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280
별의 고래에 가해지는 데미지가 커진다. 그 직후, 내 몸 안에 파직거리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나는 날카로운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악…!”
온몸이 전율한다. 왜지? 별의 고래는 아직 저기에 있는데, 내 몸에 닿은 번개를 결계가 막아 주고 있는데.
“아으윽!”
“미…나 님?”
예슬이가 당황하며 나를 불렀다. 데미지를 견디지 못한 별의 고래가 산산이 부서졌다. 온몸을 날카로운 통증이 찌르고 지나간다. 이 고통, 느껴 본 적이 있다. 번개다. 나는 애써 고통을 참으며 장군 좀비를 노려봤다.
“데미지전이마법인가. 잘도 만들었군. 하지만 이것도 그런 마법이거든. 저주의 검은 번개. 이 번개가 네 마법을 공격하면 그 공격이 먹혀든 만큼의 데미지가 고통으로 전부 환산돼 네 몸으로 옮겨 간다.”
대상대체마법인가. 가장 흔히 사용되는 저주 기법이다. 마법사를 본뜬, 혹은 상징이 되는 어떤 것을 공격함으로써 그 상대에게 고통 혹은 위협을 가한다. 별의 고래는 그것을 반대로 이용한 마법이고.
“마법의 강도는 마법사의 집중력에 비례하지! 자, 네가 어디까지 버틸까?”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만……내게는 문이가 있다. 내가 고통을 못 이길 때는 문이가 대신 판단해 줄 것이다.
‘어차피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했어.’
나는 들고 있던 총을 예슬이에게 넘겼다. 시공간마법은 사용할 수 없지만 불완전한 영역 정도는 만들 수 있다. 저 남자의 마법은 치유계열마법과 저주의 검은 번개.
그러나 저주 계통에 속할 뿐 통상적인 저주처럼 사람을 사념으로 저주하는 마법이 아니다. 왜냐면 마법을 통해 나를 공격하는 거니까. 링크마법에 가깝다. 사념을 이용한 저주가 아닌 이상, 정화마법으로 바로 정화할 수는, 없다…….
인형 같은 대상 대체 물건을 통해 못을 박거나 하면 연결을 끊으면 되는데, 내 마법의 데미지를 내가 받을 뿐이니 링크를 끊을 수도 없다. 그래도 정화마법으로 약화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는 저주기 때문이다.
나는 환각 세계에서 책을 소환했다. 문이가 두 개의 세계를 추천했다. 하나는 란스의 성배가 등장하는 신전과, 또 하나는…….
나는 책 안에서 오랜만에 빛을 발하는 풍경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어, 이걸 쓸 수 있다고? 이걸 쓸 수 있는 조건은 아직도 잘 모르겠단 말이야. 아마 제약과 관련이 있겠지만.’
저주와 반대되는 것은 신성이다. 란스의 성배 같은 것들. 나도 이곳의 교회는 싫다. 신의 대리자라고 이름을 대던 크리스트교 놈들이 무슨 짓을 벌였던가. 그 결과 이 세계가 어떤 파멸을 앞에 두고 있는가.
하지만 나에게는 믿는 신이 있다. 나의 창조신, 에쉬리안나. 손 아래로 실체화한 책의 책장이 파라락 넘어갔다.
『특수 기술 발동─책 속의 세계』
『』
내 소원을 들어준 창조신 에쉬리안나는 어둠의 신이다. 태초에 세 명의 창조신이 있었다. 한 명은 태양과 빛을, 한 명은 달과 밤을, 마지막 한 명이자 두 번째 창조신인 에쉬리안나는 태초의 어둠을 상징한다.
빛과 어둠과 밤, 두 번째 창조신인 에쉬리안나는 분명 이질적인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도 당연하다. 사실 에쉬리안나야말로 태초의 창조신이었으니까.
처음에 어둠이 생겨났다. 그때는 세계가 너무 작아 그녀가 몸을 옴짝달싹하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또 한 곳에 세계가 생겨났다. 두 번째 창조신이자 그녀의 반쪽, 혼돈이 탄생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때가 아님을 알았다. 세계는 아직 완전해질 수 없다. 그들은 대화조차 나눌 수 없다. 그러나 마음만은 통하고 있었다.
