리 일행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그 자리에서 이곳까지 살아서 도망쳐 온 사람은 나키리와 사카기를 포함해 고작 30명뿐이었다. 그중 한 명은 아까 보았듯이 총에 맞았고 7명은 장군 좀비의 힘에 당해 멀쩡한 상태가 아니다. 5명은 도망치는 도중 좀비의 마법에 당해 부상을 입었다.
일본은 궤멸한다. 그 장군 좀비가 한 말은 실현됐다. 검은 창의 비를 디스펠 할 수 있었던 범위는 고작 미나토 구역 인근뿐, 그 바깥에는 예외 없이 검은 창이 내리꽂혔겠지. 그 여파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 혹은 시체로 돌아왔던 육신이 다시 좀비가 되었고, 바깥에 있던 좀비는 전부 도쿄로 몰려왔다. 우리가 장군 좀비에게 떠밀려 억지로 떠나 있던 몇 분간, 병원에서 맘을 놓고 있던 피난민 중 대부분이 무자비하게 죽었다. 흩어져서 도망쳤다고 하는데, 과연 얼마나 살아남았을지.
“이제 일본에 안전한 곳 따윈 어디에도 없어. 카미시로 님도 죽었어…!”
장군 좀비는 병원에 한차례 공격을 가하고 그냥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죽으려면 좀비에게 죽어라, 그런 뜻일까.
나키리는 숨을 죽인 채 울었다. 이미 희망을 보는 사람 따위는 아무도 없다. 그나마 살아갈 기력이 남아 있는 자가 바로 사카기였다. 사카기는 병원을 떠나며 식량과 무기를 착실히 챙겨 왔다.
그는 몸을 쉬면서 생각에 잠겨 있는 우리에게 찾아왔다.
“이미 일본에 희망은 없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끝이다.”
속삭이듯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많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생각해 보면 쓸데없는 애착이었는지도 몰라. 일본이 멸망할 건 예견된 일이었어. 트라베리아가 바로 옆 나라인 한국을 근거지로 삼은 순간부터, 바뀔 수 없는 운명이었지.”
“…….”
“나는 일본이 좋았다. 고향이야. 태어나고 자라 왔다. 친구도, 부모도, 추억도, 전부 여기에 있는데, 차마 그걸 두고 떠날 수 있어야지. 나와 비슷하게 일본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보며, 나를 의지하는 사람들을 보며, 얼마나 위안이 됐는지 몰라…….”
“…….”
“하지만 이제 일본을 떠나려고 한다. 트라베리아가 일본 밖에 못 나가게 무슨 수를 쓴 것 같지만 힘을 모으면 작은 탈출구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거야. 아직……아직 난 죽고 싶지 않거든.”
사카기가 쓴웃음을 지었다.
“너희는 어쩔 거냐.”
나는 조용히 고민하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글쎄요.”
상황에 휩쓸려 가는 색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도쿄 타워에서 내려다봤을 때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이 어느 정도 있었다. 이미 일본은 살아남을 수 없다. 사람은 계속 죽어 간다. 또다시 기후마법을 써도 소용이 없다. 이번엔 핵이 있는 좀비라, 핵을 정확히 찌르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
사람들을 구하러 갈까 생각했다. 살아남은 사람들만이라도 구하러 갈까 하고.
구하러 가고, 한곳에 모으고, 지킨다. 같이 일본을 탈출할 때까지 지킨다.
그러나 나는 곧 그것이 오만임을 깨달았다. 소영이는 언젠가 이성진이 이런 말을 했다고 했었다. 죽이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어렵다고. 그래, 분하지만 부정할 수 없다. 데랜서 영역 안에서 무더기로 덤벼드는 좀비들의 습격을 막으며 수십 수백 명의 생존자를 데리고 일본을 탈출한다? 고작 우리 세 사람의 힘으로? 그걸 과연 장군 좀비가 두고 볼까?
장군 좀비는 내가 본실력을 발휘해도 이기기 어려운 상대다. 죽이기 위한 마법을 쓰는 대등한 실력자와 싸우면서,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을 지키며 탈출한다라. 정말 너무도 현실성 없는 이야기 아닌가?
지금 당장 달려가서 구해 내 데려올 수는 있을 거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전부는 데려올 수 없다. 숫자를 추리고 추려 강한 사람만 구해야 하려나.
생존자들을 전부 구하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겠지. 장군 좀비가 데랜서의 힘을 빌려 오지 않았다면 그나마 좀 더 매달렸을지도 모르겠다.
데랜서의 힘으로 만든 저 영역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밤의 우리? 그래, 그렇게 표현하자.
밤의 우리가 없다면, 대규모마법을 쓸 수 있다면, 몸 상태가 정상이라면. 그래서 대규모마법으로 좀비들을 몰살시킬 수 있다면.
몰살시킨 후엔 바로 장군 좀비를 치러 가야겠지. 마지막으로 내가 장군 좀비를 쓰러뜨린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살아남은 주민들을 전부 데리고 탈출할 수 있을 거다. 단, 트라베리아가 장군 시리즈가 죽은 걸 눈치채고 상황을 보러 오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조건이 갖춰진다 해도 이미 그때는 모든 사람이 좀비화해 죽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예전, 트라베리아의 실험 세계에 갇혔을 때와 똑같았다. 개인의 힘은 이렇게 작다. 행성을 부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졌다고 한들, 그보다 더 강한 힘이 있는 데다, 강하다고 만능인 것도 아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나뉜다. 나는 어느샌가 그것을 냉정하게 판단하는 사람이 됐다.
처음 마법을 얻었을 때는 정말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할 수 있는 일만 할 수 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의 죽음을 묵인해야 하는 일이 이 세상에는 너무도 흔하다.
이곳은 좀비들이 돌아다니는 지역과 꽤 떨어져 있다. 당장 사람이 죽는 모습이 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나는 우울하게 눈을 감았다.
어떻게 할까.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몸을 회복하는 게 선결이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까? 몸을 회복한 뒤 다시 몸을 지킬 수 있게 되면 무엇부터 할까?
일본은 이미 궤멸, 그건 이제 틀림없는 진실이다. 밤의 우리는 강력하다. 하지만 몸이 회복된 뒤 전력을 사용한다면 사카기 말대로 우리 세 사람이 바깥으로 나갈 출구 정도는 열 수 있을 것이다.
실험장이 되어 버린 일본을 두고 도망칠까? 동료들에게 혼난 후 동료들이나 세계 수호 연맹에 사정을 설명하면 될까?
그게 아니면 같잖은 위선 같은 정의를 위해 지금 실험을 벌이고 있는 장군 좀비를 쓰러뜨리는 길도 있다. 트라베리아가 상황을 보러 오기 전에 숨거나 도망가기로 하고. 내 마법은 정화속성 때문에 흔적이 안 남으니까.
그 남자와 나의 실력은 대등, 상성은 최악, 그래도 실력 향상에는 도움이 되겠지. 몸의 후유증은 대충 두, 세 시간 안에 회복될 것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어. 최선은 아니라도 노력했어.’
나는 지친 눈으로 허공을 보며 마른세수를 했다.
‘이만 기지로 돌아갈까?’
예지는 결국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수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데랜서의 능력을 좀 더 알게 됐다. 트라베리아의 문장(핵)을 지닌 자에게 힘을 주고, 때로는 서로 연결해 나라 하나를 지배하고, 마법을 억누른다. 괜히 악마의 창이라 이름 붙은 게 아니다.
어느 쪽이든 혼자 하는 것보단 누군가를 데리고 오는 게 나을 것이다. 이것은 작전상 후퇴일까, 도망일까. 결심을 지켜 내지 못했으니까 도망인가.
이 이상 이곳에 있으면 내 목숨도 위험하려나. 나는 예슬이와 시하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몇 명 정도는 데리고 도망갈 수 있다. 이곳에 있는 사람, 혹은 도중에 만나는 사람, 몇십 명 정도를 데리고 일본에서 나가자.
“예슬…….”
“미나 님, 미나 님은 이후에 어쩌실 건가요?”