그들은 훗날을 기약하며 세계를 넓히기 위해 제 몸과 영혼, 정신을 다시 세계에 녹였다. 비로소 세계가 힘을 지니고 고동쳤다.
또다시 아득한 시간이 흘렀다. 세계가 어느 정도 모습을 갖췄다. 두 사람이 예견했던 태양의 신과 달의 신이 탄생했다. 기억을 잃어버린 에쉬리안나가 두 번째 신으로 탄생했고, 그보다 머나먼 훗날에 혼돈이 천사로 다시 태어났다.
세계에 세 명의 창조신이 탄생한 건 에쉬리안나의 의지였다. 어째서 갑자기 어둠이 탄생했는가, 혼돈이 탄생했는가는…….
머릿속에서 노이즈가 발생하며 생각이 지워졌다. 주위로 신의 영역이 내려앉았다. 내가 생각하는 여신님의 영지다. 최근에 겨우 구체화한 특별한 영역.
땅인지, 바다인지, 하늘인지 모를 흑백 세계였다. 경계선은 있다. 유리 같은 수평선을 경계로 하늘과 땅이 갈라진다. 수평선 근처는 하얗거나 잿빛이지만 아래나 위로 갈수록 점점 새카만 색으로 물든다.
뾰족한 첨탑 건물이 서 있다. 은색 고리 원, 그 원에서 삐져나온 길이가 똑같은 십자, 그 십자를 검은 날개가 감싸고 있다. 소리마저 먹어 버릴 것 같은 아득한 정적이 기묘한 위압감을 풍긴다.
“뭐야, 여긴…?”
우리가 있는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구청 건물은 사라졌지만, 결계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와 예슬이는 높은 곳에, 좀비들은 아까 있던 대로 높은 곳이나 낮은 곳에 있다. 그 옆에 장군 좀비가 있다. 하늘에 서 있는지 땅에 서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만큼 방향 감각이나 공간 감각이 어지럽다.
나는 여기에서 신관이다. 교회는 이미 멸망했다. 그러나 세계에는 여러 신이 있다. 내가 한결같이 믿는 신은 바로 창조신 에쉬리안나 님이다.
이 기술은 본래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진짜 창조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쓸 수 있는 조건이 불규칙적이고 불확실하다. 적어도 내가 원한다고 해서 펼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여태까지 실전에서 사용이 가능했던 것은 딱 한 번뿐이다. 그리고 이번으로 두 번째가 되겠군.
『어둠의 신성 공간, 창조신 에쉬리안나의 신전 열화판.
이름을 짊어진 ‘신관’과 그 동료의 힘이 일시적으로 세 배로 늘어난다. 적대하는 자들의 힘은 20% 이상 줄어든다.
어둠마법이 10% 강화된다.
빛마법 저하 효과는 없음.』
심지어 열화판이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완벽하게 신전을 만들어 내는 건 불가능하다. 지금의 내 힘으로는 무리라는 거다. 하여간 이걸로 저주 효과는 먹히지 않는다. 어둠을 관장하는 신의 신전이니 어둠마법의 효과는 배가된다.
“대체 이건 또 뭐야?”
갑자기 다른 세계에 휘말려 든 장군 좀비가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말없이 장군 좀비를 향해 어둠마법을 날렸다. 경계선 없는 어둠이 바닥에서 소용돌이치며 휘몰아쳤다. 좀비가 무더기로 베이고, 몇 명은 핵에 맞았는지 그대로 자리에 픽 쓰러져 내렸다.
“쳇. 상태 이상, 속도 저하!”
안 되지. 내 세계에서 그런 너프는…….
그러나 내 상상과는 달리 내 어둠이 한순간 느려졌다. 역시 저자의 마법은 강하다.
그래도 여기선 내가 훨씬 더 강하다.
‘데랜서의 힘을 빌려 쓴다면 결과가 달라졌겠지만, 아까와는 달리 쓰지 않는걸? 쓰는 데 제한이 있는 걸까?’
“에잇!”
예슬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서 그림 같은 녹색 덩굴이 생겨났다. 덩굴이 좀비들을 꿰뚫었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바닥에서 일어난 어둠이 좀비의 존재 자체를 좀먹어 갔다. 어둠에 지워지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지워진’ 거다.