그러나 내가 먼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예슬이가 입을 열었다. 나는 침묵하다가 되물었다.
“너희는? 어쩌고 싶어?”
“우리는…….”
시하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예슬이가 그 의미를 이해한 것처럼 대신 말을 이었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기는 싫어요. 트라베리아 앞에서…….”
“…….”
“트라베리아 앞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예슬이의 눈동자가 일렁이며 파도쳤다. 예슬이가 이를 악물었다.
“은하, 님……. 죄송해요. 부르면 안 되는 건 알지만, 그래도 지금만 부를게요. 은하 님, 저희는 이대로 그냥 도망쳐야 하는 건가요? 그때처럼, 무력하게?”
“예슬아…….”
“그런 건 싫어요! 하나라도 좋으니까 좀 더 무언가를 하고 싶어요! 싸우고 싶어요! 강해지고 싶어! 모든 것을 빼앗은 그놈들에게……더 이상 아무것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요……!”
예슬이가 주먹을 꽉 쥐며 앞에 모은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그 절실한 감정은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나라고 아니겠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무력하게 빼앗겼는데……!
“알고 있어요. 저희는 아직 약해요. 장군 시리즈는 도저히 이길 수 없어요. 정면으로 싸웠다간 죽겠죠. 죽을 순 없어요. 죽을 수는 없어…….”
불안에 가득 찼던 눈동자가 똑바로 빛을 보았다.
“살아남아 강해져야 해요. 왜냐면 저희는, 아르델을 구해야 하니까.”
나는 말문이 막혔다. 아르델……?
머릿속이 한순간 텅 비었다. 아르델, 그 이름에 나는 잊고 있던 과거의 추억을 떠올렸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짧은 시간 같은 학교에서 동급생으로 지냈던 아이.
한때 같은 수준별 반이었고, 이런저런 이유로 많이 엮였다. 친구……였다.
지금은 봉인당한 유펠르시아의 왕녀이자, 어느새 내가 잊고 있던 추억의 단편이다.
“3년 전에.”
3년 전, 참극이 일어났다. 우리가 고등학교 2학년, 18살이던 봄에.
“참극이 일어났을 때, 죽은 사람의 숫자조차 전부 파악할 수 없었지만, 눈앞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나는, 나는, 후회해요. 눈앞에서 친구가 죽는 순간까지……아무것도 못 했어요. 피투성이가 된 몸이 굴러떨어지는 걸……지켜만 봤을 뿐이라…….”
예슬이와 시하는 그날 축제 회장에 있었다. 관계자가 아니라 축제를 구경하러 온 사람으로서 회장을 돌아다녔다.
“나리, 현제, 가장 친했던 친구는 눈앞에서 다 죽었어요…! 그날 저희 부모님도 축제 회장에 있었는데, 있었는데, 끝내 찾을 수 없었어요. 다행히 시하의 동생들은 지금도 살아서 대현에 있어요.”
시하가 흐린 표정으로 수긍했다.
“수로랑 수아는 운 좋게 무사했지만, 부모님은…….”
시하가 질끈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 트라베리아의 상흔은 그토록 짙다.
“참극이 일어나고, 대피소에서 나갔을 때, 은하 님이 만들었던 이공간에서 나갔을 때 말이에요, 처음으로 유펠르시아가 봉인당했다는 걸 알았어요…!”
유펠르시아는 봉인당했다. 유일하게 아무도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지만, 만날 수도 없다.
“나는, 그걸 알았을 때, 안심했……어요. 솔직히 안심했어요.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잖아요!”
“…….”
“만날 수 없지만, 구해 낼 수 있어요. 이번에야말로, 이번에야말로 내 손으로, 우리 손으로……!”
“그게…….”
가슴이 먹먹했다. 그 기분을 나는 미치도록 안다. 몇 번이고 곱씹고, 몇 번이고 꿈꾸었던 그 심정.
“그게 너희가 떠돌아다니는 이유구나.”
살아만 있다면 뭐든지 좋았다. 살아만 있다면, 그 끔찍한 풍경 속에서 살아만 있어 줬다면, 설령 어디에 있더라도, 언젠가는 만나러 갈 수 있다.
구할 수 있다. 구해 내고 싶었다. 죽기 전에 달려가 구해 낼 수 있었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던가.
나는 문득 두 사람이 부러워졌다. 두 사람에겐 구해 낼 수 있는 친구가 남아 있다.
“맞아. 우린 그걸 위해서 강해졌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우리 힘만으로는 봉인을 깰 수 없으니까, 봉인을 깰 만한 도구를 찾거나, 힘을 기르기 위해 싸웠어.”
다시 일본에서 재회했을 때, 나는 그들을 보고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강해졌지? 예슬이와 시하는 분명 재능 있는 마법사지만, 약관의 나이에 준A랭크가 될 정도는 아니었을 터다.
그들이 강해질 수 있었던 건 구해 내고 싶은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싸울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그들은 이렇게 강해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저흰 강해질 거예요. 강해져서, 아르델을 구해 낼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죽을 순 없어요. 하지만, 그러니까…….”
“…….”
“그러니까 여기에서 물러나고 싶지도 않아요!”
결의를 담은 눈동자가 불꽃처럼 빛났다. 나는 예슬이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의지로 빛나 타오르는 감정 때문인지 눈이 부시다. 침묵 속에서 많은 감정이 오갔던 것 같다. 절망 속에서 절망을 위해서만 달려갔던 나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은 두 사람. 우리는 같은 참극을 겪었지만 전혀 다른 길로 달려가고 있구나.
나는 두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잃었고, 나는 아르델을 떠올리지도 못했다. 친구였지만 두 사람처럼 절실하고 절친한 친구는 아니었다.
그래서 부럽다. 가슴이 벅차다. 나는 두 사람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네, 그럼…….”
“은하 님…….”
“한번 해 볼까?”
나는 예슬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우리에겐 각자 다른 목표가 있다. 길은 갈렸다. 그래도 그런 것이라면, 복수를 향한 감정을 잠깐 뒤로하더라도 도와주고 싶다. 두 사람의 빛을 지켜 주고 싶다.
“네…!”
예슬이가, 시하가, 벅찬 눈으로 내 손을 잡았다.
죽이기 위해 달려간 길에서, 나는 처음으로 삶을 위해 달려가는 친구를 발견했다.
상대는 우리보다 좀 더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 적의 수는 만 단위고, 대규모마법은 쓰기 어렵다. 무엇보다 그 장군 좀비의 마법은 골치 아프다. 상태이상마법, 문이는 치료마법 계열이라고 했다. 그걸 해석하고 막아 낼 방법을 찾지 못하면 이기기는 어렵다.
장군 좀비를 쓰러뜨리기로 결심하고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문이가 부활했다. 그 무렵에는 마력도 완전히 안정됐다.
“장군 좀비의 상태이상마법을 막아야 돼. 음……다음번엔 막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문제없습니다. 직접 맞은 덕분에 그 마법엔 내성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마법으로 막으려면 아직 해석이 불완전하지? 막을 만한 마력 패턴은……으음……아무래도 치료계열마법이랑은 상성이 안 좋으니까.”
「동의합니다만, 저를 통해 상태 이상 전용 방패를 만들어 내면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이미 한번 몸으로 겪은 마법이니까요.」
“역시 뭐든지……당해 볼 만하네. 그걸로 특수한 마법은 대개 막을 수 있게 되니까.”
우리는 목표를 몇 개 정했다. 첫째, 장군 좀비를 쓰러뜨리는 것. 둘째, 데랜서의 이상 상태를 멈추는 것. 셋째, 공기 감염을 멈추는 것.
문제는 공기 감염이다. 밤의 우리가 공기 감염이 일본 바깥으로 퍼지는 것을 막고 있다. 그러나 밤의 우리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그 장군 좀비와 대등하게 겨룰 수 없다.
‘밤의 우리가 마법을 더 방해하고 있단 말이야. 데랜서도 문제지. 한순간만이라도 데랜서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다면. 『책 속의 세계』를 쓰면 좀 나아지겠지만. 내가 만든 마정석을 데랜서 대신 배치해서, 으음…….’