하지만 역시 장군 좀비는 버거운 상대였다. 의외의 상황에도 차분히 우리를 공격한다. 수많은 좀비가 우리를 향해 달려든다. 건물에 쳐져 있는 결계에 막힌다. 검은 번개가 거세게 내리쳤다. 결국 건물을 지키기 위해 쳐 두었던 결계가 일부 깨어졌다.
“……!”
예슬이의 결계 갑옷 위로 번개가 떨어졌다. 아이템으로 독립시키긴 했으나 본래는 내 마법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대상 대체 효과는 무효가 된다. 번개는 내게 전달되는 도중에 끊겼다. 힘이 대등해서 그런 건지 몸에 미약하게나마 통증이 흘렀다.
통증이 전혀 없자 예슬이가 당황하며 나를 돌아봤으나, 나는 태연하게 예슬이의 시선을 마주했다.
“괜찮아?”
“네, 네.”
“뭐야? 왜 너한텐 안 통해?”
“…….”
예슬이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더니 허공을 손으로 휘저었다. 손에서 잿빛 비눗방울 같은 것이 흩뿌려지며 주위로 퍼졌다.
“또 특이한 게 나왔네.”
근처의 좀비가 주먹으로 거세게 후려쳐도 비눗방울은 형태가 무너지지 않았다. 예슬이의 앞에 이번엔 커다란 곰 인형이 생겨났다. 커다란 곰 인형이 리본으로 만든 칼을 들고 좀비들을 공격한다. 공격 한 번에 약 10마리쯤 되는 좀비들이 반으로 동강났다. 나는 말없이 영역을 움직였다.
“큭…!”
다른 좀비들과 함께 장군 좀비가 바닥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사막의 유사와 비슷하다. 한번 휘말리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미나 님! 다른 좀비들은 제가 맡을 테니까 저 장군 좀비한테 집중하세요!”
“문이, 예슬이를 서포트해 줘.”
「네, 마스터.」
예슬이는 저렇게 말했지만, 좀비들 중에는 예슬이보다 강한 놈도 있다. 힘만 강해 봤자 뭐 해. 생각을 안 해서 힘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데. 그건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힘의 크기는 무시할 수 없다.
“제기랄. 상태 변화, 균열!”
검은 입자가 어둠 안을 비집고 들어간다. 견고한 세계가 순간 흔들렸다. 균열은 여기저기에 미쳤다. 세계에도, 마력에도, 공간에도.
“예슬아! 뒤로 물러나! 문이!”
「알겠습니다, 마스터.」
──사람에도.
몸에서 휙 마력이 빠져나갔다. 문이가 뒤로 물러난 예슬이를 보호했다. 덕분에 예슬이는 무사했다.
안도한 순간 뺨에서 따끔하는 고통이 느껴졌다 사라졌다. 역시 장군 좀비, S랭크 마법사, 설마 대등한 상대의 몸에 균열을 만들어 낼 줄이야. 그러나 어둠은 깔끔하게 메워졌다. 장군 좀비는 여전히 유사에 빠진 채였다. 서로 공평하게 공격을 주고받은 셈이다. 공평하게는 아닌가? 내가 더 유리하니까.
나는 장군 좀비와 싸우면서도 예슬이를 신경 썼다. 이제 보니 예슬이가 만든 비눗방울은 방어용인지, 곰 인형이 비눗방울을 이용해 좀비의 공격을 적절히 막고 있다. 아니, 아무래도 단순한 방패는 아닌 모양인데? 충격을 흡수하고 있다.
검은 입자를 계속 내게 날리던 장군 좀비가 이내 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검은 번개가 번쩍였다. 결계로 막았지만 마법 융해 효과가 부여된 번개가 내 몸에 내리쳤다.
“아아악!”
나는 팔을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전투 중이라 어느 정도 통증을 차단하고 있음에도……평소보다 훨씬 뜨거운 고통이 몸에 내리꽂혔다.
‘뭐지? 이 번개…….’
“미나 님!”
‘평소보다, 아니, 아까보다 훨씬……아파!’
고통이 머리를 관통했지만 머리가 익숙하게 생각을 이어 갔다.
검은 번개, 자연 현상인 빛으로 이루어진 번개가 아니다. 마법 반탄력이 있음에도 이토록 아프다. 마법 효과인가. 저주받은 번개, 대상 대체 저주는 이곳에선 무효가 된다. 하지만 몸에 직접 저주를 꽂아 넣는다면?