아직 조각이 너무 부족했다. 우선 공기 감염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 일본의 사람은 전부 백신을 맞았지만, 바깥에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야 기후마법을 썼을 때처럼 대규모 마법으로 없애는 방법도 있긴 하다. 그런데 그래 봤자 도돌이표가 아닌가. 나는 없애고, 그자는 만들고. 뭔가 대놓고 없애지는 않으면서도 은근슬쩍 감염 바이러스를 흐려지게 하는, 그런 게 필요한데. 상대가 아주 오랫동안 눈치채기 힘든 방법이어야 한다.
어쨌거나 최우선 목표는 장군 좀비다. 그를 쓰러뜨리면 바이러스든 뭐든 다 해결된다.
그를 쓰러뜨리면 트라베리아의 마법사가 확인하러 온다는 건……웬만해선 쓸데없는 걱정이겠지. 확실히 트라베리아는 장군 시리즈를 관리하고 있다. 관리하고 있지만 동시에 방목하고 있다. 그러니까 ‘가짜 마법사에게 죽을 정도로 약한 병사는 죽든 말든 상관없다.’ 같은 느낌이다.
아무래도 그의 상관은 하멜인 모양인데, 실제로 그는 하멜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지 않나.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고.
그가 누군가의 직속 측근이라면 또 달라지겠지만. 직속 측근은 그 마법사의 소유라는 것을 증명하는 문장을 따로 가지고 있다. 핵에 새겨진 트라베리아의 문장은 필요에 따라 발동하고, 살갗에 새겨진 문장은 특정 마법사의 소유라는 증명이다. 어느 쪽이든 구속력이 있는 특별한 문장이다. 아까 그 장군 좀비한테는 그런 문장이 없었다. 게다가 직속 측근이었다면 하멜에게 그런 말을 듣지도 않았을 거다.
트라베리아는 그런 녀석들이다. 세상을 가지고 놀며 실험하면서 성공하면 럭키고 실패하면 조금 아쉬워하며 다음에 다시 해 보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녀석들이다. 재수 없는 자식들.
최우선 목표는 장군 좀비이나, 우리는 지금 그 남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관리자이니 아마 계속 일본 어딘가에 있기는 할 것이다. 나는 일단 드론을 정찰로 보냈다. 한 번 발각되어 부서진 전적이 있으므로 더 은밀하게 환각마법을 둘렀다.
‘의외로 도쿄에 있을 가능성도 있으려나. 하지만 그놈은 우리랑 달리 데랜서 안에서도 공간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 장소에는 구애되지 않겠지.’
지금도 사람이 죽어 가고 있겠지. 나는 분명 강하지만, 그렇다고 손에 닿지 않는 사람까지 지킬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신이 아니고, 전지전능한 존재는 더더욱 아니다. 내가 지킬 수 있는 건 눈에 보이며 손이 닿는 소수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신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칼날을 가는 복수자지. 손에 닿지 않는 놈을 붙잡아 죽이기 위해 달려가고 있으니까.
나는 밤을 새우며 즉석으로 무구와 아이템을 만들었다. 마력을 듬뿍 응축한 마정석을 만들고, 거기에 설정을 새긴 다음 액세서리로 꾸몄다. 속성마법을 사용한 폭탄, 상태이상마법을 거부하는 결계 갑옷, 마법을 증폭하는 증폭기, 좀비 바이러스를 빨아들이며 피어나는 작은 마정석 꽃, 결계용 마정석 다수.
소영이는 내가 학생일 적 장인을 진로로 정한 걸 좀 아깝게 여겼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게 다행이라고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소영이가 말한 미래는 모르겠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깜깜하게 둘러싸인 지금 상태로는 감히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능력은 싸우기 위한 현재에 이렇게나 도움이 된다. 장인이 되길 정말 잘했다.
“미나야, 조금 쉬는 게 좋지 않을까?”
“괜찮아. 내 몸은 쉴 때 움직일 때를 알아서 구분하거든.”
움직여야 할 때는 한 달을 자지 않아도 멀쩡하고, 쉬어도 괜찮을 때는 쉽사리 졸음이 몰려온다.
“너희들이야말로 쉬어. 또 움직여야 하니까.”
예슬이와 시하가 잠들고 내가 마정석을 계속해서 만들고 있을 때 우리가 지내는 방에 사카기가 찾아왔다. 그는 바닥 가득히 깔린 보석을 보고 잠시 감탄했다.
“대단하군.”
“전부 무기예요.”
“정말로 대단한걸.”
보석이 움직이며 그의 발을 피했다. 사카기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나와 시선을 맞췄다.
“우린 일본에서 탈출하려고 한다. 도쿄만(灣)을 따라 바다를 넘을 거다. 이 이상 일본에 있을 수 없으니까.”
“그런가요. 행운을 빌게요.”
“……너는 어떻게 할 거지?”
“할 일이 있어요.”
“이 일본에서?”
“네.”
비단 예슬이와 시하가 한 말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나에게는 책임질 것이 있다. 나는 이 상황을 예지했고, 결국 막지 못했다. 그러니 종지부 정도는 찍어야 하지 않겠나. 내 같잖은 죄책감을 위해서라도.
“그러냐. 무운을 비마.”
“감사합니다.”
사카기는 짧게 대화를 나눈 뒤 돌아갔다. 나는 무기를 분류해 나눴다. 마정석 꽃씨 보석을 손안에 굴렸다.
감염에는 감염으로 덤벼야지. 백신을 만들었을 때도 그랬다. 이 꽃은 공기 중에 퍼진 좀비화 바이러스를 흡수하며 자라나고, 내뿜는 숨결로 바이러스를 녹인다. 처음에는 사막의 모래 한 알만큼 작을지도 모르나,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 순식간에 숲을 이룰 거다.
중요한 건, 이 꽃씨는 좀비의 몸에도 싹을 틔운다. 돌로 된 꽃이 좀비를, 좀비의 핵을 좀먹어 갈 것이다.
나처럼 광범위한 감지능력을 가진 사람은 희귀하다. 그 장군 좀비는 내가 퍼트린 감염을 바로 눈치채지 못할 거다. 이것이 나와 문이, 예슬이, 시하가 함께 떠올린 ‘싸울 방법’이다.
나는 마정석을 잘게 부쉈다. 이 가루 하나하나가 꽃씨다. 바람을 타고 퍼져라. 바람 속에 뿌리를 내려라. 바이러스를 죄다 먹어 치워 버려. 우리는 흩어져 한 줌씩 씨앗을 뿌릴 거다. 내 설정대로라면 꽃을 피우는 데는 최대 5분이 걸리고, 피어난 꽃이 씨앗을 뿌리기까지는 15분 정도 걸린다. 바이러스가 진할수록 빨리 꽃이 필 거고, 빨리 씨앗을 뿌릴 거다. 정말 순식간에 퍼지겠지. 하늘 위로 올라가 바람을 타고 아주 멀리까지 퍼지도록 뿌려야겠다.
1차 준비는 끝났다.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장군 좀비를 찾아내는 것이다. 사카기 일행은 이미 나간 모양이다. 나는 이만 예슬이와 시하를 깨우기로 했다.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 결계에 무언가가 부딪치는 느낌이 왔다. 아마 좀비의 짓이겠지. 그러나 근처에는 좀비의 마력이 안 보인다. 원거리마법을 사용한 거려나. 나는 재빨리 예슬이와 시하의 몸을 뒤흔들었다.
“얘들아, 좀비들이 이곳을 발견했어. 이만 움직이자.”
“어…?”
눈을 몇 번 깜빡이던 두 사람은 이내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두 사람에게 무기를 건넸다. 마지막으로 잘게 부순 꽃씨가 담긴 주머니와 두 개의 은색 결계석을 넘겼다.
“이제부터 장군 좀비가 있는 곳을 찾을 거야. 그 전에 잠시 흩어져서 사전 준비를 하자.”
“이게 그 꽃씨야?”