이 번개로 마법이 꺾이면 그만큼의 데미지가 마법사에게 가해진다. 몸으로 직접 받았을 땐 배 이상의 고통이 가해진다. 아무래도 그런 구조인가 보다.
“씨발…….”
“으악!”
“난 괜찮으니까 집중해!”
나는 어둠마법을 주위로 퍼트렸다. 어둠이 파문처럼 퍼지며 좀비들을 찔렀다. 그러나 몇 명은 용케 내 마법을 피했다. 어둠이 전염하듯 퍼지며 좀비들을 붙잡으려 한다. 그러나 그사이를 틈타 번개가 날아왔다.
나는 결계로 번개를 막았다. 몸에 직접 꽂히면 신성의 힘도 저주의 효과를 완전히 막지 못한다. 몸에 직접 맞는 것만은 피해야겠다. 뒤에서 폭발이 일었다.
콰앙!
폭발의 근원은 아까 예슬이가 퍼트렸던 비눗방울이었다. 충격을 흡수한다 싶더니, 이런 건가.
「마법 해석 완료. 충격을 흡수하는 비눗방울. 방패로서 일정 이상 충격을 흡수한 뒤 폭발합니다.」
제법 잘 생각해서 쓰고 있구나. 괜히 기뻤다.
나는 유사를 노려보며 어둠을 더 퍼트렸다. 번개가 진동하며, 입자가 어둠을 밀어낸다. 장군 좀비와 내 마력, 혹은 마법은 대등, 하지만 이 영역이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이상 내가 훨씬 더 유리하다. 처음에 세웠던 결계는 깨졌지만 예슬이가 좀비를 대부분 상대하고 있고, 마침 거기에 시하도 합류했다.
“예슬아, 미나야! 미안해, 늦어서!”
“진짜, 늦었어!”
시하는 메인 컴퓨터실에 있었다. 달려서 이곳에 오느라 조금 시간이 걸렸나 보다.
중력이 좀비들을 날려 버린다. 시하가 왔으니 다른 좀비는 그냥 맡겨도 될 것 같군. 시하가 합류함으로써 더 유리해졌다. 내 어둠이 착실하게 장군 좀비의 마법과 마력을 흡수한다. 그러나 불안 요소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데랜서의 힘, 빌려 쓰지 않네?”
예슬이도 비슷한 것을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물음에 장군 좀비가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숨겨 봤자 소용없는 거니까 말해 두지만, 나는 데랜서를 빌려 쓸 자격을 받지 못했어. 허용된 분량밖에 쓸 수 없어. 거기에 너랑 싸운다는 건 없었다고.”
장군 좀비가 팍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이것까지는 쓰기 싫었는데.”
……뭐?
내 영역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군 좀비의 손 위로 무언가가 소환된다. 소환된 것은 바로 초록색 구슬……이었다.
‘저 마력……!’
나는 눈을 부릅떴다.
“마녀의 아이템! 녹색의 질풍!”
장군 좀비가 손에 든 구슬을 바닥에 내리쳐 깨뜨렸다. 녹색 질풍이 몰아쳤다. 나는 예슬이와 시하 앞을 막아서며 결계를 쳤다. 그 사이로 검은 번개가 내리꽂힌다.
“윽……!”
질풍 때문에 신성의 효과가 옅어지고 있다. 마법의 데미지가 이전되면서 발생하는 격렬한 통증에 한순간 마력이 흐트러진다. 결계에 한순간 빈틈이 생겼다.
「특수 기술, 『디멘션 박스』 전개(展開)!!」
디멘션 박스 두 개가 펼쳐지며 견고한 방패로 변한다. 디멘션 박스는 결계보다 견고해 보통 결계에 비해선 검은 번개에 덜 데미지를 받는다. 고통이 조금 줄어들긴 했으나 문제는 질풍이다. 검은 번개는 이것으로 그럭저럭 막을 수 있으나, 질풍을 견디지 못하고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통증은 더해진다.
막는 걸론 부족하다.
내가 느낀 그것을 문이도 똑같이 느꼈다.
계속 내 옆에 있던 책이 한 장 넘어갔다.