시하가 신기한 눈으로 주머니 안쪽을 엿봤다.
“그래. 좀비 바이러스를 먹고 자라나서 좀비 바이러스를 녹이는 숨을 내뿜을 거야. 꽃을 피우는 데 5분, 씨를 뿌리는 데 15분.”
“좀비보다 더 빨리 퍼지겠네.”
“이런 것도 만들 수 있다니, 역시 미나 님이에요!”
“예슬이 너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형상부여마법을 사용해서.”
“꽃만이라면 만들 수 있지만, 꽃씨부터 만들어서 퍼트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예슬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시하가 꽃씨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지.”
“맞아. 내가 만든 백신도 사실 그런 원리였어.”
“그랬어?”
“그래.”
단순히 좀비 세포를 파괴한 게 아니라 사람 세포로 하여금 좀비 바이러스를 잡아먹게 하는 것으로 감염을 역전시켰으니까.
“그리고 이건 결계석.”
나는 두 사람에게 쥐여 준 또 하나의 주머니를 가리켰다.
“그 좀비한테만 유리한 상황을 줄 수는 없으니까.”
일본에 있는 데랜서의 위치는 전부 알고 있다. 데랜서의 힘에 간섭해 조금이나마 방해할 수 있도록 데랜서 옆에 이 결계석을 설치할 거다. 그것도 보통 데랜서가 아니라 일본의, 혹은 펼쳐진 밤의 우리의 핵심이 되는 데랜서를 골랐다.
나는 나머지 무기의 사용법도 차례로 일러 줬다. 갑옷 결계 팔찌는 처음부터 몸에 장비하게 했다.
“자는 사이 옷에도 방어 마법을 걸어 놨어. 꽤 레벨 높은 방어구던걸?”
“감사합니다.”
“고마워.”
두 사람은 손목에 팔찌를 차고 귀에 통신용 귀걸이를 끼웠다. 여기선 통신이 잘 안 되니 어느 정도 거리까지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우리는 슬슬 밖으로 나섰다. 이미 일일이 좀비를 죽일 시점은 지났다. 우리는 우리를 방해하는 좀비만 확실하게 죽였다. 핵을 도려낸 다음 다시 씨앗이 자리 잡지 않도록 확실하게 육체를 산산조각 내서 태워 버렸다. 시체 썩은 내가 났다.
쿠궁!
그때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 아니 진동일까? 우리는 놀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일본을 덮고 있는 새까만 밤의 우리가 한순간 흔들렸다.
“뭐지?”
“혹시……바깥에서 공격한 게 아닐까?”
“그럴지도.”
그래, 이토록 대대적으로 일을 벌였는데 바깥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리 없다. 지금껏 잠잠했던 게 이상할 정도다. 이쯤 되면 틀림없다. 바깥에서도 트라베리아나 휘하 조직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겠지.
연맹과 트라베리아가 대립 중일까? 동료들도……거기에 있을까? 화가 머리끝까지 났겠지. 그리고…….
나는 침을 삼키며 생각을 삼켰다. 잠깐 사카기가 했던 말이 떠올랐으나, 그의 힘으로는 우리 전체를 뒤흔들 수 없다. 밤의 우리를 저 정도로 뒤흔들려면 대단한 힘을 가진 마법사여야 한다. 예를 들어 미영 할머니나 성진 정도는 되어야 한다. 정말 두 사람이 한 짓일지도 모르지.
“후우…….”
역시 한시라도 빨리 씨앗을 퍼트려야 한다. 나는 시하와 예슬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둘로 나뉘자.”
그런 후 시하가 끼고 있는 팔찌를 가리켰다.
“여기에 문이의 분신을 넣어 뒀어. 시야 공유를 할 거야. 검은색이 좀비, 하얀색이 사람, 파란색이 장군 좀비야. 너희 둘은 안내를 따라서 북쪽으로 가. 나는 남서쪽으로 갈게. 적당한 장소에서 씨앗을 뿌리자. 높은 곳에서, 바람이 세게 불 때 뿌려. 아니면 마법으로 넓게 퍼트려도 되고.”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