『영역 아이템: 여신의 지팡이
신관복』
몸 위에 새로운 환각이 구현된다. 첨탑 위에 세워져 있던 모형과 똑같은 모양의 지팡이가 손안에 소환된다. 옷이 변했다. 움직일 때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소매의 기장이 긴 검은 옷이다. 옆트임 사이로 하얀 레이어드 레이스가 흩날린다. 검은 치마는 종아리까지 내려왔다. 이 옷에서 하얀 부분은 목에서 가슴께로 내려오는 옷깃과 펄럭이는 소매 끝단뿐이었다.
나는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윽……!”
번개는 혼자서 나를 노렸지만 검은 입자는 질풍에 섞였다. 이 어둠이 깨부숴지려고 한다. 이미 세계에 균열이 일어났다.
“──조화.”
그러나 나는 차분히 지팡이에 힘을 불어넣었다. 내 영역에서──제멋대로 까불지 마!
모든 어둠에서 파문이 일었다. 세계가 일렁거리고, 어둠이 일렁거린다.
“재조합.”
우리들의 위치가 흔들렸다. 좀비 남자가 거꾸로 서 있고, 나와 세 사람은 사선으로 비스듬하게 서 있었다.
“분해.”
하늘에서 빛과 어둠이 억수같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별똥별 같기도 했고, 옆에서 보면 은하의 파문이 퍼져 나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것이 질풍을 휘감았다. 신관복과 지팡이가 역할을 다하고 사라졌다.
“윽……!”
질풍은 어떻게든 막았으나 대신 영역이 힘을 소진하고 사라졌다. 이것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다고? 나도 이 아이템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대상’이 있고 내가 그 대상을 아득히 높게 잡고 있기 때문일까? 설령 영역을 소환하더라도 지금의 나로서는 제대로 소화할 수 없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장군 좀비도 나도 거의 만신창이다. 장군 좀비는 손목을 잃은 채로 싸워 발목마저 잃었고, 나는 마력을 거의 다 써 버렸다.
나는 미리 만들어 뒀던 마정석을 씹어 먹고 흡수했다. 성역의 어둠이 물러가며 데랜서의 마력이 다시 피부에 와 닿았다. 역시 불쾌한 마력이다. 원래의 세계가 나타났다. 구청은 어느새 거의 부서져 있었다. 기껏 점거했더니만.
살아남은 좀비는 여전히 많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좀비투성이다. 장군 좀비가 나를 노려보았다. 2차전이 시작──되려 했을 때였다.
익숙한 섬뜩함이 주위를 사로잡았다.
이를 위압감이라 설명해야 할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장군 좀비의 뒤에 있던 좀비가 죄다 반으로 동강 나 있었다. 싸울 태세이던 예슬이와 시하가 숨을 삼켰다.
“악, 으윽……!”
장군 좀비가 잘린 손목을 꽉 감싸 쥐었다. 손목의 사슬 표시가 선명해졌다. 그가 소리쳤다.
“소……소환! 소환! 전부 나와! 전부!”
아래에서 검은 구멍이 나타났다. 주위가 좀비와 키메라로 채워졌다. 예슬이와 시하가 흠칫하며 내 가까이 다가왔다. 서로의 등이나 어깨가 맞닿았다.
“설마…….”
“또 늘어났잖아!”
예슬이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아니, 소리가 들렸는지는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니 여러 좀비가 몸 한 군데를 잃고 동강 나 있었다.
촤아악! 날카로운 바람이 흩뿌려졌다. 바람, 아니, 물이다. 날카로운 물줄기가 이곳에 있던 모든 존재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예슬이와 시하의 몸을 누르고 허리를 숙였다. 장군 좀비도 가까스로 피했다.
방금 공격으로 개미 떼처럼 모였던 좀비의 반이 사라졌다. 머리를 잃었든 팔을 잃었든, 그것으로 끝. 죽음의 선고를 받은 좀비들이 우수수 쓰러진다. 핵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한 곳을 바라보았다. 시야 안에 익숙한 색이 비쳤다. 어딘가로 우르르 몰려간 좀비가 물을 실은 검기에 날카롭게 베여 날아간다.
푹!
섬뜩한 소리와 함께 장군 좀비의 바로 앞에 있던 키메라에서 피가 튀었다. 몸이 반으로 갈라진 키메라가 자리에서 쓰러진다.
“이……괴물 자식…….”
익숙한 마력이며, 익숙한 마법이었다. 키메라의 몸뚱어리가 쓰러지자 검을 든 자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나는 그 얼굴이 제대로 보인 순간 헉 숨을 삼키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이성진……이지?’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키메라에게서 튄 피를 그는 피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다음 적을 노려보았다.
급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몰라도 인식 방해 장치와 화장만 했을 뿐 변장을 거의 하지 않은 아름다운 얼굴이 반 이상 피로 물들어 있으니 섬뜩했다.
성진의 뒤로 인하와 소영이, 인성이가 자잘하게 덤벼드는 좀비를 처리하며 다가온다. 세 사람도 어째선지 변장을 하지 않은 상태다. 성진과 마찬가지로 인식 방해 장치와 화장으로 원래 모습을 흐리게 만드는 정도에 그쳤다. 뿐만 아니라 옷이 왠지 엉망이다. 옷에 걸려 있던 마법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찢어진 곳이나 더럽혀진 곳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튄 피가 방어구에 부딪쳐 산화되지 않고 그대로 들러붙은 것도 그래서다. 간단히 표현하면 ‘엉망이다’.
아무리 현재 일본에 좀비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데랜서의 영역에서 변장을 안 하다니. 들키면 어쩌려고. 그런 생각은 압도될 것 같은 위압감에 짓눌렸다. 성진이 소매로 눈에 튄 피만 슥 닦았다. 얼굴에 피가 번졌다.
“어라? 미나 님, 저거 혹시…….”
시하와 예슬이도 바로 상대를 알아봤다.
성진은 이제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일일이 검으로 상대를 죽였다. 단 한 번 베었을 뿐인데 좀비의 핵이 부서졌다. 부서지며 그 잔흔이 상처를 통해 튀었다. 그 힘을, 성진은 피하거나 쳐 내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
어딘지 여유가 없어 보이는 몸놀림에 나는 몸을 움츠렸다. 뭔가 상태가 이상했다. 평소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
성진이 다가갈수록 장군 좀비의 손목에 새겨져 있는 사슬 자국이 진해진다. 역시 저건 저주였다. 성진 저 녀석이 직접 건 저주.
성진의 주위에 맴도는 위압감이 점점 더 짙어졌다. 그럴수록 특수능력이 진하게 나타났다. 성진의 검에 꿰뚫린 좀비는 한 놈도 남김없이 검게 변해 죽어 갔다. 좀비로서의 새로운 생명을 성진의 ‘종말’이 갉아먹는 것이다.
때때로 피가 튀고, 새까만 마력이 튀어나오고, 손을 자르고, 배를 찔렀나 싶으면 머리를 갈라 버렸다. 손 속에 자비를 두지 않는 잔인함에 무거운 위압감이 갖춰져 그 모습이 더욱 끔찍하게 다가왔다. 저건 싸움이 아니라 학살이었다. 학살이 이어질수록 장군 좀비가 겁에 질렸다.
“으…아……!”
사람이 죽는 모습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 수많이 사람이 죽고 죽는 세계이기 때문에야말로 ‘그 녀석들’처럼 마음을 잃은 괴물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분명 사람의 죽음에 많이 무덤덤해졌다. 무덤덤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려도 주위 환경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 너무 많이 죽어 버려서, 이제는 사람의 죽음을 봐도 울지 않고 견딜 수 있다.
끔찍한 장면에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나는 성진의 움직임을 보며 구역질을 삼켰다. 한 사람의 손에서 퍼져 가는 죽음. 그 안에서 분노를 닮은 일렁거림이 퍼졌다. 저건, 저건 전혀 이성진답지 않았다.
촤아아아악!
그래서 마법을 썼다. 내 어둠이 장군 좀비를 넘어 좀비 전체에게 미쳤다. 검은 어둠은 넘실거리며 오로지 좀비의 핵만을 두들겼다. 마력을 상당히 소비한 상태였는지라 나는 잠깐 가슴을 부여잡았다.
‘윽…!’
나까지 마법을 사용하자 장군 좀비가 내 공격을 피해 옆으로 물러났다.
성진의 행동이 멈췄다. 날카로운 시선이 처음으로 우리를 향했다. 예슬이랑 시하도 덩달아 위압당해 몸을 굳혔다. 성진이 손을 살짝 위로 들어 올렸다.
저 하늘 높은 곳에서 마력이 모인다. 나선으로 휘어 엮인 물의 창이 아래로 내리꽂혔다.
콰과과과!
쿠구구구궁!
주위 땅과 바위가 온통 헤집어지며 일어났다. 바닥이 깊게 뚫렸다. 멀지 않은 도쿄만에서 쓰나미가 일 정도의 지진이 지나가고 난 후에야 겨우 바닥이 가라앉았다. 성진의 손에 어느새 사슬이 잡혔다. 촤르륵 소리를 내는 사슬이 허공으로 점점 이어지더니 이내 좀비의 손목과 연결되었다. 손목 아래가 없음에도 쉽게 풀리지 않는다.
“망할! 이거 풀어! 풀라고! 이 난폭한 새끼야!”
장군 좀비가 반항하며 사슬을 떼어 내려고 했다. 그러나 성진은 사슬을 잡아당기더니 장군 좀비를 발로 차 그를 바닥에 처박은 후 머리에 발을 올려 콱 눌렀다.
“닥쳐.”
장군 좀비의 몸 주위로 검은 입자가 일어난다. 그는 모든 마법을 동원해 성진을 공격했다. 그러나 성진은 그 모든 마법을 자신에게 다가오기 전에 죽였다. 주위의 좀비가 어느 정도 정리됐다. 멀리 떨어져 있는 좀비는 성진의 위압감 때문인지 쉽사리 다가오지 않는다. 장군 좀비가 반항을 멈추지 않자 성진은 가차 없이 그의 팔에 검을 박아 넣었다.
“큭!”
“…….”
우리는 말없이 그 장면을 보았다. 정확히는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들은 좀비를 물리치며 점점 우리에게 가까워졌다. 이윽고 네 사람이 내 앞에 섰다.
“…….”
나는 뭐라 입을 열려다 멈칫했다. 멋대로 혼자 일본에 온 거다.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입을 연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를 찔렀다. 서리가 깔릴 것 같은 차가운 목소리. 인하가 나한테 이렇게 차갑게 말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나는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차갑다 못해 퍼런 안광이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혼자서 일본에 온 거냐고!”
“진짜 말도 안 돼. 용의주도하게 환각 인형까지 만들어 놓고, 자기는 위험한 곳에서 산책? 그럼 최소한 멀쩡해야 할 거 아냐!”
나는 너덜너덜해진 겉옷을 손으로 슬쩍 감쌌다. 평소 다정다감한 소영이가 이렇게 분노해 소리치는 모습은 오랜만에 본다. 화가 나도 단단히 났나 보다. 그렇겠지……. 인하가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룰을 만들었지. 우리 모두 감정이 앞서는 걸 아니까, 나갈 땐 꼭 말을 하고 가고, 위험한 곳에 갈 때는 절대 혼자 가지 않기로. 설령 혼자 나갈 일이 있더라도 위험한 일이 있으면 분명 바로 연락하기로 약속했었어.”
나는 차마 그 이상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시선을 내리고,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응. 미안…….”
짜악!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뺨에 뜨거운 통증이 내달렸다. 고개가 꺾였다. 열이 올라 뜨거워진 뺨을 손바닥으로 부여잡으며 무심코 다시 앞을 본 순간, 시린 푸른색과는 다르게 불꽃이 튀는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우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
“왜 그런 룰을 만들었는지 몰라? 동료니까잖아! 혹시라도 혼자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한 거잖아!”
내가 무심코 한 발 물러서자, 인하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그런데 뭐야! 멋대로 사라져? 그게 우릴 신뢰하지 못한다는 거랑 다를 게 뭐야! 기지는 네가 만들었지! 네가 전부 관리하고 있다는 거 알아! 믿으니까 내버려 둔 거야. 그런데 이게 뭐야? 그걸로 우릴 속이고 이런 곳에 혼자서──혼자서!!”
“인…….”
“그럴 거면 왜 동료가 필요해! 뭐 하러 팀을 맺은 건데?”
인하가 내 멱살을 쥐었다. 몸이 흔들렸다.
“네 멋대로 하면 되잖아. 혼자서 멋대로 해 버려! 하지만, 그게 싫으니까, 그렇게 멀어지면, 사라질 것 같으니까…….”
멱살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느새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그러니까 같이 있는 거잖아! 우릴 두고 가지 마……!”
시린 눈동자에서 눈물이 고이며 흘러내렸다. 인하가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건 이런 거다. 귓가로 울분에 찬 목소리가 이어졌다.